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강유익(1858--1927)
영국의 토머스 모어가 그린 <유토피아>가 서구적 이상 세계라면, <대동서>는 중국고전에 기술된 <유가의 이상세계>를 서구식 근대사상으로
재해석하여 모든 차별에서 해방된 동양적 이상세계를 그린 책이다. 즉, 무술개헉운동으로 정치적.사회적 개혁을 추진하고자 했던 강유위가
공자의 <춘추>등 6경에 나타난 공자의 근본정신을 되살려 새로운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제국주의의 침략과 내부적 경직성으로
붕괴위기에 처한 중국의 현실을 타개할 방향으로 <대동세계>를 제시했던 것이다.
생애
청나라 말기의 정치가. 무술변법운동(1898)의 중심인물로 중국전통사상의 마지막 보루이자 새로운 사상을 상징하는 첫인물.1858년 광동성
남해 출신으로 일찍이 유학경전과 불경.사서 및 서양서적을 널리 읽어 학문의 기초를 다졌다. 후에 그는 홍콩과 상해 등지에서 서양학문에
대한 이해를 깊이하면서 스스로 사상적 전환을 체험했다.
1889년 그는 한낱 서생의 신분으로 처음 조정에 복궐상서하여 변법자강을 건의했다가 조롱만 당하기도 했다. 그 이듬해 그는 만본초당을
장흥리에 짓고 후학을 양성했는데, 이때 양계초도 제자로서 수학했고 강유위는 <신학위경고>를 저술했다. 그후 그는 거인.진사 등으로
천거되기도 했다.
청일전쟁에서 중국이 패배한 직후인 1895년부터 그는 4년간에 걸쳐 7차의 상서를 올렸으나 채택되지 않다가, 1898년 드디어 덕종의 부름을
받아 2시간 이상의 밀담을 갖고 변법책의 대계를 도모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원세개의 누설로 당시의 전권자였던 서태후에게 전해지자 그
계획은 이른바 <백일유신>으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강유위는 홍콩으로 피신했고 담사동.광인 등을 비롯한 동지들은 처형당했다. 이 사건을
<무술정변>이라 한다.
강유위는 망명길에서 일본.타이.인도 등지를 둘어보고 캐나다 등지에서는 보황회를 조직하여 어느 변법을 수용하려 한 광서제를 지켜주기
위한 활동을 한다. 그러나 이는 황제제도를 인정하는 봉건적 정치체제를 인정한다는 뜻인데, 그렇다면 그는 변법자강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전에 가지고 있던 개혁사상을 버린 것일까? 어쨌든 강유위는 운동이 실패한 뒤 진보진영에서 사회개혁에 책임을 지고 그것을 행동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위험한 것인가를 절감한 것 같다.
그가 중국에 돌아온 것은 1911년 신해혁명 이후로, 1916년 원세개에게 제재를 취소한 것을 요구하기도 하지만 그것도 잠시,1917년 장훈과
결탁하여 복벽운동을 추진하는 등 1927년 병으로 세상을 뜰 때까지 사상에서나 정치에서 노골적인 보수화의 길을 걷는다.
저서로는 <대동서> 이외에도 <신학위경고> <공자개제고> <맹자미언> <춘추삼세의> <춘추공양전주> 등 방대한 양을 남겼다.
중국의 근대화운동과 강유위
중국의 근대화운동은 <양무.변법.혁명>의 3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청조는 이편전쟁과 애로 호 사건, 내부적으로는 태평천국운동 등으로
위기에 직면하여 부국.강병을 내세우면서 서양을 모델로 하는 근대화운동을 추진했는데, 제1단계가 양무운동이다. 양무운동의 <중체서용>은
중국의 정신에 기초를 두고 서양의 과학기술,특히 군수시설을 도입하여 자강을 도모하려는 부국강병운동이었으나 청일전쟁의 패배로 실패로
끝났으며, 반면 동시에 추진했던 일본의 명치유신은 성공을 거두었다.
서태후와 이홍장이 추진했던 양무운동이 실패하자 그 반대편에 있던 광서재 (덕종).장지동 등 황재파의 발언권이 커지고, 지배층
내부에서는 좀더 근본적인 개혁의 필요성을 질감하게 되었다. 이러한 운동의 중심에 강유위.양계초 등이 있었다.
무술개혁을 주도한 강유위의 변법자강운동이 처음으로 나타난 것은 제1차 상서이다. 이에 앞서 강유위는 <신학위경고>를 지어 전통적인
유교와 공자의 사상을 비판, 재해석하여 자신의 개혁사사상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했다. <<옛것에 비처어 오늘의 제도를 고친다>>는 말을
빌어왔다. 강유위가 특히 주목한 것은 일본의 명치유신(1868)이었으면,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승리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강유위는 서양의 기술의 도입만이 아닌 정치제도를 개혁(변법) 해야만 부국강병을 달성할 수 이다고 주장하고, 청일전쟁의 패전결과로
맺어진 시노모세키 조약 체결 거부운동을 전개했다. 이리하여 무술개혁의 전단계로서 급진적인 강유위 지지자인 양계초.담사등 등에 의해
호남성에서 개혁운동이 시작되었다.
이들 급진적인 개혁론자들은 학회.신문.잡지를 통해 입헌정치제, 자본주의 체제,유럽의 학술과 사상의 도입 등을 적극적으로 고취시켰고
특히 강유위의 <대동사상>과 <공자개제고>가 중심이 되었다. 그는 <대동서>에서 모든 인류가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이상사회의 대동에
도달하기 위한 전제로 민권론과 평등론을 내세웠다.
한편 <공자개제고>는 성인으로 모세지던 공자의 위상을 바꾸어 공자야말로 춘추시대의 난세를 개혁하고자 한 한 사람의 개혁자에
불과하다는 해석을 가해 변법개혁의 정당성을 찾고자 했다. 그러나 북경에서의 변법파의 활동은 서태후가 중심이 된 수구파들의 반격에 의해
저지되었고 강유위도 신변에 위협을 느껴 상해로 잠시 피신했다. 상해에서 그는 황준헌.장건 같은 당대의 개혁론자들과 어울려 개핵정책을
모색했다.
변법들의 개혁안이 정책적으로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의 교주만 점령으로 열강에 의한 중국분할이 임박한 후였는데, 가유위는
광서제에게 5번째 상서를 올려 변법개혁을 하지 않으면 황제는 물론이고 관리들도 온전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을 고취시켜 광서제의 마음을
움직였다. 이에 광서제는 1898년 제도의 개혁을 지향하는 특별조칙을 내리면서 소위 무술 백일개혁의 막은 올랐다. 이를 <변법자강운동>
또는 무술년에 있었다고 하여 <무술개혁>이라고 한다. 그해 강유위.양계초.담사동.황준헌 등이 광서제의 부름을 받았다.
광서제는 이러한 개혁세력 등에 의해 구상된 정책들을 정리하여 100여 항목이 넘는 개혁안을 발표했다. 그중 중심적인 개혁내용은 과거제
개혁, 새로운 학교제도의 도입,신문.잡지발행,인재등용,농공산업 진흥, 육해군의 근대화 등이다.
광서제는 변법파의 활동에 제약이 되는 이홍장 등 고위관리들을 해입시켰다. 그들은 대부분 서태후에 충성하는 자들이었다. 이러한
광서제의 과감한 군사력을 가진 원세개는 개혁파를 배신하고 모든 사실을 서태후에게 밀고함으로써 변법운동은 역전되었다.
수구파의 정변으로 광서제가 연금되는 가운데 담사동 등 <무술6군자>들은 처형당하고 강유위.양계초 등 몇명은 일본으로 망명을 떠남으로써
<무술개혁>은 백일천하로 좌절되었다.
강유위가 주도한 무술개혁은 근대적 시민의식이나 부르주아 세력이 발달하지 못한 중국 전통사회에서 혁신적인 지식계층에 의해 추진된
민족주의적 구국운동으로, 대중기반이 취약하기 때문에 완강한 보수세력의 반대를 극복하지 못하고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대동서>의 내용
강유위가 살았던 시대는 중국역사에서 커다란 변화의 시기였다. 중국과 서양,전통과 근대, 보수와 진보 등 여러 가치개념들이 충돌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당시 사상가들은 중국의 미래를 위한 사상적 활로를 모색하고 있었다. 강유위의 사상도 그중 하나인데, <대동서>는 그의
사상적 특징을 말해주는 저작임과 동시에 당시의 시대상을 말해주는 대표작이기도 하다.
그러면 <대동서>가 말하려는 중심사상은 무엇인가? 저자가 서문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세상의 모든 생물은 괴로움에서 벗어나려 한다(??
??).고거구략은 인간본성의 기본욕구이며 최고의 인도 법칙이다. 그리고 사람은 하늘이 낳은 것이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천부인권 사상이
있다. 여기서 우리는 그가 지닌 근대사상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러면 궁극적으로 고거구락을 위해서 괴로움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아야 할 것인데, <대동서>에서는 세상의 고뇌의 원인이
국가.계급.인종.남녀.가족.사유재산 등 9가지 구속적 존재에 있고, 이것들을 점차 제거해서 제도와 문화를 동일하고 평등하게 하는
세계정부를 실현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자유는 신선학.불학.천유학이 성해져서 모든 정신적 고뇌에서 해방된 뒤에 얻어진다고
했다.
이 책은 10부로 나뉘어지는데, <갑부>는 <세계에 들어가 중고를 보다>란 제목 아래 현실세계의 고뇌--인생의 괴로움, 천재의 괴로움,
인도의 괴로움 등이 제시된다. 그에 의하면 이 모든 괴로움은 전부 <구계>에 의해 생긴다. 따라서 이상세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이
<구계>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하여 이하 9부에서는 9계를 제거하기 위한 방법이 논술되어있다. 그 내용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제1. 국계를 떠나서 대지를 합친다. 지구상의 모든 국가의 경계를 없애고 전세계를 유일한 공정부에 의해서 통할한다.
제2. 급계를 떠나 민족을 공평케 한다. 즉, 모든 계급을 없애고 계급 없는 사회를 만든다.
제3. 종계를 없애고 인류를 같게 만든다. 즉, 인종을 개량하여 전이류를 우량인종으로 만든다.
제4. 형계를 없애고 독립을 지킨다. 즉, 완전한 남녀동등권을 실시한다.
제5. 가계를 없애고 천민이 된다. 즉, 가족제도를 파기하여 필요한 시설은 전부 공영으로 한다.
제6. 산계를 없애고 생업을 공으로 한다. 즉, 생산분배의 기구를 공영으로 하고 사유재산에 기초를 둔 불합리한 점을 제거한다.
제7. 난계를 없애고 태평을 다스린다. 즉, 앞에 든 6계를 없애고 태평한 세상에 이른다.
제8. 유계를 없애고 중생을 사랑한다. 즉, 인류평등이란 이상이 달성된 후에는 인간세계만이 아니라 전 생물계에 자비를 베푼다.
제9. 고계를 없애고 극락에 이른다. 즉, 앞에든 온갖 고뇌를 제거하여 이 땅 위에 극락세계를 출현시킨다.
이상이 바로 앞에서 말한 이상사회, 즉 대동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기본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그가 꿈꾼 사회는 말하자면 일종의
공산주의적 유토피아였다고 하겠다. 거기에는 세계정부가 이루어져서 국가가 없어지며 정부는 모든 인민의 선거로 구성되고 국가가 없어지며
가족 또한 인정되지 않는다. 아동양육과 노인의 보양은 모두 정부가 하고, 성년은 정부의 지도명령에 의해 농.공 등의 생산사업을 분담하게
된다. 그렇게 해서 이 땅에 극락세계가 출현한 후에는 <<인경을 떠나 선불의 경에 들어간다는 말로써 본서는 맺어져 있다.
사상적 평가
전체적으로 보아 <대동서>를 구성하는 사상적 요소는 <공양삼세설> <예운편의 대동소강설> <불교의 자비평들설> <루소의 천부인권설>
<기독교의 자유평등설> <유럽의 사회주의학설> 엄복에 의해 소개된 <진화론>등이다.
여기서 대동설이란 원래 유교의 고전에서 그리는 이상사회이고, 공양삼세설이란 역사가 혼탁한 거란세, 안정이 된는 승평세, 안정이
성숙되는 태평세의 평태로 발전해간다는 사상이다. 이중 승평세는 <예기>의 <예운편>에 나오는 <소강>과,태평세는 <대동>과 같다고 보았다.
이같이 <대동서>는 형식과 내용 면에서 대동사상과 공양삼세의 뼈대 위에 근대적인 것을 전통적인 것 안에 포섭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사유재산제의 해악을 지적함으로써 생 시몽, 오언,푸리에 등의 공상적 사회주의 사상가들과 비교되기도 한다.
어쨌든 강유위의 대동사상은 근대적인 것을 섭취하고 이것과 일정한 타협을 이루면서 중국적인 것, 전통적인 것을 재조직함으로써 형성된
것이다. 서구문명의 충격에 중국사람들이 반응한 여러가지 형태에는 전통에 완전히 집착하려는 보수파, 그와 정반대로 서구화를 주장하는
급진파,부분적인 서구화를 주장하는 파, 세계주의화를 주장하는 파 등이 있다. <대동서>만을 기준으로 보면 강유위는 세계의화를 주장하는
소수입장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강유위의 본질적으로 왕조체제를 근대적으로 수정함으로써 그 존속이나 강화를 의도한 것인지, 아니면 입헌군주제와 민권을
제시함으로써 근대적인 정치체제를 수립하려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견해가 일치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봉건사회에 대한 철저한
부정을 외쳤던 그가 운동이 실패한 후에는 국수주의 군주정체를 옹호하고 공화제와 혁명을 반대하는 등 보수적 전통주의자의 길을 갔기
때문이다.
또한 <대동서>의 내용이 차분히 읽어보면, 어떤 일정한 주제를 두고 쓴 저술이라기보다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동원하여 그냥
열거한 느낌도 없지는 않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앞에서 말한 세계가 인류진화의 궁극이라고 말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당시 중국사상에서 어떠한
방법으로 그것을 이루어낼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도 없다. 이런 면에서 <대동서>는 강유위가 젊은 나이에 쓴 습작 정도로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강유위의 대동사상이 그때 상황에 안주하지 않고 사상적으로 낙관적인 신념과 전망을 제시하여 계몽적.
진보적 작용을 한 점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대동서> 속에 나오는 여성해방.인권문제 등은 오랫동안 지속되어왔던 봉건구습에
반대하는 역할을 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대동서>에 나타난 강유위 사상의 특징은 전통에 대한 근본적인 자기비판이라는 문제를 남겨놓긴 하지만, 현실대응을 위해 몇천
년간 내려온 유교자체를 과감히 수정하고 다시 해석해낸 데 있다.그리고 그의 사상은 전통에서 근대로 나아가는 과도기 사상으로서
유교자체의 존재근거를 뿌리째 흔들 만큼 이후 전개되는 근대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우리가 중국철학 사상사를 총체적으로 보려고
할 뿐만 아니라, 중국학에서 지금까지 가장 중요한 문제로 취급되는 전통과 현대의 문제에 관해서도 알고 싶다면 양쪽을 가르는
분수령으로서 강유위의 사상은 반드시 건너야 할 산이다. <대동서>가 필독서가 될 이유가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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