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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장 사물을 사고하는 방법


    1. 인간미 있는 사고방법이어야 한다.

  사고란 하나의 기술이지 결코 과학은 아니다. 중국의 학문과 서양의 학문을 비교해
볼 때, 여러 가지 점에서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뚜렷하게
두드러진 한 가지 보기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들 수 있다. 중국인은 활 문제에
대해 서양 사람보다는 훨씬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나, 전문화된 과학이 없다.
이와 반대로 서양 사람은 전문적인 지식은 매우 풍부하지만 인간적인 면에서의
지식은 매우 빈약하다. 서양에서는 과학적인 사고가 인간적인 면에서의 지식의
본래의 영역 안에 침입했다. 과학적인 사고의 특징은 한문의 고도로 전문화된 것과,
과학적 술어 또는 반 과학적인 술어를 풍부하게 구사하는 일이다.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과학적)인 사고라는 것은 보편적인 뜻이며, 진실한 뜻으로의 과학적인
사고를 가리킴이 아니다. 만약 진실한 것이라면 한편에 상식, 한편에 공상, 이 두
가지 것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 보편적인 뜻의 (과학적)인
사고는 엄밀하게 말해 논리적이며 객관적이어서 고도로 전문화되며, 이 방법과
관찰력은 (원자적)이라고 할 만큼 매우 세밀하다. 동양의 학문과 서양의 학문, 이 두
가지 학문의 형은 거슬러 올라가면, 결국 논리와 상식과의 대립으로 돌아가고 만다.
상식을 잃은 논리는 비인간적이 되고 만다. 논리를 잃어버린 상식은 대자연의 신비를
구명할 수 없게 된다.
  중국 문학과 중국 철학의 세계를 훑어보면 무엇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중국에는
과학이 없다는 것, 극단적인 이론, 독단이 없다는 것, 실제로 서로 다른 철학의
대학파가 없다는 것이다. 대개 상식과 양식을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 온갖 이론, 온갖
독단을 때려 부수고 만 것이다. 중국의 학자는 대시인인 백낙천처럼 (겉은 유교로써
그 몸을 닦고, 안은 불교로써 그 마음을 다스리며, 한편 산수풍월 가시금주로써 그
뜻을 즐기는도다) 이런 것이다. 그는 몸은 비록 이승에 있었으나, 정신은 이승 밖에
있었던 것이다.
  중국 문학은 전체가 짧은 시와 짧은 수필뿐인 사막과 같은 것이다.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사막은 끝없이 계속되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광야의 풍경 그
자체와 같이 그곳에는 또한 변화가 있는 무한한 아름다움이 있다. 중국에는 미국의
국민학교 학생의 글짓기보다도 훨씬 짧은 3백자나 5백자 정도의 짧은 글이나 수기에
인생관을 담으려는 수필가나 서한 작가 밖에는 없다. 이러한 우연한 기회에 쓴 문장,
편지, 일기, 문학적 각서, 수필 일반 등등 중에는 영고 성쇠를 읊은 짧은 감상이
있기도 하고, 이웃 마을에서 자살한 여인의 기록이 있기도 하고 그런가 하면 즐거운
봄의 잔치나 눈 속의 향연, 달밤의 뱃놀이, 무시무시한 번개 치고 비가 쏟아지는
밤을 절에서 보낸 추억 같은 것이 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추억거리가 될 만한
인상적인 말을 그 사이에 엮어 가고 있다.그러므로 수필가이며 시인이고, 시인이며
수필가라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 5백 자나 7백 자 이상 되는 긴 글은 쓰지 않지만
단 한 줄 속에도 온 인생 철학이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다. 또 자기의 사상을 엄격한
체계 속에 넣으려고 하지 않는 우화 작가나 경구 작가, 가정적인 서한을 쓰는 필자도
있다. 이런 일이 중국에 있어서의 학파와 체계가 출현하는 것을 방해한 것이다.
양식, 다시 말해서 상식적인 판단을 귀중히 여기는 정신이나 또는 작가의 예술적인
감수성 뒤에 지성은 언제나 숨겨져 있다. 지성을 진심으로 믿는 사람은 없다.
  과학의 정복을 가능하게 하는 논리적인 능력이 인간 정신의 지극히 강력한
무기라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다. 서양에 있어서 인간의 진보가 지금도
여전히 상식과 비판적인 정신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이
비판적인 정신은 논리적인 정신보다 위대한 것이어서 이것이야말로 서양에 있어서의
인간적인 사고를 나타내는 가장 높은 형식을 대표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보다
훨씬 발달된 비판적인 정신이 서양에 존재한다는 것은, 내가 인정할 것까지도 없이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다. 나는 논리적인 사고의 약점을 지적했지만, 다만 서양
사상의 특수한 결함에 대해서 말했을 뿐이다. 또 이를테면 독일이나 일본에서의 무력
정책과 같이, 때때로 서양의 정치에서도 볼 수 있는 특수한 결함을 가리키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논리에도 또 독특한 매력은 있다. 나는 탐정소설의 발달을 가장
흥미있는 논리적인 정신의 소산으로 보고 있으나, 이것은 중국에서는 전혀 발달되지
못했던 문학 형식이다. 그렇지만, 너무 열중하여 논리적인 사고에 빠져 버리면 역시
그 약점이 눈에 띄게 된다.
  서양적인 학문의 두드러진 특징은 그의 전문화와 지식을 잘게 썰어 넣어 각각 다른
구획 안에 집어 넣어 버리는 일이다. 논리적인 사고와 전문화가 지나친 발달을
이루고, 그에 따라 전문적인 말투도 매우 분화된 결과 철학이 매우 뒤쪽으로, 다시
말해서 정치나 경제보다도 훨씬 뒤쪽으로 물러나게 되어, 일반 사람 따위는 조금도
양심의 가첵을 느끼지 않고, 철학의 옆을 그대로 지나칠 수 있다는 현대 문명의
기묘한 현상이 나타났다. 교육을 받은 사람일지라도 일반 사람은 철학 따위는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학과) 중에서도 첫째로 해당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확실히 현대 문화의 괴상한 변태 현상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과 일에
가장 가까와야 할 철학이 인생으로부터 가장 멀리 동떨어지고 만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인생에 관한 지식을 연구하는 일을 학자의 주요한 직분으로 여겨 오던
그리이스나 로마의 고대 문명에서는 그런 일은 없었으며, 같은 중국에서도 그러한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현대인이 철학의 본래의 제목인 생활 문제에 흥미를
느끼지 않게 되었거나, 또는 우리가 철학의 최초의 개념에서 너무 동떨어지고
말았거나 그 중의 어느 하나의 결과이다. 우리의 지식의 범위는 매우 넓어져서
저마다의 전문가에 의하여 열심히 지켜지는 굉장히 많은 (부문)이 발생되기에
이르렀으나, 철학은 그 여세로 인간 최고의 학문이라는 관록도 찾을 길 없이 겨우
아무도 자진해서 전문적으로 연구하려고 들지 않는 한 분야로서 남고 말았다.
전형적인 현대 교육의 상태는 미국의 어느 대학의 다음과 같은 발표를 읽어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대학은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심리학부는 호의를 베풀어 경제학부의 3학년
학생에게 심리학부 4학년의 문호를 개방함) 그리하여 경제학부 3학년의 교수는 그의
사랑하는 학생들의 앞날을 축복하여 모든 시중을 심리학부 4학년 교수에게 맡기게
되는 것인데, 한편 그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친절한 환영을 나타내어 심리학부 4학년
학생이 경제학부 3학년의 성역에 들어갈 것을 허락한다. 이렇게 해서 학생의 수가
적은 학과는 차츰 보잘것 없이 몰락해 가는 것이다. 옛날 중국의 전국시대의 황제는
자신의 세력권 안에 속한 각 나라로부터 공물을 거두어 들이기는커녕 세력도 영토도
차츰 줄어들어 겨우 충성되며 선량한 배고픈 소수의 백성만을 심복으로 붙들어 두는
상태가 되고 말았는데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다. 지식의 왕좌를 자랑한 철학도
이럭저럭하는 사이에 그와 똑같은 꼴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지식 그 자체는 없으면서 지식의 구획만이 있는 인간 문화의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전문화된 것은 있으나 하나로 종합된 것은 없다.
전문가는 있으나 인간적인 긍지를 다루는 철학자가 없다. 도가 지나친 지식의
전문화는 중국 궁정의 주방에서 볼 수 있는 지나친 전문화와 별로 다름이 없다. 옛날
어느 왕조가 멸망 하였을 때, 어떤 돈 많은 관리가 대궐의 수랏간 숙수로 있다가
도망쳐 온 한 여인을 자신의 숙수로 두게 되었다. 그는 그것이 자랑스러워서 여러
곳에 있는 친구에게 안내장을 보내어 수랏간의 숙수였던 여인의 음식 솜씨를 맛보아
주면 고맙겠다는 말을 퍼뜨렸다. 초대한 날이 가까와지자 그는 숙수에게 궁정 요리를
만들도록 명령했다. 그러자, 여인 편에서는 음식 같은 것은 도저히 만들 자신이
없다는 뜻밖의 대답이 나왔다.
  (그렇다면 너는 무슨 일을 했었단 말이냐?) 하고 관리가 따져 묻자,
  (예, 저는 만두를 만드는 일을 거들고 있었습니다)
  (그런가, 그렇다면 그날이 되거든 손님에게 대접할 맛있는 만두를 만들도록 해라)
  그런데, 숙수의 대답에는 그도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아닙니다. 전 만두를 만들 줄 모릅니다. 저는 폐하께서 드실 만두에 넣는
둥근파를 다지는 일을 맡았습니다)
  이와 비슷한 상태는 오늘날 인간 지식의 영역이나 아카데믹한 학문의 분야에서도
볼 수 있다. 인생과 인간성에 대해서는 극히 조금 밖에 알지 못하는 생물학자가
있는가 하면 같은 부류의 정신병학자도 있다. 인류의 고대사만 알고 있는 지질학자,
문명인에 관한 일은 모르지만 야민인의 심리라면 알고 있다는 인류학자도 있다.
어쩌다 친절한 사람이 있어서 인류사에 반영된 인간의 예지와 어리석음에 대하여
가르쳐 주는 사학가도 있다. 심리학자는 곧잘 인간의 행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지식을 주지만, 동시에 또 루이스 캐럴은 새디스트(이성을 학대하고 쾌감을 느끼는
변태성욕자) 였었다느니, 실험실에서 닭을 실험한 결과 강렬한 소음이 닭에게 끼치는
영향은 심장을 뒤게 하는데 있다는 것이 판명되었다느니 하는 것을 발표하여 공연히
아카데믹한 저능한 상태의 일단을 폭로하는 경우도 많다. 교육심리학자는 그 설명이
잘못되었을 때는 언제나 얼에 빠져 보이지만 옳았을 때는 더 한층 얼빠져 보인다.
  그렇지만 이 전문화되는 과정의 한편, 종합의 과정 다시 말해서 이러한 모든
부문의 지식을 한데 모아서 인생의 슬기로움이라는 가장 높은 목적에 도움이 되게끔
하려는 노력은 뼈져리게 그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예일 대학의 인류
종합 학회나 하버드 대학 창립 3백 년 기념제의 식사에서 실증되었듯이 어느 정도의
지식을 종합할 준비는 오늘날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서양의 과학자들이 좀더
단순하고 좀더 비윤리적인 사고 방법을 취하게 되지 않는 한 종합이라는 것은 실현될
수 없다. 인간의 슬기로움은 단순한 전문적인 지식이 산더미처럼 쌓인 것도
아니거니와 통계적인 평균치의 연구에 의하여 얻어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슬기로움은 오로지 견식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상식, 기지, 솔직
미묘한 직감이 좀더 널리 골고루 퍼지게 되어야만 비로소 사람은 슬기로운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논리적인 사고와 합리적인 사고와의 사이에는 뚜렷한 구별이 있다. 이것은 또
아카데믹한 사고와 시적인 사고와의 다른 점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카데믹한
사고의 예는 매우 많으나, 시적인 사고의 예는 오늘날 거의 찾아낼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은 놀라울 정도로 현대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고대
그리이스인이 현대인과 비슷했었기 때문이 아니라, 틀림없이 그들이야말로 현대
사상의 조상이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인간적인 사물을 보는 법,
생각하는 법이 있고, 중용설을 취하고 있던 점도 있으나, 분명히 현대적인 교과서를
쓴 필자의 조상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어서 의학, 식물학, 논리학, 정치학에
이르기까지 지식을 많은 구획으로 분리시켜 버린 최초의 사람이다. 그는 또한
그로써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보통 사람에게는 조금도 알 수 없는 터무니
없는 아카데믹한 잠꼬대를 입에 담기 시작한 맨 처음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잠꼬대가 심한 것으로는 도저히 오늘날의 미국의 사회학자, 심리학자를 당해 낼 수는
없다.
  플라톤은 진정한 인간적인 통찰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인데, 그 역시 새로운 플라톤
학파에서 볼 수 있는 것 같은 관념이나 추상적인 개념을 숭배하게 만든 책임자이다.
죄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추상적인 관념을 숭배하는 전통은 보다 통찰력이
풍부한 인물에 의하여 완화되는 일이 없이 오히려 관념이나 이데올로기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투로 논하고 있는 학자들 사이에 전해지고 있다. 오직 최근의
심리학만은 (이성), (의지), (감정)의 물샘틈 없는 구획을 깨뜨려 버리고 중세의
신학자에 있어서는 엄연한 실체였던 (심령)을 없애 버리는 일을 도왔다. (심령)은
죽이고 말았으나, 한편 우리의 사상을 제압하는 이상한 사회적, 정치적인 슬로우건이
수없이 만들어졌다. (혁명파), (반혁명파), (부르조아), (자본주의 = 제국주의자),
(탈주파) 따위이며 또 (계급)이니 (운명)이니 (국가)니 하는 똑같은 것을 창조하고,
개인적인 자유를 말살하는 방향으로 논리적인 행진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인생을 전체로서 바라볼 수 있는 참시하 사고 방식,
보다 재미있는 사고 방식이 오늘날 매우 요망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 제임즈
하베 로빈슨이 경고했듯이, (사상을 종전보다 훨씬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리지
않는다면, 문명에 어떤 커다란 후퇴가 일어나리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안식이 갖추어진 관찰자는 극히 솔직하게 이와 같은 확신을 말하고 있다) 로빈슨
교수는 또한 현명하게도 다음과 같이 갈파했다. (실직과 달식은 서로 시기하고 있는
것 같지만 머지않아 서로 친구도 될 수 있을 것이다) 현대의 경제학자와 심리학자는
양심적인 진실성은 지나칠 정도로 지니고 있으나, 달식이 결여되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논리를 인간적 사상에 적용할 위험성이 있는 것이며, 이 점을 크게
역설해야 한다. 그러나 근대에 있어서의 과학적인 사고의 힘과 위세는 너무나 크고
각종의 아카데믹한 사고는 온갖 경고에도 아랑곳 없이 인간의 정신은 하수도와
마찬가지로 측정할 수 있다느니 하는 따위의 천박한 신념을 지니고 끊임없이 철학의
영역으로 침입해 들어갔다. 그 때문에 우리 일상의 사고는 얼마만큼 어지럽혀진
정도로 그쳤으나 실제 정치에 있어서는 비참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2. 상식으로 돌아가라

  중국인은 (논리적 필연)이라는 말을 싫어한다. 인간적 사상에 논리적인 필연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중국인이 논리를 불신하는 것은 우선 말에 대한 불신에서
비롯되어 더욱 정의를 혐오하게 되고, 마지막으로 온갖 체계와 논리에 대해 증오하게
되었다. 아마도 말과 정의와 체계가 있음으로 해서 철학의 여러 학파가 생겼기
때문이다. 철학의 타락의 말에 몰두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중국의 학자인 공정암은
말했다. (성현은 말하지 않고, 능한 자는 이야기 하며, 어리석은 자는 논한다)
그런데 공부자 자신은 매우 논의를 좋아하였다니, 흥미있는 이야기다.
  성현과 능한 자와의 사이에는 서로 다른 점이 있다. 다시 말해서 성현은 스스로가
직접 체험해 얻는 인생에 대해 말하지만, 능한 자는 성현의 말에 대하여 말하며,
어리석은 자는 능란 자의 말을 서로 논하는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의 궤변학자
가운데는 말을 주고 받는 놀이 그 자체를 흘겨워한 순전한 담론가가 있었다. 지식을
사랑하는 데서 비롯된 철학은 말에 대한 사랑이 되고, 궤변파적인 경향이 커져감에
따라 철학과 인생은 점점 더 멀리 동떨어지고 만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철학자는
점점 더 많은 말을 쓰게 되고, 더욱 더 긴 문장을 쓰기 시작했다. 인생을 풍자하는
경구는 문장으로 바뀌고, 문장은 논증으로, 논증은 논문으로, 논문은 평석으로,
평석은 철학적인 연구로 자리를 양보하게 되고, 게다가 사용하는 말을 정의하고
분류하기 위해 더욱 더 많은 말이 필요해졌다. 이러한 과잉은 어디까지 가도 끝날
줄을 모른다. 드디어는 생활에 직접 친근감 있는 감정이나 각식은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오히려 속인들이 (도대체 당신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십니까?) 하고
역습을 할 권리를 갖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뒤의 사상사를 통하여 괴테나 사무엘 존슨이나 에머슨이나 윌리엄
제임즈 같은 인생 그 자체를 직접 체험한 소수의 독립된 사상가는 저 담론가가
말하는 투의 잠꼬대를 배척하고 완강히 분류적인 정신에 계속 반대했다. 아마도
그들이야말로 인생의 지식이 되는 철학의 참다운 의의를 유지해 준 현명한
철학자였다. 그들은 대개의 경우에는 논의를 버리고 경구로 돌아갔다. 경구로 말하는
능력을 잃었을 때는 단문을 썼다. 단문으로 명백하게 나타내지 못할 때는 논의를
시작했다. 논의를 해도 진의를 다할 수 없을 경우에는 비로소 논문을 쓰기 위해 붓을
들었다.
  인간이 말을 사랑하는 일은 무지로 빠지는 제1보며 정의를 사랑하는 일은 제2보가
된다. 분석이 세밀해지면 정의는 더욱 더 많아지고 더욱 더 불가능한 논리적인
완성을 보게 되지만, 이와 같은 노력은 무지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시에 지나지
않는다. 말은 인간의 사상의 재료이므로 정의를 내리려고 하는 노력은 매우 갸륵한
마음가짐이기는 하다. 소크라테스는 유럽의 정의광의 원조였다. 다만 위험한 것은
정의를 내린 말의 의의를 안 다음 그 정의에 사용된 말에 또 정의를 내려야 하게
되는 일이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에는 인생 그 자체를 정의하고 또는 표현하는 말
이외에 다른 말을 정의하는 다른 종류의 말을 갖는 것이 되는 셈이어서, 결국은 그
편이 철학자들의 주요한 관념이 되고 마는 것이다. 바쁜 말과 한가한 말, 일상
생활에 쓰이는 말과 철학자의 연구실에서 밖에는 쓰이지 않는 말과의 사이에는
분명히 구별이 있으며, 소크라테스와 프란시스 베이컨의 정의와 현대의 교수들의
정의 사이에도 차별이 있다. 인생을 가장 뼈저리게 느꼈었던 셰익스피어는 일체
정의를 내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정의를 내리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그의 말에는
다른 작가에서는 볼 수 없는 (실체)가 갖추어져 있다. 그의 어법에는 오늘날의
작가에게는 흔히 볼 수 없는 인간적인 비극감과 장엄감이 불어 넣어져 있다. 우리는
셰익스피어에게 어떤 특수한 여성관을 실토하게 할 수 없는 것처럼 그의 말을 특정한
기능에 고정시켜 놓을 수는 없다. 대개 정의라는 것은 인간의 사상을 숨막히게 하고
인간 그 자체의 특질인 찬란한 공상적인 색채를 말살시키기 쉬운 것이다. 대체로
정의란 이와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말이 아무래도 표현 과정에 있는 사상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체계를
사랑하는 것은 인생의 예민한 지각에 한층 더 치명적인 장해가 된다. 체계라는 것은
진리에 대한 사팔뜨기에 지나지 않는다. 체계가 논리적으로 발전하면 할수록
사팔뜨기는 더 심해진다. 인간은 가끔 진리를 인식하면서도 오로지 그 한쪽만을
보고, 그것을 한 개의 완전한 논리적 체계로 발전시키고 승격시키려고 하는
것이지만, 철학이 점점 더 인생으로부터 멀어져 가는 운명에 놓여 있는 이유의
하나는 바로 여기에 있다. 진리를 말하는 것은 말하는 것에 의하여 진리를 해치고,
진리를 실증하려고 하는 사람은 실증하려고 하는 것에 의해 진리를 손상하고 또
비뚤어지게 한다. 진리에 레테르를 붙이고 유파의 이름을 쓰는 사람은 진리를
죽이고, 스스로 신봉자라고 일컫는 사람은 진리를 땅 속에 묻어 버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진리라도 일단 체계가 된 것은 세 번이나 죽여서 묻힌 진리이다.
그를 장사지낼 때 거기에 모인 합장자 일동이 부르는 만가는 (우리는 모두 옳고
그대는 모두 잘못되었느니라) 하는 글귀이다. 어떤 진리를 장사지내느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고, 장사지낸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다. 왜냐하면 진리는
이렇듯이 옹호하는 자의 수중에서 계속 괴로와하며, 예나 이제나 철학의 온갖 유파는
(우리는 모두 옳고 그대는 모두 잘못되었느니라) 한 점을 증명하기에 분주하기
때문이다.
  독일인은 그들이 가장 자랑으로 삼는 근본성이라는 것을 내세우고 일정한 진리를
증명하기 위해 큰 논저를 쓰지만, 결국은 진리를 터무니 없는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고 만다. 그들이야말로 진실에 대한 가장 나쁜 모독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의 서양의 사상가들에게는 이와 마찬가지로 사고의 질환을 인정할 수
있다. 추상적이 되면 될수록 증상은 더욱 더 악화되게 마련이다.
  이와 같은 비인간적인 논리의 결과로서 비인간적인 진리가 나타난다. 오늘날의
철학은 인생 그 자체와는 더욱 더 인연이 먼 것이 되고, 인생의 의의와 생활의
지식을 가르치려고 하는 의도는 거의 포기하고 말았다. 그와 같은 철학은 우리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점으로 하는 인생에 대한 친밀감 또는 생활의 지각을 잃고 만
것이다. 읠리엄 제임즈가 스스로 (경험의 요소)라고 부르는 것은 인생에 대한 이러한
친근감이다. 내가 보는 바로는 앞으로 윌리엄 제임즈의 철학과 논리는 현대의
서양적인 사고법에 더욱 더 파괴적인 힘을 미치게 될 것이다. 오늘날 서양 철학을
인간적인 것으로 하려고 한다면 우선 서양 논리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다만 정확하고, 논리적이며, 논리정연하게 하려는 것보다 더욱 정열적으로 현실과
접촉하고, 인생과 접촉하여 특히 인간성과 접촉하려는 시고 방식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핝다)라는 유명한 데카르트의
발견 속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 있는 사고의 질병을 없애고 (나는 존재한다.
존재하는 그대로 충분하다) 이렇게 말하는 휘트먼의 보다 인간적이며 현명한
생각으로 옮겨져야 한다. 인생, 다시 말해서 실체는 논리 앞에 무릎 꿇고 자기의
존재와 실재를 증명해 달라고 할 필요는 없다.
  윌리엄 제임즈는 무의식중에 중국인이 생각하는 식의 사고 형식을 싫증하고
옹호하는 데 온 생애를 바쳤다. 그러나 윌리엄 제임즈가 만약 중국인이었다면,
말하는 바 학설 연구에 그렇듯 많은 말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겨우 3백 낱말이나
5백 낱말의 수필에, 또는 한가로운 마음으로 쓴 일기 형식의 수기에,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믿는다고 쓰는 것으로 그쳤을 것이다. 말을 많이 쓰면 오해를 받을 근심도
많아지는 것이니까, 그는 그 말 자체에 대하여 겁장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윌리엄 제임즈에게는 민감한 인생에 대한 지식과 인간적인 경험의 다양성과
기계론적인 합리주의에 대한 반항이 있었다. 그는 또 사상을 끊임없이 유동시키려고
애썼다. 그리고 나야말로 (절대적)이고 보편적이며 본원적인 진리를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혼자만의 체계 속에 집어 넣어 버리려는 인간에 대해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틀림없는 하나의 중국인이었다. 그는 또 예술가의
지각적인 현실감은 개념적인 현실감보다 훨씬 중요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중국인이었던 것이다. 진실한 철학자라는 것은 감수성을 가장 높은 촛점으로 하여,
생명의 흐름을 지켜보고 신기하고 이상한 역설이나 모순, 원칙에 맞지 않는 알 수
없는 예외에 부딪치면 영원히 놀라움을 느끼는 마음가짐이 되어 있는 사람을 말한다.
체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정확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체계이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태도는 온갖 서양 철학의 학파에 대하여
파괴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그가 말했듯이 우주의 일원관과 다원관의 차이는
철학사상 가장 함축성 있는 점이다. 그는 철학으로 하여금 화려한 공중 누각을 잊게
하였으며 인생 그 자체로 되돌아갈 수 있게 했다.
  공자는 이렇게 말했다. (도는 잠깐 동안이라도 인간에서 떨어져선 안된다.
떨어져야 할 것은 도가 아니니라) 공자는 또 제임즈의 입에서라도 나올 듯한 기지에
가득찬 짧은 말로 (도가 인간을 크게 만드는 것이며, 인간이 도를 크게 만드는
것이니라) 이렇게 말했다. 세계는 삼단 논법이나 의론이 아니라 실재이다. 우주는
말하지 않고 오직 살아 있는 것이다. 우주는 논의하지 않는다. 오직 존재할
따름이다. 영국의 어느 천재적인 소질이 있는 저술가의 말을 빌면, (이성은 신비의
한 항목에 지나지 않는다. 훌륭하기 그지없는 의식의 등 뒤에서 이성과 회의가 서로
얼굴을 맞대고 있다. 논리적인 필연은 썩었다. 그러나 회의와 희망은 사이가 좋다.
우주에는 야성이 있다. 매의 날개처럼 날짐승의 냄새가 난다. 그러나 그것은 불행한
일이 아니다. 대자연 이 모든 것이 기적이다)
  나는 생각한다. 서양식인 논리학자에게 필요한 것은 얼마간의 겸손이다. 그들을
구제하는 임무는 오리지 헤겔식의 자만을 고치는 사람에게 있다.



    3. 정리를 알라

  논리와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에 상식이 있다. 상식이라고 하기보다는 정리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정리를 중히 여긴다는 것은 인간 문화에 있어 가장
건전한 최고의 이상이어서, 정리를 아는 사람은 으뜸가는 문화인이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완전무결할 수는 없다. 다만 정리를 알고 있는 믿음직한 인간이 되도록
마음쓸 뿐이다. 실제로 나는 세계의 사람들이 개인적인 문제이건 국가적인 문제이건
이 정신을 몸소 터득하는 시대가 올 것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정리를 아는 국민은
평화로운 생활을 하며, 정리를 아는 부부는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딸의 신랑감을
고르려면 표준은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상대가 정리를 아는 사람인가 어떤가 하는
문제뿐이다. 절대로 싸움을 하지 않는 완전한 부부라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다.
다만 정리를 따져서 다투고 정리로써 화해하는 정리 있는 부부를 생각할 수 있을
뿐이다. 정리 있는 인간 세계야말로 평화와 행복을 즐길 수 있다. 정리 시대라고 할
만한 시대가 언제고 온다면 그야말로 평화로운 시대이며 정리 있는 정신이 널리
퍼지는 시대일 것이다.
  인생의 정리를 소중히 여기는 정신은 중국이 세계에 제공해야만 할 최선의 것이다.
중국의 군벌들이 50년이나 앞날의 세금을 국민으로부터 강제로 걷어가는 것이 정리를
아는 정치를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지만, 하여간 이 정신이야말로 중국 문명의
정수이며, 그 최선의 측면이라고 나는 말한다. 나의 이와 같은 발견은 우연히 오랫
동안 중국에 살았던 두 미국인에 의해 확인되었다. 그 중의 한 사람으로 30년이나
중국에 머물렀던 미국인은 중국의 온갖 사회 생활은 (강리(도리를 말한다))라는 말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한다. 중국인이 싸움에서 마지막 결판을 내는 말은, (이봐,
그게 도리에 맞는다는 말이냐!) 하는 말이다. 누구나 곧잘 하는 가장 통렬한 선어는
(부강리)한 놈이라는 것, 즉 (이치에 맞는 말을 하지 않는 놈이다)라는 한 마디다.
자기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을 인정하게 되면 싸움은 이미 진 것이다.
  인간미가 있는 사고 방법이란, 정리를 아는 사고 방법이라는 뜻이다. 논리적인
인간은 언제나 자기를 올바르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인간적이 아니며, 그렇기
때문에 잘못되어 있다. 그런데 정리를 아는 인간은 때에 따라서는 자기가 잘못되지나
않을까 하고 의심을 한다. 그러므로 언제나 올바른 것이다. 편지의 추신에는 이 두
가지의 대조가 나타나는 일이 있다. 나는 언제나 친구가 보내 주는 편지의 추신을
사랑하는데, 본문과 완전히 모순된 말을 쓴 추신은 특히 재미있다. 추신 가운데는
본문을 쓴 뒤에 가슴에 손을 대고 여러 가지 세상에서의 정리에 비춰 보아서 생각한
일이나 망설임이나 기지나 상식이 한데 섞여 있다. 어떤 명제를 긴 논의로
증명하려고 안간힘을 쓴 뒤에 갑자기 어떤 직각에 부딪쳐서 번갯불처럼 상식이
비쳤기 때문에 이제까지의 의론은 완전히 허물어져 버리고 자기가 잘못 되었음을
인정한다. 이런 것이 온정 있는 사상가인 것이다. 또 이와 같은 사고 방법이야말로
내가 인간미 있는 사고 방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편지의 본문에는 논리적인 인간으로서 말하고, 그 추신에서는 참다운 인간적
정신과 정리를 아는 사람으로서 말하고 있는 편지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어떤 아버지가 여자 대학에 입학시켜 달라고 졸라대는 딸에게 편지를 쓰고 있다고
치자.
  그는 붓을 달려 어째서 딸을 대학에 보낼 수 없는가 하는 이유는 첫째, 둘째,
세째로 조항을 들어 말하고 누가 보아도 그럴 듯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만한
갖가지의 논거를 적어 놓는다. 이론을 정연하게 늘어놓아 반문할 여지라곤 전혀
없다. 다시 말해서 현재 이미 오빠 셋을 대학에 보내고 있으며, 어머니가 병이
낫으니 누구든지 집에서 시중을 들어 주지 않으면 곤란하다느니, 어쩌느니 여러
가지를 적어 넣었다. 그런데, 편지 맨 마지막에 이름을 쓰고 나서 간단한 글귀를 한
줄 적어 넣었다. (그래, 괜찮겠지, 주리야, 올 가을에 입학할 생각으로 준비를 해
두어라. 어떻게 되겠지)
  또는 아내에게 편지를 써서 이혼할 뜻을 적어 보내려고 하는 남편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럴 수밖에 없다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첫째, 그녀는 남편에 대하여
성실성을  잃고 있었다. 둘째, 남편이 집에 들어 왔을 때 따뜻한 음식을 마련해 준
일이 없다는 등등, 모두 당연한 그럴 만한 이유이며 정당하다고 생각되는 점도 있다.
만약 변호사를 부탁한다면 논리는 더 한층 완전해지며, 사정은 한층 더 정정당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편지를 다 써 놓고 보니 갑자기 마음이 변하여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만한 글씨로 갈겨 쓰기를 (제기랄, 사랑하는 소휘여! 나야말로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구려. 나는 꽃다발을 들고 집으로 돌아가겠소) 하였던 것이다.
  이 양쪽 편지의 본문에 있는 논의는 매우 완전하며 옳다.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의
논리적인 인간이다. 그런데 추신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참다운 인간적인 정신...
인간적인 아버지와 인간적인 남편이다. 조금만 정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쓸데없이
까다로운 의논 따위에 골치를 앓지 않고 서로 반대되는 충동과 감정과 욕망이 변해
마지않는 바다 가운데서 건전한 키를 잡도록 애써야 할 것이며, 그것이 인간적인
정신의 의무인 것이다. 우리가 진실되게 만들어 주는 것이 진실이라는 것이 인간
세계에 잇어서의 진리의 모습이다. 공박할 여지가 없는 의론에는 인정이라는 것이
맞서며, 정당한 것일지라도 애정 앞에서는 약한 법이다. 그러니까 가장 확신을 가질
수 있는데, 아무래도 논리에 맞지 않는다는 경우가 가끔 있다. 법률조차도 그가
주장하는 절대적인 정의에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있다. 법률은 가끔 조문의 (조리
해석)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될 경우가 있다는 것, 최고 행정장관에게 사면권을
주고 있다는 것을 보면 뚜렷하다. 에이브러햄 링컨은 어떤 어머니의 아들에 대해
이 사면권을 매우 효과 있게 행사했다.
  이렇듯이 정리를 중히 여기는 정신은 온갖 사고 방법을 인간적인 것으로 하며,
우리들 자신이 정확하다는 것에 대한 확신을 감퇴시킨다. 그것은 우리의 관념을
원숙하게 하며, 행위에 있어 모가 난 곳을 둥글게 만들어 준다. 여기에 대립되는
것은 사상과 행위... 개인 생활, 국가 생활, 결혼, 종교, 정치에 있어서의 온갖
종류의 광신과 독단이다. 나는 감히 주장하는 바인데 중국에서는 지적인 광신과
독단논이 다른 여러 나라보다 적다. 중국의 폭도는 매우 흥분하기 쉬운 면도 있으나
정리를 분별하는 정신은, 중국의 전제 군주제, 종교, 또 이른바 (부인의 억압)을
매우 인간미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 또한 이런 일들은 모두 얼마간 조건부로
받아들여야 하지만, 어떻든지 틀림은 없다.
  정리라는 것이 중국의 황제, 신, 남편을 단순한 인간으로 끌어내리고 말았다.
중국의 역사가는, 황제는 하늘의 명령에 의해 통치하는 것이며, 잘못 다스렸을
경우에는 (하늘의 명령)을 잃는다는 이론을 발전시켰다. 황제가 나쁜 정사를 할
경우에는 우리는 사정없이 목을 베고 만다. 지난날 수없이 망하고 흥한 그 많은
왕조의 왕이나 황제의 목을 너무나 많이 베었으므로 그들이 (신성)하다거나,
반신적이라는 일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 중국의 성현은 신으로 모셔지지 않고 오직
언제나 지식의 스승으로서 우러를 뿐이다. 또 중국의 신은 완전무결한 전형이 아니라
중국의 관리와 마찬가지로 돈으로 어떻게라도 될 수 있는 썩어 빠진 사람들이어서
아첨도 통하는가 하면 뇌물도 통하는 사람들이다. 중국에서는 정리를 떠난 사람은 곧
부친런칭(인간성으로부터 멀리 동떨어진 것)이라는 낙인을 찍히고 만다. 너무나
성인인 체하며 완전무결한 인간은 마음 속에 이상이 있다고 여기고 반역자처럼
다루어지는 일조차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날의 유럽을 살펴본다면, 정리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정리는 커녕 이성조차 통하지 않고, 오히려 광신적인 정신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유럽의 실정을 보면 누구나 신경과민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러나 다만 국가의 목적인 충돌이 있다든다, 국경 문제나 식민지를
요구하는 마찰이 있다든가, 그런 일만이 원인은 아니다. 그런 일들만이라면 이성으로
판단하여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좀처럼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그
근원이 더 깊고, 오히려 유럽의 통치자라는 사람들의 정신상태에서 빚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다른 것으로 비유해서 말한다면 낯선 도시에서 택시를 탔으나 갑자기
운전수를 믿을 수 없게 되어 불안한 마음에 사로잡히고 마는 것과 같다. 운전수가
지리에 어둡고 정확한 노선으로 손님을 목적지까지 모시지 못한다면, 다소 이야기를
납득할 수 있지만, 운전수가 무언가 이상한 말을 중얼거리는 소리가 좌석에 앉아
있는 손님의 귀에 들려, 이 사람이 과연 올바른 정신의 소유자인가 하는 의심을 갖기
시작하게 되면 그야말로 곤한한 문제다. 더우기 정신이 이상한 운전수가 권총을
가지고 있고, 손님은 차에서 내릴 기회가 없다면 신경과민은 단연 극도로 심해진다.
그러나 인간 정신의 이런 컬리커추어는 인간 정신의 참다운 모습은 아니다. 온갖
나쁜 병의 물결에 휩쓸리듯 마침내는 자기 자신을 불태워 버리고 마는 단순한 정신
착란, 일시적인 발광의 단계에 서 있는 것이다. 이렇게 믿을 만한 이유가 나에게는
있다. 우리는 인간의 정신력에 결국은 신뢰의 뜻을 나타낸다. 그것은 원래 한정이
있는 것이긴 하지만 무모한 유럽의 운전수의 지능보다는 한없이 높은 그 무엇인가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평화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는 앞으로 머지않아 정리에 입각하여 사물을 생각하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믿을 만한 이유가 우리에게는 있다.

제12장 신에 가까운 것은 누구인가

    1. 종교의 부활

  신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신의 뜻을 좇는 것이고 무엇이 신의 뜻을 좇지 않는
것인가.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다고 뽐내는 사람들이 꽤나 많은 오늘날 내가 다음과
같은 문제를 다루게 되면 신을 모독하는 녀석이니, 예언자니, 하고 비난의 대상이
안될 수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대우주의 몇 억 분의 1도 되지 못하는 작은 지구,
그 지구의 또 몇 억 분의 1도 되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생물이 감히 신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대우주의 생명과 훌륭하게 조화된 관계를 갖게
되지 않는 한, 어떠한 생의 철학도 완전하다고는 말할 수 없으며 인간의 정신 생활에
대한 어떠한 사고 방식도 매우 중요한 존재이다. 또한 가장 중요한 연구 제목이다.
다시 말해서 휴우머니즘의 본체이다. 그러나 그 인간은 넓고 큰 우주에 살고 있다.
인간 못지 않게 놀랄 만한 우주에 살고 있다. 그러니까 인간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보다 넓고 큰 세계의 기원과 숙명을 무시하고서는 참된 의미의 만족스러운 생활을
해 나갈 수가 없다.
  정통파 종교는 역사적인 발전을 계속해 나가는 동안에 엄밀하게 종교의 정신적인
테두리 밖에 놓여져야 할 것... 다시 말해서 물리학, 지리학, 천문학, 범죄론 또는
부인관 따위와 한데 뒤섞이고 말았다. 이것이 정통파 종교의 곤란한 점이다.
  만일 도덕 의식의 영역 안에 머물러 있었다면 이른바 종교재정위의 일도 오늘날과
같이 그토록 거창한 것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의 관념을 깨뜨리기보다는
걸핏하면 들고 나오는 (천국)과 (지옥)의 관념을 깨뜨리는 편이 편하다.
  한편, 과학은 현대 기독교도들에게 우주의 신비에 대한 새롭고 깊은 의의와,
에네르기를 바꾸어 이름한 명사 즉 물질이 지니고 있는 새로운 개념을 뚜렷하게
하고, 신 그 자체에 대해서는 제임즈 지인즈 경도 말한 바와 같이, (우주는 커다란
기계라기보다는 위대한 사상인 편에 가까와)진 것 같다. 수학 그 자체가
수학으로서는 계산해 낼 수 없는 것의 존재를 증명했다. 그리하여 종교는 어쩔 수
없이 물러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이제까지와 같이 자연 과학의 영역에서 많은 말을
하기를 그만 두고, 그런 것은 종교가 관여할 바가 아닙니다, 하고 깨끗이 승인해야만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하물며 인류의 역사는 4천 년이라느니 백만 년이라느니,
지구는 평평하다느니 둥글다느니 접는 차탁형이라느니, 지구는 인도 코끼리 등 위에
타고 있다느니, 또는 중국 거북이가 떠받치고 있다느니 하는 따위의 전혀 터무니없는
제목을 정신적인 경험성을 말하는 근거로 삼는다는 것은 더군다나 어떨까 하고
생각한다. 종교는 모름지기 정신적인 영역에만 머물러 있어야 할 것이다. 아니
틀림없이 머물러 있을 것이다. 그 영역이야말로 어떠한 의미에서나 꽃이나 물고기나
별의 연구와 겨를 수 있는 그 자신의 존귀함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현대 생활에 적응될 만한 종교는 사람들이 저마다 멋대로 교회에서 찾아내 오지
않으면 안될 것으로 생각한다. 무릎 꿇고 기도를 드리고 색유리창을 바라보는 것
같은 예식과 예배의 분위기 속에서는 신학상의 교의에 대하여 다소 의문을 품는 일은
있더라도 위대한 정령 앞에 무릎 꿇고 싶은 마음이 되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예배는
참된 심미적인 경험이다. 그 사람 자신이 겪는 체험이다. 사실 산 위 나무들의 윤곽
뒤로 지는 저녁해를 바라보는 것과도 비슷한 심미적인 경험이다. 그 사람에게 있어
종교는 의식의 최종적인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시와 매우 가까운 심미적인
체험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를 본다면 누구나 경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예배할 정도의 신은 매일매일의 조그마한 혜택을 부탁할 만한 너절한
신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북쪽으로 항해할 때는 북쪽으로 바람을 불게 하고,
남쪽으로 갈 때는 남쪽으로 바람을 불게 해 주는 그런 신은 아닐 것이다. 순풍을
불게 해 준 것을 신에게 감사드리는 것은 뻔뻔스러운 일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이기적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중요한 한 개인인 그가 북쪽으로 항해할 때는,
남으로 항해하는 사람들을 신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영험이라면, 아무도 다른 사람의 행복을 원하지 않는 자기 본위의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존재하는 참뜻을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종교가 경과해 온 괴상한 변질에
놀라움의 눈을 크게 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의 형태 그대로 종교를
정의하려고 하면 어리둥절해지고 말 것이다.
  나는 생각하거니와 우리네의 생활 속에 종교로서 남아 있는 것은 인생의
아름다움과 장대함과 신비로움, 또한 그 의무에 대한 매우 단순화된 존경하는
마음이며, 신학이 오랜 세월에 걸려서 종교의 표면에 뒤집어 씌운 정답고도 기쁘게
느껴야 할 제물이나 신조는 이미 없어져 버린 것이다. 현대인에게는 이것으로
충분하다. 중세의 행복했던 정신적인 신권 정치는 결정적으로 물러나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영생 문제에 대해서 말하면, 이 사상이야말로 종교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두 번째로 가장 큰 이유였으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죽을 때는 미련없이
죽겠노라고 완전히 이승의 생활만으로 만족하고 있다.
  영생, 영생 하는 말을 들으면 어딘지 아무래도 병적인 데가 있다. 사람이면서 영생
불멸을 바란다는 것은 나로서는 아무래도 납득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의
영향이 없었다면, 이렇게 어이없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일은 아마도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시의 영역에 속하는 허구와 사실 가운데 자리잡은 아름다운 명상이라든가,
고상한 환상이니 하는 것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것은 그런 것이 아니라 영생
문제는 매우 진지한 문제가 되었으며, 더우기 승려에 있어서는 죽음과 죽은 뒤의
생명이 어떠냐 하는 생각이 이 세상에서의 주요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어떤가 하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반수의 사람들은 기독교도이건
이교도이건 죽는 것을 무서워 하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그들은 천국과 지옥의
위협을 받는 일도 없고,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도 별로 없다. 물론 자기가 죽은
뒤의 묘비명이나 묘비의 설계, 화장의 (가부)에 대해서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주고
받는 모습은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인데, 이것 역시 반드시 천국으로 갈 것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죽으면 목숨은 촛불과 같이 꺼지고 마는 것이라고
정직하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다. 현대에 있어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은
영생에 대한 불신을 나타내어 그런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H. G.웰즈, 알베르트 아인쉬타인, 아아더 키이드경, 그밖에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죽음의 공포를 정복하는 것은 반드시 일류급 인물이 아니라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개인적인 영생 사상 대신에 좀더 수긍할 수 있는 영생 사상을
지니고 있다. 즉 인종의 영생, 행위와 사상의 영생이다. 우리가 죽더라도 뒤에 남겨
놓은 일이 여전히 후세 사람들을 움직이게 하고, 아무리 작은 것일지라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적인 생명 속에서 한 구실을 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다.
우리가 꽃을 따서 꽃잎을 뜯어 땅바닥에 버리더라도, 그 꽃이 풍기는 미묘한 향기는
공기 속에 남아 있다. 이런 영생 사상 편이 훨씬 멋있고 이치에도 맞으며 이기적인
데가 없어 좋다. 이런 참된 뜻에서 루이 파스퇴르나 루터 버어뱅크 토머스 에디슨이
우리들 속에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육체)란 필경 끊임없이 변화하는
화학성분의 결합을 추상적으로 일반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니까, 육체가
없어졌다고 한들 어쨌다는 것인가. 인간은 차츰차츰 자기의 일생이 영원히 흘러서
그치지 않는 큰 강물 속의 한방울의 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리하여
기꺼이 생명의 대본류에 자기의 역할을 맡기려고 하게 된다. 그다지 욕심 많은
생각만 갖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2. 어째서 나는 이교도가 되었는가

  종교는 언제나 자기만의 것이라고 샐각한다. 사람은 모두 자신의 종교관을 세워야
한다. 진지하기만 하다면 결말은 어떻든, 신의를 어기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종교적인 경험은 각자가 모두 옳다. 왜냐하면 앞서도 말한 것처럼 각 개인의
종교적인 경험을 논의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 문제로 매우 괴로와한
정직한 영혼의 진지한 체험담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도움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종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언제나 일반론을 피하고 나 자신의
이야기를 하기로 하고 있다.
  나는 이교도이다. 이 성명 가운데는 기독교에 대한 반역적인 뜻이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반역이라는 말은 너무 가혹한 말이다.
나의 경우는 아주 천천히 걸음을 옮겨 기독교로부터 조금씩 멀어진 인간이며, 그
동안에도 사랑과 경건한 마음으로 죽을 힘을 다해 여러 가지 교리에 매달려
보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것은 모두 나에게서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반역이라는
말은 이러한 심정을 올바르게 표현한 것이 못된다. 즉 증오하는 마음은 절대로
없었으니까 반역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나는 목사의 집에서 태어나 한때는 기독교의 선교사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그 덕분에 종교적으로 고투한 모든시기를 통하여 묘한 나의 자연적인 감정은
반종교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종교의 편이었다. 감정과 이성과의 싸움을 거쳐 점차로
어떤 입장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테면 속죄설을 단호히 부정하였다. 그것은
이교도의 입장에서 가장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는 문제다. 우주와 인생에 대한
이러한 신앙 상태는 내적인 투쟁을 할 필요도 없고, 나에게 자연스럽고도 편한
마음을 갖게 해주었다. 지금도 그 점은 변함이 없다. 이런 마음의 과정은 갓난
아기가 젖에서 떨어지고, 잘 익은 사과가 땅에 떨어지듯이 자연스럽게 찾아왔다.
사과가 떨어질 시기가 왔을 때에는, 나는 그 떨어지는 것을 막지 않는다. 노장
철학가의 말을 빈다면 도에 산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또 유럽인의 말투로는
자기의 영혼의 불길에 따라 자기와 우주에 충실하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지성적인 진지함이 없다면 아무도 진실되고 행복할 수는 없다.
이미 진실되다면, 천국에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이교도라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바로 진실된 것이다.
  그러나 (이교도)라는 것은 (기독교이다)라는 것과 같으며, 단지 말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그것은 소극적인 성명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 독자에게는 이교도라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라는 뜻일 뿐이리라. 그리고 (기독교도이다)라는 것은 매우 막연하고
애매한 말이기 때문에 (기독교도가 아니다)라는 말로 오해되고 되고 있다.
이교도라고 하면 종교를 믿지 않고 신의 존재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해석된다면,
그것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잘못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신)이니 (인생에 대한
종교적인 턔도)니 하는 의의는 아직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옛날부터
위대한 이교도들은 자연에 대하여 언제나 몹시 경건한 태도를 가져왔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말을 보통 흔히 쓰는 그런 뜻으로 해석하여, 단지 교회에 가지 않는
사람(그러나, 심미적인 영감을 얻으러 가는 것은 이뿐만은 아니다. 그런 것이라면
지금의 나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의 종단에 속하지 않고 보통의 정통파적인
교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이러한 식으로 생각해 두어야 한다.
  적극적인 이교도로서 중국의 이교도가 있는데, 이들은 내가 누구보다도 친밀감을
갖고 이야기할 수 있는 유일한 이교도이다. 그들은 이 땅 위의 생활이야말로 인간이
염두에 둘 수도 있고 또 염두에 두어야 하는 모든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하고 있다.
즉 이 세상에서의 목숨이 끝나는 날까지 아주 즐겁게 살아가려는 것이다. 인생의
깊은 슬픔도 잘 알고 있지만, 쾌히 그것에 직면하고, 인간 생활의 착하고 아름다운
면에 마주치게 되면 언제나 날카로운 관찰안으로 이를 보고 착하 일을 행하는 것 그
자체가 충분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천국에 가기 위해 선을 행하거나, 천국에
마음이 끌리고 지옥에 위협을 받거나 하지 않으면 선을 행할 필요도 없다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그런 (종교인)에 대하여 그들은 가벼운 연민이나 경멸을
느끼고 있다. 이 점은 나도 수긍이 간다. 이 설명이 옳은 것이라면, 자기 자신이
자각하고 있는 이교도 외에도 아직도 많은 이교도가 미국에도 있다고 나는 믿고
있다. 현대의 자유주의적인 사상을 가진 기독교도와 이교도와의 간격은 사실상 종이
한 겹의 차이다. 다른 것은 그러한 기독교가 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할
때뿐이다.
  종교적인 경험의 깊이를 나는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교황청 추기관인 뉴유먼과
같은 신학자가 아니더라도 이런 경험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기독교란
하찮은 것이며, 오늘날까지 무서운 오해를 받았을 것이다. 현재 내가 보는 바로
기독교 신자와 이교도와의 정신 생활에서 서로 다른 점은 다만 다음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신이 지배하고 보살피고 다스리는 세계에 살며 끊임없이 신과
교섭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애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서 인도하시는 세계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행동은 또한 때에 따라서는 신의 아들이라는 의식과
일치되는 데까지 높여지는 수도 있다. 물론 사람의 일이니까 모든 생애를 통해서
또는 1주일 동안을 통해서 또는 단 하루만이라도 이 수준을 줄곧 유지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어서 그의 생활은 인간적인 수준과 참된 종교적인 수준 사이를
오르내리고 있다.
  한편 이교도들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모습은 흡사 고아와도 같은 것이다. 천국에
언제나 누군지 그를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어서, 기도를 드린다는 영적인 관계를
통하여 자기의 복리를 지켜 주고 있다는 든든한 마음은 이교도에게는 주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기도교가 살고 있는 세계에 비하면 그다지 태평스러운 세계는
못된다. 그러나, 그곳에는 또한 고아로서의 은혜와 위엄이 있다. 필요에 의하면
독립을 배우고 자기를 지탱해 나가는 길을 알며, 원숙해질 수 있는 덕을 닦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고아를 보면 알 수 있다. 모두 그와 같다.
  이교로 개종하게 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참으로 나를 겁나게 한 것은 이지적인 신앙
문제는 아니었다. 신의 사랑을 받지 않고 세상에 내던져진다는 느낌이었다.
기독교도로 태어난 많은 사람들은 모두 그렇겠지만, 만일 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이 세상은 밑바닥이 없는 연못이 되고 말 것이라고 나는 느꼈던
것이다.
  그러나 이교도가 이윽고 도달할 수 있는 하나의 경지가 있다. 거기에 서서
기독교의 세계를 보면, 보다 따뜻하고 보다 유쾌한 듯이 보이지만 동시에 훨씬
유치해 보이며 아직 미숙하다고 말하고 싶은 데가 있다. 기독교 세계의 환각이
깨지지 않도록 가만히 놓아 두면 유익하기도 하고 활동하기에 편하게 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참된 이교도의 생활 방법 이상의 것도 아니고 이하의 것도 아니다. 또
아름답게 채색된 세계이기는 하지만, 그 때문에 뚜렷하고 굳건한 진실성이 부족하며
그렇기 때문에 가치가 낮은 세계이다. 나라는 인간은 무슨 일이건 적당히 채색되어
있다든가 실질적인 진리가 없다든가 하는 것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치명적인 타격을
받게 된다. 진리를 알기 위해서는 자진해서 치러야만 하는 댓가가 있는 법이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되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입장은 살인자의 입장과 아주
비슷하며, 심리적으로는 똑같은 것이다. 즉 사람을 죽이면 다음에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은 죄를 자백하는 일이다. 이교도가 되려면 약간의 용기가 필요하다고 내가
주장하는 이유는 바로 이 점이다. 그렇지만, 한 번 최악의 것을 받아들인 사람에게는
더 이상 두려워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음의 평화란 여러분이 최악의 것을
받아들였을 때의 정신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여기서 나 자신이 이교 또는 도교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와 이교도의 세계가 서로 다른 점은 다음과 같이 말하여도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내 마음속에 있는 이교도는 긍지와 겸허한 생각 때문에, 다시 말해서 기분상의
긍지와 이지적인 겸허한 마음 때문에 기독교를 거절한 것이다. 그러나 아마도
전체적으로 말한다면 후자 편이 중요한 동기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우선 정서적인
자존심(긍지)이 어째서 동기의 하나가 되었는가 하면 우리가 근엄하고 단정한 신사
숙녀로서 행동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사실 외에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이론상(또한 여러분이 굳이 분류하고 싶다면) 나의
이러한 생각은 전형적인 휴머니즘이라고 부르는 것이 좋다.
  다음에 겸허한 마음, 이지적인 겸허한 마음이 가독교를 배격하게 하는 좀더 강한
동기가 되었다는 것은 간단한 이유에서이다. 즉 이 우주의 극히 작은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 태양계, 그것의 극히 작은 한 조각에 지나지 않는다는 지구, 나아가 그
작은 지구의 극히 작은 한 조각인 하나하나의 인간이 대 조물주이 눈에 아주 중요한
것으로 비친다는 것은 우리의 천문학상의 지식으로 미루어 도저히 믿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뻔뻔스러움과, 그 교만하게 거드름을 피우는 태도는 나를 아연하게
만들었다. 어찌 백 만분의 일도 모르는 지극히 높은 존재의 성질을 생각하거나 그
속성을 가정하거나 할 수 있겠는가.
  물론 개인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기독교의 근본 교의의 하나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일상생활의 실제에서 얼마나 우스운 불손한 태도를 발휘하고 있는가를
다음 두서너 가지로 알아 볼까 한다.
  나의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르기 나흘 전에 큰 비가 내렸다. 상주 지방에서는 7월에
흔히 있는 일이지만, 만일 계속해서 비가 내린다면 시가지는 홍수가 나서 장례식은
거행할 수 없다. 가족의 대부분이 상해에서 와 있었기 때문에 장례식을 연기한다는
것은 좀 괴로운 입장이었다. 집안 식구들 가운데 한 기독교도가 있었다. 좀
극성스러워 보였으나 중국의 기독교도로서는 그다지 드물게 보는 편도 아니었다. 그
본인이 나에게 말하기를, 자기는 하느님을 믿고 있는데, 하느님은 자신의 자손들을
도와 주실 것이 틀림없다고 하면서 비를 멎게 해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그러자 비가
멎었다. 마치 보잘것 없는 기독교도 집안에서 날을 연기하지 않고 장례식을 치를 수
있도록 비가 멎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부인이 한 말이 정말 걸작이었다. 우리
한 가족이 없었다면 하느님께서는 아무런 거리낌없이 창주에 사는 몇 만명의
주민들을 무서운 홍수의 희생이 되게 하셨을 것이라느니, 비가 멎은 것은 창주에
사는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들 기독교도의 한 집안을 위해서인 것이며,
예정대로 장례식을 거행하고 싶으니 비를 멎게 해 달라고 기도드린 덕분이라는
것이었다. 이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자기 본위인 사고방식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하느님이 이토록 이기적인 자식들에게 은총을 내리시리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옛날 중국에 불교를 믿지 않는 학자와 신자인 어머니가 있었다.
  독실하게 불교를 믿는 어머니는 밤낮으로 천 번씩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하면서
부처님의 은총을 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염불을 하기 시작하면 그녀의 아들이
번번이 (어머님도 참!) 하고 소리를 지르곤 했다. 어머니는 이를 몹시 귀찮게
생각했는데 아들이 말하기를 (이것 보세요 어머님, 부처님 역시 어머님의 목소리를
들으면 어머님이 귀찮아 하시는 것처럼 귀찮게 여길 거라고 생각하시지 않습니까?)
했다는 것이다.
  나의 부모님은 두 분 다 독실한 기독교도였다. 아버지가 저녁 기도를 드리는 것을
듣는 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했다. 나는 다감하고 종교적인 아이였다. 목사의 아들로서
나는 종교 교육의 혜택을 받았다. 그러나 혜택을 받음과 동시에 그 약점 때문에
괴로움도 받았다. 종교 교육이 베풀어 준 은전에 대해서는 나는 언제나 감사했고,
그 약점을 자신의 힘으로 바꾸었다. 중국인의 철학에는 인생에 행운, 불운이란 따로
없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중국 연극을 보러 가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고, 중국 악사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는 것도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다. 또한 위대한 중국 민족의 전설이나 신화와도
완전히 절연되어 있었다. 기독교 계통의 대학에 들어간 뒤로는 그나마 아버지에게서
받은 초보적인 중국 고전의 지식도 완전히 무시되는 생활을 하게 되었다. 물론
이것은 오히려 좋았던 일인지도 모른다. 그 덕분에 뒷날 완전히 서구적인 교육을
받은 뒤에, 동쪽의 동화의 나라를 찾아간 서쪽 나라의 어린이처럼, 신선하고 발랄한
기쁨을 갖고 동양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학생 시절과 청년 시절에 붓을
버리고 만년필을 쓴 것은 나에게는 가장 큰 행운이었다. 왜냐하면 나의 마음의
준비가 다 될 때까지, 동양 정신 세계의 신선함이 손상됨이 없이 보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베수비어스 화산이 폼페이 시를 뒤엎어 버리지 않았더라면 오늘날의
폼페이의 기적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돌을 깐 차도 위에 마차바퀴가 지나간 자국이
오늘날 보는 것과 같이 그토록 뚜렷하게 새겨져 남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독교
계통의 대학에서 받은 교육은 실로 나에게 있어서는 베수비어스 화산이었다.
  사색한다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사색은 언제나 악마와
손을 맞잡고 있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젊은 대학생 시절이 나의 가장 종교적인
시대이기도 했다. 그 무렵에 기독교적인 생활의 아름다움을 느끼는 감성과 무슨
일이나 이성으로 처리하려는 지성과의 싸움이 일어났다.
  톨스토이로 하여금 하마터면 자살하게 만들 뻔했던 고뇌나 절망을 이상하게도 나는
느껴본 일이 없었다. 어느 단계에서도 나는 나 자신을 빈틈없는 기독교도라고
느꼈고, 신앙에도 파탄을 느끼지 않았다. 다만 톨스토이와 비교해 볼 때 약간 더
자유주의적이고, 기독교의 교의를 받아 들이는 것도 적었다. 그러나 어쨌든 나는
언제나 산상의 수훈으로 되돌아 올 수가 있었다. (들에 핀 백합을 보라)고 한 싯구는
너무나 잘된 말이었기 때문에 좀처럼 의심해 볼 수도 없었다. 나에게 힘을 부어 준
것은 이 싯구와 기독교도로서의 정신 생활을 하고 있다는 의식이었다.
  그러나, 교리는 급속도로 나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우선 표면적인 문제가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서기 1세기 무렵에 일어나리라고 예상되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도 일어나지 않았고 사도 또한 부활되지 않았는데도, 이미오래 전에
깨져 버린 (육체의 부활)은 아직도 사도 신앙 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 나로
하여금 의아하게 느끼게 한 일 중의 하나였다.
  신학과에 적을 두고, 신성한 것 가운데서도 가장 신성한 것을 배우게 된 뒤로,
신앙 가운데의 또 하나의 제목, 처녀 잉태가 논의의 대상이 되어 있어서 미국
신학교의 여러 선생들의 설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독교 신자는
세례를 받기 전에 우선 이 제목을 무조건 믿어야만 하게 되었는데, 같은 교회에
속하는 신학자들이 이 문제를 논의의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분격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진지한 태도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또한 아무래도 옳은
일이라고도 생각할 수 없었다.
  또 나아가서, 천국의 (수문)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매우 하찮은 일에 대한
신학적인 주석을 공부하게 된 뒤로, 내 마음도 편해져서 이제는 더 이상 진지하게
신학을 연구해 보겠다는 생각은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따라서 내 성적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교수들은 내가 기독교 선교사로서 알맞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장로도
내가 그만 두어도 좋다는 정도로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나를 가르친다는 헛된 일을
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이것이 그 모습을 달리한
하늘의 축복이라는 것이었다.
  만일 그대로 계속해서 성복을 입는 몸이 되었더라면, 뒷날 지금처럼 쉽게 자기
자신에게 충실할 수 있었을는지 어떨지 의문이다. 그렇지만, 신학자에게 요구되는
신앙과 보통 일반 사람들이 개종할 때 요구되는 신앙과의 모순, 나는 이에 대하여
반항적인 마음을 느끼는데, 이것이야말로 내가 (반역)이라고 부르고 싶은 감정에
가장 가까운 것이라 생각한다.
  요즘에 와서는 기독교 신학자는 기독교의 적이라는 생각을 나는 갖게 되었다. 나는
아무리 애써도 두 개의 커다란 모순을 극복할 수가 없었다. 첫째의 모순은,
신학자들이 기독교의 모든 구성이 능금의 존재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점이다.
만일 아담이 능금을 먹지 않았더라면 원죄는 없었을 것이며, 원죄가 없다면 속죄의
필요도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능금이라는 것의 상징적 가치는 어떻든 간에 이것은
나에게는 자명한 이치였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도대체 예수 그분의 가름침에 대하여
불충실하기 이를데 없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그렇지 않은가. 예수 자신은
원죄니 속죄니 하는 말은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여러 가지
문헌을 연구하여 나는 모든 현대 미국인들처럼 죄의식을 느끼지도 않을 뿐더러
단순히 그것을 믿지도 않는다. 만일 신이 나의 어머니의 절반쯤이라도 나를 사랑해
준다면, 나를 지옥에 떨어뜨리지는 않을 것이다, 하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전부이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의식하고 있는 최종적인 사실이다. 어떤 종교에
대해서도 나는 이 진리를 부정할 수는 없다.
  또 하나의 명제는 이것보다도 더 한층 부자연하게 생각된다. 즉 이런 이야기다.
아담과 이브는 그들의 신혼 시절에 능금을 먹었고, 이에 신은 굉장히 노하여 두
사람을 벌주었는데, 이 두 남녀가 저지른 조그마한 죄 때문에, 그들의 자손인 인류는
대대로 맨 끝 대에 이르기까지 그 죄를 짊어지고 고통을 받아야 하게 되었다. 그런데
신이 벌 준 아담의 후손들이 신의 외아들인 예수를 죽였을 때, 신은 크게 기뻐하여
그들을 용서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설명을 할지 해설을 할지 모르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는 나는 도저히 묵인할 수가 없다. 이것이 나를 괴롭힌
마지막 것이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학교를 졸업한 뒤에도 나는 아직 열성 있는 기독교도였다.
자진해서 북평에 있는 예수교 계통이 아닌 대학인 정화 학당의 일요 학교에서
지도하여 많은 동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일요 학교에서 맞는 크리스마스는 나에게 큰 고통거리였다. 마음 속으로는 전혀
믿지도 않은데, 맑게 갠 한밤중에 노래를 부르는 천사의 이야기를 중국 어린들에게
들려 주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미 무슨 일이나 이성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다만 사랑과 두려움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나에게 행복과 평화를 느끼게 해 주는 전지전능한 신, 그
신의 사랑 없이는 행복이나 평화가 있을 수 있을까 하고까지 생각되는 신, 그 신에
대한, 이른바 하나의 미련이었다. 공포라는 것은 고아의 세계로 들어가야만 하는
두려움이었다.
  마침내 구원이 왔다. 어느 날 나는 동료와 함께 토론을 하고 있었다.
  (만일 신이 없다면 사람은 착한 일을 하지 않게 되고, 인간 세계는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지 않겠는가)
  (어째선가?) 하고 유교도인 그는 말했다. (사람은 본디 올바른 마음을 갖고 태어난
동물일세. 그러니까 올바른 생활을 해야 하는 걸세. 단지 그것뿐인 거야. 달리 이유
따위는 없는 것일세)
  인간 생활의 존엄을 말한 이 한 마디는 기독교에 대한 나의 마지막 인연의 줄을
끊어버리고 말았다. 그때부터 나는 이교도로서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모든 것이 나에게는 뚜렷하다. 이교의 세계는 기독교의 세계보다는
단순하다. 기독교와는 달라서 아무것도 가정하지 않는다. 또 아무것도 가정하지
않도록 되어 있다. 올바르고 착한 생활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것뿐인
것이다. 아무런 가설도 거치지 않았다. 이교가 선행을 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좋은
행위가 좋은 행위 자신을 인정할 필요를 없앰으로써이다. 선은 그 자체가 선이다.
그러므로 이를테면 사람들에게 약간의 자선 행위를 하게 하는 데도 기독교적인
일련의 가설이나 가정, 다시 말해서 원죄니 속죄니 십자가니 천국의 축재니 천국에
있는 제3자를 위한 인간적인 서로간의 의무니 뭐니 하는 공연히 복잡하기만 하고,
아무도 그 사실을 직접 증명할 수도 없는 그러한 이야기 속에 사람을 끌고
들어가지는 않는다. 선행은 선행이기 때문에 선행이라는 설을 받아들인다면, 올바른
생활에 대한 온갖 신학상의 듣기 좋은 말은 장황하여 도덕적인 진리의 빛을 흐리게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인간애는 최종적인 절대적 사실이다. 구태여 천국에 있는 제3자에 관한 것까지
생각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보는 바로는 기독교는 도덕성이라는 것을 공연히 이해하기 어렵고 복잡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죄라는 것을 무언가 조금 매력이 있고 그럴 듯해서
슬쩍 범하고 싶은 욕망을 느끼게 만들어 버렸다. 이교는 이와는 다르다. 이교야말로
종교를 신학에서 구해 내어, 아름다운 신앙의 소박함과 인간적 감정의 위엄성을
되찾았던 것이다.
  생각해 보라. 1, 2, 3세기에 얼마나 많이 신학적으로 복잡한 일이 일어나고, 산상
수훈의 단 한 진리를 거북하고 독선적인 구성으로 바꾸어, 결국 성직이라는 것을
고마운 제도로 만들었는가. 나는 잘 알 수 있을 것 같다. 묵시라는 말 속에 그
이유가 포함되어 있다. 예언자에게 주어지고 사도가 이어 받아서 끝까지 지키는
특수한 신비 또는 신의 계획의 묵시라는 생각, 이것은 마호멧교, 몰몬교, 활불을
숭상하는 라마교, 에디 부인의 크리스찬 사이언스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교에 있어서
인간을 구제하는 전매 특허를 얻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다.
  성직자는 모두 묵시라는 공통된 음식을 먹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산상 수훈에 담겨 있는 단순한 진리는 장식을 해야 하며, 그리스도가
그토록 탄상한 들에 핀 백합도 도금을 해야만 했다. 이리하여 생겨난 것이 (첫 번째
아담) (두 번째 아담) 등이다.
  초대의 기독교 시대야말로 강한 설득력이 있어 반박하는 사람도 없었던 사도
바울식 논리도, 그 무렵보다는 훨씬 치밀해진 현대적인 비평 의식에 대해서는 이미
힘이 없고 나약한 것으로 생각된다. 엄중한 아시아식 귀납법과 그보다는 탄력이 있고
정교한 현대인의 진리관과의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모순과 거리감, 여기에
기독교적인 묵시나 그밖의 묵시가 현대인의 마음을 끌어 당기는 힘의 약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교의 세계로 돌아가 묵시를 단념하는 것에 의해서만
원시적인(나에게 있어서는 보다 만족스러운) 기독교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교도를 가리켜 무종교자라고 하는 것은 당치도 않다. 다만 어떠한
종류의 묵시 따위를 믿기를 거부한다는 점만이 무종교라고 하면 할 수도 있다.
이교도는 모두 신의 존재를 믿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이교도는 모두 신을 믿고 있다. 중국 문학에서 잘 나타나는 호칭으로는
이른바 조물주라는 것을 믿고 있다. 다만 기독교와 달라서 중국의 이교도는 매우
정직하기 때문에 조물주를 신비로운 후광 속에 모셔 놓고, 거기에 외경과 존숭하는
마음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느낌을 갖는 것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이 우주의 아름다움, 수천 만에 이르는 훌륭한 창조의 솜씨, 별이 지닌 신비,
하늘의 장엄함, 인간 정신의 존엄은 그들도 또한 잘 알고 있다. 그것은 그것으로 또
만족하다. 그들은 고통과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죽음도 또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또 생활의 은혜도 있다. 상쾌한 전원에는 시원한 바람도 불고, 산 위에는
밝은 달도 떠 있다. 인생의 명암을 적당히 받아들여 굳이 불평을 말하지 않는다.
하늘의 뜻을 좇는 일이야말로 진실로 종교적이며 경건한 태도라고 생각해 이를 (도에
따라 산다)고 말하고 있다. 조물주가 일흔 살에 죽으라고 하면 기꺼이 일흔 살에
죽는다. (천도는 운행)하는 것, 이 세상에는 영원한 부정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믿고 있다. 그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

제11장 교양의 즐거움

    1. 지식과 견식

  교육 또는 교양의 목적은 지식 속에서 견식을 기르며 행위 속에서 훌륭한 덕을
북돋는데 있다.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든가 또는 이상적으로 교육된 사람이란 반드시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나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올바르게 사랑하고 좋아하며 올바르게 싫어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미워해야 할 것인가를 알고 있는 것은 견식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머릿속에 역사에 관한 연대며 여러 가지 숫자가 꽉 차 있고, 러시아나
체코슬로바키아의 시사 문제 따위에 정통해 있으면서도 그 태도나 견해가 전혀
잘못되어 있는 사람들과 모임 같은 데서 자리를 함께 하는 것처럼 불쾌한 일은 없다.
그러한 사람들을 나는 여러 번 만난 일이 있는데, 그들은 화제에 오르는 어떤
일이라도 약간의 사실이나 숫자를 모르는 일은 없지만, 그 견해라는 점에 이르러서는
실로 가엾은 생각이 든다. 그러한 사람들은 배워서 머릿속에 넣는 것은 있지만
판단력, 다시 말해서 견식 또는 감식이 없는 것이다. 지식은 사실이나 보도를 단순히
머릿속에 집어 넣는 문제이지만 견식, 다시 말해서 판단력은 예술적인 판단의
문제이다.
  학자에 대해서 말하면 중국 사람은 일반적으로 학식, 행위, 견식, 다시 말해서
감식과를 구별하고 있다. 역사가의 경우는 특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역사책이 가장 큰 학자적인 양심으로 씌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통찰력과 감식력이
전혀 없고 역사상의 인물과 사건을 판단하고 해석하는데 저자가 아무런 독창력과
이해력의 깊이를 나타내지 않는 일이 흔히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견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우리는 말하는 것이다. 세상 소식에 밝다든가 사실을 수집한다든가 하는
일만큼 쉬운 일은 없다. 역사상의 어느 시기에는 쉽게 머릿속에 넣을 수 있는 사실이
많다. 그러나 그 속에서 중요한 사항을 선택하는데 판단력을 작용하게 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그 인물의 견해에 달려 있는 것이다.
  교육 있는 사람이란, 그러므로 사랑과 미움에 대한 판단력이 올바른 사람을
말한다. 이를 우리는 견식이라고 한다. 견식에는 매력이 있다. 견식 또는 판단력을
가지려면 사물을 철저하게 생각하는 능력, 판단의 독자성, 사회적 문화적 의도적
학구적인 어떠한 방면의 기만적인 위협에도 굽히지 않는 굳센 태도가 필요하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어른들의 생활은 많은 기만에 싸여 있다. 기만된 명성, 기만된
재력, 기만된 조국주의, 기만적인 정치, 기만적인 종교, 사이비 시인, 사이비
미술가, 사이비 독재자, 사이비 심리학자 등등. 정신분석학자는 어렸을 때의 내장의
모든 기능의 작용은 뒷날의 야심 진취성 의무 관념과 결정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느니, 변비증은 인색성의 근본이니 하고 가르친다. 얼마간 견식이 있는 사람이
이런 학설을 듣는다면 재미있어 하며 일소에 붙이고 말 뿐이 것이다. 누구라도 잘못
되어 있을 때는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위인의 이름이나 위인이 읽고 보통 사람은
아직 읽은 일조차 없는 책이 수없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감탄하거나 위압을 받을
필요는 조금도 없다.
  그런데, 견식은 용기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도 중국인은 언제나
(식)과 담을 관련시켜 생각하고 있다. 용기, 다시 말해서 판단하는 독자성이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실로 드물게 보는 미덕이다.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상가나
문인은 어렸을 때부터 모두 지성을 갖고 있고, 또한 용기가 있으며, 그 독자성을
잃지 않았다. 이러한 사람들은 설사 그 시대의 인기있는 시인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호의를 갖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정말 한 사람의 시인에게 마음이 기울 때는 당당히
그 까닭을 공언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문예에 있어서의 견식이라고 한다. 그는
또 유행파에 속하는 화가의 그림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예술적 본능에 저촉될
경우에는 결코 이를 시인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미술에 있어서의 견식이다.
그는 또 철학에 있어서의 유행이나 시류에 따른 이론은 설사 그 뒤가 가장 위대한
사람의 이름이 있을지라도 결코 감동되거나 하지 않는다. 자기의 마음속으로부터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면 어떠한 저자에게도 쾌히 신복하려고 들지 않는다.
저자가 그를 신복하게 했다면 저자가 옳은 것이다. 만약 저자가 그를 신복하게  만들
수 없었다면 그가 옳으며, 저자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에 있어서의
견식이다. 본디 이와 같은 지적인 용기 또는 판단의 독립성을 지키려면 소박한
어린이다운 자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자신이 담긴 자아야말로 우리가 사수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만약 세상의 학생들이 개인적인 판단의 권리를 포기했을 때는
인생에 있어서의 온갖 기만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공자는 사려 있는 학식이 학식을 동반하지 않은 사려보다 위험한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배우고도 생각하지 않으면 곧 없음이요, 생각하고도 배우지 않으면 곧
위태로움이니라)
  이런 경구를 말한 것을 보면 공자는 그 시대의 대부분의 학자가 후자의 형에
속하고 있었음을 보았던 것이리라. 이 경구는 현대의 학교에도 매우 알맞은 것이다.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현대의 교육과 학교 제도는 일반에게 지식을 장려하여
판단력을 희생할 경향이 있다. 그리고 지식을 집어 넣는 주의를 맨 마지막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양의 학식만 있으면 교육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 사색을 대수롭지 않게 다루고 있는 것은 어떤
까닭인가. 교육 제도가 즐거운 지식의 추구를 기계적이고 규칙 투성이며, 틀에 박힌
획일적이며 수동적인 주입주의로 잘못 알게 된 것은 어째서인가. 또한 무엇 때문에
사색보다는 지식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인가. 심리학, 중세사, 논리학에서부터
(종교)에 이르는 필요한 과목 또는 청강 과정을 해냈다는 이유만으로 대학 졸업생을
교육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어찌된 것인가. 성적표나 졸업증서는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가. 또한 점수나 졸업증서가 학생의 머릿속에서 교육의 참된 목적의
지위를 뺏어버리고 만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날의 교육 제도가 대량 교육이며, 따라서 공장과 같으며,
공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슨 일이건 생명이 없는 기계적인 시스템에 의하여 하기
때문이다. 학교의 이름을 지키고 제품을 표준화하기 위해서 학교는 졸업증서를
발행하여 제품을 증명해야만 한다.
  졸업증서와 함께 품등을 나눌 필요가 생기고, 품등을 나눌 필요에서 점수를 주는
제도가 생긴 것이다. 점수를 매기기 위해서는 따로 외고 시험을 치고 고사를 해야만
한다. 교육 전체가 완전한 논리적인 연속을 이루고 있어서 도망쳐 나갈 길이 전혀
없다.
  그러나, 기계적인 시험이나 고사의 결과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치명적인
것이다. 그것은 견식이나 판단력을 기르는 것보다는 오히려 사실을 기억하는 힘을
기르는데 역점을 두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 선생을 한 일이 있어서 알고 있지만,
막연한 문제에 대한 막연한 의견을 묻는 것보다는 역사의 연대에 대하여 일련의
문제를 제출하는 편이 더 쉽다. 답안지에 점수를 매기는 일은 더욱 쉬운 일이다.
  이러한 제도가 만들어진 뒤로는 학문은 내가 견식의 계발이라고 부르는 참다운
이상에서 멀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자칫하면 잊기가 쉽다. 아니 오늘날에는 더욱 그
거리는 멀어져 가고 있다. 위험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공자가 말한 다음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을 알기만 하는 학문으로는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모자라느니라.

  형식이야 어떤 것이든 사람이 가진 지식을 시험하거나 측정하거나 할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은 버려야 한다. 장자는 정말 잘 말했다.
  (아, 내 인생에는 한이 있으나 지식에는 한이 없구나!)
  결국 문학의 탐구는 신대륙의 탐험 또는 아나톨 프랑스가 말한 이른바 (영혼의
모험)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 탐구하는 정신이 해명적이고 연구적이며
호기적이고 모험적인 마음으로 유지된다면 괴로움이 되지도 않고 즐거움으로서
계속되는 것이다. 규칙적이고 획일적이며 수동적인 지식의 주입주의를 적극적이고
발전적인 개인적 즐거움으로 바꾸어야 한다. 졸업증서나 점수가 일단 폐지되든가,
또는 다만 그것만의 것으로 다루어지게 된다면 학생은 적어도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될 터이므로 학문의 탐구는 보다
적극적이 된다. 현재의 상태로는 학생에게 있어 문제는 이미 해답이 나와 있다.
신입생은 2학년 학생이 되기 위해 공부하고, 2학년 학생은 3학년 학생이 되기 위해
공부한다. 그들은 이에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는다. 그럼 본래의 학문의 목적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 같은 생각은 모두 몰아내 버려랴야 한다. 왜냐하면 학술의
규명이라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문제이며, 다른 사람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상에 있어서는 학생들은 모두 대학 간사를 위해 공부하고 있다. 많은
선량한 학생들은 부모를 위해, 또는 미래의 아내가 될 여인을 위해 공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재학 중에 많은 학자금을 대준 부모에게 불효자가 되지 않도록,
근엄하고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선생 앞에서 근엄하게 보이기 위해 또는 학교를
졸업한 뒤에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많은 봉급을 받고 싶기 때문에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생각은 모두 부도덕한 것이 아니겠는가.
  학문의 탐구는 다른 누구의 일이어서도 안된다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교육은 즐거움이 되고 적극적이 될 수 있다.



    2. 유희로서의 예술과 품격으로서의 예술

  예술은 창조적인 동시에 오락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생각 가운데서 오락, 즉
순전한 정신적인 유희로서의 예술 편이 한층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림이건
건축이건 문학이건 불후의 창조적인 제작이라면 온갖 형식의 것을 존중은 하지만,
참된 예술적인 정신은 불후의 걸작을 후세에 남기겠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다수의
민중이 예술을 오락으로서 즐기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보다 일반화되고, 보다 넓게
보급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이 전국 경기에 출전하는 소수의 운동
선수나 축구 선수를 길러내는 것보다도, 잘하건 못하건 간에 모든 학생들이
테니스라든가 축구라든가를 하는 편이 중요한 것처럼, 한 나라가 한 사람의 로댕을
낳게 하는 것보다도 모든 어른, 모든 어린이들이 저마다 독자적인 창작을 즐거움으로
삼게 되는 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불과 몇 명의 직업적인 예술가가 있는
것보다는 전국 학생들에게 찰흙 공작을 가르치고, 모든 은행장이나 경제 전문가가
크리스마스 카드를 손수 만들 수 있게 되도록 하고 싶다. 이것은 하나의 기발한
제안일지 모르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즉 온갖 분야에서의 아마추어 주위를 주장하는 것이다. 아마추어 철학자, 아마추어
시인, 아마추어 사진가, 아마추어 마술사, 자기가 살 집을 자기 손으로 짓는
아마추어 건축가, 아마추어 음악가, 아마추어 삭물학자, 아마추어 비행가 이런
것들이다. 하룻밤 친구가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소나티네를 치는 것을 들으면, 일류
전문가의 음악회에 참석한 것과 같은 기쁨을 느낀다. 친구들 가운데 아마추어
마술가가 있다면 누구나 무대에서 공연하는 전문가인 마술사보다 그 편을 더 기뻐할
것이고, 어떤 부모건 셰익스피어 극을 보는 것보다는 자기의 자식들이 하는 아마추어
연극을 훨씬 더 기뻐한다. 아마추어 예술은 자발적인 것이다. 예술의 참된 정신은
오직 이 자발성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중국의 그림은 전문적인 화가가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본디 학자들의 오락이었다는 사실을 내가 매우 중요시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유희적인 정신이 잃어지지 않았을 때 예술은 비로소 상품화를 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사람은 아무런 이렇다 할 까닭없이 논다. 또한 놀이에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는 안 된다. 바로 이것이 유희가 지닌 특징이다. 유희는 그 자신 훌륭한
이유를 갖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진화론에 의하여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생존
경쟁의 원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동물에게는 해로운 아름다움의
형식조차도 있다. 이를테면 너무 지나치게 자란 사슴의 뿔 같은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아름답기는 하겠지만 사슴에게 있어서는 귀찮은 것이다. 다아윈은 식물계,
동물계의 아름다움은 자연 도태의 원리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웅 도태라는
2차적인 대원리를 들고 나와야만 했다. 예술이란 단지 육체적, 정신적인 정력이 넘쳐
흐르는 과잉된 상태를 뜻하는 것이고, 자유롭고 아무런 속박도 없는 그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예술과 예술이 지닌 본질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비난이 많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공식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치가가 간섭할 권리가 없는 문제이며, 단순히 모든 예술적인 창조의 심리적인
기원에 관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업 예술은
이따금 예술적인 예술은 창조의 정신을 해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정치적인 창조의
정신을 죽여 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자유야말로 예술의 혼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독재자들은 정치적인 예술을 만들어 내려고 하지만 도대체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총검의 힘으로 예술을 만들어 내는 것은 마치 창녀에게서 진실된 사랑을
구하는 것과 같은 것임을 그들은 모르는 것 같다.
  어쨌든 예술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정력 과잉으로 말미암은 예술의 육체적인
기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이것은 예술적인 충동 또는 창조적인 충동으로서
알려져 있는 것이다. 영감이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더라도 예술가 자신은 그런
충동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거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과학자가
진리를 발견하려고 하는 충동과 마찬가지로 다만 정신적인 긴박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을 설명할 도리는 없다.
  오늘날 생물학에 대한 지식 덕분에 인간의 정신 생활의 모든 조직은 여러 가지
기관과 그 기관을 지배하는 신경 계통에 작용하는 혈액 속에 있는 호르몬의 증감,
배분에 의해 조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겨우 알게 되었다. 노여움이나 두려움조차도
단지 아드레날린의 공급이 어떤가 하는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천재라는 것 자체도
선분비의 과잉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호르몬이라는 현대적인 지식 따위를 갖고 있지 않은 중국의 어느 무명 작가는 온갖
활동의 원동력은 사람의 몸 안에 살고 있는 (벌레)에 있다는 올바른 추단을 내린 바
있다. 간통은 사람의 창자를 뜯어먹음으로써 욕망을 채우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는 벌레 때문에 저질러지는 것이다.
  야심이나 침략성이나 명예욕이나 권세욕 같은 것도 야망을 이룰 때까지는 그
사람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지 않는 또 다른 벌레 탓이다. 글을 쓴다는 것, 이를테면
소설을 쓰는 것도, 작자를 몰아세워 무슨 인과인지 창작을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하는 어떤 종류의 벌레 탓인 것 같다. 호르몬인지, 벌레 때문인지, 나는
후자를 택하겠다. 벌레라고 하는 편이 더 생생한 느낌이 든다.
  이 벌레가 너무 많아지면, 아니 보통 분량인 때에는 사람은 무엇이건 창작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정력이 넘치게 되면 보통 때 걷는 방법이 변하여 뛰거나 달리거나 하게 된다. 어른의
정력이 넘치게 되면 걷는 것이 도약이나 무용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니까 무용을
한다는 것은 능률이 나쁜 걸음걸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능률적이 아니라는 말은
공리적인 견지에서 보아 정력의 낭비가 있다는 뜻이지 심미적인 뜻으로는 아니다.
댄스를 하는 사람은 어느 한 점에 도달하는 가장 짧은 거리인 직선을 취하지 않고
왈츠의 음악에 맞추어 원을 그리면서 앞으로 나간다. 사실상 춤추는 동안은 아무도
애국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이념이니 팟쇼나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에 맞추어 춤을 추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댄스가 가진 유희성과
영광스러운 비능률의 정신을 깨뜨리고 마는 것이다. 공산주의자가 그들의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거나 또는 충실한 동지가 되려고 한다면 모름지기 오직 걸어야
한다. 가장 가까운 거리를 가야 한다. 댄스 같은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의 신성함을 알고 있지만, 유희의 신성함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더더군다나 문명인들은 다른 온갖 종족에 속하는 동물에 비하여 지나치게 일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일이 모자란다는 말인가. 우리가 갖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한가한 시간, 오락과 예술을 위한 극히 짧은 시간조차도 국가라는 괴물의 요구
때문에 침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예술의 본질은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예술과 도덕과의
관계라는 문제를 분명하게 밝히는데 도움이 된다. 아름다움이란 아름다운 자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자태는 명화나 아름다운 다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행위에도 있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그림이나 음악이나 댄스보다도 훨씬
범위가 넓은 것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자태는 경기중인 운동가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인가 하면, 어린 시절에서, 청년, 장년, 노년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기에
알맞은 아름다운 생활을 즐기고 있는 사람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지휘와
작전이 다같이 잘 되어서 점차로 마지막 승리를 향해 나가는 대통령 선거전에서도
아름다운 자태라는 것은 있는 터이고, 사람의 웃음 속에도, 침을 뱉을 때에도
아름다운 자태는 있다. 중국의 늙은 관리들은 아주 조심해서 침을 뱉도록 훈련되어
있지만 그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온갖 행동에는 자태와 표현이 있고, 온갖
표현의 형식은 예술의 정의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현의 기법을
음악이라든가 댄스라든가 그림 따위의 소수의 분야로 분류할 수는 없다.
  예술을 이같이 넓은 뜻으로 해석하면 좋은 행위의 자태와 좋은 예술의 인격은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고, 다같이 중요한 것이 된다. 잘 조화된 시의 운율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의 운동도 여러 가지 사치스러운 것을 생각하게 된다. 즉
정력이 넘쳐 흐르게 되면 어떤 일을 하든지 침착성과 우아함과 자태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 된다. 이 침착성과 우아함은 어디서 생기는가 하면, 자기는 육체적으로
능력이 있다는 의식, 즉 어떤 일이고 보통 이상으로 훌륭하게 해낼 수 있다는
의식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좀더 추상적인 면에서 말한다면 멋진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이게나 이런 아름다움은 있다. 멋진 일, 즉 솜씨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충동은 본디 미적인 충동이다. 교묘한 살인, 솜씨 있는 교묘한 음모, 그러한
행위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얼른 보기에는 아름답다. 좀더 구체적인
일상 생활의 조그만 하찮은 일 속에도 이런 침착성과 우아함과 능력은 실제로 있다.
또는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생활의 마음 가짐)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이 테두리
안에 속한다. 사람에게 적절하고도 훌륭한 인사를 하면 멋진 인사를 했다는 말을
듣지만, 볼품없는 어설픈 인사를 하면 볼품없는 인사의 말을 듣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말과 생활과 습속에 아름다운 예의를 요구하는 경향은 중국에서는 진조 끝 무렵에
최고도로 발달되었다. 그 무렵은 (청담)이 유행한 시대여서, 부인들의 옷치장에 가장
마음을 썼고, 미남자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이름을 떨친 사나이들이 가장 많았던
시대였다. (아름다운 턱수염)을 기르는 것이 크게 유행되었으며, 남자들은 훨씬 품이
넉너한 긴 웃옷을 입고 일부러 몸을 건들건들하면서 멋부려 걸었다. 가운데를
긁으려고 생각하면 온몸 어디에나 손이 닿을 수 있게 옷이 만들어져 있었다.
무엇이건 우아하게 하는 것을 중하게 여겼다.
  말 총을 다발로 묶어서 자루를 붙인, 모기나 파리를 쫓는 (주)라는 것이 소중한
대화용의 도구가 되었다. 이러한 한담은 문학 작품 속에서는 (주담)이라고 오늘날도
말하고 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손에 든 (주)를 흔들흔들 우아하게 휘두르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부채도 또한 청담의 아름다운 부속물이 되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부채를 펴기도 하고, 설렁설렁 부치기도 하고, 또는 접거나 하는 폼이 보기에 퍽
아름답다.
  마치 미국의 노인이 연설을 하면서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효용이라는 점에서 말한다면, (주)나 부채 편이 영국인의 외알 안경보다는 약간 더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효용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나눌
때의 체모를 갖추기 위한 것의 하나로서, 지팡이가 산책하는 데 있어서 겉치레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 취향이다. 내가 서양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몸가짐은 프러시아의
신사가 객실에서 귀부인에게 인사를 할 때 구두 발꿈치를 맞추어 탁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나 독일의 처녀가 한쪽 발을 뒤로 살짝 물리며 몸을 굽혀 절하는 그런
모습이다. 뭐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몸가짐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풍습이
사라져 버린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중국에서는 사교상 지켜야 하는 예의 범절이 많이 행해지고 있다. 손가락, 손, 팔
따위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하는 것을 신중하게 연구하여 행하고 있는 것이다.
  타천이라고 하는 만주 사람들끼리 주고 받는 인사의 방법도 퍽 아름답다. 방안에
들어온 사람은 한쪽 팔을 똑바로 늘어뜨리고, 한쪽 다리를 굽혀 점잖게 몸을 굽히는
것이다. 자기 주위에 자리를 같이한 손님들이 있을 경우에는 그대로의 자세로 똑바로
세운 다리를 축으로 하여 조용히 몸을 돌리며 일동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품격
있는 바둑 손님이 바둑판 위에 바둑돌을 놓는 모습도 한번 보아 둘 만하다. 희고
검은 작은 바둑돌을 하나 교묘하게 균형을 잡아 둘째 손가락 위에 얹고,
엄지손가락을 바깥쪽으로 움직이고 둘째 손가락을 안쪽으로 당기면서 가만히
밀어내어 매우 우아하게 바둑판 위에 놓는 것이다.
  교양 있는 관리는 화가 났을 때에도 매우 아름다운 몸짓을 한다. 그들은
(마라이슈)라고 하여 소매 끝을 접어 올려서 비단을 댄 안감이 드러나 보이는 긴
웃옷을 입고 있는데, 몹시 기분이 상했을 때는 오른쪽 팔이나 양쪽 팔을 동시에 힘껏
아래로 내려뜨려서 (마라이슈)의 걷어 올린 소매를 소리내어 아래로 내려뜨리고는
매우 멋지게 거드름을 피우며 방에서 나가는 것이다. 이것을 (후슈)라고 한다.
(소매를 털고 떠난다)는 뜻이다.
  교양 있는 관리가 말하는 투도 매우 듣기 좋은 법이다. 그 말은 아름다운 운을
밟고 있다. 북경 액센트의 음악적인 음조에는 우아한 음악적인 억양이 있다. 한마디
한마디가 천천히 점잖게 발음된다. 참된 학자의 경우에는 그가 하는 말에는 중국의
문예어가 주옥처럼 섞여 나온다.
  주욱인이 갖고 있는 예술의 품이라는 생가은 자못 흥미로운 데가 있다. 이것은
인품이니 품격이니 하고 말하는 수가 있다. (제1품), (제2품)의 예술이라든가
시인이라든가 할 경우에는 등급을 붙이게도 되고, 또한 좋은 차를 맛보거나
시음하거나 하는 것은 (차를 품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일정한 행동에
나타난 개인의 인격에 관한 표현의 모든 카테고리가 이 말에 포함되어 셈이다. 쉬운
예로서 질이 나쁜 노름꾼, 다시 말해서 성급하고 버릇이 나쁜 노름꾼은 (도품)이
나쁘다고 말한다. 노름꾼으로서의 사람됨이 나쁘다는 뜻이다. 술을 지나치게
마시고는 걸핏하면 야비한 행동을 하는 술꾼을 (주품)이 나쁘다. 즉 술꾼으로서의
사라됨이 나쁘다고 한다. 바둑두는 사람의 좋고 나쁜 것은 (기품)이 좋다든가
나쁘다든가 하는 말로 표현된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의 평론은 (시품)이라고 하여, 여러 시인들을 평한
것이다. 물론 (화품)이라는 미술 평론의 책이 몇 권이나 나와 있다. 이 (품)이라는
관념과 관련하여 중국인 누구나가 인정하는 어떤 신조가 생겨났다. 그것은 예술가의
제작은 엄밀하게 그가 갖추고 있는 품격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 (품격)은
도덕적인 것인 동시에 예술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간의 오성, 광희, 탈속을
숭상하고, 사소한 일과 용렬함, 그리고 저열함을 초월하고 극복하는 정신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품이란 영어의 매너 또는 스타일에 가까운 뜻을 갖고
있다. 자유분방하며 낡은 풍습에 사로잡히지 않는 예술가는 분방한 스타일을 나타낼
것이고, 마음씨가 착하고 인정미가 있는 사람은 그 스타일 속에 따뜻한 마음씨와
섬세한 감정을 담을 것이고, 취미가 고상하고 우아한 대예술가는 (매너리즘)에
무릎을 끓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 어떠한 화가도 화가 자신의 도덕적 미적 품격이
위대하지 않다면 거장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신념을 중국인은 은연중에 승인해 왔다.
따라서 서화를 평하는 경우 기법이 좋고 나쁨이 아니라, 예술가 자신의 품격이
높으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기법은 완벽하면서도 품격이 얕은 작품도 있다. 이런
것은 영어에서 말하는 캐럭터가 없는 작품이 된다. 우리는 이리하여 온갖 예술의
중심 문제에 도달한 셈이다. 중국의 대장군이며 대재상이기도 했던 중국번은 자기의
가족에게 보낸 한 편지 속에서 서도 단 두 가지 살아 있는 원리를 형태와 표현이라고
말하고, 그 무렵 첫손가락을 꼽던 서예가의 한 사람인 하소기가 이 공식을 시인하여
그의 높은 식견을 칭찬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술은 모두 구체적인 것이므로 기계적인
문제, 즉 반드시 익혀 두어야 하는 기법의 문제가 언제나 따라다니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지만 예술은 또한 정신이기 때문에 온갖 형식의 창작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요소는 표현의 품격이다. 그것은 단순한 기법을 초월한 예술가의 품격인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예술적인 작품에서 오직 하나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다. 저서에
대하여 말한다면 저서 가운데에서 오직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작가의 판단과 좋고
나쁜 것에 나타난 그 스타일과 감정이다. 이 품격 즉 표현의 개성이 기법 때문에
지워지고 말 위험성은 끊임없이 있다. 그리고 그림이건 문학이건 연극이건 초심자가
모두 가장 곤란해 하는 것은 자기를 발휘한다는 일이다. 그것은 초심자가 형식, 즉
기법에 위협을 받는 결과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이 개성적인 요소가
없어서는 어떠한 포옴도 결코 좋은 포옴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모든 좋은 포옴에는
움직임이 있다. 그 움직임은 골프 선수가 내리치는 골프채의 스윙이건, 로켓처럼
성공을 향하여 달려나가는 사나이의 움직임이건, 또는 공을 갖고 경기장 안을 달리는
축구 선수의 움직임이건, 어느 것이든 모두 남이 보기에는 아름다운 것이다.
예술에는 개성적인 표현이 넘쳐 흘러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표현력은 기법에
구애되는 일이 없이 자유롭고도 즐거이 기법 속에서 약동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모퉁이를 돌아갈 때의 기차에도, 돛에 흠뻑 바람을 안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요트에도
스윙이 있다.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하늘을 나는 제비, 새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드는 매, 또는 이른바 (멋진 포옴)으로 결승점으로 뛰어들어 오는
우승마에도 모두 아름다운 스윙이 있다.
  우리는 온갖 예술이 품격을 가져야 할 것을 요구하지만, 그 품성이란 예술가의
인격이라든가 영혼이라든가 심정이라든가, 또는 중국인이 말하는 (회)를 예술 작품이
암시하거나 말없이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 작품에 인격 또는 품격이
나타나 있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 아무리 심미안이 높더라도 기법이 완벽하다는
것만으로는 생명이 없으며, 또한 생명력이 없는 예술을 구출할 수는 없다.
품격이라는 고도의 개성적인 요소가 빠져 있어서는 아름다움 그 자체가 평범하고
속된 것이 되고 만다.
  품격을 기르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미적으로도 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학식과
교양이 다같이 필요하다. 교양은 취미에 가까운 것이어서 예술가에게는 자연히
생겨나게 마련이겠지만, 예술에 관한 책을 펼쳐 들고 가장 큰 기쁨을 느끼는 것은
학식의 뒷받침이 있을 경우에 한한다. 이것은 특히 그림과 서도에 있어서 아주
뚜렷하게 나타나는 사실이다. 하나의 붓글씨를 보면 그 서예가가 수많은 위의 탁본을
본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다. 만일 본 사람이라면 그 학식은 서예가에게 어떤
고전적인 품격을 줄 것이다. 그러나 서예가는 더 나가서 자신의 영혼, 즉 품격을
그 서예 속에 쏟아 넣어야 한다. 이러한 품격이 한결같지 않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며, 섬세하고 감상적인 기질의 사람이라면 섬세하고 감상적인 서예를
나타낼 것이고, 또한 강함이나 흐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기질에 어울리는
서예를 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림과 서도의 경우 미적 특질과 여러
가지 아름다움의 온갖 카테고리를 찾아볼 수가 있다. 더우기 완성된 작품이 지닌
아름다움과 예술가 자신의 영혼의 아름다움을 구별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변덕스럽고 방자한 아름다움도 있을 것이고, 매우 거친 힘의 아름다움도
있을 것이다. 힘찬 것의 아름다움도 정신적인 자유의 아름다움도, 용기와 돌진하는
아름다움도, 로맨틱하고 매력적인 아름다움도 있을 것이고, 자제하는 아름다움,
차분하고 우아한 아름다움, 준엄한 아름다움, 소박함과 우둔함의 아름다움, 단순한
정돈된 균형 잡힌 아름다움, 신속의 아름다움, 또한 어떤 경우에는 의식적으로
만들어 낸 추괴함의 아름다움이라는 것까지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꼭 한
가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한 미의 형식이 있다. 그것은 분투 노력하는 미,
즉 분투적 생활의 아름다움이다.



    3. 어떻게 책을 읽을 것인가.

  독서, 다시 말해서 책을 읽는 즐거움은 옛부터 교양 있는 생활의 매력의 하나로
손꼽아 왔다. 그 특권을 좀처럼 얻을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오늘날에도 존경받고
부러움을 받아 오고 있다. 이는 책을 읽는 사람의 생활과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의
생활을 비교해 보면 곧 수긍할 수 있는 일이다. 평소에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이다. 그 생활은
변화없는 틀에 박힌 것이 되고 만다. 그 사람이 접촉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불과
몇 사람 안 되는 친구와 친지들 뿐이며, 그가 보는 것 듣는 것은 거의 자기의
신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뿐이다. 이런 갇힌 상태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그러나, 한 번 책을 손에 들게 되면 사람은 곧 다른 세계에 드나들게 된다. 만일 이
책이 좋은 책이라면 독서는 곧 세계에서 으뜸가는 이야기꾼의 한 사람과 만나는 것이
된다. 그는 독자를 이끌어 먼 다른 세계, 아득한 옛날로 데리고 가서 마음 속의
고민을 가볍게 해 주고, 독자가 일찌기 몰랐던 인생의 여러 가지 모양을 이야기해
준다. 옛 책은 유명계의 독자를 서로 통하게 해 주어 점차 읽어가는 동안에 저자는
어떤 얼굴의 인물이었을까, 어떤 타입의 사람이었을까 하는 것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맹자도, 중국의 대역사가였던 사마천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하루에 두
시간만이라도 다른 세게에 살며, 그날그날의 번뇌를 잊을 수가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육체적인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 하는 특권을 얻은 것이 된다.
이와 같은 환경의 변화는 심리적인 효과를 놓고 본다면 진정 여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뿐 아니라, 글을 사랑하면 언제나 사색과 반성의 세계에 드나들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물리적인 사상을 쓴 책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상을 직접 보거나 몸소
경험하거나 하는 것과 책으로 읽는 것과는 그 취향이 다르다. 책을 읽을 경우에는
물리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하나의 구경거리이며 독자는 구경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책은 우리를 이런 명상적인 기분에 잠기게 하는 것으로서, 사실
보고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신문을 읽는데 소비되는 막대한
시간은 전혀 독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문을 읽는 일반 독자는 깊은
생각에 잠길 가치가 사실이거나 사건의 보도만을 읽게 되기 때문이다.
  독서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장 적절하게 말한 공식은 내 생각으로는 송조의
시인으로 소동파의 친구였던 황산곡의 설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선비가 사흘 동안 책을 읽지 않으면 스스로 깨달아 익힌 말이 무미해지고 거울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보기가 역겨워 진다)
  즉 그가 말하는 뜻은 독서는 책을 읽는 사람에게 매력과 품격을 주는 것이며,
독서하는 목적은 이밖에는 없으며, 이 점을 노리는 독서야말로 참된 아트라고 부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정신 향상) 같은 것은 책을 읽는 목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정신 향상이니 하는 타산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독서의 즐거움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이런 혼잣말을 할 만한
사람이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꼭 읽어야겠다. 소포클레스를 꼭 읽어야 한다. 또한
엘리어트 박사가 쓴 (Five Foot Shelf)를 모두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나는
지식을 넓혀야 한다.
  이러한 사람의 학식은 절대로 깊고 넓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루 저녁 그는 자신을
매질하면서 (햄릿)을 읽는다. 그리고는 악몽에서 깨어난 것같이 되어 나온다. 그러나
앋은 것이라고는 요컨대 (햄릿)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꼭 읽어야
된다는 의무 관념으로 책을 읽는 사람은 책을 읽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책읽기를 일로 삼는다는 것은 상원의원이 연설하기 전에 서류와 보고서를 훑어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종류 찾기이고 자료 찾기이지 독서는 아니다.
  황산곡의 의견에 따르면, 사람의 외모에 매력을 더하게 하고, 그가 하는 담화에
멋을 주는 것 외에 독서의 목적으로서 인정할 만한 것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외모의
매력이라고는 해도, 황산곡이 말한 이른바 (보기 역겨운) 외모란 육체적인 흉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못생겼으면서도 사람을 끌어 당기는 얼굴도 있는가 하면
아름답기는 하지만 도무지 매력이 없는 얼굴도 있다. 나의 중국인 친구 가운데 머리
모양이 폭탄처럼 생긴 사나이가 있는데, 이 사나이는 언제 보아도 호감이 간다.
사진만 보고 말한다면 유럽 문인들 가운데 가장 잘 생긴 얼굴은 G.K.체스터튼의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콧수염이며 안경, 상당히 숱이 많은 눈썹, 주름 잡힌 미간의
선, 이러한 것들이 악마처럼 엉켜 있는 얼굴이다. 이 사진을 본 사람은 이마 속에
수없이 많은 사상이 약동하고 있어, 이상하게 사람을 쏘아보는 눈에서 그의 사상이
언제고 뛰어나올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얼굴이 황산곡이 말하는 아름다운
얼굴이다. 분이나 입술 연지로 치장한 얼굴이 아니라 오직 진실된 사색의 힘으로
치장된 얼굴이다. 담화의 품격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독서 방법이 어떤가에 달려
있다. 이야기하는 것이 멋있는가 어떤가는 독서하는 방법 여하에 달려 있다. 만일
책에 담겨 있는 고상한 멋을 독자가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면, 그가 하는 이야기
가운데도 멋이 나오게 된다. 이야기에 멋이 있으면 그가 쓰는 글에도 멋이 풍기지
않을 리가 없다.
  이런 까닭으로 나는 멋이니 취미니 하는 것이 모든 독서의 열쇠라고 생각한다.
음식에 대한 기호와 마찬가지로 좋아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 사람 그 사람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다. 가장 보건적 식사법은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먹는 것이다.
그래야만 자기의 소화력에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어떤 사람에게는 살이 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독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선생은 자기가 읽기 좋아하는 책을
학생에게 읽도록 강요할 수는 없으며 부모라 할지라도 자식들이 자기와 똑같은
취미를 가지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읽고 있는 것에 흥미가 없다면, 그 독서는
완벽한 시간 낭비일 뿐이다. 원중랑이 말한 것처럼,
  (그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은 모름지기 버려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읽게 해야 한다)
  그러니까 절대로 읽어야 한다는 책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지적인 감흥은
나무처럼 자라고,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우선 수액이 마르지 않는 동안은
나무는 어쨌든 자라는 법이고, 샘에서 새로운 물이 솟는 한 물은 흐르게 마련이다.
물이 화강암 큰 돌에 부딪치면 빙 돌아 흘러가고,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면,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가 다시 굽이쳐 흘러간다. 깊은 산속의 늪에 들어가면 기꺼이 그
속에서 머물러 쉬고, 급류를 만나게 되면 거침없이 빨리 흘러간다. 이같이 물이란
아무런 애도 쓰지 않고 목적도 정하지 않고 더우기 언젠가는 반드시 바다로 흘러가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읽어야 하는 그런 책이란 이 세상에 없다. 있는
것은 다만 어느 사람이, 어느 때, 어디서, 어떤 주어진 사정 아래에서 생애의 어느
시기에 읽지 않으며 안되는 책이 있을 뿐이다. 독서란 결혼과 마찬가지로
운명이라든가 인연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라고 나는 오히려 그렇게 생각한다.
성경처럼 어떤 종류의 책은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읽어야 할 시기라는 것이 있다.
  사상과 체험이 걸작을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 있지 않을 때 걸작을 읽으면
오히려 뒷맛이 개운치 않다. 공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이 쉰 살이 되어 역경을 읽으면 큰 잘못은 없을 것이다)
  이 말은 곧 마흔 다섯 살 때에는 아직 없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설화는 실로 온화한 품격과 원숙한 지성에 넘쳐 있거니와,
이에 접하는 사람 자신이 원숙하지 못한 동안은 그 기막힌 묘미를 알지 못하는
법이다. 나아가서 또한 같은 독자, 같은 책이라도 그 읽는 시기가 다르면 그 맛은
자연히 다르게 마련이다. 이를테면 저자와 친히 이야기를 나눈 뒤, 또는 저자의
얼굴을 사진으로 본 뒤에 읽으면, 그 책을 읽는 즐거움은 더 한층 크고, 저자와
사이가 나빠진 뒤에 읽으면 또 딴 맛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이 마흔 살에
(역경)을 읽어도 어느 정도 풍미를 알 수는 있지만 쉰 살이 되어서 변화무상한 이
세상의 상태를 잘 바라본 뒤에 읽으면 또한 전에 못 느낀 색다른 감흥을 얻게 된다.
그라므로 양서는 모두 두 번 거듭 읽으면 얻는 바도 있고 즐거움도 또한 새로와진다.
  나는 학생 시대에 (Westward Ho!)나 (헨리 에드먼드) 읽어야 했었는데, 그 무렵
10대 소년이었던 나에게 (Westward Ho!)는 재미있게 읽혀졌으나 나중 책의 참된 맛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훗날 곰곰히 생각해 보니, 옛날에 읽은 것보다 훨씬 깊은
재미가 그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독서는 그런 까닭에 두 가지 면, 즉 저자와 독자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진실로
얻게 되는 것은 독자의 통찰과 체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과 저자의 통찰과 체험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논어)에 대하여 송의 유학자였던 정이천은 이렇게 말했다.
  (논어의 독자는 어디에나 있다. 읽어도 어떤 사람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한 두 줄을 읽고도 자뭇 기뻐하고, 또한 어떤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한다)
  자기의 마음에 드는 작가를 찾아낸다는 것은 자신의 지성의 발전을 이루는데
있어서 가장 심각한 사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경우에는 영혼의 친화라는 것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니까 고금의 작가들 가운데 그 영혼이 자기의 영혼과 비숫한
사람을 우리는 찾아내야 한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참으로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자기가 사숙할 만한 스승을 찾는 데는 남에게 기대지 않고 자신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 누구에게 마음을 기울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한다. 이것은 아마도 자기 자신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른바 첫눈에 반하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어느 누구를 사랑하라고 남이 말할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일종의
본능의 힘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발견이 이루어진 유명한 실례는 역사상에
많이 나타나 있다. 몇 백 년이나 떨어져 살고 있어도, 책을 통하여 학자의 사상과
감정이 서로 통하는 데가 있으면 자기의 모습을 찾아낸 것이나 다름이 없다.
  중국인의 표현을 빌면 이같이 서로 끌리는 영혼은 같은 하나의 영혼의 화신이다.
다시 태어난 것이다. 소동파는 장자나 도연명의 확신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원중랑은
소동파가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소동파는 처음으로 장자를 읽었을 때,
어렸을 때부터 장자와 아주 똑같은 것을 생각했고, 같은 의견을 갖고 있었던 것과
같이 생각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원중랑은 어느날 밤, 작은 시집을 뒤적이다가 아직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자기와
같은 시대의 사람인 서문장을 발견했다. 그때 그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친구를
불렀다. 친구가 부르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나 시집을 읽기 시작한 그의 친구도 또한
감탄하는 소리를 질렀고, 두 사람 다 깊이 빠져 읽으면서 찬탄해 마지않아 하인이
어리둥절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을 정도였다고 한다. 조오지 엘리어트는 처음으로
루소를 읽었을 때의 감격을 감전에 비유하고 있다.
  니체가 쇼펜하우어를 읽었을 때도 그런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몹시 까다로운 스승이었고, 니체는 격정적인 성격을 지닌 제자였으므로 뒷날 제자가
스승을 배반하게 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무엇이건 얻는 바가 있는 것은 이와 같이 마음을 기울 수 있는 작가를
발견하여 그의 저서를 읽는 그런 경우다. 첫눈에 반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그저
좋게만 보인다. 키고 알맞게 크고 얼굴이나 머리칼의 빛깔이며 목소리며 이야기하는
품이며 웃는 모양이며 뭐든지 다 좋게만 보인다. 학생이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아야만
알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독서의 경우도 또한 그러하다. 문체이건 맛이건 견해건
생각하는 태도건 하나같이 비난할 데가 없다. 이렇게 독자는 한 줄 한 귀절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본디 정신적인 친화력으로 맺어진 것이니까 모든 내용을
흡수하고 모든 것을 어렵지 않게 소화해 버린다. 작자가 주문을 외면 독자는 기꺼이
주문에 얽매이게 되고, 때에 따라서는 목소리도, 하는 짓도, 웃는 모양도,
이야기하는 태도까지도 작자와 똑같아지는 수가 있다. 그리하여 문학상의 애인에게
홀딱 빠져서 그 책에서 자기의 영혼을 살찌게 하는 자양물을 아낌없이 흡수해 버리고
만다.
  여러 해가 지나 이런 마음이 풀리고 다소 싫증을 느끼게 되면 또다시 새로운
애인을 구하게 된다. 서너 번 애인을 바꾸며 남김없이 자양분을 흡수해 버리면
이번에는 자기 자신이 저자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는 독자도 많다. 마치 바람만 실컷 피우고 다니며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칠 수 없는 젊은 남녀와도 같은 것이다. 이같은 사람들은 어떤 책이든 모두 읽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얻지는 못한다.
  독서법을 이렇게 해석해 볼 때는 의무나 책무로서 책을 읽는다는 그런 생각은
단연코 배제해야 할 것이다. 중국에서는 흔히 (각고면려)라고 하여 학생들을
격려한다. 옛날에 이 각고면려를 실행한 유명한 학자가 있었는데, 밤에 책을 읽다가
잠이 오면 송곳으로 종아리를 찌르곤 했다고 한다. 또 어떤 학자는 밤중에 공부하는
동안에는 하녀를 곁에 세워 놓고 졸기 시작하면 깨워 일으키게 하였다고 한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다. 책을 펼쳐 들고 옛 성현들이 자기에게 이야기를 걸어왔을
때도 잠이 오거든 곧 자리 속에 들어가 자는 게 좋다. 송곳으로 종아리를 찌르거나,
또 하녀가 흔들어 깨워 도대체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이같은 사람들은 책을 읽는
즐거움이라는 느낌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있다. 어쨌든 제법 사람이 된 선비라면
(자자면학)이니 (각고면려)니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절대로 모른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못 견디기 때문에 책을 사랑하여 읽을 뿐인 것이다.
  이 점을 알게 되면 독서할 때와 장소를 어떻게 골라야 하느냐 하는 문제의 해답도
또한 얻어지게 된다. 즉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아무 데서나 읽어도 좋다.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알게 되면 학교에서 읽어도 좋고, 학교 밖에서 읽어도 좋고,
또는 학교 따위는 전혀 문제 삼지 않아도 좋다. 공부를 하고 싶다면 가장 좋은
학교는 어디에나 있다. 옛날의 중국번은 가족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동생이 서울에
와서 좀더 좋은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한데 대하여 이렇게 대답했다.
  (공부가 하고 싶다면 시골 어느 학교에서도 공부는 할 수가 있다. 사막에서도,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서도 할 수 있고, 나뭇군이나 목동이 되어서도 할 수가 있다.
공부할 뜻이 없다면 시골 학교에서도 못할 뿐만 아니라 조용한 시골집도 신선이 사는
섬도 공부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흔히 세상에는 무언가 책을 읽으려고 할 때 책상 앞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며
방안이 너무 춥다느니, 의자가 너무나 딱딱하다느니, 빛이 너무 강해서 책을 읽을 수
없다느니 하면서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또 그런가 하면, 모기가 너무 많다느니,
종이가 너무 반질거린다느니, 거리의 소음이 너무 시끄럽다느니 하면서 도무지 글을
쓸 수 없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이 있다. 송나라의 위대한 유학자였던 구양수는
(삼상)을 글 쓰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했다. 삼상이란 침상, 마상, 측상(변소
마룻바닥 위)을 말한 것이었다. 청나라의 유명한 학자에 고천리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한 여름에 (벌거벗고 유서를 읽는) 버릇이 있었다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편 또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을 때는 사철 어떠한 때에도 독서하지
않는다는 그런 태도도 충분히 수긍이 간다. 다시 말하면,

  봄철에 읽음은 봄의 뜻을 어기는 것이며,
  여름철은 잠자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고,
  겨울도 황망히 저물거든
  잠시 기다리리, 다시 오는 봄을.

  그렇다면 참된 독서법이란 무엇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기분이 내키면 책을 손에
들고 읽는다. 다만 그뿐인 것이다. 책읽기를 진심으로부터 즐기려면 어디까지나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해야 한다. 표지가 부드러운 (이소)라든가 오마르
카이옌(페르시아의 시인, 1025 __ 1123)의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애인과 함께
강둑으로 그 책을 읽으러 간다. 그때 하늘에 아름다운 구름이 떠 있다면 구름을 읽고
책을 잊는 게 좋다. 그렇지 않으면 책과 구름을 함께 읽으라. 때로 한모금의 담배,
한잔의 차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또는 흰 눈이 내리는 한밤중에 화롯가에
앉아 있을 때, 화로 위 차 주전자에서 끓는 소리가 들리고, 곁에는 한 갑의 담배가
있다. 그럴 때 철학, 경제학, 시가, 자서전 등 열 두 서너 권을 책상 위에 수북이
쌓아 놓고 한가로운 기분으로 그 가운데 몇 권을 펼쳐 보다가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대목이 있으면 조용히 담배에 불을 붙여 문다. 김성탄은 눈 내리는 밤에 문을 닫아
걸고 금지된 책을 읽는 것을 인생에서 가장 큰 쾌락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는 흐뭇한 마음은 진계유의 다음 한 마디에 유감 없이 잘 표현되어 있다.
  (옛사람들은 서화를 유권, 연첩이라고 일컬었다. 그러므로 책을 읽거나 화첩을
펼쳐볼 때의 가장 좋은 태도는 마음 느긋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하여 참고 견디는 마음을 기르는 것이다. 진유계는
또한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참된 대가는 사서를 읽을 때 잘못된 글자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마치 그것은
훌륭한 여행가가 등산할 때 길이 나쁜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나, 눈 경치를
구경하려는 사람이 튼튼하지 못한 다리를 참고 걷는 것이나, 전원 생활을 원하는
사람이 야인을 피하지 않는 것이나, 꽃을 감상하는 사람이 탁주를 사양하지 않고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책을 읽는 기쁨을 가장 아름답게 쓴 글을 나는 중국에서 으뜸가는 규수 시인
이청조의 자서전 속에서 발견했다. 그녀의 남편이 국립 학교의 학생으로서 매달 받는
급료는 받는 날은 어김없이 헌책이나 탁본을 팔고 있는 사원으로 부부가 함께
찾아가곤 했다. 돌아오는 길에 얼마간의 과일을 사고, 집에 돌아오면 과일 껍질을
벗기면서 사온 탁본을 부부가 함께 조사하며, 차를 마시기도 하고 판본의 다르고
같은 점을 비교하기도 한다. (금석록발문)으로 알려져 있는 청조 여사의 자서전 한
귀절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저녁 식사를 끝낸 뒤면 우리는 조용히 귀래당에
앉아서 차를 끓여 놓고 선반 위에 수북이 쌓여 있는 책들을 가리키면서, 어떤 구가
어떤 책 몇 권째 몇 면의 몇 줄째에 있는가를 알아 맞히곤 했다.
  알아맞히면 먼저 차를 마실 수 있는 것이다. 잘 맞히면 찻잔을 높이 쳐들고 큰
소리내어 웃는다. 너무 흥이 도도해져서 차가 옷 위에 쏟아져 마시지 못하게 되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만족하며 살고 그리고 나이를
먹어 갔다. 생활은 가난하고 슬펐지만, 우리는 머리를 높이 쳐들고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살았다. ... 그러는 동안 수집품이 점점 많아져서, 책이며 미술품이 책상
위에도 정자 위에도 또 침대 위에도 가득히 쌓이게 되었다. 우리들 부부는 그것을
눈과 마음으로 즐기면서, 앞으로 이렇게 하리라 저렇게 합시다 하고 곧잘 이야기를
주고 받곤 했다. 그것은 개나 말을 기르거나 음악을 즐기는 도락보다는 훨씬 즐거운
것이었다.



    4. 문장도에 대하여

  문장도는 문장을 짓는 법 그 자체, 즉 글을 쓰는 기법보다 매우 범위가 넓은
것이다. 실제에 있어 작가를 지망하는 초심자에 대해서는 우선 문장의 기법에
지나치게 구애되는 마음을 제거해 주는 것이 좋다. 즉 기법이니 하는 피상적인
문제에 사로잡히지 말고 참된 문예적 인격의 함양은 모든 글짓기의 기초로 하여 자기
정신의 깊은 곳까지 파내려 가도록 지도하는 것이 좋다. 참된 문예적 인격이
길러지고 올바르 기초가 마련되면 문예는 저절로 갖추어질 것이며, 기법의
끄트머리에 이르는 조그마한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고 마는 것이다. 이렇듯 소질 그
자체가 좋아지면 수사나 문법 같은 점에서 다소 서투르고 못한 점이 있더라도 그런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어느 출판사에서도 반드시 전문적인 교정원이라는 것이 있어서 콤마니
세미콜론이니 분할 부정법 같은 것에 주의하는 것이 그 사람들의 하는 일로 되어
있다. 그 반면 제아무리 문법이 바르고, 문학적 수식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문예적인
인격의 수양을 게을리 해서는 작가가 될 수는 없다. 뷔풍(1707 __ 1788, 프랑스의
박물학자, 철학자)이 말한 것처럼 (문체는 사람이다) 문체는 방법도 아니고 체계도
아니고 상식도 또한 아니다. 그것은 독자에게 느껴지는 작가의 품성의 특질, 즉
깊이가 있는가 없는가, 통찰력이 있는가 없는가, 그밖의 기지, 유우머, 신랄한 풍자,
다정스러운 정미, 감성의 섬세함, 이해력의 섬세함, 부드러운 야유나 또는 냉소적인
상냥함, 고집스러움, 실용적인 상식, 그리고 사물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 그러한
여러 가지 것에서 독자가 받는 인상의 총화를 가리켜서 문체라고 한다.
(유우머러스한 기법)을 숙달케 하는 핸드북이니, (냉소적이면서 상냥해질 수 있는 세
시간 강좌)니, (실용적인 상식 15법칙)이니, (감정 섬세 11법칙)이니 하는 것은
정말로 쓸모없는 것이다.
  우리는 문장도의 표면에서부터 깊이 파내려 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 깊은 곳에
도달한 순간 문장도의 문제에는 문학, 사상, 사물의 통찰력, 사고법, 감정 그리고
읽고 쓰는 모든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자기 표현파의
부흥과 발랄하고도 개성적인 산문체의 발달에 뜻을 두고 중국에서 문학 운동에
참가했다. 그리고 문예 전반, 특히 문장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논하기 위해 차례로
많은 논문을 써야만 했다. 또 전체를 (담뱃재)에 씌어 있는 내용을 조금만 적어
보겠다.



    5. 기법과 인격에 대하여

  작문 교사가 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목수가 마술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비평가가 문장 기법에서 문예 작품을 분석하는 것은 기술자가 태산의 높이와
구조를 콤파스로 측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정말로 우습기 짝없는 일이다.
  문장 기법이니 하는 따위의 것은 없다. 다소 그 가치가 인정되어 있는 모든 중국의
우수한 작가는 모두 다 그것을 부인하고 있다. 문장에 있어서의 문장 기법은 교회에
있어서의 교의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하찮은 인간이 하찮은 문제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일 뿐이다.
  초심자는 언제나 기법론에 현혹된다... 소설, 희곡, 음악, 연극의 기법에. 문장
기법이 작가의 출현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한다. 미술, 문학에
있어서의 모든 성공의 기초에 인격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른다.



    6. 문학 감상에 대하여

  이제 가령 훌륭한 작가의 문장을 많이 읽었다고 하자. 첫째 작가의 묘사는 매우
발랄하며 생동감이 있고, 둘째 작가에게는 섬세하고 우아한 취향이 깊고, 세째
작가의 표현은 정묘하며, 네째 작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매력이 있다. 다섯째
작가의 작품은 고급 위스키의 맛과 같고, 여섯째 작가의 것은 향기 그윽한 술과
같다고 느꼈다고 하자. 이럴 때 그 사람의 감상력이 참된 것인 한, 이런 작가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공언하기를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광범위한 독서의 경력을
쌓음으로써만 비로소 정밀, 원숙, 강인, 힘, 광채, 신랄, 섬미, 매력이란 어떠한
것인가를 아는 적절한 경험의 기초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모든 풍미를 모조리
다 맛보게 되면 한 권의 핸드북을 읽지 않더라도 무엇이 좋은 문학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
  문학 연구가의 첫째 법칙은 여러 가지 풍미를 맛본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풍미는
고요하고 쾌활하며 원숙된 맛이지만, 작가로서 이 경지에 도달하기란 무엇보다도
어렵다. 고요함과 무미하고 단조로움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의 차이 밖에 안된다.
사상에 깊이가 없고, 독창성이 결여된 작가는 평범한 문체로 하려다가 결국 무미하고
단조롭게 되어 버리고 만다. 신선한 물고기만이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즙으로 요리될
수 있는 것이다. 신선하지 못한 물고기는 안초비 소오스니 후추니 겨자로 맛을 내지
않으면 안된다... 조미료가 많으면 많을수록 맛이 나는 것이다.
  뛰어난 작가는 분도 연지도 바르지 않고 직접 황제를 만나러 갈 수 있었던
양귀비의 동생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후궁의 다른 미인들에게는 모두 분과 연지가
있어야 한다. 감히 평범한 영문을 쓰려고 하는 작가가 매우 적은 것은 이 때문이다.



    7. 문체와 사상에 대하여

  문장이 좋고 나쁘고는 아름다움과 풍미가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무엇을
아름다움이라고 하는가. 그 법칙은 있을 수 없다. 문장의 아름다움은 파이프 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또는 산마루에서 솟아오르는 구름처럼 멀리 희미하게
나타난다. 가장 좋은 문체는 소동파의 그것처럼 (행운 유수(구름이 흐르듯 물이
흘러가듯))다.
  문체는 언어, 사상, 인격이 모두 합쳐진 합성물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언어만으로
되어 있는 문체라는 것을 가끔 보게 된다.
  뚜렷한 사상이 뚜렷하지 못한 말로 싸여 있는 예는 거의 없다. 뚜렷하지 못한
사상이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한 문체는 분명히 뚜렷하지
못하다.
  뚜렷하지 못한 말로 표현된 뚜렷한 사상은 고집스러워 고쳐 줄 수 없는 독신자의
문체다. 아내에게 아무런 설명도 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면 임마누엘 칸트와 같다.
사무엘 버틀러가지도 때로는 꽤 이상야릇한 말을 하고 있다.
  문체는 언제나 그 (문학의 연인)의 감화를 받는다. 사고법이나 표현법이 해를
거듭함에 따라 더욱 더 연인을 닮아간다. 이것이야말로 초심자가 문체를 수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후년에 이르면 자기를 발견하는 것에 의하여 자기의 문체를
발견한다.
  독자가 저자를 싫어하면 그 저서에서 배우는 바는 아무것도 없다. 학교 선생님들은
이러한 일을 잊지 마시라!
  인간의 성질에는 천성적인 것도 있다. 문체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다. 다른 부분은
여러 가지가 섞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좋아하는 작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혼이 있을 리 없다. 언제까지 지나도 무정란이다. 화분이 생기지 않는
암술이다. 좋아하는 작가 즉 문학상의 여인은 혼의 화분이다.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에게나 있다. 없는 것은 발견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인생의 그림이나 도회지의 사진과 같은 것이다. 뉴욕이나 파리의 사진은
보지만 진짜 뉴욕이나 파리를 보지 못한 독자가 있다. 똑똑한 사람은 책과 더불어
인생 그 자체를 읽는다. 우주는 한 권의 큰 책이다. 인생은 하나의 커다란 학교다.
  뛰어난 독자는 저자를 뒤집어 놓는다. 거지가 이를 찾느라고 저고리를 뒤집는
것처럼.
  어떠한 문제거나 그것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그 문제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책부터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방법을 취하면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반대 입장의 책을 읽어 두면 찬성하는 입장의 책을 읽는
마음의 준비가 한층 잘 정돈되기 때문이다. 비평적인 정신을 기르는 방법은
이것이다.
  작가는 언제나 말로서의 말에는 본능적인 흥미를 갖는다. 모든 말에는 보통
사전에는 실려 있지 않는 생명과 인격이 담겨 있다. 다만 콘사이스 옥스퍼드 또는
포켓 옥스퍼드 사전만은 예외로 하고.
  좋은 사전은 P. O. D.(포켓 옥스퍼드 사전)처럼 언제라도 읽을 수 있는 사전이다.
  말의 광산에는 두 가지가 있다. ... 새 것과 헌 것과 헌 광산은 책 속에 있고, 새
광산은 일반 용어 속에 있다. 2류즘 되는 예술가는 한 광산을 파겠지만 1류 예술가에
한하여 새로운 광산에서 무엇인가를 파낼 수가 있다. 헌 광산의 광석은 벌써
정련되어 있지만 새로운 광산의 광석은 아직도 정련되어 있지 않다.
  왕충(기원 27 __ 100년)은 (전문가)와 (학자)를 구별하였고 또 (작가)와 (사상가)를
구별했다. 전문가는 그 지식의 범위가 넓어졌을 때 학자로 진급되고, 작가는 그
예지가 깊어졌을 때 사상가로 진급한다.
  그런데 (학자)의 저작은 다른 학자들로부터 빌어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인용하는
원전이나 출전이 많을수록 (학자)답게 보인다. 사상가의 저작은 자신의 뱃속의
관념으로 되어 있다. 위대한 사상가일수록 자기의 장액에 의존한다.
  학자는 입으로 먹는 것을 다시 배앝아서 새끼를 먹여 기르는 갈가마귀와 같은
것이다. 사상가는 뽕잎이 아니라 비단을 배앝는 누에와 같은 것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는 관념을 임신하는 기간이라는 것이 있다. 출생하기 전에
태아가 자궁 내에서 임신 기간을 지나는 것처럼. 좋아하는 작가가 자기의 혼에 불을
켜고, 산 관념의 흐름을 만들어 낼 때 그것은 곧 (수태)다. 그 관념이 임신 기간을
지나기 전에 인쇄를 서두르는 것은 설사이지 진통은 아니다. 작가가 양심을 팔고,
신념에 위반되는 글을 쓴다면 그것은 인공 유산이며 태아는 틀림없이 사산되고 만다.
소나기처럼 격렬한 경련을 머리에 느끼고, 그 상념을 배앝아 버리기 전에는 차분하게
안정되지 못하며 종이 위에 쓰기 시작해야만 비로소 안심이 된다면 그것은 문예적
탄생이다. 따라서 작가는 어머니가 갓난아기에게 대하는 것과 같이 자기의 문예적
소산에 모성애를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은 작가 자신의 것일 때에 훌륭하게
생각되고, 여자는 남의 아내일 때가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다.
  펜은 화공의 송곳처럼 쓰면 쓸수록 날카로와지고, 점점 수놓는 바늘처럼
예리해진다. 이에 반하여 인간의 사상은 더욱 더 원숙해 간다. 마치 낮은 산에서
높은 봉우리로 오르면서 바라보는 경치와도 같이.
  작가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고 그 사람에 대한 통렬한 논란을 퍼부을 생각으로
붓을 들려고 생각하고 있어도, 만일 아직 그 사람의 좋은 반면을 보고 있지 않는다면
다시 한 번 붓을 놓아야 한다. 그에게는 아직도 그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A. 자기 표현파
  16세기 끝 무렵 원 3형제(원이라 함은 명의 원송도, 원굉도, 원중도의 3형제)에
의해 창시된 이른바 (성령파),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공안파(공안은
3형제의 고향)는 자기 표현파다. 성은 (개성)을 의미하고, 영은 사람의 (혼) 또는
(생명력)을 의미한다.
  저술은 자기의 천성, 품격의 표현, 또는 그 생명력의 약동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천래의 신흥)이란 이 생명력의 흐름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혈액 속의
호르몬의 과잉이 그 원인이 되고 있다.
  늙은 스승을 대하는 것, 다시 말해서 옛사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옛사람의
생명력의 흐름을 찬찬히 본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생명력의 흐름이 메말라서
윤기가 없거나 그 정신이 비열하면 아무리 훌륭한 서예가나 문장가의 작품도, 정신
다시 말해서 생명력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이 (천래의 신흥)은 즐거운 꿈을 꾸면서 깊이 잠들고, 아침이 되어 저절로 잠이
깼을 때 솟아나오는 것이다. 아침 차를 한 잔 마시고 나서 신문을 읽는다. 마음을
산란하게 할 만한 기사는 하나도 없다.
  그래서 천천히 서재로 발걸음을 옮겨 밝은 창문 앞의 깨끗한 책상을 대하고
앉는다. 창밖에는 명쾌한 햇빛이 빛나고 바람은 고요하다. 이러한 한때 좋은 수필,
좋은 시, 좋은 편지,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또 좋은 평을 쓸 수 있다.
   (자아) 또는 (인격)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은 사지, 근육, 신경, 이성, 감정, 교양,
이해력, 경험, 편견 따위가 한묶음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저절로 갖추어지는 것도
있고, 교양에 의한 것도 있으며, 선천적인 것도 있고, 갈고 닦음에 의한 것도 있다.
사람의 성질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벌써 결정되어 있다. 아니 태어나기 전에
결정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천성이 잔인하고 비열하며, 또 어떤 사람은 천성이
쾌활하고 솔직하며, 직정, 인협, 관후하며, 또 어떤 사람은 선천적으로 성격이
온화하고 나약하거나 근심꾸러기이다. 이러한 자질은 골수에까지 스며들어 있는
것이므로 아무리 훌륭한 교사, 아무리 현명한 어버이라 할지라도 인격의 형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또 다른 자질은 태어난 뒤 교육과 경험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사상, 관념, 인상은 다종다양한 원천과 생애의 각 시기의 갖가지
영향에서 생기는 것인 한 관념, 편견, 사물의 관찰법, 사고법은 심한 혼란과 모순을
나타낸다. 어떤 사람은 개를 좋아하지만 고양이를 무서워 한다. 어떤 사람은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개를 무서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인격의 형을 연구하는 것은
모든 과학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것이다.
  자기 표현파는 본인에게 참된 사상과 감정, 즉 거짓 없는 사랑, 거짓 없는 미움,
거짓 없는 두려움, 거짓 없는 취미만을 문장에 표현하라고 요구한다. 좋은 것만을
내놓고 나쁜 것은 숨기는 따위의 잔꾀를 부리지 않고,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두려워 하지 않고, 옛날의 성현이나 현대의 권위자의 설과 모순되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솔직하게 자기를 표현하려는 것이다.
  자기 표현파의 작가는 한 작품 가운데서 작가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향을
사랑하고 그 향 중에서 가장 특징 있는 문장을 사랑하며, 문장 중에서 가장 특징
있는 표현을 사랑한다. 하나의 장면, 감정, 사건을 묘사하는데 있어서도 자신이 본
그대로의 장면, 자신이 느낀 그대로의 감정, 자신이 해석한 그대로의 사건을
다루어야 한다. 이 법칙에 들어맞는 것은 문학이며 들어맞지 않는 것은 문학이
아니다.
  (홍루몽) 속에 나오는 소녀 임대옥은 (시인이 좋은 구를 얻었을 때는 운이
이제까지의 형에 맞거나 맞지 않거나 그런 것에 구애되어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녀 또한 자기 표현파의 하나일까?
  자기 표현파는 거짓 없는 감정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자연 꾸밈이 많은 문체를
경멸한다. 따라서 문장의 순수하고 온화한 풍미를 귀하게 여긴다. 그리고
(사달이기(문장의 유일한 목적은 표현에 있다))라고 한 맹자의 금언을 언제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잊지 않는다.
  문장의 아름다움은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 파의 위험은 작가의 문체가
단조로와지는 것(원중랑이 그러하다), 관념이 이상한 것에 치우치는 것(김성탄이
그러하다), 또는 그 관념이 권위 있는 기성 관념과 몹시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이탁오가 그러하다). 자기 표현파가 매우 유가의 미움을 사게 된 까닭도 바로
이 점에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중국의 사상과 문학을 그 절대적 획일주의와
죽음에서 건져낸 것은 이러한 독창적인 작가들이었다. 이제부터 앞으로 수십 년
뒤에는 중국도 반드시 그들의 천하가 될 것이 틀림없다.
  중국의 정통파 문학은 분명히 성현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작가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주로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죽었다. 성령파
문학은 작가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성현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주로 자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살아 있다.
  이 파의 작가에게는 긍지와 독존의 기풍이 있다. 그러므로 자기 본래의 도를
떠나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공자, 맹자가 그들에게
동의하고, 그들의 양심까지도 승인하였다고 하면 굳이 자기의 도를 떠나서 성현에
반대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양심이 승인하지 않으면 공자, 맹자에게도
감히 도를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황금의 유혹에도 동하지 않고, 추방의
위협에도 꿈쩍도 않을 사람들이다.
  진정한 문학은 우주와 인생에 대한 경이감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시력이 건전하고 또렷한 사람은 언제나 모두가 이 경이감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하게 보이기 위하여 진실을 일그러뜨릴 필요는 없다. 이 파의 작가의
관념, 사물의 관찰법이 언제나 새롭고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독자가 비뚤어진 시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약점은 성령파 비평가가 사랑하는 점이다. 성령파 작가는 옛사람이나
현대인을 흉내내는 것, 문학의 기법 법칙에 다같이 반대하였다. 원 형제는 (입이나
손목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저절로 좋은 모양이 된다)는 것을 믿었고, (문학의 요는
진실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입 옹은 (문학의 요는 매력과 흥미)라고 믿고 있었다.
원매는 (문학에는 기법이 없다)라고 믿고 있었다. 송나라 첫무렵의 작가 황산곡은
(문장의 행과 형은 벌레가 파먹은 나무의 구멍처럼 전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B. 모든 것을 다 터놓은 문체에 대하여
  탁 터놓은 문체의 작가는 너그러운 기분으로 말을 한다. 그는 자기의 약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놓는다. 그러므로 무장하고 있지 않다.
  작가와 독자와의 관계는 엄격한 교장과 학생과 같은 관계여서는 안된다. 모름지기
친한 친구끼리의 관계여야만 한다. 이래야 비로소 온정미가 생기게 된다.
  자기의 작품에서 (나)를 쓰기를 두려워 하는 사람은 단연코 좋은 작가는 될 수
없다.
  나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보다는 거짓말장이를 사랑한다.
  거짓말장이도 빈틈없고 조심성 있는 거짓말보다 경솔한 거짓말장이가 더 좋다. 그
경솔함은 그가 독자를 사랑하고 있는 증거다.
  나는 경솔한 바보를 신용하고 법률가를 의심한다.
  경솔한 바보는 국가의 가장 큰 외교관이다. 그는 민중의 마음을 잡는다.
  내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좋은 잡지는 한 주일 걸려 발행하는 잡지다. 2주간에
한 번 조그마한 방에 좋은 좌담가 한 무리를 모아 놓고 함께 이야기하게 한다.
독자에게는 그것을 옆에서 듣게 하고, 좌담회는 대개 두 시간 정도로 끝마치기로
한다. 그것은 마치 즐거운 야화에 열중하는 것과 같아서, 그것이 끝나면 독자는
잠자리에 든다. 이튿날 아침 잠을 깨어 어떤 사람은 은행원으로서, 어떤 사람은
회계원으로서, 어떤 사람은 학생에게 게시문을 내붙이는 교장으로서 각자의 일터로
나가는 것인데, 어젯밤의 환담의 향기는 아직도 뺨 근처에 떠돌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것이다.
  금테를 두른 거울이 있는 큰 방에서 호화로운 연회를 하는 요정도 있고, 또 몇몇
사람의 주연에 맞도록 꾸며진 술집도 있다. 두서 명의 친구들이 모여서 조촐한
주연을 베푸는 것으로 나의 소망은 충분히 족하다. 부귀와 권세 있는 집의 큰
주연에는 가고 싶지 않다. 그러나 조촐한 음식집에서 마시고 먹고 떠들고 상대편을
야유하고 술잔을 뒤집어 엎고 옷을 버리거나 하는 재미도 큰 연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아아, 그때 그토록 즐거운 일이 있었지) 하는
즐거운 추억도 없다.
  세상에는 부호의 정원이나 저택도 있고, 산속의 한 간짜리 오막살이도 있다.
산속의 오막살이라 해도 때로는 취미가 고상하고 아름다운 살림살이를 갖춘 집도
있기는 하지만 분위기 그 자체는 요란하게 채색한 집에 한 무리의 하인들이 주욱
늘어선 부잣집과는 전혀 다르다. 안에 들어가도 충성된 개가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점잔을 빼는 집사나 문지기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떠날 때도 문밖에 있는
한쌍의 (음란한 돌사자)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정경은 17세기의 한 작가에
의하여 역력히 묘사되어 있다.
  (주, 정, 장, 주의 모든 학자가 복희당에 자리를 함께 하여 머리 숙여 절을 나누고
있다. 그 자리에 난데없이 소동파와 동방삭이 신도 신지 않고 절반 벌거벗은 채로
뛰어 들어온다. 그리고는 손뼉을 치면서 농을 걸기 시작한다. 이러한 것이다. 옆에서
보는 사람은 아마도 어이가 없겠지만 이 두 고매한 선비의 마음과 마음은 서로 통해
있다!)

  C.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문학의 아름다움, 사물의 아름다움이라고 불리는 것은 변화와 움직임에 딸려 있는
수가 많다. 즉 생명에 기초를 두고 그 위에 서 있다. 생명있는 것에는 언제나 변화와
움직임이 있으며, 변화와 움직임이 있는 곳에는 저절로 아름다움이 갖추어진다.
산간의 절벽, 골짜기, 계류에는 운하 따위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 멋대로이며 호탕한
아름다움이 있다. 더군다나 그것은 건축가의 계산을 기다리지 않고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보면 문학 문장에 일정한 법칙을 마련할 수 있겠는가. 별자리는 천문, 즉
하늘의 문학이다. 명산대강은 땅의 문학, 즉 대지의 문학이다. 바람이 불어 구름의
모양이 변하면 거기에 비단무늬가 생긴다. 서리가 내리고 나뭇잎이 떨어지면 거기에
소슬한 가을빛이 나타난다. 푸른 하늘의 궤도를 도는 별은 지상의 인간들이 자신들을
관상하고 있다는 것을 머릿속에 둔 일이 있을까. 더구나 큰개좌와 견우성은 가끔
가다 사람의 눈에 띄는 것이다. 지각은 신축이 무상하여 높은 산을 밀어 올리고 깊은
바다를 뚫는다. 그러나 지구는 인간에게 숭배하게 하려고 오악을 만든 것일까,
더구나 태산이나 화산이나 곤륜산은 웅혼한 리듬을 가지고 우뚝 솟아 있고, 옥녀나
선동 같은 묏부리는 우리를 둘러 싸고 장엄하게 솟아 있어,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해주려는 것 같다. 이러한 것은 거장인 창조주의 분방하고 자재로운 한 번의 솔질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산꼭대기에서 솟아올라 거세게 부는 산바람의 돌격을 만난 구름에게,
인간에게 보이려고 바지나 목도리에 마음을 쓸 겨를이 있겠는가. 더우기 구름은
스스로 형태를 갖추어 어떤 때는 고기 비늘이 되고, 어떤 때는 비단 무늬를
그려내고, 어떤 때는 쏜살같이 달리는 개 같고, 어떤 때는 포효하는 사자로 변하고,
어떤 때는 춤추는 불사조처럼 보이고, 어떤 때는 뛰어다니는 외뿔짐승의 모습으로
변한다. 정말로 시문의 신품을 연상케 한다. 춥고 더운 고난과 서리의 침해를 몸에
느끼고 호흡을 맞추어 정력을 보존하기에 급급하고 있는 가을 나무에게 옛길을
걸어가는 나그네의 눈을 즐겁게 해주려고 분과 연지로 치장할 겨를이 있겠는가.
더구나 나무들은 차갑고 해맑으며 적막감을 주며, 그 풍취는 왕유나 미불의 그림보다
훨씬 낫다.
  이렇듯 우주 사이의 산물에는 예술적인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마른 덩굴의
아름다움은 왕희지의 글씨보다 위대하다. 준엄하고 날카로운 절벽은 장맹룡의
묘비명보다 웅혼하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의 문, 즉 예술미는 그 천성에서 나오고,
그 천성을 다하는 자는 문, 즉 아름다운 옷을 입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문, 즉 선과 형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안에 있는 것이며, 결코 밖에서 온 것은
아니다. 말의 발굽은 빨리 달릴 수 있도록, 범의 발톱은 짐승을 덮쳐 누를 수
있도록, 학의 다리는 늪이나 연못을 건널 수 있도록, 곰의 발은 얼음 위를 걸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말이나 범이나 학이나 곰은 형태나 균형이 잡혀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생활의 기능을
다하고, 운동에 적합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동물이 하려고 하는 모두다. 그러나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말의 발굽, 범의 발톱, 학의 다리, 곰의 발 등은 그 완전히
갖추어진 외형에도, 힘의 암시에도, 선의 섬세함과 강함에도, 선명한 윤곽에도, 또는
그 불끈 솟아오른 관절에도 훌륭한 아름다움이 있다. 또 코끼리의 발은 예서와 같고,
사자의 갈기는 비백과 같으며, 싸우는 뱀은 보기 좋게 구불구불 구부러진 초서를
쓰고, 날으는 용은 진서를 쓰고, 소의 다리는 팔분을 연상케 하고, 사슴은 소해를
닮은 데가 있다.
  이러한 동물의 아름다움은 그 자세와 움직임에서 생기고 자태는 몸의 기능의
결과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문장미의 비결이기도 하다. 운동의 힘, 즉 자세에
필요한 것은 문장에서도 억제해서는 안되고, 자세나 운동에 필요가 없는 것은 그만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문의 걸작은 자연 그 자체의 운동과 같은 것이어서 모양이
없으면서 모양이 있고, 매력과 아름다움은 스스로 갖추어진다. 힘이라는 것은
동태미이지 균제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이 있고, 움직임이 있는 것에는 모두 이
힘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움이 있고, 힘이 있고, 글이 있다. 즉 형과 선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

제10장 자연의 즐거움

    1. 낙원은 잃어버렸는가

  지구상의 무수한 생물 가운데서 모든 식물에는 자연에 대한 (태도)라는 것은 없고,
모든 동물도 또한 사실상 (태도)라고 할 만한 것은 없는데, 인간이라는 한 생물이
있어 이것만이 자기와 자기의 환경을 의식하고 다라서 그 환경에 대해 하나의 태도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인간의 예지가 시작된 것은 우주에 회의를 품고
그 비밀을 탐구하고 그 의의를 발견하려고 한데서 비롯한다. 우주에 대한 태도에는
과학적인 것도 있고, 도덕적인 것도 있다. 과학자의 관심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지구의
내부와 표피의 화학적인 구조, 지구를 둘러싼 대기의 두께, 대기의 맨 위층에
방사하는 우주선, 구릉이나 암석의 형성, 생명 일반을 규정하는 법칙 따위의
발견이다. 이 과학적인 태도는 도덕적인 태도와 관련은 있지만, 그 자신으로서는
안다는 것과 탐구한다는 것의 순수한 욕구다.
  이에 반하여 도덕적 태도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자연과 조화하는 것도 있고,
정복과 복종, 지배와 이용이라는 관계가 되는 것도 있고, 불손한 모멸로 나타나는
수도 있다.
  이 마지막 태도, 다시 말해서 불손하게도 지구를 모멸하는 태도는 문명, 특히
어느 종류의 종교에서 생긴 것이며 실로 기괴한 산물이다. 그 근원은 (실락원)이라는
허구적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이상하게도 이 이야기는 원시종교 전설의 유물로
지금까지도 상당히 널리 믿어지고 있다.
  낙원 상실성이라는 것을 믿을 만한 것인지 어떤지 의문을 품는 사람이 아직까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어이없는 이야기다. 결국 에덴 동산이 얼마나 아름답고
이 우주의 실체가 얼마나 추하다는 것인가. 나는 물으리라. 이브와 아담이 죄를
저지른 뒤 꽃은 피지 않게 되었던가? 단 한 사람의 죄 때문에 신은 능금나무를
저주하고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였던가? 꽃의 빛깔은 생기를 잃고 창백해져야 한다고
결정했던가? 황조나 꾀꼬리나 종달새는 노래를 부르지 않게 되었던가? 산꼭대기에는
눈이 없어지고 아름다운 호수 위에 빗긴 그림자는 간 곳이 없어졌는가? 새빨간 저녁
해와 무지개며 여러 마을을 감싸고 있는 안개는 없어졌는가? 나무 그늘은? 떨어지는
폭포는? 흐르는 맑은 물은? 도대체 누가 (낙원)은 (상실되었다)느니, 오늘날 인간은
추한 우주에서 살고 있다느니 하는 신화를 발명해 낸 것일까? 참으로 인간이야말로
은혜를 저버린 방종한 신의 아들이다.
  이 현실 세계가 보여 주고 있는 것처럼 자연계의 모양, 소리, 향기, 맛과 우리의
시각, 청각, 후각, 미각과의 사이에는 신비롭다고 생각되는 완전한 교감작용이 있다.
우주의 모양, 소리, 향기와 우리의 자각 기관과의 이 관계는 극히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저 볼테르에게 심한 웃음거리가 된 목적론의 논거로 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들 모두가 목적론자가 될 것은 없다. 신은 이 향연에 우리를 초청할지도 모르며
또 초청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어쨌든 향연에 참석하는
것이 중국인의 태도다. 이제 눈앞에 맛있는 음식이 미각을 돋구는데 손을 대지 않고
내버려 둔다는 것은 어리석은 노릇이다. 자기가 다른 손님과 마찬가지로 향연에
초대받고 있는가 어떤가를 조사하거나 하는 것은 철학자의 형이상학에 맡겨둘 만한
일이다. 영리한 사람은 음식이 식기 전에 먹어 버린다. 배고픔은 언제나 건전한
상식과 함께 있는 것이다.
  아, 지구야말로 참으로 아름답다.
  첫째, 낮과 밤, 아침 저녁의 순환이 있다. 뜨거운 낮 뒤에는 서늘한 저녁이 있고,
바쁜 아침을 알리는 조용히 밝아오는 아침이 있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둘째, 여름과 겨울의 변화. 그 자체가 벌써 다시 없는 것이다. 봄은 여름으로,
가을은 겨울로, 저절로 옮아가는 완전무결한 4철의 모습,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세째, 삼엄하고 숭고한 나무숲이 있다. 여름은 녹음, 겨울은 따뜻한 햇볕.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네째, 달이 바뀌어 감에 따라 꽃은 피고, 열매는 익는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다섯째, 구름이 몹시 두껍고 안개가 짙은 날과 하늘이 맑고 청량한 날과의 그때
그때의 변천.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여섯째, 봄의 소나기, 여름의 뇌우, 가을의 상쾌한 소슬바람, 겨울의 눈.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일곱째, 공작과 비둘기와 종달새와 카나리아의 묘한 노래 소리.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여덟째, 동물원에 가 보라. 원숭이, 호랑이, 곰, 낙타, 코끼리, 코뿔소, 악어, 소,
말, 개, 고양이, 여우, 다람쥐, 산쥐, 그밖에 생각도 하지 못했던 갖가지 동물들.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아홉째, 홍어, 황새치, 전기뱀장어, 고래, 큰가시고기, 홍합, 전복, 새우, 참새우,
거북, 그밖에 상상에 넘치는 다채로운 종류의 물고기.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열째, 장대한 삼목의 우람한 줄기, 불을 뿜는 화산, 웅대한 동굴, 장엄한
산꼭대기, 들쑥날쑥한 언덕, 고요한 호수, 굽이굽이 흐르는 냇물, 새파란 둑길.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각자의 미각을 돋구는 메뉴는 실제로 끝이 없다.
  가장 영리한 유일한 방법은 우선 몸을 일으켜 향연에 참석하여 인생의 단조로움을
한탄하지 말 것이다.



    2. 두 중국 부인

  자연을 감상하는 것은 하나의 기술이어서, 사람의 기분과 개성에 좌우되는 수가
많다. 그래서 다른 모든 기술과 마찬가지로 그 기교를 설명하기란 어렵다. 모든 것은
자연적으로 솟아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하나의 나무, 하나하나의 바위,
또 어느 특정한 때의 하나하나의 경치를 감상하기란 어렵다. 어떠한 경치라도
정확하게 같은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칙을 세우기도 어렵다.
분별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남에게서 배우지 않더라도 능히 자연을 즐기는 길은 알 수
있을 것이다. 해브룩 엘리스와 반 데르 벨레는 부부간의 사랑의 기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데 매우 현명하게 본 것 같다. ... 부부간의 사랑의 기술에서 어떤
것은 허용되고 어떤 것은 허용되지 않으며, 또는 어떤 것이 쾌미가 있고 어떤 것이
쾌미가 없는가 하는 문제는 법칙으로 규정지을 것이 못 된다. ... 자연을 감상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자연에 접근하는 가장 좋은 길은 아마도 예술적 기질을 지닌
사람들의 생애를 연구하는 일일 것이다. 대자연에 대한 감회, 일년 전에 본 아름다운
산수에 대한 동경, 어딘가를 찾고 싶다는 급작스러운 소망, 이러한 것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떠오른다. 예술적 기질을 지닌 사람은 가는 곳마다 그것을
발휘하므로 진정하게 자연을 즐기는 문인은 이야기 줄거리나 구상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아름다운 눈 경치나 봄 밤의 정취를 묘사하는 데 몰두한다.
저널리스트들이나 정치가들의 자서전에는 대개 회상록이 많이 실려져 있지만 문인의
자서전은 유쾌한 하룻밤의 회상이라든가, 여러 벗과 함께 어느 골짜기에서 놀던 때의
추억이 주로 담겨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R.키플링(1865   __ 1936, 영국의 작가,
시인)이나 G.K.체스터튼(1874 __ 1936, 영국의 작가이며 비평가)의 자서전은 뜻밖에
실망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의 생애의 중요한 일화가 어째서 그렇게도 중요시되고
있는 것일까?
  인간, 인간, 인간, 가는 곳마다 인간 뿐이고, 꽃이며 새며 산이며 개울의 이야기는
거의 안 나오지 않는가!
  그런데 중국 문인의 회상록이나 서한은 이러한 점에서 그 취향을 달리하고 있다.
호수 위에서 놀던 하룻밤 이야기를 친구에게 편지로 써 보내기도 하고, 또 참으로
유쾌했던 그날을 어떻게 지냈는가 하는 것을 자서전 속에 기록하는 것이 중요하게
되어 있다. 특히 중국의 문인은 적어도 그 몇 사람인가는 자기의 결혼 생활의 추억을
상세하게 기록하여 후세에 남기었다. 그 중에서도 모벽강의 (영매암억어), 심복의
(부생육기) 및 장탄의 (추등쇄억) 등이 뛰어난 작품이다. 처음의 두 저서는 처첩이
죽은 뒤에 남편이 쓴 것이며, 맨 끝의 것은 늙은 장탄이 아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쓴 것이다.
  우선 자기의 아내인 추부를 여주인공으로 한 (추등쇄억)의 몇 절을 여기에
발췌하고, 다음은 운을 여주인공으로 한 (부생육기)의 일절을 소개하겠다. 이 두
부인은 모두 특별한 교육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훌륭한 시인도 아니었지만 모두
솔직한 기질의 여성들이었다. 그러나 특별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느니, 훌륭한 시인이
아니라느니 하는 것들은 문제가 아니다. 대체로 인간은 불후의 명시를 지으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정취 깊은 한때와 그때의 자기의 기분을 기록하거나 자연을
관상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만 시작을 익혀야 할 것이다.

  A. 추부
  추부는 나에게 가끔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의 수명은 길어야 백 년 밖에 계속되지 않습니다. 그 백 년도 반은 잠과
꿈으로 보내고, 반은 병과 슬픔으로 보내고, 또 그 반은 요람과 노쇠 속에서
보냅니다. 남은 것은 겨우 1할이나 2할 밖에 되지 않습니다. 게다가 우리들처럼
연약한 체질인 사람은 그 백 년의 수명조차 바랄 수 없습니다)
  중추 8월의 달 밝은 하룻밤, 추부는 젊은 여종에게 금을 안고 따르게 하여 서호의
연을 헤치고 작은 배를 띄웠다. 나는 그때 서계에서 돌아오는 도중이었는데, 집에
돌아와서 추부가 뱃놀이에 나갔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곧 수박 몇 개를 사들고 그
뒤를 쫓았다. 우리는 소제 제2교에서 만났다. 추부는 때마침 (한궁추원곡)이라는
서글픈 곡을 뜯고 있었다. 나는 장의를 걷어 올리고 앉아서 그 곡을 귀기울여
들었다. 때마침 주위의 산들은 저녁 안개에 싸이고 별과 달빛이 수면에 비치면서
여러 가지 풍악 소리가 은은히 울려왔다. 허공을 오고가는 바람소리일까, 혹은
경옥이 울리는 소리일까,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작은 배의 뱃머리는 벌써 근의원
남쪽 둑에 닿았다. 그 길로 우리는 여승 가운데 아는 사람이 있었으므로 백운암의
문을 두드렸다. 잠시 앉아 이야기를 주고 받는 동안에 여승들은 새로 딴 연밥으로
국을 끓여 주었다. 연밥의 빛이라든가 향기라든가는 참으로 훌륭한 것으로 뱃속으로
스며들게 하기에 족하였다. 고기나 기름진 음식의 맛과는 판이한 것이었다. 조금 뒤
그곳을 떠나 단가교 옆에 배를 대고 땅 위에 참대 돛자리를 펴고 앉아서 장시간
둘이서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멀리서 들려오는 도회지의 소음은 파리 소리처럼
오히려 귀찮은 느낌이 들었다. ... 그렁지렁 하는 동안에 어느새 하늘의 별들은
하나씩 둘씩 빛을 잃어 듬성해지고 호수는 부옇게 흰빛으로 싸이고 말았다. 거리의
성벽 위에서 북소리가 울려왔다. 그 소리도 밤도 벌써 4경에 이르렀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금을 거두어 들고 작은 배를 저어 집으로 돌아왔다.
  추부가 심은 파초는 벌써 커다란 잎이 피어, 발 저편에서 녹음을 던져주고 있다.
베개에 기대어 가을비가 나뭇잎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까 적적하여 단장의
느낌이었다.
  나는 어느날 한 잎의 나뭇잎에 3행의 시를 장난삼아 썼다.

  누가 부지런하여 파초를 심었던가?
  아침에 비가 적적하게 오고
  저녁에 비가 적적하게 오누나!

  그 다음날, 이러한 3행의 시가 그 뒤에 적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쓸쓸히 애태우는 그대의 마음!
  파초를 심은 마음,
  파포를 원망하는도다.

  여자 솜씨의 아름다운 글씨, 틀림없는 추부의 희필임을 알았다. 그러나 나는 그
싯구에서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어느날 밤, 창 밖에는 비바람 소리가 들리고 잠자리에는 벌써 서늘한 가을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추부는 잠옷으로 갈아 입으려는 참이고, 나는 그 옆에 앉아서 그리기
시작한 백화도첩을 그리고 있었다. 마침 그때 몇 개의 물든 누런 잎이 나풀나풀
창문으로 날아들어 사뿐히 침상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추부는 거울을
돌아보고 이러한 시를 읊었다.

  어제는 오늘보다 더 좋은 날,
  올해는 작년보다 늙어가는 이 내 몸.

  나는 추부를 위로하여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백수를 다하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서로가 다른 것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겨를은 없지 않은가?) 그리고 나는 긴
한숨을 내쉬면서 화필을 옆으로 밀어 놓았다. 밤이 점점 깊어 감에 따라 추부는
무언가 마시고 싶다고 한다. 살펴보니 아궁이에는 벌써 불이 꺼진 지 오래고,
여종들은 모두 머리를 수그리고 잠들어 있다. 그래서 나는 책상 위의 등잔을 들어다
조그마한 찻주전자 밑에 놓고, 그녀에게 연밥 끓인 것을 한 잔 데워 주었다. 추부는
10년 전부터 폐를 앓고 있다. 늦가을에는 꼭 기침을 하여 높은 베개로 몸을 받치지
않고는 깊이 잠으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올해는 다른 해보다도 튼튼하여 밤늦게까지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는 일이 많았다. 아마 치료와 자양이 좋았던 모양이다.
  온몸에 눈이 날리고, 그 속에 매화가 피어 있는 옷을 나는 추부에게 만들어
주었다. 그 옷을 입은 모습을 좀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니 인간 세계에 홀로 서 있는
매화 선녀처럼 보였다. 늦은 봄 어느날 추부가 녹색 옷소매를 팔랑거리며 노대 위에
나가 있노라니 동풍의 계절이 다 지나간 줄도 모르는 나비가 그 주변을 나풀나풀
춤을 추었다.
  작년에는 제비가 예년보다 늦게 돌아왔다. 제비가 왔을 때는 발 밖의 복숭아꽃이
벌써 절반이나 지고 있었다. 어느날 제비 둥지에서 진흙이 떨어진 줄로만 알았더니,
제비 새끼 한 마리가 땅에 떨어졌다. 고양이한테 잡아 먹히기라도 하면 큰 일이라고
생각한 추부는 얼른 그것을 집어 다시 제비 둥지에 올려 주고 둥지를 참대로 받쳐
주었다. 올해는 작년과 똑같이 제비 떼가 다시 돌아와서 집 둘레를 재재거리며
날아 다닌다. 이 제비들도 작년에 새끼를 구해준 사람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추부는 바둑을 좋아했다. 그러나 그다지 잘 두는 편은 못된다. 그녀는 밤마다
(지담)이라는 놀이를 하자고 졸라 때로는 새벽까지 계속되는 일도 있었다. 나는
장난삼아 죽택의 문장을 인용하여 말했다.
  (돈던지기나 풀잎따기 놀이에서 임자는 두 번 다 졌으니 그럼 오늘밤은 나에게 뭘
주지?) 그러면 추부는 내 말을 받아, (내개 못 이긴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실 거예요.
이 패옥의 범을 걸겠어요) 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우리는 바둑을 두기 시작했는데, 한 이삼 십 수 놓자 벌써 그녀의 형체는
점점 불리하게 되어갈 뿐이었다. 그러자 그녀는 갑자기 아기 고양이를 바둑판 위로
집어 던져 바둑판을 흐트러 뜨리고 말았다. 그래서 나는 웃으면서 (임자는 자기가
양귀비인줄 아는가 보군) 하고 나는 말했다(양귀비는 현종 황제에게 똑같은 짓을
하였다)  그녀는 잠잠히 말이 없었다. 다만 은촛대의 불빛은 복숭아 꽃빛으로 물든
그녀의 뺨을 비쳐주고 있었다. 그 후로는 우리는 다시는 내기를 하지 않았다.
  호포천 옆에 나지막히 바위 위에 가지를 뻗고 있는 몇 포기인가의 강남차가 있다.
꽃이 필 무렵에는 노랑꽃이 돌층계를 덮어, 그 향기를 맡고 있으면 마치 선향에서
노는 것만 같았다.
  나는 무엇보다도 꽃이 좋아서 곧잘 그 아래에서 차를 끓이곤 했다. 그녀는 꽃을
꺾어서 머리에 꽂았다. 때로는 늘어진 가지가 머리에 걸리기도 하여 모처럼 곱게
빗은 머리를 흐트려 버릴 수도 있었다. 나는 그 머리를 가려서 샘물로 추켜 가지런히
해 주었다. 돌아올 때는 꽃가지 몇 가지를 집 사람들에게 선물로 꺾어서 사람들에게
새 가을의 소식을 전하려고 수레 뒤에 달고 길을 달렸다.

  B. 사랑스러운 여성 운
  (부생유기)에는 중국의 어느 무명 화가와 그의 아내 운이라는 여성과의 결혼
생활에 대한 회상기가 있다. 두 사람 다 단순한 예술가다운 기질의 인물로서 적어도
그들에게 찾아드는 행복이라면 어떠한 것이든 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그들의
필치는 소박하고 꾸밈이 없다. 이 운이라는 여성은 가장 아름다운 여성으로
생각된다. 두 사람의 생활은 비참하기는 했으나 그래도 매우 명랑한 생활이었다.
그것도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명랑함이었다. 자연이 어떻게 하여 두 사람의 정신적
정험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는가 하는 것을 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이제부터
드는 3장은 그 모두가 명절인 7월 7석과 7월 보름인 백중날을 이 두 남녀가 어떻게
즐겼으며, 또 소주에서의 한여름을 어떻게 보냈는가를 기술한 것이다.

  그 해(1780)의 7월 7일 칠석날 밤에 (아취헌)에서 함께 직녀성에게 예배하려고
운은 향과 초와 수박과 그 밖에 여러 가지 과일을 마련했다. 나는
(원생생세세위부부)라는 명을 새긴 인을 두 개 팠다. 그것은 우리들 사이에 주고
받는 편지에 쓰려고 새긴 것으로, 나는 주문으로 하고, 운은 백문으로 했다. 그날 밤
달은 아름답게 빛나고, 물굽이 저 아래를 굽어보니 잔물결이 비단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우리는 얇은 비단을 몸에 걸치고, 손에 작은 부채를 들고 강을 굽어보는
창가에 둘이 나란히 걸터앉았다. 하늘을 바라보니 구름은 갖가지 모습으로 변하면서
고요히 움직이고 있다. 운은 자못 흥겨운 듯이
  (저 달은 이 세상 어디서 보나 같겠지요. 우리들처럼 진심으로 서로 사랑하며,
오늘 밤 저 달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요?)
  나는 이 말에 이렇게 대답했다.
  (음, 그야 저녁 바람을 쏘이며 달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많겠지. 또한 그들의
안방에 들어 앉아 구름을 바라보며 시취에 젖어 있는 총며안 부인들도 많겠지.
그러나 부부가 함께 달을 바라보고 있을 때 구름이 그들의 화제가 되리라곤 난 거의
생각되지 않아)
  얼마 지난 뒤 마침내 촛불은 꺼지고 달마저 기울어, 우리는 공양한 과일을 들고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7월 보름날은 귀절이다. 운은 초촐한 음식을 장만하여 달을 벗하여 둘이서
마시려는 생각인 듯했지만 밤이 되고 보니 하늘은 갑자기 검은 구름으로 덮이고
말았다. 운은 이맛살을 지푸리며 초연히 말했다.
  (우리가 둘 다 백발이 되도록 함께 사는 것이 신령님의 뜻이라면 달님은 반드시
또다시 나와 주실거예요)
  나로서도 매우 실망되었다. 강 저쪽을 바라보니 무수히 많은 촛불처럼 반딧불이
떼를 지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벗들과 여뀌 사이를 누비며 불을 켰다 껐다 한다.
우리는 곧 연구 놀이를 시작했다. 이것은 서로 각자가 두 줄씩 시를 지어 뒤를
이어가는 놀이인데, 첫줄에서 상대편이 일으킨 구를 맺고, 둘째 줄에서 딴 구를
일으켜 상대편에게 뒤를 잇게 한다. 이렇게 몇 연을 계속하는 동안에 오래 끌면
끌수록 점점 형편없는 것이 나오게 되어 들판에는 얼토당토 않은 것이 되고 만다.
이쯤 되면 운은 내 품에서 눈물을 흘리며 자지러지게 웃어대기도 하고 매어 달리기도
하는데, 그때마다 운의 머리에 꽂은 재스민 향기가 코를 찔렀다. 나는 운이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이렇게 농조로 말했다.
  (재스민은 진주처럼 둥글기 때문에 여자들의 머리 장식용으로 쓰이는 줄 알았는데,
여자의 머리와 분 냄새에 섞일 때 이렇게도 향기가 좋아지기 때문이라는 것은 전혀
몰랐소. 이런 향기가 나니 공양한 불수감 따위는 어림도 없겠구려)
  그러자 운은 웃음을 뚝 그치고 말했다.
  (불수감은 향중 군자랍니다. 향기가 어찌나 그윽한지 코로 느끼지 못할 정도예요.
그렇지만 그 향기의 일부를 다른 데서 빌어 오기 때문에 향중 소인이지요. 향기가
좋기는 하지만 재스민은 사철 생글거리며 아첨하는 사람 같은 냄새가 날 뿐인걸요)
  (그럼 왜 군자를 멀리하고 소인을 친하는 거요?)
  하고 내가 물은즉 운이 대답하기를,
  (저는 군자가 속인을 사랑하는 그 점이 좋아요)
  이런 식으로 말을 주고 받는 동안에 벌써 한밤중이 되어 있었다. 올려다보니
하늘을 덮었던 구름은 어느새 바람에 불리어 흩어지고 수레바퀴처럼 둥근 보름달이
중천에 나와 있으므로 우리는 매우 기뻤다. 그래서 창가에 자리를 잡고 술잔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런데 채 석 잔도 마시기 전에 갑자기 다리 밑에서 누군지 물에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우리는 창문 너머로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으나
습지를 달리는 오리 소리가 들릴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강물은 거울처럼
잔잔했다. 창랑정 옆에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운이 큰 겁장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일부러 그 이야기는 아예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그러자 운은 한숨을 쉬면서 (아아! 저 소린 어디서 오는 걸까요?) 하고 말한다.
그래서 허둥지둥 창문을 닫고 술병을 방 안으로 옮겼다.
  그때 등잔불은 콩알만하게 작아지고 창문에 친 커어튼이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우리는 끊임없이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불을 끄고 침상 안으로 들어갔지만 운은
벌써 열이 높아 몸이 더웠다. 얼마 뒤에 나도 열이 나기 시작하여 우리 두 사람의
병은 20일이나 계속되었다. 행운의 술잔이 넘치면 재난이 온다는 옛말은 정말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우리 인간이 백년 해로를 할 수 없다는 하나의 전조이기도 했다.

  이 책은 자연에 대한 넘칠 듯한 사랑으로 빛나며 매력과 아름다움으로 가득찬
장구로 엮어져 있지만, 다음에 인용하는 1절은 그들의 여름의 더위를 덜어 잊게 한
회상을 기록한 것이다.

  창미 거리로 이사한 뒤 우리 둘의 규방을 (빈향각)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운의
이름과 아내를 언제나 손님처럼 존경하자는 마음에서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이 집은
담이 너무 높고 뜰이 너무 좁아서 그 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집 뒤에는
서재로 가는 딴 채가 있었다. 딴 채 창문으로는 아주 황폐해진 육씨네 정원이
내다보였다. 운의 생각은 아직도 창랑정의 아름다운 경치 위로 헤매고 있는
것이었다.
  그 무렵, 금모교의 동쪽이자 경거리 북쪽에 살고 있는 어느 농사 짓는 노파가
있었다. 작은 오두막 집 둘레는 온통 채소밭으로 둘러싸여 있고 버들가지로 엮은
문이 달려 있었다. 문 밖에는 한 30평 쯤 됨직한 연못이 있고 연못 둘레는 가득히
나무로 덮인 황무지였다... 오두막집 저쪽으로 몇 걸음 떨어진 곳에 깨진 기왓장을
쌓아올린 더미가 있고, 그 위에 올라서면 주위의 경치가 한 눈에 보인다. 그 주변은
가득히 풀이 무성한 들판으로 되어 있다. 언젠가 그 노파가 그 오두막집에 대한
이야기를 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운은 언제나 그 이야기를 생각하고 있었다.
... 그래서 다음날 나도 그곳에 가보았더니 그 오두막집의 간수는 단지 두 간으로
되어 있고, 그것을 넷으로 간을 막도록 되어 있었다. 미닫이 창문이니 참대 침상이니
모두 서늘하게 기분이 좋아서 아주 살기에 편해 보이는 집이었다.
  단 한 채 뿐인 이웃은 가꾼 채소를 시장에 팔아서 살고 있는 늙은 부부였다.
우리가 한 해 여름을 그곳에서 보낼 작정이라는 것을 안 그들은 연못에서 잡은
고기며 자기네 밭에서 가꾼 채소를 가지고 찾아오곤 했다. 우리는 그 값을 주려고
하였으나 그들은 도무지 돈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운이 그들에게 각기 신을
한 켤례씩 만들어 주었더니 그들도 이것만은 거절할 수가 없어 마침내 받아 주었다.
그때는 마침 온갖 나무들이 땅 위에 녹음을 던지는 7월이었다. 여름의 산들바람은
연못 위를 스치고 매미는 온종일 시그럽게 울어대고 있었다. 이웃 노인이 우리에게
낚싯대를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곧잘 나무 그늘에 앉아 낚시질을 하곤
하였다. 해질 무렵이 되면 둘이 기와 더미에 올라 저녁놀을 바라보기도 하고, 흥이
날 때엔 시를 짓기도 했다. 어느 때에는 이런 시를 지은 일도 있었다.

  수운은 떨어지는 해를 삼키고
  궁월은 흐르는 별을 쏘더라.

  한참 뒤 달은 그림자를 수면에 떨구고 뭇벌레는 사방에서 울기 시작했다. 우리는
참대 침상을 생울타리 가까이 끌어내어 걸터앉기도 하고 눕기도 했다. 그런 때
노파는 술 안주가 다 되었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리하여 우리는 달 아래에서 조촐한
주연을 즐기는 것이다. 목욕을 한 뒤에 여름 신을 끌고 손에 부채를 들고 거기에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노인이 말하는 옛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한밤이 가까와
잠자리에 들려고 집에 돌아오면 온몸은 기분좋게 서늘해져서 도시에서 산다는 것을
거의 잊어버릴 정도였다.
  어떤 때는 이웃집 노인에게 부탁하여 생울타리 옆에 국화를 심게 하였다. 9월이
되어 꽃이 피기 시작했을 때 운과 함께 다시 열흘 동안을 그곳에 머물렀다. 나의
어머니도 역시 기뻐하시며 그곳을 찾아주셨다. 그래서 축국연을 열게 되어 함께
국화 옆에서 게를 먹으면서 하루를 즐겼다. 이곳의 생활이 마음에 들어 버린 운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도 언젠가는 꼭 여기에 조그마한 집을 한 채 짓기로 해요. 땅을 한 열
이랑쯤 사서 집 둘레에 먹을 채소와 수박을 심도록 해요. 당신은 그림을 그리고,
나는 수를 놓으면, 술을 사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서 시를 지을 돈은 모자라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검소한 옷을 입고 소박한 음식을 먹으면서 살아가면 다른 곳으로
가지 않아도 정말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거예요)
  나도 진심으로 그 말에 찬성했다. 지금의 내 신분이라면 집 한 채쯤은 지을 수
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알아줄 사람은 이미 이 세상에는 없다. 아아, 이것이
인생인가!



    3. 암석과 수목에 대하여

  우리는 대체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나로선 알 수 없다. 네모 반듯한 집을 짓고,
그것을 한 줄로 차례로 늘어놓고는 나무도 없는 똑바른 길을 만들어 나간다.
구부러진 길이나 옛날식 집은 이미 없어지고, 정원에 우물이 있는 집은 어디를 보나
찾을 길이 없다. 도시 한 복판에 내 사사로운 정원이 있다고 해도 그러한 것은
도리어 꼴불견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생활에서 자연을 쫓아내 버리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지붕이 없는 집에서
살고 있다. 건물의 실용적 방면에 대해서만 까다롭게 늘어놓는 바람에 건축업자들도
넌더리를 내어 실용 이외의 일은 대강 아무렇게 해치워 버린다. 지붕 같은 것은
염두에도 두고 있지 않다. 옛날 모양대로 그냥 내버려 두고 만다. 오늘날 일반
건축물을 물건에 비한다면 나무토막 쌓기 놀이라고 할까. 멋대로이고 변덕스러운
아이가 다 쌓아 올리기도 전에 그만 싫증이 나서 뚜껑도 해 덮지 않고 미완성인 채로
팽개쳐 두었다. 현대 문명인에게 자연의 정신은 완전히 떠나 버리고 말았다.
나무까지도 문명화하려는 모양이다. 큰 거리에 나무라도 심으려고 하면 우선 나무에
번호를 달고 소독을 하고 가지나 잎을 자르고 사람의 머리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모양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동그라미나 별 모양이나 그 밖의 여러 가지 모양으로 꽃을 심는 일은 흔히
사람들이 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해서 심은 꽃이 조금이라도 줄이 흐트러지거나 하면
마치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의 생도들이 보조를 흐트러뜨린 것을 보았을 때처럼
이맛살을 지푸리고 당장 가위를 댄다. 베르사이유 정원에는 원추형으로 나뭇가지를
다듬은 한 쌍의 나무가 완전한 원형이나 직선형으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질서정연하게 심어져 있다. 인간 세상의 영광과 권력이란 이런 것인가. 제복을 입은
병사처럼 나무를 훈련하는 인간의 능력이란 이런 것인가. 만일 한 쌍의 나무 중의 한
쪽이 너무 자라기라도 하면 그것만으로 균형과 영광과 권력이 손상된 것처럼 곧
머리를 잘라 버리지 않고는 못 배긴다.
  그래서 요즘은 자연을 회복하여 가정 안에 되찾으려는 큰 문제가 일어나고 있다.
울적한 이야기다. 흙을 떠나 아파트에 살고 있는 처지로는 제 아무리 예술적 재능에
뛰어나 있다고 하더라도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돈이 있어 조그마한 집을 한 채
얻었다 하더라도 작은 풀밭이나 우물이나 참대밭을 가지려면 어떻게 하면 되겠는가.
모든 것이 다 잘못되어 있다. 이 정도까지 철저하게 잘못되었다면 이제는 다시
회복할 수가 없다. 높다란 마천루나 밤에 불 켜진 창문의 행렬 외에 관상할 만한
것이 어디에 남아 있는가. 마천루나 불 켜진 창문의 행렬을 우러러보면 인간은 더욱
그 문명의 힘을 자만하게 되어, 인간이 얼마나 보잘것 없는 작은 존재인가 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는 해결할 가망이 없는 것으로서 포기해
버리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에게 땅을, 더우기 충분한 땅을 주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유는 어떻든 인간에게서 땅을 빼앗아 버리는 문명은 잘못되어 있다. 그래서 장래의
문명 사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1에이커의 땅을 소유할 수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우선 무엇이든지 해내기 시작할 것이다. 나무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고, 돌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다. 우선 주의하여 잘 자란 나무가 있는 땅을 선택할 것이다. 잘
자란 나무가 없다면 버드나무나 참대처럼 빨리 자라는 나무를 심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새를 새장에서 기르지 않아도 된다. 저절로 새가 모여 든다. 더욱 더 주의하여
가까운 곳에 개구리나 또 될 수 있다면 도마뱀이나 거미 따위도 살 수 있도록 손질을
한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유리 상자에 넣은 자연이 아니라 천연적인 자연
그대로를 연구할 수 있게 된다. 적어도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오는 모양을 관찰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따라서 보스턴의 (선량한 가정)의 아이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성과 번식에 대한 탄식할 만한 무지는 없어지게 될 것이다. 도마뱀과 거미와의
싸움을 관찰하는 재미도 맛볼 수 있을 것이고, 진흙투성이가 되는 재미도 맛볼 수가
있을 것이다.
  바위에 대한 중국인의 정감에 관해서는 이미 앞의 절에서 조금 말해 두었다. 그
설명에서 중국의 풍경화가가 바위로 된 산봉우리를 사랑하는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그것은 기초적인 해설에 불과하여, 돌로 만든 동산이나
암석 일반에 대한 중국인의 기호를 설명한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바위는
거대하고 단단하며 유구함을 연상케 해 준다는 것이 그 근본적인 생각이다. 바위는
말이 없고, 움직이지 않으며 대영웅과 같은 굳센 성품을 지니고 있다. 속세를 떠난
학자와 같이 고고 초연한 기풍을 지니고 있다. 바위는 또 그 어느 것이나 고색이
창연하다. 그런데 중국인은 무엇이든지 옛것을 좋아하는 기질이 있다. 특히
예술적으로 보면 바위는 위대하고 장중하며 기이하고 기괴하다. 더우기 또 (위)라는
느낌이 든다. 이 말은 (험)에 통하는 말이지만 도저히 그 진의를 번역해 낼 수가
없다. 지상 3백척, 깎아지른 듯이 솟은 절벽은 (위)를 연상케 하기 때문에 매력이
있다.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 고찰해야겠다.
  날마다 산을 찾을 수도 없는 형편이므로 바위를 가정에 가져다 놓을 필요가 생기게
된다. 바위 동산이나 석굴은 중국을 두루 돌아다닌 유럽인의 이해와 감상은
곤란하겠지만 역시 기초, (위), 장중한 바위의 산봉우리가 이어진 모습을 본뜨려는
것이다. 이해와 감상을 할 수 없다고 해서 유럽인을 나무랄 수는 없다. 왜냐하면
바위 동산이나 암굴의 대부분은 터무니 없는 취미로 만들어져서, 자연의 웅대하고도
장중한 정취가 옮겨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인공적인 석굴은 몇 개의 돌을 시멘트로
이어 붙였다. 마치 시멘트로 만든 구경거리다. 참으로 예술적인 축산은 회화의
구성과 대조를 이루고 있어야 한다.
  인공으로 된 암석 세공의 예술적 감상과 풍경화 중의 바위산의 예술적 감상과의
사이에는 밀접한 관련이 있다. 송대의 문인 두관이 바위에 관한 (운림석보)라는 책을
저술하고 있고, 또 송대의 화가 미불이 연석에 관한 저술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점은 능히 수긍이 갈 것이다. 이 책에는 축산에 쓰이는 각지의 바위 수백 종의
성질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있어 이 위대한 송대 화가의 시대에 축산술이 벌써
고도로 발달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산꼭대기의 웅대한 바위를 감상함과 병행하여 그것과는 다른 입장에서 정원석을
감상하는 일이 발달했으며, 바위의 빛, 촉감, 겉보기, 결, 때로는 두드려 보았을
때의 그 음색 등을 까다롭게 따지게 되었다. 바위가 작으면 작을수록 촉감과 돌결의
색깔을 까다롭게 따졌다. 이 방면의 발전을 크게 조장한 것은 가장 좋은 질의
연석이나 인재를 수집하는 도락이었다. 이 두 가지 물건은 중국 문인의 일상
생활과는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다. 아치, 촉감, 명암, 농담이 가장 큰 요점이
되었다. 후세에 나타난 돌이며 경옥이며 비취로 만든 담배갑에 있어서도 이런 말은
할 수 있다. 고급 인재나 담뱃갑 중에는 육칠 백 달러나 하는 것도 있었다.
  집이나 정원용 석재의 효용을 철저하게 감상하려면 중국 서도까지 올라갈 필요성이
있다. 대체로 서도는 추상 세계의 리듬과 선과 구성의 연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로 좋은 돌은 장중함과 초탈함을 연상시켜 주는 것이어야겠으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선이 잘 되어 있어야 한다. 선이라 해도 직선이니 각이니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선의 기초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올드 보이)인
노자는 그의 (도덕경) 속에서 (불각의 바위)라는 말을 언제나 강조하고 있다. 자연을
너무 부질없이 휘젓지 말라. 가장 좋은 예술품은 최대의 시나 문장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인공적인 흔적도 없이 굽이치는 냇물이나 뜬구름처럼 자연스러워 중국 문예
비평가가 가끔 말하듯이 (도끼나 끌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그대로 예술 전분야에 적응한다. 불규칙의 아름다움, 리듬과 움직임과 표정을
암시하는 선의 아름다움, 그 점에 감상의 대상이 있다. 중국 상류층인 사람의
서재에서 걸상으로 혹투성이의 떡갈나무 뿌리가 쓰여지는 수가 때로 있는데, 이러한
것을 소중히 하는 심리도 위에서 설명한 심리와 똑같은 심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 정원에서 보게 되는 축산의 대부분은 자연 그대로의 돌로 되어
있다. 높이가 10피이트, 15피이트나 되고, 위인처럼 초연하게 고립하고 있는 나무
껍질로 된 화석도 있고, 호수나 동굴에서 발견된, 대개 구멍투성이고 외모가 극히
불규칙하게 생긴 것도 있다. 어느 문인의 말에 의하면 구멍이 지나치게 둥근
경우에는 잔돌을 끼워 넣어 원을 일그러지게 한다는 것이다.
  상해나 소주 근방의 축산은 대개 태호의 돌로 되어 있어, 전시대의 바다 물결의
흔적이 보인다. 이런 바위는 호수에서 파낸다. 그 선을 고쳐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마음에 들도록 끌로 가공하여 다시 호수에 넣어 일 이 년 내버려 둔다.
물의 작용으로 끌 자국을 없애려는 것이다.
  나무에 대한 감상은 비교적 이해하기 쉽고 또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이다.
주위에 나무가 없는 집은 벌거벗은 남녀와 같다. 나무와 집과의 차이는, 집은
세워지는 것이지만 나무는 자란다는 점이다. 무엇이나 성장하는 것은 세워지는
것보다 보기에 더 아름다운 법이다.
  실제상의 편의를 생각해서 벽은 수직으로 하고, 마루는 수평으로 만들게 되어
있지만, 벽은 고사하고라도 마루에 관한 한 여러 가지 방의 마루를 각기 다른
수평상에 두어서는 안된다는 이유는 조금도 없다. 그러나 아무래도 직선과
정방형으로 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직선과 정방형은 나무가 여기에
사용됨으로써 비로소 그 무미한 맛을 면하게 되는 것이다. 색채 계획에 있어서도
우리는 집을 녹색으로 칠하는 일은 전혀 없지만, 자연은 그렇게 하고 있다. 사실
나무는 모두 녹색이다.
  무수히 많은 종류의 나무 중에서 어떤 종류의 나무의 특수한 선이나 윤곽에는
화제가 될 만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러한 나무는 특히 미적인 감흥을 일으켜 준다.
중국의 비평가들이나 시인들은 그렇게 느끼게 되었다. 즉 나무는 어느 것이나
아름답지만 어떤 종류의 나무는 특별한 표정이며 힘이며 기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나무는 많은 나무 가운데서 특히 선발되어 일정한 느낌과
결부되었다. 평범한 감람나무에는 소나무에서 보는 바와 같은 초연한 기품이 없고,
버들은 우아하지만 (장중)이니 (영감적)이니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언제나 소수의
나무만이 그림이 되고 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은
소나무와 매화나무와 대나무, 버드나무 등이며, 소나무는 그 장대한 기품 때문에
모든 사람이 기뻐하며, 매화나무는 그 낭만적인 기품 때문에 사랑을 받으며,
대나무는 선이 청초하고 가정적인 기품 때문에 진귀하고, 버드나무는 가냘프고 고운
아름다운 사람을 연상케 하는 우아한 기품 때문에 모두가 좋아한다.
  소나무가 주는 감흥은 그 중에서도 가장 특기해야만 할 것으로, 가장 시적인
의의가 두터울 것이다. 소나무에는 어느 나무보다도 숭고하고 단정한 기품이
엿보인다. 나무에는 숭고한 것도 있고 야비한 것도 있으며, 장대한 기품을 자랑하는
것도 있고 평범한 기품을 지니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매튜 아놀드가 웅대한 호머의
시풍을 말하듯이 중국의 예술가는 소나무에 갖추어진 늙고 큰 품격을 찬미한다. 이
웅대한 기품을 버들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마치 시인 스윈버언에게서 웅대한
시풍을 찾는 것과 같아서 불가능한 일이다. 한결같이 아름답다고는 하더라도 그
중에는 섬세한 미, 우아의 미, 장중한 미, 준엄한 미, 괴기한 미, 불균형의 미,
힘찬 미, 오래된 미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이 오래된 미 때문에
소나무는 여러 나무 중에서 각별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헐렁한 옷을 입고
죽장을 끌며 산길을 걷는 세상을 등진 사람, 인간 최고의 이상으로서 존경받은
은자와도 같다. 이입 옹이 도리양유의 과수원에 앉아 있어도 옆에 한 그루의
소나무가 없다면 어린 자녀들 속에 둘러싸여 있어도 우러러 볼 준엄한 늙은 선비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논한 것은 이 때문이다. 소나무 중에서도 노송을 즐기는
것은 바로 이런 까닭이다. 늙으면 늙으수록 더 운치가 있으며 노송이어야만 장중한
풍격을 띠기 때문이다. 소나무와 나란히 같은 풍취가 있는 것에 사삼이 있다. 특히
학명이 selaginela involven.로 알려져 있는 종류로, 가지가 꾸불꾸불 구부러져
환상을 이루고 있고, 희한한 모습으로 늘어져 있다. 하늘을 향해 곧장 뻗어 있는
가지는 청춘과 희망의 심벌로 보이며, 땅을 향하여 늘어져 있는 가지는 몸을 숙이고
소년을 쓰다듬는 늙은이의 모습으로 생각된다.
  소나무는 침묵과 장중과 속세를 초월한 범상한 기품을 나타내며, 은자의 품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감상한다는 것은 예술상 가장 의미 심중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소나무를 감상하는 데 있어 반드시 따라 붙게 마련인 것은 중국의
그림에서 가끔 볼 수 있는 (우암)과 나무 그늘을 거닐고 있는 인물이다. 소나무
아래에 설 때 사람은 장중함과 노성감을 느끼고, 그 고고한 모습에 이상한 행복감을
깨닫고 이것을 우러러 본다. 노자는 (자연은 말이 없다)라고 했다. 과연 노송은 말이
없다. 고요하고 태연하게 솟아 있으며, 높은 곳에서 말 없이 이러한 것을 생각하고
있다... 이 소나무 아래에서 많은 아이들이 어른이 되었다. 그 어른들이 또 노인이
되었다. 세상의 단맛 쓴맛을 다 겪은 늙은이처럼 무엇이든지 다 알고 있으면서도
아무런 말이 없다. 거기에 신비와 장중이 있다.
  매화나무가 아름다움을 칭찬받는 것은, 그 가지가 뻗은 맵시가 낭만적이기
때문이겠지만 그 향기가 맑고 고상한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우리의 시적 감상을
위해 선발된 나무 중에서 소나무와 매화나무와 대나무가 겨울과 짝지어져
(세한삼우)라고 불리어지고 있는 것은 좀 우습다. 왜냐하면 대나무와 소나무는
상록수이고, 매화나무는 늦겨울 이른봄에 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매화나무는 특히 밝고 고상함을 나타내는 셈이다. 상쾌한 겨울 기운이 담긴 맑고
고상한 심벌이다. 그 단정하고 고운 모습은 싸늘한 단려함이며, 세상을 버린
사람처럼 공기가 차면 찰수록 그 단려한 기품은 더해 간다. 도 난처럼 은일한 풍취가
깃들어 있다.
  송대의 은둔 시인 임화정은 매화는 내아내, 학은, 내 아들이라고 하였다. 서호의
한복판에 외로이 있는 산에 남아 있는 그의 숨어 살던 유적은 오늘날 문인 묵객의
동경이 되어 있다. 그의 무덤 아래에는 그의 (아들)인 학의 무덤이 있다.
  이 시인이 유명한 다음의 7언구에는 매화의 향기와 그 모습의 풍취가 가장 잘
묘사되어 있다.

      암향부동월황혼

  매화의 아름다움의 정수는 이 일곱 자로 끝나며, 그 중 한 자도 움직일 여지가
없다는 것은 모든 시인들이 누구나 다 시인하고 있는 바다.
  대나무는 그 줄기와 잎의 화사한 풍격이 매우 좋다. 화사할수록 학자의 가정에서
그 아름다움을 찬양한다. 대나무의 아름다움은 어느 편인가 하면 상냥하게 웃는
아름다움이며, 대나무에서 받는 기쁨은 온화하고도 고요한 기쁨이다. 몸매가 가늘고
날씬하며, 가지가 드문드문 솟은 기품이 죽취가 가장 좋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생죽이나 화죽이나 두서너 그루의 대나무는 한무더기의 죽림 못지않게
귀여움을 받고 있다. 가지와 잎의 날씬한 기품을 좋아하는 것이므로 두서너 대라도
그림이 된다. 그것은 마치 매화 두 서너 송이가 훌륭한 그림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찌된 셈인지 대나무의 날씬한 모습이 꺼칠꺼칠한 바위와 조화가 매우 잘 된다.
그러므로 몇 그루의 대나무에 곁들여 한두 개의 바위가 그려져 있는 수가 많다.
이러할 때의 바위는 언제나 앙상한 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서 그려지는 것이다.
  버드나무는 어디서나 자라기 쉬운 나무다. 특히 개울 둑 같은 데 많다. 이 나무는
무엇보다도 우선 여성적 나무다. 그러므로 장조는 우주 만물 가운데 인간의 심금을
가장 심각하게 울리는 네 가지 중의 하나로서 버드나무를 치고 있으며, 사람의
마음을 감성적으로 만든다고 하였다. 중국 부인의 가냘픈 허리를 (유요)라 한다.
중국의 무기는 긴 옷소매와 흐르는 듯한 긴 옷자락을 휘날리면서 바람에 날리는
버들가지의 율동을 방불케 하려고 애쓴다. 버드나무는 잘 자란다는 데서 중국 도처에
1마일 사방에 걸쳐 이를 심고 있으며, 그 위를 바람이 스쳐갈 때의 모양을
(버들물결)이라고 한다. 버드나무의 늘어진 가지에는 꾀꼬리가 즐겨 앉기 때문에
그림에서나 실제에 있어서나 버드나무에 꾀꼬리는 꼭 붙어다니는 물건이다. 매미도
곧잘 그 가지에서 쉰다. 서호 십경의 하나인 (유랑문앵)이라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물론 이밖에도 다른 이유로 찬미되고 있는 나무는 얼마든지 있다. 한 예를 들면
오동과 같은 나무는 나무 껍질이 깨끗하고 그 표면이 매끄러워, 작은 칼로 쉽사리
시를 새겨 넣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좋아한다. 또 중국인이 매우 애호하는
견만초는 그 근경이 두세 치나 되며, 고목이나 바위 같은 데에 달라 붙어 있다.
곧은 나무 줄기와 이 줄기에 구불구불 감겨 있는 만초는 재미있는 대조를 이루고
있다. 특히 품질이 좋은 만초는 영이 잠자고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용초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줄기가 구불구불하고 다소 기웃한 고목은 그
줄기 때문에 크게 애호와 존경을 받고 있다. 소주에 가까운 태호와 목둑이라고 하는
곳에 있는 네 그루의 사삼에는 각각 (청), (희), (고), (기)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청)이라는 나무는 줄기가 길고 곧게 솟아 있고, 잎이 꼭대기에 양산 같은 모양으로
퍼져 있다. (희)는 땅 위를 기며 지그재그로 Z형을 세 개 만들고 있다. (고)의
꼭대기에는 잎이 없고 굵고 뭉툭하게 생겼으며 가지는 드물게 나고 반은 말라서
사람의 손가락 같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기)의 줄기는 맨 위의
가지까지 나선형으로 비비꼬여 있다.
  중요한 점은 나무의 관상은 다만 나무만의 관상이 아니라 다른 자연물, 예를 들면
바위, 구름, 새, 벌레, 인간 따위와 관련해서 비로소 그 참다운 가치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장조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꽃을 심는 것은 나비를 부르기 위함이요, 바위를 쌓는 것은 구름을 부르기
위함이요, 소나무를 심는 것은 비를 기다리기 위함이요, 파초를 심는 것은 바람을
맞기 위함이며, 버들을 심는 것은 매미를 청하기 위함이다)
  인간은 새소리를 나무와 함께 즐기며, 귀뚜라미 소리를 바위와 함께 찬양한다.
새는 나무 그늘에서 노래하고 귀뚜라미는 바위 사이에서 운다. 중국인은 우는
귀뚜라미나 매미를 고양이나 개나 그밖의 다른 가축들보다 훨씬 사랑한다. 모든
집에서 기르는 동물이나 조류 중에서 다만 학만이 소나무나 매화 같은 종목에 들어
있다. 그것은 즉 학은 은자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학은 물론이고 백로까지도 다
한적한 늪이나 연못에 새하얀 맑은 모습으로 늠름하고도 얌전하게 그리고 또 가만히
서 있는 것을 보면 중국의 학자는 학이 되고 싶다고 한다.
  시인의 심정이 자연 속에 녹아 들어가면 동물이 행복해야만 비로소 인간도 행복한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이 동안의 심경은 정판교(1693 __ 1765)가 그의 동생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새를 새장에 넣어 길러서는 안된다고 한 글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새를 새장에 가둬 길러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여기 한 가지 덧붙여 둘 말이
있다. 내가 그런 말을 한 것은 새가 싫기 때문이 아니다. 새를 사랑하는데 스스로의
방법이 있기 때문이다. 새를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집 주위에 수백 그루에 나무를
심어 새의 왕국과 가정이 나무 그늘 사이에서 잘 보이도록 해두는 것이다. 그러면
날이 샐 무렵 잠이 깨어 그대로 침대 속에 있으면 하늘의 음악과도 같은 새의
지저귀는 합창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잠자리를 나와 옷을 입고, 세수를 하고, 이를
닦고, 아침 차를 마실 때 아름다운 새의 날개가 여기저기 날아다니는 것이 보여
일일이 그것들을 눈여겨 볼 겨를이 없다. 한 마리의 새를 새장에 넣고 바라보는
것과는 비교도 안되는 즐거움이다. 대체로 생활의 즐거움이란 우주를 공원으로 보고,
호천을 연못으로 생각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그러기에 생물은 모두 각자의 성질에
따라 살아나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 기쁨이 얼마나 클 것인가! 이 다정함과
냉혹함, 세상에 즐거움이 많은 가운데 새를 새장에 가두거나 물고기를 어항에 넣거나
하여 기뻐하는 것과 이 나의 즐거움을 비교해 보라. 얼마나 큰 차가 있는가!



    4. 꽃과 꽃꽂이에 대하여

  꽃과 생화를 관상하는 일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다소 엉터리인 것 같다.
꽃을 관상하는 것은 나무를 관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꽃의 등급이나 순위를 잘
이해하고 일정한 정서와 환경을 일정한 꽃에 연결시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선 처음에 문제가 되는 것은 꽃의 향기다. 향기에는 재스민처럼 강렬하고 분명한
것도 있고, 또 라일락처럼 미묘한 것, 또는 난초처럼 유례가 없을 만큼 기품이 있고
그윽한 향기를 내뿜는 것도 있고, 가지각색이다. 그 향기가 그윽하고 미묘할수록
고상한 꽃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음은 꽃의 빛과 자태의 아름다움인데, 이것도 또한
실로 천태만상이다. 어떤 것은 풍만한 처녀 같고, 어떤 것은 초초하게 풍취가 깊은
고요한 숙녀와도 같다. 어떤 것은 그 매력으로 세상 사람들을 유혹하려는 것처럼
보이는 꽃도 있고, 또 어떤 것은 자기의 향기에 도취되어 꿈같은 날을 보내면서
만족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꽃도 있다. 또 화려한 빛깔을 즐기는 것도 있고,
얌전하게 조심성 있는 것도 있다. 꽃은 우선 외계의 환경과 그 꽃이 피는 시기를
언제나 연상케 한다. 장미는 맑게 개인 봄날을 연상케 하고, 연꽃은 연못 위의
싸늘한 여름 아침을 연상케 하며, 물푸레 나무는 가을 달과 중추의 명절을 연상케
하고, 국화는 늦가을에 먹는 게 맛을 연상케 해주고, 매화는 눈을 연상케 하며,
수선과 더불어 정월의 즐거움에는 없어서는 안 될 꽃으로 되어 있다. 모두가 저절로
일어나는 연상이다. 어느 꽃이나 다 자기에게 꼭 들어맞는 환경에 놓이게 되어야
비로소 참다운 가치를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지만, 꽃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사철나무가 크리스마스를 연상케 하는 것처럼 꽃을 마음 속에
^4 246 5 135 4 136^ 여러 계절에 특유한 정경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쉬운
일이다.
  난과 국화와 연꽃은 소나무나 대나무처럼 어딘지 모르게 고상한 취향이 있는 것을
찬양하며, 국문학에서는 군자의 상징으로 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도 난은 특히 그
이국적인 아름다움 때문에 평가되고 있다. 매화는 아마도 어떤 꽃보다도 중국
시인에게 애호받고 있을 것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앞의 절에서 다소 말해 두었다.
매화는 새해와 더불어, 즉 4계절의 꽃 중에서도 제일 먼저 피는 데서 (제1화)라고
불리고 있다. 거기에는 물론 이설이 있어, 옛날에는 특히 당시대에는 모란이 (꽃의
왕)이라고 지목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란은 빛과 꽃잎이 요염하기 때문에 부귀와
행복의 상징으로 간주되고 있는 데 반하여 매화는 시인의 꽃, 고요하고 청빈한
선비의 상징이 되어 있다. 즉 모란은 물질적이지만 매화는 정신적이다.
  일찌기 어떤 학자가 크게 모란을 칭찬한 일이 있는데 그것은 오로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유래한 것이다. 옛날 당나라 무후가 예의 과대망상인 변덕을 일으켜 어원의
모든 꽃에 대하여 한겨울인 어느날 일시에 꽃피게 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유는
없다. 다만 그렇게 해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모란만이 용감하게도 몇 시간 늦게
피었기 때문에 그것이 몹시 무후 폐하의 기분을 상하게 하였다. 그 결과 수천 분의
모란은 칙명에 의하여 모조리 서울 장안에서 낙양으로 추방되고 말았다. 임금의
은총을 잃기는 하였으나 모란을 예찬하는 소리는 여전히 변함이 없었으며 낙양은
모란의 대표적인 명소가 되었다. 중국인이 왜 좀더 장미를 존중하지 않느냐 하면,
장미의 빛이나 자태가 모란과 동급에 들어갈 만하지만 모란의 호화로움에 그만
눌리고 말았을 것이다. 중국의 옛 기록에 의하면 모란의 종류는 90종이나 있어, 그
모두가 매우 시적인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난은 모란과 달라서 둔세적인 아름다움을 상징하고 있다. 그것은 즉 사람이 사는
동리를 멀리 떠나 깊은 산골짜기에 피는 수가 많기 때문이다. 난은 사람이 관상하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스스로 고독의 미를 즐기는) 미덕을 지니고 있으며,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시로 이식되기를 매우 싫어한다고 한다. 비록 억지로 옮겨 심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난의 독특한 조건에 따라서 기르지 않으면 안되며, 그것을 어기면
당장 시들어 죽고 만다. 그러한 데서 우리는 깊은 방안에서 고이 자란 아름다운
처녀나, 권세나 명성을 싫어하여 산 속에 숨어 사는 큰 선비를 흔히 (유곡란)에
비유한다. 그 향기는 매우 엷어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별로 노력을 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일단 그 향기를 알게 되면 그 신성함에 감탄하고 말 것이다!
이러한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난은 세상에 아부하지 않는 군자의 상징이 되고
또한 참다운 우정의 상징으로도 되어 있다. 그것은 옛글에 (난을 장식한 집에 들어가
오래 거기에 머물러 있을 때는 그 향기를 전혀 깨닫지 못하게 된다)고 했으며 그
까닭은 향기가 몸 속에 배어버리기 때문이다. 이입 옹은 난을 감상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방마다 난을 두지 말고, 다만 한 방에만 놓고 그 방에 드나들 때마다 난의
향기를 즐길 것을 권하고 있다. 미국산 난에는 이러한 그윽한 향기가 없는 것
같은데, 그 대신 모양도 크고 빛깔도 훨씬 화려하다. 내 고향인 복건성은
(복건란)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중국에서 가장 좋은 난의 산지로 되어 있다. 그
꽃은 엷은 녹색으로 자색 반점이 있고 매우 작으며 꽃잎의 길이는 1인치를 조금 넘을
정도다. 무엇보다도 귀염을 받고 있는 가장 좋은 품종인 진몽량은 그 빛이 물과
같으므로 물 속에 담그면 거의 눈에 띄지 않게 되어 버린다.
  매화는 시인 임화정의 꽃, 연꽃은 유교의 이론가 주무숙의 꽃, 이에 대해 국화는
시인 도연명의 꽃이다. 늦가을에 피는 이 꽃은 (냉향)이니 (냉수)니 하는 풍취를
띠고 있다. 국화의 냉수와 이를테면 모란의 화려함과의 대조는 누가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국화는 수백의 품종이 있는데, 그 품종마다 매우 아름다운 이름을
붙이는 유행의 선구 구실을 한 것은 내가 아는 바로는 송대의 위대한 유산자
범성대다.
  국화의 생김새와 그 색채와 더불어 그 종류가 다양 다종인 것이 국화의 특징인 것
같다. 흰색과 노랑색이 국화의 (정통)이라고 생각되고 있으며 보라색과 빨강색은
변종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등급도 훨씬 떨어진다. 흰색과 노랑색은 (은분), (은령),
(금령), (옥반), (옥령), (옥수수)라는 여러 가지 품종의 이름을 낳았다. 또는
(양귀비), (서시)와 같은 유명한 미인의 이름을 붙인 것도 있다. 짧게 깎아올린
여자의 단발 같은 모양의 것도 있고, 꽃잎이 물결치는 곱슬머리 비슷한 것도 있다.
향기도 품종에 따라 모두 다르지만, 사향이라든가 또는 이른바 (용뇌)의 향기가 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으로 되어 있다.
  연, 즉 수련은 다만 한 종류를 이루고 있지만, 수면에 떠 있는 그 줄기가 잎을
포함하여 꽃 전체로서 바라보면 모든 꽃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나에게는
생각된다. 근처에 연이 없이는 여름을 즐길 수 없다. 만일 집 근처에 연못이 없다면
커다란 질그릇 수반에 옮겨 심으면 된다. 물론 이런 경우에는 반 마일씩이나 연이어
피어 있는 연꽃의 아름다움, 대기 속에 스며들어 있는 그 향기, 진주와 같은
물방울이 구르는 연잎의 아름다움, 그것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 연잎 끝의 홍백으로
아롱진 그 꽃의 아름다움은 대부분 잃고 말게 된다(미국의 수련(Water lily)은 중국의
연과는 다르다)  송대의 학자 주무숙은 그의 수필 (애련설)에서 연을 사랑하는
까닭을 말하여, 연은 군처럼 흙탕물 속에서 자라나면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일반 유가의 설과 다를 것이 없다. 공리적인 견지에서
보면 연에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다. 연근은 청량음료를 만드는데 쓰이고, 잎은
과일이나 그밖의 음식을 찔 때 그것을 싸는데 쓰이고, 꽃은 그 모양과 향기 때문에
사랑받고, 마지막으로 연밥은 신선이 먹는 것으로서 존중되며, 까서 그냥 날것으로도
먹을 수 있고 말려서도 먹을 수 있고 설탕에 절여서 먹을 수도 있다.
  사과꽃을 닮은 해당화는 다른 꽃과 마찬가지로 시인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다만 두보만은 자기의 고향인 사천의 명물인 이 꽃에 대하여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그럴 듯한 설은 두보의
모친의 이름이 해당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모친에게 경의를 표하는 의미에서 그것을
피했다는 것이다. 향기가 좋은 점에서 난보다 윗자리에 올려놓고 싶은 꽃이 두 가지
있다. 그것은 물푸레나무와 수선이다. 수선도 내 고향인 창주의 특산물로서,
구근으로 미국에 수출되는 금액은 한때 수십만 달러에까지 오른 일이 있으나,
농무성은 그 구근에 간혹 붙어 있는 병원균을 막기 위해서 이 하늘로부터 얻은
영묘한 향기를 가진 꽃을 미국 국민으로부터 빼앗아 버렸다. 그러나 선녀처럼 고운
수선의 흰 구근에 병원균이 붙어 있으리라고는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것은
흙탕 속과는 달라서 물을 담은 유리그릇이나 사기그릇 속에 잔돌로 받쳐서 심고
최선의 주의를 다해 기르는 것이다.
  진달래는 그 모습이 완연한 아름다움에 비해 보통 세상에서는 비극의 꽃으로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꽃은 두견새의 피눈물에서 싹튼 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며,
두견새는 계모의 학대로 쫓겨난 형을 찾는 소년이 변신한 것이라고 한다.
  꽃을 선택하여 그 순위를 정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꽃병에 꽃을 꽂는 기술도 또한
중요하다. 이것은 적어도 멀리 11세기부터의 예술이다. 19세기 첫무렵의
(부생육기)의 저자는 (한정기취)라는 장에서 훌륭한 구도의 그림 못지않게 꽃꽂이의
재주를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해마다 가을이 되면 나는 국화를 열렬히 사랑했다. 나는 국화를 화분에
심지 않고 꽃병에 꽂기를 좋아했다. 그것은 화분에 심기가 싫었던 것이 아니라, 집에
뜰이 없었으므로 손수 손질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구해 오는 꽃은
손질이 잘되어 있지 않아서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국화를 꽃병에 꽂을 때는 짝수가
아니라 홀수로 하고, 어느 화병에라도 한 가지 빛깔의 꽃만을 꽂아야 한다. 꽃병의
주둥이는 꽃을 함께 쉽게 꽂을 만한 넓이가 잇어야 한다. 꽃병 하나에 꽂은 꽃이
여섯 개가 되든 30개 또는 40개가 되든 그것은 모두 다같이 꽃병 주둥이에서 곧게
서도록 꽂아야 한다. 너무 많이 뭉쳐져도 안되고, 사방으로 흩어져도 안되며, 꽃병
주둥이에 기대어도 안된다. 이렇게 위치를 정하는 것을 (근채)라고 한다. 꽃은 품위
있게 똑바로 서 있는 경우도 있고, 사방으로 뻗어 있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효과가
너무 단조로와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는 몇 송이의 꽃봉오리를 곁들여 일종의 멋을
살려 질서를 무시하여 꽂는 것도 좋다. 잎은 너무 배서도 안되고, 또 줄기가 너무
딱딱해도 안된다. 줄기를 세우기 위해 침봉을 쓸 경우에는 침봉 끝이 겉으로 나오면
보기가 흉하니까 긴 침은 잘라 버려야 한다. 이른바 (병주둥이는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 바로 그 이치다. 탁자의 크기에 따라서 셋 또는 일곱 개의 꽃병을 탁상에
늘어놓는다. 꽃병 수가 너무 많으면 너무 빽빽한 감이 들어 거리에서 팔고 있는
국화의 진열같이 보인다. 화병대의 높이도 서네 치에서 고작해야 두 자 다섯 치
정도로 하고, 통일성 있는 구성을 가진 그림처럼 높이가 각각 다른 꽃병이 서로
군형이 잡혀 각기 서로 조화를 이룬 것처럼 해야 한다. 높은 꽃병을 하나 가운데
놓고 낮은 것을 그 양쪽에 놓는다거나, 낮은 꽃병을 앞에 놓고 높은 것을 뒤에
놓는다거나, 또는 잘 균형을 취하여 한 쌍씩 나란히 늘어 놓거나 하는 방법은 흔히
말하는 (금회퇴)라는 나쁜 풍속이다. 적당히 간격을 취하는 방법과 그 배치하는
방법은 각 개인의 회화적인 구성의 이해 여하에 좌우되는 것이다.
  사발이나 큰 접시를 쓰는 경우에는 꽃을 받치려면 정제한 송진에 느릅나무 껍질과
밀가루를 기름에 섞은 것을, 일종의 아교 모양으로 될 때까지 짚을 태운 뜨거운
재로 데워서 그것으로 동판에 못을 몇 개 거꾸로 박는다. 다음에 이 동판을 데워서
그 사발이나 큰 접시 바닥에 붙인다. 이것이 식으면 철사로 꽃을 몇 개의 다발로
묶어서 위로 향한 못에 꽂는다. 꽃은 옆으로 기울이게 하는 것이 좋고, 복판에
오똑하게 세워서는 안된다. 줄기와 잎이 너무 바싹 달라붙지 않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런 과정이 끝나면 사발에 물을 붓고 깨끗한 모래를 조금 넣어서 동판을
덮어 꽃이 직접 사발 바닥에서 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꽃이 달린 가지를 잘라서 꽃병에 꽂을 경우에는 꽂기 전에 가지를 어떻게 손질하면
좋겠는가를 알아둘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누구나 항상 자신이 손수 나가서 가지를
꺾어올 수는 없고 남이 꺾어온 가지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히 있기
때문이다. 우선 그 가지를 손에 들고 앞뒤 양쪽 옆으로 여러 가지 방향으로 자리를
바꿔가며 어느 방향이 가장 모양이 보기 좋은가를 결정한다. 그것이 결정되면 그
가지를 날씬하고 고취가 풍기는 색다른 모양으로 만들기 위하여 여분의 작은 가지는
모두 잘라 버린다. 그 다음에 줄기를 어떠한 모양으로 꽃병에 꽂을 것인가. 줄기를
꽃병에 꽂았을 때 잎과 꽃이 가장 잘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줄기를
구부리면 좋겠는가를 생각한다. 만일 닥치는 대로 한 개의 묵은 가지를 손에
집어들고 그 곧은 부분을 꽃병에 꽂았다고 하면 줄기는 너무 뻗어나고, 가지는 너무
빽빽하고, 꽃이나 잎은 엉뚱한 방향을 향하게 되어 매력도 표정도 완전히 엉망진창이
되고 말 것이다. 곧은 가지를 구부리면 줄기 한가운데에 칼로 약간 상처를 내어 그
상처에 기와나 돌부스러기의 작은 조각을 끼워 넣는다. 그렇게 하면 곧은 가지는
알맞게 구부러진다. 큰 가지가 너무 약할 때에는 바늘을 두서너 개 박아서 든든하게
한다. 이 방법을 쓰면 단풍잎이나 대나무의 작은 가지나 그 밖의 보통 풀이나
엉겅퀴잎 같은 것까지 훌륭한 장식물이 된다. 몇 개의 중국 구기 열매에 파란
대나무의 작은 가지를 곁들인다든가, 품위 있는 풀잎에 몇 개의 엉겅퀴 가지를
배합해도 배치만 좋으면 참으로 아취 있는 서정을 풍겨 줄 것이다.

    5. 원중랑의 (병사)에 대하여

  꽃꽂이에 관한 가장 뛰어난 책은 아마도 원중랑이 쓴 책일 것이다. 이 사람은
16세기 끝 무렵의 사람으로, 다른 점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문인의 한 사람이다.
꽃꽂이에 대한 그의 저서 (병사)는 일본에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꽃꽂이에
(굉도류)라는 일파가 있는 것도 모두가 다 아는 바다. 그는 그 서문의 첫머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 다행히도 꽃, 대나무, 산, 물은 명성과 권세를 얻으려는
싸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명성과 권세를 쫓는 사람들은 그 때문에 애를 태우며
산과 물, 꽃과 대나무를 즐길 겨를이 없다. 그러나 속세를 떠나 은거하는 학자는
그 처지를 이용하여 자연의 즐거움을 독차지할 수 있는 처지에 놓여진 것이다.
그러나 꽃꽂이를 감상하는 것을 정상적인 즐거움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고작 도회에서 생활하는 사람의 일시적인 대용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그것 때문에
세상의 자연을 즐기는 보다 더 큰 행복을 잊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그는 또한 서재를 꾸미려고 꽃을 놓는 데는 신중한 태도가 필요하며, 종류에
마음을 쓰지 않고 아무렇게나 꽃을 놓는 것보다는 전혀 놓지 않는 편이 낫다고
말하고, 또 꽃꽂이에 쓰는 여러 가지 모양의 청동이나 도자기 꽃병의 설명까지도
했다. 모양은 크게 나누어 둘로 분류된다. 한대의 오랜 옛날의 청동 화병을 가지고
있고 큰 방이 있는 집에서 사는 부유한 사람들은 커다란 꽃병에 큼직한 꽃과 키가 큰
가지를 꽂아야 한다. 그러나 학자들은 좀더 작은 꽃가지를 충분히 음미한 작은
꽃병에 꽂는 편이 학자다와서 좋다. 예외로 허용되는 것은 모란과 연뿐이며, 꽃이
크니까 큰 꽃병에 꽂아야 한다.

  A. 꽃병에 꽃을 꽂으려면
  너무 난잡하거나 너무 빈약해도 안된다. 꽃병에 꽂는 꽃은 많아야 두세 종류에
그치고, 높고 낮은 균형이나 배치는 명화의 구도를 목표로 해야 한다. 꽃병을 놓는
데는 쌍으로 하거나 똑같은 모양으로 하거나 똑바로 한 줄로 늘어 놓거나 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꽃을 실로 묶는 것도 또한 좋지 못하다. 꽃의 청초한 아름다움은
제멋대로인 소동파의 명문처럼, 또는 연구에 구애되지 않는 이백의 시처럼
가지런하지 못하면서도 저절로 갖춰진 형용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다운
청초한 아름다움이다. 단순히 지엽의 균형이 잡히고, 홍백이 섞여 있는 것만으로
어떻게 청초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으로는 시골 관리의 집 뜰이나 무덤으로 가는 돌을 깐 길같이 느껴진다.
  가지를 골라서 꺾을 때에는 날씬하고 볼품있는 가지를 고르는 것이 좋고, 너무
복잡한 가지를 서로 한데 모으는 것은 좋지 못하다. 꽃꽂이에 쓰는 꽃은 한 가지
종류만이 좋으나, 많아야 두 가지 종류에 그치고, 두 가지 종류의 꽃이 같은
가지에서 난 것처럼 보이도록 맞추어주어야 한다... 대체로 꽃은 꽃병과 어울려야
하나, 높이는 꽃병보다 네댓치쯤 높은 것이 좋다. 높이가 두 척쯤 되고, 몸체와
바닥이 넓은 꽃병이라면 꽃의 높이는 꽃병 주둥이에서 두 척 예닐곱 치 정도가
알맞다. ... 가느다란 꽃병에는 되도록 길게 가지가 뻗고 약간 굽은 가지의 맵시가
좋은, 길고 짧은 두 개의 가지를 꽂는 것이지만, 이때 꽃이 꽃병보다 네댓 치 짧으면
한층 더 운치가 있다.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할 것은 꽃병에 비해서 너무도 꽃이
빈약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너무 복잡한 것도 또한 피해야 한다. 이를테면
꽃을 많이 묶어서 핸들처럼 만들어 버리면 멋이고 뭐고 모두 없어지고 만다. 작은
꽃병에 꽃을 꽂을 때는 꽃병 주둥이에서 꽃까지의 길이를 꽃병의 높이보다 두 치만
짧게 해야 한다. 이를테면 높이 여섯 치의 가늘고 긴 꽃병에는 고작 예닐곱 치의
꽃이어야 한다. 그러나 튼튼하게 생긴 꽃병이라면 꽃병의 높이보다 두 치쯤 긴
꽃이라도 괜찮다.
  꽃이 있는 방에는 간소한 책상과 등의자를 놓는 것이 좋다. 책상은 넓고 두터우며,
좋은 나무를 써서 표면이 반들반들해야 한다. 가장자리에 장식이 붙은 옻칠한 책상,
황금빛으로 칠한 장의자, 색칠한 꽃무늬의 대 따위는 모두 쓰면 안된다.

  꽃의 (탕욕) 즉 (세욕)에 관하여 저자는 꽃의 기분과 정서를 깊이 생각하며
관찰하고 있다.

  꽃에도 기쁨과 슬픔이 있고, 또 잠이 있다. 아침 저녁으로 적당한 때에 물을 주면
꽃에게는 정말로 고마운 비가 된다. 햇빛은 밝고 구름이 엷은 날, 저녁 해가
아름답고 달 밝은 밤은 꽃에게는 아침이다. 큰 태풍, 억수 같은 비, 지글지글 타는
더위, 지독한 추위는 꽃에게는 저녁이다. 화대가 햇볕을 받아 연약한 몸을
바람에게서 보호받고 있을 때는 꽃이 행복한 기분에 잠기어 있을 때다. 안개 깊은
날 꽃이 술에 취한 것처럼 보일 때, 또는 잠잠하여 나른하게 보일 때, 꽃은 슬픈
기분으로 있다. 몸을 꼿꼿이 가누지 못하는 것처럼 가지를 늘어뜨리고 몸을 비스듬히
하고 쉬고 있을 때는 꽃이 꿈을 꾸면서 잠을 자고 있을 때다. 눈을 반짝이며 미소
짓고 기쁜 듯 사방을 둘러보고 있는 것처럼 보일 때는 잠에서 깨었을 때다.
  꽃의 (아침)에는 인기척이 없는 정자나 넓은 방에 두는 것이 좋다. (저녁)에는
조그마한 방이나 단채에 옮기는 것이 좋다. 슬플 때는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고 싶을
것이겠고, 기쁠 때는 웃거나 떠들거나 까불고 싶을 것이다. 잘 때는 커어튼을
쳐주기를 바랄 것이고, 잠이 깨면 화장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모두 꽃의 성정을
만족시키고, 그 자고 깨는 시간을 조정하기 위해서 하는 짓이다. 꽃의 (아침)에
물을 주는 것이 가장 좋고 잠잘 때가 그 다음이고 기쁠 때가 맨 마지막이다. 꽃의
(저녁), 즉 슬퍼하고 있을 때 물을 주는 것은 꽃을 학대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다.
  꽃에 물을 주는 데는 술 취한 사람을 깨우게 하는 가랑비처럼, 또는 꽃의 온몸에
스며드는 정다운 이슬처럼, 샘에서 막 길어온 맑은 물을 조용히 조금씩 뿌려 주는
것이 좋다. 꽃에 손을 대거나 손끝으로 만져 보거나 하는 따위는 좋지 못하다.
그러한 일을 어리석은 하인이나 하찮은 하녀에게 맡겨서는 안된다. 매화는 세상을
등지고 고요히 사는 학자에게, 해당화는 아름다운 손님의 손으로, 모란은 아름답게
차려입은 젊은 처녀들에게, 석류는 아름답게 생긴 몸종에게, 물푸레나무는 영리한
아이들에게, 연꽃은 요염한 첩에게, 국화는 옛사람을 사모하는 이름 높은 선비에게,
납매는 여윈 중에게, 이런 식으로 저마다 그 맛을 따라서 물 주는 일을 맡기는 것이
좋다. 그러나 추운 계절에 피는 꽃에는 물을 주지 말고 엷은 비단으로 보호해 주어야
한다.

  원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어떤 종류의 꽃을 꽃병에 꽂으면 다른 어떤 종류의 꽃의
꽃의 컴비, 즉 (시녀)로서 잘 조화되는 것이 있다. 귀부인에게 한평생 봉사하는
시녀라는 것이 옛날 중국의 제도에 있었는데, 아름다운 귀부인은 필요한 부속물로서
아름다운 시녀들을 옆에 모시게 하여 섬기게 할 때 비로소 나무랄데 없는 귀부인이
된다는 생각이 옛날부터 중국에는 있었다. 이러한 경우에는 귀부인이나 시녀가
다같이 미인이어야 하지만, 어떤 형의 아름다움에는 어찌된 셈인지 주인
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시녀 편이라는 것이 있다. 여주인과 조화되지 않는 시녀는
안채와 균형이 안 맞는 외양간 같은 것이다. 이런 생각을 꽃에 옮겨 원은 꽃꽂이에
알맞은 (시녀)를 발견했다. 즉 매화에는 동백, 해당화에는 사과꽃과 라일락,
모란에는 육계색의 장미, 작약에는 양귀비와 해바라기, 석류에는 백일홍과 무궁화,
연꽃에는 백옥잠화, 물푸레나무에는 부용, 국화에는 가을 해당화, 납매에는 수선이
시녀로서 섬기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시녀도 모두 갖가지 색으로 아름답고 그
주인 못지않게 저마다 뛰어나게 얌전한 것들이다. 시녀라고는 하지만 이 화비들을
우습게 보려는 것은 조금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역사상 유명한 시녀들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수선은 하늘의 직녀의 시녀 양옥청처럼 모습이 날씬하고 맑고
깨끗하며, 동백꽃과 장미는 금나라 시대의 석가와 양가의 시녀 현풍과 정완처럼
맑고 고우며, 산반화는 비극적인 여승 시인 어현기의 여종처럼 깨끗하고 낭만적이며,
라일락은 화사하지만 백옥잠화는 냉정하며, 추해당은 정강성(한대의 학자, 경전의
평역이 많다)의 시녀처럼 내성적이기는 하지만 다소 잘난 체하는 냄새를 풍긴다.
  어떠한 방면이라도, 예를 들면 장기 같은 것이라도 어엿한 하나의 권위를 이루는
사람은 반드시 미친 사람처럼 그 길에 열중한다는 것이 원의 사고 방식의 근본인데,
꽃도락에 대해서도 그는 같은 식으로 생각한다.

  세상에는 이야기를 해도 재미가 없고 얼굴조차도 보기 싫은 인간이 있는 법인데,
그러한 사람들은 모두가 도락이 없는 인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꽃을 미치도록
사랑한 옛사람들은 진귀한 종류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심산 유곡을 두루 돌아다니며
찾아 헤매어, 몸의 피곤이나 지독한 추위나 더위나 살갗이 벗겨지는 일이나 진흙
투성이가 되는 것쯤은 아무렇게도 생각하지 않았다. 꽃이 봉오리를 맺으려고 할 때
침상과 베개를 꽃나무 아래에 옮겨 놓고 자면서 어린 꽃이 어른이 되어 드디어 지고
말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관찰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과수원에 수 천의 꽃을
심고는 그 변화하는 모양을 연구하고 또는 몇 그루를 방 안으로 옮겨 놓고 끝없는
흥취에 잠겼다. 잎의 냄새를 맡고는 꽃의 크기를 알아 맞힐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뿌리를 보고 꽃빛을 알아 맞힐 수 있는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참으로 꽃의 애호가, 꽃에 미친 사람들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다.

  꽃을 감상하는데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차를 마시면서 꽃을 감상하는 것이 가장 좋고,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면서 꽃을
감상하는 것이 그 다음이고, 술을 마시면서 감상하는 것이 그 다음이다. 시끄럽게
움직이거나 쓸데없는 말을 하거나 하는 것은 모두 꽃의 혼을 모독하는 짓이 된다.
  꽃을 즐기는 데는 그에 알맞은 때와 장소가 있다. 적당한 환경을 생각하지 않으면
신성을 모독하는 것이 된다. 추울 때 꽃을 감상하려면 눈이 내리기 시작했을 때나,
또는 눈이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었을 때나, 초승달이 떠 있는 동안이나, 따뜻한
방안이 좋다. 온화, 즉 봄의 꽃은 맑게 개인 날이나, 조금 추운 날에 아름다운 넓은
방에서 방에서 즐겨야 한다. 여름의 꽃은 비가 개인 뒤 상쾌한 바람을 받으면서
녹음이 우거진 나무 그늘, 대나무 아래 또는 물가의 노대가 적당하다. 양화, 즉
가을의 꽃은 싸늘하고 상쾌한 달 아래, 또는 저녁 때, 회랑의 돌층대 가장자리, 이끼
낀 뜰안의 오솔길 또는 오래된 덩굴이 얽힌 바위 가까이에서 감상해야 한다.
바람이나 태양이나 장소 여하를 생각치 않고 마음이 꽃 밖에서 헤맬 때 꽃을 대하게
된다면, 기생집이나 술집에서 꽃을 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를 것이 있겠는가.

  맨 끝으로 원은 다음의 열 네 가지를 (화쾌의)의 조건으로 들고 (23개 조항)
(화절욕)의 조건으로 들고 있다.

  B. 화쾌의 열 네 가지
  명창
  정궤
  고정
  송현
  송도계성
  주인은 화벽이 있고 시운을 사랑하다.
  차에 취미를 가진 친구 승이 찾아오다.
  계주인이 술을 갖고 오다.
  방안의 손님 시취가 풍부하다.
  향기로운 꽃이 눈부시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가 찾아오다.
  예화서를 쓰면서.
  밤이 이슥하여 차솥이 끓는다.
  처첩이 꽃이야기를 교정하며 주고 받을 때.



    6. 장조의 경구 열 가지

  자연의 즐거움은 시문이나 회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말하였다.
자연은 인생 전반 속에 파고 드는 것이다. 자연이란 모든 소리이며 색깔이며
기분이며 분위기이다. 슬기롭고 재빠른 생활 예술가인 인간은 우선 자연의 정당한
기분을 가려내어 그것을 자기의 기분에 조화시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중국의 모든 시인 문인의 태도다.
  그러나 그 가장 뛰어난 표현은 장조(17세기 중엽의 사람)의 저서 (유몽영) 중의
경구에서 이를 찾아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문학적인 격언을 모은 것으로,
이러한 종류의 격언집은 중국에 그 수가 많이 있으나 장조와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안데르센의 동화가 영국의 오랜된 옛이야기와 관계가 있고,
슈베르트의 예술적인 가요가 민요와 관계가 있는 것처럼, 이러한 문학적 격언은
민속적인 속담과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책은 세상에서 매우 사랑받고 있으며,
한무리의 중국의 학자들이 참으로 유쾌하고도 경쾌한 기분으로 그 격언 하나하나에
저마다의 평석을 붙였을 정도다. 그러나 여기서는 자연의 즐거움에 대한 가장 우수한
것 몇 가지만을 번역하는 것으로 그치기로 한다. 그러나 인생에 관한 격언도 매우
뛰어난 것이 몇 편 있고, 전편 가운데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몇 절을 마지막으로 수록하기로 했다.

  A. 무엇이 본격인가?
  꽃에는 나비가 있고, 산에는 샘이 있으며, 바위에는 이끼가 있고, 물에는 논냉이가
있으며, 교목에는 이에 기생하는 덩굴이 있게 마련이며, 인간에게는 도락이 있다.
이것은 절대로 필요한 것이다.
  꽃은 미인들과 함께 즐겨야 하며, 달빛 아래 술은 마음에 맞는 유쾌한 친구들과
함께 즐겨야 하며, 눈빛은 품격이 고상한 선비들과 함께 즐겨야 한다.
  꽃을 심는 것은 나비를 부르기에 좋다. 바위를 쌓는 것은 구름을 부르기에 좋다.
소나무를 심는 것은 산뢰(산바람이 나무가지를 스치는 소리)를 부르기에 좋다.
노대를 마련하는 것은 달을 부르기에 좋으며, 파초를 심는 것은 비를 부르기에 좋다.
버드나무를 심는 것은 매미를 부르기에 좋다.
  사람은 높은 누각에서 산을 바라보고, 성벽에 서서 눈을 바라보며, 등불 아래서
달을 우러러보며, 조각배에서 아롱진 구름을 감상하며, 방안에서 미인을 대한다.
정경에 따라 정취는 스스로 다른 것이다.
  매화 옆에 가까이 있는 바위에는 (고색창연)한 맛이 있어야 하며, 소나무 밑의
바위는 (우둔)해야 하며, 대나무 옆에 있는 바위는 가냘퍼야 하며, 수반 옆에 있는
바위는 (정교)해야 한다.
  맑고 푸른 물은 푸른 산에서 흘러 나온다. 물이 산의 빛을 빌어오기 때문이다.
명시는 향긋한 술에서 나온다.
  거울이 못 생긴 여자를 대할 때, 세상에 희귀한 벼루가 옹졸한 주인의 손에
들어갔을 때, 명도가 하찮은 장수의 손에 쥐어졌을 때 모든 것을 끝장을 보는
것이다.

  B. 꽃과 여자에 대하여
  꽃이 시들고, 달이 지며, 미인이 명이 짧아 일찍 죽는 것은 차마 볼 것이 아니다.
  꽃을 심어 그 꽃이 활짝 피는 것을 봄이 좋다. 달을 기다려 만월이 된 것을
관상함이 좋다. 저술은 완성된 것을 봄이 좋다. 미인은 쾌활하고 즐거워 보일 때
보는 것이 좋다. 그렇지 않으면 낙심할 뿐이다.
  미인을 보는 때는 아침 화장을 한 뒤라고 알아야 한다. 밉지만 볼품있는 얼굴도
있다. 밉지는 않지만 보기 싫은 얼굴도 있다.
  문법에는 맞지 않지만 애독할 만한 문장도 있다. 문법이 지나치게 맞아도 읽기
힘든 나쁜 글도 있다. 이러한 것들은 속이 얕은 사람들에게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들이다.
  미인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꽃을 사랑하면 꽃의 각별한 아름다움을 알
수 있다. 꽃을 사랑하는 것과 똑같은 마음으로 미인을 사랑한다면 특히 사랑스럽고도
귀여운 맛을 알 수 있다.
  미인은 말을 알기 때문에 꽃보다 낫고, 꽃은 향기를 풍기기 때문에 미인보다 낫다.
양손에 미인과 꽃을 다같이 잡을 수 없다면 향기를 풍기는 꽃을 버리고 말하는 꽃을
잡도록 하라.
  짙은 붉은 색 꽃병에 꽃을 꽂으려면 꽃병의 크기와 높이가 꽃과 균형이 맞도록 할
것이며, 또 꽃병 빛깔의 짙고 연함이 꽃과 좋은 대조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
  요염한 고운 꽃에는 대부분 좋은 향기가 없다. 몇 겹이나 꽃잎이 포개져 있는 꽃은
대개 밉다. 아아, 세상에 완전한 것이란 참으로 드물구나! 양쪽을 모두 갖춘
것이라곤 오직 연꽃이 있을 뿐이다.
  매화는 사람에게 청쾌한 느낌을 주고, 난은 그윽한 느낌, 국화는 소박한 느낌,
연꽃은 만족한 느낌을 암시한다. 봄철 해당화는 사람의 정열을 태우고, 모란은
용기와 의협, 대나무와 파초는 맑고 소슬하며, 가을 해당화는 우아한 기품을
나타내고, 소나무에는 세상을 등지고 숨어 사는 사람의 느낌이 있고, 오동나무는
사람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며, 버드나무는 사람의 감상을 돋군다.
  미인이 꽃 같은 얼굴, 새 같은 목소리, 달 같은 정신, 버드나무 같은 모습, 가을
호수의 아름다움, 경옥의 뼈, 눈과도 같은 살결, 시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지극히
만족하다 하겠다(참으로 그러하다! 임어당 역시...)
  만일 이 세상에 책이 없다면 아무것도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책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읽어야 한다. 만일 술이 없다면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술이 있다. 그러니까 마셔야 한다. 만일 명산이 없다면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명산이 있다. 그러므로 명산을 찾아야 한다. 만일 꽃과 달이
없다면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꽃과 달이 있다. 그러므로 꽃과 달을
즐기며, 이와 함께 놀아야 한다.
  만일 재주 있는 사람과 아름다운 사람이 없다면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 그러나
재사와 미인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사랑하고 보호해 주어야 한다. 거울이 못 생긴
여자의 적이 되지 않는 것은 거울에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감정이 있다면
틀림없이 산산조각으로 깨뜨려지고 말 것이다.
  이제 막 사온 아름다운 화분의 꽃에도 사람은 사랑을 느낀다. 하물며 (말하는
꽃)에 대해서는 그 얼마나 깊은 애정을 느낄 것인가!
  시와 술이 없다면 산수도 헛되이 가로놓여 있을 뿐, 좋은 사람과 아름다운 여인이
없다면 꽃과 달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재주가 뛰어나고 용모가 빼어난 사람,
아름답고 재주가 뛰어난 여자는 둘 다 오래도록 살기 어렵다. 반드시 신의
시새움만은 아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일대의 보배일 뿐 아니라, 만대의 보배이므로
그 신성함이 모독될 것을 두려워 하여 조물주가 이 세상에 오랫 동안 머물러 있게
하기를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C. 산수에 대하여

  우주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강하게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것... 하늘에는 달이
있고, 악에는 금이 있고, 날짐승에는 두견새가 있고, 초목에는 버들이 있다. 달과
함께 구름을 근심하고, 책과 더불어 좀벌레를 근심하고, 꽃과 함께 폭풍을 근심하고,
재사나 미인과 함께 가혹한 운명을 근심하는 것은 부처님의 대자비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이 세상에 오직 한 사람의 (마음의 벗), 다시 말해서 (나를 알아 주는 사람)이
있으면 죽어도 후회됨이 없다.
  옛날의 어느 문인은 꽃과 달과 미인이 없으면 이 세상에 태어날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는 그 말에 덧붙여서 이렇게 말하겠다. 만일
필묵과 바둑과 술이 없다면 인간으로 태어나서 무엇하겠는가. 산의 빛, 물의 소리,
달의 빛깔, 꽃의 향기, 문인의 매력, 미인의 모습, 이 모든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의 마음을 끌어 당긴다. 사람은 이러한 것들을 꿈꾸고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그러한 것에 생각을 달리고는 식욕을 잃어버린다.
  눈은 고매한 선비를 생각케 하고, 술은 숙달한 검객을 생각케 하고, 달은 정든
친한 벗을 생각케 하고, 산수는 작자의 마음에 흡족한 시문을 생각케 한다. 풍경엔
지상의 풍경, 화면의 풍경, 꿈에 보는 풍경, 머릿속의 풍경 등이 있다. 지상의
풍경의 아름다움은 그 깊이와 파격적인 윤곽이 있다. 화면의 풍경의 아름다움은
필색의 자유와 다채로움이 있다. 꿈에 보는 풍경의 아름다움은 이상하게 변하는
기막힌 그 경치에 있다. 머릿속의 풍경의 아름다움은 모든 것이 정연하게 있어야 할
곳에 자리잡고 있는 데에 있다.
  여행을 하면서 지나가는 경치에 대해서는 예술적으로 그 좋은 곳만을 고를 필요는
없다. 그러나 살 곳을 정하여 일생을 보내려는 장소에 대해서는 그 좋은 점만을
가려서 골라야 한다.
  죽순은 야채 중에서 진귀한 것이며, 여지는 과일 중에서 진귀한 것이며, 게는
수서동물 중에서 진귀한 것이며, 술은 음식물 중에서 진귀한 것이며, 달은 천계에서
진귀한 것이며, 서호는 산수에서 진귀한 것이며, 송의 서정시 사와 원의 극시 곡은
문학에서 진귀한 것이다.
  이름 높은 산수에 접하려면 숙명적인 행운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된다. 나에게
정해진 때가 오지 않으면 비록 근처에 있다 하더라도 산수를 찾을 만한 때는 없다.
  거울을 비치는 영상에도 섹이 있다. 그러나 달빛 아래 영상은 펜으로 그린
스케치다. 전자는 명확한 윤곽이 있는 그림이지만 후자는 (골격이 없는 그림)이다.
달빛에 떠 있는 산수의 그림자는 하늘 나라의 지리이며, 물에 비치는 별과 달의
그림자는 땅 위의 천문이다.

  D. 봄과 가을에 대하여
  봄은 하늘의 뜻이 자연을 따르는 계절이고, 가을은 하늘의 뜻이 변함을 나타낸
것이다.
  옛사람은 겨울을 다른 세 철의 (부속물)(즉 쉬는 시간)이라고 하였지만 나는
여름은 (세 가지 부속물)의 계절이라고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름 새벽에 일어나는
것은 밤의 (부속물), 여름 한밤중에 일어나 있는 것은 낮의 (부속물), 낮잠은 사교의
(부속물)이다.
  옛 시인이 말한 것처럼 나는 진심으로 (여름날의 긴 것을 사랑한다)
  사람은 가을의 정신을 가지고 내 몸을 단련할 것이며, 봄의 정신을 가지고 남을
대해야 한다.
  명문과 당시는 가을 정기로 맑아져야 하며, 송의 유명한 서정시와 원의 극시는
봄마음으로 향기로워야 한다.

  E. 소리에 대하여
  봄의 새가 지저귀는 소리, 여름의 매미가 우는 소리, 가을 벌레가 우는 소리,
겨울에 내리는 눈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낮에는 바둑두는 소리에, 달빛을 받으면서는
피리소리에, 산에서는 소나무를 스치는 바람소리에, 물가에서는 잔물결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이 세상에 태어난 보람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젊은 부랑배가 거리에서 싸움을 시작하거나 마누라가 귀찮은 잔소리를
퍼부을 때는 귀머거리가 되는 것이 가장 좋다.
  거위가 우는 소리를 들으면 남경에 있는 것같이 생각된다. 썰매타는 소리를 들으면
소주, 창주, 호주에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바닷가에 물결치는 소리를 들으면 절강에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여윈 말의 방울소리를 들으면 사안으로 가는 나그네 길에
있는 것처럼 생각된다.
  소리는 모두 떨어져서 듣는 것이 좋다. 다만 금소리 만은 곁에서 들어도 좋고
떨어져서 들어도 좋다.
  소나무 아래서 금소리를 들을 때, 달빛을 받으며 피리소리를 들을 때, 골짜기를
흐르는 시냇물에 내려가서 폭포 떨어지는 소리를 들을 때, 산속에서 염불하는 소리를
들을 때 귓가에 그윽한 향기가 감돈다.
  물소리에는 네 가지가 있다. 폭포 떨어지는 소리, 솟는 샘물 소리, 물살이 세게
흐르는 소리, 도랑을 흐르는 소리.
  바람소리에는 세 가지가 있다. 소나무를 흔드는 소리, 낙엽 떨어지는 소리, 수면을
달리는 폭풍 소리.
  빗소리에는 두 가지가 있다. 오동과 연꽃잎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처마에서
통속으로 떨어지는 빗물 소리.

  F. 비에 대하여
  비라는 것은 낮을 짧게, 밤을 길게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봄비는 영예로운 상을 주는 칙서와도 같고, 여름비는 기결수에게 내리는
사면장과도 같고, 가을비는 만가와도 같다.
  봄비는 독서하기에 좋고, 여름비는 바둑두기에 좋으며, 가을비는 가방 속이나
다락방 속을 뒤지기에 좋고, 겨울비는 술 마시기에 좋다.
  나는 비의 신에게 편지를 내어 다음과 같이 말하련다.
  봄비는 정월 보름이 지난 뒤에 내리고, 청명절(3월 3일, 그 무렵에 복숭아 꽃이
피기 시작한다)의 10일 전까지 계속해서 내리고, 모내기 때(곡우)에도 내리게
해 주십시오.
  여름비는 매달 초순에 열흘과 그믐께 열흘에 내리도록 해 주십시오(달을 즐기는 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가을비는 7월과 9월의 초순께 열흘과 그믐께 열흘에 오도록 해
주십시오(8월, 즉 중추에는 중추의 보름달을 감상하기 위하여 하루도 비가 내리지
않도록). 겨울의 석 달은 비 한 방울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G. 달과 바람과 물에 대하여
  사람들은 초승달이 너무 빨리 진다고 화를 내고, 그믐달이 너무 늦게 뜬다고 또
화를 낸다.
  달빛 아래 독경하는 소리를 들으면 마음은 점점 더 속세에서 멀어져 가고, 달빛
아래 검법을 논하면 용기가 점점 더 떨치며, 달빛 아래서 시를 논하면 운치 있는
기상은 넓고 끝이 없어 세상을 멀리 떠나며, 달빛 아래서 미인을 보면 마음의
번거로움이 더 한층 깊어간다.
  달을 벗삼아 놀려고 생각하면, 달이 밝게 빛나고 있을 때에 낮은 곳에서 우러러
보고, 안개가 깊어 달이 밝지 못할 때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것이 좋다.
  봄바람은 술과 같고, 여름바람은 차와 같고, 가을바람은 연기와 같으며,
겨울바람은 생강과 같다.

  H. 한가로움과 우정에 대하여
  세상 사람들이 정색을 하는 일에 정색하지 않은 사람들만이 남들이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일에 정색을 한다.
  세상에 한가로운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 한가롭다고 해도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한가로움은 사람에게 글을 읽게 하며, 며승고적으로 여행을
하게 하며, 좋은 친구를 사귀게 하며, 술을 마시게 하며, 글을 쓰게 한다.
  세상에 이보다 더한 기쁨이 있겠는가.
  구름에 햇빛이 비치면 운애가 되고, 골짜기를 흐르는 계류가 절벽에 이르면 폭포가
된다. 서로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따라 이름도 달라진다. 이것이 우정의 존귀한
점이다.
  정월 보름 날, 등절을 축하할 때는 담담하게 벗과 술을 마시고, 5월 5일, 용단절을
축하하려면 잘 생긴 벗과 함께 마시며, 7월 7일, 한 해에 한 번 견우 직녀가 만나는
것을 축하할 때는 유쾌한 친구들과 술잔을 나누며, 중추절에 보름달을 바라볼 때는
조용하고도 온순한 친구를 상대해야 하며, 9월 9일, 중양절에 높은 산에 오를 때는
로맨틱한 친구와 함께 마셔야 한다.
  아는 것이 많은 벗과의 정담은 좀처럼 보기 드믄 진기한 책을 읽는 것과 같고,
시취를 아는 벗과의 정담은 우수한 작가의 시문을 읽는 것과 같으며, 조심성 많은
벗과의 정담은 성현의 경서를 읽는 것과 다름이 없고, 기지 있는 벗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소설이나 전기소설을 읽는 것과 다름이 없다.
  조용한 선비에게는 반드시 몇 사람인가의 마음의 벗이 있다. (마음의 벗)이라는
것은 반드시 생사를 맹세한 벗을 의마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마음의 벗이라는
것은 수백리를 서로 떨어져 있어도 절대로 자기를 믿어 주며, 자기에 대해 나쁘게
평하는 말을 믿지 않는 사람들, 또 그러한 소문을 들었을 때도 모든 수단을 다하여
그것을 변명하고 부인해 주는 사람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이렇게 하라, 이렇게
하면 안된다고 충고해 주는 사람들, 위기에 처했을 때는 도와 주고, 때로는 이쪽이
모르는 동안에 자기의 생각대로 빚을 정리해 주거나, 하는 일에 따라서는 지나친
간섭이라고 할 만한 일이라도 도무지 아랑곳하지 않고 단안을 내려줄 만한 사람들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마음의 벗, 즉 (나를 알아주는 사람)은 처첩보다도 친구 사이에서 이를 찾기가 더
쉽다. 군자의 관계에서 마음의 벗을 찾아보기란 더 한층 곤란하다.
  (명저)란 선인이 일찌기 말하지 않는 것을 저술한 책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마음의 벗)이란 가정의 비밀을 서로 털어놓을 수 있는 벗이다.
  시골 생활은 좋은 벗들과 함께 살 수 있어야만 즐거움이 있다. 곡식 종류를
분별하거나 내일의 날씨를 알아맞히는 일밖에 모르는 농사꾼이나 나무꾼에게는 이내
싫증이 나고 만다. 또한 친구도 여러 가지가 있다.
  시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첫째이고, 이야기를 잘 하고 정담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둘째이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 세째이고, 노래를 부를 줄 아는
사람이 네째이며, 술을 통하는 사람이 다섯째이다.

  I. 책과 독서에 대하여
  한창 젊었을 때 책을 읽는 것은 작은 틈을 통하여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고,
늙어서 책을 읽는 것은 푸른 하늘 아래 노대에 서서 달을 바라보는 것과 같다.
독서의 깊이는 체험의 깊이에 따라서 변하기 때문이다.
  글자 없는 책(즉 인생 그 자체인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만이 그야말로 현묘한
말을 할 수 있다. 말로 설명하기 곤란한 길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부처님의 극히 높은
예지를 터득할 수 있다. 예나 이제나 찬란하게 빛나는 문학은 그 모두가 피와 눈물로
씌어져 있다.
  (수호전)은 비분의 서, (서유기)는 정신적 각성의 서, (금병매)(호색 소설)는
수탄의 서.
  문학은 탁자 위의 풍경이며, 풍경은 땅 위의 문학이다.
  독서는 모든 기쁨 가운데서 가장 큰 기쁨이다. 다만 역사서를 읽으면 기쁨보다는
분함이 앞선다. 그러나 분노 속에도 기쁨이 있다.
  경서는 겨울에 읽어야 한다. 겨울은 마음이 집중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사서는
여름에 읽어야 한다. 여름은 한가로운 때가 많기 때문이다. 옛 철인의 책은 가을에
읽어야 한다. 사상에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후대 문인의 문집은 봄에 읽어야 한다.
봄은 대자연이 다시금 소생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문사의 병담은 대개 서재의 병학에 지나지 않는다(글자 그대로 지상의 병담이다).
무장이 문학을 논할 때는 대개 귀로 얻어 들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독서술의 참다움을 살피기에 철저한 사람은 만물이 화하여 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산수 또한 책이 될 수 있고, 바둑도 술도 또한 책이 될 수 있으며, 달도
꽃도 또한 책이 될 수 있다. 현명란 여행자는 가는 곳마다 풍경이 있음을 안다. 책과
역사는 풍경이다. 술도 시도 풍경이다. 달도 꽃도 또한 풍경이다.
  옛날 어느 문인은 말했다... 10년을 책읽기에 바치고, 10년을 여행에 바치고,
10년을 그 보존과 정리에 바치고 싶다고.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보존에 10년을 허비해서는 안된다. 이삼 년으로 충분해야
한다. 독서와 여행은 내 소망을 채우기에는 두 배나 다섯 배라도 아직 모자란다.
내 소망대로 하자면 (황구연) 선배가 말한 것처럼 인간은 3백 세의 수명을 보존할
수밖에 없다.
  (시는 시인이 가난해지거나 불행에 빠진 뒤에야 비로소 좋아진다)고 옛 사람들은
말했다. 불행한 사람에게는 할 이야기가 많고 따라서 자기를 유리하게 발표하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출세해서 부자가 된 사람들이 빈궁에 대한 한탄도
없고, 불행에 대한 아쉬움도 없이 언제나 바람과 구름과 달과 이슬에 대한 시만을
짓고 있다고 한다면 좋은 시가 나올 리 없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있어 시를 짓는
유일한 방법은 여행길을 떠나 눈에 띄는 모든 것, 산도 냇물도 들도 풍속도 생활하는
모습도, 때로는 전화나 굶주림에 시달리는 민중의 모습도 그 모든 것을 자기의 시의
소재로 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자기 자신의 노래와 탄식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비애를 빌어온다면 구태여 가난해져서 불행해지기를 기다리지 않더라도 좋은 시를
지을 수 있을 것이다.

  J. 일반 모든 생활에 대하여
  번뇌는 우주의 토대를 받치고, 재품은 그 지붕을 칠했다.
  군자에게 멸시받는 것보다는 시정의 소인배에게 욕을 당하는 편이 낫다. 유명한
학자에게 인정받지 못하느니 시험관에게 낙제를 당하는 편이 차라리 낫다.
  사람은 시처럼 살아야 하고, 사물은 그림처럼 보여야 한다. 고요하고 차분하기는
하지만 생각하면 우수에 젖는 쓸쓸한 정경이 있다. 안개나 비 따위가 그것이다.
시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견디기 어려운 것이 있다. 병과 가난이다. 귀엽게
들리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야비한 목소리가 있다. 꽃 파는 소녀의 꽃 사라는
목소리가 그러하다.
  나 자신은 농사꾼이 될 수는 없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뜰에 물을 뿌릴 정도다.
나 자신은 나무꾼이 될 수는 없다. 풀을 뜯는 게 고작이다.
  유감스러운 일, 화나는 일이 내게는 열 가지가 있다.
  1. 책 겉장은 좀이 먹기 쉽고,
  2. 여름밤은 모기 때문에 기분이 상하고,
  3. 달을 바라보는 망월대는 비가 새기 쉽고,
  4. 자칫하면 국화 잎이 마르기 쉽고,
  5. 소나무엔 큰 개미가 잔뜩 끼고,
  6. 대나무 잎은 한꺼번에 땅에 떨어져 쌓이고,
  7. 물푸레나무와 연꽃은 시들기 쉽고,
  8. 푸른 풀에는 뱀이 곧잘 숨고,
  9. 울타리에 핀 꽃에는 가시가 있어 밉고,
  10. 고슴도치에는 독이 있어 먹을 수 없다.

  누군가가 방안에서 창호지에 글씨를 쓰고 있는 것을 창 밖에서 보면 뭐라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꽃이 되려거든 훤초(물망초라고 부르는 식물)가 되어라. 새가
되려거든 두견새가 되지 말라(피눈물에서 진달래가 자랐다고 한다)
  태평한 세월에 청렴하고 강직한 지사가 다스리는 산천 호소지방에 태어나서
남부럽지 않게 생활하는 집안에서 자라서 이해성 있는 아내를 맞이하고, 똑똑한
자식들을 둔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말하는 완전한 인생이다. 산이나 골짜기를 마음
속에 그리고 있는 사람은 도시에 있어도 산속 숲에서 사는 것과 같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으며, 구름에 마음을 쏟고 있으면 명부도 신선이 사는 섬으로 화한다.
  고요한 밤에 홀로 앉아 있다... 달을 불러 나의 슬픔을 달래 본다. 좋은 밤에 홀로
있다... 벌레를 불러 내 마음 속의 회한을 풀어 본다. 도시에 사는 사람은 그림을
풍경으로 보며, 화분의 모습을 뜰로 보고, 책을 자신의 벗으로 보아야 한다.
  고명한 학자에게 아들의 교육을 부탁하는 것, 명산을 찾아서 시험 논문을 쓰는
방법을 연구하는 것, 유명한 문인에게 대작을 의뢰하는 것... 이 세 가지는 터무니
없는 사도다.
  중은 술을 삼갈 필요는 없다. 다만 비속함을 떠나면 족하다. 여자는 문학을 이해할
필요는 없다. 다만 무엇이 예술적으로 흥미 있는가를 이해하면 된다.
  세무 관리가 덮칠 것으로 골머리를 앓는다면 지세를 바쳐야 한다. 중과 불법을
논하기를 낙으로 삼는다면 때로 사원에 시주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명성이라는 이 하나의 유혹만 잊어버리면 모든 일은 문제없이 잊어버릴 수 있다.
석 잔의 술만 있으면 세상 만사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술은 차를 대신할 수 있지만 차는 술을 대신할 수 없다. 시는 산문을 대신할 수
있지만 산문은 시를 대신할 수 없다. 원의 극시는 송의 서정시를 대신할 수 있지만
송의 서정시는 원의 극시를 대신할 수 없다. 달은 등불을 대신할 수 있지만 등불은
달을 대신할 수 없다. 붓은 입을 대신할 수 있지만 입은 붓을 대신할 수 없다. 여자
종은 남자 머슴을 대신할 수 있지만 남자 머슴은 여자 종을 대신할 수 없다.
  가슴 속의 사소한 부정은 술로 지울 수 있지만, 천하의 부정은 검이 아니면 없앨
수 없다.
  바쁜 사람의 뜰은 안채 바로 옆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한가로운 사람의 뜻은
안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좋다.
  깊은 산속에 들어가 사는 즐거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이른바 고기잡이, 나무꾼, 농사꾼, 정원사, 승려이다. 뜰, 정자,
사랑하는 첩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 이른바
부유한 상인과 고관이다.
  아픔을 참기는 쉬우나 가려움을 참기는 힘들다. 쓴맛을 견디기는 쉽지만 신맛을
견디기란 힘들다. 한가로운 사람의 벼루는 물론 좋은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나쁜
사람의 벼루일지라도 그래야 한다. 쾌락을 위한 애첩은 아름다와야 하겠지만 혈통을
끊지 않기 위한 애첩도 또한 아름다와야 한다.
  황새는 로맨틱한 모습을 보이고, 말은 용감하고 늠름한 것을 보이고, 난은 속세를
버린 사람의 모습을 띠고, 소나무는 옛사람의 장중함을 나타낸다.
  나는 언젠가 큰 나체 무도회를 열려고 생각하고 있다. 첫째 그 이유는 모든 시대의
재사들의 영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고, 둘째 모든 시대의 가인들의 영과 화목하기
위해서다. 다만 이것은 참된 고승을 찾아냈을 때에 실행하기로 하고, 그 고승에게
사회를 부탁하려고 생각하고 있다.
  맛있는 음식을 급히 먹고, 훌륭한 경치를 급히 보고, 심각한 감정을 경박하게
나타내고, 아름다운 하루를 먹고 마시는 일로 지내고, 부를 오로지 사치로만
즐긴다는 것은 신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