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my blog with Bloglovin FraisGout: 제2장 진정한 사색

제2장 진정한 사색

  1. 사상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본다

  여러 병의 의과대학생이 환자의 침대를 둘러싸고 서서, 긴장한 표정으로 환자를
지켜보고 있다. 이 환자는 기록에 남을지도 모를 매우 특이한 병으로 권위 있는
의학교수가 환자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고 있다. 교수의 온 신경은 지금 귀에
집중되어 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예민한 감수성을 그 얼굴에 떠올리면서, 교수는
귀를 기울이고 있다. 어떤 작은 소리라 할 지라도 놓칠 수가 없다. 이 명의에게
있어서는 흉막의 주름 하나라도 귀를 기울이고 듣고 있노라면 실제로 눈으로
보듯이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학생들은 굳게 믿고 있다.
  30분 동안의 침묵이 흐른 뒤에, 이 환자는 마치 수술대 위에서 수술이라도 끝난
것처럼 몸의 모든 기관의 내용이 샅샅이 밝혀진다. 이 의사의 놀라운 지성이 하나의
흉막을 통해서 놀라운 일을 수행해 냈던 것이다.
  당신은 세잔(1839-1906,프랑스의 이상파의 대표적 화가)의 자화상, 즉 사막에서 볼
수 있을 듯한 간단한 도구로 그린 놀라운 걸작을 알고 있는가? 깨끗하고, 그러면서도
차가운 강철과 같은 날카로운 그의 눈은 한번 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예술가는 가끔 이와 같은 눈, '현실'을 사랑하기보다는 사물의 본질에 똑바로
육박하도록 만들어진 눈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눈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 시대를 앞질러 내다보고, 사람들의 공포를 꿰뚫어 본다.
  러시아 혁명 직후인 1917년에, 파리의 살롱에서 여섯 사람이 모여서, 러시아 황제와
루이 16세, 러시아 왕비와 마리 앙투와네트, 케렌스키(11월 혁명의 임시정부의 수상이
며,
후에 실각하고는 망명했다)와 지롱드 당(프랑스 대혁명시대의 온건파)을 각각 비교해
보는, 당시에 유행하고 있던 시간 보내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즉 러시아의 장래를
프랑스 혁명의 역사에서 유추해서 끄집어내려고 했던 것이다.
  "자네는, 위기는 이미 사라졌다고 보는가? 그러나 저 병사 노동자평의회라는 것은
뭐지? 거기에서 뭐가 나타날지는 두고 보면 곧 알게 될 걸세" 하고 누군가가
말했다. 이것은 놀라운 직관으로서, 2,3주일 후에는 온통 사태가 뒤바뀌고 말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으로서 후일에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일도 가끔
있다.
  또 때로는 사상가들이 말솜씨가 없었다던가, 그의 사상을 일반인이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던가,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가 후세에 가서 비로소
그 사상가의 생각하는 바가 평가를 받고 널리 인정을 받게 되는 일이 있다.
  네덜란드에 망명했던 데카르트(1590-1650, 프랑스의 철학자)나 그 제자로서 렌즈를
가는 직공 노릇을 했던 스피노자(1632-1677, 네덜란드의 철학자)라든가 전형적인 시골
선생이었던 칸트(1724-1894, 독일의 철학자)-그들의 조촐하고 검소한 생활과 후세에
남긴 그들의 정신적인 유산 사이의 엄청난 차이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바가 있다.
  그런데 도대체 사상가를 특징 지우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우선 첫째로 비전이라
할 수 있다. 사상가란 보통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하

말의 참신함, 일종의 계시와도 같은 그들의 성격, 거기에 수반하는 매력, 이런
것들은 모두 그들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의 인습이나 풍조에 따라 서 틀에 박힌 형식을
되풀이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지만, 사상가는 정신적 자유를 충분히 발휘한다.
신성불가침이라고 할 '상식'이라고 불리는 것조차도, 그들은 맹목적으로 따르게 할 수

없다.
  16세기에, 태양이 지구 둘레를 돈다는 엄연한 사실, 즉 당시로서는 사실이었던 그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제 정신을 가진 사람으로서는 도저히 꿈도 꿀 수 없는
이론이었다. 그런데도 갈릴레이(1564-1642, 이탈리아의 물리학자, 천체망원경을
발명했다. 당시의 천동설에 대해서 지동설을 주장함)는 그건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지적 용기는 육체적 용기 이상으로 우리들을 경탄케 했다.
  이와 같이 자기의 힘으로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때로는 교만하게
보이기도 하고, 자만에 빠져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자기 자신에

불만을 느끼거나 지나친 자신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비굴해 하거나 하지 않고 모든
우상을 모조리 파괴하고 오직 일에만 전념하기 때문이다.
  또 그들은 가끔 독재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봄으로써,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다른 사람을 다루기 때문이
다.
그러나 그 본질에 있어서는 생각하는 인간은 뛰어난 교사인 셈이다.

  2. 어디에 평가의 기준을 두느냐?
  그러면 어떤 사상이 고귀하고 어떤 사상이 저열한가, 그 평가는 어떻게 해야 될까?
진정한 사상은 보통 일상생활 속에 뒤섞이고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인지를
알기가 매우 힘드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내성을 하면, 이 얼른 보기에 곤란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쉽게 알 수가 있다. 그 결과, 우선 이미지, 다음으로는 이들
이미지에 대응되는 기호, 마지막으로 지적 데이터를 잘 결합시키는 정신적
에너지가 인간의 사교를 평가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예를 들면-맛있는 음식물, 좋은 옷, 춤이나 여행이나 친구와 같은 이미지로 정신이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은 아름다운 경치라든가 건축물, 고아한 멋이나
골동품의 매력, 교회나 미술관, 위대한 예술적 생애의 회상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는 사람들과 비교한다면, 우리들이 말하는 사상과는 인연이 먼 것이라는 점을 뚜렷

알 수가 있다.
  예술가가 일반 사회인들보다 뛰어났다고 한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이미지가 다른
사람의 이미지보다 뛰어나 있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러스킨(1819-1900, 영국의 저술가, 미술평론가)이나 월리엄 모리스(1834-1809, 영국

시인 미술가)는 감각적으로 아름다움에 대한 이미지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향상, 행복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었기 대문에 우리들은
그들에게 경의를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시간이 있을 때에 우리들의 마음에 어떤 비전이 우러나오며,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를 들여다보면, 사고란 어떤 의미로는 매우 놀라운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3. 감동에는 차이가 없다.

  빼어난 사상가의 곁에서 잠시 귀를 기울여 볼 수 있는 기회를 다행히도 갖게
되었다고 하자. 이 때에 우리들의 마음은 어떤 반응을 나타내는가?
  우리들은 사상가의 '생각하는 기술'의 놀라움과 뛰어남에 우선 경탄하고 찬미해 마

않을 것이다. 그리고 찬미하면서 낙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또 부글부글 저항감을
불태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보통 사람 같으면,
  "나는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무미건조한 사람으로 보였음이 틀림없어. 부끄러운
이야기다. 그러나 할 수 없지. 나에게는 자신을 좀더 뛰어난 사람으로 만들어 줄 기회

없었기 않았는가?"
라고 하면서 애석해 하면서도 부끄럽게 생각할 것이다.
  또 콧대가 좀 센 사람들은 좀 다른 태도를 취할 것이다.
  "그 사람, 자기가 유명하다고 해서 그렇게 뽐낼 것까지는 없잖아. 나와 저 친구
차이는 단지 운이 좋았느냐 나빴느냐의 차이밖에 없잖은가"
  한층 단순한 사람들 같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 사람은 사물을 생각하는 방법과 요령을 잘 터득하고 있지. 그리 대단치도 않은
비결인 셈이지. 그 요령만 안다면 나들 뭐 그만큼 안될라고?"
라고 퍽 낙천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가장 단순하고 생각이
모자라는 사람들 같으면,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할까? 뛰어난 재능과 자기네들 사이에
가로놓여 있는 차이에 대해서 그렇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 그들은 오히려
친근한 감정을 가지고 이 사고의 명인들을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할 수가 있을까? 그들의 '우둔함'때문에 뭔가
착각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들에게도 그들대로의 '생각하는 기술'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둔한' 사람들은 생각하는 기술을 몸에 밸 정도로
익히고 있는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심사숙고한 끝에 말이 나오는 마음의
상태를 그들은 그들대로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는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체험'이
실마리가 되어서 그들은 사상가들에게 친근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물론 결여되어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언어이다. 또 때로는 자기
자신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조잡하고 거짓이 없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오묘한
오르간의 연주 소리나 '출발의 노래'의 멜로디를 들었을 때에는, 마음에 찡하고 울리

무엇을 느낄 수는 있을 것이다. 그 상태가 '종달새'에게서 시흥을 느끼게 되었을
때의 셸리(1792-1822, 영국의 시인)의 도취와는 비교가 안된다고 누가 감히 말할
수가 있겠는가? 감동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지적인 인상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신에게로부터 공평하게 받는 것이다.
시골 사람들이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산과 들, 그리고 논밭을 바라보는 눈에 담겨져
있는 애정과 감동의 깊이도 시인이나 화가의 감흥과 그 본질에 있어서는 전적으로
같은 것이다.
  우리들은 누구나 갚은 감동을 느껴본 경험들이 있다. 이와 같은 인상이 거친
일상생활 속에서 닳아 없어지지 않도록 소중히 지키려고 한다. 우리들이 이와 같은
비길 데 없는 소중한 인상을 간직하고 키우는 태도, 즉 회상 속에 창조적인 사고의
출발점이 있으며, 스프링의 튕기는 힘이 작용하는 것이다.

  4. 생각하기 쉬운 상황

  별로 의도한 것도 아닌데 문득 마음에 생기가 솟고 감수성이 맑아지는 일이 있다.
밤샘을 하면서 일을 할 때, 불면증에 걸렸을 때에 이상하게도 정신이 맑아진다고
생각되어질 때가 있을 것이다.
  이럴 때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어도 '생각'이 혼자서 앞질러 달려가곤 한다.
사색가나 예술가들은 이와 같은 순간을 의식적으로 만들어 내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방법을 택한다.
  #1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에너지가 심하게 소모되는 것을 알면서도 밤을 새운다.
  #2 식사하는 것마저 잊거나 시간을 늦춘다.
  #3 밤길을 혼자서 쏘다니거나 헤맨다(찰스 디킨즈).
  #4 조용한 여관이나 시골에 틀어박힌다.
  #5 종교가들처럼 때로는 은둔해 버린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사물을 잘 생각할 수 있는 상태란 쉽게 말한다면
  #1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는다.
  #2 마음 그 자체가 맑다.
  이 두 조건이 충족될 필요가 있다. 이 조건에 맞는 경우는-여기에 그 한 예를
들어보면-열 살 미만의 어린이의 경우이다. 이 나이 또래의 어린아이들은
시인이기도 하고 철학자이기도 하다. 이들은 놀라운 존재들이다. 어린이들은 아직은
어른들의 흉내를 내는 일에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들은 '고양이'처럼 스스로
만족하고 있으며, 자유를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대상'을 자기의 마음을 통해서
보는 매력에 취해 있는 존재들이다. 뛰어난 화가나 시인의 외모가 어린이와 같은
인상을 주는 것도 생각해 보면 바로 이런 공통된 점이 있기 때문이다.
  대학교수들이 사무실에서 안락하게 앉아서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방에 아홉
살 난 소녀가 들어와서 참견을 하기 시작했다.
  "아빠, 아름답다는 건 뭐야?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지, 응?"
  나는 그 소녀의 아버지에게서 이 이야기를 들었다. 이 소녀의 말에는 뭔가 숨기려고
하는 것이 전혀 없는 지성의 번득임을 볼 수가 있다.
  어린아이들의 '지성'은 이 내·외부의 모방에 작용하기 시작해서 그 번득임을
잃어버리고 만다.
  가정이나 학교의 교육이 모방이라는 형태의 '훈련'을 어린아이에게 강요하고 있다.
대다수의 어린아이들은 거기에 저항하지 못한다.
  블레이크(1757-1827, 영국의 시인, 화가)나 휘트먼(1819-1892, 미국의 시인)은 열

미만의 어린이만이 지닐 수 있는 순수한 마음을 어른이 되어서까지도 간직할 수
있었던 매우 특이한 예외적인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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