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my blog with Bloglovin FraisGout: 제5장 누가 인생을 가장 즐길 수 있는가

제5장 누가 인생을 가장 즐길 수 있는가

    1. 그대 자신을 발견하라: 장자

  근대 사회에서는 철학자란(가령 그러한 인간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아마도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 받고 있거나, 또는 가장 무시당하고 있는 인간이다. (철학자)라는
말은 단순히 사회적 존칭이 되고 말았다. 까다롭고 외고집스런 사람을 누구나
철학라고 부른다.
  또한 현실 생활에 초연한 사람도 누구나 철학자라고 부른다. 후자의 뜻이라면
조금은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셰익스피어가 (뜻대로 하세요)라는 작품 속에서
터치스톤에게 (목동이여, 그대는 철학이라도 갖고 있는가?)라는 말을 하게 하고
있는데, 그것은 후자의 뜻으로 쓰여지고 있는 것이다.
  이 뜻으로는 철학이라는 말은 자연과 인생 전반에 관한 평범하고 조잡하며 흔해빠진
사고 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정도의 것이라면 누구나 조금은 갖고 있을 것이다.
현실의 모든 모양을 그 표면적인 가치면에서 바라보기를 거부하거나 또는 신문에
씌어진 말을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조금은 철학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그는 남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 인간인 것이다.
  대개 철학에는 깨달음에서 오는 진짜 맛이라는 것이 언제나 따르게 머련이다.
철학자가 인생을 바라보는 방법은 화가가 정치를 바라보는 것과도 같아서 베일이나
안개를 통해서 바라보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현실 그대로의 또렷또렷하고 생생한
물상이 조금은 흐려지게 되므로 오히려 현실의 대의를 쉽사리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중국의 예술가나 철학자의 사고 방식은 이러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철학자라는
것은 그날그날 자기에게 필요한 일에 얽매여 안달을 하며, 그 성패득실만이 진정한
것이라고 굳게 믿는 철저한 현실주의자와는 정반대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같은 사람은 사물에 대해 의문을 가져 보는 일조차 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고 어떻게 할 수도 없다고 하겠다. 그러기에 공자는 말하기를 (어찌하면
좋은가, 어찌하면 좋은가 하고 스스로 말하지 않는 사람은 나 역시 이러한 사람을
어떻게도 할 수가 없다)  이 말은 내가 공자의 말 가운데서 여간해서 찾아 보기 힘든
의식적인 해학의 하나이다.
  나는 이 장에서 중국의 철학자들이 생각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생활 방식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이들 철학자들의 생각은
저마다 다르지만 그런 만큼 또한 일치되는 점이 있는 게 사실이다. 즉 인간은
현명해야만 하며 유쾌한 생활을 보내기를 망설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맹자의 생각은
적극적인 것으로 보이고 노자의 생각은 교활한 평화주의로 보이지만, 그런 만큼 이
양자의 생각은 이른바 중용의 철학 속에 하나로 융합되고 만 것이다.
  대체로 나는 이 철학을 일반 중국인의 종교라고 생각한다. 활동과 무활동이라는
서로 모순되는 생각은 일종의 타협, 바꾸어 말하면 이 땅 위에 만들어진 극히
불완전한 천국에 만족한다는 생각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이에 비로소 현명하고
명랑한 생활 철학이 생겨나고, 마침내는 중국의 모든 역사를 통하여 가장 큰 시인이며
가장 높은 조화된 인격자라고 생각되는 도연명의 생활에서 그 전형을 찾아보게 된다.
  모든 중국의 철학자들이 어쨌든 중요한 일이라고 한결같이 무의식 중에 생각한 오직
하나의 문제는 어떻게 인생을 즐길 것이며, 또 어떤 사람이 가장 인생을 즐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이른바 완전주의는 아니다. 바라서는 안되는 일을 굳이
알아내려는 것도 아니다. 때가 오면 속절없이 죽어야 하는 이 불쌍한 인생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평화롭게 일하고, 훌륭하게 참고 따르며 즐겁게 살려면 생활을
어떻게 계획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을 문제로 삼는 것이다.
  도대체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이것이 맨 처음 부딪치는 문제이다. 그리고 또한
이는 거의 답변을 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상 생활에서 살아가기 위해
분주히 뛰어다니는 우리네 자신은 결코 참된 자기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에 우리는
모두 같은 뜻을 나타낸다. 그저 단순히 이 세상에 사는 것만을 찾는다면 무언가 좀
모자란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믿는 일이다. 여기에 무엇인가를 찾아서 들판을
뛰어다니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향하여
(자아, 이 문제를 풀어 보시오)하고 현자는 어떤 어려운 문제를 내놓을 수가 있을
것이다. (저 사람은 무엇을 잃었는가?) 어떤 사람은 시계라고 할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다이아몬드 부로우치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밖의 사람들도 여러 가지로 상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 모두 틀린 것이다.
  한 현자는 그 사람이 무엇을 찾는지는 모르지만 대중을 향해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당신네들에게 가르쳐 주겠다. 저 사람은 무언지 매우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것이오)라고. 그의 말이 옳았다는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생활에 쫓겨 분주히 돌아가는 동안에 가끔 참된 자기의 모습을 잊기가 쉬운
법이다. 그것은 마치 사마귀를 노리는 새가 자기의 몸에 닥쳐오는 위험을 알지
못하고, 사마귀는 사마귀 대로 다른 먹이를 노리느라고 자기 몸이 위험한 지경에 놓여
있음을 잊어버리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맹자가 공자의 웅변을 이어받아 더욱 보충한 것처럼, 장자는 노자의 뛰어난 웅변을
이어받은 이었다.
  두 사람이 다같이 그들의 스승과는 백 년이나 뒤에 태어난 인물이었다. 노자가
아마도 공자와 같은 시대에 태어난 인물었던 것처럼 장자는 맹자와 같은 시대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맹자와 장자는 다음과 같은 점에서는 일치되어 있다. 즉 인간은
무언가 중요한 것을 까맣게 잊고 있으니까 철학이 추구해야 할 일은 잃은 것, 즉
여기서는 맹자가 주장하는 이른바 (갓난아이의 순진한 마음)을 발견하여 다시 되찾는
데 있다고 했다. 맹자는 말하고 있다. (위대한 인물이란 그 어린이 때의 순진한
마음을 잃지 않는 사람을 뜻함이다)
  맹자는 문명의 기교적인 생활이 인간이 나면서부터 타고난 젊고 싱싱한 마음에 주는
영향을 숲의 나무를 마구 자르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우산의 숲은 일찌기 매우 아름다왔다. 그러나, 큰 도시 근처에 있어 나무꾼들이
마구 나무를 자르니 이제는 더 이상 어찌 아름답다고 할 수 있겠는가. 밤과 낮이 숲에
휴식을 주고 비와 이슬이 땅을 기름지게 하여 땅에서 쉴새 없이 새싹이 돋아났으나
또한 소와 양떼들이 마구 거닐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산은 저와 같이 벌거숭이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 헐벗은 모습을 보고 일찌기 큰 나무는 없었던 것으로 생각하나,
이 벌거벗은 지금의 모습이 어찌 산이 지닌 참다운 본성이라 할 수 있는가. 사람으로
태어난 자에게도 어찌 인의가 없겠는가. 양심을 놓아 버리게 되는 까닭도 또한 도끼가
나무에게 한 것과 같은 것이다. 날마다 이것을 베어낸다면 어찌 타고난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낮과 밤이 편안히 쉬게 하고 몸을 기름지게 하여 건강을
유지하게 하지만, 그 좋고 나쁨이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서기 어려운 것은 인간이 낮에
행한 악은 이를 다 소용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인간이 타고난 본성을 쉴새없이
도끼질 하면, 밤 동안에 취한 휴식과 건강의 회복이 아무 소용도 없게 되며, 밤
사이에 취하는 휴식이 전혀 효험이 없게 되면 그 인간은 짐승과 별로 다를 바 없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 소행이 짐승과 다름이 없는 것을 보고 그에게는 일찌기
인간다운 참된 마음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찌 이것이 그가  타고난 진짜
본성이겠는가.

  위의 말은 맹자가 한 말이다.



    2. 정, 지, 용: 맹자

  인생을 가장 즐길 수 있는 이상적인 이상적인 성격은 마음에 온정을 지녀 대범하여
근심이 없고, 더우기 용기 있는 성격이다. 맹자는 그가 말하는 이른바 (대현)이
갖추어야 할 성덕(mature virtues)으로서 세 가지 덕을 들었는데 (지, 인, 용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인(compassion)이라는 말의 첫음절을 떼어 버리고 정(passion),
슬기(wisdom), 용기(courage)를 위대한 인물이 지녀야 할 성품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다행히 영어에는 패션(passion)이라는 말이 있어서 중국어의 정이라는 말과 매우
비슷한 뜻으로 쓰여지고 있다. 두 말이 다 성적 열정(sexual passion)이라는 좁은
뜻에서 나왔지만, 그러나 이 두 말은 그보다도 훨씬 넓은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장조가 말했듯이 (정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이성을 사랑하지만, 이성을 사랑하는
사람이 언제나 정이 있는 정이 있는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다)  또는 (정은 인간
세계의 밑바닥을 바치고 있는 것이지만 재는 그 지붕을 채색하는 것이다)
  대체로 정이라는 것이 없다면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인생의 정기, 빛나는 별빛, 음악의 곡조, 꽃이 주는 기쁨, 새의 깃, 여성의
아름다움, 학구적인 생활, 이것들 모두 정의 정다운 표현인 것이다. 표현이 없는
음악을 생각할 수 없듯이 정이 없는 마음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정이야말로
유쾌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따뜻한 마음과 풍부한 생명력을 주는 것이다.
  중국의 문인들이 정이라고 부르는 말을 패션이라는 말에 들어 맞추어 표현하는 것은
어쩌면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패션이라는 말보다 조용하고, 거친 파도와 같은
정열이라는 격한 뜻이 비교적 적은 센티먼티(sentiment)라는 말로 되풀이 해야 하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왕년의 로맨티스트들이 센시빌리티(sensibility)라고 부른
그 말과 같은 뜻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이는 따사롭고 넓고 넓은 예술가적인
심정 속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 패션이라는 것, 또는 그보다는 좀더 나은 말인 센티먼트라는 것을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조금은 갖고 있는 것이어서, 부모를 자기 마음대로 골라 잡을 수 없듯이 본디
몸에 갖추어진 차가운 성질이라든가 따뜻하 마음씨라든가를 우리들ㄹ은 저마다 갖고
있다. 이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기도 하다.
  한편 또한 마음속까지 차가운 성질을 갖고 태어나는 어린이란 아무데도 없다.
우리들이 따뜻한 마음씨를 잃게 되는 것은 다만 젊었을 때의 젊고 싱싱한 심정을 잃게
되는 정도에 의할 따름이다. 중년이 되면 우리가 지닌 다감한 성품은 무자비한 주위
환경 때문에 없어지고 숨이 막히고 냉각되어 또한 움츠러드는 경우가 있다.
  그렇게 되는 이유의 대부분은 이같은 순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지 않는 우리의
게으름 때문이거나, 또는 무자비한 환경의 영향을 피할 힘이 없기 때문인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경험을 배워가는 동안에 외부 세계의 많은 힘이 우리가 타고난
천성에 작용하여 이로 말미암아 자기 자신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기교적으로 만들고,
때로는 냉혹하기 이를 데 없이 무정하게 만드는 것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살아가는 경험을 많이 쌓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게 될 무렵에도 신경은
한층 더 둔감해지고 마비되어 버리게 된다.
  정계와 실업계에서는 특히 이런 경향이 심하다. 그 결과 누구라도 닥치는 대로
제쳐 놓고 자기만이 앞장서서 달리는 무시무시한 (억척꾸러기)가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강철 같이 굳은 의지와 굳센 결의만은 있지만 인간적인 따뜻한 마음씨는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어 겨우 그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인 그런 사람도 있다. 이런
사람에게는 정다운 맛 따위는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이상주의나, 한낱 감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내가 경멸하고 싶은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이 세상에는 마음이 차가운 사람이 너무나도 많다.
  만일 단종이라는 것을 나라의 정책으로 행한다면 도덕적으로 무감각한 인간, 미적
감이 썩어빠진 사람, 정감이 우둔하기 이를 데 없는 사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잔인 냉혹한 방법으로 출세하는 사람, 도저히 구제할 길 없는 냉혈한, 또는 세상
살아가는 데 아무런 흥취도 느끼지 못하게 된 사람, 그러한 사람들을 우선 단종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격한 생활로 정신병자가 된 사람이나 그 희생이 된 사람보다도
오히려 이런 사람들을 먼저 단종시켜야 한다. 열정이나 감상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리석은 짓이나 터무니없는 일을 저지를지는 모르지만, 인간에게 그런 성품이 없다면
우스꽝스러운 것이어서 한 조각의 만화에 지나지 않는다.
  자 도데가 그린 사포(Sappho)에 비하면, 이러한 인간들은 벌레나 기계나
자동인형이나 아니면 땅 위에 버려진 하나의 더러운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매춘부
가운데는 성공한 실업가보다도 마음이 훨씬 고상한 사람이 많다. 사포가 죄를
저질렀는지는 모르지만 도대체 그것이 어쨌다는 것인가. 과연 그녀는 죄를 짓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을 사랑했다. 강하게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지은 죄는 대채로 용서해 주어야 한다. 어쨌든 그녀는 현대와 다름없는 몹시
살기 힘든 가혹한 사회에 태어난 여인이었지만, 자 수많은 백만 장자에 비하면 훨씬
젊고 싱싱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막달라 마리아를 숭배하는 일도 좋은 일이다.
정열이나 감상적인 성품을 지녔기 때문에 언젠가는 죄값을 치러야만 하는 잘못을
저지러게 되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는 죄를 지은 어머니가 그 죄 때문에 때로는 오히려 보다 훌륭한 사랑의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일도 있다. 또는 세상에 흔히 볼 수 있는 엄격하고 준엄한 사람들처럼
까다롭게 일생을 보내지 않고 가족들과 좀더 즐거운 생활을 했더라면 좋았겠다고
늙은 뒤에 후회하는 어머니도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일찌기 친구에게서 들은 일이
있는데, 일흔 여덟은 살이 된 어느 노파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고 한다.
  (지나간 78년의 생애를 뒤돌아보고 제 자신이 죄를 졌을 때를 회상하는 것은 그래도
즐겁습니다. 하지만 제가 어리석었다고 생각하면 이 나이가 되어서도 제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같이 따뜻하고 너그러운 아량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 나가려면 하나의
철학으로 몸을 지켜야만 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가혹하기에 온정만 가지고는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은 슬기와 용기에 결부되어야만 한다. 내 생각으로는
슬기도 용기와 같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용기란 인생을 보다 잘 이해하는
데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생을 완전히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용기가 있다. 그것은 어쨌든 우리에게 용기를 갖게 해주지 않는 슬기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것이다. 우리가 어리석은 야심을 부정하고, 사상에 관한 것이건, 생활에 관한
것이건 간에 일반의 세상 사람들이 사로잡히기 쉬운 망집을 벗어남으로써만 슬기는
용기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많은 망집이 있다. 중국의 불교도들은 갖가지 작은 망집을 두 개의
크다란 망집으로 분류했다. 명성과 부귀가 바로 그것이다.
  전해져 내려오는 옛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건륭 황제가 남중국으로 여행을 하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올라가 많은 돛단배가 부지런히 지나해를 오가는 것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때 황제는 곁에 있는 신하를 돌아다 보며 저 몇 백 척의 배
속에 타고 있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신하는
대답하여 말하기를 (두 척의 배가 보일 따름이옵니다. 배의 이름은 명성, 부귀라고
하옵니다)
  많은 교양 있는 사람들은 부의 유혹은 쉽게 물리칠 수 있다. 그러나, 명성에 대한
유혹을 물리치는 것은 매우 위대한 사람이 아니면 할 수 없다. 옛날 어떤 스님이
세속적인 번뇌의 두 개의 원천에 대하여 그 제자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명성을
얻고 싶은 욕망을 버리기보다는 금전을 얻고 싶은 욕망을 버리기가 보다 쉬운 것이다.
조용히 물러나 있는 학자나 스님조차도 여전히 자기네 둉료들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이름을 떨치기를 원하는 것이다. 많은 청중이 있는 공적인 자리에서 설교를
하고 싶어하며, 너와 나와 단둘이 있는,  스승도 하나 제자도 하나인 이런 작은
절에서 숨어 살려는 생각을 하지 않는 법이다)  그러자 제자가 대답했다. (스님,
정말로 그 말씀이 옳습니다. 스님이야말로 명성을 얻으려는 욕망을 이겨내신 오직
유일한 분이십니다)  그러자, 스님은 빙그레 웃었다는 것이다.
  내 자신의 눈으로 인생을 살펴 보면 인간에 지닌 망집에 대한 이와 같은 불교도적인
분류는 완전하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인생의 큰 망집은 두 종류가 아니라 세
종류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즉 명성, 부귀, 그리고 권력. 이 세 가지의 것을 하나의
커다란 망집으로 한데 묶어주는 꼭 알맞은 말이 미국에 있다. 그것은 이른바
(성공)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많은 슬기로운 사람들은 이미 알고 있는 일이지만 성공
즉 명성, 부귀에 대한 욕망이라는 것은 실패와 가난과 무명에 대한 두려움을 모나지
않게 표현한 말이며, 이같은 두려움이 우리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이미 명성과 부귀를 얻은 뒤에도 여전히 계속해서 사람을 지배하려고
버티는 사람들이 꽤 많다. 이러한 사람들은 자기의 나라를 위하여 그들의 생활을
바치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 희생은 때로는 너무나 큰 경우가 많다.
  이에 다음가는 사회적인 망집이 여기 또 하나 있다. 강력하고 일반적인 망집으로서
남에게 멋지게 보이고 싶어하는 체제가 바로 그 생각이다. 자기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려는 용기를 가진 사람은 사실 매우 드물다.
  그리스 철학자였던 데모크리스토는 이렇게 생각했다. 자기는 두 개의 크다란
두려움, 즉 신에 대한 두려움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압박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켜
주는 것이므로, 위대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죽음과
신에 대한 두려움과 같이 보편적인 또 하나의 두려움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지는
않는다. 즉 그것은 이웃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다. 신이나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된 사람일지라도 이웃 사람들, 즉 인간에 대한 두려움에서 놓여 나온 사람은
많지 않다. 의식하고 있든, 의식하고 있지 않든 간에 우리는 모두가 세상 사람들에게
인전받는 역할과 차림을 하고 연극을 하는 인생의 배우인 것이다.
  연극적인 재능은 그 재능의 일부로서 관계가 깊은 흉내내는 재능과 함께 우리가
우리네 조상인 원숭이들로부터 물려 받은 습성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남에게 보여주고 싶어하는 인간의 습성에서 비롯되는 이점이 여러 가지 있는 것은
사실이다. 즉 가장 눈에 띄기 쉬운 것이 관중의 갈채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갈채가 큰 만큼 무대 뒤에서의 걱정도 한층 더 크다. 그러나 그것도 또한
사람이 살아나가는 하나의 생활 양식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관중들이 기뻐하는 체제로
자기가 맡은 구실을 다했다고 한들 하나도 부끄러워 할 일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반대할 만한 것은 배우가 인간의 자리에 대신 들어 앉음으로써 본디의
인간의 모습이 완전히 잃어지고 마는 것이다. 명성이 있더라도,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더라도, 다만 언제나 웃음을 띤 채 본디의 자기의 모습을 바꾸지 않는 그러한
산택된 인물은 많지 않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연극은 어디까지나 연극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는 사람인 것이며, 지위라든가 직함이라든가 재산이나 부귀 따위의
이위적인 환각에 사로잡히지 않는 인물로서, 자기에게 찾아오는 것은 언제나 너그러운
미소로써 받아들이고 자기만은 여느 사람들과는 좀 색다른 존재라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들인 것이다. 그들의 개인 생활에서 본질적으로 간소한 생활을 보낼 수 있는
사람은 이와 같은 계급의 사람들인 것이며, 이같은 사람들이야말로 진실로 위대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무릇 간소하게 지낸다는 것이 언제나 진실로 위대한 사람의 징표가 되는 것은,
그들이 앞서 말한 여러 가지 환각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무엇이 가장
불쌍한가 하면 자기가 뛰어난 인물이라는 환각에 사로잡혀 있는 보잘것 없이 초라한
시골 관청의 공무원이라든가, 보석을 여봐란 듯이 자랑하는 벼락부자 출신인 사교계의
여인, 불후의 작가 대열에 끼게 되었다고 확신하며, 삽시간에 여태까지 해온 간소하고
자연스러운 생활을 잃어버린 뜨내기 작가 만큼 더없이 불쌍하고 보잘것 없는 존재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연극적인 본능은 이같이 심각한 것이기 때문에 때로 무대에서
떠나서 생활하는 것을 잊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마에 땀을 흘리며
일하면서 이 인생을 살아가지만, 그것도 참된 인간의 본능에 따라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중국의 속담에
있듯이 (다른 여인의 결혼 의상을 짓고 있는 노처녀)와도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3. 냉소, 대우, 도회: 노자

  매우 성질이 비뚤어진 노자의 (노회(원문: The old roga. 늙고 교활하다는 뜻))
철학은 옛부터 중국의 최고 이상인 평화, 너그러움, 소박함, 지족(만족할 줄 안다는
뜻)의 정신이 밑바탕이 되어 왔다. 이것은 얼핏 보기에 매우 역설적으로 보이지만
사실이다. 이와 같은 가르침에는 어리석은 사람이 지닌 슬기, 도회의 이점, 약자의
힘, 또한 진실된 뜻에서의 회의에 철저한 사람이 지닌 소박함 등이 포함되어 있다.
  나무꾼이나 어부들의 자연 생활에 대한 시적인 환상과 찬미에 가득차 있는 중국
예술은 이와 같은 철학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중국인이 지닌 평화주의 밑바닥에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조금의 손실을 보는
것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고 해운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편이 좋다는 생각이 있는
것이며, 그것은 다음과 같은 신념에 의거한 것이다. 즉 만물의 운행은 스스로 정해진
바 있어, 자연의 동과 반동의 법칙에 지배되고 있는 것이므로 영구적으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도 없고 일생 동안 구렁텅이에서 헤어날 수 없는 대우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뛰어나게 훌륭한 지혜는 얼른 보기에 어리석음과 같고,
  뛰어난 능변은 말더듬이와 같다.
  떠들썩함은 추위를 이겨내고
  고요함은 열을 이겨낸다.
  창정은 천하의 정이니라.

  자연의 섭리에는 영원히 남보다 뛰어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도 없고, 평생
동안 머리를 쳐들지 못하고 죽어 지내는 큰 바보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그
당연한 결론으로서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무슨 일이고 서로 다툴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노자의 말을 빈다면 어진 사람은 (그 다투지 아니함으로써 천하,
또한 그와 다투는 일이 없도다)  또한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폭력을 쓰는 자로서 그 종말이 좋은 자가 없으며,
  있다면 내 그를 스승으로 삼으리라.

  현대의 필자라면 아마 여기에 이렇게 덧붙여 쓸 것이다.
  (비밀 경찰의 도움 없이도 독재를 유지할 수 있는 자가 있다면 데려다 주오. 내
그의 부하가 되리라)  그렇기 때문에 너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천하에 도가
행해지지 않으면 말은 전투용으로 훈련되고, 도가 행해지고 있으면 말은 분뇨차
끄는 것으로 길들여진다)

  뛰어난 전사는 성급히 앞으로 나가지 않으며,
  잘 싸우는 병사는 함부로 노여움을 드러내지 않는다.
  위대한 정복자는 남의 병력을 빌어 옴이 없이 이기도다.
  사람을 잘 부리는 자는 마치 자기가 부림을 당하는 자보다 못한 듯이 행한다.
  이를 남과 다투지 않는 데서 생기는 덕이라고 하며,
  이를 남의 힘을 부리는 법이라 하며,
  이를 하늘의 순리를 따르는 것이라 하여
  아주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비법이다.

  동과 반동의 법칙은 힘을 튕겨 물리치는 힘을 낳게 한다.

  도로써 지배자를 돕는 사람은
  병력으로써 천하를 억지로 정복하지 않는다.
  이런 일은 천하 인심을 잃게 하기 때문이다.
  군마가 머무는 곳에는 가시덤불이 자라고 대군을 일으킨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든다.
  그러므로 명장은 자기의 목적을 이룬 뒤에는 곧 군대를 거두며
  자기의 승리의 이점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는 법이다.
  목적을 이룰 뿐 자기가 성취한 일을 영광스럽게 여기지는 않는다.
  목적을 이룰 뿐 자기가 성취한 일을 뽐내지는 않는다.
  목적을 이룰 뿐 자기가 성취한 일로 해서 교만해지지는 않는다.
  목적을 달성하되 부득이한 일만 행하며 폭력을 씀이 없이 목적을 이룬다.
  한참 기운차게 성한 때가 있으면 또한 힘이 빠지고 쇠잔해지는 때도 있다.
  이를 지키지 않음은 도를 어김이니 도를 어기면 곧 멸한다.

  중국인의 평화주의는 몽상적인 박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그런 평화주의가 아니라,
노회 철학에 의한 평화주의인 것이다. 보편애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학고 부동한
현묘한 지혜에 기초를 둔 것이다.

  끝에 가서 줄어들게 하고자 한다면
  우선 이를 팽팽하게 해야 하며,
  약하게 하기를 원한다면
  우선 튼튼하게 만들어야 한다.
  무너뜨리려면 우선 이를 단단히 일으켜 세워야 하며,
  빼앗으려면 우선 주어야 한다.
  이를 가리켜 미명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약한 것은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다.
  물고기는 연못을 떠나지 않게 함이 좋으며,
  나라의 이기는 이를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간직해야 한다.

  약자가 지닌 힘, 평화애의 승리, 스스로 몸을 낮게 하는 이로움을 노자만큼
효과적으로 이야기 한 사람은 일찌기 없었다.
  노자에게 있어서는 물은 약자의 힘의 상징이었다. 조용히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져서
바위에 구멍을 뚫는 저 물, 스스로를 가장 낮추려는 위대한 노자와 같은 지혜를
갖추고 있는 저 물.

  강과 바다가 능히 여러 개의 작은 개울의 왕이 된 까닭은
  자기를 낮추어 흘러내림으로써 능히 왕이 된 것이다.

  이에 못지 않게 세상에 널리 알려진 것은 이른바 (곡)의 설로, 곡이란 공동, 만물의
자궁 또는 모체, 현 또는 암컷의 이름이다.

  곡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가리켜 현빈이라 한다.
  현빈의 문
  이를 천지의 근이라 한다.
  면면히 존재하는 것과 같으며
  이를 아무리 써도 따르지 못한다.

  동양 문명의 암컷은 원리를 대표하고 서양 문명은 수컷의 원리를 대표한다고 해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어쟀든 자궁이라는 말과 중국인이 말하는 이른바
수동적인 힘으로서의 곡이란 말 사이에는 굉장히 서로 비슷한 데가 있다. 노자의 말을
빈다면 (천하의 곡이 되면 상덕을 갖춘 게 된다)고 하였던 것이다.
  나는 노장사상의 고설을 짧게 간추려 다음과 같은 싯귀를 지었다.

  우자에는 슬기가 있고
  유장에는 아름다움이 있으며,
  노둔에는 묘리가 있으며
  하위에는 이가 따르느니라.

  기독교도인 독자들에게는 흡사 산상의 설교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리고 산상의
설교와 마찬가지로 아마 별다른 감명도 받지 않을 것이다. 저 산상의 설교의 복음에
대하여, 노자는 (백치에게 축복 있으라, 땅 위에서 가장 행복한 자이기
때문이니라)라고 덧붙였는데, 진실로 능청스러운 말이 아닐 수 없다. 노자가 한
유명한 말 (뛰어나게 훌륭한 지혜는 얼른 보기에 모자람과 같이 보이며, 뛰어난
능변은 말더듬이와 흡사하다)에 따라 장자는 (소지를 떠나라)고 말하고 있다.
  8세기에 살았던 유종원은 자기 집 근처 산을 (어리석은 언덕)이라고 하고, 근처에
흐르는 강을 (어리석을 강)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18세기 사람인 정판교에게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이 있다. (어리석은 사람이
되기도 어려운 일이요, 똑똑한 사람이되기도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똑똑한 사람이
어리석음으로 들어감은 더욱 어렵다)
  중국 문학에서 어리석음을 찬미한 일이 그친 일이 없다. 이런 태도를 취하게 되는
예지는 일찌기 미국인도 다음과 같은 속어를 통해 이해한 일이 있다. (너무 지나치게
똑똑한 체하지 마라)  그러니까 가장 똑똑한 사람은 때로는 (멍텅구리)인 체하고 있는
사람 가운데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인적인 교양 가운데는 기괴한 현상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곧
자기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하는 높은 지성인 것이며, 또한 내가 알고 있는 한에서는
오직 하나의 무지한 복음과 옛사람들이 행한 바 있는 도회설을 발전시켜서, 생존
경쟁에서의 가장 좋은 무기로 삼는 높은 지성이기도 하다. 장자가 말한 이른바,
(소지를 떠나라)는 권고와 치인 예찬과는 그 차이가 별로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걸인이라든가 산림을 핑계삼는 선인이라든가 기승이라든가, 또는 도적수가 쓴
(명료자) 속에 나오는, 세상을 등지고 사는 괴짜들을 그린 중국의 그림이나 문학적인
스케치 가운데 언제나 반영되어 있다. 초라한 누더기를 걸친 반미치광이 중이
우리에게 있어 최고의 예지와 숭고한 품성을 나타내는 상징이 될 때, 이러한 인생에
대한 총명한 깨달음은 낭만적이며 종교적인 맛을 띠게 되어 마침내는 시적인 환상의
세계로 드나들게 되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유명한 우인들이 많다. 모두가 정말로 정신이 돌았거나 또는
미친 체하고 있는 사람들로서 굉장히 유명하여 일반 대중들이 좋아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에도 이를테면 저 바보로 유명한 송대의 화가인 미불이 있다.
미전이라고도 쓰는데, 그 자신이 (의부)라고 부르는 이상하게 생긴 바위 한 구석에
절을 하기 위해 예복을 입고 찾아간 일이 있은 뒤부터 이런 이상스러운 별명을 듣게
된 것이다.
  이 미불이라든가 유명한 원대의 화가였던 예운림은 더러운 것을 몹시 싫어하는
성질이 있었다. 그러니까 깨끗한 것을 굉장히 찾는 괴벽스러운 결백광이었다. 또한
이밖에도 유명한 기승이며 시인이기도 했던 한산이 있다. 그는 더벅머리에 맨발로
마구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절의 부엌에서 이상한 일을 하고 남은 밥을 얻어 먹으면서,
절이며 절 부엌의 벽에 불후의 시를 남겨 놓았다.
  중국인의 공상을 사로잡은 가장 위대한 기승은 물론 제전 또는 제공으로서, 이
스님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덧붙여지고 과장되어서 돈키호테의 세 배
가량이나 되어 오늘날까지도 끝날 줄을 모르는데, 이 많은 일화의 주인공인 그는
마법과 영약과 해괴와 술취한 세계에 살며, 수백 마일이나 떨어져 있는 다른 나라의
여러 도시에 하루 사이에 나타나곤 하는 선술을 체득하고 있었다. 그를 흠모하는
비석이 오늘날도 항주서호 근처에 있는 호포사에 서 있다. 이밖에도 정도는 작지만
16세기, 17세기에 살았던 위대한 낭만파의 천재들은 우리와 조금도 다름없이 훌륭하게
제 정신을 지닌 사람들이었지만, 그 기교한 생김새라든가 그들의 언행을 통해서
기인이니 광인이니 하는 인상을 일반에게 주기 쉽다. 이런 부류에 속하는 인물들로
서문장, 이탁오, 김성탄을 들 수가 있다(여기 인용한 맨 마지막 인물은 글자 그대로
(성탄)으로서, 자기가 태어났을 때 마을의 공자를 모신 사당에서 이상한 한숨 소리가
들렸다고 해서 자기 자신이 붙인 이름이다)



    4. 중용(Half and Half)의 철학: 자사

  아무것에도 구애됨이 없고 근심도 없는 무애 무우의 생활을 취지로 삼는 철학은
너무나도 번잡한 생활이나, 지나치게 무거운 책임을 지지 않도록 우리를 일깨워 주는
경향이 매우 강하며, 그러므로 인간이 지닌 행동욕을 없애버리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한편 현대인은 몸을 위하는 것이 될지언정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 이 철학의 신선한 바람을 쐴 필요가 있다.
  인간을 채찍질하여 아무런 소득도 없는 헛된 활동을 하게 하는 일로매진주의는
고금을 통한 온갖 견유철학에 비하면 그 인류에게 준 손해는 아마도 보다 큰 것이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이러한 철학에 언제나 반발하려고 하는 생물학적인
충동이 너무나도 많다. 그러므로 이 위대한 우유철학이 널리 행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부지런한 민족의 하나이다. 대다수의 인간은 견유
철학자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대다수의 인간이 철학자는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생각할 수 있는 한에서는 견유 철학이 대중 사이에
넓게 유행될 그런 위험은 매우 적다고 본다.
  노장 철학이 본능적으로 마음의 금선을 울리고 수천 년에 걸쳐서 영향을 미치고
모든 시나 온갖 산수화 속에서 우리를 뚫어지게 지켜보고 있는 이 중국에 있어서조차
부귀, 명성, 권력을 망신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자기 나라를 위해 일하려고 굳게
결심하고 또 그렇게 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으므로 우리네 인생을 명랑하게
살아나가는 것이다. 또 그렇지 않으면 이 세상을 살아나갈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중국인들이란 실패했을 때에만 남을 빈정거리거나 또는 시인이 되는 것이며, 중국
국민의 대다수는 모두가 훌륭한 흥행사들이다. 노장적인 냉소 철학의 영향은 중국인의
생활속도를 단지 느리게 하였을 뿐 천재나 실정을 겪게 되면 결국은 정의를 가져다
주는 (동과 반동의 법칙)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을 조장한다.
  그러나 이런 무애 무우의 철학, 즉 자연 우유 철학에 대립하는 정반대 되는
철학적인 영향이 중국인의 사상 전체 속에 있는 것이다. 이른바 자연적 신사의 철학에
대한 사회적 신사의 철학이다. 즉 노장 철학에 대한 유교다. 노장 사상과 유교가
인생에 대한 소극적인 견해와 적극적인 견해를 뜻하는데 지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중국 특유의 것이 아니라 온갖 인간성에 갖추어진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모두가
절반은 노장파, 절반은 유교파로 태어나 있다. 그러나 철저한 노장주의자가 된다면
그 논리적인 결론으로서 산 속으로 들어가 선인이나 세상을 등지고 사는 은둔자
생활을 하고, 나무꾼이나 어부와 같이 될 수 있는 대로 속세를 떠난 원시적인 생활을
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푸른 산의 주인인 나무꾼, 푸른 물의 임자인 고기잡이가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산봉우리에 걸린 구름에 반쯤 몸을 숨긴 노장파인 은자는
나무꾼이나 고기잡이를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다. 나무꾼과 고기잡이는 산은 영원히
푸르고, 물은 밤낮으로 흘러서 그치지 않으니 이것으로써 모든 것은 족하지 않소,
하고 한가한 이야기를 주고 받는 것이다. 이 초라한 두 사람의 이야기 벗들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산은 마냥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이런 조용한 세계에서 은자는
완전한 평화감을 체득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 사회에서 완전히 떠날 것을
가르치는 초라한 철학이다.
  이 자연주의보다는 좀더 훌륭한 철학이 중국에는 있다. 즉 휴우머니즘, 인간주의의
철학이다. 중국사상이 바라보는 최고 이상은 자기가 타고난 행복한 천성을 간직해
나가기 위하여는 인간 사회와 인간 생활에서 반드시 도피해 버릴 필요가 없는 사람을
말한다.
  도시 생활로부터 도피하여 산 속에서 홀로 사는 은자는 아직도 여전히 환경에
끌려다니는 2류급 은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대은은 시중에 숨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주위 환경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만큼 충분히 유유히 자기를 지키며
생활할 수 있는 힘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 사회로 돌아와 돼지고기를 먹고 술을 마시고 여자와 사귀나 자기
마음을 더럽히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고승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철학을 하나로 섞어 융합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유교와 노장
철학과의 모순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이며, 다만 양쪽 극단에서 출발한 교의이며,
이 양자 사이에는 많은 중간적인 단계가 있는 것이다.
  반 견유 철학자가 가장 위대한 견유 철학자이다. 결국 최고의 생활이란 (중용)의
저자이며 공자의 손자인 자사가 말하는 것과 같은 미묘한 사려 깊은 생활을 말한다.
인간 문제를 논한 동서고금의 철학을 훑어보아도 사물의 두 극단 사이의 어디엔가
있는 꼭 알맞은 생활을 하라는 가르침, 즉 가운데 또 가운데 이를테면 (중용)의
교의보다 더 뛰어나게 시원한 진리를 찾아낸 이는 아직 없다고 생각한다.
  반쯤 세상에 나타나고 반쯤은 숨어서 생활하는 사람이 간직하고 있는 이상 속에서
엿볼 수 있는 것은 활동과 무활동 사이의 완전한 균형에 도달하는 이 미묘한 심려의
정신이다. 다시 말해서 적당히 게으름을 피면서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일하고도
적당히 쉴 수 있을 정도, 집세를 내지 못할 만큼 가난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해서
조금도 일할 필요가 없을 만큼 부자도 아니며, 또 너무 돈이 많아서 그 때문에
오히려 (조그만 더 돈이 있었더라도 친구를 도와줄 수 있으련만) 하고 인정미 있는
일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도 아니요, 피아노는 있지만 그저 매우 가까운 벗들에게
들려 주거나 또는 주로 자기 혼자 즐길 수 있을 정도의 것이며, 골동품 수집을 하지만
수집품을 난로 선반 위에 늘어놓을 만한 정도이며, 책은 읽지만 지나치게 열중하지는
않고, 상당히 공부는 했지만 전문가는 되지 않았고, 글은 쓰지만 신문에 보내는
기고가 때로는 안 나오기도 하고, 때로는 실리기도 할 정도... 한마디로 말해서
중국인에게 발견된 가장 건전한 생활의 이상이라고 내가 믿는 것은 중산 계급의
생활이상이다.
  이것은 명조 말의 이밀이 지은 (중용가) 속에 잘 나타나 있는 이상이다.

      중용가

  이 세상 모든 중용이 으뜸이거니, 믿고 살아 왔네... 그러나 이상할손
  이 (중용)... 씹을수록 단맛이 나네.
  이렇게 되고 보면 무슨 일이고 중용을 택하여 당황하지 않고 서두르지 않으니
마음은 편하기 그지 없다.
  하늘과 땅 사이는 넓디넓은 것, 도시와 시골 사이에 살며
  산과 냇물 사이에 농토를 갖네,
  알맞게 지식을 얻고 알맞게 주인 되어
  적당히 일하고 적당히 놀며
  일가끼리도 알맞게 대하네.
  집은 너무 좋지도 않고 너무 초라하지도 않으며,
  가꾼 것도 절반이요 가꾸지 않음도 절반일세.
  입은 옷도 낡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너무 새로운 것도 아닐세.
  좋은 음식도 알맞게 먹으며
  하인들도 바보와 꾀보의 중간쯤이다.
  아내의 머리도 알맞을 정도로 영리하며
  그러고 보면 이 내 몸은 반은 부처요 반은 노자라고 할 만하네.
  이 몸 절반은 하늘로 돌아가고,
  너머지 절반은 이승에 물려주니,
  자식의 생각도 잊지는 않지만,
  죽으면 염라대왕에게 해야 할 말,
  이럴까 저럴까 궁리도 절반
  술도 알맞게 절반쯤 취하며
  꽃도 볼품은 반쯤 핀 것이 으뜸일세.
  돛도 반쯤 올린 배가 가장 안전하도다.
  말고삐도 절반쯤 느슨하고 절반쯤은 단단히 매며
  보물이 너무 많으면 걱정이 많고,
  가난하면 모든 일이 둔해지는 것도 세상 이치일세.
  인생은 쓰고도 단 것임을 깨닫고 보면,
  그 절반 맛이 가장 영리하다.

  이리하여 우리는 세상을 비양거리는 노장 철학의 냉소주의가 유교의 적극론과
하나로 융합이 되어 중용의 철학으로 변했음을 보게 된다. 어이없을 만큼
저돌맹진주의를 신봉하고 있는 유럽인들에게 있어서는 내가 말하는 것이 당장은
만족스럽지 못하게 느껴질지 모르지만, 인간은 실존하는 대지와 가공의 천국과의
중간에 태어난 존재인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최대의 철학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인간미가 있는 철학인 것이다.
  물론 이 사의에는 탐험가, 정복자, 대발명가, 위대한 대통령, 역사의 코오스를
바꾸는 영웅 등과 같은 다소의 초인이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지만,
그것은 그렇다고 하고 가장 행복한 사람은 간신히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게 되어
인류를 위해서 대단한 공헌은 없었지만 사회에서 다소의 일은 하였고, 사회에서
어느 정도 이름은 알려저 있지만 그다지 유명한 인물이 아니라는 그런 정도의
중산 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한 개인이 가장 행복을 느끼고 가장 처세를 능하게 해 나갈수 있는 것은 생활
걱정이 우선 없고, 그렇다고 전혀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닌 정도, 이름이 알려졌다면
알려졌고 알려지지 않았다면 않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의 상태, 약간의 재정 능력을
가진 조촐한 환경의 사람들이다.
  뭐니뭐니해도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아 나가야만 한다. 그러니까 철학을 하늘
나라에서부터 땅 위로 끌어내려야만 한다.



    5. 삶을 사랑하는 자: 도연명

  그러므로 인생에 대한 적극적인 견해와 소극적인 견해를 적당히 융합시킴으로써
조화 있는 (중용)의 철학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그것은 활동과 활동하지
않는 것의 중간에 산다는 것을 뜻하며, 성급하게 마음을 죄며 헛되이 애쓰는 일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인생의 책임으로부터 완전히 도피하지도 않는다는 뜻이며,
세계의 온갖 철학에 비추어 보더라도 이러한 사고 방식이야말로 가장 건전하고
행복한 처세 철학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사고 방식을 조화시키면 조화 있는 개성을
기를 수 있는 것으로서, 이 조화된 개성이야말로 인간이 갖추려고 하는 온갖 교양,
그리고 교육의 목표로서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주목해야 할 일은 이
조화된 개성에 의하여 우리는 인생의 기쁨과 사랑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인생애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알려면 어떤 우화에 대해서 이야기 하거나 아니면 진실로 삶을 사랑한 인물의 생애를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하는 편이 편한 것이다. 그래서 중국 문화가 낳은 최대의
시인이며, 최고의 조화적인 소산인 도연명은 중국 예술의 전역사를 통하여 가장
완전하게 조화된 원만하기 이를 데 없는 인격자였다고 해도 중국에서는 아무도 반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별로 높은 벼슬을 한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권세나 사회적인
공명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남아 있는 저술이라고 해 보았자 불과 몇 편의 시편과
두 서너 가지의 논문이 있는 데 지나지 않지만,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천 수백 년이나
지난 오늘날에도 도연명 그는 더욱 눈부시게 빛나는 빛이며, 후세의 군소 시인이나
문인들에게 최고의 인간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말해 주는 상징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의 샐활을 보면 그가 지었던 시풍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진지한 맛이 스며
나와 있어 그보다는 혈기 왕성하고 이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그에게 주어진 지위는 진실로 인생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알맞은
전형 바로 그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경우는 속세의 욕망에 반항한다고는 하지만 전혀
그 욕망에서 도피하지도 않고, 관능을 잊지 않는 생활과 잘 조화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약 2백 년 동안에 걸쳐서 문학적인 낭만주의, 한적한 노래 부르며
찬양하는 노장열, 즉 유교에 대한 반역이 유행했지만 마침내는 유교 철학과 협력하여
도연명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조화적인 성격의 출현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도연명의 사상을 살펴 보면 사물에 대한 적극적인 견해가 있기는 있지만
그 어리석은 자기 만족의 경지에서 벗어났으며 회의 철학은 본디 지녔던 그 준열한
반역성을 버리고(도로우에게조차 아직 그 냄새가 가시지 않아 미숙한 느낌이 든다)
인간이 지닌 예지가 비로소 관대한 해학의 느낌 속에서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볼 수 있는 것이다.
  도연명이야말로 저 현묘하고 특이한 중국인적인 교양을 나타내고 있는 인물이다.
그것은 육체에 대한 애착과 고답적인 정신, 금욕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는 정신성과
유육론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는 유물론의 불가사의한 결합인 것이며 거기서는 관능과
정신이 하나의 조화 속에 병립되고 있다. 짐작컨대 이상적인 철학자란 여성이 지닌
아름다움은 이해하나 아례를 잃지 않으며, 인생을 깊이 사랑하기는 하나 스스로
절도를 잃지 않으며, 속세에서의 성공과 실패가 다같이 허망함을 깨달아 세상 일에
초월하여 대관은 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속세를 적대시 하지 않는 선비를
말하는 것이다. 도연명은 정신면에서 성숙해진 결과 이와 같은 참된 조화의 경지에
이른 것이며, 거기에는 내적인 정신면에서의 상극 같은 것은 털끝만큼도 찾아볼 수
없었으며, 그의 생애는 그가 남긴 시와 같이 자연스럽고 솔직한 것이었다.
  도연명은 기원 4세기 말에 어느 뛰어난 학자이며 관리이기도 했던 사람의 빼어난
증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였던 분은 분주한 것을 즐겨한 사람으로 언제나 무슨
일이라도 하고 있어야만 했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면 한 무더기의 기와를 어떤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겼고, 오후가 되면 다시 먼저 있던 곳으로 다시 옮겨 놓곤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고 한다. 도연명은 그 청년 시대에 늙은 부모를 봉양하기 위해 보잘것
없는 공직에 있었던 일이 있으나 머지 않아 그만 두고 전원으로 돌아가 하나의
농부로서 스스로 밭을 갈았으나 마침내 병을 얻기에 이르렀다. 어느날 친척과
친구들에게 묻기를 (논과 밭을 유지하기 위하여 방랑 시인이 되어 돈을 벌며
돌아다니는 것이 내 성미에 맞지 않겠는가?)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친구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애쓴 보람이 있어서 구강에서 가까운 평택의 태수 자리 하나를 얻어
주었다.
  그의 유일한 약점은 술을 몹시 좋아한 점이었다.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으므로 그다지 손님과 만나는 일은 없었지만, 술만 있으면 비록 상대하는 주인과
전혀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라도 함께 술을 마시곤 했다고 한다. 또한 그밖의 경우
자기 자신이 주인인 경우라도 자기가 먼저 취하게 되면 언제나 이렇게 손님에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나는 취해서 자고 싶으니, 여러분들은 모두 돌아가시오)
  그는 현악기인 금을 한 틀 가지고 있었는데, 줄은 하나도 없었다. 금이라고 하는
것은 옛날 악기로서 굉장히 느리게 쳐야 하며, 마음이 조용히 맑게 가라앉았을 때에야
비로소 제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술을 마신 뒤에 음악적인 감흥이 일어나면 이
무현금을 어루만지며 흥취를 풀곤 했다.
  (이제 금의 진미를 맛보았거늘 어찌 줄 당기는 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을까 보냐)
  겸허하고 단순하면서도 꿋꿋한 성품을 지녔던 그였으므로 사람들과 사귀기를 몹시
귀찮게 여기곤 했다. 도연명을 숭배하던 강주의 자리 왕흥은 간절히 그와 친히
사귀기를 바랐으나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연명은 매우 순진하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내가 혼자서 이렇게 조용히 살고 있는 것은 본디 성품이 사교 생활에 맞지 않기
때문이오. 몸이 불편하기 때문에 이렇게 집에 있는 것이오. 세상 일에 뛰어다니는
명성을 얻기 위하여 이런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더욱 더 아니오)
  그 무렵 연명이 그 기슭에서 살고 있던 대려산의 산 속에는 선종에 속하는 고승들의
훌륭한 종단이 있어 대학자였던 승장인 혜원법사가 연명을 초청하여 그들의 종단
백련사에 가입하게 하려고 한 일이 있었다. 어느 날 연명은 산에서 사는 사람들로부터
초대를 받았는데 그가 술을 마셔도 좋다는 이야기였다. 불교도의 금주계를 깨뜨려도
상관 없다면 가겠다고 하여 그는 산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막상 단원으로서 이름을
적어 넣으려는 단계가 되자, 그는 이맛살을 찡그리고 떠나 버리고 말았다. 이 승단은
사령운과 같은 대시인까지도 가입하려다가 못했던 것이다.
  연명이 도망쳐 돌아온 뒤에도 승장은 여전히 호의를 보여 어느 날엔가는 또 하나의
노장과 친구인 유수정과 함께 연명을 술자리에 초대했다. 이리하여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는데 승장은 불교를 대표하고 연명은 유교를 대표하고 육수정은
도표를 대표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혜원법사는 날마다 산책할 때 호계교를 결코
건너지 않았다는 규칙을 엄히 지켰는데 그날은 친구와 함께 연명을 전송하느라고
걷다가 너무나도 재미있는 이야기에 넋을 잃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다리를 건너고
말았다고 한다. 뒤늦게 이 사실을 깨달은 세 사람은 크게 웃음을 터뜨리었다. 이 세
노인이 크게 웃는 모습은 호계 삼소도라고 해서 중국의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제가 되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아무 데도 구애됨이 없으며 근심 또한 없는
경지에 도달한 세 명의 현인들의 환담하며 기쁨을 즐기는 상징이며, 유교, 불교,
도교의 세 종류의 교의가 유우머이며 감각으로 통일되었음을 말해 주는 그림이다.
  도연명은 이와 같은 일생을 보냈다. 아무것에도 걸리는 것 없고, 근심 없는 한
가난한 농사꾼 시인, 현명하고 명랑한 늙은이로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그러나 술과
전원을 노래한 조그만 시집이나 그때그때 지은 두서너 편의 수필이며, 자손에게 보낸
한 편지, 희생자적 마음이 넘치는 세 수의 기도문(그 중 하나는 그 자신에 대한
글이었다), 또는 그의 후손에게 남긴 몇 가지 교훈들을 음미해 보면 완전무결한
자연스러움에 이르렀으며, 일찌기 그 어느 누구도 그를 능가할 수 없는 조화적인
생활에 대한 정감과 재능이 있었음을 볼 수가 있다. 기원 405년 11월, 태수의 자리를
물러나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마음을 정했을 때 그가 지은 귀거래사에 실려 있는
것은 것은 그가 지녔던 이 위대한 인생에 대한 사랑 그것이었다.

      (귀거래사)

  돌아가리라, 내 전원이 거칠어져 가거니,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내 마음이 육신의 종이 되었거니, 어찌 헛되이 홀로 슬퍼만 하리오.
  기왕에 지나간 일은 고칠 수 없음을 깨닫고 앞으로 닥칠 일을 바로 쫓아야 함을
아리로다.
  진실로 길 잃음이 아직 멀지 아니하였으니, 오늘의 생각이 옳고 어제 일은 모두
그릇되었음을 깨달음이라.
  배가 가볍게 물에 떠돌고, 바람은 산들산들 옷깃을 날리는도다. 지나는 길손에게
길을 물으니 새벽빛 희미함이 한스럽구나.
  곧 초라한 내 옛집 지붕을 바라보고 기쁜 걸음 재촉하노라. 하인들이 반겨 맞고
어린것들은 문 앞에서 기다려 주네.
  정원의 오솔길은 거칠어졌으나 아직도 국화와 소나무는 남아 있구나! 한손에 어린것
손잡고 방으로 드니 술 있어 통이 가득 차고야!
  술병 당겨 손수 따라 얼근히 취해 앞 나무 보니 얼굴 펴이네.
  남창에 기대어 편히 앉으니 방은 좁으나마 무릎 펴기에 이토록 편하고 쉬운 것을.
  날마다 거닐어 정원 정취는 익어가고 있으되 언제나 닫혀 있나니.
  늙은 몸 지팡이에 실어 고요히 거닐다가 때로 머리를 들어 먼 곳 바라보다.
  구름은 무심코 산 후미를 돌아오고 날기에 지친 새들은 돌아갈 것을 아는도다.
  해는 뉘엿뉘엿 지려 하는데 외로운 소나무 어루만지며 배회하네.
  돌아가리라! 모든 인연 깨끗이 끊으리라!
  세상도 나도 모두 잊었으니 나 어디에 무엇을 찾으랴.
  친척들과 나누는 정담을 기뻐하며 금과 서로써 시름을 없애리.
  농부가 나에게 봄을 알리니 장차 서쪽 밭에 할 일도 생기리로다.
  때로는 포장한 달구지도 몰고 때로는 작은 배에 노도 젓노라.
  때로는 조용한 못을 찾고 때로는 험한 산도 찾는도다.
  나무들은 기꺼이 무럭무럭 자라고 샘물은 졸졸졸 흐르기 시작하네.
  만물이 때를 얻었음을 좋아하는데, 내 인생은 장차 쉴 것을 느끼는도다.
  두어라! 내 몸을 이 세상에 두기를 얼마나 하겠기에, 가고 머무름을 마음대로
못하고 어찌 한가로이 어디로 가려는가.
  부귀는 내가 바라는 바 아니며, 권도는 기약할 바 아니다.
  좋은 때에 홀로 생각에 잠겨 거닐며 때로는 지팡이를 세워 밭도 갈리라.
  동고에 올라 마음껏 외치고 깨끗한 시냇물에 나아가 시도 읊으리.
  애오라지 조화에 따라 살다 다하면 돌아가리니, 그 천명을 즐기매 또 무엇을
의심하리.

  도연명은 (은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나 결코 그렇지는 않다.
  그가 피하려고 한 것은 정치였을 뿐, 인생 그 자체는 아니다. 만일 그가 교리를
존중이 여기는 인물이었다면 불교의 승려라도 되어 인생으로부터도 동시에 도망쳐버릴
결심을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위대한 인생애가 있었으므로 그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내나
아이들은 그에게 있어서는 너무나도 진실한 존재였다. 전원이며, 자기 집 뜰 안에
뻗은 나뭇가지며, 마음에 든 언덕 위의 외로운 소나무에는 모두 너무나도 애착을
느꼈으며, 이론가가 아니라 생각이 보다 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에게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인생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고 또 인생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다. 또한 그가
지닌 교양의 특징인 인생의 조화감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은 인생에 대한
적극적이지만 사려 있는 태도 때문이었다. 인생과의 조화에 가장 위대한 중국의 시가
솟아나온 것이다.
  이 세상에 속하고 이 세상에 태어난 인간으로서 그가 지닌 결의는 인생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때를 생각하며 홀로 거닐고 때로는 지팡이를 한 옆에
세워놓고 잡초도 뽑고 밭도 간다)는 것이었다.
  도연명은 단지 전원과 가족에게로 돌아왔던 것이다. 그가 구한 것은 조화였지
반역은 아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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