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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단경

(육조단경)
        저자:혜능 (638--713)

  (육조단경)은 중국 남방 선종의 창시자인 제6대 혜능의 문인들이 그의 말씀과 행적을 엮은 것으로, 중국인의 저술로 유일하게 불경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이 책에는  모든 존재에는 다 부처님이 될 바탕 이 있다는  일체중생 개유불성 의 도리와  명심견성   견성성불  등의
이치, 그리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깨달을 수 있다 는 선불교의 생활화를 주장하여, 좌선을 중시하는 인도식 선불교와는 상당히 다른
중국불교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일자무식에서 성인으로
  중국 선종의 6대 조사이자 동아시아 선불교의 대표적 계통으로 발전한 남종선의 창시자인 혜능은 당나라 때 중국의 광동성에서 태어났다.
혜능은 그의 법명이고, 성은 노씨였다.
  그가 태어나자 상서로운 빛이 방안을 비추고, 방안이 향기로 가득 찼다. 새벽에 신비한 두 스님이 대사의 아버지를 찾아와 말하기를  어제
저녁에 낳은 아이의 이름을 혜능이라 하시오 라고 했다.  혜자와 능자는 무슨 뜻입니까? 라고 부친이 묻자   혜 는 중생에게 베푼다는
뜻이요,  능 자는 부처님의 일을 감당할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라고 말한 뒤 그들은 사라졌다 한다.

    홍인의 제자
  (육조단경)에 의하면 혜능은 젊었을 때 가난하고 무식하여 장작을 팔아서 생계를 꾸려나갔다고 한다. 24세 때 어느 날 장작을 지고 시장에
나갔다가, 한 객승이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을 듣고 불교에 귀의할 뜻을 굳혔다.
  그는 당시 중국불교의 중심지였던 중국 북부로 가서 선종의 5대 조사로서 명망이 높은 홍인의 문하에 들어갔다. 처음에 홍인이  너는
어디서 왔느냐 라고 묻자 혜능이  영남에서 왔다 고 대답했다. 이에 홍인이  영남 사람은 불성이 없다 고 하자 혜능은  사람은 남북의
구분이 있지만, 불성에 무슨 구분이 있느냐 고 대답하자 예사 사람이 아님을 알고 행자 노릇을 하게 했다고 한다.

    신수와 동문수학
  홍인의 문하에 들어온 지 8개월 가량 지났을 때 홍인은 자신의 법맥을 이을 제자를 물색하기 위해 제자들로 하여금 시를 짓게 했다. 그간
가장 촉망을 받았고, 후에 북종선의 창시자가 된 신수는 다음과 같이 지었다.
   몸음 보리수요 / 마음은 밝은 거울 / 부지런히 털고 닦아서 / 때묻지 않게 하라.
  그러나 이를 본 홍인은  이 게송은 소견은 당도했으나, 문안에 들어오지 못해 자성을 보지 못했다. 다시 지어오라 고 명했다. 그러나
신수는 며칠이 지났으나 짓지 못했다.
  이때 한 동자가 방앗간 옆을 지나면서 이 게송을 외우는 것을 들은 혜능은 이 게송이 견성하지도 못했고 큰 뜻을 알지도 못했음을 알았다.
8달 동안 방아만 찧던 혜능은 동자의 안내를 받아 조사당 앞으로 가서 홍인이 볼 수 있도록 글을 쓸 줄 아는 이의 도움을 얻어 복도에
자신의 게송을 붙였다.
   보리는 본래 나무가 없고 / 밝은 거울은 또한 받침대 없네 / 부처의 성품은 항상 깨끗하니 / 어느 곳에 먼지나 티끌은 끼겠는가?

    홍인의 법통전수
  이를 본 홍인은 곧 큰 뜻을 알았으나, 다른 사람들이 이를 시기하여 해칠 것을 염려하여 대중에게는 이를 아니라고 부인했다. 그리고
홍인은 밤중 삼경에 혜능을 조사당 안으로 불러 (금강경)을 설해 주었다. 혜능이 한번 듣고 문득 깨쳐서 그날 밤으로 법을 전해 받으니,
사람들은 아무도 이를 알지 못했다. 이내 홍인은 단박에 깨치는 법과 의발(스승으로부터 전해받는 옷과 나무그릇)을 전달하시며 말했다.
   네가 육조대사가 되었으니 가사로서 신표를 삼을 것이며, 대대로 이어받아 서로 전하되, 법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여 마땅히 스스로
깨치도록 하라. 혜능아, 예부터 법을 전함에 있어서 목숨은 실낱에 매달린 것과 같다. 만약 이 곳에 머물면 사람들이 너를 해칠 것이니,
너는 모름지기 속히 떠나라. 너는 가서 노력하라. 법을 가지고 남쪽으로 가되 삼년 동안은 이 법을 펴려고 하지 마라. 환란이 일어나리라.
뒤에 널리 펴서 사람들을 잘 지도하여 만약 마음이 열리면 너의 깨침과 다름이 없으리라.

    16년 은거 후 설법
  이에 혜능은 가사와 법을 받아 남쪽으로 떠났다. 광동성으로 돌아온 그는 이후 16년 동안 사냥꾼의 무리들 속에 숨어서 생활하던 어느 날,
이제는 마땅히 설법을 할 때라는 생각으로 산에서 나와 법성사에 온다.
  법성사에는 인종법사가 (열반경)을 강의하고 있었는데, 그때 바람이 불어 깃발이 펄럭이는 것을 보고 한 중이  바람이 움직인다 고 말하자
다른 중은  깃발이 움직인다  하여 논쟁이 계속되자, 혜능이 나서서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며,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다만
사람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라고 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나서 자신이 홍인의 뒤를 이은 6대조사임을 밝히고 공식적인 활동에
나서 37년간 널리 가르침을 폈다.

      선종과 혜능 대사
    선종의 근본 사상
  석가모니가 불교를 창시한 이래 그의 제자들 사이에는 성불하는 과정에 있어 방법의 차이가 생기게 된다. 석가모니가 남긴 말씀이 담긴
경전연구를 통한 독도를 추구하는 교종과, 참선을 통한 깨달음을 추구하는 선종으로 분파된다.
  이중 선종은 자신의 내적 성찰에 의해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중시하여  선불교 라고도 한다. 이러한 선종의
근본사상은 진리는 경전의 문자보다는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진다는  교외별전, 이심전심 과 마음에 갑자기 와닫는 체험을 통해 자기
마음의 본성을 깨달음으로써 성불한다는  직지인심 견성성불 에 담겨 있다.
  이러한 선사상의 배후에는 언어와 문자를 초월하여 직관적 지혜와 무위자연을 강조하는 중국의 노장사상과 인도의 공사상이 짙게 깔려
있다.
  선종에서는 언어나 문자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부처의 마음을 중생의 마음에 전하고 수행법으로 좌선을 택한다. 그런데 선종은 좌선을
중시하긴 하나 그것만을 수단으로 삼지 않는 깨달음의 종교로서 일상생활에서도 선을 실천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집단 노동을 중시하고
속어를 구사하는 일상적인 문답으로 종지를 선양했다. 이처럼 인도의 전통적인 좌선이나 수행보다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깨달음을 중시하는
현상은 중국 선불교의 특징으로 간주된다. 이로 인해 그들은 수많은 선사들의 깨달음의 설법과 선문답을 담은 어록을 발간하여 석가모니의
가르침인 경전보다 오히려 중시했다.

    선종의 계보
  이러한 선종은 인도승려 보리달마대사에 의해 중국으로 전해졌다. 선종의 제1조는 부처님의 후계자인 마하가섭이고, 제2조는 아난존자,
제3조는 상나화수존자, 제12조는 (대승기신론)의 저자 마명대사, 제14조는 (중론)의 저자 용수, 제28조가 달마대사로 중국선종의 제1조가
된다.
  이후 제2조 혜가, 제3조 승찬, 제4조는 도시, 제5조는 홍인, 제6조는 혜능으로 이어지는데, 제5조인 홍인까지는 단일계통으로 전해졌으나,
홍인 제자들인 혜능과 신수에 오면서 혜능은 홍인의 정통을 이어받아 강남으로 가서 남종선을 열었고, 신수는 장안과 낙양에서 북종선을
열었다. 이것을  남능북수 라 한다.
  이후 북종선은 쇠퇴하고 혜능의 제자들이 융성하여 청원과 남악의 두 계통이 출현한다. 청원의 후계로
조동종운문종법안종남악의 후계로 임제종과 위앙종의 여러 종파가 출현한다. 당나라에서 송나라에 걸친 5가가 다시
임제종으로부터 황룡 양기의 2파로 나누어져, 선종은 5가 7종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중국 불교의 주류를 차지한다.

    선불교의 생활화
  중국 선종의 6대조인 혜능은 기존의 선종 수행방식에서 변화를 가져왔다. 보리달마대사가 중국의 소림사 동굴에서 9년간 벽만 보고
수도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전의 수행은 한 곳에 자리잡고 조용히 마음을 보는 좌선중심이었다.
  그러다 보니 많지 않은 수도승 중심으로 전래되어왔다. 이에 반해 혜능은 견성을 종지로 삼아 생활선동태선창조선을
주창했다.
  이로써 선종은 민간 속으로 전파되고 선불교의 대중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가 중국 선불교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그의 설법을 담은
(육조단경)의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다. 원래  경 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록한 것을 말하고, 걸출한 스님들의 말씀은  어록 이라 하는
것이 보통인데, 혜능대사만은 예외로  경 으로 취급하고 있다.

      네 마음을 보거라
  (육조단경)은 육조대사가 16년 동안 은둔생활을 지내고 대범사 강단으로 나아가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연설하는 데서 시작하여 열반에
드시는 최후 설법까지를 담고 있다. 모두 10개 부분으로 구성되 있는데, 다른 불교서적에 비해 어렵지 않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읽어볼
만한다. 각 부분에서 중요한 부분을 그의 육성을 통해 직접 들어보자.

    법을 깨닫고 법의를 받다
  대사의 첫번째 음성은  선지식아 모두들 마음을 깨끗이 하여 마하반야바라밀다밀을 생각하라 이다. 그리고 자신의 출생과 출가, 홍인
스님과의 대면 및 홍인 스님의 후계자가 되어 법과 의발을 전수받고 은밀하게 빠져나오는 과정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의발을 탐낸 무리들의
추격과 16년간의 사냥꾼들과의 생활, 인종 법사와의 만남을 이야기한 후 다시 대중들에게 말한다.
   선지식아, 보리반야의 지혜는 세간 사람이 다 본래부터 스스로 가지고 있는 것인데, 다만 마음이 미혹하여 스스로 깨닫지 못할 따름이니
모름지기 큰 선지식의 가르침과 인도를 빌어서 견성하여야 하느니라. 마땅히 알라. 어리석은 자와 지혜 있는 사람이 불성에는 본래 차별이
없는 것이요, 다만 미혹함과 깨친 것이 다를 뿐이다. 이 까닭에 어리석음도 있고 슬기로움도 있는 것이다. 내 이제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여 너희들로 하여금 각기 지혜를 얻게 하리니, 지극한 마음으로 자세히 들어라.
  이렇게 말한 후 큰 지혜로 피안에 이른다는  마하반야바라밀 을 자세하게 설한다.

    공덕과 정토를 밝히다
  다음 날 한 스님이 옛날 양나라의 무제가 달마대사에게  짐이 일생 동안 절을 짓고 스님을 봉양하고 널리 보시를 했는데 어떤 공덕이
있겠습니까?  하고 묻자 달마대사는 이에  실로 공덕이 없느니라 라고 대답한 점을 상기시키며  공덕 에 관해 묻는다. 이에 대사는  안으로
마음이 겸양하여 낮추면 이것이  공 이요, 밖으로 예를 행하면 이것이  덕 이다. 선지식아, 공덕이란 모름지기 자성 안에서 볼 것이요,
보시나 공양을 올리는 데서 구할 바가 아니다.
  이어 서방정토에 관한 질문에  어리석은 범부들은 자성을 밝히지 못하여 자기 몸 가운데 정토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에 부처님이
머무는 곳은 어디든지 항상 안락하다 고 말씀하셨다. 사군아, 다만 마음 바탕에 착한 마음이 가득하면 서방정토가 여기서 멀지 않고, 만약
착하지 않은 마음을 품고 있다면 설사 염불하여도 서방극락에 가기 어렵느니라.

    정혜는 일체임
  정(고요한 마음)과 혜(지혜)의 우선 순위 문제에 대해서도 대사는 이것이 둘이 아니고 한 가지임을 밝힌다.  선지식아, 정혜는 무엇과
같을까? 비유하면 마치 등불과 같으니, 등이 있으면 빛이 있고 등이 없으면 곧 어두우니 등은 빛의 본체요 빛은 등의 작용이다. 이름은 비록
둘이나 체는 본래 동일하니, 이 정혜의 법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그리고  돈오점수 와 관련된 생각을 말한다.  선지식아, 정교에는 본래 돈점이 없건만, 사람마다 성품이 영리함과 우둔함이 있어 더딤과
빠름이 있다. 그러나 본성을 봄에는 차별이 없으니, 여기서 돈점이라는 거짓이름이 있느니라.

    좌선법
   선지식아, 좌선이란 무엇이냐? 이 법문 중에는 걸림도 없고 막힘도 없나니, 밖으로 일체 선악경계를 당하여도 신념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좌이고, 안으로 자성이 원래 동함이 없음을 보는 것이 선이 되느니라.

    참회법
   선지식아, 어떤 것이  참 이며 어떤 것이  회 일까?  참 이란 이제까지의 지은 허물을 뉘우치는 것이니, 지금까지 지은 모든 억압인
어리석고 미혹하고 교만하고 속이고 질투하는 등 죄를 모두 다 참회하여 영영 다시는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회 라 함은 미래의 허물을 뉘우침이니 지금부터 이후의 짓는 바 악업인 어리석고 미혹하고 교만하고 속이고 질투하는 죄를 지금
미리 깨닫고, 모두 다 영영 끊고 다시는 짓지 않는 것, 이것이  회 다. 범부는 어리석고 미혹하여 다만 이전의 허물만 뉘우칠 뿐, 미래의
허물을 뉘우칠 줄 모르나니, 미래의 허물을 뉘우치지 않으므로 앞의 허물도 멸하지 아니하고 또한 뒤의 허물이 생기나니, 이미 앞 허물이
없어지지 않고 뒤 허물이 또 생기니 어찌 참회라 할 것이냐?

    참청한 기연
  여러 사람들의 질문에 대사가 답변하는 내용으로 특히 (법화경)을 3천 번 외웠다는 법달에게 말한다.  너 이제 이름을 법달이나 하나,
부지런히 외울 뿐 마음을 밝혀 법을 보지 못했구나. 공연히 외움은 소리만을 따르는 것, 마음을 밝혀야 보살이 된다. 너 나와 더불어 인연
있으니 내 이제 너 위해 말하노라. 부처님은 말 없음을 오직 믿어라. 입에서 연꽃이 피어나리라.

    남돈과 북점
  당시에 신수가 이끄는 북종선에서는 점점 닦아 점점 깨달아가는 점수점오를 주장하고, 혜능이 이끄는 남종선에서는 수행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단번에 깨달아 단번에 닦아 마친다는 돈오돈수를 주장했는데, 이를 남돈북점이라 한다. 이에 대해 혜능은  법은 본래 하나이건만
사람들이 남과 북을 가른다. 법에는 본래 돈점이 없건만 사람에게 영특함과 우둔함이 있으므로 돈점의 이름이 있게 된다 고 질타한다.

   당의 초청과 거절
  당의 중종이 설간을 보내 대사를 초청했으나 아프다고 사양하며, 숲 아래에서 종신하기를 원한다. 설간과 나눈 대화가 기록되어 있다.

    법문의 대
  대사가 신회 등 10대 제자들을 불러 이들이 훗날 법을 전할 때 강조해야 할 점과 주의해야 할 점을 이야기한다.

    유통부촉
  열반에 들기 전 마지막으로 제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너희 모두 잘 있거라. 나는 이제 간다. 내가 간 뒤에 세속적인 눈물을 흘리지 말고,
사람들의 조문을 받지도 말며 돈도 비단도 받지 말고 상복도 입지 말라. 그렇게 하는 것은 성스러운 법도 아니고, 나의 제자가 아니다. 내가
살아 있던 때와 같이 모두 앉아서 좌선을 하라. 너희가 오직 평화롭고 고요하고 조용히 하여, 움직임도 없고 고요함도 없으며 태어남도 없고
죽음도 없고 옴도 없고 감도 없고 옳고 나쁨도 판단하지도 않고 머무름도 없고 감도 없으면 이것이 대도다. 내가 떠난 뒤에도 법을 따라
수행하면 내가 너희와 같이 있던 때와 한 가지일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 있다 하더라도 너희가 가르침을 어기면 내가 여기 있어도 소용이
없다.

      인간 성찰의 서
  (육조단경)에 담긴 혜능의 사상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모든 사람의 내면에는 불성이 있으며 사람의 본성은 원래 순수하다.
경전을 읽거나 사찰을 건립하거나 부처의 이름을 암송하는 일보다는, 오로지 자기자신의 본성을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자기자신의
본성을 발견하려면 마음이 고요하고 지혜로워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인위적 사고와 사물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앉아서 명상하는 등의 전통적 수법은 무익한 것이니 진정한 마음의 고요란 움직임이 없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본성이
혼란되지 않은 상태이며, 도착된 사고가 없는 상태를 가리킨다. 누구든 자기자신을 보면 어떠한 외적인 도움 없이 즉각적으로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이다.
  혜능은 이처럼 즉각적인 깨달음, 곧 돈오에 대한 혁명적 선언을 하여 온갖 전통적인 불교의 개념과 경전수행법 등을 철저히
배격함으써 점진적 깨달음을 옹호하는 신수의 북종선과 그의 남종선 사이에 메울 수 없는 심연이 생겼다.
  (육조단경)의 곳곳에서 우리는 인간의 영원성과 만인의 평등성, 그리고 혜능의 지혜와 자비가 온전히 우리의 체온으로 맥박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현대의 인간상실, 역사의 방향부재, 이성의 혼미 속을 헤매는 현대인들에게 광명과 생동의 평원으로 안내할 것이다.

법구경

(법구경)
        저자:미상
   진리의 말씀 이란 뜻의 (법구경)은 (수타니파타)와 함께 가장 오래된 경전의 하나다. 423편의 시로 이루어진 이 경전은 부처님께서 직접
읊은 것은 아니지만, 시편 하나하나가 윤리적종교적으로 높은 철학적 가치를 담고 있어, 모든 사람들이 애송하는 경전이다.  경전을
아무리 적게 알아도 법을 따라 도를 행하고 욕심과 화와 어리석음을 버려 지혜가 바르고 마음이 해탈해서 이승에도 저승에도 집착이 없으면,
그야말로 부처님의  제자 라는 구절처럼 평이하면서도 깊은 사상을 담고 있다.


      불교의 주요 경전
    불교의 성립
  불교의 경전은 부처님이 45년간 깨달은 진리를 중생들에게 설법한 내용을 기록한 성전이다. 부처님은 자신의 가르침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부처님의 사후 제자들이 기억했던 내용이 서로 달라 이를 통일할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부처님의 사후 최고 제자인 마하가섭을 중심으로 부처님의 설법을 가장 많이 들은 아난존자가 교리를 암송하고, 부처님의 계율을
잘 지켰던 우파리가 계율을 정리했다. 이를 함께 모였던 500제자들의 승인을 받아 공식적으로 확정지었는데, 이것을 제1결집이라 한다.
  원래는 인도의 고대언어인 산스크리트 어(범어), 지방 언어인 팔리 어 등으로 기록되었다가, 여러 나라 어로 번역되었다. 처음에는
기억하기에 편하도록 짧은 단문이나 싯구로 만들어지다가, 후에는 장문의 경이 편집되었는데, 이는 부처님 사후 100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삼장
  그러나 일반적으로 불교경전이라 하면, 보통 삼장을 말한다. 삼장이란 아난존자가 암기해낸 경장, 우파리가 승려와 승단의 규율에 대해
구술한 율장, 그리고 경장에 대한 주석서인 논장을 말한다. 이와 같은 경율론 삼장을 한꺼번에 모아 정리한 것을  대장경 이라
하는데, 우리가 볼 수 있는 대장경은 세 가지 부류가 있다.
  첫째  팔리 어 삼장 은 팔리 어로 기록된 경전으로, 스리랑카 및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근본성전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법구경)이나 (수파니파타)들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둘째  티벳 대장경 은 티벳 어로 번역된 불경을 말하는데, 인도 범어로 된
원전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세번째는  한역대장경 인데, 한문으로 번역된 불교경전의 총칭을 말한다.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경전은
한역경전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수타니파타)
   수타 는  경 ,  니파타 는  모음 의 뜻으로  경의 모음 이란 의미를 갖는다. 가장 오래된 경전으로 오직 팔리 어 대장경에만 실려 있다.
인간적인 모습의 부처님과 초기의 불교형태를 아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불교의 전문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내용도 소박하고 평이하여
마치 부처님 곁에서 그의 음성을 듣는 것처럼 편안함을 준다. 전 5장 중 제4장만이 (의품경)으로 한역되었고, 제1장에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라는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불교사상의 원천을 알기 위한 가장 적합한 책이다.

    (반야심경)
  정식 명칭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고 줄여서 (심경)이라고도 한다. 우리 나라의 불교의식 때 필수적으로 암송되고 있어 가장 친근한
경전이나, 사실은 600권이나 되는 여러 반야경전의 사상의 정수를 뽑아 262자로 요약한 것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많은 해석서가 있다.
대승불교사상의 핵심인  공 사상을 깨닫는다는 의미를 가지는  반야 란  지혜 를 뜻하고,  바라밀다 는  피안에 도달함 을 뜻한다.
  결국 (반야심경)은 피안의 세계로 이르는 지혜로운 가르침을 밝혀놓은 경전으로,  색즉시공   공즉시색 은 그중 유명한 구절이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리사바하(도달한 때, 도달한 때, 피안에 도달한 때, 피안에 완전히 도달한 때, 깨달음이 있나니
축복하소서) 의 산스크리트 어로 끝을 맺는다.

    (금강경)
  원래 이름은 (금강반야바라밀다경)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반야심경) 다음으로 널리 읽힌다. 중국의 육조 혜능대사의 출가의 동기가
되었던 경전으로, 부처님과 제자들의 대화형식으로 엮어져 있다.
  금강석같이 견실한 지혜의 배를 타고 생사미혹의 세계에서 깨달음의 세계로 도달할 것을 가르친 (금강경)은 견실한 지혜를 얻기 위해서는
사람이나 사물에게 집착하는 마음을 없애고, 보상을 바라지 않는 보시를 베풀도록 설하고 있다.  응무소주이생기심  즉,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라는 구절로 집착이 없는 마음을 강조하고 있다.

    (법화경)
  (묘법연화경)의 약칭이다. 대승불교의 대표적 경전 중의 하나이자 천태종의 근본경전이다. 튿히 중국의 천태대사는 이 경전을 근간으로
천태사상을 선양함으로써, 후에 화엄경과 더불어 중국불교의 쌍벽을 이루게 된다.
  이 경의 핵심사상은  회삼귀일  사상이다. 소승불교의 성문(부처의 음성을 듣고 깨닫는 자)과 연각(부처의 가르침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
깨닫는 자), 그리고 대승불교의 이상적인 인간상인 보살(깨달음을 본질로 하는 자의 뜻으로 자신의 구원에 앞서 남부터 구원하고자 함)의
삼승이 결국 부처님의 일승으로 귀착한다는 것이다.
  대승불교 초기에는 소승의 이상인 아라한을 자신의 이익만을 돌보는 이기적인 존재로 보고, 성문과 연각을 멸시했었으나 (법화경)에서는
이들도 포용하고 있다. 그런 이유로 이 경전의 서두에는 자기의 입장만을 고수하는 독선적 태도를 배척한다고 되어 있다. 모든 불교경전 중
가장 넓은 지역과 많은 민족이 독송해온 대승경전의 꽃이라 할 수 있다.

    (열반경)
  원래 명칭은 (대반열반경)이다. 부처님의 열반을 중심으로 그 전후의 경과를 서술한 (소승열반경)과 부처님의 열반의 의미를 밝힌
(대승열반경)의 두 가지가 있으나, 보통 후자를 지칭한다.
  대승불교의 중요한 3가지 사상이 담겨 있다. 첫째는 불신은 상주한다는 사상이다. 즉, 부처님의 본래 모습은 죽거나 소멸하지 않고 그
자체로 영원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열반은 상락아정이라고 하여, 인생의 고통과 무상을 거치고 나면 변함없고, 즐겁고, 진정한 나와 깨끗한
세계를 발견한다는 사상으로, 인생에 대한 소극적 견해를 뛰어넘어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인생관을 고취시키고 있다. 셋째는 일체중생은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상이다.

    (화엄경)
  원래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으로,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으로 만든 화환으로 부처님을 장엄하게 한다는 뜻이다. (화엄경)은 부처님께서
깨달은 내용을 가장 훌륭하게 드러낸 경전으로 방대한 분량의 대승불교 경전이다.
  내용은 부처님이 성불하는 장면에서 주위의 수많은 보살들이 일어나 그 공덕을 찬양함으로써 시작된다. 부처님의 침묵의 설법으로 그
절대의 경지를 드러내는 가운데 주위의 보살들이 부처님을 대신해서 가르침을 베푼다. 비슷한 모임들이 지상과 천상에서 여러 번 있게 되고,
그 모임에서 보살들은 모든 존재가 불성을 가지고 있고, 모든 현상은 다른 현상의 원인이 되어 상호의존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화엄경)의 마지막 품을 이루고 있는  일법계품 에서는 선재동자가 출현하여 53명의 선지식을 두루 만나면서 도를 추구하는 이야기로
(화엄경)의 가르침을 평이하고도 재미있게 펼치고 있다.

      진리의 말씀
  (법구경)은 범어로는  담마파다 라고 하며  진리의 말씀 이란 뜻이다. 불교의 원시경전과 인도의 여러 문학작품 가운데서 가장 교훈적이고
훌륭한 구절만을 뽑아 모은 교훈집이다.
  편집의 시기는 기원전 4--3세기경으로 추정되고, 그보다 더 오래된 것도 있다. 이 경은 불교의 윤리적인 시의 형태로 나타내어 불가에
입문하는 지침서로 삼고 있다. 방대한 불교성전 중에서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 부처님의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뜻을 주옥같은 문자로
나타내고 있어, 예로부터 불교도들에게 많이 애송되어 왔다.
  부처님의 말씀을 쉽고 평이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장으로 서술하여 초보자를 위해서도 훌륭한 불교 입문서 역할을 하고 있다. 총 26장
423게로 이루어져 있다.
  다음에 인용하는 글들은 (법구경) 중 빛나는 부분들을 인용해 보았다.
  이 말씀들은 깨끗한 상태 그 자체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이 말씀들은 우리를 평온하게 하고 우리의 갈등을 풀어준다. 그리고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며 자유롭게 한다. 즉, 이것은 진리를 갈망하는 영혼 그 자체이다. 우리의 몸과 마음, 정신이 맑아지지 않으면 진리는
멀어지고 깨끗한 본성은 더러워지며 운명은 이리저리 방향을 잃게 되며, 결국 진리에 다가갈 수 없게 되어 어둠 속을 계속 헤매게 될
것이다.
  모든 말씀은 영혼 속에서 불타오르고 고요한 순간이 흐른다. 수많은 모닥불, 수많은 강, 수많은 명상 속에서 그분의 말씀은 우리를 얼마나
살찌우는가. 귀중한 말씀들이 주는 평화로움을 차분히 음미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되돌아보자.

    (교학품)
  깊이 생각하여 방탕하거나 안일한 생활을 하지 않고, 인을 행하며 인의 자취를 배우면 이로 인해 근심이 없으리니 항상 마음에 새겨
자신의 욕심을 없애라.

    (세속품)
  정도를 순순히 행하고 사악한 업에 따르지 않으면 가거나 멈추었거나 누웠거나 편안하고 세상마다 근심이 없다.

    (안녕품)
  이기면 원망이 생기고 지면 스스로 비굴해진다. 승부의 마음을 버려 다툼이 없으면 스스로 평안하다.

    (봉지품)
  이른바 단정한 사람이란 얼굴 빛이 꽃과 같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인색하고 질투하며 거짓 꾸미는 자는 말과 행실에 어긋남이 있다.
능히 악을 버리어 그 근원을 끊고 지혜로워서 성냄이 없으면 이것을 일컬어 단정한 사람이라 한다.

    (도행품)
 생과 사는 덧없이 괴로운 것, 능히 이것을 보는 것이 지혜가 된다. 일체의 괴로움을 떠나려거든 도를 행하여 모든 것을 없애버려라. 생과
사는 덧없이 헛된 것이니 능히 잘 보는 것이 지혜가 된다. 일체의 괴로움에서 떠나려거든 다만 부지런히 도를 행할 뿐이다.
  말을 삼가는 것, 뜻을 지키는 것, 몸으로 선하지 않는 것을 행하지 않는 것, 이 같은 세 가지 행을 닦으면 부처님은 도를 얻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광연품)
  불제자가 되었으면 항상 깨어 있어 스스로 깨닫고 낮이나 밤이나 선정에 들어 그 마음 살피어 보기를 즐거워해야 한다. 사람은 마땅히
생각이 있어야 하나니, 먹을 때마다 스스로 적게 먹을 줄 알면 병고와 탐욕이 적어 정력의 소모를 절제하여 수명을 보전한다.

    (애욕품)
  대저 근심하고 슬퍼하며 세상의 괴로움이 하나만은 아니나 이것은 다만 애욕이 있음에 연유하나니, 애욕을 떠나면 근심이 없다. 근심을
버리면 마음이 편안하다. 애욕이 없으면 어찌 세상이 있으랴. 근심하지 않으며 집착하여 구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편안함을 얻는다.

    (이양품)
  대저 천명에 편안하고자 하거든 마음을 쉬어 스스로 살피고, 의복이나 음식의 수량을 계산할 줄 몰라야 한다. 무릇 천명에 편안하고자
하거든 마음을 쉬어 스스로 살펴 취하여, 얻음에 족함을 알고 한 가지 법을 지켜 행해야 한다. 무릇 천명에 펀안하고자 하거든 마음을 쉬어
스스로 살피며 마치 쥐가 구멍에 몸을 감추는 것 같이 숨어서 가르침을 익혀야 한다.

    (이원품)
  부처님은 진리의 법을 밝히셨나니 지혜와 용기로 능히 받들어 가져 행동이 깨끗하고 더러움이 없으면 스스로 피안에 도달하여 안락을 얻게
된다. 도에 힘써 먼저 욕심을 멀리하고 진작 부처님의 가르침과 계율에 따라 악을 멸하여 악의 끝에 이르면 그 쉽기는 마치 새가 하늘을
나는 것과 같으리라.
  만약 이미 법구를 알았거든 지극한 마음으로 그 도를 본받아 행하라. 이와 같이 하면 생사의 언덕을 건너 괴로움이 다하고 근심이 없을
것이다.

      시대를 초월한 마음 공부의 서
  이상에서 본 것처럼 우리는 (법구경)에서 인간의 미망과 깨달음, 죄악과 미덕, 깨달음의 열반을 이해할 수 있으며, 신앙이 있는 사람이나
없는 사람이나 부처님의 광대무변한 지혜와 대자대비를 알게 된다.
  이 게송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다 간결한 노래의 형식을 빌어 입에서 입으로 전하고자 했던 원시교단 구성원들의 노작이다. 이 경전
중의 가장 큰 특징은 어떤 교리상의 문제나 계율적인 장점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신자가 아닌 일반인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혜의
보편성을 담고 있는 점이라 할 수 있다.
  결국 (법구경)의 요지는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로 귀결된다. 특히 출가 수행자나 재가 신도를 막론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것은 바로 자신의 마음을 닦는 일, 그래서 모든 욕망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이를 위해서는 스스로 밝은 지혜를 얻어야 한다는 (법구경)의 말씀은 (법구경)이 왜 가장 널리 읽혀지는 대중적인 경전으로 자리잡고
있는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된다. 즉 시대를 초월해 현대인들의 마음에 절실하고 간절하게 다가오는 경전 중의 하나가 (법구경)이다.

중론

(중론)
    저자:용수(150? --250?)

  제2의 부처님이자 대승불교 8종의 조사로 불리는 용수의 초기작품으로 인도의 깊은 철학적 사색이 낳은 가장 난해한 저작이다. 대승불교의
(반야경)에 나타난  공  사상을 계승하여 이론적 기초를 명확히 한 용수는 이 책에서  모든 것은 어떤 다른 것과의 연관 속에서 유로든
무로든 파악될 수 있다 는  중관론 을 제시하고 있다.  즉  공 과  연기 의 문제를  유  또는  무 로 단정하지 않는 부정의 부정이라는
중론의 방법을 통해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인도의 중관학파와 중국 삼론종의 근본입장이다.


      파우스트적 생애
  일본의 한 출판사(고단샤)에서 펴낸  인류의 지적 유산  시리즈(전 80권)에는 불교에 관한 저서가 5권이 있는데,
석가용수세친달마선도 등이 그것이다. 이중 용수는 중관파의 연구에, 세친은 유식파 연구에, 달마는 선의 연구에,
선도는 정토교의 연구에 필수적이라는 이유에서라고 한다.
  선종의 14대 조사이자 대승불교 8종의 조사, 그리고 중관학파의 개조인 나가르주나(용수)의 생애에 대해서는 대략 세 가지의 전기가
전해오고 있으나, 사실과 허구를 구별하기가 어렵고 내용 또한 서로 다르다. 여기서는 유명한 번역가인 구마라습이 쓴 (용수보살전)에
기록된 내용을 중심으로 그의 생애를 더듬어보고자 한다.
  남인도 바라문 계급 출신인 용수는 천성이 총명하고 탐구욕구가 강한  파우스트적 인간 이었다. 약관의 나이에 이미
천문지리예언 및 온갖 도술을 체득하여,  마음을 닦고 깨달아야 할 천하의 깊은 도리를 모두 통달했다 고 자신했다.
  하루는 친구 셋과 의기가 투합하여 앞으로 무엇을 하며 즐길 것인가 하고 고민하다가,  은신술 을 배워 육체적 쾌락에 탐닉하기로 한다.
그래서 은신술의 대가를 찾아가 이를 마스터한 후 왕궁에 들어가 궁중의 미인들을 모두 범해버렸다.
  얼마가 지나자 궁녀들 가운데 임신한 여자가 속출했다. 임금은 신하들과 상의하여 왕궁의 출입문에다 잔 모래를 뿌려놓았다. 이를 모르고
왕궁에 다시 들어왔던 네 사람은 발자국을 남기게 되어 병사들이 휘두른 칼에 세 명은 죽고, 용수는 왕 옆에 숨어서 이를 피했다. 이때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욕망은 괴로움의 근원이며, 모든 재앙의 뿌리이다. 덕이 상처입고 몸이 위태로워지는 것은 모두 여기서 생기는 것이다. 만일 내가 여기서
벗어날 수 있다면, 수행자에게 가서 출가의 법을 받겠다.
  육체적 욕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집을 나온 용수는 산으로 들어가 선종 13대 조사인 가비마라에게 출가를 한다. 출가한 지 90일만에
경율논의 삼장을 모두 독송했지만, 완전한 만족을 얻지 못해 다른 경전을 찾아 히말라야로 들어간다. 거기서 대승불교 경전을
전해받는 등, 인도 곳곳을 돌며 아직 보지 못한 경전을 찾아다닌다. 그리고 불교 이외의 수행자들의 글이나 주장을 철저하게 비판하고
그들을 복종시킨다.
  교만한 마음에 사로잡힌 그는  진리에 이르는 길은 아주 많다. 부처님의 경전은 절묘하여 뛰어나긴 하지만 아직 미흡한 점도 있다. 도리에
철저하지 못한 것을 헤아려 기술하여 그로 인해 깨달아서 후학들이 도리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자. 여기에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라고
생각한다.
  이때 대룡보살은 지적 오만에 빠져 있는 그를 딱하게 여겨 심오한 경전이 가득 찬 바다의 궁전으로 안내한다. 그는 90일 동안 경전을
탐독하는 가운데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남을 이롭게 하는 진실을 체득한다. 이윽고 그는 여러 경전이 든 상자 하나를 얻어 깊은  무생법인 ,
즉  공인 진리를 깨달아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 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보살은 그를 남인도로 돌려보냈다.
  용궁에서 나온 그는 깨달은 진리를 인도 전역에 전파하고 저서들을 남겼다. 그중 (중론)가 (화쟁론)은 그가 쓴 것이 확실한 것으로
산스크리트 어로 전해진다.
  그는 불교의 대중화를 위해  나무의 뿌리를 치지 않으면 가지가 기우는 일은 없다. 국왕을 인도하지 못하면 바른 도리가 행해지지 않는다
고 생각하고 왕의 경호대장이 되어 왕을 설복시킨다. 그러자 왕은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만 명의 바라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궁전에서
머리를 깍고 불교의 계율을 받았다. 그러고 난 후 조용히 방에 들어가 며칠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제자가 방을 부수고 들어가보니, 그는
매미처럼 허물을 벗고 죽어 있었다.

      불교사에서 용수의 위치
  인도불교는 시대별로 석가 생존 당시의 원시불교, 석가 입적 후 부처사상에 대한 제자들의 다양한 집단이 형성된 소승불교 시대, 그리고
소승불교에 대한 비판으로 생긴 대승불교 시대로 나눌 수 있다.

    원시불교
  석가는 출가 수행하기 전 태자 시절에 매우 관능적인 궁중생활을 했다. 이에 회의를 느낀 그는 출가하여 고행을 했으나, 고행이 결코
인간에게 만족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후  쾌락주의 와  고행주의 의 양극단을 버리고  중도 의 길을 걷는다. 이 중도를 통해
통찰하고 인식한 끝에 그는 깨달음을 얻고 열반에 이르렀다.
  중도란 구체적으로 8정도(바른 견해판단말행위생활노력생각명상)를 말하고, 그 이론적 근거로
4성제를 설했다. 4성제란 첫째 인간의 삶은 괴로움이고, 둘째 모든 괴로움의 원인 번뇌이며, 셋째 모든 번뇌를 없애며, 넷째 열반의 길에
든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인생의 참모습을  고통 으로 보고 4고(생노병사)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애별이고 , 미워하면서도 함께 살아야
하는  원증회고 , 구해도 얻지 못하는  구부득고 , 인간 육신의 구조 자체가 원인이 되어 생기는  오음성고 를 합쳐  8고 라 했다. 이런
고뇌의 원인을 소멸시키고 고뇌가 없는 열반으로 이르기 위해서는 계정혜를 닦아야 한다고 설했다. 이것을  3학 이라 한다.
불교의 경전은 결국 이런 뜻을 전하고자 한 불타의 가르침을 기록한 것이다.

     부파불교
  석가모니가 입적한 뒤에 제자들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하나로 집결하는 작업을 하고, 그 가르침을 널리 전파하기 위해 교단을 세우기
시작한다. 석가모니의 대제자 마하가섭이 그 일을 주도적으로 시작하여, 석가모니가 45년간 설법했던 가르침(법)과 계율(율)들을 하나로
정리한다. 이것을  제1차 결집 이라고 하는데, 500명 정도가 참여했다. 이렇게 결집된 법과 율은 화합된 교단에 의해 잘 전승된다.
  그러나 석가모니가 입적한 후 100년 후부터 이러한 법과 율을 해석하고 수용하는 데 견해 차이가 생기게 된다. 석가모니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10대 제자들이 모두 죽고 난 뒤부터는 법과 율에 대한 통일성은 사라지게 된다.
  이러한 차이는 점차  보수적인 흐름 과  진보적인 흐름 으로 나뉘어지게 되는데 그 차이는 아주 작은 것이었다. 예를 들어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킬 것인가, 아니면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때와 장소에 따라 달리 표현하기로 할 것인가의 차이였다.
또 자신의 깨달음을 최고의 목표로 할 것인가, 아니면 자신의 깨달음을 통해 중생구제를 최고의 목표로 할 것인가의 차이였다. 전자가
보수적인 흐름이고 후자가 진보적인 흐름이다. 그런데 진보적인 흐름과 보수적인 흐름을 배격하면서 제2차로 경전과 계율을 결집하게 되면서
이 두 견해는 상좌부(보수파)와 대중부(진보파)로 분열한다.
  그뒤 상좌부에서 11파가 나뉘어지고 또 대중부에서 9파가 나뉘어진다. 이때의 불교를  부파불교 라 하는데 각 부파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해석하고 체계화하여 각각의  논 을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는 경율논의  삼장 이
형성된다. 그런데 각각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훈고학적으로 해석하면서 자신들은  논 을 형성하는데 주력하다 보니 불교의 교리는
난해해지고, 출가하여 전문적으로 연구한 사람이 아니고는 그것을 이해하기 어렵게 되었다.

    대승불교
  부파불교가 이렇게 민중들로부터 유리되자 민중 속에서 대중적 불교운동이 자연스럽게 성장한다. 이러한 민중적 불교운동과 대중부 계통의
혁신적인 승려들이 결합하면서  대승불교 운동 이 일어난다. 한마디로 대승불교 운동은 깨달음과 중생구제를 함께 추진하려는 불교운동이다.
그래서  위로는 진리의 깨달음을 추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한다 는 말이 대승불교의 표어가 되었다.
   대승 이란  큰 수레 라는 뜻으로, 모든 중생을 피안의 세계로 날라다주는 큰 수레와 같다는 의미이다. 반면 이들은 종래의 불교를  소승
즉  작은 수레 라 불러, 특히 보수적인 상좌부가  자기만의 깨달음 에 빠져 있다고 비판했다. 당연히 보수적인 상좌부 승려들은 이러한
대승불교의 폄칭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를  정통불교 라고 부른다. 이 상좌부의 대표적인 불파는  설일체유부 다.
  그후 대승불교는 북인도중국한국일본으로 전파되고, 상좌부의 소승불교는 주로 스리랑카태국 등 동남 아시아로
전파된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이처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발전해가면서, 서로간에 깊이 있는 논쟁들이 발생한다. 논쟁을 통해 서로의
정통성으로 입증하려고 했다. 그 과정은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교리와 핵심사상이 체계적으로 정리되는 과정이기도 했다. 서로의 약점을
공격하다보니 약점을 보완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체계적인 교리를 갖추게 된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용수가 (중론)을 통해 보수적인
상좌부의  설일체유부 와 벌이는 논쟁이다.

      힌두교, 소승불교 비판한 대승불교 기본서
  대승불교는 처음에는 소승불교의 번잡한 교리연구를 부질없는 것으로 여기고 이에 반발하여 대중적인 종교운동으로 일어났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승불교도 자신을 철학적으로 무장할 필요를 느꼈다. 그래서 소승불교와 같은 논을 쓰게 되는데
공무자성연기중도 등의 대승불교의 이론적 기초를 정립한 사람이 용수이고, 대표적인 저작이 (중론)이다.
총 2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중론)은 주로 소승불교의 여러 부파들의 사상을 비판하는, 그중에서도 특히 소승불교의 대표적 학파인
설일체유부 를 공격하고 있는 논쟁서다. (중론)의 내용은 매우 난해하다.
  그러면 이제 (중론)의 핵심사상인  공 사상을 설일체유부의 사상과 구별하면서 정리해보자.

    유부철학의 객관적 실재론
  설일체유부의 핵심사상은  삼세실유 법체항유 인데, 이를  일체유 라는 말과 합쳐 말하면  일체의 실유인 법체가 삼세(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 항유이다 라고 할 수 있다. 즉, 세계를 구성하는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법이 있는데, 그것만이 객관적으로 실재하고 법에
인연하여 비로소 존재하는 것은 주관적 관념일 뿐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때 객관적 실재인 법은 사물을 사물되게 하는  이법 을 말하는
것으로 자성을 가져야만 한다. 즉 자기 독립적 실재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색(육신)수(감각)상(사유)행(행위)식(인식)의 여섯 가지에 인연하여 비로소 존재하며,
주관적인 관념이지만 그 5가지 구성요소는 다른 요소에 의존하지 않는 객관적인 실재이다. 다시 말하면, 사물은 생멸변화하기 때문에
무상하며 자아 역시 끊임없이 생멸변화하기 때문에 무아이지만, 이러한 생멸변화로 인한 무상과 무아는 법이 실재하므로써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다섯 가지는  자성 을 가지고 있고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이 다섯 가지가 결합하여 사물이 생기며, 흩어지면 사물이
멸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관적 관념에 기초한 집착을 버리고, 법의 실상을 관조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현실적경험적으로 드러나는 생활의 모습보다는 그 이면에 가치를 부여하여 대중적 호응을 얻지 못했다.

     용수의 공사상
  대승불교의 대표적인 경전은 (반야경)으로, 여기에서는 유부의 실재였던 법조차도 실재가 아니라고 부정하는데, 그 이유는 밝히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용수가 대승불교에 대한 철학적 원리를 제시한다. (중론)에서 용수는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주장하는 것이 아니고,
상대방의 이론이 가지고 있는 논리적 모순을 지적함으로써 그 반대의 논증인 자신의 의견이 자연스럽게 인정되도록 하는 방법인
프리상기카(귀류법,파사현정) 을 사용한다.
  용수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설일체유부의 사상을 정면으로 부정한다. 이러한 용수의 사상은 (중론)의 첫머리에 잘 나타나 있다.
   우주에서는 어떤 것도 소멸하지 않고(불멸), 어떤 것도 생기지 않고(불생), 어떤 것도 종말이 없고(부단), 어떤 것도 항상함이
없고(불상), 어떤 것도 그 자신과 동일하지 않고(불일의), 어떤 것도 그 자신으로부터 나누어진 별개인 것이 없고(불이의), 어떤 우리를
향해 오지 않고(불래), 우리로부터 가지 않고(불거), 희론(형이상학적 논의)의 소멸이라는 훌륭한 연기의 도리를 설하신 부처님을 모든
설법자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분으로 경배한다.
  이 부분은  팔불중도 라 하여 (중론)의 중심사상으로 간주되고 있다. 유와 무의 양극을 피하는 석존의 기본적 입장을 계승한 것이다.
생기는 것도 아니고 멸하는 것도 아니며(불생불멸), 사물이 생멸변화하므로 무상하다는 것은 사물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벗어났지만, 무상한
것 속에 무상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것을 또다른  집착 이라며 그것은 생멸변화에 대한 집착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한다. 그런 관점에서 제행무상, 제법무아, 일체개공이 옳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생이 있기에 멸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과 멸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 생이면서 동시에 멸인 것이요, 그래서 그는
논리적으로 변화를 부정한다. 생과 멸은 서로  의존 하고 있을 뿐, 변화의 과정이 아니다. 이것은 연기를 시간적 인과의 문제로 본 유부의
입장과는 달리  상호의존  문제로 보고 있다. 이처럼 용수는 연기를  상호의존성 으로 파악했다. 즉 인간은 색^수^상^행^식의 다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다섯 가지 역시 사람에 의해 구성된다. 다시 말해 이 다섯 가지가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또 이 다섯 가지의 요소도
사람이 없으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들 요소는 자성을 갖는 실재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자성을 갖는 것이 아니다.
무자성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죽는다. 그러나 그러한 성장과 변화는 사람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들과 자연의 여러
요소들과의 상호의존과 상호제약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따라서 무상한 것이다.
즉,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상호의존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무상함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공이다. 세계의
사물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공이지만 공은 결코 무가 아니며, 다만 자성 없이 조건적으로 생기하는 현상세계의 실상을
그대로 표현하는 개념일 뿐이다. 따라서 공이란 비유^비무이며 중도인 것이다. 또한 공은 연기라는 제법의 실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일단 제법의 실상이 공임을 알면, 그 법들이 아무것도 아닌 무가 아니라 공한 그대로 여러 이름을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다. (반야심경)은
이것을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라고 표현했다.

      중관학파유식학파의 대립과 원효
  위에서 본 것처럼 대승불교, 특히 용수를 시조로 하는 중관파에서는  어떤 것도 참으로 실재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모든 사물은
겉모양뿐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고 주장하고 여러 가지 사상이 상호의존해서 성립하고 있다는 공사상을 정립했다. 하지만 공이란
영원불변하는 무엇이 없다는 것이지, 결코 아무것도 없다는 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불교에 대한 대표적인 오해 중의 하나는  불교는 허무주의 라는 것이다. 이러한 오해는 불교 내부에서도 있었는데, 이는  공 과
무상 의 개념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공은 허무주의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바탕이며 실상이다. 실로 공으로부터 모든
존재가 비롯된다. 따라서 어떤 조건(이것을 불교에서는  인연 이라 한다)에 의해 생겨날 수도 있는 것이 바로 공이요, 이 공이 바로 세계의
참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대승불교는 이 공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중관학파와 유식학파로 나뉘어진다. (중론)을 기본서로 하는 중관학파는 모든 존재란
그 자체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 인연이란 관계에서만 성립된다고 보아 공을 특히 강조했다. 반면 미륵이 지은 (해심밀경)을
근본사상으로 하는 유식학파는 모든 존재가 공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을 인식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유식학파는 모든
사물현상은 오직 인식의 산물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우리의 인식활동을 떠난 사물의 개관적 실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인식대상은
존재하지 않고 인식활동만 존재한다는 유식무경의 철학이다.
  즉, 중관학파는  세계의 모든 것은 공 이라 하여 부정적인 입장이 강했고, 유식학파는  세계의 모든 현상은 다 식 이라 하여 긍정적인
입장이 강했다. 이를 흔히  공유의 대립 이라 한다. 그런데 이들의 입장 차이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더욱 심화되어 인도에서 두
학파의 대립을 극복하지 못하자, 그 해결의 과제는 중국과 한국으로 넘어오게 되었고, 이 과제를 해결한 사람이 신라의 원효라는 사실은
본서의 제1권 원효의 (대승기신론소)에서 살펴본 바와 같다.

바가바드기타

(바가바드기타) (Bhagavad gita)
   저자 미상

  마하트마 간디의 인생 지침서였던 (바가바드기타) (지존의 노래)는 원래 인도의 유명한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제6권의 일부이나, 그
내용상 독립된 문헌으로 읽혀져왔다. 왕권찬탈을 노리는 피비린내나는 전쟁터에서 싸워야 하는 무사의 육체적 고통을 통해 마련되는
성스러운 죽음의 의미,즉 영혼의 해탈에 대한 깊은 성찰을 우리는 (바가바드기타)에서 만나게 된다.

      힌두교의 바이블
   (바가바드기타)는 모든 문학이 제공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아니 아마도 유일하며 진정한 철학시 라고 독일의 인문주의자이자
정치가인 훔볼트는 갈파했다.
  우리가 논어 한 구절을 외우고 있듯이, 인도의 힌두교 신자들은 (바가바드기타)(이하 (기타))의 명언들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다. 사실
(기타)는 이제 인도만이 아닌 전 세계의 고전으로 읽혀지고 있고, 힌두교 신자들만의 경전이 아닌 진리를 사랑하는 세계인 모두의 사랑을
받는 책이 되었다.
  (기타)는 (우파니샤드)와 더불어 인도의 종교적, 철학적 전통의 원천을 이루고 있는 중요한 고전이다.  바가바드기타 란  지존의 노래
라는 뜻으로 이 경전을 설하고 있는 크리슈나의 노래 혹은 가르침이라는 뜻이다. 크리슈나는 많은 힌두교인들이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비슈누(Bisnu)의 화신으로서 등장하여 (기타)를 설한 것으로 되어 있다. (기타)는 원래 인도 고전문화의 총화인 대서사시 (마하바라타)의
제6권의 일부분이나 그 내용상 하나의 독립된 문헌으로 읽혀져 왔다. 서사시 (마하바라타)는 바라타족 가운데서 사촌간인  판두  형제들과
쿠루  형제들간에 벌어지는 왕위 계승을 위한 싸움의 이야기를 줄거리로 하고 있으며, (기타)는 이 이야기 중의 클라리맥스에서 시작된다.
  즉, 판두 5형제 중 셋째인  아르주나  왕자는 그의 사촌들인  쿠루  형제들과 전장에서 만나 살육전을 벌이려고 하는 순간, 그만 용기를
잃고 만다. 차라리 내가 죽으면 죽었지, 동족을 죽이지는 못하겠다고 하자, 아르주나의 마부(실제로는 최고 신)인 크리슈나는 그에게 영혼의
불멸과 이기심 없는 의무의 수행을 역설하면서 정의의 싸움을 향해 나아가라고 왕자를 고무한다. 실제로 크리슈나의 설교에는 이 줄거리와
관계 없는 많은 종교적철학적 사상들이 혼입되어 있다. (기타)는 그 성격에 있어서 하나의 체계적인 철학서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해탈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실천적 성격이 강한 종교적 작품이다. 해탈이란 물론 인도인들이 전통적으로 추구해온 삶의 최고 목표로서,
윤회의 세계로부터 해방을 의미한다. (기타)는 이러한 해탈을 위한 훈련으로서 여러 가지 요가(yoga)의 수련을 가르치고 있는 요가의 고전인
것이다.

  (기타)의 주요내용
  요가행자는 항시 한적한 곳에 처하여
  홀로 자신을 수련할지어다.
  몸과 마음을 제어하며
  바라는 것도 없고
  소유도 없이

  자신을 위해 깨끗한 곳에
  헝겊이나 가죽이나 풀로 덮인
  너무 높지도 않고 너무 낮지도 않은
  고정된 좌석을 마련하고

  거기서 마음으르 한 곳에 모으고
  생각과 감각기관의 활동을 제어하고
  자리에 앉아 자신의 정화를 위해
  요가를 수련할지어다.

  이렇게 자신을 항상 수련하면서
  수행자는 마음이 제어되어
  열반을 구경으로 하는
  내 안에 있는 평안에 이를 것이다.

  음식과 휴식에서 절제를 알고
  행위에 있어서 행동을 절제하며
  잠과 깨어 있음에 절제를 아는 사람에게만
  고통을 없애주는 요가는 가능하다.
            - (6장) 중에서

  저에 대한 은혜로서 당신은
  최고의 자아라 불리는
  지고의 비밀이 되는 말씀을 해주셨고
  그것에 의해 나의 미혹은 사라졌습니다.

  존재들의 생성과 소멸에 관해서
  당신으로부터 자세히 들었을 뿐만 아니라
  오, 연꽃잎을 가진 이여, 당신의 불멸의
  위대함에 대해서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자신에 대해서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오, 지고의 주이시여.
  저는 주로서의 당신의 형상을
  보기 원합니다. 오, 최고의 정신이시여.

  만약 제가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오 주님이시여, 요가의 주시여,
  당신의 불멸의 자리를
  저에게 보여주소서
                       (11장) 중에서

      해탈에 이르는 세 가지 길
  (기타)의 사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요가 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기타)는 하나의 요가경전인 것이다. 요가라는 말은 (기타)에서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가장 일반적인 의미는  정신이 산만하지 않고 제어된 상태 를 뜻한다.
  각종 욕망에 이끌리어 흩어졌던 산란한 마음이 하나의 대상에 고정되거나 제어되고 안정을 얻는 상태를 뜻한다. 이렇게 제어된 사람은
(기타)가 추구하는 가장 이상적인 인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끊임없는 욕구의 악순환과 갈등, 대립과 혼란을 넘어서서 평안과 안식을 얻은
사람이다. 힌두교와 불교의 용어로 말하면 마음이 해방되어 해탈의 경지를 얻은 사람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러한 정신적 평안에 이를 수 있는가? (기타)는 크게 세 가지 길을 제시해주고 있다. 이 세 가지 길은
(기타)뿐만 아니라 힌두교 전체의 핵심으로 파악되기도 한다.

  지혜의 요가
   지 란 주로 영원한 정신으로서 인간의 참자아와 물질적이고 현상적인 자아(몸감각기관지성까지 포함)의 근본적인 차이를
분명히 깨달아 아는 지혜를 의미하며, 때로는 (우파니샤드)적인 범아일여의 진리를 깨닫는 지혜와 신을 아는 지혜를 의미한다. 지혜란
무엇보다도 만물의 근원인 신과 인간에 대한 올바른 통찰로서, (기타)에 의하면 인간은 단순히 물질적 존재만이 아니라, 영원불멸의
정신이다. 이 정신은 육신을 소유하고 있는 소유주 내지 주인과 같은 존재로서, 이 소유주야말로 인간의 참자아인 것이다. 육신의 소유주는
물질로 된 육신적 존재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서, 육신적 존재가 수행하고 있는 온갖 행위와 그 결과, 또한 그것이 겪고 있는 온갖 경험과
정신상태를 초월하여 존재하는 항구불변의 영원한 존재이다.
  인간은 무지로 인하여 이러한 참자아를 인식하지 못하고 오히려 변하는 현상적 물질적 존재를 자아로 오인함으로써, 경험세계의 온갖
갈등과 대립, 소요와 괴로움을 겪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혜를 통하여 바로 이러한 참자아를 인식함으로써, 물질세계의 속박과
현상세계의 무상함으로부터 벗어나, 자아와 모든 존재의 궁극적 근거인 신과 합일하여 영원한 안식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의 요가를 위해서는 세상사를 단념하고 집을 떠나, 홀로 엄격한 금욕과 명상의 생활을 해야 한다. (우파니샤드)의 시대 이래
인도인에게 있어서는 지혜란 단순한 철학적 이론이나 관조로서가 아니라, 포기자로서의 새로운 삶의 양식과 실천적 수련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행위의 요가
  (기타)는 두번째로 행위의 요가를 설하고 있다. 행위의 요가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아무런 집착이나 욕망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행함으로써, 세속적 생활을 떠나지 않고도 해탈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 모든 행위는 업보를 초래하여 그것에 따라 인간을
윤회의 세계에 속박시키지만,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행한 초연한 행위는 아무런 업보를 초래하지 않아 해탈과 평안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행위의 요가는 지혜의 요가와는 달리 행위의 포기보다는 행위 가운데서의 포기라 할 수 있으며, 아르주나와 같이 재가자로서
사회적 의무를 수행하면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길이라 할 수 있다.
  행위를 떠나서 따로이 요가의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행위 가운데서 요가를 이루는 길이기 때문이다. 행위의 요가로서
(기타)는 사회적 의무의 수행과 초세간적 해탈의 추구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해소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신애의 요가
  세번째로 (기타)는 신애(박애)의 요가를 해탈의 길로서 가르치고 있다. 신애란 우주만물과 인간존재의 궁극적 실재이며, 크리슈나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기억하고 사랑하며 무슨 일을 하든 그에게 헌신하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키며, 이러한 신애를 통하여 마음이 오로지
신에게 집중되어 평안을 얻으며, 마침내 신의 은총으로 이르러 그와의 합일을 체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애의 길은 다른 모든 길을 포섭하면서도 능가하는 최고의 구원의 길로서 설해지고 있다. 행위의 요가와 같이 출가자나 재가자, 혹은
사회적 계급 여하를 막론하고 누구나가 따를 수 있는 대중적인 구원의 길이기도 하다.
  이상과 같이 지혜행위신애를 통한 해탈과 영원한 안식의 길을 간단히 살펴보았지만, 이 세 가지 요가는 서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에, 명확히 구분짓기는 어려우며, (기타)의 내용은 이 세 요가에 의하여 집약되는 것보다 훨씬 더 다채롭고 미묘하며 때로는
일관된 사상을 결여하고 있는 듯이 보이기도 하다. (기타)는 결코 논리의 일관성을 추구하고 있는 체계적인 철학서가 아니고, 오랜 세월을
통하여 여러 편집자들의 손을 거치는 동안 다양한 사상들이 편입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기타)가 욕망 없는 행위라는 개념을 통하여 사회윤리적 의무와 해탈이라는 초월적 이상을 동시에 살리는 적극적인 행동의 철학을 전개한
것은 인도 사상사에서 특기할 만한 점으로서, 간디나 타고르와 같은 현대의 인도사상가들에 이르기까지 지대한 영향을 끼쳐왔다.
  (기타)의  지혜의 요가 를 통하여 (우파니샤드) 이래로 고대 인도인이 추구해온 우주와 인간에 대한 신비적 지식을 기반으로 하여
한편으로는  행위의 요가 의 사상을 통하여 전통적인 바라문적 사회질서와 윤리를 옹호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신애의 요가 를
통하여 여자나 노예계급인 수드라까지도 실천할 수 있는 대중적인 구원의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기타 의 사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혜와 신애를 둘 다 강조하고 있으며, 때로는 지식에 수행의 최고목표를 두는가 하면, 때로는 신애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최고의 실로
찬양되기도 한다.
  간디는 그의 자서전에서 술회했다.
   (기타)는 나의 행동의 틀림없는 안내자가 되었으며, 마치 내가 모르는 영어단어를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듯이 나의 모든 어려움과 시련을
해결하기 위해 이 행동의 사전을 찾아보았다.

기학

(기학)
      저자:최한기(1803--1877)
  전통철학의 개념인  기 를 중심개념으로 하여 유학불교도교는 물론 새로 수용된 서양의 과학, 천주교까지 포함하는 방대한
철학체계를 구상했던 최한기는 이 책에서 동양의 유교정신을 바탕으로 서양의 과학적 지식을 수용하여 이 둘을 창조적으로 결합시킴으로써
동서학문의 가교자 역할을 했다. 동도서기론의 사상적 기초로 평가되는 최한기의 기학은 서경덕에 이어 독창적인 패러다임으로 한국철학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평탄한 삶 속에서 완성한 기철학
  실학사상과 개화사상의 가교자 최한기. 그의 호는 혜강 명남루. 그는 세상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으나, 1970년대에 들어와 그의 사상에
대한 관심이 일어났다.
  혜강의 15대 조상은 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최항으로, 사육신을 배반하고 세조를 받들었던 사람이다. 그의 아들이 이조판서를 지냈을 뿐,
그후 가문이 거의 몰락하여 혜강의 아버지는 일찍 죽은 백면 서생이었다. 혜강은 군수를 지낸 큰집의 양자로 들어가게 되고, 후에 양부의
재산을 물려받게 되어 생활은 어렵지 않았다.
  23세에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연구에 전념했다. 그는 천하의 서적을 수집하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중국에서 새로
나온 진기한 서적은 거의 다 구입하여 놀라운 속도로 독파했다. 그는 곧잘 중인 출신들과 어울려 다녔는데, 평민출신으로 저 유명한
대동여지도 를 작성한 김정호와 친분을 가졌다. 32세 때에 그는 김정호와 함께 세계의 지구도를 만들어 이를 판각했고, 또 김정호가 제작한
청구도 에 그 내력을 알리는 글을 썼다. 그가 남의 저술이나 문집에 덧붙이는 글을 쓴 것은  청구도 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이를 보면
각별한 사이였음을 알 수 있다.
  30대 중반에 그의 경험철학을 토대로 한 명저 (기측체의)를 완성했다. 이것은 경험을 토대로 철학이론을 전개한 것으로, 종래의
관념론에서 탈피한 것이다. 어쨌던 이 책은 중국에서 출판되어 중국 인사들에게 널리 읽혀, 서경덕의 (화담집)이 중국의 (사고전서)에
들어간 것과 비유될 수 있다.
  그는 서양의 과학책도 널리 읽어 과학기구나 생활기구의 개량에도 힘을 기울였다. 과학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심기도설) 등의 저술을
내면서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기에 옛것에만 집착하면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말을 하는데 당시로서는 용기가 필요했다.
종래의 실학이 유교이론에 근거를 둔  경학의 실학 이라고 한다면 그의 실학은 과학에 토대를 둔  과학 실학 이라 할 수 있다.
  1860년에는 인사문제에 관한 이론과 실제를 다룬 (인정)을 저술했다. 이 책에서 그는 사람을 옳게 써야 나라를 바로잡을 수 있다고
주장하고 용모행동말씨 등 인물평가의 다양한 방법을 제시했다. 그가 60세 때 그의 아들 병대가 문과에 합격하여 가문의 영광을
드러냈다. 63세부터는 그의 서재를 명남루라 일컫고, 그 자신의 문집을 (명남루집)이라 하여 손수 편집하기 시작했다. 평생 쓴 글을 후세에
온전하고 체계 있게 전할 의도였다.
  그는 평생 스승을 찾아 다닌 적이 없고, 자기의 저술을 자랑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현실문제에 많은 관심을 갖고 동서양의 정신을
융합하여 새로운 이론을 세우려 했다. 그는 실학을 계승했지만 맹종하지는 않았고, 과학에 심취했지만 인문정신도 중시했다. 그래서 그의
저술 속에는 실학과 과학과 인문정신이 담겨 있는 것이다. 그는 경험을 통한 실천을 강조했고, 옛 경서를 끌어대는 관념론자가 아니었다.
그러기에 유학의 이기철학을 독창적으로 정립한 서경덕이 조선전기에 있었다면, 개혁사상인 실학을 새시대에 맞게 정리한 혜강이 조선후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시대적 상황과 저술 배경
    현실적 한계사황
  항상 어떤 사상은 그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혜강이 살았던 19세기는 오랫동안 누적된 구질서의 모순과 세도정치의 폐해가 극에 달해
전국 도처에서 민란이 반발하고 대외적으로 서구열강은 천주교와 과학기술을 앞세워 밀고들어오는 혼란상태였다. 이런 불안한 시대를 사는
지식인인 혜강은 나름대로 이 위기를 수습할 방안을 모색했다. 특히 그가 당시에 서구 과학기술문명에 대한 가장 풍부한 지식의 소유자로서,
이것의 우수성과 필요성을 강하게 인정하고 있었기에 이것을 전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철학적인 바탕의 마련이 절실했다.

    새로운 사유체계 필요
  당시에 한계상황에 이른 구질서를 새로운 질서로 바꾸기 위해 여러 대안이 제시되었지만, 혜강은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새로운 학문의
정립이 요청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곧 구질서의 이념적 토대인  주자학적 성리학 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사유체계의 제시를 의미한다.
이렇게 혜강은 동양정신의 정수인 유교를 토대로 서양과학을 수용할 수 있는 그러한 학문체계를 마련해야 하겠다는 의지를 갖게 되고 오랜
시간에 걸친 탐색과 숙고 끝에 드디어 (기학)을 저술함으로써 그의 의지를 구체화시킨다.
  (기학)은 19세기의 조선조 사회가 봉착한 한계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구질서를 점진적으로 대체함으로써 급속한 변화에 따른 혼란을 막고
세계의 개방화과학화 추세에 맞추어 조선 사회를 개혁 해보려는 혜강의 깊은 고뇌의 소산임에 틀림없다. 다시 말하면 전통적인
학문으로는 당시의 상황을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에 직면한 혜강은 유교정신에 바탕을 두고 서양의 과학기술을 수용하여  기철학 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것이 단지 그 시대에만 유용한 것은 아니고, 시공을 초월한 보편적인 철학서로서 우리에게도 여전히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는 데 이 책을 읽어야 할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실용성과 과학성 추구한 혜강철학
  혜강에 있어 학문은 현실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용성과 객관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과학성을 지닌 것이어야 했다. 그래서 혜강은
감각경험에 의한 검증을 중시하는데, 경험의 보편성은 세계의 근원존재인 기에 의해서 특히 인식의 보편성을 가능케 하는 신기의 추측능력에
의해서 확보된다. 그리고 세게를 구성하고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기의 성질은 관념적이고 형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물질적 감각적인
것이므로 경험에 의해 객관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유교의 현실중시 정신을 계승하면서도 기존의 공허한 학문들을 비판하고 새로운 사유체계를 제시했다. 이 경우 일반적으로
동원되는 방법이 사서삼경 등 유교경전에 대한 새롭고 독자적인 해석을 가하는 것이다. 윤휴박세당정약용 같은 분들이
그들이다.
  그러나 혜강은 이와는 달리 직접 이들 학문의 한계를 비판했다. 특히 그가 이러한 입장에서  성리학 을 비판한 점은 두드러진다. 이것은
그가 유교의 학문정신을 계승하는 데 있어, 유교경전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사유의 공간을 이미 확보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미
동양과는 다른 서양에 대한 폭넓은 지식이 그 밑바탕에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혜강은 이 책의 도처에서 그동안 서양과학이 밝혀낸 새로운 사실들을 언급하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지식들을 그의 새로운 경학관을
정립하는 데 수용반영시키고 있다. 예를 들면 그의 (기학)에서 아주 중요한 비중과 의미를 가지는  운화 라는 용어는 지구의 공전과
자전에 대한 그의 지식과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운화란 일반적으로 운동변화의 의미로 파악되기 때문이다.
  혜강은 서양과학에 의거하여 규명된 지식을 독창적인 경학관 정립에까지 적극적으로 반영시킨, 다시 말하면 동양의 유학 정신을 바탕으로
서양의 과학적 지식을 수용하여 이 둘을 창조적으로 결합시킨 동서양 학문의 가교자 역할을 담당했으며, 바로 이 (기학)은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책이라 할 수 있다.

      동양지식과 서양지식의 결합
    내용 구성
  (기학)은 2권으로 되어 있다. 제1권은 (기학) 서문과 모두 100개의 문단으로 되어 있고, 제2권은 125문단과 그의 장남인 병대가 쓴
발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기학) 서문과 (기학) 발문은 (기학) 전체를 관통하는 글이라 할 수 있다.
  제1권에서는 (기학)이라는 학문이 정립되어야 할 필요성 동기, 그리고 그것의 효과를 강조하면서 기존의 여러 형태의 학문을  중고지학
으로 단정짓고 이들을 비판한다. 나아가 (기학)이 이들 학문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밝히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하고 있다. 따라서 혜강의
학문관이 뚜렷이 부각되고 있다.
  제2권에서는 제1권에서 거론된 견해들을 더욱 압축하여 (기학)의 구체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들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즉, 제1권에서
(기학)의 전체 구조를 해명하는데 빠뜨릴 수 없는 핵심적이도 중요한 용어들이 소개되고 아울러 이들의 개념이 설명되고 있다면,
제2권에서는 이러한 제1권의 내용을 기반으로 더욱 구체적이고 심오한 논의가 전개됨으로써 (기학)이라는 새로운 사유체계가 그 골격을
드러낸다.
  제1권과 제2권에서 다 같이 비중 있게 거론되고 있는 중요한 용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기운화기화대기운화인기운화신기운화천인운화활동운화통민운화방령운화인도^5
,23^천도 등이다.
  사실 이들 용어 중 대부분은 기존이 개념과 다른 새로운 개념을 지니는 것으로서 여기에서 혜강 철학의 독창성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이들 용어들의 의미를 충분히 이해하고, 이들의 상관관계를 제대로 규명하기만 한다면 그의 철학체계가 분명하게 해명될 것이다.

  신기의 역동성
  그는 기를 우주의 근본존재로 파악하고 우주의 모든 존재는 기의 산물로 보았다. 이는 기에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기가 있으면 반드시
이가 있고, 기가 없으면 이가 없다 고 하여 주자학에서 주장하는 이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기일원론을 주장했다. 그는 기를  신기 라고
표현했는데, 이 신기는 단순한 물질적 존재의 근본형태가 아닌 살아 움직이는 현실적 역동성의 개념이다. 이런 의미에서  운화지기 , 또는
천지지기 라고 했다. 기는 우주 속에서 계속적으로 운화(운동, 변화)하면서 모든 사물을 형성하기도 하고 소멸시키기도 하는데, 이런 뜻에서
기를  형질지기 라고도 한다.
  그런데 기의 운화는 막연하고 맹목적인 것이 아닌 일정한 법칙과 조리에 따라 운행한다. 이러한 기의 운동변화의 법칙을  운화지리  또는
유행지리 라 한다. 유행지리 가운데서도 그 객관적 자연법칙이 인간의 주관적 의식에 반영되는 사유의 법칙을  추측지리 라 불렀는데 이
양자가 일치를 이루어 인간과 우주의 조화를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운화지기와 형질지기, 유행지리와 추측지리는 서로 짝을
이루어 혜강의 기철학을 형성하고 있다.
  한편 그는 인간의 사유기관과 감각기관을 갖추고 있어, 세계에 대한 인식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선천적인 지식이란 없으며, 외부의
물질대상에 대한 신기의 경험을 통해서만 인식이 이루어진다. 이때 주체의 신기와 사물의 신기를 통하게 해주는 것은 인간의 감각적 지각과
견문을 통한 경험이다. 즉, 감각기관을 통해 경험된 지각은 경험의 축적으로 생긴 기억과 변통을 통해서 양적 확충을 할 수 있으며, 추측을
통해 경험하지 않은 것에까지 인식의 영역을 넓힐 수있다고 했다.
  그는 모든 사물이 운동변화하며 그 법칙도 변한다고 생각했다. 사회나 인간은 끊임없이 운동변화해야 자연법칙을 어기지 않게
되며, 이를 어기면 폐해가 생긴다. 따라서 사회와 인간의 자연법칙을 위반하고 전진을 방해하는 것이 있을 때는 그 장애를 인간의 힘으로
제거하고, 자연법칙에 맞추는 변통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변통의 사상은 그의 정치사회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학의 학문적 특성
  기학의 학문적 성격에 대해서 혜강은  이 (기학)은 무형지신에 견주어 살피면 유형지신이며 또 이것은 무형지리에 비교하면 곧 유형지리다
라고 하여 기존의 기에 관한 학설은 무형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 그의 기학은 유형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기에
그의 학문은 기일원론과 인식론을 바탕으로 한 학문체계이다.
  혜강이 기화를 밝히고자 한 이유는 살아가는 도리와 학술의 무궁한 실효가 모두 이 기화에 있기 때문이다. 학문의 궁극적인 목표를
실용실사의 추구와 민생의 안정에 두고 있는 혜강으로서는, 그것의 기반이 되는 기화의 규명이 일차적인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이외에도
기화를 규명하는 효과는  남과 나 사이의 간격을 없애는 것 과  모든 사람을 동일한 인기운화 가운데로 귀일케 하여, 대동을 이룩하는 것 도
있다. 어쨌든 기화규명의 노력은 종국적으로는 천인운화의 대략을 통달하는 데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한국철학의 독창적인 패러다임
  (기학) 이라는 새로운 학문체계는 유교의 현실중시와 실용실사정신의 바탕 위에 혜강 자신이 섭취한 서구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지식이 합쳐져서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서양 과학문명이 유입되는 시기에 살면서 이것의 우월성에 충격을 받고 앞으로 이러한
과학기술문명이 주도하는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예견하고, 이에 대비하기 위해 유교적인 도덕규범을 바탕으로 합리적인 사회구성과 생산력
증대를 위한 기술은 서구의 것을 도입해야 한다는 동도서기론의 입장을 제시했던 것이다.

  유학의 과학화
  먼저 (기학)에 담긴 그의 기학은 인문사회자연과학을 포괄하는 학문체계이다. (기학)은 유학에 근거함이 분명하지만,
그는 이 유학의 요체를 성리학의 수기 중심의 인문과학이 아닌 치인 중심의 사회과학으로 보고자 한다. 따라서 수신의 원리보다 치국의
원리가 강조된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원리가 천지자연의 원리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사회과학으로서의 유학을 과학화시킨 학문이
(기학)이라 볼 수 있다.

  전통적 기철학 계승
  혜강은 전통적인 기철학을 계승하면서도 이를 자연과학적으로 해석하여 경학적 실학이 아닌 과학적 실학을 이루었다. 그는 기의 운동을
자연에서의 기의 운동과 인간의 역사로 나누고, 이 둘의 조화 내지 일치를 통하여 이상사회를 추구했다.
  이러한 기의 운동은 기수로 표현되는데, 자연의 법칙은 변함이 없지만, 역사사회의 운동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변함이 있다 하였다.
이러한 기수의 학은 시대가 지남에 따라 점점 발전한다. 그러므로 그의 역사관은 진보주의적인 색채를 띠게 되고, 앞선 실학자들이 지니고
있던 상고주의를 청산하여 새로운 학문과 문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바탕에서 혜강은 무역과 통상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산업진흥의 방도를 역설했다.

  대동 사회 건설
  다음으로 (기학)에서 제시된 세계관은 대동사회의 실현을 궁극적으로 겨냥하되, 이를 위해서 국가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으로서,
개화사상가들의 부국강병적인 국가관과 성리학자들의 평천하적인 세계관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고 이 둘을 잘 조화시키는 데서
발견한다. 혜강은 국가 지상주의적인 쇼비니즘과 추상적인 사해동포주의가 갖는 위험성과 한계를 잘 자각하고 있었다.

  물리개념 규명이 과제
  그러나 (기학)이 갖는 한계로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진리발견에 있어 추측과 경험을 강조하는 혜강이 (기학)에서 아직 검증과 확인이
안된 사실을 열거하고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불교의 영혼불멸성을 부정하면서, 육신이 흩어져 소멸되면 영혼도 흩어져서 천지운화 가운데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이것이 과연
어떻게 증명되고 확인될 수 있는가? 하는 점 등이다. 이러한 의문점은 혜강이 무엇보다도 먼저 천인운화지리 또는 운화지리로 표현되는
물리는 사실로서 검증되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하므로, 당연히 제기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본다.
  다시 말하면 (기학)의 최대과제는  물리 의 정체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규명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물리는 (기학)의 성립근거이기
때문이다. 이밖에도 북한 학자들의 주장처럼 혜강이 유물론자이며 무신론자인가, 이것이 아니라면 그의 철학적 성격을 어떻게 규정지어야 할
것인가도 앞으로 해명되어야 할 과제로 남게 된다.
  결국 혜강은 유교철학의 근본문제를 계승하고 재해석하면서 하나의 창조적인 사유체계를 제시하여 화담 서경덕에 이어 한국철학의 새로운
가능성을 정립했다는 점에서 그 자신의 독창적인 철학체계의 보편적 가치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하겠다.

매월당집

(매월당집)
      저자:김시습(1435--1493)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하고 이방인의 삶을 살다간 김시습의 고민과 사상을 담은 책으로, 조선 초기의 문학사와 철학사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정치한 성리학 이론의 전개와 심도 깊은 불교사상, 그리고 도교에 관한 그의 관심을 엿볼 수 있을
뿐더러, 암울한 시대를 만나 힘겹게 살아가는 한 천재의 고민과 삶에 대한 태도를 만날 수 있다.


    암울한 시대를 힙겹게 살다간 지식인
   생이지지(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자) 란 칭호를 들은 김시습. 신동의 탄생을 알리는 전주곡은 그가 태어나던 전날 밤, 성균관 유생들이
꾸었다는 공자의 꿈으로 시작한다. 그는 지금의 서울 명륜동 성균관 부근에서 신라 김알지 왕의 42세 후예로 출생했다. 과연 그는 보통
어린애와는 달라서 8개월에 글을 읽고, 3살 때에는 글을 지었다.
   시습 이란 이름은 논어 첫머리의  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에서 따온 것이니, 재주만 믿지
말고 끊임없이 노력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 5세에 (중용)과 (대학)을 배우고 신동으로 소문이 나자, 소문을 들은 정승 허조가 그를
시험해보기 위해 그의 집에 들러, 나는 늙었으니  노 자를 사용하여 시를 지으라 하니  노목개화심불노(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나, 마음은
늙지 않았네)라고 했다 한다.
  세종께서도 스스로 보고자 했으나, 남의 이목을 의식하여 신하를 시켜  너무 드러내지 말고 잘 가르치도록 해라. 나이가 들고 학업이
성취되면 내가 크게 쓰겠노라 하고 비단 50필을 주었다. 신동 김시습은 이후 15세까지 (논어) (맹자) (주역) (예기) 등을 김반, 윤상 등
당대의 석학들에게 사사했다.
  그러나 세종 이후 정치가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자, 그는 심사가 뒤틀렸다. 그는 삼각산에 들어가 독서에 전념하던 중, 세조의
왕위찬탈 소식을 듣고 수주일이나 두문불출하면서 대성통곡을 했다. 그리고 읽던 책을 모두 불사르고 머리를 깍고(법명은 설잠) 일단 서울로
나왔다. 그후 평양으로, 관서관동으로 발 닿는 대로 전전하면서, 백성들의 삶을 직접 체험했다. 그리고 시문으로 그의 울분을
토로했다.
  불의가 난무하는 현실과 이상을 어떻게 승화시킬까 생각한 나머지, 31세 때에 경주 남산 금오산에 들어가 비분강개한 마음을 달래며
남녀간의 사랑을 주제로 한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저술했다. 이때 그는 금오산의 용장사에서 천년고도의 풍물과 인생을 관조하면서
창작에 열중했다. 그러나 건강악화로 당시 그의 시문엔 음울하고 처절한 심경 등이 담겨 있다. 이렇게 지내던 중 효령대군의 부름으로
원각사 낙성식에 참가하여  원각사 찬시 를 지어올리고 다시 낙향했다.
  금오산실로 돌아온 그는 술에 취해 차가운 달빛 아래서 매화를 바라보기도 하고, 대나무에 부는 바람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리고 시로써
수탈에 못 이겨 유랑하는 농민의 참상과 고통을 담아냈다. 금오산실의 김시습은 병고에 시달렸으나, 동가숙 서가식할 때보다 고달프지는
않아 저술에 몰두할 수 있었다. 당시 남긴 소설들은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남염부주지) (용궁부연록)으로 이들은
(금오신화)로 엮어졌다.
  산에서 6--7년을 병고에 시달렸던 그는 무엇인가 새로움을 찾고자 했다. 마침 그동안에 세조도 죽고 성종이 즉위하여, 문치를 표방하고
널리 인재를 구하고 있었다. 37세 때 금오산실을 하직하고 상경했으나 신숙주서거정정창손김수온 등이 출세한 것을 보고,
그는 일단 근교에 폭천정사를 짓고 농사를 직접 지으며 생활했다. 거기서 남효은김일손 등과 어울렸고, 47세에는 머리도 기르고 일시
환속하여 새로운 여자를 만나 새생활을 기약했다. 그러나 속세와는 인연이 적었던지, 1년도 못되어 부인을 사별하고 실의에 빠져 다시
심산유곡을 찾아 방랑길을 떠났다.
  그는 상처 후 승려의 신분으로 산수자연을 유랑하다가 충청도 홍산의 무량사를 마지막 안식처로 삼아 불운한 삶을 마감했다.

    김시습의 사상
  율곡 이이가 쓴 (김시습전)에는 그를  심유적불  즉  마음은 유자이나 그 행적은 불자였다 라는 표현이 있다. 한마디로 그는  승복을 걸친
유학자 라는 것이나, 불교계 인사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매월당집)에 나타난 그의 사상은 정치적 유교사상 위에 그의 해박한
불교지식을 적용하고 도교에도 지속적인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유교사상
  그는 수확기에 당대의 유학자들에게서 경서류를 배웠으며 20대 이후 승려의 신분으로 방랑생활을 하는 가운데서도 항상 경서류를
가까이하여 유교의 본질을 탐구했다. 그의 정치사상은  왕도정치 였고, 이를 위해서는 (대학)에서 말하는 격물치지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의
정치사상은  왕도 의 고취와  패도 의 규탄이 핵심인데, 이 사상을 바탕으로 특히 인재 등용의 신중과 공평성, 가렴주구의 배격과
절약명분의 중시 등을 강조했다. 이러한 인본주의 내지 민본주의 정신은 공맹의 사상을 현실적으로 실현해보려는 유학자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불교사상
  한편 조선의 개국과 더불어 시작된 억불정책은 불교에 치명적인 타격이 된다. 그러나 세종과 세조는 불교의 종교적 기능을 인정하고,
비공식적으로 불교를 보호하게 된다. 김시습은 세종 만년의 호불에 영향을 받아 출가했는데, 그 이후 세조의 호불책, 성종의 억불책을
겪으면서 이십대 이후 거의 만년에 이르기까지 38년간 승려신분을 유지했다. 그의 깊은 불교의 경지는 그가 남긴 불교관계 저술인
(화엄경석제) (십현담요해) (조동오위요해) 등을 통해 나타나고 있으며, 율곡 이이도 이를 기록으로 인정하고 있다.

    도교사상
  현실에 안주하지 못하고 건강마저 좋지 않았던 그는 불로장생의 도인도가사상으로 관심을 확대했던 것 같다. 그의 시에는 노장
사상에 심취한 흔적이 역력하며, 신선술에도 능하여 장생의 도를 논했다. 도선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고 몸소 선도를 닦았기 때문에, 후세에
그의 인물이 마치 도술가처럼 과장된 점도 없지 않다. 조선 후기 도인들은 환인 단군을 우리 나라 도파의 시조로, 김시습을 중조로 내세울
정도로 그가 도교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적지 않다.

    폭넓은 사상과 탁월한 문장의 결실
  (매월당집)은 권수 시집 15권, 문집 6권, 부록 2권으로 되어 있고 6책으로 장정되었다. 본집은 이자박상윤추년 등이
수집발간한 것을 기본으로 하여, 선조 때에 율곡 이이가 왕명을 받들어 전기를 써서 올리고 곧 예문각으로 하여금 간행케 했으며,
이듬해 겨울 이산해가 왕명으로 서문을 써 넣은 것이다.
  권수에는 김시습의 생애와 (매월당집)의 간행 연혁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김시습의 가계가 신라 왕통임이 기록되어 있다.
제1권부터 제15권까지는 총 1700여 수의 시가 수록되어 있는데, 어느 것이나 비분강개한 심정을 토로하고, 세상을 조소하고 있는 것들이다.
  문집은
소부금조사소주잡저잡설논찬전설변의명잠고편
서서 등이 들어 있고 부록 두 권은 그의 기행이 담겨 있는 유적수보기영전명문발 기타가
수록되어 있다.
  그럼 본문에 들어 있는 그가 남긴 작품을 몇 편 감상함으로써 그의 사상을 더듬어보자.

  10년 동안 떠돌이 되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 보니
  이내 몸은 도시 밭둑 가의 쑥대로구나
  세상 살아가는 길은 모두 험하고 위태로우니
  아무 말없이 꽃떨기나 냄새 맡고 지내는 것이 좋으리로다

이 시는 고단한 속세를 떠나 산중에 은거하고자 하는 자신의 심정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방랑중에 농민의 참상을 목격하고 다음과 같이
부정한 관리들을 고발했다.

  원님이 어질고 자애로워도 허덕이는 살림살이일텐데
  이리 같은 벼슬아치 만났으니 백성은 정말 가엾구나
  며느리 짐 이고 시아비 손자 끌어 길에 가득하니
  어찌 주리고 얼어죽는 것이 풍년 아니기 때문이랴

다음과 같은 시도 탐욕스런 대지주와 위정자를 질타한 것이다.

  자갈밭에 바윗돌이 울퉁불퉁
  온통 가시덤불 등넝쿨 얽혀 있네
  땅은 토박한데 잡목만 자라고
  밭 둔덕 경사져 곡식 자라지 못하는구나
  굶주린 까마귀 나무 끝에서 울어대고
  여윈 송아지 둔덕에 누워 있네
  이같이 깊은 산골인데도
  해마다 세금이야 면할 수 있으랴

  그러나 계속된 방랑과 폭음, 그리고 깊은 고독으로 그는 거의 폐인이 되다시피한 상태에서, 마지막 안식처인 무량사에서 다음과 같은 시를
남긴다.

  봄비가 주룩주룩 이삼월에
  모진 병 붙들고 선방에서 일어나
  중생에게 서쪽에서 온 뜻을 묻고자 했으나
  다른 중들이 기리고 높일까 두렵구나

  그는 매사를 비웃으며 평생 동안 폭음하고, 취하면 아무 데서나 잤으며 아이들의 돌팔매 대상이 되기도 할 만큼 기행을 계속했다.
   김시습은 광승 노릇을 하였으므로 파계는 말할 것도 없고 해괴망칙한 행동을 일삼았다. 그러나 스님들은 그를 은근히 존경하고 섬기었다.
하루는 스님들이 불법의 강설을 청하였는데 김시습은 크게 법연을 개설하고, 스님들을 모은 다음 가사와 법의를 갖추어 입고서 강설할
것처럼 했다.
  그러나 강설은 하지 않고 소 한마리를 끌고 오라 한 후 소먹이 여물을 가져다 소 뒤에 놓게 하고는 큰 소리로 웃으면서 너희들이 내
강설을 들으려 하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라고 조롱한 일도 있고, 또 김시습의 학문을 듣고 배우기를 원하여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돌을
던지고 나무장대를 휘둘러 못 들어오게 한 일도 있었다.

    왕도정치에 기초한 애민 사상가
  무량사에서 어느 날 그는 붓을 잡고 자화상을 그렸다. 그런 다음 그 자화상 위에 이런 글귀를 써넣었다.  너의 모양은 조그만하고, 너의
말은 크게 분별이 없구나. 너는 구덩이 속에 처박아 두어야 마땅하다.  인생을 마감하며 남긴 말이었다. 철저한 자기반성의 글귀였다.
  그는 이상과 현실의 갈등 속에서 어느 곳에도 안주하지 못한 채 기구한 일생을 보냈는데, 그의 사상과 문학은 이러한 고민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국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얻은 생활체험은 현실을 직시하는 비판력을 갖도록 했고, 현실의 모순에 대한 그의 비판은 부정한
위정자들에 대한 비판과 연결되면서, 애민에 기초한 왕도정치의 이상을 형성시킨다.
  한편 당시의 사상적 혼란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은 유불도 3교의 원융적 입장에서 일치시키는 노력을 나타난다. 불교적 미신은
배척하면서도, 불교의 종지는 자비로 만물을 이롭게 하고 마음을 밝혀 탐욕을 없애는 길이라고 했다. 또 합리적인 도교의 신선술을
부정하면서도, 기를 다스림으로써 천명을 따르게 하는데 그 가치가 있다고 했다. 즉 음양의 운동성을 중시하는 주기론적 성리학의 입장에서
불교와 도교를 비판, 흡수하여 그의 철학을 완성시키고 있는데, 이런 철학적 깨달음은 궁긍적으로는 현실생활로 나타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분명히 불행한 삶을 살았다. 살아서 그의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기도 했고 시샘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죽어서는 수많은 일화로
민중의 가슴 속에 깊게 자리하고 있다. 지조를 위해 현실에 대한 참여를 거부했으나 민중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그의 시를 통해 절절히
흘러나왔고 노동 자체를 신성하게 여기는 지사였다. 그는 현실사회의 모순에 철저하게 저항한 진보적 지식인이요, 폭넓은 학문을 가진
사상가요, 섬세한 정서를 가진 시인이었다.

원돈성불론

(원돈성불론)
    저자:지눌 (1158--1210)
   선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라는 말로 당시 대립하던 선과 교가 둘이 아닌 하나(선교일치)라고 주장하여, 교종과
선종의 대립을 차원 높게 극복한 지눌의 핵심사상은  돈오점수 이며 그 실천방법은  정혜쌍수 다.  돈오점수 란 먼저 중생의 마음이 바로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후에도 수행을 계속해야 한다는 뜻인데, 그뜻을 담은 책이 (원돈성불론)이다. 정혜쌍수란 정(산란한 마음을
고요하게 함)과 혜(진리를 바로 봄)를 함께 닦아야 한다는 뜻으로 그의 (권수정혜결사문)에 잘 나타나 있다.

    세 번에 걸친 깨달음의 과정
  원효 - 지눌 - 효정 
  대승불교의 2대 조류인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첨예한 대립이었던 공, 유의 대립을 불교의 원산지인 인도에서도 해결하지 못하자, 이를
원효가 그의 독특한  화쟁사상 으로 해결했음은 본서의 제 1권 (대승기신론소)에서 살펴보았다.
공유의 대립이란  세계의 모든 것은 공 이라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 중관학파와,  세상의 모든 현상은 식 이라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 유식학파의 대립을 말한다. 원효는 이를 화쟁사상에 입각하여 두 학파 모두가 한측면만을 보고 전체를 보지 못했음을 지적했다. 화쟁의
논리란  서로 다른 의견을 살리면서도 이를 잘 화합하여 하나로 만드는 논리 를 말하는데 이것은 모든 대립을 서로 세워주면서도 동시에
이를 극복하는 방법을 말한다. 이 방법으로 원효는 두 학파의 주장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부정하여 하나로 통합했던 것이다.
  이러한 원효의 사상은 고려의 지눌에게 연결되어, 당시 극심하게 대립하던 선종과 교종의 대립을 차원 높여 해결하게 했고, 조선시대의
휴정 (서산대사)에게도 영향을 주어 통불교적인 성격의 한국불교의 특징을 이룬다. 즉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의 불교가  원론적 이었다면,
중국불교는  각론적 이었고 한국불교는  통합적  성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8세에 출가
  원효서산대사와 함께 한국적 통불교 건설의 주역자이자 조계종의 창시자인 보조국사 지눌. 지눌은 그의 법명이고 호는 목우자(소를
키우는 사람. 불교에서는 소를 진리로 안내하는 동물로 간주)인데, 황해도 서홍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당시 국립대학에 해당하는  국학
의 교수로 있었다.
  어려서 병이 많았으므로 부모들은 부처님 앞에 발원하고 그를 8세에 종휘선사에게 출가시켰다. 그 뒤로 25세에 개경에서 개최한 승과
(선종승려의 자격시험)에 합격하여, 장차 왕사나 국사가 될 수 있는 등용문을 일단 통과한 셈이었다. 그 당시 임금의 정치 자문역할을 하는
왕사에게는 임금도 절을 할 정도로, 국사가 되면 온나라의 정신적 스승으로 존경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불교의 본연의 길이 아니라, 명예와 출세를 위한 길임을 간파하고 합격한 친구들과 다음과 같이 맹약했다.  이것은
명리의 길이니 우리는 참된 수도자가 되기 위해 이 길을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며, 뒷날에 새로운 수도의 결사를 하고 정혜 쌍수하자.
그리고 그들은 흩어져 각자 수도의 길을 떠났다.

    (육조단경)과의 만남
  지눌은 남쪽으로 내려가 창평 청원사서 중국 선종의 6대 조사인 조계 혜능대사가 지은 (육조단경)을 읽고,  진여자성(본래의 참된
성질)에서 생각이 일어나면 보고 듣고 분별해 알며 만경에 물들지 않고 진성(만물의 본체)이 언제나 나에게 있다 는 대목에 이르러 자득했다
한다. 이것이 첫번째 깨달음이었다. 그후 그는 평생 동안 조계 혜능대사를 흠모했고, 후에 송광산 길상사를 조계산 수선사로 개칭할
정도였다.
  28세에는 하가산 보문사에서 대장경을 열람하였다. 참선을 주로 하는 선종 승려인 그가 교종에서 중시하는 경전을 열람하게 된 것은
참선을 통해 깨닫고자 하는 선종과, 독경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는 교종이 서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눌은 과연 교와 선이
근본적으로 다른 것인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수많은 경론들은  마음을 밝히라   마음을 닦으라   본성을 찾아라 고 가르치고
있었는데, 이것은 선종에서 주장하는 바와 일치했다.

    이통현의 (화엄론) 만남
  그리고 당나라 이통현 거사가 지은 (화엄론)을 읽고 두번째 깨달음을 얻은 후, 드디어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요,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므로 둘이 아니고 하나다 라는 결론을 내리고 그뒤  선교일치 와  정혜쌍수 의 새로운 지도체계를 세우게 되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선종이 독립하면서 생긴 상호간의 장벽을 일시에 거두었다. 이것은 인도적인 교와 중국적인 선을 한데 묶어 한국적 회통불교를 건립한
불교사상 일대 혁명이었다.
  일찍이 당나라의 정혜선사 종밀이 선과 교가 본디 둘이 아니었는데 후세에 학도들이 아집과 편견에 의해 분파되었다고 지적은 하였으나,
그에 따른 실천운동은 없었다. 그런데 지눌은  지행일치 정혜쌍수 의 실천수행을 함으로써 중국에서 볼 수 없었던 통불교가 실현되었다.
선교불이의 이념 아래 33세의 지눌은 팔공산 거조사에서 4, 5명의 도반들을 모아 정혜사를 조직하고 (권수정혜결사문)을 발표했다.  명리를
버리고 산림에 은둔하여 모임을 결성하고 항상 선정과 지혜를 함께 익히며, 예불과 독송으로부터 노동에 이르기까지 각자 맡은 일을 잘
구하면서 마음을 수양하며, 한 평생 자유롭고 호쾌하게 지낼 것 을 기약했다. 이 결사에는 왕족관리등과 수백 명의 승려가 참석하기도
했다.

    (대혜어록)과의 만남
  그후 40세에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참선에 몰두하다가 중국의 대혜선사가 지은 (대혜어록)을 열람하던 중  선이란 일체경계에 구애됨이
없이 마음 자체가 독립하여 자유자재해야 한다 는 구절에 이르러 세번째 깨달음을 얻는다. 그로서는   고의 종교적 체험이었다 한다.
  42세 때 정혜사를 거조암에서 순천의 송광산(지금의 조계산)의 길상사로 옮기고 그 깨우침의 본격적인 실행에 옮긴다. 왕명에 의해 송광산
길상사를 조계산 수선사로 고치고, 신앙결사 단체인 정혜사도 수선사로 개명했다. 이 수선사가 현대 조계산 송광사다. 수선사는 선종과
교종의 일치를 위해 노력했고, 이들의 수행방식은 그후 한국불교에 면면히 계승되고 있다. 지눌은 53세에 법상에 올라 설법하고 대중과
문답을 마친 뒤 조용히 앉아서 육신을 벗었다.

      선교의 대립과 지눌의 혁신운동
    교종과 선종
  불교의 인생관은  욕심에서 비롯되는 괴로운 삶 이다. 이 고통을 없애는 길은 욕심을 버리고 이 세상의 참모습을 깨닫는 것이 중요한데,
이러한 깨달음의 경지를  열반 (nirvana)이라고 한다.
  부처님은 열반에 이르는 방법으로 명상과 깨달음을 말했다.  붓다 (Budda)라는 말도  깨달은 사람 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부처님의
가르침을 깨닫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경전 을 연구하는 교종이고, 다른 하나는  참선 을 위주로 하는
선종이다. 선종은 9년 동안 면벽수도한 인도의 달마대사가 중국에 와서 시작한 것으로 인간 마음의 본성을 제대로 찾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이다. 이러한 선종이 우리 나라의 통일신라에 전수되어 9산을 형성하면서 교종과 대등하게 발전하였다.
  불교를 국시로 내세운 고려시대 들어와 이들의 대립은 표면화된다. 고려불교의 특징을  교종과 선종의 갈등 이라 할 만큼 그 대립은
심각했다. 그런데 왕권강화와 국론통일을 위해서도 교종(이론체계)과 선종(실천방법)의 화합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요청이었다. 고려
초기의 불교는 대각국사 의천의 활약으로 교종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무신란 이후에는 불교계에 새로운 움직임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선종의 부흥 과  신앙결사운동의 전개 로 요약할 수 있다.
당시까지 왕실의 비호를 받으면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던 교종 중심의 불교계는 종래의 권위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무신정권에 대해
반발하게 되고, 이로 인해 최씨정권이 수립되면서부터는 그들의 가혹한 탄압을 받게 되어 교종은 급격히 쇠퇴했다. 그대신 의천 이후 침체해
있던 선종 세력이 최씨 정권과 제휴함으로써 급격하게 부상하였다.

    최씨정권과 선종의 결합
  무신정권과 선종의 결합은 신라하대에 선종이 호족들에게 환영받았던 사실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선종은 경전을 통한
복잡한 이론적 접근을 취하는 교종과는 달리, 참선에 의한 불교신앙을 그 중심으로 삼았기 때문에 소박한 무인들에게 친근감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선종의 혁신성은 종래의 문신귀족에 의한 기성질서를 무너뜨리고 성립한 무신정권의 성향에 맞는 것이었다.
  이처럼 지눌이 살았던 시대는 불교외적으로도 혼란한 상황이었다. 무신란과 최씨 무단정권의 집권 등으로 사회 기강이 문란해지고, 정치는
혁명과 반혁명의 와중에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눌은 시대족 혼란과 불교계의 갈등을 통합하기 위해 일생 동안 노력하게 된다.

    완전하고 단번에 부처가 되는 논서
  선교의 대립을 먼저 인식한 사람은 고려 초기 천태종을 창시한 대각국사 의천이었다. 그는 교종과 선종의 통합을 주장했으나, 어디까지나
교종을 위주로 하는 것이었다. 즉 천태종 교단에 선종 9산의 승려를 많이 흡수하고 그의 저서 (신편 제종교장총록)에는 선종에 관한 서적을
하나도 넣지 않았다.
  이러한 의천의 정치적인 선교의 통합보다 지눌은 좀더 근원적인 화합을 모색했다. 또 중국에서도 종밀에 의해 선교일치 사상이
대두되었으나 별다른 발전을 보지 못한 것에 비교한다면 상당한 성과를 거둔 것임에 틀림없다. 그는 9산선문을  조계종 으로 통일하고,
선종의 입장을 취하면서도 선과 교 모두를 포함하는 독창적인  돈오점수 사상 을 제시했다. 그리고  정혜쌍수 라는 실천운동을 전개했다.
  (원돈성불론)은 지눌이 선교 양종이 대립하게 되자, 이를 개탄하고 선종의 처치를 밝혀 교종의 이해를 돕고자 쓴 책이다. 내용은 주로
화엄경에 입각하여 성불의 도리를 밝힌 것이다. 특히 이통현의 (화엄신론)이 많이 반영되어 있어 그의 독창적인 저술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 글은 지눌이 입적한 뒤에 글상자에서 발견된 것을 그의 제자인 진각국사 혜심이 간행한 것이다. 여기서  원 은  완전하다 의 뜻이고  돈
은  단번에 뛰어오른다 는 뜻으로 결국 (원돈성불론)은  완전하면서도 단번에 부처가 되는 논서 라고 생각된다. 내용은 문답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돈오점수
  지눌의 주요 저서인 (원돈성불론) (권수정혜결사문) 그리고 인간의 참다운 모습을 밝힘으로써 이 세상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밝혀놓은 (수심결)등 전체를 일관하는 사상은  돈오점수 이다. 이는 인간의 마음이 부처라는 사실을 먼저 깨닫고(선 돈오) 이를 바탕으로
수련을 계속해야 한다(후 점수)는 뜻이다.
  그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 밖에 부처가 있고 인간의 본성을 떠나서 따로 진리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아무리 열심히 도를 닦아도 절대로
진리를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 마음(자심)이 참부처(진불)이며, 나의 본성(자성)이 참진리(진법)라는 생각이 그의 일관된 사상이다.
  마음이 어두워 어쩔줄 모르는 사람은 먼저 마음을 깨쳐야 한다. 마음을 깨친 사람이 다름아닌 부처다. 그러므로 진리를 깨달으려는 자는
눈을 밖으로 향하지 말고 안으로 돌려 자기의 마음을 밝혀야 한다.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성자들은 누구나 마음이 밝아진 분들이었다고
역설한다.
  그럼 내 마음이 참부처이며 내 본성이 참진리라면 어찌하여 지금의 나는 이와 같이 어리석은가? 이런 물음에 지눌은  나는 어리석다 고
보는 그 생각에 억눌려 자기의 불성을 확인하지 못할 뿐이므로, 먼저 그 생각을 중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밤낮 스스로 부처노릇을 하면서도
부처인 줄 모르고 부처를 따로 찾고 있기 때문에  미했다  하고, 이런 사람들을 중생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중생이 바로
부처이지 중생을 떠나 따로 부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자기가 바로 부처임을 깨달으면 부처로서의 영원한 면과 무한한 능력이 나타나야 할 텐데 왜 오늘날 깨달았다는 사람에겐 이러한
면이 나타나지 않는가? 이에 대한 지눌의 답변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우매한 중생의 눈으로 알아볼 수 있도록 부처로서의 영원하고 무한한 면을 나타내려면 그것은 신통을 부리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진리를
깨달은 부처의 세계에서는 신통을 부린다는 것이 지극히 지엽적일 뿐만 아니라, 요망스러운 짓에 속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산에 가서
나무하고 우물에서 물 긷는 것이 모두 신통 아닌 것이 없는데, 이것 밖에서 신통을 찾으니 중생을 떠나 따로 부처를 찾는 것과 같은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또 하나의 답변은  이치를 깨닫는 것 과  실제로 그렇게 된다 는 것과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 이론은 지눌의 사상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대목이면서, 동시에 많은 논쟁을 야기하고 있는 부분이다. 부처는 분명히 모든 관념적인 제약을 벗어나 자유로운 존재이지만 우리는
그동안 너무나 오래도록 나쁜 습관에 젖어 있어 일시에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때문에 이제까지 몸에 밴 습관마저 완전히 제거하려면
깨달은 다음에도 꾸준히 닦아나가야 한다(점수)고 주장한다. 이러한 이론 체계를 돈오점수라 한다.

    정혜쌍수
  이 수행에 있어서는 정과 혜를 함께 닦아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정혜쌍수란 점수의 실천적 방법을 말하는데, 여기서  정 이란
산란한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고 고요하게 하는 것이며,  혜 란 진리를 바로 보는 것이다. 대중의 마음은 한 시도 쉬지 않고 출렁거리는
물과 같이 번뇌와 망상이 일고 있으므로, 이를 다스리는 수행이  정 이며, 만일 정만 있고 혜가 없다면 마치 바위처럼 침묵만 지킬 뿐
아무런 작용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진실과 인생의 바른 판단을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범부는 일상 속에서 지혜가 아닌
분별심으로 생활하므로 대립과 분열을 맛보게 되며 통합과 조화를 잃게 되는 것이다. 지혜는 분별심으로 식별하는 지식이 아닌 전체를
직시하는 영지작용이다.
  지눌은 정혜를 쌍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를 조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자성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서 박학다식만을 자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달을 가리키면서 달은 보지 못하고 손가락만 보는 것과 같은 꼴이다. 둘째로 마음을 통일하는 것은 극락정토를 바라는
바이지만, 밖의 극락세계만을 염원하는 것은 옳지 아니하다. 왜냐하면 이는 마음의 바람만 있기 때문에 비록 정토에 왕생할 수 있으나
성불은 멀어진다는 것이다.

      한국 불교의 중흥조

    선교일치
  지눌의 선사상은 이러한 돈오점수설에 입각한 정혜쌍수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시 교종의 큰 흐름인 화엄학의 이론을 수용함으로써
교종과 선종의 화합의 길을 모색한다. 결국 중국 화엄종의 이통현의 (화엄론)의 구절에서 화합의 길을 찾고 여러 대장경을 열람한 후
선교는 하나 라는 확신을 갖게 된 것이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마음과 말이 분리될 수 없듯이 선과 교는 둘일 수가 없다.
  이처럼 지눌은 선교일치의 철학체계를 완성했다. 따라서 지눌사상의 역사적 의의는 침체했던 선을 부흥시켜 교종을 포함해서, 결국 양측의
대립을 넘어 선교일치의 사상을 이끌어낸 데 있다.

    불교혁신운동
  선종의 부흥과 수선사백련사 등의 결사로 특징 지어지는 무신집권기의 불교는 한국불교사에 있어서 일대 전환점을 이루었다. 종래의
교종 중심의 불교를 선종 중심으로 옮기고 선종 자체에도 새로운 혁신의 기풍을 갖게 되었으니, 종래의 교종과는 달리 정치적이고 세속적인
성격을 벗어나, 왕실귀족에 대신하여 민중을 저변으로 한 종교는 그 기반을 확대할 수 있었다. 또한 그의 심성론은 수선사가 주로 지방의
지식인층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고려 후기에 지방 향리 출신의 신흥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수용하는 바탕을 마련하기도
했다.

    통불교 법맥 계승
  지눌이 만년을 보낸 전남 순천 송광사에는 지금도 지눌을 계승한 제자들의 찬란한 업적들이 문헌으로 보존되어 있다. 그 가운데는 나라의
스승 역할을 한 고승들이 16명이나 있었다 한다.
  조선에 들어와 배불정책으로 선종의 법맥이 한때 중단되었다가, 임진왜란 전후에 서산대사에 의해 부흥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 말엽에
경허라는 스님이 홀로 참선을 하다가 크게 깨쳐 그 문하에서 만공해월한암 등 쟁쟁한 선사들이 배출되었고, 최근에는
청담성철 스님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렇게 하여 한국의 선종은 다시 일어나게 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지눌의 사상이 오늘날까지
면면히 전해 내려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돈오점수와 돈오돈수
  우리는 앞에서 지눌이 주장한 돈오점수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중  점수 부분에 대해서는 기나긴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 논쟁은
유교의 주리설과 주기설의 뿌리깊은 논쟁을 연상케 한다. 지눌은 내 마음의 본성이나 내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깨달았어도(돈오)
이전의 나쁜 버릇들이 남아 있으므로,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 점차적으로 닦아나가야 한다(점수)고 주장한다. 마치 돈오가 생명의
탄생이라면, 점수는 탄생된 생명이 어른이 되기까지의 성숙과정이라고 비유한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이에 반대하고  단번에 깨우쳐 단번에 닦아 마친다 는  돈오돈수 를 주장하기도 한다. 이 돈오돈수는 중국 선종의 6대
조사인 혜능이 주장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쟁은 석가모니 이래 논의되어온 문제이고, 중국에서는 이미 8세기에 혜능이 이끄는 남종선의 돈오돈수와 신수가 이끄는
북종선의 점수점오의 치열한 돈점논쟁이 있었다. 한국에서 지난 20년간 벌어진 돈점논쟁은 깨달음에 이르는 길, 즉 방법론의 시비였다. 현재
두 개념 사이의 관계는  깨달음(서울)에 가는 길은 비행기로도, 걸어서도 갈 수 있다는, 즉 사람에 따라서는 빨리 깨우칠 수도 있고 늦게
깨우칠 수도 있다 는 이해로써 좁혀가고 있다.
  우리 나라에서 돈오돈수를 주장하는 사람으로는 얼마 전에 입적하신 성철 스님 등이 있는데, 이들은 돈오하고 나서 점차 닦아야 한다면 그
돈오는 진정한 돈오가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한 돈오는 수행의 완성까지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자성을 아는
것이며, 자성이 본래 스스로 구족하고 원만한 것을 깨닫는 것인데, 다시 더 깨달을 것이 있다거나, 닦을 것이 있는 깨달음이란 단지 이해가
더해가는 과정상의 깨달음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돈오돈수나 돈오점수의 논쟁은 깨달음에 대한 견해 차이지 깨달음 자체에 상하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나라에서의 최근의 돈점논쟁은 81년 조계종 종정이던 성철 스님(해인사)이 자신이 저서 (선문정로)에서 돈오점수 사상을 강력히
비판하여 조계종의 종조인 지눌이 만년을 보냈던 송광사측을 자극하여 불이 붙기 시작했다. 송광사측과 해인사 양측은 몇 년 전 각기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등 참선 지도노선이 대결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눌은 중국과 인도의 돈점논쟁을 통합해 새로운 선을 창출한 토착불교적 선각자였다. 돈점론을 두고 섣부르게 상호비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일 것이다.

책임의 원리

책임의 원리(Das Prinzip Verantwortung)
      저자:요나스(Hans Jonas, 1903--1993)

   기술문명에 대한 윤리학 시론 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인간 상호간에 성립했던 책임의 원리를,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생태윤리학의 고전적 저술이다.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과 기술을 분석하고, 근세인의 유토피아가 전제하는 진보의
신화를 비판하면서 인간과 자연의 한계에 대한 인식 위에 성립하는 책임의 윤리를 역설하고 있다. 인간과 더불어 함께 몰락하겠다는  자연의
경고 가 마치  절망적 선전포고 로 들리는 오늘날, 이 책은 유한한 인간존재의 의미를 되묻는 문명비판서이다.

    지구의 종말을 외친 생태학적 예언자
  한스 요나스는 독일에서 태어나 프라이부르크, 베를린, 하이텔베르크와 마르부르크에서 철학신학예술사를 공부하고, 1928년
하이데거와 볼트만에게서  그노시스 (Gnosis) 개념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33년 영국을 거쳐 1935년에는 팔레스티나로 망명했고, 1949년 캐나다를 거쳐 1955년에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예루살렘 대학, 맥길대학,
칼레톤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1955--1976년 뉴욕의 사회과학연구소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미국의 프리스턴 대학, 컬럼비아 대학, 뭔헨
대학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했으며, (책임의 원리)로 1987년 독일서적 판매조합의 평화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바울의 자유의 문제)(그노시스와 후기 고대적 정신)(그노시스 종교)(무와 영원의 사이)(생명의
현상)(책임의 원리)(1979)(주체성의 권력인가 아니면 무능력인가)(기술, 의료, 그리고 윤리)(1985)등이 있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책임의 원리)에서 요나스는 생태학적 위기에 처해 있는 인간의 실존상황을 이렇게 서술한 적이 있었다.
   예전에는 세계의 종말에 관한 판결로서 우리를 위협했던 것이 종교였다. 오늘날에는 바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우리의  지구  자체가
이날의 도래를 예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마지막 계시는 예수가 설법했던 시나이 산으로부터 오지도 않고, 석가가 깨우쳤던 보리수
나무로부터도 오지않는다. 한때는 훌륭한 창조로 나타났던 이 지구의 황무지에서 우리 모두가 몰락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탐욕스론 권력을
억제해야 한다고 고발하는 것은 바로 말없는 피조물들의 고발이다.

    환경문제에 대한 3대 경종
   지구는 단 하나뿐이다(Only one earth!) 이 하나뿐인 지구가 오늘날  인구증가  산업화  도시화  등 우리 인간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날로  오염-파괴-황폐화 되어 그 존망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제 환경문제는 선진국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 문제는 한 나라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닌, 전 지구적 생태계의 파괴와 우리 인류의 사활이 걸려 있는 지구환경의 위기의 문제로까지 대두되고 있다.
  무릇 모든 역사적 대사건과 대역사가 그러하듯이, 오늘날 환경문제가 이토록 짧은 시간에 전 인류의 최대 관심사로 급부상하게 된 데는 그
이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 슈마허의 (작은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 로마 클럽의 (성장의 한계)(The Limits Growth) 등 3대 고전적 저작이 그것이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의  복지국가 를 있게 한 그 이면에 (소수의견 보고서)와 (비버리지 보고서)와 같은 불후의 저작들이 있었던 것처럼
요나스의 (책임의 원리)도 이들의 선구적인 연구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침묵의 봄
  이 책은 1962년 미국의 한 무명 여류 해양학자인 레이첼 카슨 여사가 쓴 17편의 에세이로,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던 책이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농업생산성을 위해 DDT와 같은 농약의 남용과 오용으로 야생동식물이 사멸되고, 농작물 그리고 가축이 피해를 입는 등
자연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 그래서 봄은 왔어도 꽃도 피지 않고, 새도 지저귀지 않는 조용한 죽음의 침묵만이 계속되고 있다고 경종을
울려준 책이다.
  당시 켸네디 대통령으로 하여금 환견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고취시키고, 환경문제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을 환기시킨 이 책은 우리
나라에서도 1990년 탐구당에서 번역, 출간되어 보급되고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독일의 경제학자 슈마허가 1973년 엮은 핸드북으로, 이 책은 서구세계의 자본주의 경제구조를 혁명적 방법으로 고찰한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기업조직의 거대화와 기술전문성의 고도화 촉진은 결과적으로 거대경제가 비능률, 환경오염, 비인간적인 작업조건을
초래했다고 비판하고, 경제적기술적^5.23^과학적 전문성에 도전하면서, 보다 작은 단위 공공 소유권 지역단위의 사업에 기반을 둔
이른바  중간수준 의 기술체계를 주장했다.
  그리고 자본의 노예로서의 인간이 아닌 인간에 봉사하는 자본관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생산물 보다는  인간  그 자체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한편,  인간상실 로부터  인간회복 을 주창하면서 종국적으로는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닌 자연의 관리자로서, 최소의
소비로 최대의 복지를 이룩해야 한다는 불교 경제학을 강조했다. 국내에서도 1986년 범우사에서 김진욱씨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성장의 한계
  풍요 속의 빈곤^5.23^환경 파괴 등 우리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현재 및 미래의 고난을 주된 연구대상으로 하고 있는 로마 클럽의 첫
작품으로, 1972년에 출간하여  생태학적 폭탄 을 터뜨렸다. 지상에서 성장을 결정짓고 결국 그것을 제한하게 되는 5가지 기본요소들, 즉
인구증가농업생산자연자원산업생산환경오염 등 5대 요소를 가지고 연구를 수행한 결과, 방종한 기계문명, 무분별한
성장, 인간부재의 물질적가치관을 비판하면서 이들 문제들에 대한 전 인류의 즉각적인 대처를 주장했다.

    과학의 비윤리성을 파헤친 문명비판서
  (책임의 원리)는 전체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변형된 인간행위의 본질),제2장은 (토대와 방법의 문제), 제3장은 (목적과
존재에서 차지하는 목적의 위상에 관하여), 제4장(선, 당위, 그리고 존재: 책임의 이론), 제5장(오늘날의 책임: 위협받는 미래와 진보사상),
제6장 (유토피아 비판과 책임의 원칙>)로 되어 있다.

    전통윤리의 한계
  무엇이 위기에 처해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인가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나스는
생태학적 문제를 대체로 3단계로 접근하고 있다. 즉, 그는 이 책에서 왜 위기인가? 어떻게 위기를 극복할수 있는가? 위기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철학적 대답을 시도한다.
  1--2장에서는 전통윤리학으로는 왜 생태학적 위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가를 설명한 다음에, 새로운 윤리학의 원칙으로  책임의 명법??
을 제시한다. 3--4장에서 요나스는  왜 인간은 존재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윤리학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구축한다.
요나스는 여기서 인간존재의 당위성과 존재에 대한 인간의 책임 사이의 관계를 목적론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5~6장에서 요나스는 현대
위기의 근원을  할 수 있다 는 인간능력의 절대화와 유토피아주의가 결합하여 나타난 진보사상에서 발견한다.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적
유토피아를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적 간섭에 대한 지구의 인내 한계를 분석함으로써, 요나스는 인간존재의 유한성과 인간의
거주공간인 지구의 유한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제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힘을 과학을 통해 부여받고 경제를 통해 끊임없는 충동을 부여받아, 마침내 사슬로부터 풀려난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권력이 인간의 불행이 되지 않도록 자발적인 통제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하나의 윤리학을 요청한다
고 저자는 서문을 시작하고 있다.

    사고의 전환 필요
  생명의 젖줄인 하천은 하수구로 점차 변해가고 도시는 이미 거대한 매연의 굴뚝으로 변한 지 오래다. 우리는 이제 환경오염에 의한 피해를
피부로 느낀다. 그렇지만 과연 우리는 우리의 아픔을 지구의 아픔으로 느끼고 있는 것일까? 조금은 철학적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오염된 사물, 인간의 타락과 부패, 문명의 시궁창 등이 이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된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구의 종말을 외쳐대는 생태학적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와 같은  생태학적  불감증을 치유할수 있을까? 한스 요나스는  사고의 혁명  없이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인간의 자유가 기술을 통해 실현되고 따라서 기술에 의한 환경오염은 우리가 자유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대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지구의 병은 치유할 길이 없다. 환경오염을 기술적 문제로만 파악하는 근대적 사고방식은 속으로
곪아들어가는 생태학적 문제를 계속 악화시킬 뿐이다.
  우리에게 종말을 위협하는 것은 결코 강대국만의 전쟁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평화적 기술도 역시 가공할 만한 불행의
잠재력을 함축하고 있다. 평화적 기술에 의한 불행은 결코 갑작스럽게 오지 않고 수많은 기술문명의 성공들에 가려진 그림자 속에 숨어든다.
따라서 몰래 숨어드는 생태학적 불행을 피하는 것은 분명한 징조를 가지고 있는 전쟁을 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기술의 평화로운
사용이 전쟁보다 더 커다란 재앙을 가져온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어떤 위험에 봉착하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

    정복된 자연의 보복
  인간의 기술적 착취에 의해 고통을 받고 신음하던 지구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드디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에 대한 자연의 보복은
역설적이다. 인간이 기술을 통해 자신의 삶의 영역을 넓히면 넓힐수록 진정한 삶의 터전은 이로 인해 더욱 더 잠식당한다. 요나스의 (책임의
원리)는 바로 인간의 방종한 권력을 고발하는 자연의 대변인이다.
  자연도 말을 할 수 있는가? 자연도 고통을 당하는가? 자연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존재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생태학적인 맥락에서
제기되는 이런 질문들은 모두  인간은 과연 존재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으로 모아진다. 만약 우리가 인간존재의 당위성을 선험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한다면 인간의 거주공간인 지구존재의 당위성도 역시 인정되어야 한다. 인간의 안과 밖의 존재하는 자연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한 삶의 터전을 잃게 된다.

    인간과 자연으로 책임원리 확장
  만약 자신에 대한 무분별한 착취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인간과 더불어 몰락하겠다는 자연의 경고가 마치  절망적 선전포고 처럼 들리는
오늘날, 요나스의 이 책은 유한한 인간존재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드는 문명비판서다.
  핵전쟁이 발발할 경우 승자와 패자의 구별이 무의미해진다면 우리는 이제 자연과의 전쟁에서도 항상 승자로 남을 것이라는 미몽에서
깨어나야 한다. 인류의 자멸이라는 위협에 직면하여  평화 가 절대적으로 요청된다면  책임 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행위의 명법 이라고
요나스는 말한다.
  이 책은 환경문제를 기술적 문제로만 파악하는 개량주의에 빠지지 않고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자연에 대한
지나친 승리는 승자 자신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철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책임의 원리를 인간 상호간의 영역으로부터 인간과
자연으로 확장할 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나스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시간이 촉박하다고 말하고 있다. 생각만 하고 있기에는 지구의 위기가 너무나 심각하다는 것이다. 사실
기술에 의한 진보가 진행되면 될수록 우리에게 주어진 유예기간은 그만큼 줄어든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요나스의 (책임의 원리)는 너무 무거운 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나스가 이 책을 쓴 것은 이론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천을 위해서이다. 이론은 항상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생태학적 위기에 직면하여 우리에게 요구되는 실천은 너무나 분명하다. 아무튼 이
책은 이제까지 잠들어 있던 우리의 생태학적 의식을 깨워놓는다.

    인간중심적 세계관에서 생태학적 세계관으로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거대한 트럭, 산을 뭉개는 불도저들, 사방에 들어서는 고층건물 주변의 크레인 등을 볼 때마다 우리는 혼란과 고통을
느끼면서도 흐뭇해진다. 거기서 우리가 성공적으로 이룩한 산업화와 국력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지구 곳곳에 동일한
모습과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산업화를 통한 문명화가 인간을 빈곤과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수단인 한 이작업은 더욱 추진되어야 한다.

    문명 뒤에 숨은  죽음
  그러나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과 고통은 너무 크고 그것이 동반하는 그늘은 너무 어둡다. 오염된 하천에서 죽어가는 물고기를 볼 때
자연파괴의 심리적 아픔을 경험한다. 생태계가 파괴되고 지구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개발, 경제적 풍요, 역사적 진보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흐려지고, 인류와 지구의 앞날이 암담해진다. 역사와 문명에 관한 방향감각이 혼란해진다. 세계는 어떻게 되는 것이며,
인류는 어떤 삶의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일까?
  오늘과 같은 추세로만 갈 때 생태계 파괴, 인류의 종말과 지구의 죽음은 기정사실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날 인류가 대처할 문제
가운데서 생태계의 문제보다 더 심각하고 절망스러운 문제는 없다. 산업화가 당장 물질적 풍요를 가져온다 해도, 더이상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진할 수가 없다. 현재까지 인류가 택한 방향과 그런 지평에서 이룬 문명의 의미에 대해 근본적 반성과 재해석이 필요하다. 이미 심각한
병에 든 오늘의 지구와 어두운 세계가 우리의 세계관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라면 그러한 세계관은 근본적 전환을 필요로 한다.
  인류의 역사는 자연정복과 복종의 시각에서 서술될 수 있다. 한 개인이나 집단의 역사가 인간 사이의 정복과 복종의 긴장된 복종의 관계로
기록될 수 있다면, 인류 전체의 시각에서 볼 때 인간의 역사는 인간에 의한 끊임없는 자연정복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인간끼리의 관계에서나
자연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행동을 지배해온 것은  정복 의 이념과 그러한 목적을 가장 효율적 도구로 사용한 과학적 자연관이다. 과학문명은
인간에 의한 자연정복의 놀라운 성공을 뜻한다. 정복이념과 과학적 자연관을 합쳐  인간중심적 세계관 으로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중심적 세계관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류가 과학기술을 빌려 성공한 자연의 궁극적이고 구체적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환경오염, 생태계의 파괴, 인류의 멸망 그리고 지구의 죽음을 뜻하게 됐다.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절박한 위기의 원천적 밑바닥에  정복 이라는 이념과 과학적 자연관으로 표현된 인간중심적 세계관이 깔려 있다면
그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바로 그 세계관을 원천적으로 수술하는 데서 찾을수 있다. 그것은 세계관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한다. 근원적 문제는 근원적으로만 해결된다. 근원적 해결책은  인간중심 적 세계관을  생태학 적 세계관으로 전환대치 시키는
것이다.
  생태학적 세계관은 거시적 입장에서 미시적 입장에 갇혀 있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포기를 의미한다. 자연은 인간의 욕망충족을 위한
도구나 자료가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모체이며 조화를 찾아야 할 대상이다. 인간 외의 생물체는 정복과 약탈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공생활
권리를 갖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이런 생태학적 세계관에 비추어볼 때  발전 과  진보 의 의미는 재해석된다. 인류의 참다운 발전은 무제한적 자연정복이 아니라 자연과의
공존이다. 인류의 진정한 진보는 생물학적 욕망의 이기적 충족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욕망을 극복하여 남의 존엄성을 고려하고 남과 조화
속에서 공존하는 도덕적 태도와 실천력에 의해서만 측정된다.
  생태학적 이념은 자연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차원과 측면에서 나타나는 모든 인간관계에도 다 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물질적
가치를 가장 존중하고 인간의 이기심을 전제한 자본주의적 이념이나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전체주의적 이념은 생태학적 이념과
배치된다.
  그러므로 서로 대립되면서 지난 한 세기 동안 세계를 지배하고 갈등을 일으켜온 이 두 개의 이념들은 다 같이 비판되고 극복되어야 한다.
과학기술이나 위의 두 가지 정치 사회적 이념이 서양적 사상의 산물이라면 서양적 사상은 생태학적 이념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예종에의 길

예종에의 길(The Road to Serfdom)
   저자:하이에크(Friedvicw August von Hayek,1899~1992)

  이책은 독일과 러시아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전체주의와 계획경제의 허구성을 폭로하고,정부의 시장개입을 주장하는 케인스식 계획경제는
전체주의로 통하게 되며 결국 개인의 자유까지도 억압하게 되어 국민 등을  노예에의 길 로 이끌 가능성이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모든 것을
시장기능에 맡기자는 하이에크의 생각이 담긴 이 책은 오늘날 경제에 대한 국가적 통제 및 복지국가관에 반대하는  신자유주의자  내지
신보수주의자 들의 고전이자 케인스의 경제학에 대한 비판서다.

      케인스의 영원한 라이벌
  이미 50년 전에 사회주의가 인류를  노예의 길 로 인도하고 결국 혁명과 반혁명의 와중에서 끝내 종언을 고하리라고 예언한 학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하이에크다.
  케인스의 숙명적 라이벌 하이에크. 그의 생애는 전기의 경제학자적 생애와 후기의 사상가적 생애로 구분된다. 그는 오스트리아 빈 대학의
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적부터 귀족적 전통 속에서 자랐다. 빈 대학에서 법학^5.23^경제학 등을 공부했다. 1921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정부기관에서 근무하면서 여기서 그의 스승이자 동료로서 그를 이끌어준 미제스를 만난다.1923년 경제학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는데, 이것은 경제학이 법학부에 부속되어 있었던 당시의 제도 때문이다. 그의 학문적 기초와 세계관의 형성은 그의 젊음을 불태웠던 빈
대학인데,그는 여기서 자본주의적 세속에서 벗어나 학문적 도원경에 젖으면서 자유주의 사상의 이론적 기초를 닦았다.
  그뒤 미국을 방문하여 본격적으로 경제학 수업을 쌓으면서 당시 신대륙에서 성행한 경기변동의 실증적 연구에 주목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19년 (화폐이론과 경기변동이론)이라는 저서를 내고,모교인 빈 대학의 강사가 된다. 그의 평생의 연구분야는 전반기의
경기이론과 후반기의 자유주의 경제이론으로 대별할 수 있다.
  그후 그는 영국의 로빈스의 초청으로 1931년 런던 대학의 교수로 취임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케인스와 숙명적인 대결이 시작된다.
로빈스가 그를 영국으로 초빙한 데는 케인스를 견제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로빈스의 부탁으로 하이에크가 케인스의 저서(화폐론)에 대한
비판을 가하자 케인스도 다른 학자를 시켜 하이에크의 저서(가격과 생산)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이후 두 당사자는 물론이고 아서 피구를
비롯한 당대의 기라성 같은 경제학자들이 대거 토론에 참여하여 반론과 재반론의 치열한 공방을 전개했다. 존 힉스가  일대 드라마 로
표현한 논쟁에서 그는 무려 10편의 논문을 쓰며 분전했지만, 승리의 여신은  당분간  케인스 쪽으로 미소를 보내는 듯했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가격수준에 관한 케인스의 거시적 분석은 상대가격의 변화가 투자와 생산의 각 분야에 끼치는 미시적 영향을 무시하고
있고, 소비수요의 증대 역시 케인스의 관찰과는 달리 투자를 위축시켜 불황을 야기 한다는 것이다. 케인스의 한 제자가 그에게  당시의
견해로는 내가 새로 양복을 구입하면 사회의 실업이 증가하는가  하고 물었더니 그는  그렇다 고 대답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칠판에
부호와 수식을 잔뜩 늘어놓았다 한다.
  그러나 케인스의 승리는 새 양복이 실업을 줄인다는 이론 때문이 아니라 1930년의 대공황에 직면한 각국 정부가 케인스의 (일반이론)에
제시된 그의 처방을 하이에크의  무위도식 적인 권고보다 한층 더 절실하게 받아들인 현실에 기인한다. 케인스가 주도한 케임브리지
경제학과 그에 대항하는 런던 경제학의 일대 자존심이 걸린 전투에 하이에크는  용병  으로 참전했다가 패배한 셈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 예로 그는 전력을 다해 케인스의 (화폐론)에 대한 논평을 끝내고 나니, 케인스가 그 책에
담긴 생각을 바꾸었다고 말하는 바람에 완전히 김이 샜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그리고 그의 반론이 나오면 케인스가 또다시 생각을
바꾸었다고 말할지 몰라서 (일반이론)에 대한 서평은 아예 꿈도 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1941년 런던 대학에서 그는 세번째 학위를 얻는데, 이번에는 정식으로 경제학 박사학위였다. 그러나 경제학 박사와 함께 그 뒤의
하이에크는 오히려 철학자와 사상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이 변모에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영국에 체류하던 칼 포퍼??((열린 사회와 그
적들)의 저자)의 역사주의 비판이 큰 영향을 주었다. 하이에크 역시 개인의 행위를 역사보다 중시하면서 흄의  개인주의 는  우연적 이므로
옳으나, 루소의 개인주의는  계획적 이기에 싫다고 주장했다.
  하이에크 자신이  정치적 저작 이라고 선언한 1944년의 (예종에의 길)은 자유주의 전도사로서 그의 명성을 세계에 전파한 책이 되었다.
모든 당파의 사회주의자 에게 헌정한 이 책에서 그는 모든 계획은 반드시 전체주의로 통한다는 소신에 입각하여 파시즘과 사회주의를 맹렬히
규탄한다. 나아가 그는 사회주의를 유태인 다음으로 박해한 나치즘에서 사회주의적 연원을 추적할 만큼 참으로  정치적 저작다운 모험 을
강행했다.
  매카시의 반공 히스테리가 기승을 부리던 1950년 하이에크는 극우 경제학의 본산인 미국의 시카고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윤리학 교수로
취임한 그는 주로 지성사를 강의했으며, 밀턴 프리드먼은 그의 가장 가까운 동료였다. 미국에서 출간한 최초의 저서는 (존 스튜어트 밀과
헤리에트 테일러: 그들의 우정과 결혼)이었는데, 아마도 자신의 이혼과 소꿉친구와의 재혼이 마음에 걸렸던 듯하다. 밀은 친구의 부인
해리어트를 20년 동안 사모하다가 친구가 죽자 그녀와 결혼한 세기의  불출 을 실연한 장본인이다. (자유의 헌법)은 이 시기에 나온 가장
가장 중요한 저작 가운데 하나인데 그는 자유의 근본원리를 강제의 부제 로 간단히 규정했다.
  12년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그는 독일의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돌아왔다가,1968년 오스트리아의 찰스부르크 대학으로
초빙된다.경제학의 학위과정조차 개설되지 않은 이 대학에서 그는 아주 무료하게 세월을 보내다가 1974년 스웨덴의 경제학자 군나르
뮈르달과 함께 노벨 경제학상을 공동수상한다.화폐이론과 경기변동이론에 대한 무려 50년 전의 기여가 시상 이유였지만 정작 그의 수상연설
제목은  지식의 가면 이었다.
  1938년 영국에 귀화했으므로 그의 공헌은 영국경제학의 업적으로 기록되었다.1977년 다시 프라이부르크로 돌아와서
(법입법자유)의 3부작으로 완성한다.그후 연구와 여행에 몰두했으며,1978년에는 한국을 방문했다. 1988년에 저술한 (치명적
망상: 사회주의의 오류)는 그가 남긴 마지막 반공 메시지다. 예를 들어 그는  사회적 이란 말이 은연중에  옳은 이란 냄새를 풍기는  족제비
처럼 교활한 언어라면서  사회정의 조차 흔히 시장원리를 거스르는 분배정의를 가리키기 때문에  반사회적 이라고 단죄한다. 민주주의마저도
다수의 이름으로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의 전집은 22권으로 예정되어 있는데, 그 방대한 저술과 관련하여 언젠가 그는  물리학자는 물리학자이기만 하면 일급이지만 경제학자는
경제학자이기만 하면 폐를 끼친다 고 토론한 적이 있다.미국의 레이건과 영국수상인 대처의 극우 보수주의가 발호하고 고르바초프의
현실주의가 무너지는 가운데 그는 평생의 지론이 승리하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1992년 93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계획경제와 케인스의 복지국가관 비판
  제2차 대전 중 자신이 머물고 있던 영국에서도 계획경제 움직임이 가시화되자 그의 우려는 점점 깊어져, 그의 관심이 점차  자유 의
문제로 옮겨지는데, 이런 상황에서 나온 책이 본서이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열띤 논쟁을 야기시켜 미국에서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그 요약판을 게재할 정도였다.
  그는 이 책의 서문에서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우리가 그 결과를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지나간 역사와는 다르다. 우리들은 과거를
돌이켜봄으로써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의 의미를  평가할 수 있게 되고 또 그 사건의 중요성을 발견할 수 있다. 고 기술 하면서 독일과
러시아의 역사적 경험을 통해 전체주의와 계획경제의 허구성을 폭로하며 그 배경과 사회학적 원인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파시즘 혹은 나치즘의 발생을 그 이전 시대의 사회주의적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그러나 많은 나치
지도자들이 걸어온 지적 발전의 경로를 거슬러가다보면 파시즘은 공산주의가 환상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뒤에 도달한 당연한 결과임을
알게된다다.
  사회주의는 파시즘과 마찬가지로    집산주의????의 일종이다. 만약  자유의 길 이라고 믿어왔던 장밋빛 미래가 사실을 알고 보니  노예의
길 이었다면 얼마나 큰 비극일까? 어쩌면 사회주의는 집산주의가 가장 정체된 형태로 발현된 사상일 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적 정신을 가진
사람들에겐 그들이 이미 포기했던 경제생활에 대한 통제에 한번 더 복종하기를 강요하는 것이다.
  모든 계획의 출발점은 문제를 합리적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파시스트들은 어떻게 하면 여러 자원을 확고한 방법으로 특수한
목적에 봉사하도록 운영하는가, 그리고 그 계획에 따라 모든 경제활동을 중앙집중적으로 지도하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가를 생각하고 있다.
중앙집중적 계획에 따르면 경제문제는 개인에 의해 결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 여러 가지 욕망의 상대적 중요성을 결정하는 주체는 사회
내지 그 대표기관이어야 한다. 그러나 그 계획에 따른 지도는 어쩔 수 없이 단일한 전문가 진용에 의한 것이 되고, 결국 책임과 권력이
총지휘자의 수중에 집중된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일단 경쟁 대신 중앙계획을 채택하게 되면 이전에 계획했던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생활부분에 중앙적 지도가 필요해진다. 왜냐하면
생산부문에서 중앙적 지도가 실시된 후엔 소비부문에서도 중앙의 지도가 필요해지고, 경제영역에서의 계획은 정치 ^5.23^사회의 모든
분야에서의 중앙적 지도를 유발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개인의 권리를 심하게 제약하는 계획사회는 자연스럽게 전체주의 사회로
넘어가게 된다.
  집산주의는 사회의 모든 영역과 자원을 단일한 목적을 위해 조직하려는 점에서나 개인의 목적이 최고의 자주적 영역임을 무시하는 점에서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집산주의는 수많은 사람들의 복리와 행복은 경중만을 표시하는 단일한 목적으로 적당하게
표현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의 활동을 단일한 계획에 따라 지도하려면 우리들의 욕망에 가치서열을 매겨 적당한 자리에 끼워맞출 수 있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또 계획이 성공하려면 이들 가치서열을 계획자가 충분히 조정^5.23^예측할 수 있을 정도로 완절무결하게 정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
  계획이 성공하려면 서로 다른 인간의 가치가 적재적소에 배치 될 수 있는 도덕률이 마련되어야 한다. 이것 역시 인간사회에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어떤 사람도 모든 인간의 동기를 의식적으로 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분산주의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만약 산업제도를 의식적인 중앙계획 아래 두었더라면 지금까지 이룩해낸 분화복잡성탄력성의 수준에 결코 도달할수 없었을
것이다. 분산주의와 그에 필연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시장의 자동조절수단에 의해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비하면 중앙의 지도는 말할 수
없이 열등하고 원시적이며 그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 현대사회의 복잡성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결코 중앙계획방식을 사용할 수 없다.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의식적인 통제를 시도할 가능성은 점점 더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경쟁은 우리가 지금껏 경험한 방법 가운데 가장 유효한 방법일뿐 아니라, 정부당국의 강제적자의적 간섭이 없이 우리의 활동을
상호간에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에 우리는 그 우월성을 인정한다. 자의적인 사회통제를 불필요한 것으로 만들고 개인에게
직업선택의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의미에서도 경쟁은 가치가 높다. 인간이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것보다 인간을 참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인간은 수단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흔히 사회주의 혹은 다른 형태의 집산주의와 대비해 말하는 개인주의는 이기주의자기 중심주의와 동일한 것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다. 개인주의는 개인이 해야 할 일의 영역이 아무리 협소하다 할지라도 각자의 견해와 취미가 최고의 표준이 되어야 하고, 개인의 능력과
재주를, 개발하는 길이 최고의 목표가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들은 사건을 정리하는 데 있어서 가급적이면 사회의 자발적인 힘을 이용해야 하며 강제수단은 피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 기본원리를
실제에 적용할 때면 무한히 많은 변수가 있음도 사실이다. 사회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태도는 식물을 기르는 정원사의 태도와 같은 것이며,
사회발전에 가장 유리한 조건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사회구조가 움직여나가는 방향을 알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자유주의를 무조건
자유방임주의와 일치시키는 것은 오류다.
개인의 자유를 충분히 보장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법적인 장치가 필요하다.

    경제학자에서 사상가로
  이상에서 살펴본 하이에크 사상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울수 있다. 하나는 자유와 자유경제가 무엇이며, 다른 하나는
스태그플레이션(물가상승과 경기침체가 공존하는 현상)을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하이에크는 처음 순수경제학에서 출발하여
곧 정치학법학사회학철학 등 인접 사회과학으로 그의 관심을 확대심화시켰으며,  현대의 영지??를 대표하는 철인적
지도자 로 평가되고 있다.

    독자적 세계 구축
   이제 우리는 모두 하이에크 학파 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미국의 신경제 법학이나 신경제 학자들도  공급 경제학 이나  작은 정부론 을
내세우면서 모두 하이에크에게서 자유와 스태그플레이션을 배웠다. 그의 자유는 신 자유주의에서 우러나오며 스테그플레이션 대책은 케인스
비판에서 시작되는 것이지만, 이 모두 하나가 커다란 하이에크 세계에 바탕을 두면서 전개되고 있다.
  그의 사상을 간혹 자유주의자의 진부한 생각 정도로,또는 자유주의적 반동으로 간주하는 이들도 있으나, 그의 비판의 대상이었던
사회주의자 케인스조차도 하이에크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실토할 정도로 깊은 논리를 가지고 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를 알면 알수록 외경의 마음을 갖게한다고 한다.

    자유주의 경제
  그의 자유는 법의 지배하에서만 존재하는 하나의 사회질서이며, 사회 내부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자발적 질서로서의 자유를 말하기
때문에, 각자가 처한 역사적^5.23^사회적 전제조건을 깊이 음미하고 자기 환경에 맞는 자유주의 사회와 자유주의 경제를 구현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의 자유주의 경제는 교과서적인 추상적 자유경제의 사회 경제가 아니라, 그 사회 특유의 자발적 시장경제가
개개인의 지식을 가장 잘 종합할 때 생기는 역사적 특징을 지닌 경제를 말하기 때문에, 이러한 자유경제를 통해서만  노예에의 길 에서
벗어날수 있고 정부의 개입을 최소화하여 경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된다고 그는 믿고 있다.
  이 책의 중심적인 명제는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라는 정치체제를 낳게 한 것이 계획경제를 채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며, 이들은
모두  국가 사회주의 라는 특수한 형태를 띠었지만, 어디까지나 사회주의의 한 변형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국가경제에 있어
중앙집권적 계획화가 확대될수록 그 국가의 정치체제가 틀림없이 전체주의화되어간다고 보고, 복지국가도 이러한 맥락으로 비판하고 있다.

    현대 경제학에 경종
  그는 (예종에의 길) 이후 여러 저서를 통해 칼 포퍼의 (단편적 사회공학)을 발전시키고, (전체와 개체)(사회적 다위니즘)(사회의
의인화)등을 논하면서 신자유주의 사상을 전재해가고 있다.
  특히 근래에 발표된 (법,입법 및 자유)는 문자 그대로 하이에크의 걸작으로, 여기서 그는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주의가 아니고
야경국가주의도 아니며, 과학혁명과 시민혁명이 밑바탕이 된  질서 자유주의 라고 말하면서 자유를 하나의 사회적 질서, 또 자유는 그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의지가 없거나 그것을 육성^5.23^추진하는 정책적 틀을 확립시키려는 정부의 노력이 없으면 존속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강력히 피력하고 있다.
  하이에크의 지적 발단단계에서 볼 때 이 책은 하나의 전환점이 된다. 그 이후 그는 화폐적 경기 변동론보다는 자유의 조건을 규정하고
인간사에서 작용할 수 있는 강제력을 최소화시키고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요인이 감소된 제도를 연구하는 데 더욱
몰두하게 되었다. 결국 그는 케인스 경제학 비판뿐만 아니라 수학과 증명만을 중시하는 현대 경제학자에게도 충격적인 경종을 울려주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
    (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
    저자:슘패터(Joseph Alois Schumpeter. 1883--1950)

  이책은  자본주의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는가? 라는 명제하에 자본주의는 기업가의  혁신 에 의해 끊임없이 발전하지만, 자본주의는 바로
그 발전 때문에 필연적으로 붕괴하고 사회주의로 이행하게 되며, 사회주의는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면 민주주의와 양립이 가능한 체제가 될
수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슘페터식 자본주의 붕괴론은 마르크스의 주장과는 내용이 다르며, 오히려 슘페트는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이 책의 장을 열고 있다.

     기술혁신의 숭배자
  케인스와 함께 20세기 전반을 대표했던 오스트리아 출신의 미국 경제학자 슘페터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모라비아에서 출생했다. 그의 생은
만년의 18년 동안의 하버드 대학 교수생활을 제외하고는 굴절이 많은 인생이었다. 또 케인스와는 달리 초학파적인 연구성향 때문에 자신의
학파를 남기지도 않았다.
  4살 때 부친을 잃은 그는 어머니가 오스트리아 군사령관과 재혼하는 바람에 일찍부터 귀족사회에서 생활했다. 빈 대학의 법학부에 입학한
후 처음에는 역사학에 관심을 가졌으나, 경제학으로 전환하여 벰바베르크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개화기로서 비저,
필립포비치, 벰바베르크 등이 활약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론은 오히려 로잔 학파의 발라스의 영향 아래 골격을 형성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12세 연상의 영국 부인과 결혼하여 이집트의 카이로에 왕실고문 변호사로 부임했다. 이 결혼은 얼마 안 가 곧 파탄에
빠져 이혼하게 된다. 제1차 대전 직후에 오스트리아의 재무장관과 민간 은행장을 지내고, 1925년에 본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32년 이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하버드 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1937년에는 젊은 경제학자인 미국여성과 세번째
결혼했는데, 그녀는 깊은 이해와 따뜻한 애정으로 그를 뒷받침하여 슘페터의 만년을 더욱 빛나게 했다.
  저술활동으로는 25세 때 처음으로(이론경제학의 본질과 주요내용)을 집필했다. 무명의 슘페터는 이 저작의 발간으로 일약 오스트리아
학파(빈 학파의 선구)의 젊은 세대 중의 선두주자로 부각되었다.
  이 처녀작 발간에서부터 4년 후인 1912년 그의 창조적인 구상의 성과가 불후의 명저(경제발전의 이론)으로 나타났다. 이는 종래의
경제학을 정태적 순환의 이론으로 보고,그 위에 동태적 발전이론을 수립하고자 하는 획기적인 역작으로,자본주의 발전의 원동력으로서의
기업가의 기능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특징이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자본주의 발전의 담당자인 기업가가 도입하는 새로운 방안 즉, 기술의 진보, 생산조직의 개선, 신제품의 개발, 새로운
판로의 개척 등이 경제 발전의 동력이고, 그것을 가능하게하는 것이 은행에 의한 신용창조라 했다. 이러한 중심적인 구상은
(경기순환론)에서도 계승되는데, 새로운 방안의 도입에 따른  창조적 파괴 가 경기순환을 일으키는 원천이라고
보고,이론적^5.23^역사적^5.23^통계적 분석으로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자본주의^5.23^사회주의^5.23^민주주의)에서는 경제사회적인 고찰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에 따라 기업가 기능이 쇠퇴하는 것과, 정부의
개입이 증대함에 따라 민간부문의 활력이 약화되는 요인도 함께 고려하여 독특한 자본주의 붕괴론 을 이끌어냄과 동시에, 사회주의가 어떻게
하면 민주주의적인 것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비교체제론적인 분야에까지 시야를 넓혔다.
  미국 이주 이후 그는 하버드 대학의 훌륭한 스승으로서 젊은 학도들에게 열정적인 지도를 아끼지 않았고, 경제학계의 지도자로서 바쁜
삶을 살다 조용히 생을 마감했다.
      슘페터의 지적 배경
  슘페터는 케인스와 함께 근대 경제학의 최고봉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케인스의 이론이 거시체계로서 신고전파 경제학을 낳은
반면,슘페터의 경제학은 그 전모가 파악되지 않은 채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 이유는 먼저 그의 저작이 다방면에 걸쳐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사실 슘페터는 단순한 경제학자라기보다는 광범위한 사회과학자로 보는 편이 더 정확하다. 그는 이전의 모든 학설과 이론을
계승^5.23^종합하여 독자적인 이론을 창조했다. 오스트리아 학파의 뵘바베르크,비저를 출발점으로 하여 발라스의 일반균형 이론체계를
근본적 기초로 삼고,마샬 빅셀의 보다 앞선 분석용구를 섭취해서 광범한 일반균형 체계를 이룩했다.
  살아 있는 경제학의 권위자인 미국의 새뮤얼슨은  슘페터에는 많은 얼굴이 있다. 고 말했다. 그는 광범한 문헌지식과 모든 학설이나
사상을 객관적으로 공평하게 판단하는 날카로운 통찰력과 풍부한 역사감각,그리고 훌륭한 예술적 감각 등을 완비한 그는 경제학사에 족적을
남긴 개개인에 대한 평전을 담은 (학설사 및 방법론사의 제시대)를 저술했는데,이는 독일어로 씌어진 이 분야의 역저다.그의 사후
편찬된(10대 경제학자)도 역시 경제학자의 평전에 관한 고전으로 간주된다.
  그 이후 이론경제학계에서 그의 높은 지위는 평생 변하지 않았다. 그는 생애가 다할 때까지 항상 새로운 경제이론을 탐구하는데 소홀하지
않았고 또한 끊임없이 새로운 문제를 파악함으로써 경제학 발전의 미래를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이론경제학의 테두리 안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의 연구범위는 사회과학의 전반에 걸쳤으며 하버드 재직시  순수이론의
기수 로서 계량경제학에서 수리경제학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이론에 적극적으로 대결했다. 그 당시의 성과가 다름아닌 필생의 대저
(경기순환론)이었다. 그것은 이 책의 부제가 말해주듯  자본주의 과정의 이론적^5.23^역사적 통계적 분석 이며 그 안에는 그때까지의 그의
다방면에 걸친 연구의 성과가 전부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것은 그의 보다 대중적인 저작 (자본주의^5.23^사회주의 민주주의)로 나타났다.
     자본주의 붕괴와 사회주의 도래 예견서
  본서의 핵심은  자본주의는 기업가의 혁신(inovation)에 의해 끊임없이 발전하지만,자본주의는 바로 그 발전 때문에 필연적으로 붕괴하고
사회주의로 이행한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몇몇 조건이 충족된다면 민주주의와 양립 가능한 사회로 형성될 수 있다 는 것이다. 언뜻 보면
이러한 슘페터식 자본주의 붕괴론이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붕괴론과 유사하게 보이나 사실은 크게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제1부를
마르크스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고 있다. 주요내용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의 학설비판
  예언자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생산수단과 노동력이 분리되어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이 날카롭게 대립하는 경제체재이며,바로
그 때문에 생산력은 향상되나 생산관계는 악화되어 자본주의는 저절로 붕괴하게 된다. 그러나 이 같은 마르크스의 논리는 자본주의
붕괴과정을 현실적으로 해명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자본주의는 막다른 골목에 빠진 것 같지만 또 다른 발전의 여지를 자체 내에서 지니고
있다.
   자본주의의 생존 가능성
   창조적 파괴 의 과정이야먈로 자본주의의 본질적 특징이며 이런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는 부단히 발전해왔다. 철도와 발전소의 건설,
자동차나 제철공업 등 모든 새로운 생산활동은 카네기, 록펠러와 같은 기업이 끊임없이 창조적 파괴의 과정을 반복한 결과다. 마르크스의
예언과는 달리 자본주의,특히 미국의 자본주의는 여러 가지 불리한 조건이 없지는 않지만 발전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물론 이런 경제발전의 과정에서 독점기업이 생겨나며 이 독점의 경향은 흔히  동맥경화증  같은 증상으로 묘사되곤 한다. 그러나 독점의
경향은 생산성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이 될 수도 있다. 이같이 자본주의 훌륭한 업적을 이루어냈으나 결국은 붕괴될 체제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있다.
  첫째는 기업가 무용론으로 자본주의가 발전함에 따라 기업은 자본가의 천재적인 영감보다는 경영전문가의 전문성에 따라 운영된다.
따라서 자본가의 기능은 불필요한 존재가 된다.
  둘째는 자본주의 수호계층의 몰락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중소기업은 파멸하게 되며, 이들은 자본주의의 기반을 이루는
사유재산제도와 자유시장경제를 포기하게 된다. 결국 이들은 부르주아 정당보다는 사회주의 정당을 선호하는 등 정치세력의 분포에서 큰
변화가 생기게 된다.
  셋째,소유와 경영이 분리됨으로 기업의 중역도 자신이 고용자라는 것을 인식하게 된다. 이제 기업가는 혁신의 주체가 아니라 이윤을
배당받는 소유자에 불과하게 된다. 그래서 기업가들은 자본주의적 기질을 잃고 자본주의를 사수하려는 정열을 잃게 된다. 그러나 과연
사회주의가 자본주의 체제의 기능을 대신할 수 있을까?
   사회주의의 대체 가능성
  사회주의란 생산수단과 생산과정의 운영권을 중앙당국이 쥐고 있는 체제로,경제 각 부분은 사적 영역이 아닌 공적 영역에 속한다. 따라서
시장경쟁의 메커니즘을 갖추지 못한 사회는 합리적인 경제운영이 불가능하고 모순 없는 정책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회주의에서도 합리적인 경제운영이 가능하다. 사회주의에서는 오히려 불확실성을 배재함으로써 비용의 낭비를
없애고 과잉생산 부분을 후생 부분에 이용할 수 있으며, 수입 원천을 국가가 관리함으로써 조세를 폐지할 수 있다는등 자본주의보다도
유리한 점도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라 해도 어떤 조건에서 발생하는가에 따라 사회주의로의 이행과정은 큰 차이가 있다. 영국과 같이 자본주의가 충분히
발전하여 사회주의화하기에 적합한 조건이 조성되어 있을 경우,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모든 계급의 사람들이 헌법개정이라는
점진적^5.23^평화적 방법을 종원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
  반면 경제발전 수준이 낮은 단계에서 사회주의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의회를 통한 점진적^5.23^평화적 방법보다 혁명적 방법을 택하지 않을
수 없다. 러시아의 볼셰비키 혁명이 이 경우로,여기서는 노동지도자가 정부관청을 점령하고 강력한 혁명군을 동원, 사회주의를 이룩하게
된다.
  사회주의로 나아가는 이 두 가지 방식 가운데 성숙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회를 통해 이루어지는 점진적 평화적 방법이 혁명에 의한
것보다 사회주의의 장점을 보다 효과적으로 살릴 수 있다.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보다 장점이 많지만 이 장점은 비민주적 사회주의가 실제 존제함으로써 무시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역사를 돌아볼 때
비민주적 사회주의가 존재함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민주주의란  정치적 영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자유경제 을 의미하며, 민주주의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다. 즉 일종의  정치방식 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때와 장소에 따라서는 반드시 최상의 방법이 아닐수 있다.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사회^5.23^경제적 조건이
필요하며, 이런 조건을 이해하지 못한 채 민주주의를 이상화^5.23^절대화하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소수가 생산수단을 지배하는 체제를 철폐하고 (인민에 의한 지배)를 확립함으로써,진정한 민주주의를 실현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들은 과도기에 한해서는 민주주의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하는데,바로 이 과도기가 그들에게 민주주의를 회피할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회주의자들도 근대 시민사회 이래 보편적 가치로 인정받는 민주주의를 자신의 무기로 삼고
싶겠지만,실제로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에는 어떤 필연적 연관이 없다. 사회주의에서도 민주주의가 성립될 수 있으나 이것이 사회주의의
본질로부터 유래하는 것은 아니다.
     과연 자본주의는 죽었는가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자본주의의 소멸과 사회주의의 도래를 예견했던 슘페터가 오늘날 공산주의의 몰락과 자본주의의 승리를 보고 뭐라고
말할까? 그의 사상으로 보아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첫째,공산주의, 특히 스탈린 주의가 망한 것이지 사회주의가 망한 것은 아니다. 둘째,아직도 자본주의가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승리했다고는 볼 수 없다. 내가 말했지 않는가. 이런 문제를 논할때는 긴 안목으로 보아야 하며 50년도 단기간에 불과하다고 물론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논리다.
  이 책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기업가의  기술혁신 이라는 창을 통해서 설명한 슘페터의 견해는, 자본주의 발전을 자본가에 의한 노동자의
착취로 설명하고 이를 통해 자본주의의 사망선고를 내린 마르크스의 이론과는 아주 대조적이다. 물론 슘페터의 결론 역시 자본주의의
불가피한 멸망이지만.
  그는 자본가들이 열정적인 기사처럼 행동하는 동안에만 자본주의는 생존할 수 있는 체제로 생각했다. 자본주의의 추진력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용감한 사람들에게서 나온다고 그는 보았다. 그런데 현대에 들어올수록
자본주의의 눈부신 발전은 경제발전 자체까지도 자동 기계화하여 발전의 추진력인 기업가의 창조적 정신을 무색하게 만든다.
  결국 그는 기업가들이 자본주의 체제를 수호하려는 의욕을 잃게 되며,그들의 관심도 사회주의 쪽으로 기울게 되어 체제의 수호자들을 잃게
된 자본주의는 결국 사회주의 체제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본주의를 이은 사회주의는 민주주의 없이도 존재할 수 있고
또 양자가 결합되어 존재할 수도 있다고 그는 말한다. 이처럼 그는 자본주의의 우울한 장래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슘페터가 예견한 사회주의는 사회제도로서는 흥망이 있을 수 있으나,하나의 이상으로서의 사회주의는 긴 생명력을 가지며 오히려 자본주의
속에서 자본주의를 도울 수 있다. 그가 지적한 대로 자본주의는  창조적 파괴의 끊임없는 강풍 에 의하여 발전하는 경제체제이며 그 강풍이
멎으면 살아남기가 어렵게 된다. 그 강풍은 끊임없는 자유경쟁에 의해서만 유지된다.
  사실 자본주의 체제는 안온한 체제가 아니다. 약자는 도태되고 강자만이 살아남는 비정적인 체제다. 강자에게는 너무 많은 포상이
주어지고 약자의 몫은 너무 적게 주어지는 제도다. 따라서 이 제도는 어떤 다른 제도보다도 불평등을 가시적으로 만들어내는 체제다. 또 이
체제하에서 승패를 가름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금전이기 때문에 황금만능의 천민적 가치관이 자리잡기 쉽다.이 두가지, 즉 강자와 약자
사이의 지나친 불평등과 건전한 가치관의 마모가 자본주의 약점이라 할수있다.
  자본주의가 건전한 발전을 하려면 항상 이 두 가지가 시장원리에 보완되어야 한다. 불평등이란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적인
이념이 필요하며,가치관 마모의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서는 종교나 철학이 자본주의를 도와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상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를 대체하거나 자본주의에 의해 패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본주의를 도와주는 일종의 방부제
역할을 한다. 이런 점에서 이념으로서의 사회주의는 영원하다.

중세사회

중세사회 (??)
        저자:블로크 (Marc Bloch, 1886-1944)

  역사의 표층에만 시선을 집중하는 전통적인 역사학을 비판하고, 인간활동의 총체적 모습과 역사의 심층적 이해를 강조한 블로크는 이를
위해 모든 학문간의 장벽을 극복하고 종합적인 시각에 입각한 새로운 역사학의 창조를 제창했다. 블로크의 종합적인 역사관의 결정이자
20세기 역사학의 최대성과로 평가되는 이 책은  과거의 한 시기에 지나지 않는 중세사회가 어떠한 특성을 가졌기에 그 전후의 다른 시기들과
구분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에 대한 대답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레지스탕스 지도자가 된 대학교수
  역사연구에서 다른 학문분야를 폭넓게 적용하는 접근 방법으로 20세기 역사서술에 혁명을 가져온 프랑스의 역사가 블로크. 그는 리옹
대학의 로마사 교수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적부터 역사가로서의 소양을 키울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 최고의 지적 엘리트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이었던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역사학과 지리학을 주로 공부했다. 1908년에 졸업한 그는 역사학 교수 자격을 획득하고 독일로
건너가 독일 역사학을 공부했다.
  제1차 대전중에는 보병으로 복무하면서 뛰어난 공을 세워 훈장을 받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20년에 박사학위를 받고 스트라스부르
대학에서 중세사 교수로 재직했다.이 대학에서 평생의 학문적 동반자인 뤼시앵 페브르를 만나 1929년에 (사회경제사연보)를 발간하는 등
아날 학파 를 형성한다.전통적인 역사학이 역사의 표층에만 시선을 집중하자, 이를 비판하고 인간활동의 총체적 모습과 역사적 세계의
심층적 인식의 주요성을 강조하고, 이를 위해 모든 학문간의 상호교류에 입각한 새로운 역사학의 창조를 제창했다. 이들의 1세대를 이어
브로델 등의 제2세대를 거쳐 라뒤리 르고프 등의 아날 3세대가 훌륭하게 그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1937년에 그는 소르본 대학의 경제사 교수로 취임했고, 1939년에는 그의 주저인 (중세사회)를 출간함으로서 그의 명성은 확고 해졌다.
그러나 곧 제2차 대전이 발발하자, 이미 여섯 아이의 아버지이자 저명한 대학교수인 그는 다시 연구실을 박차고 나가 전쟁에 종군했다.
이듬해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하자, 이제 레지스탕스 지도자로 독일군과 맞서 싸우다가 어느 들판에서 사로잡혀 처형되었다. 전쟁중에
참고문헌도 없는 상황에서 역사학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틈틈이 정리하여 쓴 (역사를 위한 변명)을 유고로 남겼다.
  레지스탕스 동지였던 한 친구의 회고에 의하면 블로크는 혹심한 고문을 당하고 1944년 58세의 나이로 다른 26명의 대원들과 함께
처형당했는데, 당시 16세 가량의 소년이 그의 곁에서 떨고 있었다 한다.
   저 총 맞으면 아프겠지요 라고 묻는 소년에게 블로크는 다정한 손길로 그의 팔을 잡으며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그렇지 않단다, 얘야.
조금도 아프지 않을 거야 라고 말한 후  프랑스 만세 를 외치며  프랑스의 양심 은 죽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종군과 레지스탕스 운동에의 참여를 통해 그토록 간곡하게 주장했던 대로 역사는 스스로의 정당성을 입증해보였다. 그의 사망
후 얼마 안되어 나치 독일은 패전하고 프랑스는 다시 자유를 찾았다. 그리고 이 양차대전의 경험은 블로크가 생전 원하던 대로 전후 유럽
각국의 역사학계의 학풍을 재정립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봉건사회의 성격에 대한 논란
  일반적으로  암흑의 시대 라 불리는 중세사회에 대한 사회적 성격을 둘러싸고 프랑스 혁명 이후 학자들간에 치열한 논쟁이 있어왔다.
계몽사상가들인 몽테스키외는 중세유럽의 봉건사회를  세계역사상 단 한번 있었으며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을 특유한 사건 으로 보았다.
그러나 역시 계몽사상가인 볼테르는 봉건제가 단순한 사건이 일정의 통치형태로 유서 깊은 세계적인 현상이었다고 파악했다. 그 이후에도
논쟁은 계속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크게 보면 2,3가지로 줄기를 잡을 수 있다

   세 가지 견해
  첫째는 봉건제를 하나의 지방분권적인 통치조직으로 파악하는 정치적 유형론이 있는데, 이들은 봉건제란 고도로 조직화된 정치체제가
몰락할 때 이에 대한 응전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하나의  통치조직 이라고 보았다. 두번째는 봉건제 본질을 주군과 가신의 쌍무계약관계로
파악하는  법제사적 해석 을 들 수 있고, 세번째는  마르크스 사학 인데, 이들은 봉건제를 하나의 생산양식으로 파악하고 있다. 

   봉건사회의 모습
  이처럼 이들의 관점에 따라 중세 봉건사회의 모습이 다소 다르긴 하나 대체로 그 모습을 그려볼수는 있다. 중세란 용어는 대체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476년)한 이후 16세기 르네상스 시대까지의 약 천 년간을 가리킨다. 대체로 중세를 암흑의 시대로 규정하나, 중세의 문화부재
시대는 대체로 6--19세기로 국한되며, 13세기를 전후해서는 독특하고 우수한 중세문화가 형성되기도 했다.
  지중해 세계를 통합했던 서로마의 멸망 후 정치적으로는 게르만 민족의 이동에 따른 공백기가 왔으며, 문화적으로는 서양문명권이 크게
3분되었다. 즉, 동쪽에는 동로마 제국의 문화인 비잔틴 문명권, 서쪽에는 게르만 국가들에 의한 독특한 유럽 문명권, 중동지역에는 이슬람
문명권이 형성되기 시작하여 나름대로의 특성을 유지하면서 유럽 중세문화의 형성에 기여했으나, 최종적으로는 유럽문명권이 그 주도권을
행사하며 발전했다.
  10세기를 전후하여 전 유럽에는 정치^5.23^군사^5.23^경제^5.23^사회면에 걸쳐 독특한 체제가 성립되었는데 이것이  봉건체제 다. 이
봉건체제는 유럽인들의 사고방식^5.23^가치관^5.23^사회제도 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봉건제도란 왕^5.23^제후^5.23^기사 등 지배층
상호간에 토지를 매개로 하여 주종관계를 맺고, 이들은 대소장원의 영주로서 농민을 지배했던 유럽 특유의 사회를 말한다.
  기사는 자기보다 유력한 기사를 주둔으로 섬겨 충성을 맹세하고 군역과 의무를 부담한 반면, 주군은 의탁해온 기사를 가신으로 삼아
보호하고 봉토(토지)를 주어 부양했다. 주군이나 가신은 모두 기사로서 같은 신분에 속했으며, 그들 사이에 맺어진 주종관계 또한 평등한
사람들 사이에 체결된 쌍무적 계약관계였다. 따라서 주군과 가신 중 어느 한 쪽이 그 위무를 이행하지 않는 경우 그 관계는 해소될 수
있었다.
  주군과 종신과의 인적관계가 강한 이 사회에서는 국가의 주권이 지방의 제후들에세 분산되어 행사되었다. 비록 왕은 있었지만 백성에게는
통치권이 직접 미치지 못하고, 그가 거느린 몇몇 대귀족에게 국한되었다.
  경제적으로 볼 때 영주의 토지는 하나 또는 몇 개의 장원으로 조직되어 있는데, 대체로 1촌락 1장원을 이루 었다. 농민들은 장원에서
대체로 자급자족 공동체 생활을 영위했다.   
  한마디로 중세봉건사회는 영주와 성, 농민과 오두막, 성직자와 교회라는 봉건사회의 3요소 위에 정치적으로는 지방분권, 군사적으로는
주종관계, 경제적으로는 장원제도로 움직인 시대로 규정지을 수 있다.

     종합적인 시각에서 기술된 봉건사회
  블로크는 (중세사회)에서 기존의 여러 견해들을 포괄적으로 수용하여 중세사회의 전체적인 모습을 한편의 대하소설로 그려냈다.
  그는 봉건제가 그 자체로서 고립적으로 파악될 수 있는 하나의 입장을 배격하고 전체성 속에서 파악되어야 진정한 모습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진 듯하다. 봉건사회의 종합사를 구축하려는 저자의 구상에서 태어난 이 책은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권에서는  인적
종속관계의 형성 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봉건사회의 형성 및 작동 원리로서의 사람들 사이의 종속 및 유대관계를 논하고 있으며,
계급과 통치라는 부제가 붙은 제2권에서는 봉건사회의 정치체제의 형성과 그 변천을 다루고 있다.
  그는 이책에서 봉건제의 기본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논하고 있다.
   농민층의 종속, 봉급제 대신 봉토제도 채택, 기사계급의 우월한 위치, 인간과 인간을 서로 결속시켜주던 복종과 보호의 유대관계, 권력의
세분화,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와중에서도 친족집단과 국가가 계속 살아남았으며 국가는 봉건시대 제2기에 새로운 활력을 되찾았다. 
  위의 내용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던 내용과 거의  다르지 않으나 간과해서는 안되는 점이 발견된다. 그가 유럽 봉건제의 특징으로 제일
먼저 들고 있는 것이 이 사회의 직접적인 생산자층의 존재형태인데, 이것은 그가 한 사회의 기본성격을 파악할 때 우선적으로 주목했던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해준다.
  한편 그는 봉건사회를 1,2기로 나누었을 뿐  봉건제의 위기 라는 말로 대표되는 봉건제 말기상황은 따로 설정하지 않은 것 또한
특징적이다. 그는 13세기까지를 봉건시대로 잡아놓고 있는데, 불과 4--5세기만을 중세시대로 보고 있는 블로크의 파악은  중세 천 년 을
주장하는 사람들과 논란이 일 수도 있다고 보여진다.
  블로크가 이 책에서 보여주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가 계약의 상호성을 극히 중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봉건적 충성이야말로
봉건제 후기에 국가가 재건되고 왕권이 강화됨에 있어서 강력한 이념적 도구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이 봉건적 계약의
상호성은 군주에게도 신민의 복지도모라는 의무를 부여하는 것이어서 그것이 지켜지지 않을 때는 군주에 대한 신민의  저항권 까지도
인정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블로크가 이 책에서 사용한 사료의 종류는 서사시^5.23^벽화^5.23^기도문 등 당대의 문학작품이나 역사적 소산들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그로 인해 그의 문학작품 분석방식은 그후의 중세문학 연구 자체에까지 영향을 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저서는 블로크 특유의 문화적 서술방식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그 도도한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때로는 길을 잃고 헤매는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유럽 역사의 어느 한구석에서 불쑥 꺼내온 사건 하나하나가 궁극적으로는 저자의 일관된 논리에 용해되면서 그 시대
인물들의 삶의 갖가지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중세시대를 구성하는 주종관계^5.23^장원제도^5.23^분권제도 등 개별적인 연구성과들을 토대로 중세봉건인들의 삶의 총체성을
드러내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종합적인 안목을 가진 역사가로서의 블로크의 저작은 돋보인다.
   블로크의 역사인식
  블로크의 학문형성 과정에는 중요한 세 가지 만남이 있었다.
첫째는 언어학과의 만남으로 이를 통한 그는 연구의 정밀성을 기함과 동시에 비교방법론을 터득할 수 있었고, 둘째는 독일 역사학과의
만남으로 이로 인한 문헌비판 방법의 습득, 그리고 세 번째는 뒤르켐의 사회학과 비달 드 라 블라쉬(Vidal de la Blache)의 지리학의 결합된
형태와의 만남이 그것이다.
   독일 문헌사학의 극복
  랑케로 대표되는 19세기 독일 역사학은 독자적인 개체에 대한 내면으로부터의 이해를 대상으로 하고, 그 이해의 방법은 기록문서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블로크는 독일에 유학가면서 이러한 독일사학을 접할 수 있었는데, 독일사학의 이러한 경향은 결국 한편으로는
문서숭배 사상을 잉태했다.
  19세기 유럽의 혁명과 반혁명의 와중에서 각국의 공문서들이 공개된 데 힘입어 독일 문헌비판 사학은 한층 더 활기를 띠었다. 블로크도
그의(역사를 위한 변명)에서 기록된 사료 없이 역사서술이 불가능함을 내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독일사학의 영향은 그에게 있어서 하나의 기초공사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했다. 그는 문헌사료가 제시할 수 있는 한계가 얼마나
좁은 것인가, 그리고 문헌에만 의존하는 연구방법이 얼마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가를 깨닫고 역사가의  상상력 을 제한 하는 문헌숭배
사상을 극복하고자 했다. 
   학문간의 장벽 극복
  한편 그는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학은 무엇을 위한 학문인가 라는 근본적 의문을 제기하고 학문과 학문 사이에 존재하는 기존의 두터운
장벽을 거부했다. 그는 인간에 대한 탐구인 역사란 다양한 인간적인 삶의 전체에 대한 탐구이자 복합적인 사회전체에 대한, 그리고 상당히
장기간에 걸치는 시대 전체에 대한 탐구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에서 그는 인간에 관한 것이라면 지리학^5.23^경제학^5.23^인류학^5.23^사회학^5.23^고고학 등 모든 학문적 성과를 포용하고자
했다. 그의 이러한 자세는 뒤르켐과 앙리 베르의 영향이 컸다. 특히 앙리 베르는 이러한 취지에 공감하는 연구자들을 규합하여 1900년 에
<사적 종합론>을 창간한 바 있는데, 블로크는 1912년에 이 잡지의 공동편집자가 되었다. 그후 독립한 블로크는 스트라스부르에서 페브르와
<사회경제사 연보>를 창간하여 그 취지를 계승했다. 우리는 이들을 흔히  아날 학파 라 부른다. 열린 태도로 인간화학들을 통합하는
역사학을 추구하는 아날 학파는 오늘날 유럽역사학계에 지배적인 패러다임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에 의한 과거의 미래
  그의 첫 번째 저서 (일 드 프랑스)를 발표한 이래 그의 주된 관심은 중세의 사회경제사, 특히 그중에서도 농업사로 기울어져갔다. 그는
토지 자체에 다가가 접촉한다 라는 신념으로 농민들의 기쁨과 고뇌가 담겨 있는 농업사를 서술코자 했다.
  이를 위해 그는  농부이면서 동시에 역사가 가 되고자 했으며, 문서나 책상물림을 통해서는 도저히 포착할 수 없는  생명의 움직일 을
포착하려 했다. 실제로 그는 생생한 농촌사를 쓰기 위해 프랑스 농촌을 구석구석을 방문하여 촌로들과 대화를 통해 구전을 수집하고 들판을
거닐면서 농촌의 향기를 음미해보기도 했다. 이처럼 그는  현재에 의한 과거의 이해 , 곧 거꾸로 역사를 읽어가는 것을 중요한 방법으로
생각했다. 특히 변화가 완만한 농업사일수록 현재 남아 있는 경지구조나 촌락의 흔적을 통해서 과거의 농촌구조와 농민의 삶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교사학 추구
  그는 각 사회단위들에서 나타나는 역사들 사이의 연관관계를 설명함으로써 역사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자 했는데,  비교 의 방법이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그는 비교 언어학과의 만남을 통해 중요한 시사를 받을 수 있었다.
  그는 비교의 방식을 둘로 나눈다. 첫째 방식은 그리스^5.23^로마문명과 현대의 원시사회를 비교하는 것처럼, 시간적^5.23^공간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 동일한 기원을 설정할 수 없는 사회들을 비교하여 유사점을 밝히는  원거리 비교방법 이다. 두번째는  공통된 기원을 가진
즉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는 동시대 사회들의 상호작용을 연구한 방법 이다.
  이와 같은 비교의 방법을 쓰는 이유는 현상들의 일반적이  참된 원인 을 규명하기 위함이다. 예를 들면, 거의 같은 방향의 발전이
이루어지면서도(중세 유럽의 봉건제) 그 속도와 양상이 다를 때(프랑스 봉건제와 독일의 봉건제) 이 같은 각각의 차이를 확인하고 이를
초래한 원인 또한 규명함으로써 각 단위 사회의 특성도 밝혀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비교사의 방법에 입각해서 전체도 조망할 수 있고,
개별적인 특징도 선명히 부각시킬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자 했다.
  위와 같은 역사관을 가진 블로크는 유럽 중세의 출현은 내적 발전의 필연성에 따른 역사적 단계가 아니라, 당시의 특수한 상황의 복합적인
작용에 의한 산물이라고 파악했다. 이 책은 과거의 한 시기에 지나지 않는 봉건사회가 어떻한 특성을 가졌기에 그 전후의 다른 시기들과
구분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대답적인 성격을 가지는데 블로크의 종합적인 역사관의 결정인 이 책이 20세기 역사학의 최대성과로
평가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옥중수고

옥중수고 (Quaderni del carcere)
        저자:그람시(Antonio Gramsci, 1891--1937)

  그람시가 옥중에서 1929년부터 1935년 사이에 쓴 글들을 모은 이 책은 마르크스주의적 사회분석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가장 창의적인
마르크스주의적 저작의 하나다. 외부로부터의 차단, 가혹한 감시, 자신의 건강상태 악화라는 극한상황 속에서 그에게 남겨진 단 하나의
실천활동인 지적 탐구를 계속해간 그람시의 글들은 그후 출간되어 현재까지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고단했던 혁명가의 삶
  잠시 타오르는 불꽃처럼 짧은 생애를 살았으나,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의 창당주역,또 훗날 유로코뮤니즘이라는 새로운 마르크시즘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한 창조적 사상가로서, 이른바 전쟁중에 활동한 유럽 공산주의 이론가 중 가장 두드러진 봉우리를 이룬다.       
  생애를 통하여 그를 지배했던 일관된 관념인 혁명운동은 노동자의 일상생활과 함께 시작해야 된다는 생각이었으며, 이 점에서  전체성 의
개념을 강조한 루카치와 맥이 통한다. 그람시는 파란만장한 생애를 통하여 실로 다양한 문제에 관심을 표명했으나,무엇보다 가장 치열한
초점은 선진 자본주의 내의 혁명과정에 맞춰졌으며 여기서 특히 이념적 투쟁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된다.
  그람시의 생애는 대체로 4기로 나뉜다. 제1기인 1918년까지의 그의 생애는 이탈리아 사회원(PSI)의 당원으로서 전통적 마르크시즘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사고를 성숙시키는 시기였다. 제2기는 1919--1920년간에 걸친 이른바  붉은 해  (red year)의 시기로서 튜린 시 공장위원회
운동을 주도하며 (신질서) 지의 편집장으로 활동하던 시절이다. 다음 1921년 말부터 26년에이르는 제3기는 그가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건한
후 그 주역의 한 사람으로서 당의 정책노선을 설정하고 코민테른과의 교섭에 바빴던 시기다. 다음 제4기는 1926년부터 37년 그의 죽음에
이르는 시기로서 옥중에서 어려움을 맛보며 그의 사상을 (옥중수고)에 옮겨 적는다. 그의 주저이자 네오 마르크시즘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이 책은 이렇듯 그의 생활체험과 사상적 편력을 집약한 노작이다.
  (옥중수고)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는 그 논의에 앞서 튜린에서의 공장위원회 운동에 투신하던 그 당시까지의 그의 생애를 더듬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는 1891년 이탈리아에서도 매우 낙후된 지역의 하나인 사르드니아에서 유복한 집안 출신의 어머니와 말단 공무원으로 있던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출생했다.
  그가 3살 되던 해 우연한 사고로 꼽추가 되었고, 키도 작아 152cm 정도였다. 설상가상으로 아버지가 공금횡령죄로 감옥에 잡혀가는 불행이
겹쳐 외롭고 불우한 소년기를 보낸다. 허약한 몸, 가난한 집안형편 등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그는 놀라운 정열로 독서에 열중했고, 튜린
대학에서 언어학을 전공하다 결국 학업을 중단하고 1913년 이탈리아 사회당에 가입한다. 이어 1916년 당기관지인 <전진>의 편집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정치세계에 투신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은 그에게 놀라운 충격을 주었고, 이를 계기로 그는 서서히 대두되는 공장운영회 운동에 모든 정열을 불사른다.
당시 전후 이탈리아의 경제적 상황은 최악의 상태에 이르렀다. 특히 노동자을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으므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기존의
노동조합에 불신을 표명했다. 그의 눈에 비친 노동조합은 관료적이며 엘리트 중심적일 뿐만아니라, 부르주아 사회의 틀 속에서 움직이는
비혁명적 조직이었다. 따라서 이탈리아의 혁명적 전환을 꾀하려는 그로서는 그 대신에 공장위원회를 중심개념으로 잡았다.
  위원회의 주된 과제는 노동자 대중의 의존적 태도를 보다 주체적 입장으로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공장 노동자들이 교육을 통해
행정적^5.23^기술적 기능을 비축하고 진정으로 생산과정을 통제할 수 있을 때 새로운 노동자 국가의 토대가 마련된다고 그는 보았다. 다시
말해서, 그람시는 공장위원회를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축소판으로 인식한 것이었다.
  그가 공장위원회 개념에 심취한 것은 실제로 이 조직 속에서 러시아 소비에트의 이상화된 모습을 찾고자 한 것이었으나, 러시아 혁명의
전개과정에서 소비에트의 권력이 약화되는 것을 뒤늦게 알면서부터 점차 당의 역할을 강조하기 시작한다. 1920년 말 튜린의 위원회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고 점차 파시즘의 위협이 높아지자 그는 오랫동안 몸 담았던 사회당을 떠나 1921년 이탈리아 공산당 창건의 주역이 된다.
  1922년 파시스트들이 정권을 잡고 독재정치를 강화하면서 이탈리아 공산당은 탄압의 표적이 되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당은 그에게
망명을 권유했으나, 그는 거절했다. 그는 최악의 상태가 되기 전까지는 지도자는 대중과 함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국회의원인 자신까지 체포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다소 안이한 생각도 했다. 그러나 그는 체포되어 20년의 형을 언도받았다.  우리는 이
녀석의 뇌가 작동하는 것을 20년 동안 중지시켜야 한다.  담당 검사의 말이었다.
  1929년부터 그는 (옥중수고)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건강이 악화되어 1935년 감옥에서 로마의 퀴시사 병원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그의 생명을 구하기엔 너무 늦어 1947년 46세에 세상을 떠났다.

     극한상황에서 집필된 옥중서신
   독수리에게 간을 쪼이는 프로메테우스처럼 살면서도 나는 무언가 몰입할 수 있고, 자신의 내적인 삶에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어떤 영원한
것을 쓰고자 한다.
  그는 감옥에서 처형에세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의 주저인 (옥중수고)는 1929년부터 1936년에 이르는 동안 옥중에서 씌어진 것으로, 이 글에는 그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삼엄한 감시
속에서 집필된 원고여서 전체적인 완결성이 부족하고 생략된 부분이 적지 않으며, 내용 또한 모호한 부분이 많아 해석에 어려움이 따른다.
내용이 애매한 것은 검열의 어려음을 피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풀이된다. 이 책의 주요한 주제는 지식인의 역할, 헤게모니의 개념, 동서의
상이한 혁명전략으로 집약된다.

   지식인
  그람시의 사상에 있어서 지식인의 역할은 항상 중핵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종종  상부구조의 이론가 로 불린다. 마르크스가
지식인의 개념을 수공노동과 정신노동의 차이에 준거하여 협의로 정의하는 전통적 입장을 취하는 데 반하여, 그람시는 이 개념을 보다
폭넓게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개개의 사회계급은 그 자체로서 유기적으로 하나 혹은 드이상의 지식계층을 창출하는데,이에 의해 정치적
영역뿐만 아니라 사회적^5.23^경제적 영역에서 계급의 동질성이 공고해지며 계급의식 또한 투철해진다. 고 설명한다.
  좀더 부연하면 그는  전통적  지식인과  유기적  지식인을 구별한다. 전자는 스스로 사회계급과 무관하며 사회정치적 변동에 의해
영향받지 않고, 역사적 계속성을 체화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부류로서, 문필가^5.23^예술가^5.23^철학자^5.23^성직자 등을 일컫는다. 이들
전통적 지식인은 일차적으로 역사적 산물인 데 반하여, 유기적 지식인은 보다 사회학적인 측면으로 이해된다.
  어떤 지식인이 얼마나 유기적인가를 측정하는 척도는 그가 속한 조직이 그 조직이 대표하는 사회계급과 얼마ㅇ나 가깝게 연계되었는가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서 유기적인 지식인은 정치적^5.23^사회적^5.23^경제적 제영역에서 그들 계급의 집단적 의식을 표명하는 존재인
것이다.
  다음 그람시의 관심은 노동계급이 그들 자신의 지식인을 생산하는 문제로 집약된다. 그에 따르면 바로 이것이 이른바 성공적인 혁명운동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이다. 유기적인 지식인과 그들의 계급과의 관계는 변증법적인 것으로, 전자는 노동계급의 체험으로부터 그 자산을
얻어내는 동시에 후자에게 이론적 의식을 심어준다. 프롤레타리아의 경우 유기적 지식인의 형성은 부르주아 계급에 비하여 매우 불리하다.
때문에 그람시는 프롤레타리아가 정말로 그 자신의 지식인을 생산해내는 시기는 국가권력을 장악한 이후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에게 당은 계급과 가장 유기적으로 연계되는 지식인의 조직이며, 따라서  집단적 지식인  의 의미를 가진다. 당은 그 안에서 집단적
의지가 구체적 형태로 옮겨지는 유기체이자 사회의 복합적인 한 요소로 이해된다.

   헤게모니 개념
  그에 의하면 지식인의 주된 기능의 하나는 이념의 정당화 작업을 통하여 그들의 계급이 전체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 유지하도록 유도하는
일이라고 본다. 그는 헤게모니의 개념을 프롤레타리아가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다른 모든 세력, 특히 농민세력에 대하여 지도력을 발휘하게
되어 이들을 내적 갈등이 없는 동질적인 정치경제적 역사적 블럭으로 결집시키는 과정으로 활용한다. 이에 따라 경제적^5.23^사회적 내지
이념적 제세력들이 사회변혁을 위한 잠정적 통일체와 연결이 되는 이른바  역사적 블럭 은 그람시에 있어 가장 의미있는 개념으로 등장한다.

  그에 있어 역사적 블럭은 단순한 연합전선의 의미 이상의 것으로 이때 지배집단은 구체적으로 추종집단의 일반이익과 조정을 꾀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그람시는 헤게모니의 개념을 광의로 해석하여 지배계급이 그들의 군림을 위해 추종집단의 동의를 얻어내는 것을 그 안에
포함시킨다. 실제로 많은 나라에서 지배계급의 세계관이 지식인에 의하여 크게 확산되어 전체 사회에  상식화 되는 경우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그는 헤게모니의 개념을 통하여 서방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속에서 자본주의가 계속 살아남는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모색해왔다.
그는 이들 세계에서 힘과 동의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며 자연스럽게 헤게모니가 유지되는 현상에 유의하며, 부르주아 언론기관(신문이나
결사체) 을 통하여 문화적 헤게모니를 계속 행사하는 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불가능하다고 설파한다.
  부르주아가 어떻게 강제력 대신에 동의를 바탕으로 그들의 지배를 영속화시킬 수 있는지 그는 분명 이 문제에 대하여 정밀한 분석을 꾀한
최초의 마르크시즘 이론가로 기록될 것이다. 그는 전통적 마르크시즘에 내재하는 경제결정론에 대하여 회의를 표명하며, 노동계급의
지식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 한 프롤레타리아의 반 헤게모니 구축은 불가능하다고 진단한다.특히 부르주아의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를 경시하는 레닌주의적 전략은 서방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서 통용될 수 없다고 밝혔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당은 국가권력을 장악하려고 꾀하기 전에 스스로의 주된 역할을 교육기관으로 규정하고, 교육을 통하여
시민사회의 여러 영역에 반문화를 확산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시민사회 내의 헤게모니를 손에 넣지 않고 국가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는 실로 무모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람시가 강제력을 전혀 경시한 것은 아니나, 그는 어디까지나 그것이 시민사회 내의
헤게모니에 의한 투쟁과 변증법적으로 연계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동서의 혁명전략
  그람시는 동서간의 상이한 혁명전략을 비교하며 기동전과 진지전을 그예로 삼는다. 발전된 자본주의 체제에 적용할 수 있는 혁명전략은
진지전이며, 기동전은 그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에 한하여 사용될 수 있다고 설명된다.
  그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대중파업에 관한 팜플렛을 통하여 서방세계에서 이론적으로 기동전을 정당화하려고 노력한 것은 잘못이라고
공박한다. 경제적 위기가 혁명으로 치닫는 일반적 위기를 창출할 것으로 판단한 그녀의 관점을그는 경제결론적이며 자연발생적 관점이라고
공박한다. 더욱이 그는 러시아에서 성공한 레닌의 기동전 전략을 서방세계까지 보편화시키려는 시도는 오류라고 설명한다. 
  그는 기동전과 진지전간의 차이와 연관하여 유기적 위기와 국면적 위기간의 개념분화를 시도한다. 예컨대 기존의 지배계급이 장기간
치유불가능한 구조적 모순에 직면해 있는 경우, 즉 유기적 위기의 상황이 존재하는 경우에 한하여 기동전은 고려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국면적 위기상황에 몰입되는 서방 선진 산업사회의 경우 기동전은 고려될 수 없으며, 참호 속에서 장기전을 펴는
진지전만이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노동자 계급의 헤게모니적 계급 상승
  이 책에는 통일국가 형성까지의 이탈리아 역사에서 지식인이 한 역할을 고찰하고 부르주아 지배에 이론적 근거를 제공하는 여러 철학을
비판하며, 새로운 프롤레타리아적 세계관, 피착취 계급의 의식 속에서 부르주아적 세계관에 대항해서 그에 대치될 새로운 세계관을
정립하려는 그람시의 사상이 담겨 있다.
  여기서 제시된 그람시의 지식인관, 헤게모니 개념 및 진지전의 전략은 이후 서구의 좌파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의 지적
유산은 이탈리아 공산당의 사상적 기반이 되었으며, 공산당이 기독교 민주당과의 화해를 꾀한 1972년의 이른바  역사적 화해 의 이론적
바탕이기도 하다.
  그의 영향은 특히 모든 유로코뮤니즘의 이론가들에세 결정적 영향을 미쳐 스페인 공산당 당수인 카릴리오에 의하여 1978년 출간된
(유로코뮤니즘과 국가)의 내용 또한 그 본질적 맥락에서는 그람시의 (옥중수고)의 재판에 불과한 것이다.
  몇 년 전, 국가보안법이 젊은 자유와 이성을 구속하는 포승줄로 작용할 때만 해도 이 책은 마르크스의 (자본론), 모택동의 (실천론) 등과
함께 금서의 목록에 끼어 있었다. 실로 상전벽해라는 말이 실감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