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my blog with Bloglovin FraisGout: 제4장 흉내내기와 사교성 사고를 방해하는 것(II)

제4장 흉내내기와 사교성 사고를 방해하는 것(II)

  1. 흉내내기와 사교성

  우리들의 의식의 안쪽을 만일 들여다볼 수가 있다고 한다면, 아마 놀라지 않고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거기에는 가지각색의 해로운 벌레들이 우글거리고 있기 때문이
다.
이들 기생충은 어느 종류를 집어내 보아도 우리들의 사고를 방해하는
백해무익한 것들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당신의 의식 속에 집을 짓고 있는
기생충을 지금 곧 없애 버리자. 그렇지 않으면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다.
  이 '벌레'의 생태를 조사하려면 신중하고도 세심하게 하지 않으면 안된다. 벌레란
때로는 당신 자신의 모습을 하고 나타날 지도 모른다. 어떤 벌레가 있는지를 알아보
자.

  2. 백해무익한 것

  가) 남의 흉내내기
  남의 흉내를 내는 것은 매우 위험한 벌레이다.
  이 '남의 흉내를 낸다'고 하는 것은, '성질' 또는 '천성'이 아니다. 성질과 같이
보일지는 모르지만 벌레임에는 틀림없다. 성질은 고치기가 몹시 어렵지만 벌레 같으면
떼어버릴 수가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우리들의 마음속에 사람 흉내내기가 자리잡게 되었을까? 우선
어린아이 때의 이미지가 어떻게 해서 아이들의 마음속에 자리잡는가를 보자. 그것은
마치 대도시의 새벽녘의 동틀 무렵에 비유할 수가 있을 것 같다.
  처음에는 그 맑디맑은 공기와 상쾌한 고요 속에 싸인 여명의 한때를 생각해 보자.
뭐든지 방금 '태어난 듯이' 보이는 신선함과 소란과 소용돌이, 따분한 '일상생활'이
시작된다.
  어릴 때의 이미지는 이와 같은 대도시의 낮처럼 잡다한 것의 혼합물이 없기 때문에
'첫인상'이란 것이 강하게 또 선명하게 어린아이들을 사로잡는다. 매개물이라고 하는
장애물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지 않고도 지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의 부모들은 어린이들의 관찰의 예리함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어린아이들이 '흉내내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열 살 경부터이다.
이 변화는,
  #1 어른 같은 '말씨나 태도'
  #2 틀에 박힌 발음이나 말투
  #3 짐짓 무관심한 체하는 것
  #4 거짓말에 대한 관심
과 같은 형태를 취하면서, 대체로 갑자기 나타나게 된다. 소녀의 경우는, 이른바
'조숙'한 듯한 포즈의 대한 관심이 깊어지는 시기이다.
  요컨대 어린아이들은 자연스러워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소년들은 그들대로 어른 티

내려고 노력한다. '어른에 대한 동경'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에 비례해서 '티없이 맑다'든지 '귀엽다'든지 하는 성질은 두드러지게 줄어든다.
영혼의 순진함, 때묻지 않음이 상실되어지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어린아이들의
'흉내내기'의 표본은 어른들이다. 이렇게 해서 기생하기 시작한 '흉내내기 벌레'는
'숙주'의 성장에 따라 한층 더 제멋대로 날뛰게 된다.
  처음으로 바다를 보고도 놀라지를 않았다고 하는 따위의 놀랄 만한 무신경이 되는
것도 대체로 12, 13살쯤 되어서이다. 이미지를 생생하게 파악하는 힘이 시들기 시작한
것이다. 감수성이 약해지면, 자연히 행동도 '될 대로 되라'는 수동형이 되고 만다.
  그는 다분히 어려 사람들의 생활 방식이 될 수 있는 대로 비슷한 생활 방식을
선택하게 되겠지요. 남의 것에서 '빌어 온' 사상, 태도나 언어 속에 숨겨져 있는 '안
일'
속에 평생을 바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본다면, 저 '남의 흉내내는 벌레'를 물리치는 방법을 어느 정도는 알 수가
있다. 어떤 방법이 시도되고 있을까?
  우선 교육의 감화력을 들 수가 있다. 어린아이들은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그러

더욱 중요한 것은 어린아이들에게 자기 자신을 교육할 기회를 주는 일이다.
  미국의 부모들은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될 수 있는 대로 속박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학교도 또한 될 수 있는 대로 이 부모의 의견을 존중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듯하다.
얼른 보기에도 그럴듯한 이야기 같은데, 나에게 말하게 한다면, 이것은 쓸데없는
노릇이라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어린아이 자신의 맹종이라는 습관에 강하게 묶여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는-다른 역사가 오랜 여러 나라도 같지만-흉내를 내거나 얼마간의
불성실성이 오히려 권장되고 있는 터이다.
  "아빠를 본받아야 된다"
  "애야, 넌 자기 생각만을 자꾸 고집하면 못써요..."
라고 언제나 이런 식인 것이다.
  자기 생각을 말하는 대신에 흉내를 낼 '본'이 있어야 한다. 이럴 때, 꼭 들고
나오는 것은 사람 좋은 필랑뜨(몰리에르의 극 "사람 싫어하기"의 주인공)이다. '내'가
강한 아르세스뜨(같은 작품에 나오는 사람 싫어하기의 전형)는 물론 낙제이다. 과연
필랑뜨는 바보는 아니다. 그러나 현실을 보다 깊이 통찰하고 있는 것은 아르세스뜨
쪽이다.
  이렇게 벌레에서 기생 당하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딱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 사교성
  '사교하기 좋아한다'는 것은 끼리끼리 모이려고 하는 인간의 하나의 약점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것도 모방성의 일종이다. '군거성'은 '남의 흉내내기'의
혈통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사람에게는 누구 나가 '사람에게 의존하는' 기분이 있고, 이 경향은 그냥 내버려두

제멋대로 비대해지기 쉽다.
  특히 미국인들은 이 경향이 두드러진다.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에 당면했던 저 고독한
환경이 도리어 박차를 가했다고나 할까? 어찌되었건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사교적인 국민이다. 두 사람만 모이면 싫증나는 줄 모르고 지껄여 대는 것이
미국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든 기회를 이용한다. 구실이 없더라도-아니 그것을 어떻게 해서라고
감쪽같이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그들의 주특기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과
만나서 담소하는 기회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저 시작에 불과하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 '친해진다'는
출발점에 던져진 물 한 방울은 같은 것 끼리를 모아서 '친구'가 되고 다시 커다란
집단으로 되고... 이렇게 물의 파문이 퍼져 가듯이 커 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그들 내지 집단은,
  #1 공통된 취미를 기른다.
  #2 공통된 이익을 가진다.
  #3 유연성(유사성과 비슷하나 인연도 포함됨)을 발전시키고 확대한다.
  #4 통일된 슬로건을 내걸고 대대적인 운동을 펼친다.
  와 같은 순서를 좇아서 순식간에 한 개의 거대한 세력이 되어 버리곤 한다. 소수의
의견은 어떻게 다루어지는 것일까? 무시되어지는 것이면 행복한 편이다. 나쁜 경우에

발길로 채이고 만다.
  나의 조국(프랑스)에서 미국에 이주한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흑인에 대해서 거의
비슷한 '편견'을 품고 있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주하기 전에는 그런 편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

그들은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위장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미국에 이주해 온 이후로는 집단의 압도적인 감화력이 극히 자연스럽게 이주민들의
마음을 바꾸어 버렸다고 할 수가 있겠다.
  그들도 '집단'의 한 사람이 되어 버린 셈이다. 그래서 극히 자연스럽게, 다시 말하

자발적으로 그룹의 회원과 같은 이미지를 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발성'은
겉으로만 체하는 데 지나지 않는다. 사실은 '다른 사람에게 맡겨 버리거나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안이한 태도 속에 안주하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집단에 몸을 맡겼을 때에는 사람들은 마음속 깊은 데서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진다.
그 이유는 자기 자신이 열심히 생각하지 않아도, 집단 전체로서의 사상이 만들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 좋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으면서도 마치 자기도 뭔가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위장하기 쉽다는 점이다.
  이 군거성에 대립하는 것으로서 개인주의란 것이 있다. 개인주의는 그
정도가 지나치면 민주주의의 통일성을 위협하기 쉽다고들 흔히 말한다. 그러나 진실된
개인주의는 뭐니뭐니해도 민주제도의 가장 기본적인 기초가 되는 것이다.
  '집단'의 마력에 휘말려 들어가서 결국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힘으로 생각하는
권리를 포기해 버리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우리들은 스스로 경계했으면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군거'를 원하는 우리들의 마음의 약함에 주의를 주는 한 방법으로
'시간 분할의 관념'에 언급하고 싶은 것이다.
  도대체 시간이란 구분되어 있다는 사실에 의심의 눈을 가지고 바라본 사람이
있을까? 달력이나 시계의 효용은 여기서 새삼스럽게 다시 고쳐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간분할이라는 편리한 것이 있음으로 해서 우리들의 사회생활이 정립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관점을 바꾸면, 우리들은 시간의 노예라는 관심도 또 성립될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은 시간에 매이게 되는 '집단'이라는 것도 하나의 진리인 것이다.
  모파상(1850-1893, 프랑스의 작가)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매초마다 우리들의 생명은 갉아 먹히고 있다. 해마다 또 생일이 바위처럼
낭떠러지에서 떨어지고 있고...'
  오스카 와일드(1856-1900, 영국의 극작가)에 의하면, '늙은이의 비극은 자기만은 아

젊다고 느끼고 있는 데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만들어진 관념=허구라는 공식을 털어 버리려면, 천재에 가까운 노력이 필요하다.
개인 쪽에서 하는 노력은 자칫하면 중단되기 쉬우나 허구는 끊임없이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부터 눈과 귀를 통해서 계속해서 들어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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