기억력을 향상시키려면
인간의 능력에 대한 평가는 갖가지인데 결국 능력이란 기력, 행동력, 정신력, 체력, 노력 등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서 하나의 형태를 이루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는 편의상 기억력(멜로디), 집중력(리듬), 창조력(하아모니)의 셋으로 좁혀서 설명키로 한다.
우선, 기억력인데 한 번 기억되면 화제에 번번히 등장하는 것이므로 음악으로 말하자면 멜로디라고 해도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과 접해 보면 확실히 뛰어나게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 있다. 그렇지만 반드시 모두가 천부적으로 타고난 소질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같다. 옛부터 "5세에는 신동, 10세에는 천재, 20세가 지나면 범인"이라거나, "문 앞의 나의 어린 중, 배우지 않은 경을 읽는다"라고 하는 말이 쓰이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는 김에, 오해를 풀기 위해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을 말하기로 한다.
최근, 영어는 유아 때부터라는 선전에 놀아나 중요한 유아기에 공부를 강요하는 부모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외국에 장기 체류할 일이 있어 가족 동반으로 가게 될 경우, 확실히 어린이쪽이 말이나 생활에 있어 부모보다 훨씬 빨리 적응한다. 하지만 몇 년 지나서 다시 귀국해 살게 되면 아이들은 대부분을 까먹게 된다. 어린이란 그만큼 순응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적어도 고교생 정도가 되지 않으면 정말 몸에 배지가 않는 것이다.
기억이란,
"빨리 외운 것일수록 일찍 까먹고 시간이 걸려서 외운 것일수록 오래도록 까먹지 않는다"
고 한다. 그러므로, 역시 사람은 각자마다 특유의 기억술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숫자를 외우는 데에는 자신이 있다. 특히 전화번호에는 더욱 자신이 있다. 물론 내가 외우는 데는 어떤 기본이 있다. 예를 들어,
집이나 연구실의 전화번호
친척도 포함한 생년 월일
집이나 연구실의 주택 표시
좋아하는 숫자(우수, 기수, 소수 등)
같은 것을 기본으로 하여 거기에다,
지역에 따른 국번의 특이성
대표 번호의 특이성
등을 가미하면 외우기 쉽다.
이렇게 해도 잘 납득이 가지 않을 것이다. 좀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자
국철의 기술 연구소를 예로 들면, 구니다찌에 있으니 지역 번호는 (0425))이고 번호는 72-2151인데, 나의 기억에는 7, 2, 5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 대신 기억할때는 몇 사람의 연구실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쪽의 번호는 XXXX로 바뀌었습니다"하고 알리고, 불필요한 전화는 일체 걸지 않는다. 한 번 걸면 이제 잊지 않으니 재차 확인할 필요도 없다.
어째서 7, 2, 5만으로 충분하느냐는 것은 설명할 바가 없다. 그 점에서는 오히려 바둑 이야기쪽이 재미 있을지 모른다.
전문 기사는 몇 점씩이나 깔아 주고 이른바 지도 바둑을 둔다. 지도 바둑이기 때문에 다 두고 나면 꼭 복기를 하며 잘못을 지적해 준다. 아마추어들은 그것을 보고 대개는 놀라게 된다.
"선생님, 어떻게 그렇게 많은 것을 모조리 외울 수 있습니까?"하고 물으면, "이 정도를 외우지 못한다면 프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하고 일소에 붙인다.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초인적이라고 느낄지 모르지만 프로기사들에게 있어서는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국면에 따라 여러 가지의 패턴이 있는데 그런 것이 제대로 정리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필연적인 수의 변화를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1국만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프로기사는 굉장하다"고 그저 혀를 내두를지 모르지만 실은 프로기사가 되기까지는 거의 무한에 가까운 여러 가지의 패턴을 전부 정리해서 머리 속에 넣지 않으면 안된다는 현실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나의 수치만 하더라도 수 없이 많은 데이터와,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계산의 과정에서 분명히는 말할 수 없지만 여러가지의 기본 패턴이 정리되어 있으며, 그것이 전화번호에 결부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한 가지 일이 만 가지 일이다. 기억이라는 것은 어떤 특별한, 그리고 가장 친밀하고 중요한 사항과 잘 결부되면 기억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볼 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며, 또한 장기간 잊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지하게 고생을 한 경험이 없는 사람이 볼 때는 마치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생각되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기억력이란 그렇게 특이한 능력이라고도 할 수 없다. 앞에서 말한 종합력이 하나로 정리되어서 인상에 강하게 남는 것에 불과하다.
집중력이란 전력투구가 낳은 몰아의 상태
집중력이란 신체 안의 모든 부분이 전력 투구하려는 의지를 중심으로, 일체가 되는 집약력을 말한다. 따라서, 생활에 있어서의 <리듬>에 필적한다고 볼 수 있다.
야구가 성행하게 되면서부터 전력 투구라는 말을 많이 쓰게 되었는데, 이것과 집중력과는 매우 관련이 깊어서 집중력의 설명에는 안성마춤의 말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력 투구란 다만 볼의 속도를 높이기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투구의 순간에 있어서,
"상대(타자)의 폼에서 그가 노리는 방향을 알아낸다"
"상대의 기세로 타이밍을 알아내고, 거기에 어긋나게 던질 것을 생각한다"
"타자가 볼을 그냥 보내어 스트라이크 되는 것같은 구종을 택한다"
고 하는 것을, 극히 제한된 시간 안에 판단하지 않으면 안되다. 그리고 그러한 판단의 결과의 구질로 볼이 던져질 때 비로소 전력 투구가 되는 것이다. 집중력도 전적으로 이와 똑같은데, 단순히 말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기에 한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기로 한다.
나의 경우 일요일은 원고를 쓰는 날이다. 아침 4시나 5시에 기상해서 일을 착수한다. 그날, 아내는 요꼬하마의 친정으로 갔다. 당시는 신혼 초였기 때문에 아내가 떠나자 나 혼자뿐이었다. 이렇게 되자 더욱 기분이 느긋해져서 일이 잘 되었다. 오로지 일에 몰두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녀왔어요.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집안에 불도켜지 않고서..."
"뭐, 잊은 것이라도?"
"무슨 말씀을 하세요. 벌써 저녁 9시가 지났는 걸요."
요컨대, 나는 주위의 밝고 어두운 것에 개의치 않고 아침과 점심도 굶은 채 스탠드 불빛 아래서 줄곧 일만 한 것이었다.
이렇듯 일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해 주는 배후의 존재가 바로 집중력이라는 것이다. 마치 알콜에 젖은 표본처럼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흠뻑 젖도록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집중력의 유무에 달려 있다.
또 하나의 다른 사례를 소개하기로 한다. 나는 한때 OB교향악단의 멤버였던 적이 있다. 세컨드 바이올린은 쉽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리듬도 하아모니도 후스트 바이올린과 똑같다. 단지, 멜로디가 적다는 것일 뿐 테크닉도 실은 쉬운게 아니다.
처음에는 악보에 쫓긴다. 다음에는 지휘봉에 쫓긴다. 그리고 연습을 쌓으면 악보를 거의 보지 않고서도 그 무우드 속으로 젖어들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집중력에 의해 빨려 들어가는 몰아의 심경인 것이다.
떨어지면 안된다거나, 따라가지 못한다면 어쩌나 하고 걱정만 한다면 집중력은 생기지 않으며, 동화될 수도 없다. 오히려 무심이 되어서 동화하려고 힘쓰는 동안에 집중력이 키워지고 동화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설명하면 어느 정도 알았을 것이다. 어느 일정 수준에 이르지 않은 초심자에게는 아무리 말해 보아도 집중력은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것은 본인 자신이 항상 의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금이라도 빨리 그 영역에서 탈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도 연습, 둘째도 연습이다. 그처럼 기초가 튼튼한 자기 단련을 거치지 않으면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가 없을 것이다.
비행기 조종을 배울 때면 교관은 언제나 "몸으로 익혀라!"고 한다. 이론으로는 안된다는 것이다. 몸으로 익히는 훈련을 쌓아야 비로소 이론적인 뒷받침이 이해된다. 아무리 열중한다고 해도 거기까지의 훈련 과정이 없으면 쓸 데가 없다. 비전문가는 불필요할 때에 힘을 주고 긴요할 때에 힘을 뺀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몸에 익지 않았단, 말이리라.
또 한 가지 실례를 소개하기로 한다. 그것은 서예의 연습이다. 예를 들어, 하루 걸려서 2절지 100매의 연습을 했다고 하자. 처음에는 보고 써야 되기 때문에 20매를 넘으면 우선 싫증이 나기 마련이다. 그래도 강행해서 연습하여 30매를 넘을 무렵에는 더 이상 보지 않고도 어느 정도 쓸 수 있게 된다. 그런데 50매를 넘으면 글씨가 의식되지 않는다. 사고가 일시적으로 경화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 자는 무슨 자였지?"하는 상태였는데 그래도 멈추지 않고 계속 써내려가 이윽고 80회를 넘기면 새하얀 종이에 그려진 검은 빛의 무늬처럼 의식된다. 그리고 그 무늬 속에 미를 추구하는 리듬과 하아모니에서 운필이 터득된다는 것이다.
100매의 연습도 보통 힘이 드는 것이 아니다. 먹을 갈고, 정좌 해서 계속 쓰면 여러 시간이 걸린다. 나는 200매 이상까지도 해본 적이 있는데, 12시간 이상이 걸렸다. 연습이 끝난 다음 신문을 보니 눈이 어른어른하여서 활자가 보이지 않았다.
집중력을 방해하는 것은 <미혹>이다.
"이런 것으로 하루를 소비해도 되는 걸까?"
"저 선생은 괜찮다고 했지만 그저 말뿐이 아닐까?"
"이 자습서를 익히면 정말 글씨를 잘 쓸 수 있을까?"
무엇이건 마찬가지이다. 이런 미혹이 잠재적으로 존재하는 한 집중력은 생기지 않으며, 기량의 성장도 바라볼 수 없다.
4시간 수면도 창조력의 소산이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이다"라는 말이 있다. 창조라는 것도 환경조건에 대한 일종의 응답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창조는 음악에서의 하아모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창조란 전적으로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데서 불쑥 튀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창조의 과정에 대해 순서를 세워 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이 된다.
1) 새로운 것의 필요성을 인식한다
2) 그 인식에 대해, 자신의 지식을 대응시켜 본다
3) 부족한 지식이 있으면 즉각 보충한다
4) 요구에 일치한 스타일로 정리해 본다
5) 형편이 좋지 못한 점을 수정한다
6) 최종적인 결론을 낸다
실제로는 5)에서 1)로 다시 돌아가고 또 돌아가고 하며 몇 번씩 반복될 적이 있다.
어떻든 적극성이 기본이다. 그리고 그것을 정확히 포착할만한 힘이 전제가 된다. 거기에 창조력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다음에 중요한 것은 각 단계로 옮기고 바뀌는 사이에 항상 연구가 따라야 한다. 그것은 연구해서 사물을 만든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요구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어떻게 대응시키느냐 하는 의미에서의 연구이다.
세째로 꼭 필요한 것은 도중에서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몇년이 걸려도 6)에까지 도달시키겠다는 의욕이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창조력이 풍부한 사람은 일반적으로 과묵하고 언제나 무엇을 하고 있다. 그리고 눈빛이 빛나며 맑다.
보통 창조력이 풍부하면 흔히들 초능력과 결부해서 생각하기 쉬운데 실제는 지금 말한 것처럼 적극성, 연구 그리고 지속력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또는 행동력, 판단력, 지속력에 의해 표현 된다고도 할 수 있다. 어떻든 앞에서 든 2), 3)을 중심으로 요구에 맞는 현실을 만들어 내려는 것이기 때문에 단순한 착상만으로는 어림도 없다.
창조력이 넘치는 사람은 항상 무의식 속에서 발상의 전환을 반복한다. 그 좋은 예가 나의 체험인 나폴레옹 수면일 것이다. 나는 흔히,
"어떤 계기로 그런 일을 할 마음이 생겼습니까?"
하는 질문을 받는데, 그때마다 나는,
"단지, 시간이 필요해서..."
라고 할 뿐이다. 약하고 작고 어설픈 운명으로 태어난 나로서는 오로지 시간만이 구원의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직감에만 의지한 것은 아니다. 공평히 주어진 하루 24시간의 배분을 자기 나름대로 시간표로 작성하고, 그것을 지키고자 노력한 것 뿐이다. 모든 것이 계산 위에 존재했다고 할 수도 있다. 그 결과로서 여러 가지의 창조를 할 수 있는데 나폴레옹 수면을 발견한 것 자체도 일종의 창조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일생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인가
너무 지루하지 않도록 이쯤에서 총괄해 보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능력이란 기억력, 창조력같은 형태로 설명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기력, 행동력, 정신력, 체력, 노력이 집약된 결과, 눈에 보이는 형태로 만들어지는 것을 간접적으로 입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극언하면 능력이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으로서 부모로부터 받는 것도 아니고 스승이 만들어 주는 것도 아니다. 이런 점에 대한 생각의 차이가 결국 그 인간의 일생을 결정하게 되는 것이다.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라는 말은 없다!"
고 나폴레옹은 말했다고 한다. 평균적 일반인은 그것을 과대망상이라 생각하면 "결국 러시아 원정에서 패하고 유배생활로서 일생을 마치지 않았느냐"고 힐난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속령이기는 했지만 나폴레옹은 이탈리아인이었다. 그런 그가 프랑스의 황제가 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능력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별로 황제가 되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다만 약하고 작고 어설픈 숙명을 뒤집으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건강한 우량 노인 (벌써 60세이다)이며, 비행기로 하늘을 날고, 30세 때에 학위를 받았으며, 대학교수로 20년간 근무했다. 즉, 지금은 강하고 크고 단단한 인간으로 바뀌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하고자 한다.
"뜻을 세우고 노력만 한다면 무엇이든지 실현할 수 있다. 따라서 불가능이라는 말을 생각할 필요가 없다. 만약에 결과가 여의치 않으면 자신의 의지가 약했고 노력이 부족했으며 타이밍도 잘맞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자각해야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느냐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불가능을 긍정하는 한 모든 생각은 꿈으로 끝나게 되며 모든 노력은 무의미할 뿐이다. 나폴레옹이나 유방간은 역사상의 산 증인이 있다. 그들도 사람이요, 나도 사람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사전에도 <불가능>이라는 말은 없다.
"능력이란 무한히 신장할 수 있다."나는 이렇게 믿고 있다. 60세가 된 지금도 나는 매일매일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고 있다. 몸소 자신의 능력을 키우고 싶기 때문이다.
2. 무한한 활력을 주는 시간철학
<시간의 구두쇠>로 일관하라
옛부터 "시간은 돈이다"라고 했다. 시간이란 중요한 것이니 돈이라고 생각하고 낭비하지 말라는 가르침이다. 이 말은 서양에서 전해진 격언인데 동양에도 똑같은 의미를 가진,
"청춘은 두 번 다시 오지 않는다"
"소년은 늙기 쉽고...뜰 앞에는 오동잎이 이미 가을 소리를 내는 구나"
등의 말이 적지 않다.
그러나, 현실을 보면 사람들은 돈에는 제법 침착하면서도 시간에는 전혀 무관심하고 있다. 게다가 자신의 시간을 자신이 낭비하는 것은 자유라치더라도 타인의 시간을 무시하는 일을 서슴지 않고 있다. 예를 들어,
약속을 잊는다
지각을 당연한 것처럼 행동한다
필요없다는 데도 언제까지나 치근덕거리면서 돌아가지 않는다(보험이나 구입의 권유 등)
같은 것은 정말 불쾌하여 견딜 수가 없다.
나는 본디 가난한 말단 관리의 집안에서 자라나서 그런지 남의 앞에서는 그렇지 않은체 사실 혼자가 되면 정말 구두쇠다. 검소, 필요한 양의 식사, 단벌신사의 생활 등 모두 구두쇠로 일관하고 있다. 그리고 시간에 대해서는 더욱 더 구두쇠가 된다.
언제나 메모 용지를 갖고 다니며 사람을 기다리는 등의 토막 시간에 계산을 하거나 생각나는 것을 적거나 해서 메모를 한다. 그것이 나중에는 논문이 되고, 특허가 되며, 학생들에 대한 훈계가 되는 것이다.
나는 우선 지각을 하지 않는다. 상대에게 무슨 빚을 진 것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그 대신 정확히 5분을 넘기면 굉장히 중요한 용건이 아닌한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하지 않느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인간이란 제멋대로여서 자신에게는 관대한 시간적 관념도 타인에게는 제법 엄격한 법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신용을 얻으려면,
약속을 꼭 지킨다
절대로 지각하지 않는다
고 하는 2가지를 철저하게 지켜야 한다. 사회에서의 신용도 부하로부터의 신뢰도 이것 없이는 바랄 수 없는 것이다. 4시간 수면을 뜻하는 사람은 이런 의미에서도 시간에 대해서는 철저한 구두쇠는 그래도 금전적 구두쇠보다는 나은 취급을 받는다. 오히려, 시간적 구두쇠는 생동감이 넘치는 활동력을 보증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경의와 신뢰를 함께 지니는 인간으로서 평가 받게 된다. 따라서, 똑같은 구두쇠일지라도 금전적 구두쇠와 시간적 구두쇠는 전혀 다른 것이다.
옛부터 시간을 중요시하지 않는 사람은 출세하지 못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서양이나 동양도 똑같다. 따라서 지금까지 출세하고 성공한 사람들은 누구나 어떤 형태로든 시간적 구두쇠짓을 한 것이다. 4시간 수면은 이런 의미에서도 큰 역할을 하게된다. 더우기 앞길이 창창한 젊은 사람에게는 꼭 권하고 싶은 것이 바로 <4시간 수면>이다.
세계는 엄청난 인구 증가율을 보이고 있다. 그 반면 기계화, 로봇화가 진행되어 직장은 자꾸 줄고 있다. 언젠가 닥칠 것으로 예측되는 세계적 불황에 대비해 젊은 사람들은 어떤 생활을 해야만 하겠는가?
어느 시대에도 악인은 있었다. 낙오자도 있었다. 그것은 어제 오늘의 이상 현상이 아니다. 하지만 멀지 않은 장래에는 지금까지보다도 더 많은 이상 사태가 벌어지지 않는다고 아무도 단정할 수 없다. 그때 가서 후회해봤자 이미 때가 늦게 되는 것이다.
"일관한다"는 것은 4시간 수면을 실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관한다"는 말에 대해서 한 마디 설명해 두기로 하자. 나는 나폴레옹 수면의 생활을 해오는 동안 자신에 대해 지나칠 정도로 엄격함을 요구해 왔다. 타인에게는 언제나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대하면서도 자신에 대해서는 항상 엄격했다.
나폴레옹 수면 자체가 수행인 이상 그러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4시간 수면 또한 마찬가지이다. 어떤 것에 일관하면서 다른 것도 적당히 한다는 것은 어지간히 특수한 예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즉, "일관한다"는 것은 몰입하는 것이며, 다른 일은 안중에도 두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한 가지가 만 가지가 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4시간 수면을 실천해도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면 의미가 없다. 그럴 바에는 8시간 수면을 해서 불필요한 시간을 만들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관념론에 귀기울일 필요는 없다. 실제로 4시간 수면의 생활을 해 보면 끊임없이 수마가 엄습하므로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만한 긴장 속에 살면 자연히 시간적 구두쇠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구두쇠로 일관하는 것도 역시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무슨 일이건 일관해서 할 마음이 없다면 도저히 수마를 이겨낼 수는 없다.
따라서, 새삼 구두쇠로 일관한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그럴때면 다음과 같은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된다.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 것 - 구두쇠로 일관한다는 것은 오히려 절대적인 성격의 것이지 상대적 성질의 것이 아니다.
몸차림을 개의치 말 것 - 타인의 빈정거림이나 뒷말을 겁낼 정도라면 4시간 수면 같은 것은 하지 않는 편이 낫다. 그런 상태에서는 도저히 실천하지 못한다.
타인에게는 관대하고 자신에게는 엄하게 할 것 - 평균적 일반인과 동격으로 의식할 정도라면 아예 <보통 사람>으로 남아 있는 쪽이 마음 편하다.
타인을 의지하지 말 것 - 부모나 형제에게 <몇 시에 깨워 달라>고 부탁하는 정도라면 우선 가망이 없다. 언제든지 자신의 일은 스스로 대처하는 기개가 없으면 안된다.
즉, 시간적 구두쇠로 일관한다는 것은 결국 4시간 수면을 실행하는 것이다.
3. 일생의 설계
4시간 수면은 일생을 설계하는 기본
요즘 들어 갑자기 <일생의 설계>라는 말이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50세 전후가 되어 허둥댄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니다.
역시 뜻을 세우는 것은 젊을 때가 아니면 안된다. <타협>이라는 것을 아는 나이가 되면 어떻게 할 바가 없기 때문이다.
자유업이나 자가영업의 사람은 그렇지 않지만, 샐러리맨에게는 한결 같이 청년이라는 것이 있다. 다소 연령에 차이는 있어도 후진을 위해 길을 터 주는 것이 연장자로서 당연한 의무인 것이다. 그 무렵이 되어서, "나는 힘껏 일하며 살았다. 이제부터는 편히 쉬어야지"
하는 생각이라면 별문제이지만,
"집에서 빈들빈들 놀기도 그렇고, 쥐꼬리 만한 연금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으니..."
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비극이다. 그러므로 숨을 거둘 때까지 어떻게 살 것인가 일생의 설계를 해야 한다. 또한 설계는 그런 막다른 데까지 몰리기 전에도 언제나 할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빠르면 빠를수록 좋은 것이다.
일생의 설계란 손수 작성해야 한다. 젊은 때라면 어떤 꿈을 그려도 노력에 따라서는 실현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몸이 말을 듣지 않게 된다. 게다가, 때로는 연령 제한을 받을 수도 있다.
뒤늦게 "자유업이나 자기 영업을 하는 사람이 부럽다"고 생각해 보았자, 이미 때가 늦은 것이다. 자유업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거의가 국가시험에 의한 자격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가 영업 또한 마찬가지이다. 물건의 운반, 수금 등 샐러리맨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생이 따르는 법이다.
그런데, 고령자가 되면 자유업이나 자가 영업을 하는 도리밖에 없다.
그렇다면 국가에서 실시하는 자격증을 취득하거나 돈을 모아서 여생에 쓸 수 있도록 축적해 두어야 한다. 전자는 시간을 필요로 하고 후자는 절약을 전제로 한다. 즉, 일생을 설계하는 기본은 시간적 구두쇠, 금전적 구두쇠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부모의 도움으로 한창 공부하고 있을 때에 금전적 구두쇠로 일관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 그렇다면, 일생을 설계하는 기본은 시간적 구두쇠로 일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만약에 일생의 설계를 생각한다면 우선 <4시간 수면>을 뜻하는 데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4시간 수면이란 일생의 설계에 빠져서는 안될 필수조건인 것이다.
현실적 바탕을 두고 행동해라
국가에서 부여하는 자격증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더 자세히 설명하기로 한다.
국가에서 부여하는 자격이란 그 법률에 의해 보장되어 있는 범위 안에서 갖가지의 일을 직업으로 삼을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의사, 변호사, 공인 회계사, 변리사, 전기주임 기술자, 세무사, 사법서사...열거하자면 한이 없는데 모두가 국가시험을 거쳐야 한다. 그렇지만 합격하면 부와 지위가 함께 따르는 것이니 만큼 시험을 보는 것은 쉽지만 합격하는 것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개중에는 그것만을 목표로 삼아 몇 년을 공부해도 합격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다.
만약 샐러리맨이 그 중의 어느 것에 뜻을 세웠다고 하자. 물론 샐러리맨으로서의 일은 다른 사람과 다름없이 처리해야 하므로 보통 사람처럼 공부해서는 어림도 없다. 그렇다면 보통 사람의 두 배, 세 배의 내용으로 인생을 진하게 살지 않으면 안된다.
이런 의미에서 4시간 수면의 의의가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안이하다. 때로는 타인과의 의리를 어기는 일이 있을지라도 자기 연마를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의리를 버릴 각오까지도 할 정도로 노력을 쌓는 냉혹성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국가적인 자격이라는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학력으로 대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시험에 합격하지 않는한 영구히 무자격으로 있을 수 밖에 없다.
그와 반대로, 다소 비판을 받아도 또 뒷말을 듣는 일이 있어도 자격을 취득하기만 하면 그러한 것은 모조리 사라진다. 이런 점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4시간 수면은 다만 심신에 고통을 강요할 뿐이다. 그래서는 모처럼의 인생도 무엇 때문에 있는지 모르게 된다.
예를 들어 회사같은 한 조직 속에서 일하면 조직으로서의 자격이 문제가 되며, 개인의 자격은 그다지 문제시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조직 속에서 일을 할 때에는 개인으로서의 자격을 갖지 않아도 조직이 보유하는 자격만으로 충분히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이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주요 원인이 된다.
즉, 정년이 되어 샐러리맨을 졸업하면 아무리 활발히 활약한 실적이 있었다 해도 개인적인 자격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무엇 하나 일을 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샐러리맨에게 있어 최대의 함정은 이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일생의 설계를 생각한다면 거기에 필요한 자격은 모두 자신이 보유하지 않으면 안되다. 그것도, 정년이 되기까지 사이에 모두 입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이랬으면 좋을 텐데..."
하는 식의 마음 편한 꿈이나 동경을 해보았자 아무 소용이 없다.
"정년이 될 때까지는 적어도 이런저런 자격을 취득할 테야!"
하는 현실적인 행동이 아니면 안된다. 가령, 조직 속에 있으면서 승진하고 있는 동안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행동파의 생활을 할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결국 남의 힘을 빌려서 씨름하는 격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러한 사람들을 "프로인체 하는 아마추어"라고 부른다.
<평균적 일반인>으로 만족하지 않으려면
대단히 실례된 말이지만 내가 말하는 <평균적 일반인>이란 "프로인체 하는 아마추어"들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천박한 지식을 내세워 식견이 있는 체하고, 자기 연마를 보류한 채 알랑거려서 이익을 얻는 것으로 일관하고, 마음에도 없는 말들에 놀아나서 샐러리맨 생활을 끝내는 사람들이다. 그런 상태에서 일생의 설계를 생각한들 도대체 무엇이 이루어지겠는가. 따라서 나는 "그것으로는 안된다"고 확언하는 바이다.
4시간 수면을 실천하는 사람은 아무리 학력이 없어도, 아무리 가난에 쫓겨도 이제 <평균적 일반인>일 수는 없다. 언젠가는 화려한 일생이 약속되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이 일생의 설계 속에 반드시 <4시간 수면> 을 포함시키는 의의가 있는 것이다. <4시간 수면>은 후회없는 일생을 약속해 주는 성공의 바이블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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