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고를 방해하는 것
사고를 방해하는 것으로서 제일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어리석음'이다. 말하자면 즉
선천적인 '무능력'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이러한 무능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무능력에 관한 문제는 이 책의 독자적인 여러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동시에 어떤 장애라도 시달리지 않는 천재에 관해서도, 실상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 책의 대상이 되지는 않는다.
모두 다 일고 있는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바보와 천재의
중간에 있는 우리들과 같은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향상을 바라는 한에 있어서는
이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이 바보도 천재도 아니라는 말은
바로 우리는 사고의 방해가 되는 여러 가지 장애물들을 저마다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의 장애물로 들 수 있는 것은 바로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강박관념 또는 열등감
#2 남의 흉내를 내는 것과 군거성, 정신적 기생을 만들어 내는 것.
#3 교육
정상적인 사고를 이따금 왜곡시키는 것으로는 정열을 빠뜨릴 수는 없지만, 이 책에
서
의도하는 것은 사고를 창출하는 방법이지, '사고의 안내'가 아니므로 정열의
작용에 대해서는 더 이상 검토하지 않기로 하겠다.
2. 처치 곤란한 기생물
"당신은 자기 마음속으로부터 강박관념 또는 열등감 따위를 자기 스스로 없앨 수
있습니까?"
사람에 따라서는 저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그것(강박관념이나 열등감) 때문에 밤낮으로 애를 먹고 있어요"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또 다른 사람은,
"뭔지 분명치는 않지만, 확실히 그 비슷한 것이 있는 것 같아요"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물론 누구에게나 이러한 강박관념이나 열등감은 당연히 있게 마련이다. 우리들이
사물을 생각하고, 따지고, 검토하고 하는 이상은 이와 같은 장해가 있음을 깨닫게 되
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열등감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예를 들어 이야기해 보자.
여기에 평범한 한 청년이 있는데 때마침 어떤 친구가 프랑스 사람과 유창하게
대화를 나누는 것을 목격하였다. 그 광경은 매우 '폼 좋게' 보였다.
청년은 크게 자극을 받게 되었다.
"응, 나도 하면 되겠지, 안 될 리가 없어"
집에 돌아와서 곧장 학생시절의 참고서를 끄집어내서 먼지를 털었다. 그러나 그의
학습은 낮에 잠깐 들었던 그 친구의 유창한 회화처럼 결코 수월하지는 않았다.
동사의 활용 변화를 외우려고 하니 거추장스럽고 짜증스러웠다. 전에도 동사변화를 못
외우고 내동댕이친 적이 있다.
길고 긴 기초문법을 통째로 외우려면 몹시 짜증스러운 노릇이다. 그래서 청년은
도중에서 점점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나는 기억력이 약할 뿐만 아니라 끈질긴 데도 없지. 프랑스어를
꼭
배울 필요가 정말로 있는 것일까? 더구나 해야 할 공부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지
않은가? 셰익스피어를 읽는 편이 낫겠어. 전에도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지금 읽고 있는
추리소설을 다 읽으면 하룻밤에 일막씩 읽어 가도록 하자"
이 청년이 그 다음에 어떤 행동을 취했는가 하는 점은 독자들의 상상에 맡기기로
하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청년이 어학 공부를 단념하게 되는 이유이다.
'나는 기억력이 약하다'
'나는 끈질긴 성질이 못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이런 식으로 규정해 버리고 만 것이다. 정말로 그럴까?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나 같으면 이 청년에게 당장에 반문해 보고 싶다.
"당신은 자기 스스로 기억력이 약하고, 게다가 끈기도 없다고 체념하고 말았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말하면 그는 얼굴이 발개지면서 고개를 숙이겠지. 아니면 벌컥 화를 낼지도
모를 일이지. 어쨌든 이 청년은 자기 본심을 털어놓은 셈이기는 하지만
자기 평가의 방법은 틀렸던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 청년은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열등감이란 처치가
곤란한 '기생물'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조그마한 틈이라도 있으면 이
열등감이란 괴물은 곧장 공격해 온다.
이 청년의 경우, 끈기가 없다고 중얼거린 그 순간에 영락없이 열등감에
속아넘어간 것이다.
적을 알되 자기를 알지 못하면 열등감에 이기지를 못한다. 잠시라도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이 생각해 보라.
우리들의 마음속에 여러 가지 강박관념이 집을 짓고 있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우리들이 가끔 '나는 그런 것은 잘못해'라고 간단히 단념해 버리는 것도, 대개는 이
강박관념 때문이다.
열등감이 나타나는 것도 앞의 예에서 보듯이,
#1 이미지에 직접 작용해 오는 경우가 아닐 때
#2 그 때의 사고의 대상이 되고 있던 것과는 전혀 무관한 이미지(목적이나 소원)를
끄집어내서, 그것으로 하여금 사고 속을 뚫고 들어오게 하는 일이 있다.
#3 의 경우에는, 열등감이 보다 교묘하게 작용하고 있다고 하겠다.
3. 연기는 지성의 적
우리들 주위에는 다른 사람의 성격을 흉내내면서 뽐내고 다니는 사람을 가끔 볼 수
있다.
정말 치사한 이야기이다. 그들은 노력하면 할수록 자기 성격의 특징을 잃어버리고
만다는 절망적인 사태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한 예를 여기서 두세 개 들어보기로 하자.
#1 에드워드 7세(1901-1910, 빅토리아 여왕의 장남) 또는 조지 5세(에드워드 7세의
둘째 아들)처럼 머리를 짧게 깎은 영국인
#2 유명인(예를 들면, 알프레드 D.뮈세, 1801-1857, 프랑스 시인)과 똑같은 옷차림
을
하고 파리의 거리를 활보하는 프랑스인
#3 역사상의 위대한 인물을 흉내내고 싶은 정치가.
이런 불성실성은 정치가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4 아직 외국어를 완전히 마스터하지 못한 주제에 몸짓이라든가 말투만은 그럴
듯하게 꾸며대는 사람, 이런 가짜는 그 나라 사람에게 걸리면 여지없이 탈이 벗겨지고
마는 경우가 있다. 가짜도 되지 못하고, 그렇다고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지도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이다.
#5 위선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 살롱에서 친구들과 이야기하고 있을 때,
어떤 책의 이름이 화제에 올랐다고 하자. 그럴 때, "나는 그 책은 읽지를 못했어"라고
솔직하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이 여기에 든 위선자 축에 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은 이따금 서점에서 책을 살 때에도 '누구나 사가지고 다니니까 나도
한 권!' 식으로 사게 되는 사람들이다. 이런 형편이므로 책을 사기는 해도, 아마도 그
냥
꽂아 두는 데 불과할 것이다.
#6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체하는 사람.
젊은 층에게 의외로 많은 것이 이런 거드름쟁이들이다.
미술전람회나 음악회에 다녀온 후 자기의 감상력을 자랑하는 것은 의외로 쉬운
것이다. 외국어나 전문 술어를 알지도 못하면서 빌어서 쓰는 재주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최저의 연기자들이다.
저 부인은 허영심이 많다거나, 그 사람은 연기가 서투르다거나, 하는 식으로 인물평
을
하는 일은 흔히 있다. 비평의 대상이 된 사람은 '연기'가 서투르다는 점 때문에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이런 일은 모두가 제 탓이니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렇다면 그들이 비웃고 있는 바로 그 사람은 과연 어떤가라는 의문이
솟아날 것이다.
그들은 지금 #1-#6까지에 열거한 연기를 하는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일까? 우리들 보통 사람들은 정직하게 털어놓고 이야기해 본다면, 결코 그렇게 큰
소리치거나 뽐낼 수가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사실보다는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을 돋보이게 하고 싶다는, 누구 나가 가지
고
있는 욕망이야말로 지성의 적이다.
완전히 자기의 것으로 소화시키지 못한 지식이나 정보를 마치 제 것처럼 남에게
이야기하는 것도 똑같은 위험을 범하고 있는 셈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제 자신의 것이
아닌 지식은 그 사람 자신의 사고를 구석으로 몰아넣고, 자기 스스로가 생각하는 힘을
악화시켜 버리기 때문이다.
내용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껍질만을 외우려고 하는 태도에도 열등감의 유혹이
깃들기 쉬운 것이다.
'외우려는' 생각만으로 연설을 듣고, 시를 읽고 하면, 확실히 빨리 외어지겠지요.
그러나 그 연설의 요지나 목적, 또는 그 시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
게
된다.
4. 선입의식은 판단을 흐리게 한다.
두 가지 생각이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생각하는 힘은 1+1=2와 같은 덧셈이 될까? 사실은 이와는 반대로 1-1=0과
같은 뺄셈이 되고 만다.
지금 여기에 '진짜' 명화가 있다고 하자. 그러나 미리 누구에게서
"저 그림은 모조품이야"라는 말을 듣게 되면 어떻게 될까? 당신은 그 그림 앞에 섰
을 때,
"이 그림은 훌륭한 작품이다"라고 생각하게 될까?
이 짓궂은 친구는 도중에 사실을 말해 주었다.
"사실은 이게 진짜야"라고.
그 순간, 명화가 갖는 박력이 당신이 이미지를 단번에 뒤바꾸어, "응, 그러면
그렇지. 과연 훌륭한 그림이야"라고 몇 초 전과는 180도로 다른 흥분을 불러일으킬 것
이다.
'선입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이미지를 흐리게 만드느냐를 설명해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이야기는 또 하나 다른 사실을 밝혀 주고 있다. 즉 이 남자가 자기의 눈을 전혀
신뢰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폭로한 셈이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로 삼고 싶은 것은, 그에게 그림을 '감상하는 능력'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별문제로 하고라도 열등감은 이와 같은 자그마한 암시가 있기만 해도 이미
우리들의 사고를 방해한다는 사실이다.
5. 사고는 쓴다고 닳는 것이 아니다.
아직 그럴 나이가 되지도 않았는데 아주 지치고 맥이 빠져 있는 사람이 있다. 특히
인텔리들에게 많은 타입이다. 그들이 그렇게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들은 사고하는 것의 효과를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사고하는 것을
아끼고 있는 것이다.
'사고'는 쓴다고 결코 닳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을 뿐더러 반대로 쓰지 않고
놓아두면 퇴화해 버리는 것이다.
시끈가오리(우리 나라 근해에도 있는 어류로서 길이는 40cm 정도이고 회갈색.
30-40볼트의 한 쌍의 발전 기관이 있어 몸에 전기를 통하게 하여 적을 공격하고 자기
를
방어한다)의 흉내를 내어서는 안된다. 소모하는 것을 두려워해서 방전을
주저하거나 하면, 제대로의 일은 할 수가 없다.
그러나 '사고의 방전'이 신경의 소모를 가져온다는 환상은 뿌리가 몹시 깊어서 가끔
'사고의 전문가'들까지도 같은 생각에 사로잡히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문학가 중에는 취미 삼아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많은 것 같지만, 그들 작가는
미술가들이 따르지 못할 자유분방하고 시원스러운 그림을 그린다.
반대로 직업적인 화가들이 쓴 문장도 가끔 같은 경향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그들의 활달한 문체와 재치 있는 문장은 도리어 문학가들이 부러워할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은 예에서도 뚜렷이 알 수 있듯이 예술가들은 일을 하고 있을 때에도
끊임없이 자꾸 떠오르는 '환영'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일이 많다. 이러한 강박관념
은
특히 그들이 '내 자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내보이는 것은 참을 수가 없다' 라고 생각했
을
때 더욱 강화되는 것 같다.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이유를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작가들일
것이다. 그래도 "알고 있어도 그렇게 하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다"고 그들은
털어놓는다. 떼느(1828-1893, 프랑스의 철학자, 역사가)와 같은 사람도 환영에 사로
잡혔던 체험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나는 여전히 쓸데없이 '세계를 그려내는 방법'을
계속 추구했다. 이러한 욕망 때문에 나는 무척이나 고민했다"고 말하고 있다.
칼라일(1795-1881, 영국의 평론가, 사상가)의 경우는 언제나,
"너는 언제나 사물의 한 면밖에 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라고 속삭이는 환상과 필사적인 싸움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고 한다.
6. 자기 자신의 그림자에 겁을 먹지 말라
작가들은 평론가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들은 평론가들이 어떤 식으로 비평을
할 것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평론가의 공격을 받으면 펜이라는 무기를
휘둘러서 반격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상상상의 독자'라는 그림자이다. 자신의
상상력이 만들어 낸 '수퍼 맨'의 그림자에 겁을 집어먹는다는 것은 기묘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들로서는 이것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가 없는 것이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과거에 몇 번씩이나 이야기된 적이 있고 또 논의가
된 적이 있는 문제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같은 것을 되풀이해 보았자 아무 소용없는
게 아닐까?'
이러한 생각에 대해서 당신 같으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단순한 사람일수록 도리어 명쾌한 해답을 할지도 모른다.
#1 정당한 것은 언제, 어느 때나 정당한 것이다.
#2 정당한 이론이라면 몇 번이고 되풀이하더라도 상관이 없지 않느냐?
이것만으로도 만족할 것이다.
그런데 '생각이 깊은 사람'일수록 이와 같이 명쾌하게는 안된다. 사실 수많은
재주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을 단념하고 말았던 것이다.
"같은 말을 되풀이해 보았자 쓸데없는 노릇이야"
이렇게 귓가에 속삭이는 악마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강박관념'이다.
주베르(1754-1824, 프랑스의 도덕가)나 아미엘(1831-1881, 스위스의 작가)도 이러한
환영의 유혹을 간신히 떨쳐 버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쓴 글을 발표하
는
것을 삼갔던 것이다. 그들은 전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글을 썼다. 또한 되도록
공공의 문제에는 신중한 태도를 취했다.
그러나 그 박력의 힘참, 영향력의 크기를 생각할 때, 우리들은 그들이 좀더 주위의
눈치를 보지 않고 썼었으면 더욱 좋았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이
다.
재능을 좀먹는 환영은 여러 가지 모습의 수단 방법을 써서 공격해 온다. 실례를
일일이 들고 있다가는 끝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쥬르 르메트르(1855-1914, 프랑스의 작가)와 같이 의식적으로, 또 자유로이 사물을
볼
수가 있었던 사람조차도
"과거를 재현하려는 노력 자체가 강박관념이 될 수가 있다"
라고 쓰고 있다.
오후 한때 양지바른 곳에서 한가롭게 쉬면서 흰 포도주로 목을 축이는
제본공들에게도 강박관념의 씨가 있을 것이다. 아나톨 프랑스(1844-1924, 프랑스의
작가)의 "신들은 목마르다"에 등장하는 혁명적인 직업인의 이미지가 이 제본공들은
위협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7. 글쓰는 것이 왜 고통스러운가?
'쓰는 것'은 창조적인 사고 방법의 가장 유력한 수단이다.
나도 여러분에게 꼭 쓰도록 권유하고 싶다. 그러나, 쓰는 행위 자체가 어쨌든 환상
을
만들기 쉽다는 점은 알아야 된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바꾸어 말하려고 한다.
"쓰는 일에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쓰지 말 것이다"
라고 말이다.
자기 표현은 그것 자체가 가쁨이고 구원이다. 그러나 현실은 직업적인 저술가를
포함해서 쓰는 것을 괴롭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볼 수가 있다. 왜 그렇게 되는
것일까?
그 이유로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1 사용되어지는 언어의 파악이 불완전하다.
#2 다루는 주제에 대한 진정한 흥미가 결여되어 있다.
#3 이미 쓰기를 마친 부분의 이미지가 자주 걸리게 된다. 등을 들 수가 있다. 물론
이밖에도 다른 원인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은 쓰는 것을 고통스럽게 여기는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일까?
학교 시절에 몸에 붙었던 '환상'이 아직도 남아 있지는 않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작문을 잘 지었던 사람도-괴롭게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더욱이 주베르가 말했듯이, '마음속의 생각이 정리가 되면, 즉시 써 보는'
습관을 꼭 우리들의 것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되겠다.
말하는 것은 즐거우나 쓰는 것은 잘 안된다고 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은 것 같다.
세상에는 실제로 말재주가 뛰어나면서도 글을 쓰라고 하면 잘 안되는 사람도 가끔 볼
수가 있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우스운 이야기이다. 이런 절름발이가 어디서 왜 생겨나는
것일까? 여기에도 커다란 수수께끼가 있다.
다분히 거기에도 열등감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1 나는 예전부터 글짓기는 매우 서툴렀다.
#2 화술의 기교를 그대로 문장 속으로 끌고 갈 수는 없다.
#3 쓴 것은 꼭 남이 보게 마련이다.
이와 같은 강박관념에 일시적으로나마 걸려드니, 꼼짝 못하고 마는 것이 아닐까?
이와 같은 사람은 흔히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형용사를 세 개나 네 개씩 쓰고
싶어한다. 그러다가 드디어는 아무런 소용도 없이 무위로 끝나 버리고 마는 것이다.
자,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예술가들까지도 '나의 작품은
고전적인 스타일에 비한다면 결정적으로 뒤떨어진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의
포로가 되는 일이 있다.
여기에 괴테(1794-1832, 독일의 사상가)의 잠언이 있다.
"자기 자신의 시대를 진정으로 산 사람은 어느 시대에도 산 것이 된다"
이 말에 용기를 얻어서 우리는 앞으로 계속 나아간다. 우리들의 마음은 언제나
'눈'과 같은 것이었으면 한다. 우리는 눈처럼 단순해야 한다. 마치 눈이 여러 개 있으
면
판단에 혼란이 오듯이 말이다.
비전 내지 이미지가 여러 개로 나누어져 있으면 과연 어떤 결과가 올까? 이 점에
대해서는 앞에서 쭉 검토해 온 바가 있다.
참고를 위해서 열등감에 져 버린 사람들의 증상을 적어 보자.
#1 겁쟁이고, 조그만 일에도 안절부절하는 사람.
#2 사람을 지도하기보다는 지도를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
#3 자기가 만들어 내는 인상을 끊임없이 불안해한다. 자기의 약점에서 오는
'과민성' 때문에 고민한다.
#4 정신의 기생물에 대한 저항력이 약하다. 강박관념이나 열등감은 우리들의 의식
속
깊숙이 숨어들어 있어서 자각되어지지 않고 있는 경우가 많다.
우리들의 '잠재의식' 속에서 이와 같은 콤플렉스를 끄집어내어, 그 정체를 밝힌 것
을
프로이트(1859-1939,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나 아들러(1879-1967,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의 공적이다.
그들은 동시에 강박관념이나 열등감이 불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다. 우리들도 '열등감을 지배할 수 있다'라는 신념을 가지고 싸워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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