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my blog with Bloglovin FraisGout: 제6장 인생의 항연

제6장 인생의 항연

    1. 행복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즐거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우리들 자신의 즐거움, 가정 생활의 즐거움,
나무, 꽃, 구름, 흐르는 시냇물, 떨어지는 폭포, 그 밖의 삼라 만상을 보는 즐거움.
그리고 또한 어떤 모양의 형태로서 이루어지는 마음의 교류, 시가, 미술, 사색,
우정, 주고 받는 이야기, 책을 읽는 즐거움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든가, 유쾌한 모임을 갖는다든가, 가족끼리 단란하게 지낸다든가, 아름다운
봄날에 들놀이를 가는 즐거움처럼 그 형태가 뚜렷한 것도 있고, 시가, 미술, 사색의
즐거움과 같이 그다지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 것도 있다. 이들 두 방면의 즐거움을
물질적인 즐거움이니, 정신적인 즐거움이니 하고 나누어 부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선 나는 이런 구별을 믿지 않고, 둘째로는 이런
식으로 나누려고 하면 언제나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남녀 노소가 함께 모여서 소풍을 즐기는 장면을 보면 그들이 맛보는 즐거움이 어느
것이 물질적이고 어느 것이 정신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어느 아이는 풀밭
위에서 뛰놀고 있고, 다른 아이는 들국화를 따서 꽃줄을 만들며 놀고 있고, 어머니는
샌드위치 한 조각을 들고 있고, 삼촌은 맛있어 보이는 빨간 사과를 먹고 있고,
아버지는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을 올려다보면서 땅바닥에 누워 있고, 할아버지는 입에
파이프를 물고 있다. 그리고 이런 경우 대개 그 누군가가 축음기를 틀고 있을
것이고, 멀리서부터는 음악 소리나 파도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게 마련이다. 이들의
즐거움 가운데 어느 것이 물질적인 즐거움이고 어느 것이 정신적인 즐거움인 것일까.
샌드위치를 먹는 즐거움과 우리가 시취라고 부르는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는 즐거움
사이에 뚜렷한 선을 긋는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일까.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음악의 즐거움이 물질적이라고 말하는 파이프 취미보다 절대적으로 고급인
즐거움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물질적인 즐거움과 정신적인
즐거움을 구별한다는 것은 나에게는 난처한 일이며, 잘못된 생각이기도 하며, 그다지
현명한 생각이 아닌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것은 정신과 육체를 엄밀하게
구별하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참된 즐거움을 좀더 단도직입적으로 음미하지 않는
그릇된 철학에서 비롯된 생각이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내 설이 너무 지나치게
독단적인 것일까. 또는 인생의 목적은 본디 어떤 것인가 하는 문제를 논하는 데 있어
논점의 중심을 잘못 잡고 있는 것일까.
  나는 여태까지 생활의 목표는 그 참된 즐거움을 추구하는데 있다고 말해 왔다.
사실이 그러하니까 그렇다고 할 뿐인 것이다. 오히려 나는 (목표)니 (목적)이니 하는
말을 쓰기를 망설인다. 참된 즐거움을 주지로 하는 인생의 목표니 목적이니 하는
것은 인생에 대한 인간 본디의 태도 여하에 달렸다는 것과 같은 의식적인 목적은
아니다. (목적)이라는 말은 지나치게 공부라든가 노력이라든가 하는 말을 연상하게
한다.
  누구나 이 세상에 태어난 뒤 부딪치는 문제는 이제부터 노력해서 도달해야 할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 평균 오륙십년 동안의 인생을 어떻게 해서
살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이에 대한 대답이, 인생 최대의 행복이
무엇인지 찾아낼 수 있도록 생활을 규정해 가려는 것이라면, 그것은 주말을 어떻게
지낼 것인가 하는 것과 같은 문제이며, 대우주의 섭리 속에서 인간이 태어난
신비로운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내려는 형이상학적인 명제보다는 훨씬 더
실제적인 문제라고 생각된다.
  이와는 반대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덤벼든 철학자들은
처음부터 인생에는 목적이 있어야만 한다고 독단하여 덤비는 것이니까, 도대체
논리의 앞뒤를 잘못 잡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서구의 많은 사상가들이 너무나도
지나치게 파고 들어간 이 문제가 오늘날에 와 중요성을 갖게 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신학이 미친 영향에 의한다.
  우리는 모두가 너무 지나치게 설계니 목적이니 하는 것을 가정하고 있다. 사람들이
이 문제에 해답을 주려고 노력하고 이에 대해서 논쟁을 하지만 여전히 시원하게
알아내지 못하는 것을 보면, 이와 같은 문제가 완전히 헛수고에 그치는 불필요한
일임을 잘 알 수가 있다. 만일 우리네 인생에 처음부터 목적이나 설계가 되어
있다면, 그것을 알아내는 것은 그렇게 알기 힘들고, 막연하고, 성가신 것이 아닐
것이다.
  문제는 결국 둘이 될 것이다. 즉 신이 인간을 위하여 정해 놓은 신성한 목적이거나
아니면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하여 정한 인간적인 목적이거나, 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전자에 관한 한 나는 이 문제에 개입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신의 고려
속에 들어 있다고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모두, 반드시 우리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신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우리가 상상하고
있을 따름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지능이라는 것을 헤아려 짐작하는 것은 인간의
지능으로는 사실 곤란한 일인 것이다. 보통 이런 이론이 도달하는 마지막 결말은
신을 우리의 군대의 기수로 만들어서 인간과 똑같이 맹목적인 애국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다음에 두 번째 문제에 대해서,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지,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이것은 실제 문제이며 형이상학적인 문제는 아닌
것이다.
  인생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할 것인가, 라는 것이라면 누구나 자기의 생각이나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 판단을 들고 나올 수가 있다. 이 문제로 우리가 언제나
말다툼을 하는 것은 이상과 같은 이유에서이며 가치 판단이 사람에 따라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내 경우에 대해 말하면 그다지 철학적이 아니라 좀더 실제적이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인생에는 목저이나 의의가 꼭 있어야 한다고 고집할
생각은 없다. (이렇게 나는 살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월트 휘트먼도
말하고 있다. 살아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아마 앞으로도 몇 십 년이나
더 살아나갈 것이다. 여기에 인생이라는 것이 있다. 그것만으로 족하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문제는 매우 간단해져서 두 개의 다른 대답이 나올 여지는
없다. 오직 하나의 대답이 있을 뿐이다. 즉 인생을 즐기는 것 이외에 인생에 무슨
다른 목적이 있겠는가.
  모든 이교도 철학자에게 있어서는 큰 문제인 이 행복론을 기묘하게도 기도교적인
사상가들은 완전히 소홀히 취급하고 있다. 신학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큰 문제는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이 아니라 비장한 말이지만 인류의
(구제)라는 것이다.
  이런 말을 들으면 침몰되어 가는 배 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도저히 피할 길 없는 마지막 운명이라든가, 목숨을 건지려면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가 하는 것을 생각하는 심정이다. (멸망해 가는 두 세계의 마지막
탄식)(그리이스와 로마)이라고 말하는 기독교에는 오늘날까지도 아직 그 잔재가 남아
있다. 왜냐하면 구제라는 문제를 강조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어떻게 해서든지 구제를 받아 이 세상에
살고 싶다는 문제 속에는 완전히 잊혀지게 마련인 것이다. 멸망해 버린 운명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구제라는 것에 대해서 어째서 그토록 머리를 써야만 하는
것인가. 신학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구제라는 것에 너무 열중한 나머지
인생의 행복이라는 것을 그다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미래에 대해서 그들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모두 그저 막연히 천국이 있다는 것일 뿐이며, 인간은
천국에 가서 무엇을 하는 것인지, 천국에 가면 어떤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받게 되면 성가가 들려오고 백의의 천사가 날고 있다는 둥 매우 막연한 말을
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이다.
  적어도, 그 중 마호멧만은 향기로운 과일과 술이 가득하고, 검은 머리에 눈이 큰
정열적인 처녀들이 놀고 있는 천국의 행복을 그려내고 있다. 이것이라면 누구나 알
수가 있다. 천국이라는 것이 좀더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곳이 아닌 이상, 이 지상의
생활까지 잊고 천국으로 가려고 노력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누군가가 한 말이
생각난다. (내일의 암탉보다는 오늘의 달걀)이라고. 여름 방학을 어떻게 지낼까 하는
계획을 세울 때 적어도 우리는 이제부터 가려고 하는 고장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알아보는 노력을 기울인다. 만일 이때 관광 안내소가 아무것도 그 고장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면 도무지 그 고장에 대하여 흥미가 없다. 그렇다면 아무 데도 가지
않고 그냥 집에 가만히 있는 편이 낫다. 진보와 협력을 믿고 있는 사람들은 천국에도
진보와 협력이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 틀림없으리라고 나는 생각하지만, 우리는
천국에 가서도 부지런히 힘써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그러나 인간은 이미
완전한 존재인데 어찌 더 이상 노력하여 진보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단지
천국에서 빈들빈들하며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아무런 고생이나 걱정 없이 지내려고
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천국의 생활의 준비로서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
빈들거리며 노는 것을 배워 두는 편이 영리하지 않겠는가.
  만일 우리가 하나의 우주관을 꼭 가져야 한다면 모름지기 자아를 잊고 우주관을
인생에 한정시키는 것을 그만두는 게 어떨까. 좀더 우주관을 넓혀 생각하여 우리의
생각 속에 바위라든가 나무라든가 동물 등 우주 만물이 지니고 있는 의의까지도
포함시키는 게 어떻겠는가. 자연 현상엔 일정한 기획이라는 것이 있다(그러나 이
말은 내가 아주 싫어하는 목표니 목적이니 하는 말과는 그 뜻이 다르다)  내가
말하는 뜻은 자연 물상에는 하나의 규범이 있다는 것이며, 구극론으로서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 온 우주에 대해서 인간은 어떤 생각에 이르며, 그런 뒤에 우주에 대하여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자연과 자연 사이에 있어서
인간의 위치가 어떠한가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사고방식일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자연과 떼어 놓을 수 없는 일부이며,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기의 분수에 넘치는 터무니없는 짓을 계획하여 한달음에 결론에
이르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천문학, 지지학, 생물학, 역사는 모두 한결같이 우리에게
많은 재료를 공급하고, 공명한 사고 방식을 짜내게 해주는 것이다. 조화의 목적을
이와 같이 큰 규모로 생각한다면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는 조금 초라해지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는 인간이 차지하는 위치가 있으며 따라서
주위의 자연과 조화가 있는 생활을 한다면 인생 그 자체에 대하여 실제적이고 분별
있는 사고 방식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것으로 충분한 것이다.



    2. 행복은 관능적인 것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은 모두 생물적인 행복이다. 이런 사고 방식은 매우
과학적이다. 오해를 살 위험은 있지만, 이 점을 좀더 분명히 해 두어야만 하겠다.
되풀이해 두지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란 모두 관능적인 행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유심론자와 유물론자는 언제까지나 서로 오해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양자는 같은 언어로 말을 하지 않는다. 그렇지 않으면
같은 말을 하더라도 서로 다른 뜻을 가리키고 있다. 우리도 또한 이 행복 보전론
가운데서 유심론자에게 속아 넘어가야만 하는 것일까. 그리고 참다운 행복이란 다만
정신의 행복이라는 것을 승인해야 하는 것일까. 가령 한 걸음 양보하여 그들이
말하는 것을 승인하기로 하자. 그리고 곧 우리의 논지를 내세워 이렇게 말하도록
하자. 정신이란 내분비선의 기능이 완전히 행해지고 있는 어떤 종류의 상태이다.
만일 그렇다면 도대체 정신적인 행복이란 어떤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나에게
있어서는 행복이란 주로 소화가 잘 되느냐 여부에 달려 있는 문제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은 주로 오장 육부의 운행에 달려 있는 문제라고 하며 내가 사회에서 받고 있는
명성이나 존경을 잃지 않도록 하려고 생각한다면 저 미국의 어떤 대학총장의 소매
밑이라도 숨어야만 한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미국의 대학총장은 신입생의 각
클라스에서 훈시를 할 때면 언제나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곤 했다. (여러분이 잊어서는
안 될 일이 꼭 두 가지가 있다. 즉 성서를 읽을 것과 용변을 잊지 말 것)  실로
대단한 슬기를 가진 분이라고 생각한다. 총장의 몸으로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
얼마나 현명하고 온정이 넘치는 분인가. 내장만 제대로 움직이고 있으면 행복한
것이다. 움직이고 있지 않으면 불행하다. 문제는 다만 이것 뿐인 것이다.
  행복이라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추상적인 문제 속에 빠져 들지 않도록 해야겠다.
그리고 진정 행복한 때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들 스스로의 손으로 사실에
비추어 해부해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 세상에는 행복이라는 것은 소극적인 경우가
굉장히 많다. 다시 말해서 슬픔, 괴로움, 육체적인 고통이 전혀 없는 상태를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것은 적극적인 경우도 있을 있는
것이며, 그러한 경우에는 우리는 그러한 경우를 환희라고 부르고 있다. 가령, 내
경우라면 진짜 행복한 한 때란 바로 다음과 같은 경우이다.
  푹 잠을 자고 난 뒤 아침에 눈을 뜨고 새벽의 공기를 마시면 해가 충분히 부푼다.
그러면 마음껏 숨을 깊이 들이쉬고 싶어져서 가슴께의 피부나 근육에 유쾌한 운동의
감각이 일어난다. 따라서 일도 할 수 있겠다는 느낌이 드는 한때.
  손에 파이프를 들고 의자 위에 길게 발을 뻗고 있노라면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가는 그러한 한때.
  여름 여행길에서 목이 타는데, 아름답고 깨끗한 샘물이 있어서 물이 솟아오르는
소리가 흐뭇하게 들려온다. 나는 신발도 양말도 벗어던진 채 펑펑 솟아오르는 그
차가운 물 속에 발을 담그는 그러한 한때.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은 다음 안락의자에 기대어 앉는다. 함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마음에 꼭 드는 친구들 뿐이다. 두서도 없는 정담이 끝없이 경쾌하게 계속된다.
몸도 마음도 천하태평인 그러한 한때.
  어느 여름날 한낮이 겨워, 지평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검은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것이 보인다. 15분 쯤 지나면 초여름의 소나기가 틀림없이 퍼부을 것
같다. 비를 흠뻑 맞고 싶지만 우산도 받지 않은 채 빗속으로 나가는 것도 어쩐지
쑥스럽다. 그래서 얼른 밖으로 나가 들 한복판에서 소나기를 만난 것처럼 구실을
댄다. 이윽고 흠뻑 젖어서 돌아와 집안 식구들에게는 (허, 그만 비를 만났지, 뭐야)
하고 말하는 그 한때.
  어린이들이 재잘거리는 것을 듣거나 그 통통하게 살찐 종아리를 볼 때면 도대체
나는 아이들을 육체적인 뜻에서 사랑하는 것인지, 정신적인 뜻에서 사랑하는 것인지
그것을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이 느끼는 기쁨과 육체가
맛보는 기쁨을 구별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육체적으로 이성을
사랑하지 않고 정신적으로만 사랑할 수 있는 것일까. 또한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의
아름다움 즉 그 여인의 웃음, 미소, 머리를 가누는 모양, 여러 가지 일들을 대하는
태도, 이러한 것들을 해부하거나 하는 것이 남자에게 있어서 그렇게 쉬운
일이겠는가. 결국 어떤 처녀이거나 좋은 옷을 입었을 때에는 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한다. 입술 연지나 볼 연지에는 여인의 마음을 들뜨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다.
또 미용의 지식에서 오는 정신적인 차분함이나 고요함이라는 것도 있다. 이런 느낌은
곱게 단장한 그 처녀 자신에게 있어서는 진실하고 뚜렷한 것이지만, 세상의
정신주의자라는 말을 듣는 사람에게는 이런 심정은 전혀 생각조차도 할 수 없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죽어야 하는 육신을 지닌 몸이기 때문에 육체와 정신을 딱
갈라 놓는 차이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것과 같아서, 아무리 섬세한 정서나
위대한 정신미가 정신의 세계에서 높이 평가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감각을 무시하고
그런 상태에 이른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다.
  촉각, 청각, 시각에는 도덕성이라든가, 비도덕성이라는 것은 없다. 인생의
적극적인 기쁨을 받아들일 힘이 없어지는 것은 주로 관능적인 감수성이 줄었기
때문이며, 또는 만족스럽게 그것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가능성이란 매우 많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 때문에 공연한 논의를 하고 있는 것일까? 차라리 그보다는
재빠르게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서 동서양의 모든 위대한 인생 애호자들이 쓴 글
가운데에서 다소의 문례를 뽑아서 그들이 스스로 즐거운 한때라고 생각하는 순간들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또한 그들이 귀로 듣거나 코로 맡거나 눈으로 보는 그런
소중한 감각과 얼마나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가를 고찰해 보자. 다음에 인용하는
것은 숲의 시인인 도로우가 귀뚜라미 우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얻은 시취이며, 굉장히
심미적인 감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우선 귀뚜라미가 우는 소리에 귀를 귀울여 보자. 귀뚜라미는 돌틈에 얼마든지
있다. 한 마리 뿐이라면 더욱 흥취가 깊다. 그 울음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무언지
모르게 유장한 놈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승에서의 짧은 동안의 목숨이
다하면, 영원한 죽음을 맞이해야만 하는 생물의 운명을 생각하기 때문에, 우는 벌레
소리를 유장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한 헛되이 발버둥치며 허덕이는 인간의
번뇌를 생각할 때 그런 느낌도 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본디 온갖 시련의 관념을
초월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유장하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다. 그보다는 오히려 봄의
욕정이나 여름의 광열이 한창일 때에 홀로 가을의 서늘함과 원숙함을 연상하게
해주는 것이 있는 것이다. 새를 향해 귀뚜라미는 말한다. (너희들은 어린이들처럼
일시적 충동으로 울고 있구나. 자연은 너희들을 통해서 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원숙한 슬기가 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4계절의 변화는 없다.
우리들은 4계절의 자장가를 부르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노래한다. 풀숲에서
영원한 노래를. 이미 그것이 천국(Heaven)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들을 새삼스럽게
끌어올려(heave) 천국으로 보내려고 할 필요도 없다. 5월에도 11월에도 영원히
변함이 없다. 안 그런가?
  고요한 슬기, 그 노래에는 산문과 같은 확실성이 있다. 술은 마시지 않지만 이슬을
마신다. 교미기가 지나면 사라지는 속절없는 사랑의 선율이 아니다. 신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원히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4계절의 변천하는 테두리 밖에서 그
가락은 진리와 같이 변하지 않는다. 마음이 그지없이 고요하게 맑은 그 마음으로만
귀뚜라미의 울음 소리를 들어야 한다.

  휘트먼이 지녔던 후각, 시각, 청각이 그의 장신성을 높이는 데에 얼마만한 힘이
되었는지, 그리고 또한 그가 그러한 감각들을 얼마나 중대시했는지, 다음의 글에서
찾아내어 보라.

  아침부터 내리는 눈보라는 온종일 그칠 줄 모른다. 휘날리는 눈을 맞으며 같은 숲,
같은 길을 두 시간 가량이나 나는 걸었다. 바람은 멎었다. 그러나 소나무 사이로
낮은 음악적인 소리가 들려 온다. 매우 뚜렷한 이상한 소리, 마치 폭포 떨어지는
소리 같다. 때로는 조용히, 때로는 다시 흘러 떨어지는 듯한 소리. 온갖 감각, 시각,
청각, 후각의 형용하기 어려운 기쁨. 눈은 내려 쌓인다. 상록수, 물푸레나무,
월계수, 그 밖의 모든 나무라는 나무의 수많은 잎과 가지 위에 쌓이고 쌓여 잎사귀는
하얗게 부풀어 오르고 에머랄드 빛깔의 가장자리에 뚜렷하게 드러난다... 사방에
빽빽이 들어찬 청암송의 높고 꼿꼿한 기둥... 아련한 송진 냄새가 눈 냄새와 한데
섞인다(냄새가 없는 것은 없다. 눈까지도 향기는 있다. 다만 여러분이 냄새를 맡아낼
수 있으냐가 문제다. 똑같은 두 장소란 없고, 또 시간의 경우에도 한때와 한때는
어딘지 다르다. 전혀 같을 수는 없다. 정오와 한밤중, 겨울과 여름, 바람이 부는
한때와 조용한 한때, 그 향기가 얼마나 다른가!)
  정오와 한밤중의 향기, 겨울과 여름의 향기, 바람 부는 한때와 고요한 한때에서
풍기는 향기를 식별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 것인가. 시골에서 사는 것보다
도시에서 사는 편이 대개 불쾌하다는 것은 도시의 시각, 후각, 청각의 변화와
뉘앙스가 시골보다 선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디를 바라보나 단조로운 잿빛
담장과 시멘트를 깐 보도 속에 그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른바 흐뭇한 한때의 참된 한계, 참된 자격, 참된 성질이 어떤 것이냐 하는 점을
따지게 되면 중국인과 미국인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다. 다음 절에서 소개하는 어느
중국학자가 쓴 (유쾌한 한때에 관한 33절)을 번역하여 독자 여러분에게 보여 주기
전에 그가 쓴 글과 비교하는 뜻에서 휘트먼의 글 가운데서 다시 한 대목을 인용할
생각이다. 이 글을 읽으면 중국인의 감각과 닮은 점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맑게 갠 상쾌한 어느날, 공기는 마르고 바람은 산들거리며 산소로 가득차 있다.
나를 감싸고 나를 녹이는 건전하고 말 없는 아름다운 갖가지 기적들... 나무, 물,
풀, 햇빛, 첫서리... 그 가운데서 내가 오늘 가장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것은 가을에
특유한 이상할 만큼 투명한 하늘이다. 구름이라고는 크고 작은 흰 구름 뿐 조용히
생각에 잠긴 듯이 푸른 하늘을 난다. 아침 나절에는 줄곧(아침 7시부터 11시까지라고
할 수 있겠지) 그 빛은 투명하고 생생한 푸른 빛이다. 그러나 한낮이 가까와지면
빛은 엷어져 두서너 시간 동안은 마치 잿빛이다... 그리고는 점점 더 빛은 바래서
황혼으로 접어든다... 커다란 나무가 서 있는 언덕 위의 짬 사이로 찬란한 빛을
던지는 낙조를 바라본다... 불꽃의 방사, 장대한 담황색 경관, 그리고 붉은 빛이다.
수면에 비스듬히 넓은 은빛 광택... 맑게 가라앉은 그림자, 사광, 섬광, 그림으로도
그려낼 수 없는 선명한 색조.
  굉장히 흐뭇한 가을의 몇 시간 동안 분명히 나에게는 그것이 있었다. 무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주로 이 하늘이 있기 때문에 가을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때때로 나는 생각한다. 이 세상에 태어난 뒤로 날마다 하늘을 보지만
제대로 똑바로 참다운 하늘을 본 일은 없었던 것이다)  이런 순간들을 더 바랄 나위
없는 유쾌한 한때라고 말할 수 없겠는가. 예전에 읽은 일이 있는데 시인 바이런은
숨을 거두기 전에 친구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전생애를 통해서 행복했던
시간이라고는 단 세 시간 밖에 없었노라고 했다. 이와 똑같은 내용의 임금님의 종에
관한 오랜 전설이 독일에도 있다. 가까운 문 밖으로 나가 숲의 나무 사이로 빛나는
아름다운 석양을 바라보면서 나는 바이런과 종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했다. 그러자
자신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었다(매우
즐거웠던 한때의 기억을 기록해본 일이라곤 없다. 그런 순간을 맞게 되면 메모를
쓰느라고 모처럼의 아름다운 느낌을 잃게 되는 것이 싫은 것이다. 나는 그저 기분에
맡길 따름이다. 마음내키는 대로 간다. 고요한 황홀감 속에 몸을 내맡긴 채)
  그러나 도대체 행복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내가 경험한 것과 같은 그런
순간의 하나를 말하는 것인가. 또는 그것괴 비슷한 한때를 말하는 것인가. 굉장히
미묘하여... 삽시간에 사라지는 색조인가. 뭐라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음내키는 대로, 알지 못하는 즐거움을 즐기게 해 주소서. 신이여, 당신의 그
투명한 짙푸른 심연 속에 나와 같은 환자를 위한 명약이 있나이까(오, 편안하지
못한 몸의 상태와 마음의 번거로움이 지난 3년 동안 계속되었나이다)  신은 대기를
통하여 나에게 신묘한 명약을 남 몰래 떨어뜨려 주셨나이까.



    3. 유쾌한 한때에 관한 김성탄의 33절

  우리는 여기서 한 중국인이 쓴 흐뭇한 한때라는 글을 음미하고 감상해 보려고
한다. 이 중국인의 이름은 김성탄이며, 17세기에 살았던 위대한 인상파 평론가로서,
(서상기)라는 희곡을 논평한 가운데서 33절에 이르는 유쾌한 한때라는 것을 차례차례
예를 들고 있다. 이 글들은 어느 때, 그가 한 친구와 비에 길이 막혀서 열흘 동안
절에 갇혀 있었을 때 둘이서 꼽아본 것이다. 다음 33절은 인간의 정신이 관능과
빈틈없이 결부되어서 인생의 참다운 유쾌함을 맛볼 수 있는 한때라고 그는  생각하는
것이다.

  1. 때는 6월의 어느 더운 날, 태양은 아직도 중천에 걸려 있고, 산들바람도 한점
없고 하늘에는 한조각의 구름도 보이지 않는다. 앞뜰도 후원도 마치 가마 속같이
찐다. 하늘을 나는 새는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고, 땀은 온 몸을 폭포처럼 흘러
내린다. 점심상을 받았으나 무더위 때문에 숟가락을 들 엄두도 나지 않는다. 그래서
돗자리를 한 장 가져 오게 해서 땅바닥에 깔고 그 위에 벌렁 누워 본다. 그러나
돗자리는 축축하고 파리떼가 코 언저리를 날아 다니며 아무리 쫓아도 영 달아나지
않는다. 이렇게 되면 나는 완전히 맥을 쓰지 못하게 된다. 그때 갑자기 우뢰 소리가
요란스럽게 들리더니 검은 구름이 첩첩이 하늘을 덮고 싸움터로 향하는 대군처럼
당당한 기세로 몰려 온다. 이윽고 처마에서 비가 폭포처럼 떨어지기 시작한다.
그러자 땀은 걷히고 땅이 축축하던 것도 없어지고 파리떼들은 모두 어디론지
숨어버려 겨우 밥을 먹을 수 있게 된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10년 동안이나 만나지 못한 친구가 갑자기 해질 무렵에 찾아온다. 문을 열고
그를 맞아들여 배편으로 왔는지 육로로 왔는지도 묻지 않고, 침대나 걸상에 앉아
잠시 쉬라는 말도 하지 않은 채 곧장 내실로 들어가 아내에게 조심조심 이렇게
말한다. (여보, 당신도 소동파의 아내처럼 듬뿍 수이나 좀 사다 주지 않으려오?)
그러면 아내는 기꺼이 금비녀를 뽑아 들며 (이것을 팔도록 하지요) 하고 말한다.
우선 사흘 동안은 실컷 마실 수가 있을 듯 싶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아무도 없는 텅 빈 방 안에 멍하니, 나는 혼자 앉아 있다. 그러자 베갯머리에
쥐가 다가와 점점 성가시게 군다. 도대체 바지락거리며 무엇를 하는 것일까, 무엇을
쏠고 있는 있는가, 내 어느 책을 쏠고 있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면서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험상궂은 고양이가 무언가를
노리기라도 하는 듯이 꼬리를 움직이며 눈을 부릅뜨고 가까이 다가온다. 나는 숨을
죽인 체 꼼짝도 하지 않고 잠시 기다린다. 그러자 쥐는 순식간에 바삭하는 소리를
남겨 놓은 채 바람처럼 사라져 버린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서재 앞에 있는 해당화와 자형을 뽑아버리고 열 그루인가 스무 그루의 싱싱한
파초나무를 심는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봄날 저녁 로맨틱한 몇 명의 친구들과 술잔을 나누어 어지간히 취기가 들었다.
술잔을 놓기도 싫고 그렇다고 더 이상 마시기도 괴로운 일이다. 그러자, 내 기분을
알아 차린 곁의 동자가 열 두서너 개의 커다란 폭죽을 넣은 광주리를 냉큼 가져다
준다. 나는 술상을 떠나 마당으로 나가 폭죽을 터뜨린다. 유황 냄새가 코를 찌르고
머리를 자극하여 온몸이 매우 기분 좋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거리를 걷노라니까 부량배 둘이 무엇인지 심하게 말다툼을 하고 있다. 얼굴은
상혈이 되고, 눈은 분노에 타고 있어 마치 불구대천의 원수와도 같은 형상이다.
그러나 서로 예의를 차린답시고 팔을 올리거나 허리를 굽신거리며 절을 하면서
댁께서는, 라든가 댁과는, 라든가 어떻게 된 셈이신가요, 라든가 그렇지 않은가요,
라는 등 매우 점잖은 말을 주고 받고 있다. 그러나 그런 수작은 끝도 없다. 그러자,
느닷없이 하늘을 찌를듯한 험상궂은 사나이가 팔을 휘두르면서 나타나더니 큰소리로
어서 집어치워! 하고 호통을 친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물항아리에서 물이 흘러나오듯이 나의 아이들이 옛글을 줄줄 따로 외고 있다.
그것을 나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식사를 끝낸 뒤 심심풀이로 근처에 있는 가게를 찾아가니 조그만 물건이
필요해진다. 잠시 동안 값을 흥정하여 이제 조금만 더 깎아 주었으면 좋겠는데, 가게
점원 아이는 아직 팔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그 값을 깎는 정도의 값이 될
만한 간단한 물건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점원 아이에게 준다. 그러자, 점원 아이는
대번에 빙그레 웃으며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한다. (나리께서는 아주 마음이
너그러우십니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식사를 끝낸 뒤의 무료함을 달래려고 헌 가방을 열어 그 속에 든 물건을
공연스레 뒤적거린다. 그러자, 우리 집에 돈을 꾸어 준 사람들이 쓴 수십 장 수백
장의 차용증서 뭉치가 나왔다. 빚진 사람들 가운데는 이미 죽은 사람도 있고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어쨌든 돈을 받아낼 가망은 없다. 나는 몰래
그것들을 둘둘 말아 불에 태우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연기가 깨끗이 사라져 가는 것을
바라본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어느 여름날, 맨머리 맨발로 문 밖에 나가 젊은이들이 수차를 밟으면서 소주의
민요를 노래하는 것을 양산을 받고 서서 정신 없이 듣는다. 밭의 물은 녹은 백은이나
녹은 백설처럼 흰 거품을 내면서 수차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아침에 일어나 보니, 지난 밤에 누군가가 죽었다고 집안 식구들이 수군거리는
모양이다. 나는 곧 누가 죽었느냐고 집사람에게 묻는다. 그리고 그가 동네에서 가장
지독하게 노랭이었던 녀석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여름날 아침 일찍 일어나니, 물받이 홈통으로 쓰려고 사람들이 소나무 선반
아래에서 커다란 대나무를 톱으로 자르고 있는 것이 보인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한 달 동안이나 꼬박 장마가 들어 주정뱅이나 앓는 사람처럼 아침이 되어도
일어나지 않고 자리에 누워 있곤 했다. 그러자 창문 밖에서 비가 멎었음을 알리는
새들의 울음 소리가 들린다. 나는 부리나케 일어나서 침실의 커어튼을 젖히고 창문을
여니 아름다운 햇빛이 쨍쨍 내리쬐고 있고, 나무들은 마치 목욕을 하고 난 뒤처럼
싱싱하고 깨끗하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밤에 누군지 멀리서 나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다음날 나는 그
사람을 찾아간다. 그 집에 들어가 거실을 둘러보니, 본인은 남쪽을 향해 책상 앞에
앉아 무언가 기록을 읽고 있다. 내 모습을 보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내 소매를
잡아 앉게 하더니 (마침 잘 왔으니 이것을 읽어 보게나) 하고 말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 웃음을 나누고 담 위에 햇살이 사라질 때까지 즐거이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이윽고 친구는 시장기를 느낀 듯 나에게 조용히 말한다. (자네도 배가
고픈가)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나는 집을 지으려고 별로 진지하게 생각했던 것도 아닌데 뜻하지 않게 돈이
조금 들어왔기 때문에 집이라도 지어 볼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 뒤로는
자나깨나 재목을 사야 한다, 기와며, 벽돌이며, 회를 사야 한다, 못을 사야 한다고
성화 같은 재촉을 받게 되었다. 나는 그런 것들을 파는 거리라는 거리는 샅샅이
찾아다녔다. 그것은 모두가 역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런 일을 하는
동안 새로 짓고 있는 집에서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마침내는 모두 다 집어치우고
싶은 생각이 들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드디어 어느날 겨우 집이 완성되었다. 벽에는
흰 회칠을 하고 마루는 깨끗하게 쓸고 닦았으며 문이나 창에는 종이를 바르고,
벽에는 서화를 걸고, 일꾼들은 모두 가 버리고, 친구들이 찾아와서 단정히 여기저기
놓여 있는 걸상에 기대 앉는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겨울밤에 술을 마시는 동안에 방안이 몹시 추워진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된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니,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땅 위에는 벌써 서너 치나 눈이
쌓여 있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여름 날 오후, 새빨간 큰 소반에 새파란 수박을 올려 놓고 잘 드는 칼로
자른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나는 오래 전부터 승려 되기가 소원이었다. 그러나 육식을 못한다기에 망설이고
있었는데, 이제부터는 승려가 되어도 마음대로 육식을 해도 좋게 되었다고 하자.
자, 그렇게 되면 대야에 하나 가득 물을 데워 놓고 잘 드는 면도칼로 여름철이
지나기 전에 깨끗이 삭발을 한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음부에 조그마한 습진이 생겼으므로, 문을 단단히 닫아 걸고 가끔 더운 김을
쐬거나 또는 더운 물에 담그거나 한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우연히 가방 속에서 옛 친구들이 손수 써 보낸 편지를 발견한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어느 가난한 선비가 돈을 꾸러 온다. 그러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면서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려 한다. 퍽 괴로우리라 생각하고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곳으로 데리고 가서 얼마나 필요하냐고 묻는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와 돈을
내주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부터 곧 가서 그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겠나?
웬만하면 잠깐 앉아 술이나 한잔 들고 가는 게 어떻겠나?)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지금 나는 조그만 배에 몸을 싣고 있다. 산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 오지만
배에는 돛이 없다. 그러자 갑자기 어딘선지 큰 배 한 척이 나타나 바람처럼 빨리
다가온다. 나는 그 배로 가까이 가서 갈고리쇠를 걸려고 한즉 뜻밖에도 잘 걸린다.
그래서, 그 배에 밧줄을 던져 그 배더러 끌어 달라고 한다. 그리고 두보의 시를
읊는다. (푸른 빛은 산봉우리가 지남을 아쉬워하고 노랑 빛은 밀감이 익었음을
알린다)  그리고 유쾌하게 웃음을 터뜨린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한 친구와 함께 살 집을 찾아다녔지만, 마땅한 집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
찾아와서 알맞은 집이 있다고 말해 준다. 그다지 크지 않은 집으로 열 두어 개의
방이 있고 강을 향해 있으며, 아름다운 푸른 나무에 둘러 쌓여 있다고 한다. 나는 그
사람에게 저녁 식사를 대접하고 나서 어떻게 생긴 집인가 하는 생각도 하지 않은 채
함께 어슬렁어슬렁 집 구경을 떠난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커다란 빈터가 있고 곡물
창고가 예닐곱 개나 있다. 그 순간 나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기를 ^6 236^이제부터는
야채와 참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겠구나^356 3^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길을 떠났던 나그네가 먼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다. 그리운 성문이 보이고, 강
양쪽 기슭에서는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고향의 사투리로 이야기를 주고 받고 있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오래 된 자기 그릇이 깨지면 아무리 애써 보았자 먼저 대로 되지 않는 것은
뻔한 사실이다. 깨진 그릇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아도 바라보면 볼수록 더욱 화만
나게 마련이다. 그럴 때는 그 그릇을 부엌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내주며 다른 낡은
그릇과 같이 쓰라고 하면서, 한 번 깨진 그 그릇을 또다시 내 눈에 띄지 않도록
하라고 이른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나는 성인 군자가 아니기 때문에 좋지 못한 일을 행하지 않는다고 할 수는
없다. 밤중에 그 어떤 좋지 못한 일을 하고 아침에 일어나면 그 때문에 매우
불쾌하다. 그때 문득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좋지 못한 일을 감추지 않는 일은
참회함과 같다고 하는 불교의 가르침이다. 그래서 나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거나 옛날
친구이거나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내가 행했던 좋지 못한 일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아래 위로 한 자나 됨직한 커다란 글씨를 누군가가 쓰고 있다.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창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방에서 왕벌을 내쫓는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태수가 북을 치게 하여 퇴영시 임을 알린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누군가가 날리고 있던 연줄이 끊어져서 연이 날아간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벌판에 불이 붙고 있다. 그것을 보고 있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빚진 돈을 모두 갚아 버린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1. (규염객전)을 읽는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일생 동안에 불과 세 시간 밖에 마음 흐뭇한 시간을 갖지 못했던 불쌍한 바이런
경이여! 그의 정신은 병적이거나 굉장히 균형이 잡히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시작 10년 동안에, 유행한 세계고를 단지 애호했던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세계고의 사고 방식이 그토록 유행하지 않았더라면 세 시간이 아니라, 적어도 서른
시간쯤은 유쾌한 시간을 가졌을 것을 바이런 경은 인정했을 것이 틀림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상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실로 이 세상은 우리의 관능에 의해서만 즐길 있도록
우리에게 펼쳐 놓아진 인생의 향연인 것이며, 이와 같이 관능적인 기쁨을 인정할 수
있는 교양을 지니고 있어야만 솔직하게 그것들을 승인할 수 있는 것이다. 대체로
이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뚜렷한 일이 아니겠는가. 자기 자신의 관능에 떨고 있는 이
호화로운 현세에 대해서 우리가 자진해서 눈을 감는 것은 유심론자가 우리를 완전히
관능공포자로 만들어 버린 탓이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 좀더 높은 견지에서 철학은
우리가 육체라고 부르는 이 섬세한 감수 기관에 대한 믿음을 재건해 주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선 육체를 멸시하는 사상을 몰아내고, 이어서 관능 공포를
없애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철학자들이 실제로 물질을 승화시키고 인간의 육체를
기화시켜 신경도, 미각도, 후각도, 색감도, 운동 감각도, 촉각도 없는 하나의
영혼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는 한 또 저 흰두교의 고행자와 같은 고행을 할 배짱도
갖지 않는 한, 우리는 용감하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에 직면해 나가도록 하자.
생각컨대 진실을 인정하는 철학만이 우리를 참된 행복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것이며, 이러한 철학이야말로 건전하고 건강한 것이기 때문이다.



    4. 유물론의 오해

  윗 절에 예거한 인생의 유쾌한 한때에 관한 김성탄이 쓴 글을 읽은 사람은 누구나
다 진실한 인생에 있어서는 정신적 즐거움과 육체적 즐거움은 서로 떼어 놓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이미 깨달았을 것이다. 정신적 즐거움은 육체를
통해서 감득될 때에만 진실하여진다. 나는 그 속에 도덕적 즐거움도 포함시키고
싶다. 저 옛날의 에피쿠로스 파(향략주의파)나 스토아 파(금욕주의파)의 철학자들이
가끔 사회의 오해를 받았던 것처럼 그 어떤 교의를 주장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세인의
오해쯤은 각오해야 한다.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로마 황제, 철학자 121 __ 180)와
같은 스토아 철학자의 정신 속에 숨겨진 본질적인 정애가 그 얼마나 잘못 보여져
왔던가. 또는 지혜와 절욕을 주장하는 에피쿠로스 파의 교의가 쾌락주의라고
일반에게 해석되는 일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어딘지 모르게 유물론적인 느낌을 받는
이러한 철학 사상에 대해서는 그것들은 이기적이라느니, 사회적 책임이 전혀
결여되어 있다느니, 자기만의 쾌락에 빠지는 것을 가르친다느니 하는 여러 가지
반대론이 대번에 일어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반대론은 무지에서 오는 것이다.
이러한 논자들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이러한 인생 애호자의 따뜻한 마음씨는 말할 것도 없고, 냉소주의자의 정애도
모르는 것이다. 자기의 동포를 사랑한다는 것은 주의나 신조도 아니고, 지적 확신의
문제도 아니며, 또 논의에 의하여 지지될 명제도 아니다. 이유가 필요한 인류애는
참된 사랑은 아니다. 참된 사랑은 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어야만 한다. 마치 새가 깃을
퍼득이듯이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건전한 마음에서 저절로 솟아나서
대자연에 접촉하며 움직이는 때묻지 않은 감정이어야 한다. 진심으로 나무를
사랑하는 사람은 동물이나 동료에게 참혹한 짓은 할 수가 없다.
  인생이나 동료에 대한 직각, 자연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갖춘 극히 건전한 정신에
있어서는 정애란 당연한 일에 속한다. 그러한 사람의 마음에는 정애를 가르치는
철학도 인공적인 종교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정신은 자기의 감각을
통해서 적절하게 함양되었고 기교적인 생활이나 더우기 기교적인 처세술 같은 것을
어딘지 모르게 대관하고 있기 때문에 참된 도덕적, 정신적으로 건전함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땅을 파고 흙을 치워 이 정애의 샘이 저절로 흘러나오는
구멍을 크게 하려고 하는 것이니까 이때 이것을 가리켜 애타주의를 가르치는
것이라는 비난은 받을 까닭이 없다.
  유물론은 오늘날까지 오해를 받아 왔다. 개탄할 정도로 오해를 받아온 것이다.
이 점에 관하여 나는 조오지 산타야나로 하여금 답변하게 해야겠다. 그는 스스로
칭하여 (유물론자... 아마도 현존한 유일한 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현대인 중에서 가장 정애가 깊은 한 사람이라는 호칭을
받고 있다.
  그 말에 의하면 유물론 철학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이 편견을 갖는 것은 유물론을
외부에서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오래 전부터 지켜온 신앙과 비교해
봄으로써만 겨우 알게 되는 어떤 결함을 유물론에서 발견하고는 일종의 놀라움을
느낀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까지 알지 못했던 신앙이나 종교나
국가를 올바르게 이해하려면 이 새로운 세계의 정신 속으로 침투해 들어가야만 한다.
세상 사람들의 대부분이 전혀 오해하고 있는 이른바 이 (유물론)에는 약동과 기쁨,
감각의 건전함이 있다. 산타야나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참된 유물론자는 그 언제나
웃는 철학자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인물이다. (대체로 귀찮은 지성 때문에 재난이
되어 웃는 능력을 잃은) 것은 바로 우리들이다. 즉 (이 어쩔 수 없는 유물론자)들로,
정신주의를 동경하면서도 이기적, 유물적 생활을 하고 있는 무리들이다.

  유물론의 신앙 때문에 이 세상에 태어난 철저한 유물론자, 또 기독교의 세례를
엄동에 무심코 받고 나서 중간에서 헤매고 있는 신자들과는 유를 달리하는 철저한
유물론자란 저 웃는 철학자 위대한 데모크리토스와 같은 인물이어야 한다. 무수히
많은 신기하고도 아름다운 형상이 되어 나타나고 또 수없이 많은 굉장한 정열을 낳은
대자연의 기구를 내다보는 데모크리토스의 기쁨은 생물 박물관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저지성의 기쁨과 같은 것이다(표본 상자 안에 있는 수없는 나비, 홍악이나
갑각류, 맘모스나 고릴라가 거기에 있다)  틀림없이 그 수많은 생명에는 여러 가지
괴로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괴로움은 곧 끝났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야외극은
그 얼마나 훌륭한 한때였으며, 또 저 우주의 상호 작용 속에는 그 얼마나 끝없는
감흥이 있는 것인가. 그리고 또 너무나도 사소한 여러가지 욕정은 그 얼마나
어리석고 피하기 어려운 것인가.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유물론이 사람의 억센 마음
속에 불러일으키는 정감이며, 적극적인 기쁨에 가득차고 개인적으로 떨어지는 일
없이, 자기의 환상을 존중하며, 조그마한 냉소조차도 허용치 않는 것이다.
  옛부터 유물론적인 윤리학은 모든 생물의 침통한 슬픔을 냉담하게 바라보지는
않았다. 그와는 반대로 유물론적인 논리학은 고통을 느끼는 신경 조직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고통 앞에서 몹시 무서워 떨며 인간의 의지가 꺾여 넘어가지 않도록
고행자적인 태도로 그 의지를 되찾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슬픔을 경멸하는
것은 호산나를 부르며 절대 낙천론의 수레를 끄는 사람들이 하는 짓이다. 그러나
순전한 허영심과 자기 기만에서 생긴 여러 가지 악덕에 대해서나 또는 자기는 우주의
종점이며 절정이라고 믿고 득의양양한 태도를 취하는 무리들의 언론에 대해서는
유물론적인 웃음이야말로 안성마춤의 방위가 된다. 웃음에는 또 다음과 같은 미묘한
이점도 있다. 즉 유물론자는 깊은 동정이나 우정이 없는 곳엔 아예 가기를 싫어한다.
예를 들면 돈키호테가 저지르는 어리석은 짓이나 재난 이야기를 읽고 웃기는 하지만
이 영웅의 의향까지를 비웃지는 않는다. 그의 열성만은 칭찬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인간 세계를 적절하게 개량할 수 있으려면 우선 그 세계부터 잘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인생의 행복이라는 것도, 만일 그것을 얻고 싶다면 우선 이성에다
기준을 두고 생각해야만 한다.

  우리가 오늘날까지 언제나 자랑거리로 삼아 왔고, 또 관능적 생활보다 늘 상 위에
올려 놓아온 이러한 지능 생활이니, 정신 생활이니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불쌍하게도 현대 생물학은 정신이라는 것을 동물 섬유나 분비액이나 신경으로 구성된
하나의 조직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본디의 위치로 되돌려 놓으려는 경향이 있다.
내가 대체로 믿는 바로는 낙천주의는 하나의 분비액이다. 적어도 어떤 종류의 순환
분비액으로 말미암아 가능해지는 신경의 한 상태다.
  정신 생활이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가. 그것은 또 무엇에 의해서 존재하고,
어디로부터 영양을 섭취하는 것인가. 철학자들은 진작부터 인간의 모든 지식은
지각적인 체험에서 생긴다는 것을 지적해 왔다. 우리는 시각, 촉각, 후각 등이
없이는 어떠한 지식도 얻을 수가 없다. 그것은 마치 렌즈와 감광판이 없이는 사진을
찍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똑똑한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라는 것도 결국
전자가 후자에 비해서 선명한 영상이 비치고, 오래 보존할 수 있는 정교한 렌즈와
건판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학상의 지식으로부터 인생의 참된 지식으로
나아가려면 다만 사유나 사색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드시 자기의 독특한 방법을
감득 해야만 한다. 즉 사물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인생과 인간성에 관한 무수히
많은 모든 사물에 대한 정확한 인상을 서로 떨어진 관계가 없는 부분으로서가 아니라
전체로서 얻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생을 느끼고, 경험을 쌓으려면 우리의
모든 감각은 힘을 합쳐 활동한다. 지상에 빛나는 따뜻함이 마음 속에 생기는 것은
이러한 여러 감각이 서로 협조하고 또 심정과 지능이 서로 협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성의 따뜻함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대체로 푸른 빛이 나무의
표시인 것처럼 그것은 인생의 표시인 것이다.
  어떤 사람이 생각하고 있는 인생이 어떠한 것인가를 알고 싶다면 그 사람에게
그러한 지성의 따뜻함이 있는가 없는가를 보면 된다. 마치 그것은 그 어떤 불행한
재해 끝에 괴로와하고 있는 죽어가는 나무가 아직 살아 있는지 어떤지를 알려면
잎에 생명의 빛이 있는지, 수분이 있는지, 섬유의 조직은 튼튼한지, 그러한 것들을
보면 알 수 있는 것과 같다.



    5. 정신적 쾌락이란?

  여기서 우리는 흔히 고급이라고 생각되는 지적, 정신적 쾌락에 대해 생각함으로써
그것들이 인간의 지력보다 그 감각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고찰해
보기로 하자. 일반적으로 저급한 감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과 구별되는 이른바
고급의 정신적 쾌락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감각 속에 뿌리를 박고
그 속에서 끝을 맺으며, 또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같은 사물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학, 미술, 음악, 종교, 철학 등 고급인 정신적 쾌락에 관하여 대충 고찰해 보면,
인간의 감각이나 감정에 비하여 그 지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력한 것인가를 알 수
있다. 회화라 하지만 우리가 풍경화나 초상화를 볼 때에 실제의 경치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싶다는 관능적인 쾌락을 불러 일으켜 주지 않는다면 회화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또 문학이라고 하지만 인생의 모습을 그 속에 재현시켜, 그 정취와 명암을
그려 내고, 목장의 향기나 뒷골목의 악취를 느끼게 하지 못한다면 문학의 가치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소설은 인간과 그 희노애락의 참된 모습을 그려내는 데 따라서
참된 문학적 표준에 접근하는 것이라고 세상 사람들은 말한다. 인간을 이 인생에서
떼어 놓고 다만 그것을 냉담하게 분석하는 데 그치는 책은 문학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으로, 그 책이 인간적인 진실을 담고 있으면 있을수록 뛰어난 문학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소설이 다만 냉혹한 해부에 그치고 인생의 맵고 신 것, 쓴맛, 또는 그
냄새를 그려낼 수 없다면 그 어찌 독자에게 감흥을 줄 수 있겠는가.
  또 다른 경우에 관하여 말하자면 시가는 인간의 정서로 윤색된 인생의 진실에
지나지 않으며, 음악은 말없는 정감이며, 종교는 공상의 형태를 취하는 예지에
지나지 않는다. 회화가 색채와 공상의 감각에 바탕에 두고 있는 것처럼, 시가는
인생애의 진실을 나타낼 뿐 아니라 음향, 가락, 리듬의 감각 위에 놓여져 있다.
음악은 순수한 정감 그 자체이며, 인간의 지력이 그것에 의해 활동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 즉 언어라는 것이 전혀 필요하지 않다. 음악은 워낭 소리, 어시장, 싸움터의
여러 가지 음향이나 때로는 꽃의 아름다움, 파도의 일렁임, 달빛의 은은하고 고요한
맛까지도 표현한다. 그러나 음악이 감각의 한도를 넘어서 철학적 관념을 표현하려고
하면 그 순간 음악은 타락되며, 따라서 타락 세계의 산물로 화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의 타락은 종교가 이론 그 자체에 빠짐으로 해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산타야나도 말하고 있는 것처럼 종교 타락의 과정은 너무도 이론에 빠졌기 때문이다.
산타야나는 말한다. (불행하게도 종교가 이론으로 도금된 미신이 되기 위해서 공상
세계의 지혜가 되기를 그만둔 지도 이미 오래다)  종교의 타락은 신조나 신앙
형식이나 신앙 개조나 교의 그리고 그 해석 따위에 온갖 정성을 집중하여 결국
현학적인 정신에 빠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신앙을 정상화하고 합리화하고 옳다고
믿게 됨에 따라 경건한 마음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모든 종교가 자기만이 진리를
발견했다고 망신하는 좁은 소견의 종파로 변하게 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그 결과 모든 종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론으로 신앙을 정당화하면 할수록 더욱
소견이 좁은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종교는 가장 악질적인 고집스럽고
좁은 소견에 개인 생활의 철저한 이기주의하고도 결합하게 되고 만 것이다.
  종교도 이런 경지에 이르게 되면 다른 종파에 대하여 너그러운 태도를 가질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종교 의식을 신과 인간과의 사적인 거래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인간의 이기주의만을 길러 내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을은 갑에 대하여
거의 상상할 수 있는 온갖 기회에 찬미가를 불러서, 신의 이름과 갑의 영광을
찬양하고, 그 대신 갑은 을을 축복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때 다른 누구보다도 특히
우선 자기를 축복하고 다른 어떤 가족들보다도 우선 자기의 가족을 축복하는 것이다.
매우 (신앙심이 깊어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꼬박꼬박 교회에 나가는 노부인들
가운데 지나친 욕심장이가 흔히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하겠다. 결국
자기만이 진리를 찾아냈다고 망상하는 독선적인 생각은 종교가 본시 근거로 삼고
있는 온갖 보다 섬세한 정감을 몰아내고 만 것이다.
  미술, 시가, 종교는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의 마음 속에
공상의 신선미, 보다 커다란 정서적인 미감, 보다 발랄한 생명감을 부활시키기
위해서이며, 그 밖의 다른 이유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감각이 점차로 둔해지고, 고통과 부정과 잔인한 것에 대한 희로 애락의 정도
약해지고, 차가운 현실의 보잘것 없는 싸움질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나머지 인생에
대한 공상도 그만 일그러지고 마는 것이다.
  다행히도 이 세상에는 그 날카로운 감수성이나 섬세한 정서적인 감응이나 공상의
신선미를 잃지 않은 몇몇 시인과 예술가가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람들의 의무는
우리의 도덕적인 양심이 되고, 무디어진 공상을 반성시켜 주는 거울이 되며, 위축된
신경을 조정해 주는 데 있는 것이다. 모름지기 예술은 우리의 마비된 정서라든가,
생기를 잃어버린 사고나 부자연스러워진 생활에 대하여 풍자와 경고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지나치게 약아빠진 세계에 살면서 순진성이란 무엇인가를 가르쳐
준다. 그것은 또한 생활의 건강함과 건전함을 회복하고, 지나친 정신 활동으로
말미암은 열광착란을 고쳐 주는 것이다. 우리의 감각을 날카롭게 해 주고, 이성과
인간성과의 사이의 연락을 재건해 주며, 인간의 본디 모습으로 되돌아가게 해 균형을
잃은 생활의 파편을 다시 조립하여 먼저대로의 완전한 것으로 돌아가게 해 주는
것이다. 이해가 따르지 않는 지식, 감상이 따르지 않는 비판, 사랑이 따르지 않는
아름다움, 정이 따르지 않는 진리, 자비가 따르지 않는 정의, 온정이 따르지 않는
예의가 판을 치는 이 세상은 얼마나 비참한 세상인가!
  특히 정신의 활동이리고 셍각되는 철학에 대하여 생각해 볼진대, 인생 그 자체에
대한 느낌을 잃어버린다면 그 위험은 보다 더 크다. 이른바 정신적인 기쁨이라고
하는 것 가운데는 긴 수학의 방정식을 푸는 기쁨이라든가, 우주의 오묘한 이치를
깨닫는 기쁨 등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어떠한 이치를 깨닫는다는
것은 아마도 온갖 정신적인 기쁨 가운데서도 가장 순수한 것이리라. 그러나, 그런
것까지도 나는 맛있게 차린 음식하고라면 기꺼이 바꿀 생각이다.
  첫째, 그 속에는 우리의 정신적인 용무의 부산물인 변덕이라고도 부름직한 것이
끼여 있기 때문이다. 즉 자기가 재미있어서 하고 있는 일일 뿐, 인체에 필요한 그
밖의 다른 여러 작용과 같이 긴급하고도 없어서는 안될 것은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이같은 지적인 기쁨은 결국 크로스워어드 퍼즐(낱말을 가로 세로 맞추는
놀이)을 잘 풀어 맞추었을 때의 기쁨과 같은 것이다.
  둘째로, 이때 철학자는 대개 자기 자신을 속이고 완전이라는 추상적인 생각에
빠지게 되며 진실 그 자체를 배경으로 삼는 것보다도, 세계의 이론적 완성이라는
것을 크게 생각하기 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물을 옳게 그리는 방법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마치 별의 모양으로 별을 그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물론 정도를 너무
지나치지 않으면 그것도 또한 좋겠다고 하겠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들은 만물의 설계에 내재하는 단일한 이치를 찾아내지 않더라도
유쾌하게 살아갈 수 있다. 사실 그러한 것은 없어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수학자와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결혼할 나이가 된 처녀와 이야기를 주고 받는 편이 훨씬
좋다. 처녀가 하는 이야기는 구체적이며, 그 웃음에는 정기가 넘쳐 흐르기 때문에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편이 인간성에 대한 지식을 듬뿍 얻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어떠한 경우에도 나는 시나 노래보다는 돼지고기를 택할 것이고, 노릇노릇하게
구어져서 씹으면 바삭바삭하는 고급 소오스를 발라서 구운 등심살코기 한조각을
위해서라면 번잡한 철학 따위는 내던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유물론자이다.
  생활을 사색보다 소중한 것으로 생각함으로써만 철학의 광열이나 숨막히는
기분에서 빠져나올 수 있으며, 동심이 지니고 있는 참된 통찰력이 신선함과 소박함을
조금이라도 되찾을 수가 있는 것이다. 어떠한 철학자라도 만일 참된 철학자로서의
자격을 지니고 있다면 어린이의 모습을 보면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우리
안에 갇힌 아기 사자를 보고도 그러할 것이다. 발톱이며 근육이며 아름답고 부드러운
털, 뾰족한 두 귀, 반짝이는 똥그란 눈, 그 재빠른 동작, 장난을 좋아하는 짖궂은
성품 등,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완전히 자연스럽게 갖추어져 있는가. 신이 준 완전이
때때로 인공의 불완전으로 바뀌는 것을 돌아볼 때 철학자는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안경을 쓰고, 식욕도 없고, 때때로 골치를 앓고 마음을 괴롭히고, 전혀
인생의 아취를 알지 못하는 것을 철학자는 마땅히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철학자들에게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가 말하는 바 하나도
필요하고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철학이 기꺼이 시가와 손을 잡고 우선 자연,
이어서 인간성이 지닌 참된 모습을 우리에게 줄 때야말로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상당한 가치를 지닌 인생 철학이라면 인간이 타고난 본능의 조화를 이루는 데
바탕을 두어야만 한다. 너무나도 관념적인 철학자는 자연 그 자체가 곧 꿰뚫어 본다.
중국의 유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에 의하면 인간이 지닐 수 있는 최고의 성격은 자연에
순응해서 살고, 마침내는 천지와 똑같은 가장 높은 위치에 이르렀을 때 얻어질 수
있다고 했다.
  이것이야말로 공자의 손자가 쓴 (중용) 속에서 설한 가르침인 것이다.

  하늟이 주신 명을 성이라고 하고, 이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고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교라고 이른다.
  희로 애락의 감정을 아직 나타내지 않음을 중이라고 하고, 희로 애락을 알맞게
나타냈을 때, 이를 화라고 한다. 중은 철학의 근본이요, 화는 천하의 달도이다.
중화에 이르렀을 때 하늘과 땅에는 질서가 생기고 만물은 고이 자란다.
  성이 있음으로써 명이 있으며 이를 성이라 한다. 명하게 함으로써 성에 이른다.
이를 교라 한다. 성이 있으면 곧 명이 있으며, 명하게 하면 곧 성에 이른다.
  오직 천하의 지성, 그 성을 다하게 한다. 그 성을 다하면 곧 사람의 성을 다한다.
사람이 성을 다하면 곧 사물의 성을 다한다. 사물의 성을 다하면 곧 천하의 화육을
돕는다.
  천하의 화육을 도우려면 곧 천지와 더불어 삼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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