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요나스(Hans Jonas, 1903--1993)
기술문명에 대한 윤리학 시론 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인간 상호간에 성립했던 책임의 원리를, 인간과 자연의 관계에도 확립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생태윤리학의 고전적 저술이다.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과 기술을 분석하고, 근세인의 유토피아가 전제하는 진보의
신화를 비판하면서 인간과 자연의 한계에 대한 인식 위에 성립하는 책임의 윤리를 역설하고 있다. 인간과 더불어 함께 몰락하겠다는 자연의
경고 가 마치 절망적 선전포고 로 들리는 오늘날, 이 책은 유한한 인간존재의 의미를 되묻는 문명비판서이다.
지구의 종말을 외친 생태학적 예언자
한스 요나스는 독일에서 태어나 프라이부르크, 베를린, 하이텔베르크와 마르부르크에서 철학신학예술사를 공부하고, 1928년
하이데거와 볼트만에게서 그노시스 (Gnosis) 개념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33년 영국을 거쳐 1935년에는 팔레스티나로 망명했고, 1949년 캐나다를 거쳐 1955년에는 미국으로 이주했다. 예루살렘 대학, 맥길대학,
칼레톤 대학 등에서 강의를 했으며, 1955--1976년 뉴욕의 사회과학연구소에서 교수로 활동했다. 미국의 프리스턴 대학, 컬럼비아 대학, 뭔헨
대학에서 객원교수로 활동했으며, (책임의 원리)로 1987년 독일서적 판매조합의 평화상을 수상했다.
주요 저서로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바울의 자유의 문제)(그노시스와 후기 고대적 정신)(그노시스 종교)(무와 영원의 사이)(생명의
현상)(책임의 원리)(1979)(주체성의 권력인가 아니면 무능력인가)(기술, 의료, 그리고 윤리)(1985)등이 있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책임의 원리)에서 요나스는 생태학적 위기에 처해 있는 인간의 실존상황을 이렇게 서술한 적이 있었다.
예전에는 세계의 종말에 관한 판결로서 우리를 위협했던 것이 종교였다. 오늘날에는 바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우리의 지구 자체가
이날의 도래를 예견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마지막 계시는 예수가 설법했던 시나이 산으로부터 오지도 않고, 석가가 깨우쳤던 보리수
나무로부터도 오지않는다. 한때는 훌륭한 창조로 나타났던 이 지구의 황무지에서 우리 모두가 몰락하지 않으려면 우리의 탐욕스론 권력을
억제해야 한다고 고발하는 것은 바로 말없는 피조물들의 고발이다.
환경문제에 대한 3대 경종
지구는 단 하나뿐이다(Only one earth!) 이 하나뿐인 지구가 오늘날 인구증가 산업화 도시화 등 우리 인간 스스로의 행위에 의해
날로 오염-파괴-황폐화 되어 그 존망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제 환경문제는 선진국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지금 이 문제는 한 나라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닌, 전 지구적 생태계의 파괴와 우리 인류의 사활이 걸려 있는 지구환경의 위기의 문제로까지 대두되고 있다.
무릇 모든 역사적 대사건과 대역사가 그러하듯이, 오늘날 환경문제가 이토록 짧은 시간에 전 인류의 최대 관심사로 급부상하게 된 데는 그
이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Silent Spring), 슈마허의 (작은것이
아름답다)(Small is Beautiful), 로마 클럽의 (성장의 한계)(The Limits Growth) 등 3대 고전적 저작이 그것이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의 복지국가 를 있게 한 그 이면에 (소수의견 보고서)와 (비버리지 보고서)와 같은 불후의 저작들이 있었던 것처럼
요나스의 (책임의 원리)도 이들의 선구적인 연구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침묵의 봄
이 책은 1962년 미국의 한 무명 여류 해양학자인 레이첼 카슨 여사가 쓴 17편의 에세이로, 미국에서 베스트 셀러가 되었던 책이다.
현대에 들어오면서 농업생산성을 위해 DDT와 같은 농약의 남용과 오용으로 야생동식물이 사멸되고, 농작물 그리고 가축이 피해를 입는 등
자연생태계가 파괴되고 있다. 그래서 봄은 왔어도 꽃도 피지 않고, 새도 지저귀지 않는 조용한 죽음의 침묵만이 계속되고 있다고 경종을
울려준 책이다.
당시 켸네디 대통령으로 하여금 환견문제에 대한 심각성을 고취시키고, 환경문제에 대한 전 세계적인 관심을 환기시킨 이 책은 우리
나라에서도 1990년 탐구당에서 번역, 출간되어 보급되고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독일의 경제학자 슈마허가 1973년 엮은 핸드북으로, 이 책은 서구세계의 자본주의 경제구조를 혁명적 방법으로 고찰한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 경제의 기업조직의 거대화와 기술전문성의 고도화 촉진은 결과적으로 거대경제가 비능률, 환경오염, 비인간적인 작업조건을
초래했다고 비판하고, 경제적기술적^5.23^과학적 전문성에 도전하면서, 보다 작은 단위 공공 소유권 지역단위의 사업에 기반을 둔
이른바 중간수준 의 기술체계를 주장했다.
그리고 자본의 노예로서의 인간이 아닌 인간에 봉사하는 자본관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생산물 보다는 인간 그 자체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한편, 인간상실 로부터 인간회복 을 주창하면서 종국적으로는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가 아닌 자연의 관리자로서, 최소의
소비로 최대의 복지를 이룩해야 한다는 불교 경제학을 강조했다. 국내에서도 1986년 범우사에서 김진욱씨의 번역으로 출간되었다.
성장의 한계
풍요 속의 빈곤^5.23^환경 파괴 등 우리 인류가 당면하고 있는 현재 및 미래의 고난을 주된 연구대상으로 하고 있는 로마 클럽의 첫
작품으로, 1972년에 출간하여 생태학적 폭탄 을 터뜨렸다. 지상에서 성장을 결정짓고 결국 그것을 제한하게 되는 5가지 기본요소들, 즉
인구증가농업생산자연자원산업생산환경오염 등 5대 요소를 가지고 연구를 수행한 결과, 방종한 기계문명, 무분별한
성장, 인간부재의 물질적가치관을 비판하면서 이들 문제들에 대한 전 인류의 즉각적인 대처를 주장했다.
과학의 비윤리성을 파헤친 문명비판서
(책임의 원리)는 전체 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장은 (변형된 인간행위의 본질),제2장은 (토대와 방법의 문제), 제3장은 (목적과
존재에서 차지하는 목적의 위상에 관하여), 제4장(선, 당위, 그리고 존재: 책임의 이론), 제5장(오늘날의 책임: 위협받는 미래와 진보사상),
제6장 (유토피아 비판과 책임의 원칙>)로 되어 있다.
전통윤리의 한계
무엇이 위기에 처해 있는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선 무엇인가가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요나스는
생태학적 문제를 대체로 3단계로 접근하고 있다. 즉, 그는 이 책에서 왜 위기인가? 어떻게 위기를 극복할수 있는가? 위기는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철학적 대답을 시도한다.
1--2장에서는 전통윤리학으로는 왜 생태학적 위기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가를 설명한 다음에, 새로운 윤리학의 원칙으로 책임의 명법??
을 제시한다. 3--4장에서 요나스는 왜 인간은 존재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으로부터 출발하여 새로운 윤리학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구축한다.
요나스는 여기서 인간존재의 당위성과 존재에 대한 인간의 책임 사이의 관계를 목적론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5~6장에서 요나스는 현대
위기의 근원을 할 수 있다 는 인간능력의 절대화와 유토피아주의가 결합하여 나타난 진보사상에서 발견한다. 한편으로는 마르크스주의적
유토피아를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술적 간섭에 대한 지구의 인내 한계를 분석함으로써, 요나스는 인간존재의 유한성과 인간의
거주공간인 지구의 유한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이제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힘을 과학을 통해 부여받고 경제를 통해 끊임없는 충동을 부여받아, 마침내 사슬로부터 풀려난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의 권력이 인간의 불행이 되지 않도록 자발적인 통제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하나의 윤리학을 요청한다
고 저자는 서문을 시작하고 있다.
사고의 전환 필요
생명의 젖줄인 하천은 하수구로 점차 변해가고 도시는 이미 거대한 매연의 굴뚝으로 변한 지 오래다. 우리는 이제 환경오염에 의한 피해를
피부로 느낀다. 그렇지만 과연 우리는 우리의 아픔을 지구의 아픔으로 느끼고 있는 것일까? 조금은 철학적 눈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면
오염된 사물, 인간의 타락과 부패, 문명의 시궁창 등이 이제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된 듯한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구의 종말을 외쳐대는 생태학적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이와 같은 생태학적 불감증을 치유할수 있을까? 한스 요나스는 사고의 혁명 없이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인간의 자유가 기술을 통해 실현되고 따라서 기술에 의한 환경오염은 우리가 자유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치러야 할
대가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지구의 병은 치유할 길이 없다. 환경오염을 기술적 문제로만 파악하는 근대적 사고방식은 속으로
곪아들어가는 생태학적 문제를 계속 악화시킬 뿐이다.
우리에게 종말을 위협하는 것은 결코 강대국만의 전쟁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평화적 기술도 역시 가공할 만한 불행의
잠재력을 함축하고 있다. 평화적 기술에 의한 불행은 결코 갑작스럽게 오지 않고 수많은 기술문명의 성공들에 가려진 그림자 속에 숨어든다.
따라서 몰래 숨어드는 생태학적 불행을 피하는 것은 분명한 징조를 가지고 있는 전쟁을 피하는 것보다 훨씬 더 어렵다. 기술의 평화로운
사용이 전쟁보다 더 커다란 재앙을 가져온다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어떤 위험에 봉착하고 있는가를 알게
된다.
정복된 자연의 보복
인간의 기술적 착취에 의해 고통을 받고 신음하던 지구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드디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에 대한 자연의 보복은
역설적이다. 인간이 기술을 통해 자신의 삶의 영역을 넓히면 넓힐수록 진정한 삶의 터전은 이로 인해 더욱 더 잠식당한다. 요나스의 (책임의
원리)는 바로 인간의 방종한 권력을 고발하는 자연의 대변인이다.
자연도 말을 할 수 있는가? 자연도 고통을 당하는가? 자연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존재의 권리를 가지고 있는가? 생태학적인 맥락에서
제기되는 이런 질문들은 모두 인간은 과연 존재해야 하는가? 라는 물음으로 모아진다. 만약 우리가 인간존재의 당위성을 선험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한다면 인간의 거주공간인 지구존재의 당위성도 역시 인정되어야 한다. 인간의 안과 밖의 존재하는 자연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진정한 삶의 터전을 잃게 된다.
인간과 자연으로 책임원리 확장
만약 자신에 대한 무분별한 착취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인간과 더불어 몰락하겠다는 자연의 경고가 마치 절망적 선전포고 처럼 들리는
오늘날, 요나스의 이 책은 유한한 인간존재의 의미를 되새기게 만드는 문명비판서다.
핵전쟁이 발발할 경우 승자와 패자의 구별이 무의미해진다면 우리는 이제 자연과의 전쟁에서도 항상 승자로 남을 것이라는 미몽에서
깨어나야 한다. 인류의 자멸이라는 위협에 직면하여 평화 가 절대적으로 요청된다면 책임 은 이를 실현할 수 있는 행위의 명법 이라고
요나스는 말한다.
이 책은 환경문제를 기술적 문제로만 파악하는 개량주의에 빠지지 않고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자연에 대한
지나친 승리는 승자 자신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는 철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하여 책임의 원리를 인간 상호간의 영역으로부터 인간과
자연으로 확장할 때, 우리는 비로소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요나스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시간이 촉박하다고 말하고 있다. 생각만 하고 있기에는 지구의 위기가 너무나 심각하다는 것이다. 사실
기술에 의한 진보가 진행되면 될수록 우리에게 주어진 유예기간은 그만큼 줄어든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요나스의 (책임의 원리)는 너무 무거운 책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요나스가 이 책을 쓴 것은 이론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천을 위해서이다. 이론은 항상 이론??의 여지가 있지만, 생태학적 위기에 직면하여 우리에게 요구되는 실천은 너무나 분명하다. 아무튼 이
책은 이제까지 잠들어 있던 우리의 생태학적 의식을 깨워놓는다.
인간중심적 세계관에서 생태학적 세계관으로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거대한 트럭, 산을 뭉개는 불도저들, 사방에 들어서는 고층건물 주변의 크레인 등을 볼 때마다 우리는 혼란과 고통을
느끼면서도 흐뭇해진다. 거기서 우리가 성공적으로 이룩한 산업화와 국력의 성장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지구 곳곳에 동일한
모습과 현상이 만연하고 있다. 산업화를 통한 문명화가 인간을 빈곤과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수단인 한 이작업은 더욱 추진되어야 한다.
문명 뒤에 숨은 죽음
그러나 우리가 겪고 있는 혼란과 고통은 너무 크고 그것이 동반하는 그늘은 너무 어둡다. 오염된 하천에서 죽어가는 물고기를 볼 때
자연파괴의 심리적 아픔을 경험한다. 생태계가 파괴되고 지구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개발, 경제적 풍요, 역사적 진보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흐려지고, 인류와 지구의 앞날이 암담해진다. 역사와 문명에 관한 방향감각이 혼란해진다. 세계는 어떻게 되는 것이며,
인류는 어떤 삶의 형태를 갖추게 되는 것일까?
오늘과 같은 추세로만 갈 때 생태계 파괴, 인류의 종말과 지구의 죽음은 기정사실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오늘날 인류가 대처할 문제
가운데서 생태계의 문제보다 더 심각하고 절망스러운 문제는 없다. 산업화가 당장 물질적 풍요를 가져온다 해도, 더이상 그것을 맹목적으로
추진할 수가 없다. 현재까지 인류가 택한 방향과 그런 지평에서 이룬 문명의 의미에 대해 근본적 반성과 재해석이 필요하다. 이미 심각한
병에 든 오늘의 지구와 어두운 세계가 우리의 세계관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라면 그러한 세계관은 근본적 전환을 필요로 한다.
인류의 역사는 자연정복과 복종의 시각에서 서술될 수 있다. 한 개인이나 집단의 역사가 인간 사이의 정복과 복종의 긴장된 복종의 관계로
기록될 수 있다면, 인류 전체의 시각에서 볼 때 인간의 역사는 인간에 의한 끊임없는 자연정복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인간끼리의 관계에서나
자연과의 관계에서 인간의 행동을 지배해온 것은 정복 의 이념과 그러한 목적을 가장 효율적 도구로 사용한 과학적 자연관이다. 과학문명은
인간에 의한 자연정복의 놀라운 성공을 뜻한다. 정복이념과 과학적 자연관을 합쳐 인간중심적 세계관 으로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인간중심적 세계관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류가 과학기술을 빌려 성공한 자연의 궁극적이고 구체적 의미는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환경오염, 생태계의 파괴, 인류의 멸망 그리고 지구의 죽음을 뜻하게 됐다.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절박한 위기의 원천적 밑바닥에 정복 이라는 이념과 과학적 자연관으로 표현된 인간중심적 세계관이 깔려 있다면
그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은 바로 그 세계관을 원천적으로 수술하는 데서 찾을수 있다. 그것은 세계관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한다. 근원적 문제는 근원적으로만 해결된다. 근원적 해결책은 인간중심 적 세계관을 생태학 적 세계관으로 전환대치 시키는
것이다.
생태학적 세계관은 거시적 입장에서 미시적 입장에 갇혀 있는 인간 중심적 세계관의 포기를 의미한다. 자연은 인간의 욕망충족을 위한
도구나 자료가 아니라 인간의 근원적 모체이며 조화를 찾아야 할 대상이다. 인간 외의 생물체는 정복과 약탈의 대상이 아니라 인간과 공생활
권리를 갖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공존
이런 생태학적 세계관에 비추어볼 때 발전 과 진보 의 의미는 재해석된다. 인류의 참다운 발전은 무제한적 자연정복이 아니라 자연과의
공존이다. 인류의 진정한 진보는 생물학적 욕망의 이기적 충족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욕망을 극복하여 남의 존엄성을 고려하고 남과 조화
속에서 공존하는 도덕적 태도와 실천력에 의해서만 측정된다.
생태학적 이념은 자연에만 적용되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차원과 측면에서 나타나는 모든 인간관계에도 다 같이 적용되어야 한다. 물질적
가치를 가장 존중하고 인간의 이기심을 전제한 자본주의적 이념이나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모든 전체주의적 이념은 생태학적 이념과
배치된다.
그러므로 서로 대립되면서 지난 한 세기 동안 세계를 지배하고 갈등을 일으켜온 이 두 개의 이념들은 다 같이 비판되고 극복되어야 한다.
과학기술이나 위의 두 가지 정치 사회적 이념이 서양적 사상의 산물이라면 서양적 사상은 생태학적 이념으로 대치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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