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집)
저자:김시습(1435--1493)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고 이방인의 삶을 살다간 김시습의 고민과 사상을 담은 책으로, 조선 초기의 문학사와 철학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정치한 성리학 이론의 전개와 심도 깊은 불교사상, 그리고 도교에 관한 그의 관심을 엿볼 수 있을
뿐더러, 암울한 시대를 만나 힘겹게 살아가는 한 천재의 고민과 삶에 대한 태도를 만날 수 있다.
암울한 시대를 힙겹게 살다간 지식인
생이지지(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 란 칭호를 들은 김시습. 신동의 탄생을 알리는 전주곡은 그가 태어나던 전날 밤, 성균관 유생들이
꾸었다는 공자의 꿈으로 시작한다. 그는 지금의 서울 명륜동 성균관 부근에서 신라 김알지 왕의 42세 후예로 출생했다. 과연 그는 보통
어린애와는 달라서 8개월에 글을 읽고, 3살 때에는 글을 지었다.
시습 이란 이름은 논어 첫머리의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에서 따온 것이니, 재주만 믿지
말고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5세에 (중용)과 (대학)을 배우고 신동으로 소문이 나자, 소문을 들은 정승 허조가 그를
시험해보기 위해 그의 집에 들러, 나는 늙었으니 노 자를 사용하여 시를 지으라 하니 노목개화심불노(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나, 마음은
늙지 않았네)라고 했다 한다.
세종께서도 스스로 보고자 했으나, 남의 이목을 의식하여 신하를 시켜 너무 드러내지 말고 잘 가르치도록 해라. 나이가 들고 학업이
성취되면 내가 크게 쓰겠노라 하고 비단 50필을 주었다. 신동 김시습은 이후 15세까지 (논어) (맹자) (주역) (예기) 등을 김반, 윤상 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사사했다.
그러나 세종 이후 정치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자, 그는 심사가 뒤틀렸다. 그는 삼각산에 들어가 독서에 전념하던 중, 세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수주일이나 두문불출하면서 대성통곡을 했다. 그리고 읽던 책을 모두 불사르고 머리를 깍고(법명은 설잠) 일단 서울로
나왔다. 그후 평양으로, 관서관동으로 발 닿는 대로 전전하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다. 그리고 시문으로 그의 울분을
토로했다.
불의가 난무하는 현실과 이상을 어떻게 승화시킬까 생각한 나머지, 31세 때에 경주 남산 금오산에 들어가 비분강개한 마음을 달래며
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저술했다. 이때 그는 금오산의 용장사에서 천년고도의 풍물과 인생을 관조하면서
창작에 열중했다. 그러나 건강악화로 당시 그의 시문엔 음울하고 처절한 심경 등이 담겨 있다. 이렇게 지내던 중 효령대군의 부름으로
원각사 낙성식에 참가하여 원각사 찬시 를 지어올리고 다시 낙향했다.
금오산실로 돌아온 그는 술에 취해 차가운 달빛 아래서 매화를 바라보기도 하고, 대나무에 부는 바람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시로써
수탈에 못 이겨 유랑하는 농민의 참상과 고통을 담아냈다. 금오산실의 김시습은 병고에 시달렸으나, 동가숙 서가식할 때보다 고달프지는
않아 저술에 몰두할 수 있었다. 당시 남긴 소설들은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으로 이들은
(금오신화)로 엮어졌다.
산에서 6--7년을 병고에 시달렸던 그는 무엇인가 새로움을 찾고자 했다. 마침 그동안에 세조도 죽고 성종이 즉위하여, 문치를 표방하고
널리 인재를 구하고 있었다. 37세 때 금오산실을 하직하고 상경했으나 신숙주서거정정창손김수온 등이 출세한 것을 보고,
그는 일단 근교에 폭천정사를 짓고 농사를 직접 지으며 생활했다. 거기서 남효은김일손 등과 어울렸고, 47세에는 머리도 기르고 일시
환속하여 새로운 여자를 만나 새생활을 기약했다. 그러나 속세와는 인연이 적었던지, 1년도 못되어 부인을 사별하고 실의에 빠져 다시
심산유곡을 찾아 방랑길을 떠났다.
그는 상처 후 승려의 신분으로 산수자연을 유랑하다가 충청도 홍산의 무량사를 마지막 안식처로 삼아 불운한 삶을 마감했다.
김시습의 사상
율곡 이이가 쓴 (김시습전)에는 그를 심유적불 즉 마음은 유자이나 그 행적은 불자였다 라는 표현이 있다. 한마디로 그는 승복을 걸친
유학자 라는 것이나, 불교계 인사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매월당집)에 나타난 그의 사상은 정치적 유교사상 위에 그의 해박한
불교지식을 적용하고 도교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유교사상
그는 수확기에 당대의 유학자들에게서 경서류를 배웠으며 20대 이후 승려의 신분으로 방랑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항상 경서류를
가까이하여 유교의 본질을 탐구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왕도정치 였고, 이를 위해서는 (대학)에서 말하는 격물치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정치사상은 왕도 의 고취와 패도 의 규탄이 핵심인데, 이 사상을 바탕으로 특히 인재 등용의 신중과 공평성, 가렴주구의 배격과
절약명분의 중시 등을 강조했다. 이러한 인본주의 내지 민본주의 정신은 공맹의 사상을 현실적으로 실현해보려는 유학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불교사상
한편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시작된 억불정책은 불교에 치명적인 타격이 된다. 그러나 세종과 세조는 불교의 종교적 기능을 인정하고,
비공식적으로 불교를 보호하게 된다. 김시습은 세종 만년의 호불에 영향을 받아 출가했는데, 그 이후 세조의 호불책, 성종의 억불책을
겪으면서 이십대 이후 거의 만년에 이르기까지 38년간 승려신분을 유지했다. 그의 깊은 불교의 경지는 그가 남긴 불교관계 저술인
(화엄경석제) (십현담요해) (조동오위요해) 등을 통해 나타나고 있으며, 율곡 이이도 이를 기록으로 인정하고 있다.
도교사상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건강마저 좋지 않았던 그는 불로장생의 도인도가사상으로 관심을 확대했던 것 같다. 그의 시에는 노장
사상에 심취한 흔적이 역력하며, 신선술에도 능하여 장생의 도를 논했다. 도선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몸소 선도를 닦았기 때문에, 후세에
그의 인물이 마치 도술가처럼 과장된 점도 없지 않다. 조선 후기 도인들은 환인 단군을 우리 나라 도파의 시조로, 김시습을 중조로 내세울
정도로 그가 도교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적지 않다.
폭넓은 사상과 탁월한 문장의 결실
(매월당집)은 권수 시집 15권, 문집 6권, 부록 2권으로 되어 있고 6책으로 장정되었다. 본집은 이자박상윤추년 등이
수집발간한 것을 기본으로 하여, 선조 때에 율곡 이이가 왕명을 받들어 전기를 써서 올리고 곧 예문각으로 하여금 간행케 했으며,
이듬해 겨울 이산해가 왕명으로 서문을 써 넣은 것이다.
권수에는 김시습의 생애와 (매월당집)의 간행 연혁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김시습의 가계가 신라 왕통임이 기록되어 있다.
제1권부터 제15권까지는 총 1700여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어느 것이나 비분강개한 심정을 토로하고, 세상을 조소하고 있는 것들이다.
문집은
소부금조사소주잡저잡설논찬전설변의명잠고편
서서 등이 들어 있고 부록 두 권은 그의 기행이 담겨 있는 유적수보기영전명문발 기타가
수록되어 있다.
그럼 본문에 들어 있는 그가 남긴 작품을 몇 편 감상함으로써 그의 사상을 더듬어보자.
10년 동안 떠돌이 되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보니
이내 몸은 도시 밭둑 가의 쑥대로구나
세상 살아가는 길은 모두 험하고 위태로우니
아무 말없이 꽃떨기나 냄새 맡고 지내는 것이 좋으리로다
이 시는 고단한 속세를 떠나 산중에 은거하고자 하는 자신의 심정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방랑중에 농민의 참상을 목격하고 다음과 같이
부정한 관리들을 고발했다.
원님이 어질고 자애로워도 허덕이는 살림살이일텐데
이리 같은 벼슬아치 만났으니 백성은 정말 가엾구나
며느리 짐 이고 시아비 손자 끌어 길에 가득하니
어찌 주리고 얼어죽는 것이 풍년 아니기 때문이랴
다음과 같은 시도 탐욕스런 대지주와 위정자를 질타한 것이다.
자갈밭에 바윗돌이 울퉁불퉁
온통 가시덤불 등넝쿨 얽혀 있네
땅은 토박한데 잡목만 자라고
밭 둔덕 경사져 곡식 자라지 못하는구나
굶주린 까마귀 나무 끝에서 울어대고
여윈 송아지 둔덕에 누워 있네
이같이 깊은 산골인데도
해마다 세금이야 면할 수 있으랴
그러나 계속된 방랑과 폭음, 그리고 깊은 고독으로 그는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한 상태에서, 마지막 안식처인 무량사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봄비가 주룩주룩 이삼월에
모진 병 붙들고 선방에서 일어나
중생에게 서쪽에서 온 뜻을 묻고자 했으나
다른 중들이 기리고 높일까 두렵구나
그는 매사를 비웃으며 평생 동안 폭음하고, 취하면 아무 데서나 잤으며 아이들의 돌팔매 대상이 되기도 할 만큼 기행을 계속했다.
김시습은 광승 노릇을 하였으므로 파계는 말할 것도 없고 해괴망칙한 행동을 일삼았다. 그러나 스님들은 그를 은근히 존경하고 섬기었다.
하루는 스님들이 불법의 강설을 청하였는데 김시습은 크게 법연을 개설하고, 스님들을 모은 다음 가사와 법의를 갖추어 입고서 강설할
것처럼 했다.
그러나 강설은 하지 않고 소 한마리를 끌고 오라 한 후 소먹이 여물을 가져다 소 뒤에 놓게 하고는 큰 소리로 웃으면서 너희들이 내
강설을 들으려 하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라고 조롱한 일도 있고, 또 김시습의 학문을 듣고 배우기를 원하여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돌을
던지고 나무장대를 휘둘러 못 들어오게 한 일도 있었다.
왕도정치에 기초한 애민 사상가
무량사에서 어느 날 그는 붓을 잡고 자화상을 그렸다. 그런 다음 그 자화상 위에 이런 글귀를 써넣었다. 너의 모양은 조그만하고, 너의
말은 크게 분별이 없구나. 너는 구덩이 속에 처박아 두어야 마땅하다. 인생을 마감하며 남긴 말이었다. 철저한 자기반성의 글귀였다.
그는 이상과 현실의 갈등 속에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기구한 일생을 보냈는데,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얻은 생활체험은 현실을 직시하는 비판력을 갖도록 했고, 현실의 모순에 대한 그의 비판은 부정한
위정자들에 대한 비판과 연결되면서, 애민에 기초한 왕도정치의 이상을 형성시킨다.
한편 당시의 사상적 혼란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은 유불도 3교의 원융적 입장에서 일치시키는 노력을 나타난다. 불교적 미신은
배척하면서도, 불교의 종지는 자비로 만물을 이롭게 하고 마음을 밝혀 탐욕을 없애는 길이라고 했다. 또 합리적인 도교의 신선술을
부정하면서도, 기를 다스림으로써 천명을 따르게 하는데 그 가치가 있다고 했다. 즉 음양의 운동성을 중시하는 주기론적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와 도교를 비판, 흡수하여 그의 철학을 완성시키고 있는데, 이런 철학적 깨달음은 궁긍적으로는 현실생활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분명히 불행한 삶을 살았다. 살아서 그의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시샘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죽어서는 수많은 일화로
민중의 가슴 속에 깊게 자리하고 있다. 지조를 위해 현실에 대한 참여를 거부했으나 민중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의 시를 통해 절절히
흘러나왔고 노동 자체를 신성하게 여기는 지사였다. 그는 현실사회의 모순에 철저하게 저항한 진보적 지식인이요, 폭넓은 학문을 가진
사상가요, 섬세한 정서를 가진 시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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