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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장 교양의 즐거움

    1. 지식과 견식

  교육 또는 교양의 목적은 지식 속에서 견식을 기르며 행위 속에서 훌륭한 덕을
북돋는데 있다. 교양이 있는 사람이라든가 또는 이상적으로 교육된 사람이란 반드시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나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올바르게 사랑하고 좋아하며 올바르게 싫어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미워해야 할 것인가를 알고 있는 것은 견식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머릿속에 역사에 관한 연대며 여러 가지 숫자가 꽉 차 있고, 러시아나
체코슬로바키아의 시사 문제 따위에 정통해 있으면서도 그 태도나 견해가 전혀
잘못되어 있는 사람들과 모임 같은 데서 자리를 함께 하는 것처럼 불쾌한 일은 없다.
그러한 사람들을 나는 여러 번 만난 일이 있는데, 그들은 화제에 오르는 어떤
일이라도 약간의 사실이나 숫자를 모르는 일은 없지만, 그 견해라는 점에 이르러서는
실로 가엾은 생각이 든다. 그러한 사람들은 배워서 머릿속에 넣는 것은 있지만
판단력, 다시 말해서 견식 또는 감식이 없는 것이다. 지식은 사실이나 보도를 단순히
머릿속에 집어 넣는 문제이지만 견식, 다시 말해서 판단력은 예술적인 판단의
문제이다.
  학자에 대해서 말하면 중국 사람은 일반적으로 학식, 행위, 견식, 다시 말해서
감식과를 구별하고 있다. 역사가의 경우는 특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역사책이 가장 큰 학자적인 양심으로 씌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통찰력과 감식력이
전혀 없고 역사상의 인물과 사건을 판단하고 해석하는데 저자가 아무런 독창력과
이해력의 깊이를 나타내지 않는 일이 흔히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야말로 견식이 없는
사람이라고 우리는 말하는 것이다. 세상 소식에 밝다든가 사실을 수집한다든가 하는
일만큼 쉬운 일은 없다. 역사상의 어느 시기에는 쉽게 머릿속에 넣을 수 있는 사실이
많다. 그러나 그 속에서 중요한 사항을 선택하는데 판단력을 작용하게 하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그 인물의 견해에 달려 있는 것이다.
  교육 있는 사람이란, 그러므로 사랑과 미움에 대한 판단력이 올바른 사람을
말한다. 이를 우리는 견식이라고 한다. 견식에는 매력이 있다. 견식 또는 판단력을
가지려면 사물을 철저하게 생각하는 능력, 판단의 독자성, 사회적 문화적 의도적
학구적인 어떠한 방면의 기만적인 위협에도 굽히지 않는 굳센 태도가 필요하다.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어른들의 생활은 많은 기만에 싸여 있다. 기만된 명성, 기만된
재력, 기만된 조국주의, 기만적인 정치, 기만적인 종교, 사이비 시인, 사이비
미술가, 사이비 독재자, 사이비 심리학자 등등. 정신분석학자는 어렸을 때의 내장의
모든 기능의 작용은 뒷날의 야심 진취성 의무 관념과 결정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느니, 변비증은 인색성의 근본이니 하고 가르친다. 얼마간 견식이 있는 사람이
이런 학설을 듣는다면 재미있어 하며 일소에 붙이고 말 뿐이 것이다. 누구라도 잘못
되어 있을 때는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위인의 이름이나 위인이 읽고 보통 사람은
아직 읽은 일조차 없는 책이 수없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감탄하거나 위압을 받을
필요는 조금도 없다.
  그런데, 견식은 용기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오늘날도 중국인은 언제나
(식)과 담을 관련시켜 생각하고 있다. 용기, 다시 말해서 판단하는 독자성이란
우리가 알고 있듯이 실로 드물게 보는 미덕이다. 후세에 이름을 떨친 사상가나
문인은 어렸을 때부터 모두 지성을 갖고 있고, 또한 용기가 있으며, 그 독자성을
잃지 않았다. 이러한 사람들은 설사 그 시대의 인기있는 시인이라고 해서 무턱대고
호의를 갖기를 싫어한다. 그러나 정말 한 사람의 시인에게 마음이 기울 때는 당당히
그 까닭을 공언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을 문예에 있어서의 견식이라고 한다. 그는
또 유행파에 속하는 화가의 그림이라 할지라도 자기의 예술적 본능에 저촉될
경우에는 결코 이를 시인하려고 하지 않는다. 이것은 미술에 있어서의 견식이다.
그는 또 철학에 있어서의 유행이나 시류에 따른 이론은 설사 그 뒤가 가장 위대한
사람의 이름이 있을지라도 결코 감동되거나 하지 않는다. 자기의 마음속으로부터
납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면 어떠한 저자에게도 쾌히 신복하려고 들지 않는다.
저자가 그를 신복하게 했다면 저자가 옳은 것이다. 만약 저자가 그를 신복하게  만들
수 없었다면 그가 옳으며, 저자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지식에 있어서의
견식이다. 본디 이와 같은 지적인 용기 또는 판단의 독립성을 지키려면 소박한
어린이다운 자신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런 자신이 담긴 자아야말로 우리가 사수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며, 만약 세상의 학생들이 개인적인 판단의 권리를 포기했을 때는
인생에 있어서의 온갖 기만을 용인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공자는 사려 있는 학식이 학식을 동반하지 않은 사려보다 위험한 것을 느꼈던 것
같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배우고도 생각하지 않으면 곧 없음이요, 생각하고도 배우지 않으면 곧
위태로움이니라)
  이런 경구를 말한 것을 보면 공자는 그 시대의 대부분의 학자가 후자의 형에
속하고 있었음을 보았던 것이리라. 이 경구는 현대의 학교에도 매우 알맞은 것이다.
누구나 다 아는 바와 같이 현대의 교육과 학교 제도는 일반에게 지식을 장려하여
판단력을 희생할 경향이 있다. 그리고 지식을 집어 넣는 주의를 맨 마지막
목적이라고 생각하고 많은 양의 학식만 있으면 교육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 사색을 대수롭지 않게 다루고 있는 것은 어떤
까닭인가. 교육 제도가 즐거운 지식의 추구를 기계적이고 규칙 투성이며, 틀에 박힌
획일적이며 수동적인 주입주의로 잘못 알게 된 것은 어째서인가. 또한 무엇 때문에
사색보다는 지식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인가. 심리학, 중세사, 논리학에서부터
(종교)에 이르는 필요한 과목 또는 청강 과정을 해냈다는 이유만으로 대학 졸업생을
교육 있는 사람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어찌된 것인가. 성적표나 졸업증서는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가. 또한 점수나 졸업증서가 학생의 머릿속에서 교육의 참된 목적의
지위를 뺏어버리고 만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 이유는 간단하다. 오늘날의 교육 제도가 대량 교육이며, 따라서 공장과 같으며,
공장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무슨 일이건 생명이 없는 기계적인 시스템에 의하여 하기
때문이다. 학교의 이름을 지키고 제품을 표준화하기 위해서 학교는 졸업증서를
발행하여 제품을 증명해야만 한다.
  졸업증서와 함께 품등을 나눌 필요가 생기고, 품등을 나눌 필요에서 점수를 주는
제도가 생긴 것이다. 점수를 매기기 위해서는 따로 외고 시험을 치고 고사를 해야만
한다. 교육 전체가 완전한 논리적인 연속을 이루고 있어서 도망쳐 나갈 길이 전혀
없다.
  그러나, 기계적인 시험이나 고사의 결과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치명적인
것이다. 그것은 견식이나 판단력을 기르는 것보다는 오히려 사실을 기억하는 힘을
기르는데 역점을 두기 때문이다. 나는 학교 선생을 한 일이 있어서 알고 있지만,
막연한 문제에 대한 막연한 의견을 묻는 것보다는 역사의 연대에 대하여 일련의
문제를 제출하는 편이 더 쉽다. 답안지에 점수를 매기는 일은 더욱 쉬운 일이다.
  이러한 제도가 만들어진 뒤로는 학문은 내가 견식의 계발이라고 부르는 참다운
이상에서 멀어져 버렸다는 사실을 자칫하면 잊기가 쉽다. 아니 오늘날에는 더욱 그
거리는 멀어져 가고 있다. 위험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공자가 말한 다음 말을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을 알기만 하는 학문으로는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모자라느니라.

  형식이야 어떤 것이든 사람이 가진 지식을 시험하거나 측정하거나 할 수 있다는
사고 방식은 버려야 한다. 장자는 정말 잘 말했다.
  (아, 내 인생에는 한이 있으나 지식에는 한이 없구나!)
  결국 문학의 탐구는 신대륙의 탐험 또는 아나톨 프랑스가 말한 이른바 (영혼의
모험)과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며, 그 탐구하는 정신이 해명적이고 연구적이며
호기적이고 모험적인 마음으로 유지된다면 괴로움이 되지도 않고 즐거움으로서
계속되는 것이다. 규칙적이고 획일적이며 수동적인 지식의 주입주의를 적극적이고
발전적인 개인적 즐거움으로 바꾸어야 한다. 졸업증서나 점수가 일단 폐지되든가,
또는 다만 그것만의 것으로 다루어지게 된다면 학생은 적어도 공부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게 될 터이므로 학문의 탐구는 보다
적극적이 된다. 현재의 상태로는 학생에게 있어 문제는 이미 해답이 나와 있다.
신입생은 2학년 학생이 되기 위해 공부하고, 2학년 학생은 3학년 학생이 되기 위해
공부한다. 그들은 이에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는다. 그럼 본래의 학문의 목적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 같은 생각은 모두 몰아내 버려랴야 한다. 왜냐하면 학술의
규명이라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문제이며, 다른 사람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한 현상에 있어서는 학생들은 모두 대학 간사를 위해 공부하고 있다. 많은
선량한 학생들은 부모를 위해, 또는 미래의 아내가 될 여인을 위해 공부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재학 중에 많은 학자금을 대준 부모에게 불효자가 되지 않도록,
근엄하고 까다롭기 이를 데 없는 선생 앞에서 근엄하게 보이기 위해 또는 학교를
졸업한 뒤에 가족들을 부양하기 위해 많은 봉급을 받고 싶기 때문에 공부하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생각은 모두 부도덕한 것이 아니겠는가.
  학문의 탐구는 다른 누구의 일이어서도 안된다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교육은 즐거움이 되고 적극적이 될 수 있다.



    2. 유희로서의 예술과 품격으로서의 예술

  예술은 창조적인 동시에 오락이다. 나는 이 두 가지 생각 가운데서 오락, 즉
순전한 정신적인 유희로서의 예술 편이 한층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림이건
건축이건 문학이건 불후의 창조적인 제작이라면 온갖 형식의 것을 존중은 하지만,
참된 예술적인 정신은 불후의 걸작을 후세에 남기겠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다수의
민중이 예술을 오락으로서 즐기게 되었을 때에 비로소 보다 일반화되고, 보다 넓게
보급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대학이 전국 경기에 출전하는 소수의 운동
선수나 축구 선수를 길러내는 것보다도, 잘하건 못하건 간에 모든 학생들이
테니스라든가 축구라든가를 하는 편이 중요한 것처럼, 한 나라가 한 사람의 로댕을
낳게 하는 것보다도 모든 어른, 모든 어린이들이 저마다 독자적인 창작을 즐거움으로
삼게 되는 편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불과 몇 명의 직업적인 예술가가 있는
것보다는 전국 학생들에게 찰흙 공작을 가르치고, 모든 은행장이나 경제 전문가가
크리스마스 카드를 손수 만들 수 있게 되도록 하고 싶다. 이것은 하나의 기발한
제안일지 모르나,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즉 온갖 분야에서의 아마추어 주위를 주장하는 것이다. 아마추어 철학자, 아마추어
시인, 아마추어 사진가, 아마추어 마술사, 자기가 살 집을 자기 손으로 짓는
아마추어 건축가, 아마추어 음악가, 아마추어 삭물학자, 아마추어 비행가 이런
것들이다. 하룻밤 친구가 아무렇게나 되는 대로 소나티네를 치는 것을 들으면, 일류
전문가의 음악회에 참석한 것과 같은 기쁨을 느낀다. 친구들 가운데 아마추어
마술가가 있다면 누구나 무대에서 공연하는 전문가인 마술사보다 그 편을 더 기뻐할
것이고, 어떤 부모건 셰익스피어 극을 보는 것보다는 자기의 자식들이 하는 아마추어
연극을 훨씬 더 기뻐한다. 아마추어 예술은 자발적인 것이다. 예술의 참된 정신은
오직 이 자발성에서만 찾아 볼 수 있다. 중국의 그림은 전문적인 화가가 그리는 것이
아니라, 본디 학자들의 오락이었다는 사실을 내가 매우 중요시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유희적인 정신이 잃어지지 않았을 때 예술은 비로소 상품화를 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사람은 아무런 이렇다 할 까닭없이 논다. 또한 놀이에는 어떤 이유가
있어서는 안 된다. 바로 이것이 유희가 지닌 특징이다. 유희는 그 자신 훌륭한
이유를 갖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진화론에 의하여 충분히 증명되고 있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생존
경쟁의 원리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며, 동물에게는 해로운 아름다움의
형식조차도 있다. 이를테면 너무 지나치게 자란 사슴의 뿔 같은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아름답기는 하겠지만 사슴에게 있어서는 귀찮은 것이다. 다아윈은 식물계,
동물계의 아름다움은 자연 도태의 원리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웅 도태라는
2차적인 대원리를 들고 나와야만 했다. 예술이란 단지 육체적, 정신적인 정력이 넘쳐
흐르는 과잉된 상태를 뜻하는 것이고, 자유롭고 아무런 속박도 없는 그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않으면 예술과 예술이 지닌 본질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은 비난이 많은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공식인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정치가가 간섭할 권리가 없는 문제이며, 단순히 모든 예술적인 창조의 심리적인
기원에 관한 움직일 수 없는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고 나는 생각한다. 상업 예술은
이따금 예술적인 예술은 창조의 정신을 해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정치적인 창조의
정신을 죽여 버리고 만다. 왜냐하면 자유야말로 예술의 혼이기 때문이다.
  현대의 독재자들은 정치적인 예술을 만들어 내려고 하지만 도대체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총검의 힘으로 예술을 만들어 내는 것은 마치 창녀에게서 진실된 사랑을
구하는 것과 같은 것임을 그들은 모르는 것 같다.
  어쨌든 예술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정력 과잉으로 말미암은 예술의 육체적인
기초까지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이것은 예술적인 충동 또는 창조적인 충동으로서
알려져 있는 것이다. 영감이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더라도 예술가 자신은 그런
충동이 어디서 오는 것인지 거의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과학자가
진리를 발견하려고 하는 충동과 마찬가지로 다만 정신적인 긴박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을 설명할 도리는 없다.
  오늘날 생물학에 대한 지식 덕분에 인간의 정신 생활의 모든 조직은 여러 가지
기관과 그 기관을 지배하는 신경 계통에 작용하는 혈액 속에 있는 호르몬의 증감,
배분에 의해 조정되고 있다는 사실을 겨우 알게 되었다. 노여움이나 두려움조차도
단지 아드레날린의 공급이 어떤가 하는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천재라는 것 자체도
선분비의 과잉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호르몬이라는 현대적인 지식 따위를 갖고 있지 않은 중국의 어느 무명 작가는 온갖
활동의 원동력은 사람의 몸 안에 살고 있는 (벌레)에 있다는 올바른 추단을 내린 바
있다. 간통은 사람의 창자를 뜯어먹음으로써 욕망을 채우지 않고는 견딜 수 없게
하는 벌레 때문에 저질러지는 것이다.
  야심이나 침략성이나 명예욕이나 권세욕 같은 것도 야망을 이룰 때까지는 그
사람에게 마음의 안정을 주지 않는 또 다른 벌레 탓이다. 글을 쓴다는 것, 이를테면
소설을 쓰는 것도, 작자를 몰아세워 무슨 인과인지 창작을 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게 하는 어떤 종류의 벌레 탓인 것 같다. 호르몬인지, 벌레 때문인지, 나는
후자를 택하겠다. 벌레라고 하는 편이 더 생생한 느낌이 든다.
  이 벌레가 너무 많아지면, 아니 보통 분량인 때에는 사람은 무엇이건 창작하지
않고는 못 견디게 된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어린이의
정력이 넘치게 되면 보통 때 걷는 방법이 변하여 뛰거나 달리거나 하게 된다. 어른의
정력이 넘치게 되면 걷는 것이 도약이나 무용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니까 무용을
한다는 것은 능률이 나쁜 걸음걸이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능률적이 아니라는 말은
공리적인 견지에서 보아 정력의 낭비가 있다는 뜻이지 심미적인 뜻으로는 아니다.
댄스를 하는 사람은 어느 한 점에 도달하는 가장 짧은 거리인 직선을 취하지 않고
왈츠의 음악에 맞추어 원을 그리면서 앞으로 나간다. 사실상 춤추는 동안은 아무도
애국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이념이니 팟쇼나 프롤레타리아의
이데올로기에 맞추어 춤을 추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댄스가 가진 유희성과
영광스러운 비능률의 정신을 깨뜨리고 마는 것이다. 공산주의자가 그들의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고 하거나 또는 충실한 동지가 되려고 한다면 모름지기 오직 걸어야
한다. 가장 가까운 거리를 가야 한다. 댄스 같은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의 신성함을 알고 있지만, 유희의 신성함은 알지 못하는 것
같다.
  더더군다나 문명인들은 다른 온갖 종족에 속하는 동물에 비하여 지나치게 일을
하고 있는데, 아직도 일이 모자란다는 말인가. 우리가 갖고 있는 얼마 되지 않는
한가한 시간, 오락과 예술을 위한 극히 짧은 시간조차도 국가라는 괴물의 요구
때문에 침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예술의 본질은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예술과 도덕과의
관계라는 문제를 분명하게 밝히는데 도움이 된다. 아름다움이란 아름다운 자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아름다운 자태는 명화나 아름다운 다리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행위에도 있는 것이다. 모든 예술은 그림이나 음악이나 댄스보다도 훨씬
범위가 넓은 것이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자태는 경기중인 운동가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인가 하면, 어린 시절에서, 청년, 장년, 노년 시대에 이르기까지 각 시기에
알맞은 아름다운 생활을 즐기고 있는 사람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지휘와
작전이 다같이 잘 되어서 점차로 마지막 승리를 향해 나가는 대통령 선거전에서도
아름다운 자태라는 것은 있는 터이고, 사람의 웃음 속에도, 침을 뱉을 때에도
아름다운 자태는 있다. 중국의 늙은 관리들은 아주 조심해서 침을 뱉도록 훈련되어
있지만 그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인간의 온갖 행동에는 자태와 표현이 있고, 온갖
표현의 형식은 예술의 정의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표현의 기법을
음악이라든가 댄스라든가 그림 따위의 소수의 분야로 분류할 수는 없다.
  예술을 이같이 넓은 뜻으로 해석하면 좋은 행위의 자태와 좋은 예술의 인격은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고, 다같이 중요한 것이 된다. 잘 조화된 시의 운율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몸의 운동도 여러 가지 사치스러운 것을 생각하게 된다. 즉
정력이 넘쳐 흐르게 되면 어떤 일을 하든지 침착성과 우아함과 자태에 대한 관심이
생기게 된다. 이 침착성과 우아함은 어디서 생기는가 하면, 자기는 육체적으로
능력이 있다는 의식, 즉 어떤 일이고 보통 이상으로 훌륭하게 해낼 수 있다는
의식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좀더 추상적인 면에서 말한다면 멋진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이게나 이런 아름다움은 있다. 멋진 일, 즉 솜씨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충동은 본디 미적인 충동이다. 교묘한 살인, 솜씨 있는 교묘한 음모, 그러한
행위는 용납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얼른 보기에는 아름답다. 좀더 구체적인
일상 생활의 조그만 하찮은 일 속에도 이런 침착성과 우아함과 능력은 실제로 있다.
또는 있을 수 있다. 우리가 (생활의 마음 가짐)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이 테두리
안에 속한다. 사람에게 적절하고도 훌륭한 인사를 하면 멋진 인사를 했다는 말을
듣지만, 볼품없는 어설픈 인사를 하면 볼품없는 인사의 말을 듣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말과 생활과 습속에 아름다운 예의를 요구하는 경향은 중국에서는 진조 끝 무렵에
최고도로 발달되었다. 그 무렵은 (청담)이 유행한 시대여서, 부인들의 옷치장에 가장
마음을 썼고, 미남자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이름을 떨친 사나이들이 가장 많았던
시대였다. (아름다운 턱수염)을 기르는 것이 크게 유행되었으며, 남자들은 훨씬 품이
넉너한 긴 웃옷을 입고 일부러 몸을 건들건들하면서 멋부려 걸었다. 가운데를
긁으려고 생각하면 온몸 어디에나 손이 닿을 수 있게 옷이 만들어져 있었다.
무엇이건 우아하게 하는 것을 중하게 여겼다.
  말 총을 다발로 묶어서 자루를 붙인, 모기나 파리를 쫓는 (주)라는 것이 소중한
대화용의 도구가 되었다. 이러한 한담은 문학 작품 속에서는 (주담)이라고 오늘날도
말하고 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손에 든 (주)를 흔들흔들 우아하게 휘두르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부채도 또한 청담의 아름다운 부속물이 되었다. 이야기를 하면서
부채를 펴기도 하고, 설렁설렁 부치기도 하고, 또는 접거나 하는 폼이 보기에 퍽
아름답다.
  마치 미국의 노인이 연설을 하면서 안경을 썼다 벗었다 하는 것과 비슷한 일이다.
효용이라는 점에서 말한다면, (주)나 부채 편이 영국인의 외알 안경보다는 약간 더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효용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나눌
때의 체모를 갖추기 위한 것의 하나로서, 지팡이가 산책하는 데 있어서 겉치레가
되는 것과 마찬가지 취향이다. 내가 서양에서 본 가장 아름다운 몸가짐은 프러시아의
신사가 객실에서 귀부인에게 인사를 할 때 구두 발꿈치를 맞추어 탁 하는 소리를
내는 것이나 독일의 처녀가 한쪽 발을 뒤로 살짝 물리며 몸을 굽혀 절하는 그런
모습이다. 뭐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몸가짐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런 풍습이
사라져 버린 것은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중국에서는 사교상 지켜야 하는 예의 범절이 많이 행해지고 있다. 손가락, 손, 팔
따위를 어떻게 움직이는가 하는 것을 신중하게 연구하여 행하고 있는 것이다.
  타천이라고 하는 만주 사람들끼리 주고 받는 인사의 방법도 퍽 아름답다. 방안에
들어온 사람은 한쪽 팔을 똑바로 늘어뜨리고, 한쪽 다리를 굽혀 점잖게 몸을 굽히는
것이다. 자기 주위에 자리를 같이한 손님들이 있을 경우에는 그대로의 자세로 똑바로
세운 다리를 축으로 하여 조용히 몸을 돌리며 일동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품격
있는 바둑 손님이 바둑판 위에 바둑돌을 놓는 모습도 한번 보아 둘 만하다. 희고
검은 작은 바둑돌을 하나 교묘하게 균형을 잡아 둘째 손가락 위에 얹고,
엄지손가락을 바깥쪽으로 움직이고 둘째 손가락을 안쪽으로 당기면서 가만히
밀어내어 매우 우아하게 바둑판 위에 놓는 것이다.
  교양 있는 관리는 화가 났을 때에도 매우 아름다운 몸짓을 한다. 그들은
(마라이슈)라고 하여 소매 끝을 접어 올려서 비단을 댄 안감이 드러나 보이는 긴
웃옷을 입고 있는데, 몹시 기분이 상했을 때는 오른쪽 팔이나 양쪽 팔을 동시에 힘껏
아래로 내려뜨려서 (마라이슈)의 걷어 올린 소매를 소리내어 아래로 내려뜨리고는
매우 멋지게 거드름을 피우며 방에서 나가는 것이다. 이것을 (후슈)라고 한다.
(소매를 털고 떠난다)는 뜻이다.
  교양 있는 관리가 말하는 투도 매우 듣기 좋은 법이다. 그 말은 아름다운 운을
밟고 있다. 북경 액센트의 음악적인 음조에는 우아한 음악적인 억양이 있다. 한마디
한마디가 천천히 점잖게 발음된다. 참된 학자의 경우에는 그가 하는 말에는 중국의
문예어가 주옥처럼 섞여 나온다.
  주욱인이 갖고 있는 예술의 품이라는 생가은 자못 흥미로운 데가 있다. 이것은
인품이니 품격이니 하고 말하는 수가 있다. (제1품), (제2품)의 예술이라든가
시인이라든가 할 경우에는 등급을 붙이게도 되고, 또한 좋은 차를 맛보거나
시음하거나 하는 것은 (차를 품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일정한 행동에
나타난 개인의 인격에 관한 표현의 모든 카테고리가 이 말에 포함되어 셈이다. 쉬운
예로서 질이 나쁜 노름꾼, 다시 말해서 성급하고 버릇이 나쁜 노름꾼은 (도품)이
나쁘다고 말한다. 노름꾼으로서의 사람됨이 나쁘다는 뜻이다. 술을 지나치게
마시고는 걸핏하면 야비한 행동을 하는 술꾼을 (주품)이 나쁘다. 즉 술꾼으로서의
사라됨이 나쁘다고 한다. 바둑두는 사람의 좋고 나쁜 것은 (기품)이 좋다든가
나쁘다든가 하는 말로 표현된다.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시의 평론은 (시품)이라고 하여, 여러 시인들을 평한
것이다. 물론 (화품)이라는 미술 평론의 책이 몇 권이나 나와 있다. 이 (품)이라는
관념과 관련하여 중국인 누구나가 인정하는 어떤 신조가 생겨났다. 그것은 예술가의
제작은 엄밀하게 그가 갖추고 있는 품격에 의하여 규정된다는 것이다. 이 (품격)은
도덕적인 것인 동시에 예술적인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간의 오성, 광희, 탈속을
숭상하고, 사소한 일과 용렬함, 그리고 저열함을 초월하고 극복하는 정신을 높이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뜻에서 품이란 영어의 매너 또는 스타일에 가까운 뜻을 갖고
있다. 자유분방하며 낡은 풍습에 사로잡히지 않는 예술가는 분방한 스타일을 나타낼
것이고, 마음씨가 착하고 인정미가 있는 사람은 그 스타일 속에 따뜻한 마음씨와
섬세한 감정을 담을 것이고, 취미가 고상하고 우아한 대예술가는 (매너리즘)에
무릎을 끓는 것을 싫어할 것이다. 어떠한 화가도 화가 자신의 도덕적 미적 품격이
위대하지 않다면 거장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신념을 중국인은 은연중에 승인해 왔다.
따라서 서화를 평하는 경우 기법이 좋고 나쁨이 아니라, 예술가 자신의 품격이
높으냐 아니냐에 달려 있다. 기법은 완벽하면서도 품격이 얕은 작품도 있다. 이런
것은 영어에서 말하는 캐럭터가 없는 작품이 된다. 우리는 이리하여 온갖 예술의
중심 문제에 도달한 셈이다. 중국의 대장군이며 대재상이기도 했던 중국번은 자기의
가족에게 보낸 한 편지 속에서 서도 단 두 가지 살아 있는 원리를 형태와 표현이라고
말하고, 그 무렵 첫손가락을 꼽던 서예가의 한 사람인 하소기가 이 공식을 시인하여
그의 높은 식견을 칭찬했다고 말하고 있다. 예술은 모두 구체적인 것이므로 기계적인
문제, 즉 반드시 익혀 두어야 하는 기법의 문제가 언제나 따라다니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렇지만 예술은 또한 정신이기 때문에 온갖 형식의 창작이 지니고
있는 중요한 요소는 표현의 품격이다. 그것은 단순한 기법을 초월한 예술가의 품격인
것이며, 그것이야말로 예술적인 작품에서 오직 하나 없어서는 안될 요소이다. 저서에
대하여 말한다면 저서 가운데에서 오직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작가의 판단과 좋고
나쁜 것에 나타난 그 스타일과 감정이다. 이 품격 즉 표현의 개성이 기법 때문에
지워지고 말 위험성은 끊임없이 있다. 그리고 그림이건 문학이건 연극이건 초심자가
모두 가장 곤란해 하는 것은 자기를 발휘한다는 일이다. 그것은 초심자가 형식, 즉
기법에 위협을 받는 결과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렇지만, 이 개성적인 요소가
없어서는 어떠한 포옴도 결코 좋은 포옴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모든 좋은 포옴에는
움직임이 있다. 그 움직임은 골프 선수가 내리치는 골프채의 스윙이건, 로켓처럼
성공을 향하여 달려나가는 사나이의 움직임이건, 또는 공을 갖고 경기장 안을 달리는
축구 선수의 움직임이건, 어느 것이든 모두 남이 보기에는 아름다운 것이다.
예술에는 개성적인 표현이 넘쳐 흘러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표현력은 기법에
구애되는 일이 없이 자유롭고도 즐거이 기법 속에서 약동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모퉁이를 돌아갈 때의 기차에도, 돛에 흠뻑 바람을 안고 전속력으로 달리는 요트에도
스윙이 있다. 그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하늘을 나는 제비, 새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드는 매, 또는 이른바 (멋진 포옴)으로 결승점으로 뛰어들어 오는
우승마에도 모두 아름다운 스윙이 있다.
  우리는 온갖 예술이 품격을 가져야 할 것을 요구하지만, 그 품성이란 예술가의
인격이라든가 영혼이라든가 심정이라든가, 또는 중국인이 말하는 (회)를 예술 작품이
암시하거나 말없이 나타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 작품에 인격 또는 품격이
나타나 있지 않으면 생명이 없다. 아무리 심미안이 높더라도 기법이 완벽하다는
것만으로는 생명이 없으며, 또한 생명력이 없는 예술을 구출할 수는 없다.
품격이라는 고도의 개성적인 요소가 빠져 있어서는 아름다움 그 자체가 평범하고
속된 것이 되고 만다.
  품격을 기르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미적으로도 행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학식과
교양이 다같이 필요하다. 교양은 취미에 가까운 것이어서 예술가에게는 자연히
생겨나게 마련이겠지만, 예술에 관한 책을 펼쳐 들고 가장 큰 기쁨을 느끼는 것은
학식의 뒷받침이 있을 경우에 한한다. 이것은 특히 그림과 서도에 있어서 아주
뚜렷하게 나타나는 사실이다. 하나의 붓글씨를 보면 그 서예가가 수많은 위의 탁본을
본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있다. 만일 본 사람이라면 그 학식은 서예가에게 어떤
고전적인 품격을 줄 것이다. 그러나 서예가는 더 나가서 자신의 영혼, 즉 품격을
그 서예 속에 쏟아 넣어야 한다. 이러한 품격이 한결같지 않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일이며, 섬세하고 감상적인 기질의 사람이라면 섬세하고 감상적인 서예를
나타낼 것이고, 또한 강함이나 흐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기질에 어울리는
서예를 취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림과 서도의 경우 미적 특질과 여러
가지 아름다움의 온갖 카테고리를 찾아볼 수가 있다. 더우기 완성된 작품이 지닌
아름다움과 예술가 자신의 영혼의 아름다움을 구별한다는 것은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변덕스럽고 방자한 아름다움도 있을 것이고, 매우 거친 힘의 아름다움도
있을 것이다. 힘찬 것의 아름다움도 정신적인 자유의 아름다움도, 용기와 돌진하는
아름다움도, 로맨틱하고 매력적인 아름다움도 있을 것이고, 자제하는 아름다움,
차분하고 우아한 아름다움, 준엄한 아름다움, 소박함과 우둔함의 아름다움, 단순한
정돈된 균형 잡힌 아름다움, 신속의 아름다움, 또한 어떤 경우에는 의식적으로
만들어 낸 추괴함의 아름다움이라는 것까지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에 꼭 한
가지 실재하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한 미의 형식이 있다. 그것은 분투 노력하는 미,
즉 분투적 생활의 아름다움이다.



    3. 어떻게 책을 읽을 것인가.

  독서, 다시 말해서 책을 읽는 즐거움은 옛부터 교양 있는 생활의 매력의 하나로
손꼽아 왔다. 그 특권을 좀처럼 얻을 수 없는 사람들로부터 오늘날에도 존경받고
부러움을 받아 오고 있다. 이는 책을 읽는 사람의 생활과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의
생활을 비교해 보면 곧 수긍할 수 있는 일이다. 평소에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는 사람이다. 그 생활은
변화없는 틀에 박힌 것이 되고 만다. 그 사람이 접촉하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불과
몇 사람 안 되는 친구와 친지들 뿐이며, 그가 보는 것 듣는 것은 거의 자기의
신변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뿐이다. 이런 갇힌 상태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
그러나, 한 번 책을 손에 들게 되면 사람은 곧 다른 세계에 드나들게 된다. 만일 이
책이 좋은 책이라면 독서는 곧 세계에서 으뜸가는 이야기꾼의 한 사람과 만나는 것이
된다. 그는 독자를 이끌어 먼 다른 세계, 아득한 옛날로 데리고 가서 마음 속의
고민을 가볍게 해 주고, 독자가 일찌기 몰랐던 인생의 여러 가지 모양을 이야기해
준다. 옛 책은 유명계의 독자를 서로 통하게 해 주어 점차 읽어가는 동안에 저자는
어떤 얼굴의 인물이었을까, 어떤 타입의 사람이었을까 하는 것을 상상하기 시작한다.
맹자도, 중국의 대역사가였던 사마천도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하루에 두
시간만이라도 다른 세게에 살며, 그날그날의 번뇌를 잊을 수가 있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육체적인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 하는 특권을 얻은 것이 된다.
이와 같은 환경의 변화는 심리적인 효과를 놓고 본다면 진정 여행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뿐 아니라, 글을 사랑하면 언제나 사색과 반성의 세계에 드나들 수 있는 것이다.
비록 물리적인 사상을 쓴 책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사상을 직접 보거나 몸소
경험하거나 하는 것과 책으로 읽는 것과는 그 취향이 다르다. 책을 읽을 경우에는
물리적으로 일어나는 일은 하나의 구경거리이며 독자는 구경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좋은 책은 우리를 이런 명상적인 기분에 잠기게 하는 것으로서, 사실
보고만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신문을 읽는데 소비되는 막대한
시간은 전혀 독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신문을 읽는 일반 독자는 깊은
생각에 잠길 가치가 사실이거나 사건의 보도만을 읽게 되기 때문이다.
  독서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가장 적절하게 말한 공식은 내 생각으로는 송조의
시인으로 소동파의 친구였던 황산곡의 설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선비가 사흘 동안 책을 읽지 않으면 스스로 깨달아 익힌 말이 무미해지고 거울에
비친 자기의 얼굴을 보기가 역겨워 진다)
  즉 그가 말하는 뜻은 독서는 책을 읽는 사람에게 매력과 품격을 주는 것이며,
독서하는 목적은 이밖에는 없으며, 이 점을 노리는 독서야말로 참된 아트라고 부를
수가 있다는 것이다. (정신 향상) 같은 것은 책을 읽는 목적이 아니다. 왜냐하면
정신 향상이니 하는 타산적인 생각을 하기 시작하면 독서의 즐거움은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틀림없이 이런 혼잣말을 할 만한
사람이다.
  (나는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을 꼭 읽어야겠다. 소포클레스를 꼭 읽어야 한다. 또한
엘리어트 박사가 쓴 (Five Foot Shelf)를 모두 읽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나는
지식을 넓혀야 한다.
  이러한 사람의 학식은 절대로 깊고 넓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루 저녁 그는 자신을
매질하면서 (햄릿)을 읽는다. 그리고는 악몽에서 깨어난 것같이 되어 나온다. 그러나
앋은 것이라고는 요컨대 (햄릿)을 (읽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꼭 읽어야
된다는 의무 관념으로 책을 읽는 사람은 책을 읽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이다.
책읽기를 일로 삼는다는 것은 상원의원이 연설하기 전에 서류와 보고서를 훑어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종류 찾기이고 자료 찾기이지 독서는 아니다.
  황산곡의 의견에 따르면, 사람의 외모에 매력을 더하게 하고, 그가 하는 담화에
멋을 주는 것 외에 독서의 목적으로서 인정할 만한 것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외모의
매력이라고는 해도, 황산곡이 말한 이른바 (보기 역겨운) 외모란 육체적인 흉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못생겼으면서도 사람을 끌어 당기는 얼굴도 있는가 하면
아름답기는 하지만 도무지 매력이 없는 얼굴도 있다. 나의 중국인 친구 가운데 머리
모양이 폭탄처럼 생긴 사나이가 있는데, 이 사나이는 언제 보아도 호감이 간다.
사진만 보고 말한다면 유럽 문인들 가운데 가장 잘 생긴 얼굴은 G.K.체스터튼의
얼굴이라고 생각한다. 콧수염이며 안경, 상당히 숱이 많은 눈썹, 주름 잡힌 미간의
선, 이러한 것들이 악마처럼 엉켜 있는 얼굴이다. 이 사진을 본 사람은 이마 속에
수없이 많은 사상이 약동하고 있어, 이상하게 사람을 쏘아보는 눈에서 그의 사상이
언제고 뛰어나올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이러한 얼굴이 황산곡이 말하는 아름다운
얼굴이다. 분이나 입술 연지로 치장한 얼굴이 아니라 오직 진실된 사색의 힘으로
치장된 얼굴이다. 담화의 품격에 이르러서는 오로지 독서 방법이 어떤가에 달려
있다. 이야기하는 것이 멋있는가 어떤가는 독서하는 방법 여하에 달려 있다. 만일
책에 담겨 있는 고상한 멋을 독자가 자기의 것으로 만든다면, 그가 하는 이야기
가운데도 멋이 나오게 된다. 이야기에 멋이 있으면 그가 쓰는 글에도 멋이 풍기지
않을 리가 없다.
  이런 까닭으로 나는 멋이니 취미니 하는 것이 모든 독서의 열쇠라고 생각한다.
음식에 대한 기호와 마찬가지로 좋아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 사람 그 사람에 따라
다르게 마련이다. 가장 보건적 식사법은 결국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먹는 것이다.
그래야만 자기의 소화력에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어떤 사람에게는 살이 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독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선생은 자기가 읽기 좋아하는 책을
학생에게 읽도록 강요할 수는 없으며 부모라 할지라도 자식들이 자기와 똑같은
취미를 가지기를 기대해서는 안된다. 읽고 있는 것에 흥미가 없다면, 그 독서는
완벽한 시간 낭비일 뿐이다. 원중랑이 말한 것처럼,
  (그대의 마음에 들지 않는 책은 모름지기 버려야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읽게 해야 한다)
  그러니까 절대로 읽어야 한다는 책이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지적인 감흥은
나무처럼 자라고,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우선 수액이 마르지 않는 동안은
나무는 어쨌든 자라는 법이고, 샘에서 새로운 물이 솟는 한 물은 흐르게 마련이다.
물이 화강암 큰 돌에 부딪치면 빙 돌아 흘러가고, 깊은 골짜기로 들어가면, 잠시
그곳에 머물렀다가 다시 굽이쳐 흘러간다. 깊은 산속의 늪에 들어가면 기꺼이 그
속에서 머물러 쉬고, 급류를 만나게 되면 거침없이 빨리 흘러간다. 이같이 물이란
아무런 애도 쓰지 않고 목적도 정하지 않고 더우기 언젠가는 반드시 바다로 흘러가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반드시 읽어야 하는 그런 책이란 이 세상에 없다. 있는
것은 다만 어느 사람이, 어느 때, 어디서, 어떤 주어진 사정 아래에서 생애의 어느
시기에 읽지 않으며 안되는 책이 있을 뿐이다. 독서란 결혼과 마찬가지로
운명이라든가 인연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라고 나는 오히려 그렇게 생각한다.
성경처럼 어떤 종류의 책은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꼭 읽어야 하는 책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읽어야 할 시기라는 것이 있다.
  사상과 체험이 걸작을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 있지 않을 때 걸작을 읽으면
오히려 뒷맛이 개운치 않다. 공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이 쉰 살이 되어 역경을 읽으면 큰 잘못은 없을 것이다)
  이 말은 곧 마흔 다섯 살 때에는 아직 없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설화는 실로 온화한 품격과 원숙한 지성에 넘쳐 있거니와,
이에 접하는 사람 자신이 원숙하지 못한 동안은 그 기막힌 묘미를 알지 못하는
법이다. 나아가서 또한 같은 독자, 같은 책이라도 그 읽는 시기가 다르면 그 맛은
자연히 다르게 마련이다. 이를테면 저자와 친히 이야기를 나눈 뒤, 또는 저자의
얼굴을 사진으로 본 뒤에 읽으면, 그 책을 읽는 즐거움은 더 한층 크고, 저자와
사이가 나빠진 뒤에 읽으면 또 딴 맛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이 마흔 살에
(역경)을 읽어도 어느 정도 풍미를 알 수는 있지만 쉰 살이 되어서 변화무상한 이
세상의 상태를 잘 바라본 뒤에 읽으면 또한 전에 못 느낀 색다른 감흥을 얻게 된다.
그라므로 양서는 모두 두 번 거듭 읽으면 얻는 바도 있고 즐거움도 또한 새로와진다.
  나는 학생 시대에 (Westward Ho!)나 (헨리 에드먼드) 읽어야 했었는데, 그 무렵
10대 소년이었던 나에게 (Westward Ho!)는 재미있게 읽혀졌으나 나중 책의 참된 맛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훗날 곰곰히 생각해 보니, 옛날에 읽은 것보다 훨씬 깊은
재미가 그 속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독서는 그런 까닭에 두 가지 면, 즉 저자와 독자로 이루어지는 행위이다. 진실로
얻게 되는 것은 독자의 통찰과 체험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과 저자의 통찰과 체험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논어)에 대하여 송의 유학자였던 정이천은 이렇게 말했다.
  (논어의 독자는 어디에나 있다. 읽어도 어떤 사람은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가 하면,
어떤 사람은 한 두 줄을 읽고도 자뭇 기뻐하고, 또한 어떤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기뻐서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한다)
  자기의 마음에 드는 작가를 찾아낸다는 것은 자신의 지성의 발전을 이루는데
있어서 가장 심각한 사건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경우에는 영혼의 친화라는 것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니까 고금의 작가들 가운데 그 영혼이 자기의 영혼과 비숫한
사람을 우리는 찾아내야 한다. 오직 그렇게 함으로써만 참으로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자기가 사숙할 만한 스승을 찾는 데는 남에게 기대지 않고 자신의 힘에
의지해야 한다. 누구에게 마음을 기울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한다. 이것은 아마도 자기 자신도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른바 첫눈에 반하는 것과
같은 것이어서, 어느 누구를 사랑하라고 남이 말할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니라 일종의
본능의 힘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발견이 이루어진 유명한 실례는 역사상에
많이 나타나 있다. 몇 백 년이나 떨어져 살고 있어도, 책을 통하여 학자의 사상과
감정이 서로 통하는 데가 있으면 자기의 모습을 찾아낸 것이나 다름이 없다.
  중국인의 표현을 빌면 이같이 서로 끌리는 영혼은 같은 하나의 영혼의 화신이다.
다시 태어난 것이다. 소동파는 장자나 도연명의 확신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원중랑은
소동파가 다시 태어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소동파는 처음으로 장자를 읽었을 때,
어렸을 때부터 장자와 아주 똑같은 것을 생각했고, 같은 의견을 갖고 있었던 것과
같이 생각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원중랑은 어느날 밤, 작은 시집을 뒤적이다가 아직 이름도 들어 보지 못한 자기와
같은 시대의 사람인 서문장을 발견했다. 그때 그는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친구를
불렀다. 친구가 부르는 바람에 잠에서 깨어나 시집을 읽기 시작한 그의 친구도 또한
감탄하는 소리를 질렀고, 두 사람 다 깊이 빠져 읽으면서 찬탄해 마지않아 하인이
어리둥절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을 정도였다고 한다. 조오지 엘리어트는 처음으로
루소를 읽었을 때의 감격을 감전에 비유하고 있다.
  니체가 쇼펜하우어를 읽었을 때도 그런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몹시 까다로운 스승이었고, 니체는 격정적인 성격을 지닌 제자였으므로 뒷날 제자가
스승을 배반하게 된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무엇이건 얻는 바가 있는 것은 이와 같이 마음을 기울 수 있는 작가를
발견하여 그의 저서를 읽는 그런 경우다. 첫눈에 반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그저
좋게만 보인다. 키고 알맞게 크고 얼굴이나 머리칼의 빛깔이며 목소리며 이야기하는
품이며 웃는 모양이며 뭐든지 다 좋게만 보인다. 학생이 선생에게 가르침을 받아야만
알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독서의 경우도 또한 그러하다. 문체이건 맛이건 견해건
생각하는 태도건 하나같이 비난할 데가 없다. 이렇게 독자는 한 줄 한 귀절을
탐독하기 시작한다. 본디 정신적인 친화력으로 맺어진 것이니까 모든 내용을
흡수하고 모든 것을 어렵지 않게 소화해 버린다. 작자가 주문을 외면 독자는 기꺼이
주문에 얽매이게 되고, 때에 따라서는 목소리도, 하는 짓도, 웃는 모양도,
이야기하는 태도까지도 작자와 똑같아지는 수가 있다. 그리하여 문학상의 애인에게
홀딱 빠져서 그 책에서 자기의 영혼을 살찌게 하는 자양물을 아낌없이 흡수해 버리고
만다.
  여러 해가 지나 이런 마음이 풀리고 다소 싫증을 느끼게 되면 또다시 새로운
애인을 구하게 된다. 서너 번 애인을 바꾸며 남김없이 자양분을 흡수해 버리면
이번에는 자기 자신이 저자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는 독자도 많다. 마치 바람만 실컷 피우고 다니며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모든 것을
바칠 수 없는 젊은 남녀와도 같은 것이다. 이같은 사람들은 어떤 책이든 모두 읽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얻지는 못한다.
  독서법을 이렇게 해석해 볼 때는 의무나 책무로서 책을 읽는다는 그런 생각은
단연코 배제해야 할 것이다. 중국에서는 흔히 (각고면려)라고 하여 학생들을
격려한다. 옛날에 이 각고면려를 실행한 유명한 학자가 있었는데, 밤에 책을 읽다가
잠이 오면 송곳으로 종아리를 찌르곤 했다고 한다. 또 어떤 학자는 밤중에 공부하는
동안에는 하녀를 곁에 세워 놓고 졸기 시작하면 깨워 일으키게 하였다고 한다. 정말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다. 책을 펼쳐 들고 옛 성현들이 자기에게 이야기를 걸어왔을
때도 잠이 오거든 곧 자리 속에 들어가 자는 게 좋다. 송곳으로 종아리를 찌르거나,
또 하녀가 흔들어 깨워 도대체 무슨 이로움이 있겠는가. 이같은 사람들은 책을 읽는
즐거움이라는 느낌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있다. 어쨌든 제법 사람이 된 선비라면
(자자면학)이니 (각고면려)니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절대로 모른다. 다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못 견디기 때문에 책을 사랑하여 읽을 뿐인 것이다.
  이 점을 알게 되면 독서할 때와 장소를 어떻게 골라야 하느냐 하는 문제의 해답도
또한 얻어지게 된다. 즉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아무 데서나 읽어도 좋다.
책을 읽는 즐거움을 알게 되면 학교에서 읽어도 좋고, 학교 밖에서 읽어도 좋고,
또는 학교 따위는 전혀 문제 삼지 않아도 좋다. 공부를 하고 싶다면 가장 좋은
학교는 어디에나 있다. 옛날의 중국번은 가족에게 보낸 편지 속에서 동생이 서울에
와서 좀더 좋은 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한데 대하여 이렇게 대답했다.
  (공부가 하고 싶다면 시골 어느 학교에서도 공부는 할 수가 있다. 사막에서도,
사람들이 오가는 거리에서도 할 수 있고, 나뭇군이나 목동이 되어서도 할 수가 있다.
공부할 뜻이 없다면 시골 학교에서도 못할 뿐만 아니라 조용한 시골집도 신선이 사는
섬도 공부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흔히 세상에는 무언가 책을 읽으려고 할 때 책상 앞에 앉아 거드름을 피우며
방안이 너무 춥다느니, 의자가 너무나 딱딱하다느니, 빛이 너무 강해서 책을 읽을 수
없다느니 하면서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또 그런가 하면, 모기가 너무 많다느니,
종이가 너무 반질거린다느니, 거리의 소음이 너무 시끄럽다느니 하면서 도무지 글을
쓸 수 없다고 불평을 하는 사람이 있다. 송나라의 위대한 유학자였던 구양수는
(삼상)을 글 쓰기에 가장 좋은 장소라고 했다. 삼상이란 침상, 마상, 측상(변소
마룻바닥 위)을 말한 것이었다. 청나라의 유명한 학자에 고천리라는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은 한 여름에 (벌거벗고 유서를 읽는) 버릇이 있었다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편 또 책을 읽고 싶은 생각이 나지 않을 때는 사철 어떠한 때에도 독서하지
않는다는 그런 태도도 충분히 수긍이 간다. 다시 말하면,

  봄철에 읽음은 봄의 뜻을 어기는 것이며,
  여름철은 잠자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고,
  겨울도 황망히 저물거든
  잠시 기다리리, 다시 오는 봄을.

  그렇다면 참된 독서법이란 무엇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기분이 내키면 책을 손에
들고 읽는다. 다만 그뿐인 것이다. 책읽기를 진심으로부터 즐기려면 어디까지나
마음이 내키는 대로 해야 한다. 표지가 부드러운 (이소)라든가 오마르
카이옌(페르시아의 시인, 1025 __ 1123)의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애인과 함께
강둑으로 그 책을 읽으러 간다. 그때 하늘에 아름다운 구름이 떠 있다면 구름을 읽고
책을 잊는 게 좋다. 그렇지 않으면 책과 구름을 함께 읽으라. 때로 한모금의 담배,
한잔의 차가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또는 흰 눈이 내리는 한밤중에 화롯가에
앉아 있을 때, 화로 위 차 주전자에서 끓는 소리가 들리고, 곁에는 한 갑의 담배가
있다. 그럴 때 철학, 경제학, 시가, 자서전 등 열 두 서너 권을 책상 위에 수북이
쌓아 놓고 한가로운 기분으로 그 가운데 몇 권을 펼쳐 보다가 재미있다고 생각되는
대목이 있으면 조용히 담배에 불을 붙여 문다. 김성탄은 눈 내리는 밤에 문을 닫아
걸고 금지된 책을 읽는 것을 인생에서 가장 큰 쾌락이라고 생각했다.
  책을 읽는 흐뭇한 마음은 진계유의 다음 한 마디에 유감 없이 잘 표현되어 있다.
  (옛사람들은 서화를 유권, 연첩이라고 일컬었다. 그러므로 책을 읽거나 화첩을
펼쳐볼 때의 가장 좋은 태도는 마음 느긋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하여 참고 견디는 마음을 기르는 것이다. 진유계는
또한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참된 대가는 사서를 읽을 때 잘못된 글자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마치 그것은
훌륭한 여행가가 등산할 때 길이 나쁜 것을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나, 눈 경치를
구경하려는 사람이 튼튼하지 못한 다리를 참고 걷는 것이나, 전원 생활을 원하는
사람이 야인을 피하지 않는 것이나, 꽃을 감상하는 사람이 탁주를 사양하지 않고
마시는 것과 같은 것이다)
  책을 읽는 기쁨을 가장 아름답게 쓴 글을 나는 중국에서 으뜸가는 규수 시인
이청조의 자서전 속에서 발견했다. 그녀의 남편이 국립 학교의 학생으로서 매달 받는
급료는 받는 날은 어김없이 헌책이나 탁본을 팔고 있는 사원으로 부부가 함께
찾아가곤 했다. 돌아오는 길에 얼마간의 과일을 사고, 집에 돌아오면 과일 껍질을
벗기면서 사온 탁본을 부부가 함께 조사하며, 차를 마시기도 하고 판본의 다르고
같은 점을 비교하기도 한다. (금석록발문)으로 알려져 있는 청조 여사의 자서전 한
귀절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나는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저녁 식사를 끝낸 뒤면 우리는 조용히 귀래당에
앉아서 차를 끓여 놓고 선반 위에 수북이 쌓여 있는 책들을 가리키면서, 어떤 구가
어떤 책 몇 권째 몇 면의 몇 줄째에 있는가를 알아 맞히곤 했다.
  알아맞히면 먼저 차를 마실 수 있는 것이다. 잘 맞히면 찻잔을 높이 쳐들고 큰
소리내어 웃는다. 너무 흥이 도도해져서 차가 옷 위에 쏟아져 마시지 못하게 되는
일도 여러 번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만족하며 살고 그리고 나이를
먹어 갔다. 생활은 가난하고 슬펐지만, 우리는 머리를 높이 쳐들고 의기양양한
마음으로 살았다. ... 그러는 동안 수집품이 점점 많아져서, 책이며 미술품이 책상
위에도 정자 위에도 또 침대 위에도 가득히 쌓이게 되었다. 우리들 부부는 그것을
눈과 마음으로 즐기면서, 앞으로 이렇게 하리라 저렇게 합시다 하고 곧잘 이야기를
주고 받곤 했다. 그것은 개나 말을 기르거나 음악을 즐기는 도락보다는 훨씬 즐거운
것이었다.



    4. 문장도에 대하여

  문장도는 문장을 짓는 법 그 자체, 즉 글을 쓰는 기법보다 매우 범위가 넓은
것이다. 실제에 있어 작가를 지망하는 초심자에 대해서는 우선 문장의 기법에
지나치게 구애되는 마음을 제거해 주는 것이 좋다. 즉 기법이니 하는 피상적인
문제에 사로잡히지 말고 참된 문예적 인격의 함양은 모든 글짓기의 기초로 하여 자기
정신의 깊은 곳까지 파내려 가도록 지도하는 것이 좋다. 참된 문예적 인격이
길러지고 올바르 기초가 마련되면 문예는 저절로 갖추어질 것이며, 기법의
끄트머리에 이르는 조그마한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고 마는 것이다. 이렇듯 소질 그
자체가 좋아지면 수사나 문법 같은 점에서 다소 서투르고 못한 점이 있더라도 그런
것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
  어느 출판사에서도 반드시 전문적인 교정원이라는 것이 있어서 콤마니
세미콜론이니 분할 부정법 같은 것에 주의하는 것이 그 사람들의 하는 일로 되어
있다. 그 반면 제아무리 문법이 바르고, 문학적 수식이 훌륭하다 하더라도 문예적인
인격의 수양을 게을리 해서는 작가가 될 수는 없다. 뷔풍(1707 __ 1788, 프랑스의
박물학자, 철학자)이 말한 것처럼 (문체는 사람이다) 문체는 방법도 아니고 체계도
아니고 상식도 또한 아니다. 그것은 독자에게 느껴지는 작가의 품성의 특질, 즉
깊이가 있는가 없는가, 통찰력이 있는가 없는가, 그밖의 기지, 유우머, 신랄한 풍자,
다정스러운 정미, 감성의 섬세함, 이해력의 섬세함, 부드러운 야유나 또는 냉소적인
상냥함, 고집스러움, 실용적인 상식, 그리고 사물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 그러한
여러 가지 것에서 독자가 받는 인상의 총화를 가리켜서 문체라고 한다.
(유우머러스한 기법)을 숙달케 하는 핸드북이니, (냉소적이면서 상냥해질 수 있는 세
시간 강좌)니, (실용적인 상식 15법칙)이니, (감정 섬세 11법칙)이니 하는 것은
정말로 쓸모없는 것이다.
  우리는 문장도의 표면에서부터 깊이 파내려 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 깊은 곳에
도달한 순간 문장도의 문제에는 문학, 사상, 사물의 통찰력, 사고법, 감정 그리고
읽고 쓰는 모든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자기 표현파의
부흥과 발랄하고도 개성적인 산문체의 발달에 뜻을 두고 중국에서 문학 운동에
참가했다. 그리고 문예 전반, 특히 문장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논하기 위해 차례로
많은 논문을 써야만 했다. 또 전체를 (담뱃재)에 씌어 있는 내용을 조금만 적어
보겠다.



    5. 기법과 인격에 대하여

  작문 교사가 문학을 이야기하는 것은 마치 목수가 마술을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비평가가 문장 기법에서 문예 작품을 분석하는 것은 기술자가 태산의 높이와
구조를 콤파스로 측정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정말로 우습기 짝없는 일이다.
  문장 기법이니 하는 따위의 것은 없다. 다소 그 가치가 인정되어 있는 모든 중국의
우수한 작가는 모두 다 그것을 부인하고 있다. 문장에 있어서의 문장 기법은 교회에
있어서의 교의의 관계와 같은 것이다. 하찮은 인간이 하찮은 문제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일 뿐이다.
  초심자는 언제나 기법론에 현혹된다... 소설, 희곡, 음악, 연극의 기법에. 문장
기법이 작가의 출현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그는 깨닫지 못한다. 미술, 문학에
있어서의 모든 성공의 기초에 인격이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꿈에도 모른다.



    6. 문학 감상에 대하여

  이제 가령 훌륭한 작가의 문장을 많이 읽었다고 하자. 첫째 작가의 묘사는 매우
발랄하며 생동감이 있고, 둘째 작가에게는 섬세하고 우아한 취향이 깊고, 세째
작가의 표현은 정묘하며, 네째 작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매력이 있다. 다섯째
작가의 작품은 고급 위스키의 맛과 같고, 여섯째 작가의 것은 향기 그윽한 술과
같다고 느꼈다고 하자. 이럴 때 그 사람의 감상력이 참된 것인 한, 이런 작가들을
좋아한다는 것을 공언하기를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광범위한 독서의 경력을
쌓음으로써만 비로소 정밀, 원숙, 강인, 힘, 광채, 신랄, 섬미, 매력이란 어떠한
것인가를 아는 적절한 경험의 기초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런 모든 풍미를 모조리
다 맛보게 되면 한 권의 핸드북을 읽지 않더라도 무엇이 좋은 문학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된다.
  문학 연구가의 첫째 법칙은 여러 가지 풍미를 맛본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풍미는
고요하고 쾌활하며 원숙된 맛이지만, 작가로서 이 경지에 도달하기란 무엇보다도
어렵다. 고요함과 무미하고 단조로움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의 차이 밖에 안된다.
사상에 깊이가 없고, 독창성이 결여된 작가는 평범한 문체로 하려다가 결국 무미하고
단조롭게 되어 버리고 만다. 신선한 물고기만이 자신의 몸에서 나오는 즙으로 요리될
수 있는 것이다. 신선하지 못한 물고기는 안초비 소오스니 후추니 겨자로 맛을 내지
않으면 안된다... 조미료가 많으면 많을수록 맛이 나는 것이다.
  뛰어난 작가는 분도 연지도 바르지 않고 직접 황제를 만나러 갈 수 있었던
양귀비의 동생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후궁의 다른 미인들에게는 모두 분과 연지가
있어야 한다. 감히 평범한 영문을 쓰려고 하는 작가가 매우 적은 것은 이 때문이다.



    7. 문체와 사상에 대하여

  문장이 좋고 나쁘고는 아름다움과 풍미가 있는가 없는가에 달려 있다. 무엇을
아름다움이라고 하는가. 그 법칙은 있을 수 없다. 문장의 아름다움은 파이프 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또는 산마루에서 솟아오르는 구름처럼 멀리 희미하게
나타난다. 가장 좋은 문체는 소동파의 그것처럼 (행운 유수(구름이 흐르듯 물이
흘러가듯))다.
  문체는 언어, 사상, 인격이 모두 합쳐진 합성물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언어만으로
되어 있는 문체라는 것을 가끔 보게 된다.
  뚜렷한 사상이 뚜렷하지 못한 말로 싸여 있는 예는 거의 없다. 뚜렷하지 못한
사상이 뚜렷하게 표현되어 있는 경우가 훨씬 많다. 그러한 문체는 분명히 뚜렷하지
못하다.
  뚜렷하지 못한 말로 표현된 뚜렷한 사상은 고집스러워 고쳐 줄 수 없는 독신자의
문체다. 아내에게 아무런 설명도 할 필요가 없다. 예를 들면 임마누엘 칸트와 같다.
사무엘 버틀러가지도 때로는 꽤 이상야릇한 말을 하고 있다.
  문체는 언제나 그 (문학의 연인)의 감화를 받는다. 사고법이나 표현법이 해를
거듭함에 따라 더욱 더 연인을 닮아간다. 이것이야말로 초심자가 문체를 수련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후년에 이르면 자기를 발견하는 것에 의하여 자기의 문체를
발견한다.
  독자가 저자를 싫어하면 그 저서에서 배우는 바는 아무것도 없다. 학교 선생님들은
이러한 일을 잊지 마시라!
  인간의 성질에는 천성적인 것도 있다. 문체도 역시 그와 마찬가지다. 다른 부분은
여러 가지가 섞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좋아하는 작가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혼이 있을 리 없다. 언제까지 지나도 무정란이다. 화분이 생기지 않는
암술이다. 좋아하는 작가 즉 문학상의 여인은 혼의 화분이다.
  좋아하는 작가는 누구에게나 있다. 없는 것은 발견하려고 노력하지 않기 때문이다.
  책은 인생의 그림이나 도회지의 사진과 같은 것이다. 뉴욕이나 파리의 사진은
보지만 진짜 뉴욕이나 파리를 보지 못한 독자가 있다. 똑똑한 사람은 책과 더불어
인생 그 자체를 읽는다. 우주는 한 권의 큰 책이다. 인생은 하나의 커다란 학교다.
  뛰어난 독자는 저자를 뒤집어 놓는다. 거지가 이를 찾느라고 저고리를 뒤집는
것처럼.
  어떠한 문제거나 그것을 연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선 그 문제에 대하여 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책부터 읽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 방법을 취하면 속아 넘어가지 않을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반대 입장의 책을 읽어 두면 찬성하는 입장의 책을 읽는
마음의 준비가 한층 잘 정돈되기 때문이다. 비평적인 정신을 기르는 방법은
이것이다.
  작가는 언제나 말로서의 말에는 본능적인 흥미를 갖는다. 모든 말에는 보통
사전에는 실려 있지 않는 생명과 인격이 담겨 있다. 다만 콘사이스 옥스퍼드 또는
포켓 옥스퍼드 사전만은 예외로 하고.
  좋은 사전은 P. O. D.(포켓 옥스퍼드 사전)처럼 언제라도 읽을 수 있는 사전이다.
  말의 광산에는 두 가지가 있다. ... 새 것과 헌 것과 헌 광산은 책 속에 있고, 새
광산은 일반 용어 속에 있다. 2류즘 되는 예술가는 한 광산을 파겠지만 1류 예술가에
한하여 새로운 광산에서 무엇인가를 파낼 수가 있다. 헌 광산의 광석은 벌써
정련되어 있지만 새로운 광산의 광석은 아직도 정련되어 있지 않다.
  왕충(기원 27 __ 100년)은 (전문가)와 (학자)를 구별하였고 또 (작가)와 (사상가)를
구별했다. 전문가는 그 지식의 범위가 넓어졌을 때 학자로 진급되고, 작가는 그
예지가 깊어졌을 때 사상가로 진급한다.
  그런데 (학자)의 저작은 다른 학자들로부터 빌어온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인용하는
원전이나 출전이 많을수록 (학자)답게 보인다. 사상가의 저작은 자신의 뱃속의
관념으로 되어 있다. 위대한 사상가일수록 자기의 장액에 의존한다.
  학자는 입으로 먹는 것을 다시 배앝아서 새끼를 먹여 기르는 갈가마귀와 같은
것이다. 사상가는 뽕잎이 아니라 비단을 배앝는 누에와 같은 것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기 전에는 관념을 임신하는 기간이라는 것이 있다. 출생하기 전에
태아가 자궁 내에서 임신 기간을 지나는 것처럼. 좋아하는 작가가 자기의 혼에 불을
켜고, 산 관념의 흐름을 만들어 낼 때 그것은 곧 (수태)다. 그 관념이 임신 기간을
지나기 전에 인쇄를 서두르는 것은 설사이지 진통은 아니다. 작가가 양심을 팔고,
신념에 위반되는 글을 쓴다면 그것은 인공 유산이며 태아는 틀림없이 사산되고 만다.
소나기처럼 격렬한 경련을 머리에 느끼고, 그 상념을 배앝아 버리기 전에는 차분하게
안정되지 못하며 종이 위에 쓰기 시작해야만 비로소 안심이 된다면 그것은 문예적
탄생이다. 따라서 작가는 어머니가 갓난아기에게 대하는 것과 같이 자기의 문예적
소산에 모성애를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은 작가 자신의 것일 때에 훌륭하게
생각되고, 여자는 남의 아내일 때가 아름답게 보이는 법이다.
  펜은 화공의 송곳처럼 쓰면 쓸수록 날카로와지고, 점점 수놓는 바늘처럼
예리해진다. 이에 반하여 인간의 사상은 더욱 더 원숙해 간다. 마치 낮은 산에서
높은 봉우리로 오르면서 바라보는 경치와도 같이.
  작가가 어떤 사람을 미워하고 그 사람에 대한 통렬한 논란을 퍼부을 생각으로
붓을 들려고 생각하고 있어도, 만일 아직 그 사람의 좋은 반면을 보고 있지 않는다면
다시 한 번 붓을 놓아야 한다. 그에게는 아직도 그 자격이 없기 때문이다.

  A. 자기 표현파
  16세기 끝 무렵 원 3형제(원이라 함은 명의 원송도, 원굉도, 원중도의 3형제)에
의해 창시된 이른바 (성령파),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공안파(공안은
3형제의 고향)는 자기 표현파다. 성은 (개성)을 의미하고, 영은 사람의 (혼) 또는
(생명력)을 의미한다.
  저술은 자기의 천성, 품격의 표현, 또는 그 생명력의 약동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천래의 신흥)이란 이 생명력의 흐름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로는 혈액 속의
호르몬의 과잉이 그 원인이 되고 있다.
  늙은 스승을 대하는 것, 다시 말해서 옛사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옛사람의
생명력의 흐름을 찬찬히 본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 생명력의 흐름이 메말라서
윤기가 없거나 그 정신이 비열하면 아무리 훌륭한 서예가나 문장가의 작품도, 정신
다시 말해서 생명력이 결핍되어 있는 것이다.
  이 (천래의 신흥)은 즐거운 꿈을 꾸면서 깊이 잠들고, 아침이 되어 저절로 잠이
깼을 때 솟아나오는 것이다. 아침 차를 한 잔 마시고 나서 신문을 읽는다. 마음을
산란하게 할 만한 기사는 하나도 없다.
  그래서 천천히 서재로 발걸음을 옮겨 밝은 창문 앞의 깨끗한 책상을 대하고
앉는다. 창밖에는 명쾌한 햇빛이 빛나고 바람은 고요하다. 이러한 한때 좋은 수필,
좋은 시, 좋은 편지,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고 또 좋은 평을 쓸 수 있다.
   (자아) 또는 (인격)이라고 불리어지는 것은 사지, 근육, 신경, 이성, 감정, 교양,
이해력, 경험, 편견 따위가 한묶음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저절로 갖추어지는 것도
있고, 교양에 의한 것도 있으며, 선천적인 것도 있고, 갈고 닦음에 의한 것도 있다.
사람의 성질은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벌써 결정되어 있다. 아니 태어나기 전에
결정되어 있다. 어떤 사람은 천성이 잔인하고 비열하며, 또 어떤 사람은 천성이
쾌활하고 솔직하며, 직정, 인협, 관후하며, 또 어떤 사람은 선천적으로 성격이
온화하고 나약하거나 근심꾸러기이다. 이러한 자질은 골수에까지 스며들어 있는
것이므로 아무리 훌륭한 교사, 아무리 현명한 어버이라 할지라도 인격의 형을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또 다른 자질은 태어난 뒤 교육과 경험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의 사상, 관념, 인상은 다종다양한 원천과 생애의 각 시기의 갖가지
영향에서 생기는 것인 한 관념, 편견, 사물의 관찰법, 사고법은 심한 혼란과 모순을
나타낸다. 어떤 사람은 개를 좋아하지만 고양이를 무서워 한다. 어떤 사람은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개를 무서워 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인격의 형을 연구하는 것은
모든 과학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것이다.
  자기 표현파는 본인에게 참된 사상과 감정, 즉 거짓 없는 사랑, 거짓 없는 미움,
거짓 없는 두려움, 거짓 없는 취미만을 문장에 표현하라고 요구한다. 좋은 것만을
내놓고 나쁜 것은 숨기는 따위의 잔꾀를 부리지 않고,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는 것도
두려워 하지 않고, 옛날의 성현이나 현대의 권위자의 설과 모순되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솔직하게 자기를 표현하려는 것이다.
  자기 표현파의 작가는 한 작품 가운데서 작가의 특징이 가장 잘 나타나 있는 향을
사랑하고 그 향 중에서 가장 특징 있는 문장을 사랑하며, 문장 중에서 가장 특징
있는 표현을 사랑한다. 하나의 장면, 감정, 사건을 묘사하는데 있어서도 자신이 본
그대로의 장면, 자신이 느낀 그대로의 감정, 자신이 해석한 그대로의 사건을
다루어야 한다. 이 법칙에 들어맞는 것은 문학이며 들어맞지 않는 것은 문학이
아니다.
  (홍루몽) 속에 나오는 소녀 임대옥은 (시인이 좋은 구를 얻었을 때는 운이
이제까지의 형에 맞거나 맞지 않거나 그런 것에 구애되어서는 안됩니다) 하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녀 또한 자기 표현파의 하나일까?
  자기 표현파는 거짓 없는 감정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자연 꾸밈이 많은 문체를
경멸한다. 따라서 문장의 순수하고 온화한 풍미를 귀하게 여긴다. 그리고
(사달이기(문장의 유일한 목적은 표현에 있다))라고 한 맹자의 금언을 언제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잊지 않는다.
  문장의 아름다움은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 파의 위험은 작가의 문체가
단조로와지는 것(원중랑이 그러하다), 관념이 이상한 것에 치우치는 것(김성탄이
그러하다), 또는 그 관념이 권위 있는 기성 관념과 몹시 동떨어져 있다는
것이다(이탁오가 그러하다). 자기 표현파가 매우 유가의 미움을 사게 된 까닭도 바로
이 점에 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 중국의 사상과 문학을 그 절대적 획일주의와
죽음에서 건져낸 것은 이러한 독창적인 작가들이었다. 이제부터 앞으로 수십 년
뒤에는 중국도 반드시 그들의 천하가 될 것이 틀림없다.
  중국의 정통파 문학은 분명히 성현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작가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주로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죽었다. 성령파
문학은 작가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성현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주로 자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살아 있다.
  이 파의 작가에게는 긍지와 독존의 기풍이 있다. 그러므로 자기 본래의 도를
떠나서 사람을 놀라게 하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된다. 공자, 맹자가 그들에게
동의하고, 그들의 양심까지도 승인하였다고 하면 굳이 자기의 도를 떠나서 성현에
반대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양심이 승인하지 않으면 공자, 맹자에게도
감히 도를 사양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황금의 유혹에도 동하지 않고, 추방의
위협에도 꿈쩍도 않을 사람들이다.
  진정한 문학은 우주와 인생에 대한 경이감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시력이 건전하고 또렷한 사람은 언제나 모두가 이 경이감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하게 보이기 위하여 진실을 일그러뜨릴 필요는 없다. 이 파의 작가의
관념, 사물의 관찰법이 언제나 새롭고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독자가 비뚤어진 시각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약점은 성령파 비평가가 사랑하는 점이다. 성령파 작가는 옛사람이나
현대인을 흉내내는 것, 문학의 기법 법칙에 다같이 반대하였다. 원 형제는 (입이나
손목은 가만히 내버려 두면 저절로 좋은 모양이 된다)는 것을 믿었고, (문학의 요는
진실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입 옹은 (문학의 요는 매력과 흥미)라고 믿고 있었다.
원매는 (문학에는 기법이 없다)라고 믿고 있었다. 송나라 첫무렵의 작가 황산곡은
(문장의 행과 형은 벌레가 파먹은 나무의 구멍처럼 전혀 우연히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B. 모든 것을 다 터놓은 문체에 대하여
  탁 터놓은 문체의 작가는 너그러운 기분으로 말을 한다. 그는 자기의 약점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놓는다. 그러므로 무장하고 있지 않다.
  작가와 독자와의 관계는 엄격한 교장과 학생과 같은 관계여서는 안된다. 모름지기
친한 친구끼리의 관계여야만 한다. 이래야 비로소 온정미가 생기게 된다.
  자기의 작품에서 (나)를 쓰기를 두려워 하는 사람은 단연코 좋은 작가는 될 수
없다.
  나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보다는 거짓말장이를 사랑한다.
  거짓말장이도 빈틈없고 조심성 있는 거짓말보다 경솔한 거짓말장이가 더 좋다. 그
경솔함은 그가 독자를 사랑하고 있는 증거다.
  나는 경솔한 바보를 신용하고 법률가를 의심한다.
  경솔한 바보는 국가의 가장 큰 외교관이다. 그는 민중의 마음을 잡는다.
  내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좋은 잡지는 한 주일 걸려 발행하는 잡지다. 2주간에
한 번 조그마한 방에 좋은 좌담가 한 무리를 모아 놓고 함께 이야기하게 한다.
독자에게는 그것을 옆에서 듣게 하고, 좌담회는 대개 두 시간 정도로 끝마치기로
한다. 그것은 마치 즐거운 야화에 열중하는 것과 같아서, 그것이 끝나면 독자는
잠자리에 든다. 이튿날 아침 잠을 깨어 어떤 사람은 은행원으로서, 어떤 사람은
회계원으로서, 어떤 사람은 학생에게 게시문을 내붙이는 교장으로서 각자의 일터로
나가는 것인데, 어젯밤의 환담의 향기는 아직도 뺨 근처에 떠돌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것이다.
  금테를 두른 거울이 있는 큰 방에서 호화로운 연회를 하는 요정도 있고, 또 몇몇
사람의 주연에 맞도록 꾸며진 술집도 있다. 두서 명의 친구들이 모여서 조촐한
주연을 베푸는 것으로 나의 소망은 충분히 족하다. 부귀와 권세 있는 집의 큰
주연에는 가고 싶지 않다. 그러나 조촐한 음식집에서 마시고 먹고 떠들고 상대편을
야유하고 술잔을 뒤집어 엎고 옷을 버리거나 하는 재미도 큰 연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알 수 없다. 그러니까 (아아, 그때 그토록 즐거운 일이 있었지) 하는
즐거운 추억도 없다.
  세상에는 부호의 정원이나 저택도 있고, 산속의 한 간짜리 오막살이도 있다.
산속의 오막살이라 해도 때로는 취미가 고상하고 아름다운 살림살이를 갖춘 집도
있기는 하지만 분위기 그 자체는 요란하게 채색한 집에 한 무리의 하인들이 주욱
늘어선 부잣집과는 전혀 다르다. 안에 들어가도 충성된 개가 짖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점잔을 빼는 집사나 문지기의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떠날 때도 문밖에 있는
한쌍의 (음란한 돌사자)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정경은 17세기의 한 작가에
의하여 역력히 묘사되어 있다.
  (주, 정, 장, 주의 모든 학자가 복희당에 자리를 함께 하여 머리 숙여 절을 나누고
있다. 그 자리에 난데없이 소동파와 동방삭이 신도 신지 않고 절반 벌거벗은 채로
뛰어 들어온다. 그리고는 손뼉을 치면서 농을 걸기 시작한다. 이러한 것이다. 옆에서
보는 사람은 아마도 어이가 없겠지만 이 두 고매한 선비의 마음과 마음은 서로 통해
있다!)

  C.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문학의 아름다움, 사물의 아름다움이라고 불리는 것은 변화와 움직임에 딸려 있는
수가 많다. 즉 생명에 기초를 두고 그 위에 서 있다. 생명있는 것에는 언제나 변화와
움직임이 있으며, 변화와 움직임이 있는 곳에는 저절로 아름다움이 갖추어진다.
산간의 절벽, 골짜기, 계류에는 운하 따위는 도저히 미치지 못할 멋대로이며 호탕한
아름다움이 있다. 더군다나 그것은 건축가의 계산을 기다리지 않고 이루어진 것이다.
그리고 보면 문학 문장에 일정한 법칙을 마련할 수 있겠는가. 별자리는 천문, 즉
하늘의 문학이다. 명산대강은 땅의 문학, 즉 대지의 문학이다. 바람이 불어 구름의
모양이 변하면 거기에 비단무늬가 생긴다. 서리가 내리고 나뭇잎이 떨어지면 거기에
소슬한 가을빛이 나타난다. 푸른 하늘의 궤도를 도는 별은 지상의 인간들이 자신들을
관상하고 있다는 것을 머릿속에 둔 일이 있을까. 더구나 큰개좌와 견우성은 가끔
가다 사람의 눈에 띄는 것이다. 지각은 신축이 무상하여 높은 산을 밀어 올리고 깊은
바다를 뚫는다. 그러나 지구는 인간에게 숭배하게 하려고 오악을 만든 것일까,
더구나 태산이나 화산이나 곤륜산은 웅혼한 리듬을 가지고 우뚝 솟아 있고, 옥녀나
선동 같은 묏부리는 우리를 둘러 싸고 장엄하게 솟아 있어, 인간의 눈을 즐겁게
해주려는 것 같다. 이러한 것은 거장인 창조주의 분방하고 자재로운 한 번의 솔질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산꼭대기에서 솟아올라 거세게 부는 산바람의 돌격을 만난 구름에게,
인간에게 보이려고 바지나 목도리에 마음을 쓸 겨를이 있겠는가. 더우기 구름은
스스로 형태를 갖추어 어떤 때는 고기 비늘이 되고, 어떤 때는 비단 무늬를
그려내고, 어떤 때는 쏜살같이 달리는 개 같고, 어떤 때는 포효하는 사자로 변하고,
어떤 때는 춤추는 불사조처럼 보이고, 어떤 때는 뛰어다니는 외뿔짐승의 모습으로
변한다. 정말로 시문의 신품을 연상케 한다. 춥고 더운 고난과 서리의 침해를 몸에
느끼고 호흡을 맞추어 정력을 보존하기에 급급하고 있는 가을 나무에게 옛길을
걸어가는 나그네의 눈을 즐겁게 해주려고 분과 연지로 치장할 겨를이 있겠는가.
더구나 나무들은 차갑고 해맑으며 적막감을 주며, 그 풍취는 왕유나 미불의 그림보다
훨씬 낫다.
  이렇듯 우주 사이의 산물에는 예술적인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마른 덩굴의
아름다움은 왕희지의 글씨보다 위대하다. 준엄하고 날카로운 절벽은 장맹룡의
묘비명보다 웅혼하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의 문, 즉 예술미는 그 천성에서 나오고,
그 천성을 다하는 자는 문, 즉 아름다운 옷을 입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문, 즉 선과 형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안에 있는 것이며, 결코 밖에서 온 것은
아니다. 말의 발굽은 빨리 달릴 수 있도록, 범의 발톱은 짐승을 덮쳐 누를 수
있도록, 학의 다리는 늪이나 연못을 건널 수 있도록, 곰의 발은 얼음 위를 걸을 수
있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말이나 범이나 학이나 곰은 형태나 균형이 잡혀 있는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을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생활의 기능을
다하고, 운동에 적합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 동물이 하려고 하는 모두다. 그러나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말의 발굽, 범의 발톱, 학의 다리, 곰의 발 등은 그 완전히
갖추어진 외형에도, 힘의 암시에도, 선의 섬세함과 강함에도, 선명한 윤곽에도, 또는
그 불끈 솟아오른 관절에도 훌륭한 아름다움이 있다. 또 코끼리의 발은 예서와 같고,
사자의 갈기는 비백과 같으며, 싸우는 뱀은 보기 좋게 구불구불 구부러진 초서를
쓰고, 날으는 용은 진서를 쓰고, 소의 다리는 팔분을 연상케 하고, 사슴은 소해를
닮은 데가 있다.
  이러한 동물의 아름다움은 그 자세와 움직임에서 생기고 자태는 몸의 기능의
결과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문장미의 비결이기도 하다. 운동의 힘, 즉 자세에
필요한 것은 문장에서도 억제해서는 안되고, 자세나 운동에 필요가 없는 것은 그만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시문의 걸작은 자연 그 자체의 운동과 같은 것이어서 모양이
없으면서 모양이 있고, 매력과 아름다움은 스스로 갖추어진다. 힘이라는 것은
동태미이지 균제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생명이 있고, 움직임이 있는 것에는 모두 이
힘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아름다움이 있고, 힘이 있고, 글이 있다. 즉 형과 선의
아름다움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