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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승패를 좌우하는 4시간 수면법

1. 4시간 수면의 비밀

    건강과 체력은 전혀 별개의 것
  요즘 들어 곧잘 "체력을 길러서 건강을 증진하자"는 소리들을 많이 하고 있다.  체력에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그러한 소리를 듣고 우왕좌왕하는 것이 사실일것이다.
  의사들은 무어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는 아무래도 이런 말을 이해할 수 없다.  나로선 체력과 건강은 전혀 무관하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옛부터 곧잘 체력 검정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100m를 몇초에 달렸는가? 2,000m를 몇 분으로 달렸는가? 턱걸이는 몇번 했는가? 하고 말이다.  이것은 체력이라는 것을 외견상 정량화함으로써 보편적으로 나타내는 것인데, 그 외도하는 바를 모르는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그 정량화된 순위대로 병에 걸리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로, 달리기는 잘해도 헤엄을 못치는 사람도 있다. 평형감각이 무디어 평균대 위도 걷지 못하고, 자전거나 스케이트도 못타는 사람이 상당 수에 달한다. 때로는 고공 공포증이 있어 높은 데는 딱 질색인 사람도 있다. 이런 데도 보통사람과 같은 체력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세째로, 그러한 사람들도 4시간 수면의 생활을 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4시간 수면의 생활은 <수행>이기 때문에 체력의 소모가 매우 크다. 그러므로 그것을 해 내는 사람쪽이 훨씬 체력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나폴레옹 수면을 장기간에 걸쳐 실천해 왔다. 그렇지만 구보는 언제나 꼴찌였으며 무거운 것을 나르는데 있어서도 꼴찌였다. 병이 갓나은 약질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꼴찌인 것이 당연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폴레옹 수면을 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다.
  따라서 내 생각으로는 체력이란 환경 조건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신체의 순응성, 또는 다소의 무리에 대해서도 그 건강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지속성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럼, 건강이란 무엇인가?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자율신경 전체로서의 밸런스, 또는 조화성이라고 하면 어떨까?
  환경 조건은 항상 변화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자율신경은 서로 연계를 유지하며 그 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그 대응 능력이 체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일부에서 언밸런스가 생겨도 다른 부분이 협력함으로써 지탱되는 복원력이 바로 건강이라는 것이 아니겠는가.
  다시 말해 건강이란 복원력에 의해 상징되는 자율신경 전체의 밸런스이며, 체력이란 힘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율신경 전체를 잘 조화시키면서 환경조건의 변화에 순응시켜 가는 능력으로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복원력이 커지지 않으면 체력도 커질 리가 없다. 즉 "체력을 길러서 건강을 증진하자"고 하는 것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지속하는 두뇌와 자율신경의 건강

  4시간 수면의 생활은 모든 자율신경을 혹사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훈련에 따라 강인하게 될 뿐만 아니라 상호의 연계가 긴밀해진다. 따라서 전체로서의 복원력이 증가한다.
  일반적으로 4시간 수면은 신체를 망친다고 불안해 할지 모르나 그러한 불안은 전혀 쓸데없는 망상이다. 오히려 4시간 수면이야 말로 건강을 창조하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령이 되어서는 어떨지 모르나 의사들의 말로는 한창 성장기일 때는 만 3년이면 세포가 전부 교체된다고 한다. 이런 때에 4시간 수면을 실천하면 새로운 세포는 4시간 수면에 적응되도록 만들어지고 다듬어진다는 것이다. 즉, 이것이 건강을 창조한다고 볼 수 있다.
  만 3년이 되면 이제 완전히 4시간 수면에 적응되는 신체로 만들어진다.
  건강도 체력도 인간생활에 있어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정량적으로 평가해서 어느 쪽이 떨어져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종류의 성격은 아니다.
  꼬마건 꼴찌건 병에 걸리지 않고 지치지 않는 쪽이 체력은 뛰어나다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몸집이 크다거나 힘이 세다고 해서 또 달리기가 빠르다고 해서 반드시 체력이 있는 것은 아니며 건강하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째든, 4시간 수면의 생활을 지속하면 이른바 두뇌도 자율신경도 항상 긴장된 상태가 되어 한창 성장기가 아니더라도 신경 상호간의 연계가 밀접해진다. 그리고 3년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나가면 신체 안의 세포는 모두 새로운 것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머리의 회전도 빨라지고 허약한 신체도 병에 저항할 수 있게 된다. 따라서, 4시간 수면은 곧 건강을 창조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건강은 스스로 창조한다

  그러나 4시간 수면을 실천하여 건강을 창조한다고 해서 구보가 빨라지거나 힘센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른바 체력이라는 것과는 별개이다. 하지만, 환경조건의 여하에 따라서는 반사동작이 빨라지며 평형감각도 예리해진다. 환경에 대한 순응성의 발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자율신경의 원활한 연계는 생활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지 약이나 특정한 건강법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즉, 상호연계의 조화가 무너지지 않는 한 약의 신세를 질 필요도 없고, 의사의 진단을 받을 필요도 없다.
  4시간 수면 자체는 신체에 상당한 부담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당사자인 본인이 "수면부족으로 병이 되는 것은 아닌가?"하고 의심을 갖게 되면 그것으로 끝장이다. 자신을 자신이 믿지 않는한 4시간 수면은 실천될 수가 없다. 그리고 체질의 개조 또한 바랄 수 없는데 체질이 개조되지 않으면 몸에 배지를 않는다. 그렇게 되면 결국 3일 작심으로 끝나게 되고 만다.
  요즈음 건강에 관해 관심이 높아진 탓인지 다방면으로 논의 되고 있다. 그런데 모두가 마치 건강이 생명을 보증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식물인간이 되어서도 건강만 하면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
  자율신경이 풀가동으로 활약하고 상호의 밸런스가 유지되면 신체는 건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율신경을 그처럼 혹사하는 것이 누구일까. 본인이다. 즉, 본인이 살려고 하는 힘이 바로 건강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란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는 신체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움직일 수 있는한 움직인 결과 최후로 죽음에 직면하는 것이다.
  이런 표현을 하면 어딘가 종교적 분위기를 느낄지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살아가고 그리고 살아 있는한 활약하고 싶다고 원한다면 역시 자기 스스로 자신을 단련해야 한다.
  건강이란 그러한 결과로 만들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종교와는 관계가 없지만 확신을 가져야 된다는 점에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건강이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죠깅을 하는 것도 좋고 사이클링도 무방하겠지만 자기 체내의 자율신경을 무시한다면 백해는 있을지언정 일리도 없게 된다. 그점에 4시간 수면의 의의가 존재하는 것이다.


    2. 생활의 리듬을 조정하는 4시간 수면

    개인에 따라 다른 생활리듬

  4시간 수면의 생활을 하려면 1주일을 하나의 주기로 삼은 생활 패턴, 즉 시간표를 작성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뇌, 좌뇌의 적절한 사용이나 근육에 대한 노동 또는 자율신경에 대한 부담을 고정화해 주지 않으면 안된다. 이렇게 하여, 하루에 20시간의 활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나 이미 경험하고 있는 바와 같이 20시간 동안 계속해서 전력 투구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물며 그런식으로 1주일 동안이나 계속한다면 자멸하게 될 것은 당연하다. 그 방지책으로서 특별히 중시되는 것이 <리듬>이다.
  여기서의 <리듬>이란 힘을 내는 방식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100% 또는 120%의 힘이 요구되어, 그것을 모조리 소모시킨 뒤는 80%의 긴장도라도 충분한 일로 대상을 바꾸어 주는 것이다.
  좀더 알기 쉽게 설명하기로 한다.
  나는 전기공학이 본업이다. 따라서 100%, 120%의 힘은 전기공학의 분야에서 요구받는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학습하고 있는 인도네시아어는 본업이 아니다. 오늘은 몇개의 단어를 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법도 없으며, 몇 페이지를 해석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긴장을 풀어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 80% 정도의 긴장도라도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각자 자신의 판단에 따라 경중의 평가가 내려지고, 그런 것이 적당히 짜여짐으로써 각자의 리듬이 조성되는 것이다.
  리듬은 개개인의 가치관에 따라서도 달라지며 인생관에 따라서도 일정하지 않다. 즉, 개인 생활에 있어서의 리듬은 각자마다 독립된 것으로서 보편성을 지닌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되는데로 내버려 두자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서도 한 마디 언급해 두기로 하자.
  음악에는 멜로디, 리듬, 하아모니라는 3요소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 3요소가 어떻게 짜여져 있느냐에 따라 명곡이냐, 명곡이 아니냐, 명연주냐, 서투른 연주냐가 정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인간도 전적으로 이와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으리라. 멜로디란 재능이며 소질이다.  리듬이란 움직임이며 하아모니란 환경에의 조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환경에의 하아모니가 재능을 발휘 한다

  재능이나 소질이라는 것은 부모로부터 받는 것이다. 그런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본디 남남 사이였으므로 두 사람은 당연히 각자 특유의 많은 유전자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몇 명의 자식을 낳아도 유전자의 결함에는 차이가 생긴다.
  즉,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자식이라도 각자의 재능이나 소질이 서로 다르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천태만상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재능이나 소질이라는 것은 개개인에 따라 각각 다른 독자의 것이며 천혜의 재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곳을 뜻대로 활약시킬 수 있으면 인생의 성공자가 되는 것이고, 스스로 그 천혜의 재산을 발견하지 못하면 인생을 실패로 끝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자신의 재능이나 소질이 어떤 점에 있는지 어느 누구도 가르쳐 주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각자의 의무이며 사명인 것이다.
  옛부터 "금강석도 갈지 않으면 빛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갈아보지 않고서는 유리알인지 다이아몬드인지 구별할 수 가 없다. 갈아보지도 않고 체념하거나 포기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4시간 수면의 생활이 바로 그 갈아보는 것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리듬>은 생동하는 생활 속에서 재능이나 소질을 찾아 내고 그것을 키우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확실히, 자신의 재능이나 소질을 발견한 사람은 생동하는 생활을 하고 있으며 또 언젠가는 사회에서도 인정을 받게 된다.
  그리고 재능이나 소질이 사회를 배경을 클로우즈업 되었을때 화려한 성공을 거두게 되는 것이다. 즉, 하아모니이다.
  하아모니가 잘 되지 않으면 멜로디도 리듬도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전혀 모르게 된다. 역사상 하아모니가 잘 되지 않았기 때문에 뛰어난 멜로디나 피나는 생활의 리듬이 아무 쓸모없이 말살 된 사람들이 적지 않다.
  멜로디를 발견하지 못한 사람은 그나마 체념할 수 있으리라. 리듬을 그르친 사람의 책임이니 도리가 없다. 하지만 하아모니가 없었던 사람이야말로 비극의 주인공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하아모니라는 것은 그 생활이 존재하는 장소의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작게 말하면 가정이고, 크게 말하면 국가이다.
  여러분들이 아무리 진지하게 4시간 수면의 생활을 하고자해도 가족들에게 이해가 있어야만이 비로소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영어에 능통해도 중국에 가면 통용되지 않듯이 어떤 재능이나 능력도 환경 속에서만이 평가받는 것이므로 그 환경을 무시하면 안된다. 즉, 하아모니이다.

    리듬이 존재하는 한 인간은 성장을 한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리듬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기로 한다. 지금까지의 설명으로도 이미 짐작했지만 리듬은 멜로디와 하아모니를 잇는 입장에 있다.
  누구나 환경 조건이 정비될 때까지는 가만히 참으면서 힘을 기르는 것이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여기서 말하는 리듬인 것이다. 리듬은 살아 있는 것에 대한 상징이다. 리듬이 존재하는한 인간은 성장한다. 그리고 리듬을 타고 있는한 인간은 더욱더 건강해질 수 있다.
  끝으로, 리듬을 적절히 만드는 것에 대해 언급하기로 한다. 4시간 수면의 생활을 실천하면 따로이 잔재주를 부리지 않아도 개인의 리듬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그것은 3년간의 수행 기간, 우여곡절을 경험하면서의 이야기이다.
  따라서 2,3년 동안에 만약 불안이 닥치면 다음의 5가지를 꼭 기억해 주기 바란다.
  첫째, 남의 흉내는 내지 말라-물론 위인전 등에서 큰인물들의 생활습관을 흡수하고, 그것을 자기 방식대로 다시 고쳐 사용하는 것은 매우 바람직하다.
  둘째, 자신의 결론에 대해 자신이 망설이면 안된다-모든 것은 시도해 보고 또 시도해야 한다.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고 이론만 내세울 바에는 처음부터 안하는 것이 낫다.
  세째, 형편이 좋지 않거나 또는 무리한다는 것을 깨달았으면 즉각 바꿔나가라-4시간 수면을 실천한다는 대목표만 바꾸지 않는다면 아무리 생활을 바꿔도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솔직성, 순응성이 없으면 대목표 달성 자체가 무리일 것이다.
  네째, 항상 남이나 가족에게 폐를 끼치지 않도록 힘써야 된다-사회의 한 일원이라는 자각이 없으면 결국 하아모니로 부터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 자신을 가지고 생활하라-공표하고 실행한다는 자신이야말로 자기 완성을 이룩하게 한다고 믿지 않으면 안된다.


    3. 숙면과 건강

    신진대사를 촉진하는 엷은 옷
  4시간 수면의 실천에 있어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자율신경이라는 것을 잘 알았으리라 믿는다.
  이 자율신경을 적당히 피로케 하고, 또한 휴식시키는 것이 숙면의 요점이라는 것도 이미 반복해서 말해 왔다.
  4시간 수면법의 가장 큰 전제가 되는 것은 숙면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여러 가지로 설명해 온 숙면의 비결을 한 번 정리해 보기로 한다.
  1) 검소, 필요최소한 양의 식사
  2) 9시 이후는 먹지 않는다
  3) 음주할 때는 안주를 먹지 않는다
  4) 매약류는 입에 대지 않는다
  5) 부드러운 베개나 이부자리는 사용하지 않는다
  어느 것을 보아도 <인색>한 이야기 뿐이다. 기왕 말하는김에 또 한 가지 <인색>한 이야기를 하기로 한다.
  그것은 엷은 옷으로 일관하라는 것이다. 자율신경의 밸런스를 생각한다면, 피부를 강화하는 것도 필요하다. 우선 엷은 옷의 효용을 알아보기로 하자.
  기온의 변화에 따라 피부 호흡의 정도를 조절해 주기 때문에 감기에 걸리지 않게 된다.
  피부의 활동이 활발해져서 신진대사가 촉진된다
  잠자고 있을 때 등, 땀의 흡수가 좋고 그런 만큼 숙면하기 쉽다.
등의 효과가 있다.
  엷은 옷의 효용에 해당하는 수행의 종류로서는,
  폭포를 맞는다
  냉수 마찰
  건포 마찰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이런 수행을 매일 아침 실천하는 것은 좋으나 나중에 두꺼운 옷에 싸이거나, 난방에서 지내는 것은 무의미하다.
  오히려 이런 수행을 실천하지 않아도 항상 엷은 옷으로 지내는 편이 훨씬 자율신경에는 효과적이다.
  일반적으로 인간이란 약한 존재이다. 수행이라고 하면 으례 단체로 참가한다. 어느 일면 군중심리도 작용하게 되기 때문이리라.
  추운 날씨에 수영하는 한중수영 같은 것도 제법 참가자가 적지 않은데, 그것은 매일 본인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며, 극히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래가지고는 도저히 4시간 수면을 수행하는 만 3년 간을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그보다는 매일 할 수 있는 <엷은 옷>쪽이 훨씬 손쉽고, 또 항상 실천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게다가 옷값도 절약할 수 있다.
  피부를 단련한다는 것은 빠르게 달린다거나 힘을 세게 하는 것과는 달라서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도 표면의 피부를 두텁게 하는 것도 아니며, 또 단순히 강인한 강도를 길러주는 일도 아니다.
  그것은 환경 조건의 변화에 대한 적응 속도를 높여 줄 뿐이다. 그 까닭인지, 나는 아무리 엷은 옷으로 자도 아침에 일어나 보면 다소 땀이 흐르고 있는데, 그것은 피부 호흡에 의한 배설물의 축적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이것을 제거하지 않으면 싸쓰를 입어도 어딘지 상쾌하지 않다. 따라서 아무래도 냉수마찰이나 건포마찰을 하고 싶어진다. 나는 매일 아침 하의를 갈아입기 전에 힘껏 건포마찰을 하고 있다. 물론 나폴레옹 수면을 뜻한 이래 줄곧 계속해 오고 있는 것이다.
  즉, 엷은 옷은 신진대사를 촉진시키는 작용을 해 준다. 그런데 보통 사람보다 일어나 있는 시간이 길기 때문에 때도 많이 낀다. 그래서 때미는 수건으로 세게 밀어내면 신체 전체에서 때가 떨어지며 피부도 새빨갛게 된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다음 날이 되면 여전히 많은 때가 떨어진다.
  이와 같은 신진대사의 촉진이 <엷은 옷>의 효용이며, 4시간 수면의 공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색>이 새로운 인생을 만든다
  결국 4시간 수면의 생활이란 여타의 다른 문제들과 독립시켜서 실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같이 따뜻한 옷, 배부른 식사로는 도저히 실천할 수 없는 것이다. 4시간 수면의 생활은 아무래도 검소, 필요최소한 양의 식사, 엷은 옷을 입는 등의 생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엷은 옷으로 지냈다고 하자. 필연적으로  피부에서의 열 방산이 많아진다. 그러면 신체의 전표면에서 상실되는 열량에 해당한 분만큼 더 영향분의 흡수작용이 필요해진다. 따라서, 소화기계는 물론, 모든 자율신경이 서로 협력해서 밸런스를 유지하려고 활동하게 된다. 그것이 신체의 건강이라는 것을 만들어 낸다.
  여기서 가령 미식으로 포식했다고 하자. 소화기계는 아무런 고통도 없이 요구되는 규정량을 다할 수 있다. 즉, 무리하게 전체적인 밸런스의 유지를 위한 일에까지는 요구받지 않고도 충분히 규정량을 충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건강의 본질이 상실되어 버리고 만다. 이처럼 평소에 전력으로 활약할 일이 없던 소화기계가 갑작스런 사태가 발생할때 응답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옛 말에 부자는 약질, 가난뱅이는 건강이라는 말이있다.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이 건강하게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은,
  일하지 않으면 먹고 살 수가 없기 때문에 수면시간마저 최대로 절약할 수 밖에 없다(3--4시간 수면)
  입고 있는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다(엷은 옷)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 족하다(검소, 필요최소한 양의 식사)라는 3박자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게다가,
  기상 등의 자연환경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된다.
  노력하기에 따라서는 현재보다 나은 생활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라는, 즉 "난관을 극복하며 살아 나가는 것이다"라는 스스로 깨달은 적극적인 개척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인색으로 일관하지 않으면 안되며, 또 일관하는 것에 의의가 있다.
  돈이 없기 때문에 쓰지 못한다는 것은 가난하기 때문이지 인색한 것은 아니다. 돈을 가지고 있어도 쓰지 않는 것이 인색이다. 그 극한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구두쇠인 것이다.
  가난하면 언제나 참고 견디는 것에 익숙해지면 매우 소극적이다. 다급해지면 임시 변통으로 때우려고 한다. 또 열등감에 꽉차 있다.
  그러나, 구두쇠는 다르다. 다소의 여유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최후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없었던 걸로 치고 맨주먹으로 대처하려 한다. 따라서, 다급해질 일도 없으며 임시 변통도 하지 않는다. 엄연히 목표를 향해 노력한다. 물론, 열등감도 가지고 있지 않다. 아니, 오히려 우월감에 젖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구두쇠로 일관할 것은 권하고 싶다. 일관함으로써 새로운 인생을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건강도 만들어 주고, 생활상의 신념도 확립해 준다. 그리고 월부나 대부금의 중압에서 해방해 주기 때문이다.

    놀라운 한쪽 눈 수면법
  여기서 나 자신의 체험담을 말하겠다. 23세 때, 나는 어떤 불운한 짓을 당해 350만엔 정도의 빚의 짊어지게 됐다. 지금 처지라면 별로 대단한 돈이 아닐지 모르겠지만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다. 대학출신인 월급장이의 초임봉급이 4--5만엔이었던 무렵이다.
  나는 이 큰빚을 갚기 위해 하루에 4개의 일을 해치우기로 마음먹었다. 우선 아침 9시부터 저녁 5시까지는 가정용품의 외판원, 저녁 6시부터 8시까지는 학원의 강사, 밤 9시부터 새벽 6시까지는 운송회사에서 철야근무의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리고 가정용품의 판매가 없는 날에는 아침부터 토목공사현장에서 땀을 흘렸다. 어쨌든지간에, 빚을 반년 안에 갚아야만 했었기 때문이다.
  4개의 일을 걸머잡고 매일 24시간 전력투구라고 해도 좋을 가혹한 나날을 보냈다. 그 덕에 내 월수는 40만엔에 이르렀다. 대학졸업인 풋나기봉급자의 월급에 몇급에 몇곱을 더한 돈을 벌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기간 동안 나는 어떻게 해서 수면시간을 짜냈을까?
  이것은 과장된 표현도, 아무 것도 아니다. 그저 사실만을 밝힐 뿐인 것인데, 그 반년 동안 나는 옆으로 누워서 잔 적은 한번도 없었다. 나는 걸으며 잤고, 일을 하면서도 잤고, 1초, 2초를 아껴서 겉잠을 잤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눈을 붙였을까. 이 방법을 내가 전에 TV의 장시간 쇼프로에서 <한쪽 눈 수면법>이라고 해서 소개한 적이 있었다.
  우선 까만 안대로 오른쪽 눈을 2시간 덮고 다음에는 그 안대를 왼쪽 눈으로 바꾸어 단다는 것이다. 즉, 한쪽 눈씩 교대로 쉬는 것이다.
  "그런 터무니 없는..."
하며 웃기지 말라는 독자도 많을지 모르지만 나는 잘라 말한다. 이것은 가능하다.
  까만 안대를 끼게 해서 오른쪽 눈의 활동을 쉬도록 하면 그러는 동안은 오른쪽 뇌도 쉬게 할 수 있다.  2시간 지나면 오른쪽 눈과 뇌는 모두 산뜻하고 원기가 회복돼 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반대로 혹사당한 왼쪽 눈과 뇌는 피로가 쌓여서 멍한 상태다.
  그래서 안대를 왼쪽 바꾸어 끼면 이번에는 왼쪽 눈과 눈이 푹 쉬기 시작한다. 2시간 뒤에는 역시 사뿐한 상태가 된다.
  이렇게 해서 나는 6개월간을 이럭저럭 억지로 넘기며 극복했다. 옆으로 눕지 않아도 근육의 피로를 풀 수 있다는 것을 내몸으로 스스로 실증해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4. 속박, 불안의 해방이 곧 장수다
    자기암시와 자신감으로 만드는 건강
  <불면증>의 치료에 자기 암시법이 유효하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이다. 4시간 수면법도 당사자가 "할 수 있다" "해내고 말겠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도저히 성취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검소, 필요최소한 양의 식사>도 <구두쇠 같은 엷은 옷>도 일종의 자기 암시 없이는 결국 작심 3일으로 "굿바이"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건강도 또한 자기 암시가 만들어 낸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중학교 3학년 시절 나는 이런 체험을 한 적이 있다.
  어느 체육 시간에 높이뛰기를 한 적이 있는데, 30cm를 넘지 못한 학생은 나 한 사람 뿐이었다. 그날의 최고 기록은 135cm였다. 정말 분했다.
  그래서 곰곰이 생락해 본 끝에 이런 것을 발견했다. 나는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검도를 배워 오고 있었다. 검도에서의 점프는 왼발이다. 그런 데도 높이뛰기는 오른발로 뛰어 오르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스텝이 맞지 않은 것도, 30cm를 뛰어 오르지 못한 것도 말하자면 당연한 일이었다.
  방과 후, 나는 혼자서 다시 뛰어 보았다. 과연 50cm정도까지는 아무런 힘도 들지 않았다. 그때부터 나는 우리 반의 최고 기록인 135cm를 뛰어 넘고자 매일 한 시간 정도 연습을 반복했다. 역시 실현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까지는 100일이나 걸렸다. 그리고, 그것도 검도 실력에도 예상 밖의 발전을 가져다 주었다.
  이 사건은 그 후의 내 인생에 하나의 교훈이 되었다. 그야말로 나의 비약의 토대가 된 것이다.
  즉, "자기가 믿고 노력하는 곳에 반드시 해결은 주어진다"라는 자기 암시를 거는 것이다.
  나는 의학을 전혀 모른다. 게다가 한때는 의사에게 버림까지 받았던 생명의 주인공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생활, 지켜 오고 있는 양생훈같은 것은 모두 내 스스로의 체험에서 찾아내고, 체계화하고 자기 암시로 걸어 왔던 것이다.
  나는 언제나,
  "인간은 백인 백색, 만인 만색이다. 따라서 자신에게 가장 적합한 룰을 스스로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고 생각해 왔으며, 또 그렇게 주장해 왔다. 그런 만큼, 자기 암시가 맡고 있는 역할은 매우 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릴 적의 나는 선병질로 허약한 약골이었다. 체력은 물론이거니와 병에 대한 저항력도 전혀 없었다. 그런데 <나폴레옹수면>을 만 3년 계속한 다음부터는 어쩐지 병에만은 저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덕분에 해군 기술 중위로서의 의무도 아무 불편없이 다른 사람과 똑같이 해낼 수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전후의 거친 세파에 시달림을 받으면서도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지 않고 굳굳하게 살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죠오지대학에 봉직한 지 만 19년, 안주의 터전을 얻어 무한한 미래의 꿈을 펼치고 있다.
  나는 혈압도, 체중도 10년 전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자가용기의 면허를 취득한지 꼭 10년, 마음대로 하늘을 날고있다.
  대개의 사람들은 나를 10세 정도 젊게 본다. 유년 시절, 건강 열등아였던 나는 환갑을 맞은 나이가 된 지금 건강 우량 노인이 되었다.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것은 신진대사가 변함없이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건강 우량 노인으로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자기 나름대로의 암시 속에 자기 나름대로의 리듬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나의 생활을 지탱시키고, 나의 생명을 키워 온 것은 모두 자기 암시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절망 직전의 몸이 그런대로 별탈없이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 암시의 덕분이다.
  옛날엔,
  "사람에게 밟힌 떡갈나무의 열매가..."하고 탄식하던 몸이 지금은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현존하고 있다. 물론 떡갈나무는 떡갈나무일 뿐 참나무나 자작나무가 되지는 못한다. 그래도 좋지 않은가. 짓밟힌 채 다람쥐의 먹이나 되었을 자신을 생각하면 그런 호사스러운 말을 하고 있을 처지가 못되는 것이다.

    건강이란 자신의 능력을 항상 100% 발휘하는 것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몸의 밸런스가 무너지면 의사의 진단을 받고 지시를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무너지기까지의 과정에서 자율신경으로 복원시키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내가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의사의 신세를 지지 않아도 되게끔 평소에 자율신경을 조정해 두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도 자기 암시의 의의가 있다.
  인간이라는 것은 암시에 걸리기 쉽다. 예를 들어 주간지에 "염분을 많이 섭취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기사가 나왔다 하면 "나는 염분을 과다하게 섭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걱정하며 현실적인 증상은 전혀 없는 데도 "나는 염분 과잉으로 멀지 않아 암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믿어 버린 나머지 매일 고민하다 일찍 죽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늦건 이르건, 아무래도 어떤 암시에 걸릴 바에야 자기 나름대로의 자기 암시에 걸려 버리는 게 훨씬 낫다.
  "나는 이런 생활을 하고 있다. 따라서 건강하게 살 수 있다!"고 믿으며, 그런 생활을 계속해 나가면 그리 간단히 병이 나지는 않는다. 당연한 일이다. 자율신경의 밸런스 복원력의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이니...
  어떤 명의가 추천한 것이라도 자신의 생활 리듬을 급변시키는 것은 도리어 건강에 좋지 않다. 역시 신분에 맞는, 관습화된 생활 속에 안주하는 편이 훨씬 건강에도 좋다.
  흔히, 건강한 신체를 만들기 위해서는 스포츠를 해야 한다고들한다. 그 말에 끌려서 죠깅이나 골프를 하는 사람을 본다. 그러나, 나는 부럽다고 생각지도 않고 훌륭하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왜냐 하면 본디 약하고 작고, 어설펐던 나로서는 스포츠에 합당하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야구도 축구도 언제나 응원석에 앉아 있는 신세였다.
  따라서, 내가 진지하게 맞붙은 것은 검도뿐이었다. 국민학교 5학년 때부터 여순공과대학 예과를 수료할 때까지만 10년간 수련을 했다. 그리고, 2단의 단증을 땄다. 그러나, 시합 성적은 조금도 양호하지 않았다. 체력의 문제도 작용했는지 모른다. 나폴레옹 수면이 아직 몸에 배기 전이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때의 훈련을 지금도 감사하고 있다. 실제로 치고 받는 연습보다. 마루 소제로 상징되는 도장에서의 훈련, 예법에 의해 얼마나 귀중한 것을 얻었는지 모른다.
  건강이라면 누구나 몸집이 크고 힘센 사람을 연상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참된 건강이 아니다.
  옳은 의미의 건강은 항상 그 능력을 100% 발휘할 수 있도록 유지하는 것이며, 한 순간 순간에 따라 적응력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따라서 외면으로만 남을 보고 부러워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좀더 자신감을 갖고, 자기 자신을 건강하게 유지하는 편이 부러워하는 것 보다는 훨씬 낫지 않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자기 암시가 맡은 역할은 큰 것이다.

    스스로 살아가는 스스로의 인생
  최근, 일반인의 평균 수명이 길어졌다고 한다. 그것 자체는 확실히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의학이 진보하는 반면 식물인간이 된 채 단지 삶을 연장하고 있는 사람들 또한 늘고 있다고 한다.
  도대체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수명이라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가? 나로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그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윤리, 종교적인 면을 포함해서 금후에도 논의는 그치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논의에는 휩쓸리고 싶지 않다. 기적에 가까운 체험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가능한한 여러 가지 분야에서 힘껏 일하고, 어느날 예고없이...라는 식으로 죽는 것을 원하고 있다. 자고 있는 동안은 죽어 있는 것과 같다고 까지 극언하면서 그것을 생활 신조로 삼고 있기 때문에 활약을 위한 수면이 아니면 차라리 영원히 잠들어 버리는 쪽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폴레옹 수면]이라는 책 속에서 나는 57세가 되는 3월로서 대체로 일반인의 124세와 맞먹는다고 적었다.
  그로부터 만 3년이 더 지났으니 평균적 일반인의 나이로 환산하면 실로 130세가 넘어선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남들로부터 50세 전후로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다. 즉, 장수라는 것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하나는 호적상의 연상이며, 또 하나는 깨어 있는 시간을 평균적 일반인과 비교해서 얻은 연령, 또는 종합적 작업량으로 환산된 연령이라는 것이다. 물론, 자질구레한 논의를 하자면 이론이 끝이 없기 마련이다. 4시간 수면의 생활을 하면 어느 쪽도 신장하는 것은 틀림없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주기 바란다.
  4시간 수면을 첫째 자율신경을 조정하고 건강을 만들어 준다. 건강하면, 그만큼 병이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장수를 누리게 해 주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숙면에 의해 충분한 휴식이 주어진다. 이것도 이미 몇번씩 설명했으니 새삼스레 거듭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세째, ...이하, 지금까지 언급한 것은 일체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한 가지, "스스로 살아가는 스스로의 인생"이라는 것에 대해서 설명해 두고자 한다. 손오공은 아니지만 인간 역시 뽐낸다고 할지라도 결국 관음보살의 손바닥에서 춤추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가령 <자유>를 표방해도 그런 것은 주어질리 만무하다. 법률가는 흔히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무리가 통하면 도리는 곤두박히듯이 누구나 똑같은 수명이 주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징역을 살고, 학대를 받는 것도 아니다. 언제나 싱글벙글 웃고 있으면서 부처님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즉, 체념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수동적인 인생을 보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든 자기 나름대로 즐거울 수 있는 생활을 찾아내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4시간 수면은 그것을 위한 유일한 방법인 것이다.

    <깨달음>을 가진 매일의 생활
  4시간 수면을 실천하면 혼자서 자유로이 쓸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게 된다.
  이 시간은 잘 안되는 일의 보충에 쓰여도 좋고, 새로운 꿈의 실현을 향해 소비해도 좋다. 요컨대, 봉급을 손에 쥐기 위한 시간이 징역이라고 한다면, 이런 종류의 시간은 자신을 만능의 문수보살로 완성시키기 위한 시간이 되는 셈이다. 또한 보통 때 방치해 두었던 사항에도 몇 번씩 손질을 하여 제대로 마무리지을 뿐만 아니라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도전에도 쓰인다. 이 점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당신의 매일은 일이 주어지고, 봉급을 받기 위해서 징역과 다름없는 마음으로 일을 한다. 그런 매일을 보낸다면 청년이 될 때쯤 해서는 두뇌도 오체도 완전히 숨통이 막혀 버리고 말 것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먹기 위해, 살기 위해서는 일해야지..."하고, 집에서 내쫓긴다. 그러니 "이제 지긋지긋하다. 빨리 죽어 버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마저 드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다. 그런 상태로 장수를 한다고 해서 도대체 무엇하겠는가.
  똑같이 청년이 되어도 "겨우 이제야 자유로운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고 기뻐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러자면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으니 4시간 수면을 실천해서 심적으로나 지력으로나 그리고 체력으로나 여유를 갖지 않으면 안된다.
  4시간 수면의 생활이란 잠들어 있는 4시간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깨어 있는 20시간을 문제삼는 것이다. 물론 깨어 있는 시간이라 해도 단지 시간만 문제삼는다면 4시간 수면자의 20시간과 8시간 수면자의 16시간 사이에는 큰 차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봉급을 받기 위한 징역에 해당하는 8시간, 왕복의 통근에 소요되는 3시간, 잡스러운 2시간을 제외하면 결국 4시간 수면자는 7시간, 8시간 수면자는 3시간이 남는데 그 차이는 두배 이상이나 된다.
  따라서, 자유로이 살아가려면 이 시간을 어떻게 살려 가느냐에 달려 있다.
  스스로의 인생을 스스로 살아간다는 문제에 있어서 꼭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은 해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에 여유가 있으면 하찮게 생각되는 일까지도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반복할 수 있으므로 생활상에 있어 구석구석에 이르도록 일체의 불안 요소가 사라지게 된다. 즉, 단순한 속박에서의 해방뿐만 아니라 불안에서도 해방된다.
  불안에서의 해방은 즉, <깨달음>인 것이다. 망설임과 번뇌속에서 구제받기 위해 평생을 바치는 사람이 많은 이 세상에서 <깨달음>을 가지면서 인생을 지낼 수 있다면 그것은 마음 속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최고의 장수라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한 평생 서로 미워하고 지낼 바에는 부부가 되지 않는 것이 낫다. 모처럼 주어진 형제이면 한 평생 서로 돕고, 서로 존경하며 지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이다.
  아무튼 평생을 살아갈 인생이라면 <깨달음>의 경지에서 장수를 누려야 한다. 마음에 불안이 없으면 병도 나지 않는다. 밝은 가정에는 항상 복이 있다. 가난해도 나누어 가질 수 있으면 만족이 생긴다. 즉, 4시간 수면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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