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계몽주의 정신을 이어받은 헤겔은 인간정신의 본성이 <자유>라는 명제로부터 진보사상을 이끌어내어, 그 이후 사상, 특히 마르크스의 사상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역사철학강의>에서 헤겔은 인간 개개인의 생각이 발전하는 것처럼, 인간정신의 구체적인 구현인 <역사>도 자유를
실천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난해한 독일 관념론의 완성자
<<나를 이해하는 자는 단 한 사람밖에 없다. 그러나 그 한 사람까지도 나를 정말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다>>고 헤겔 자신이 탄식할 만큼,
그의 철학은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칸트가 46세로 대학교수가 되던 해에 헤겔은 독일의 슈투트가르트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신앙심이 돈독했던 어머니로부터 정신적
감화 속에 라틴 어를 배우며 자랐다. 그러나 13세 된 헤겔을 남겨두고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5살 때 그곳의 라틴 어 학교에 입학하여, 고전교육을 받았고, 2년 후 김나지움으로 전학했다. 성적은 언제나 수석이었고, 특히 그리스의
비극작품, 키케로의 철학, 셰익스피어의 작품 등 고전을 탐독했다. 그가 고전을 좋아하게 된 것은 레플러 선생님의 감명 깊은 고전강의
때문이었으며, 이 두 사람은 사제지간에 깊은 신뢰를 쌓았다. 그러나 선생님은 얼마 후 돌아가셨다. 이때 어린 헤겔의 심정은 그의 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18세에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튀빙겐 대학 신학과에 입학하여, 입학동기인 휠덜린과 5년 후배인 셸링과 사귀면서 그리스 고전 작품 등을
읽었다.
1789년(19세)은 헤겔에 있어 충격적인 해였다. 프랑스 혁명의 와중에서 그는 다른 친구들과 환호했으며, <자유의 나무>를 심고 <루소 만세>
<자유 만세>를 외혔다. 23세에 신학과를 졸업했는데 이 당시 졸업증명서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재능있는 인격자로서 신학과 문헌학에는
조예가 있으나 철학적 능력은 없다>>고 적혀 있었다 한다.
그러나 그는 목사보다는 철학자가 되기 위해 칸트나 피히테 등의 선배들처럼 6년간의 가정교사 생활을 하면서 독서와 사색의 시간을 가졌다.
가정교사 생활은 보수는 적었으나, 비교적 자유로운 연구시간을 확보할 수 있어, 당시의 교수 지망생들에게는 일반적인 경력이었다. 그의 이
생활을 마감한 것은 부친의 죽음으로 막대한 유산을 상속한 후였다.
그후 당시 독일철학의 중심지인 예나로 가서, 셸링의 추천으로 예나 대학의 강사가 되고, 4년 후에는 괴테의 추천으로 원외교수로 승진한다.
이때 문교부장관이던 괴테는 <<살아가기에 지극히 적은 수입이지만, 참고 노력하면 좋은 미래가 열릴 것>>이라는 위로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1806년(36세)에는 예나가 나폴레옹 군에 점령되자, 말을 타고 지나가는 나폴레옹을 보고 <<말을 타고 있는 정신세계를 보라>>고 외쳤다.
그의 대표작이자 가장 난해하다는 <정신현상학>은 이런 빈곤과 정치적 혼란 속에서 서둘러 마무리되었다. 이 책은 인간정신이 어떻게 단순한
의식에서 자기의식이성5,23^정신종교를 거쳐 절대지로 상승하는가를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몇 년의 강사생활로 유산마저 탕진한 그는, 극도의 경제적 어려움에 시
달려 출판사로부터 선불을 받아쓸 정도였다. 경제적 안정이 필요했던 헤겔은 신문 편집인으로 일하다가, 김나지움의 교장으로 취임했다.
다소 격이 떨어지긴 했지만 자유로운 연구와 강의가 가능했다. 1811년(41세)에 21살 연하인 마리와 결혼하여 피히테, 셸링 등 몇 안되는
결혼한 철학자의 대열에 합류했다. 두 사람의 결혼은 그가 기대했던 대로 행복했다.
1816년에 완간된 <논리학>으로 몇몇 대학으로부터 교수 요청이 있자 그해에 하이델베르크 대학의 철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이후 2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끝에 <철학강요>를 써서 당대 철학계의 1인자가 된다.
1918년 베를린 대학측은 당시 감정으로 치우치고 있던 학생들의 애국운동을 학문연구의 방향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헤겔을 초청하자, 그는
쾌히 수락했다.
베를린 대학에서의 13년간은 그의 생애에서 가장 화려한 시기여서 수강생 중에는 장군들도 끼어 있을 만큼 영향력을 가졌다. 그의 제자들이
각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기 시작하자 헤겔은 이전에 칸트도 누리지 못했던 거대한 학파를 형성하게 된다. <<철학은 독일에서, 독일 철학은
베를린 대학에서, 베를린 대학의 철학은 헤겔에서>>라는 말이 유행한 것도 이 당시였다.
만년에 그는 대학총장을 지내게 되고 그의 철학은 프로이센 정부로부터 국가공인 철학으로 인정받게 되는 등 학문적 명예와 경제적 풍요를
누렸다. 그러다가 콜레라에 감염되어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그의 희망대로 베를린의 피히테 곁에 묻혔다.
헤겔의 사상
칸트의 뒤를 이은 피히테, 셸링, 헤겔 등 독일의 관념론자들 중에서 최고봉은 헤겔이다. 상당기간 동안 베를린 대학의 철학교수였던 그는
많은 추종자들을 얻어 그후 유럽의 지성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변증법
헤겔 철학의 핵심은 합목적적 진화의 개념이다. 그에 의하면 우주의 모든 것이 반대물을 향해 전환되어가는 변화의 상태에 있다.
사회정치적인 제도는 일단 성숙하면 다른 것에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그러나 낡은 것 자체는 절대로 없어지지 않는다. 신구의
충돌 속에 융합되어 그 결과 생긴 새로운 유기체는 그 안에 신구를 함께 보유하고 있다.
이와 같은 헤겔의 정반합의 반복 발전과정은 기계론적인 것이 아니며, 전 과정이 <신>이나 <보편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것이다.
헤겔의 변증법적 역사발전은 궁극적으로 <완전국가>를 향해가는 것이며, 완전국가에서는 모든 개인의 이해가 사회 전체의 이해와 융합되어
있다.
헤겔은 진정한 자유란 정치사회에 복종하는 데 있으며, 국가는 개인보다 우월한 권리를 갖는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국가 지상주의>는
보수주의자들에게는 환영을 받았으나, 프로이센의 적대자들에게는 국립대학의 어용학자라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절대정신
그에 의하면 세계역사는 <세계정신>의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한다. 즉 정신이란 우주의 근원이며 세계의 생성발전의 과정은 바로 정신의
발전과정에 불과하다고 본다.
헤겔은 정신은 <주관적 정신>-<객관적 정신>-<절대적 정신>의 세 단계로 발전한다고 보았다. 특히 객관적 정신은 법-도덕-인륜의 세 단계로,
인륜은 다시 가족-시민-국가의 세 단계로 발전하는데, 이때 <국가는 객관적 정신의 최고단계>라고 생각했다.
또한 자연계와 인간계를 포함하는 전 우주를 하나의 생성발전하는 과정으로 보고, 생성발전하는 과정을 추진하는 궁극적인
최고원리를 <절대정신>이라고 규정했으며, 절대정신의 자기발전이 곧 세계요, 역사라고 보았다. 이러한 헤겔의 이론은 내셔널리즘의 발전을
강화하는 동시에 궁극적으로는 20세기 파시즘의 형성에 기여했다.
역사철학의 목적은 세계정신의 발견
헤겔의 저서는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헤겔의 강의가 끝나면 학생들은 남아서 강의의 내용을 음미해보곤 했는데, 그래도 감이 잡히지 않아
담당 조교를 통해 헤겔에게 확인해보면, 헤겔의 대답은 <<그게 아니야, 내 철학은 나 외에는 아무도 몰라>>라고 대답할 정도로 어려웠다
한다.
그러나 <역사철학강의>는 비교적 일반인이 쉽게 그의 사상에 접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책이다. 대부분 관념적으로 흐르고 있는 다른
저서들에 비해, 이 저서는 다양한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흥미롭게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머리말, 서론, 그리고 제1부 동양의 세계, 제2부
그리스의 세계, 제3부 로마의 세계, 제4부 게르만의 세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역사는 <자유>의식의 진보
헤겔에 의하면 이념은 역사 속에서 자기를 실현해가는 것인데, 그것은 <자유>를 본질로 하기 때문에, 역사는 자유를 실현해가는 과정이다.
즉, 역사는 본질적으로 이념과 정신의 역사이며, 정신의 본질인 자유가 실현되는 것이 세계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세계사의 목적이란
인간의 <자유>를 실현시키는 일이다. 자유는 정신의 본질이지만 정신이 자유스럽다는 것은 그것이 본래 지니고 있던 것(자유)을 스스로
의식하는 일을 뜻하며, 세계사란 바로 <자유의식의 진보>인 것이다.
그러면 세계사의 궁극목적인 자유는 어떻게 세계사에서 실현되는가? 원래 정신의 본질인 자유 그 자체는 내적인 것이어서, 아직 밖으로 나와
실존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단순한 내적인 자유는 인간의 의지와 활동 특히 어떤 한 가지 목적을 위하여 자기의 온 정열을 다 쏟을 때
실현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하여 그는 <<이 세계에서 이루어진 위대한 사업 치고 정열 없이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고 단언했다.
역사과정은 자유를 실현해가는 보편적인 성격을 띠지만, 겉으로 보기에 어울리지 않는 인간의 욕구정열관심 등을 인류의 역사적
행위를 일으키는 동기로서 그는 인정한다. 헤겔은 이러한 모순을 해소하기 위해 <역사적 이성>이라는 것이 동시에 여기에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즉 사람은 누구나 자기의 개인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정열을 다 쏟는데, 이때 어떤 보편적인 목적(이념)이 실현된다. 다시
말해 개인은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자유를 진전시키는 보편적인 일을 수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활동하는 개인은 자기가 관심을
가지는 것을 추구하고 만족시키면서 동시에 보다 높은 것을 실현하기 위해 봉사한다. 이것을 헤겔은 <이념의 간계>라고 했다.
헤겔에 의하면 민족은 역사의 전개단위이고, 역사의 궁극적 주체는 <세계정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의 역사는 민족국가들의 역사며,
세계사의 변증법적 발전은 민족국가들간의 대립에 있다는 것이다. 세계정신은 자기실현을 위하여 어떤 특정한 개인이나 민족에게 사명과
역할을 부여하는데, 이 역할을 부여받은 특정한 개인이 세계사적 개인이요, 민족이 세계사적 민족이다. 그래서 각 시대는 하나의 특수한
민족국가가 그 시대의 세계사의 지배적인 민족이 된다. 그리고 헤겔은 역사상 결정적인 순간에 특수한 세계사적 개인이 시대정신의
대행자로서 출현한다고 본다. 세계사적인 영웅도 이런 의미에서는 세계정신의 사무 집행인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정신은 세계사적 개인이나 세계사적 민족을 통하여 세계사의 궁극적인 목표인 <자유>를 실현해나간다. 이처럼 역사과정을 자유이념의
점진적 성취과정으로 보는 그는 민족국가들의 갈등을 불가피한 것으로 생각했다.
역사의 발전단계
한편 어떠한 국가이든 그 국가를 건설한 민족만이 비로소 세계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모든 민족은 제각기 독자적인 원리를 가지고 그 시대를
지배하기에 이르지만, 세계사에 있어서는 오직 한 번만 후대를 지배할 수 있을 뿐이요, 세계사의 필연적인 자유의 의식을 가진 진전은
단계적으로 진행된다. 그는 이와 같은 역사의 변증법을 설명하기 위해 여러 민족들을 예로 들었는데, 그 민족들은 자유의 발전에 있어서 세
단계를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제1단계는 동양인의 세계인데, 오직 한 사람의 전제군주의 세계만이 있고, 오직 한 사람만이 자유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 세계를 그는
역사의 유년기로 본다. 제2단계는 그리스 인과 로마의 세계인데, 약간의 사람들이 자유를 의식하는 데 불과했다. 최초로 개성이 출현한
그리스 세계를 역사의 청년기에 비유한 반면, 추상적인 보편성의 나라로 간주한 로마의 세계는 성년기에 비유했다. 제3단계의 게르만
인(헤겔 자신이 게르만 출신임)의 세계에서는 기독교에 의하여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자유롭다는 자각에 도달했으며, 세계사의 발전은
여기에서 원리적으로 완결되었다.
그 원리를 현실의 세계에서 관철시키는 일만 남아 있다. 이것은 정신의 필연적인 발전단계로, 역사는 이것에 적합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되어왔다. 이 세계를 노년기에 그는 비유했는데, 이는 쇠퇴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의 완전한 성숙을 의미했다. 각각에
대응하는 정치형태로 전제정치, 군주정치, 민주정치에 비유했다.
이 책에는 한 사람의 자유에서 몇 사람의 자유로, 다시 만인의 자유로 자유의식이 진보하고 양적으로 확대되는 과정을 곧 세계사라는 그의
주장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다.
독일 관념철학의 정상
헤겔의 철학은 당대의 상황에 심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특히 정신의 개념을 자유 및 역사의 개념과 결합시킴으로써, 개별자로서의 인간이
전체적인 역사진행의 체계 속에서 차지하는 의무와 책임이 강조되어, 프러시아적 근대국가 이념을 심화시키는데 결정적 공헌을 하게 된다.
그러나 헤겔 철학에 대한 찬성 또는 반대의 경향에 의하여 대부분의 현대철학의 조류가 형성되었다는 점을 인식할 때, 그만큼 헤겔 철학이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부정적인 면도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포이에르바하, 마르크스, 엥겔스 등은 헤겔의 변증법은 인정했지만, 관념론에는 반대했다. 듀이는 헤겔의 변증법적 발전개념을 자신의
도구주의에 도입한 반면, 실존주의나 생철학의 경향에서는 헤겔의 사변적 관념론과 아울러 도식적인 변증법 체계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입장을 취했다.
헤겔이 그의 주저인 <정신현상학>에서 정신의 전개과정을 존재론적 변증법과 역사적 변증법의 측면에서 고찰한 점은 탁월한 것이다. 또한
자기 의식의 소외와 극복을 통해 의식의 전개 및 인류사의 변증법적 전개를 파악한 것 역시 그의 예리한 통찰력을 말해준다. 헤겔 철학의
가장 일반적인 특징은 그가 어떤 사상가보다도 의식과 실체의 세계를 유기적이고 동적인 것으로 파악하여 실체의 세계를 주체의 세계로
전환시켰다는 점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철학체계에는 여러 문제점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절대적 형식주의
우선 세계나 역사가 과연 체계적인가 하는 물음이 제기될 수 있다. 헤겔의 말대로라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유기적 운동을 거부하고,
형식주의에 치중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인륜성교양도덕성의 객관정신이나 종교 및 절대지식의 절대정신을 보더라도, 그가
주장하는 정신이 얼마만큼 폐쇄된 형식적 체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그의 철학의 전체적인 모습이 형식적인 이유는, 헤겔이 현실을 외면하고 철저하게 사변에 의존했다는 데 있다. 제 아무리 이론과 현실을
통일시킨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단지 사변 속에서만 이루어진다면 결국 남는 것은 형식주의다. 특히 그의 <정신현상학>의 체계와 변증법은
절대정신이라는 거대한 틀 안에서 모든것이 이루어지는 절대적 형식주의에 물들어 있다. 따라서 헤겔은 의식과 삶이 정신의 거대한 틀
속에서 소외와 극복의 단계를 차례차례 법칙적으로 거치면서 모순의 통일이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헤겔의 정신개념이라든가 변증법적 운동의 개념이 다분히 상상의 산물에 유사할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신비적인 요소를 지닌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인식능력에는 한계가 있으나, 이 한계를 명백히 의식할 때 우리는 조금씩 신비의 틀을
깨뜨릴 수 있다.
평생동안 헤겔을 증오한 쇼펜하우어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자기보다 18년 연상이자 베를린 대학의 선배교수인 헤겔을 평생을 두고 증오했다. 왜
그랬을까?
사정은 이렇다. 1819년(31세)때 쇼펜하우어는 베를린 대학의 사강사로 초빙되었다. 다음해 봄에 대학강당에서 헤겔을 비롯한 교수들과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교수자격 시험강의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 당시 떠오르던 태양이던 헤겔이 강의를 중단시키고, 혼란스런 질문을 한다.
<<말이 길거리에 드러누울 때 그 동기는 무엇인가?>>
<<말의 정서적 구조, 즉 그의 피로함이 동기입니다.>>
<<그러면 심장의 고동과 같은 동물적 기능도 역시 동기인가?>>
<<우리가 동물적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신체의 의식적 운동입니다.>>
이에 헤겔이 동물적 기능은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하자, 한 의학도가 쇼펜하우어의 편을 드는 바람에 논쟁은 여기서 중단되었다.
그런데 진짜 싸움은 그 다음부터 벌어진다. 헤겔의 명성에 도전하고 싶었던 그는 자신의 강의시간을 헤겔과 같은 시간에 배정했다. 그러나
당시 독일 철학계를 풍미하고 있던 대가의 명강의에 압도되어 그의 강의실은 텅텅 비었다. 그후 10년 동안을 계속했으나 상황은 호전되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헤겔에게 다음과 같은 독설을 퍼부었다.
<<천박하고 우둔하며, 메스껍고 무식한 사기꾼인 헤겔은 뻔뻔스럽게도 어리석은 소리들을 잔 늘어놓았다. 그런데 이것을 그의 상업적인
추종자들은 마치 불멸의 진리인 양 나팔을 불어대고, 바보들은 그것을 진짜로 받아들이며 환호했다. 헤겔은 교육받은 한 세대를 지적으로
파산시켰다.>>
당시 베를린을 덮친 콜레라로 헤겔이 죽은 뒤, 그는 콜레라를 피해 프랑크푸르트로 간다. 이후 30년 동안 개 한 마리와 함께 여생을 보내게
되는데, 그후에도 화가 안풀렸던지 그 개의 이름을 헤겔이라고 짓고, 평생 동안 구박을 하며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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