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수프단지
삶에는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보물들이 아주 많다. 어떤 예기치 않은 일로
인해 그것을 깨닫기 전에는 우리는 그것들이 지닌 가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채로
살아간다. 엄마의 수프단지도 그 중 하나였다.
그것은 이가 군데군데 빠지고, 희고 푸른빛 나는 유약이 발라진 커다란 단지였다. 그
단지가 화덕 위에서 끓고 있는 모습을 난 아직도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다. 마치
활화산처럼 김을 피우면서 그것은 언제나 찌글찌글 끓고 있었다. 학교에 갔다가
부엌쪽 뒷문으로 들어올 때면 그 내음이 입안에 군침이 솟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 내음은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엄마가 그 단지 옆에 서서 길다른 나무 주걱으로
그것을 휘젖고 있을 때 나 없을 때나 나는 그 냄새만으로도 내가 집에 돌아왔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엄마의 미네스트로니 수프 (마카로니나 야채 따위를 넣은 수프)에는 정해진
요리법이 없었다. 그 요리법은 상황에 따라서 늘 발전했다. 그것은 엄마가 북부
이탈리아의 피에몬테 산악지대에 살 때부터 그래 왔다. 그곳에서 엄마는 엄마의
노나(할머니)에게서 그 비법을 배웠으며, 할머니는 또 그 윗대의 할머니들로부터 여러
세대에 걸쳐 그것을 전수받았다.
우리집은 미국에 이민온 지 얼마 안 되는 대가족이었다. 그런 우리집 식구들에게
엄마가 끓여 주시는 수프는 우리가 결코 배곯지 않으리라는 것을 보장해 주었다.
그것은 팔팔 끓고 있는 안정의 상징이었다.
그것의 요리법은 부엌에 무슨 재료가 있는가에 따라 그 자리서 결정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수프의 내용물을 보고 우리집의 경제 사정을 판단할 수 있었다. 토마토,
국수사리, 콩, 당근, 셀러리, 양파, 옥수수, 고기 등이 가득 든 걸쭉한 수프는
버스가글리아 집안이 잘 돌아가고 있음을 상징했다. 반면에 희멀건 수프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않다는 뜻이었다. 우리집에선 음식을 결코 내버리는 법이 없었다.
그것은 신에 대한 모독이었다. 모든 남는 음식은 전부 엄마의 수프 단지 속으로
들어갔다.
수프를 끓일 준비를 하는 것은 엄마에게 있어서 매우 신성한 일이었다. 엄마는 음식
만드는 일을 신의 섭리에 대한 찬양으로 여겼다. 엄마는 지극히 감사한 마음을 갖고
감자 한 알, 닭고기 한 조각을 수프 단지 속에 집어넣었다. 구약성서의 잠언에 나오는
다음 구절을 읽을 때마다 나는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녀는 아직 어두운 시간에 일어나 식구들이 먹을 음식을 장만한다. 그녀의
자녀들이 일어나 그녀를 축복하리라..."
하지만 한 번은 엄마의 그 수프 단지가 나를 아주 당황스럽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나는 그것 때문에 학교에서 사귄 새 친구를 잃을까 노심초사했다.
솔은 마른 체구에 머리칼이 검었다. 그는 나에게 흔치 않는 친구였다. 왜냐하면 솔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그 친구의 집은 도시에서 가장 부자 동네에 있었기 때문이다. 솔은
종종 나를 자기집의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그 집안에는 흰색 유니폼을 입은 요리사가
있어서 번쩍거리는 은제 식기들이 진열된 주방에서 음식을 만들었다. 요리는
고급이었지만, 사실 나는 별로 맛이 없었다. 그 음식들은 불에 그을린 단지에서 끓여져
나오는 우리집의 음식과는 달리 마음의 정성이 빠져 있었다.
게다가 그집 분위기도 음식와 비슷했다. 모든 것이 너무 형식적이었다. 솔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교양이 있고 정중했다. 하지만 식탁에서의 대화가 지나치게
조용하고 형식적이었다. 그리고 그 집안에선 아무도 서로를 껴안지 않았다. 솔이 가장
가까이 아버지와 접촉할 때는 악수할 때뿐이었다.
우리집에선 따뜻한 포옹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남자든 여자든, 사내 아이든 여자
아이든 언제나 서로 껴안고 야단들이었다. 그리고 만일 하루라도 엄마에게 키스를
하지 않았다가는 당장 이런 소리를 듣기 마련이었다.
"무슨 일이냐? 너 어디 아프니?"
하지만 그 무렵 나의 삶에서는 이 모든 것이 나를 더없이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나는 솔이 우리집에서 저녁을 먹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세상이 두쪽으로 갈라져도 그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우리집 식구들은 너무 달랐다.
다른 친구들의 집에서는 아무도 화덕 위에 우리집처럼 커다란 단지를 올려놓고 있지도
않았으며, 집에 돌아오면 엄마가 맨 먼저 숟가락을 주며 그릇에다 수프를 퍼담지도
않았다.
나는 엄마를 설득시키려고 노력했다.
"미국에 사는 사람들은 아무도 이렇게 하지 않는단 말예요."
그러면 엄마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난 그사람들과는 다르다. 난 어디까지나 로지나일 뿐이야. 내 미네스트로니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할 수 있지."
마침내 솔은 드러내 놓고 자기를 우리집 저녁식사에 초대해 달라고 요구했다. 난
거절할 도리가 없었다. 사실 그것보다 엄마를 더 행복하게 해드리는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불안해져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집 식구들과 식사를 같이 했다간 솔이 영영
내 곁에서 떠나갈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엄마, 우리도 햄버거나 후라이드 치킨처럼 미국식 음식을 좀 먹을 순 없어요?"
엄마는 한참 동안 날 째려보셨다. 난 더 이상 묻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는 걸 알았다.
마침내 솔이 우리집에 오던 날, 난 신경쇠약으로 쓰러질 것만 같았다. 엄마와 다른
아홉 명의 식구들은 연달아 솔을 껴안고 등을 두드리며 법석을 떨었다.
잠시 후 우리는 아버지의 자랑이자 기쁨인, 아버지가 손수 짜신 식탁에 둘러앉았다.
정교하게 무늬가 새겨진 식탁이었지만 이미 음식때가 잔뜩 얼룩져서 잘 지워지지도
않았다. 식탁 위에는 화려하고 밝은 색채의 식탁보가 씌워져 있었다.
아버지가 식사 기도를 마치자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 모두의 앞에는 수프 그릇이
하나씩 놓였다.
엄마가 물으셨다.
"어이, 솔! 이것이 무슨 음식인 줄 알겠어?"
솔이 대답했다.
"수프 아닌가요?"
엄마는 강조하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수프가 아니야. 이건 미네스트로니라구!"
그런 다음 엄마는 미네스토로니의 효능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명하기
시작했다. 엄마의 주장에 따르면 그것은 두통과 감기, 심장병, 소화불량, 신경통,
간질환 등에 특효였다.
솔의 야윈 체구를 보더니 엄마는 이 수프를 먹으면 틀림없이 미국에 이민와서
성공한 어떤 이태리 운동선수처럼 뼈가 튼튼해질 것이라고 거듭 확신을 갖고
말씀하셨다. 나는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것으로 내친구 솔과는
마지막이구나 하는 생각이 확실하게 들었다. 이런 별난 사람들과, 기이한 발음, 이상한
음식이 있는 집에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솔은 두말 없이 자기 그릇을 비우더니 한 그릇을 더 청하는
것이었다. 그는 숟가락을 빨며 말했다.
"정말 맛있는데요."
작별 인사를 하러 밖으로 나왔을 때 솔이 실토했다.
"넌 정말 훌륭한 가정을 갖고 있구나. 우리 엄마도 그렇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리고 나서 그는 덧붙였다.
"임마, 넌 행운인 줄 알아!"
행운이라구! 손을 흔들며 입가에 미소를 짓고 걸어가는 솔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약간 의아해 했다.
내가 얼마나 행운이었던가를 나는 이제 안다. 솔이 우리집 식탁에서 경험한 그
만족감은 엄마의 미네스토로니 수프에 담긴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따뜻함이 전부가
아니었음을 난 안다. 그가 느낀 것은 사랑이 가득한 한 가정의 식탁에서 체험한
순수한 기쁨이었다.
엄마는 오래 전에 돌아가셨다. 엄마를 묘지에 묻고 돌아온 다음날 누군가
미네스트로니 수프 단지가 얹힌 화덕의 가스를 잠궈 버렸다. 황금빛 시절은 그렇게
불꽃과 함께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그 맛좋은 수프 속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던
신성한 사랑과 안도감은 오늘날에도 내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 준다.
솔과 나는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우정을 키워 나갔다. 그의 결혼식 날 나는
들러리를 섰다. 얼마 전에 나는 그의 집으로 저녁식사에 초대되었다. 솔은 아이들을
일일이 껴안아 주었고, 아이들은 또 나를 껴안았다. 그런 다음 솔의 아내가 김이
무럭무럭 나는 수프 그릇을 식탁으로 가져왔다. 야채와 고기 토막이 풍성하게 들어간
닭고기 수프였다.
솔이 나한테 물었다.
"어이, 레오. 이것이 무슨 음식인 줄 알아?"
내가 웃으며 대답했다.
"수프 아닌가?"
솔이 골을 내며 말했다.
"수프라구? 이건 단순한 수프가 아니라 닭고기 수프야! 감기와 두통, 소화불량에
아주 효과가 있지. 그리고 간질환에도 좋구 말야."
솔은 그렇게 말하면서 나에게 윙크를 보냈다. 나는 다시금 집에 온 느낌이 들었다.
<레오 버스카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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