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거래시>로 잘 알려진 중국 진대의 도연명이 쓴 중국 최초의 전원시집. 중국 최초의 전원시인으로 평가받는 그는 자신이 직접 전원생활을
하면서 일상적인 전원생활의 아름다움과 그 가치를 시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단순히 전원생활을 동경하는 도시인적
사고방식으로는 접근하기 어려운 전원생활의 진솔한 정서가 표출되고 있다. 얼핏 현실도피자로 보이기 쉽지만, 사실은 인생에 대한 깊은
사색과 예리한 관찰로 적극적으로 인생의 진리를 추구하는 시인이라는 것을 그 작품은 잘 나타내고 있다. 그가 노래하는 전원생활의
진실에서 우리는 인간의 가장 본원적인 모습을 찾는다.
생애와 작품
중국 북위. 송나라 때 시인. 이름은 잠이고 연명은 자. 강서성 심양현 시상에서 태어났다. 동진왕조의 초창기에 큰 공을 세운 증조부
도간은 대사마란 큰 벼슬을 지냈으며 그의 조부와 부친도 태수를 지냈다. 모친도 장군 집안의 혈통으로, 그의 고상한 인격과 품격은
혈통에서 연유한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도연명의 생애는 대략 소년, 출임, 은일의 3기로 구분하여 생각할 수 있다.
소년기란 그가 출생하여 다음 2기의 출사하기 전까지를 말하며, 다음 2기의 준비기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을 뿐, 지적할 만한 중요한
사적은 없다. 다만 그의 깊고 고요한 인품, 고매한 취지, 그리고 학문에 대한 열정이 이 시기에 형성되었고, 웅대한 포부, 출세에의 갈망
등이 이 시기에 발아하여 성장하고 있었음을 그의 작품을 통해 알 수 있다.
출임기는 그가 관계에 첫발을 내딛던 무렵부터 은퇴할 때까지의 시기를 말한다. 그가 출사를 택하게 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소년기에 품었던 이상과 웅지를 펴기 위해서요, 또 하나는 호구지책을 위해서였다. 하급귀족의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젊어서부터 면학에 힘써 입신의 뜻을 품었으나, 29세에 처음으로 주좨주가 되고 뒤이어 몇가지 벼슬을 거치는 동안 그가
접한 현실은 그에게 실의와 번민만을 안겨줄 뿐이었다. 그의 정신적 추구는 물질생활 속에 추락했고 그의 이상은 현실 속에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고향에서 멀지 않은 팽택현령을 80일간 지내다가 사임하여 13년에 걸친 관료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는데, 그때 나이 41세였다.
<<내 어찌 5두미(당시 현령의 봉급) 때문에 허리를 굽혀 향리의 소인을 대할 소냐>> 하고 물러났다. 현을 사찰나온 군의 말직에게
굽신거릴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전원으로 돌아가는데, 그때의 심경을 토로하는 것이 그 유명한 <귀거래사>다. 관직을 내놓고
은일생활을 하겠다는 선언의 뜻이 담겨 있다.
은일기는 그가 관직에서 은퇴하고 전원에 귀의하여 타게할 때까지 그의 생애에 가장 중요한 시기로 불후의 대작들이 빛을 발하게 된다.
천성적으로 자연을 좋아하는 그가 현실의 외면하고 찾아든 전원의 보금자리는 어떠했는가? 물론 경제적인 고통이 뒤따랐지만, 그는 그
속에서 속박 대신 해방을, 번민 대신 열락을 누릴 수 있었다.
직접 농민과 접촉하며 농업에 참여하면서 그들의 순박한 인품과 감정을 알게 되고 그것을 찬양했다. 그들과의 우의를 소중히 여기고
그들을 동정하고 그들의 생활과 염원을 반영했다. 열광적으로 자신에 주어진 운명을 포용하는 속에 그는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면서 화미한
종막을 드리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작품 중에는 이 시기에 있어서 초탈과 해방의 희열을 구가한 것이 많다. 그는 끝내 문벌사족과
타협하지 않고 꿋꿋이 살다가 63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시대적 배경
어느 문인이나 작가로 모두가 시대적 배경의 영향을 받듯이 도연명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은 두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정치사회적 배경이요, 하나는 사상종교적 배경이다.
후한 말엽부터 동요되기 시작한 중국의 정국은 3국, 서진을 거치는 동안 혼란이 계속되어 동진에 이르러서야 겨우 일시적인 소강상태를
유지하는 듯하다가 다시 난이 잇따랐다. 이렇듯 200여 년간이나 꼬리를 문 전쟁과 당화 속에서 수많은 인명이 무참히 도륙되는 등 혼란하고
비참한 사회상이 빚어지는 가운데, 한대에 그렇게도 극성한 양상을 보이던 유학도 점차 쇠해져 사회질서의 확립에 이바지하기보다는 한낱
몇몇 선비들이 부귀를 구하는 도구로 변질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경지에 이르러 백성들의 경제생활은 도탄에 빠졌고 일반지식층 인사들은 되도록 현실을 피해 안식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이 노장철학과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였다. 당시 지식인들은 의식 면에 있어서는 현실에 대한
반항과 불만이 자못 적극적이고 강렬했지만, 행동면에서는 소극적인 태도로 현실을 도피했다.
중국문학의 발전사적인 측면에서 고찰할 때 위진시대는 분명 하나의 분명한 특색을 지닌 시대로 설명될 수 있다. 문학의 형식적인
면에선 비록 이렇다 할 창조가 없었다 해도 문학의 정신 면과 창작활동 면에서는 적지 않은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작가들은 실용면의
사회적 사명을 이탈하여 낭만적이고 신비적인 철학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기울었고, 그 결과로 문학이 공용학문에서 개인적인 언지문학으로
발전했다. 이와 같은 발전은 점차로 독립적인 예술을 형성하여 어떠한 외적인 여건이나 구속도 받아들이지 않는 뚜렷한 현상을 조성했다.
<전원문학>의 비조로 그 이름을 창사에 드리운 도연명도 그와 같은 시대와 환경 속에서 살았고 그의 작품들도 이 시대환경의 산물이다.
<도연명시선>과 작품세계
도연명의 시는 오늘날 4언시 9수, 5언시 120여 수가 전해지고 있다. 시가 외에도 사부와 산문도 썼다. 내용은 전원에 사는 은사의 생활을
노래한 것, 유유자적한 심경을 토로한 것, 주현의 관리들과의 증답시영사의고시 등이 주가 된다. 한가한 정취 가운데서도
때로는 격렬한 감정이 표출되어 있어 송나라 소동파는 이것을 평해 <<그의 시는 질(순박)하나 실제는 기하며(아름다움), 구(파리함)하나
실제는 유(살찜)하다>>고 했다.
스스로 농사짓는 생활 속에서 그 전원생활을 소재로 하여 작품을 썼다. 술과 국화에 얽힌 에피소드로 자칫하면 현실도피자로 보이기
쉽지만, 사실은 인생에 대한 깊은 사색과 예리한 관찰로 적극적으로 인생의 진리를 추구해간 시인이라는 것을 그 작품은 잘 나타내고 있다.
도연명은 동진과 송나라가 교체되는 암흑 같은 사회적 현실에 대해 증오하면서도 완곡하게 비판, 폭로했다. 그는 고대신화와 전설 중의
영웅을 노래하고, 정직하고 재능있는 역사적 인물을 찬미하는 것을 통해 당시 정권찬탈의 참극과 포악무도한 정치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그는 <사기를 일고 9장을 쓰노라>의 첫수에서 백이숙제를 노래했는데, 이는 주무왕이 은나라를 정복했기에 주나라의 음식을 먹는
것은 치욕이라고 생각하고 수양산에 들어가 굶어죽었다는 백이숙제의 이야기를 빌어 유유가 동진정권을 찬탈하고 송나라를 세운 데
대한 비판한 것으로, 송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절개를 표현하고 있다. 제6수는 굴원과 가의를 노래했는데, 굴원의 애국사상과 가의의
재능에 대한 찬미를 통해 정권찬탈의 불의를 비판했다. 또한 도연명은 은퇴하여 직접 노동에 종사하고 농민과 접촉하기는 했지만 정치를
완전히 잊지는 않았다. 특히 그는 이상적 사회를 추구했다. <도화원시와 기>는 바로 시인의 정치적 이상을 나타낸 작품으로 시인의 사상과
예술성의 최고봉이다. <도화원>은 진왕조 때 난을 피해온 사람들이 개척한 곳으로 인간세상과 격리된 낙원이다.
토지는 평탄하고 가옥은 즐비하게 서 있는데 비옥한 밭,
좋은 못이 있고 뽕나무와 대나무 같은 것들이 늘어서 있다
두렁같은 가로세로 뻗어 있고 개짖는 소리와 닭울음 소리가 들린다
거기로 사람들은 오가며 농사를 짓는다
남자와 부녀자들의 옷차림은 모두 밖의 사람들과 다른 것이란 없다
늙은이와 어린 것들은 모두 걱정없이 즐거이 지낸다
시인은 이렇게 <도화원>을 그림처럼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또 그는 천성이 술을 좋아해서 그의 시는 <<편편 술이 있다>>고 할 정도다. 그중에도 가을밤의 지루함을 달래며 술을 마시고 마구 썼다고
하는 <음주>라고 제목 붙인 20수의 연작은 도연명의 독특한 시경을 남김없이 전한다. 그중에서도 널리 회자되는 <다섯째>를 보면 다음과
같다.
초려를 맺어 인경에 있고 / 더구나 거마의 시끄러움이 없고
그대에게 묻노니 무엇이 능하뇨 / 마음 머니 땅 또한 편벽되다
국화꽃 동쪽 울 밑에서 꺾고 / 유연히 남산을 보누나
산기운 낮밤으로 좋고 / 나는 새 서로 더불어 돌아간다
이 가운데 참뜻이 있으나 / 말하려 해도 이미 말을 잊었다
처음 4구의 서언에서는 자문자답형으로 <<은일생활은 산중에 살 필요 없이 마음가짐 하나로도 사회에서 멀어질 수가 있다>>고 했다. 중간
4구는 인생의 참뜻을 가을 황혼의 경치 속에 묘사한 것이다. 국화꽃을 꺾으면서 바라본 남산의 황혼녘 경치는 깊은 맛이 감돌아 시심을
유감없이 발휘하게 한다. 그는 은사의 처세를 뛰어난 감각으로 노래한 최초의 시인이었다.
뭐니뭐니해도 도연명 하면 떠오르는 것은 <귀거래사>다. <귀거래사>는 전문 240여 자, 4장으로 구성되었다. 그 전반부에서는 관직을
사퇴하고 전원으로 돌아가는 해방감을 가을 정경 속에 그려냈고, 후반부에서는 다가오는 노년의 삶을 <천명>에 맡기는 심경을 봄의 정경
속에서 묘사했다.
제1장은 관리생활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심경을 읊었고, 제2장은 도착한 기쁨을 노래했다. 제3장은 고향에서의 생활과 그곳에서 얻은
철학을 담았으며, 제4장은 자유를 누리면서 자연의 섭리에 몸을 맡겨 살아가는 것이 좋겠다는 자신의 모습을 노래했다. 전체적으로 영탄조가
강하나, 신선한 정경묘사와 청아한 풍취가 넘쳐흐르는 걸작이다.
귀거래사
돌아가련다
이제 정원이 장차 거칠어지려고 하는데
어찌 돌아가지 않으리...
돌아갈까나
사귐을 그만두고 교유를 끊으리
세상과 나는 서로 잊으리니
다시 수레를 타고 여기에 무엇을 구하랴
친척의 정다운 이야기를 기뻐하고
거문고와 책으로 시름을 잊으리라
문학사적 의의 및 그 영향
도연명은 자기의 작품 속에서 자신의 형상을 성공적으로 부각시켰다. 그의 형상은 통치계급과 타협하지 않고 현실을 부정하고 완곡하게
투쟁을 견지했으며, 전원에 돌아와 직접 농업 노동에 참가하고 가난에 쪼들리면서도 지조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불우한 여건 속에서 투지를
얻었고 담력을 키웠으며 또 진실한 인생을 추구했다.
그리고 진실한 천부의 성격은 관계 아닌 자연을 무대로 함으로써 한껏 자득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시대도, 그의 환경도,
그의 지위도 모두 우연일 수만은 없다. 이 모든 것들이 전원시인이며 낭만시인인 도연명을 탄생시키기 위한 필연적인 요건들이 아닐 수
없다. 시대가 그를 분만했고 사회가 그를 길렀으며 자연이 그와 교류했던 것이다. 따라서 그가 펴낸 산문과 사부, 시 모두가 주옥 같은
명편들일 수 있었고, 그의 작품 속에 불어넣은 명료한 개성, 순정한 사상, 고결한 인품 등은 중국문학사에서 불멸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도연명의 작품은 후세의 문인 및 그들의 문예활동에 미친 영향은 말할 수 없이 크다. 비록 당대에는 그의 작품에 대한 평가가 점점 높아져
문학 내지 예술의 분야에서 그를 숭배하고 그의 작품을 탐구하고 그의 작품을 배우려 들었다. 도연명이 <시경> <초사> 그리고 건안 이래의
우수한 사실주의적 전통을 총화한 끝에 창조한 그의 특이하고 소박한 스케치의 풍격은 당대의 맹호연이나 왕유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들은 도연명의 전원을 제재로 하기도 하고 <유연>한 정신을 따라 배워 <전원시파>를 형성했다.
이백이 권세가들에 대해 가졌던 경멸과 반항도 도연명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백거이의 통속적이고 소박한 스케치의 풍격은
도연명의 스케치적 표현방법의 발전이다. 송대의 소식도 <유연>한 정신을 따랐고, 육유신기질도 그의 전투정신을 본받았으며,
<유연>의 요소를 없애지를 못했다.
후세의 많은 문인학자가 그를 좋아하고 그의 작품의 진가를 알아 작품집을 인쇄, 오늘날 전하는 판본이 수십 종에 달하며, 시인들은 그의
자연시와 소박한 기법에 심취하여 모방을 시도했다. 평론가들은 그들의 시화를 통해 최고의 찬사를 아끼지 않았고 화가들은 도연명 작품의
제목을 화제에 썼다. 특히 잡극에 까지 그의 시제가 채택된 일은 주목할 만하다. 그가 후세에 끼친 영향인 이렇게도 큰 것을 보면 소식이
도연명의 지위를 논하여 <<조식이나 이백두보도 따를 수 없다>>라고 한 극구의 찬사도 과찬으로만 돌릴 수는 없을 것 같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