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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학의

북학의
   저자: 박제가(1750~1805)

 조선 후기의 문장가이자 개혁사상가였던 박제가의 경제적 구국의 방책과 국가의 부강책을 담은 기행문적 대문장. 박제가는 이 책에서 조선
후기 사회의 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성리학적 명분론과 도덕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선진적인 처의 문물제도를 과감히 받아들이고
상공업  을 진흥하여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이러한 박제가의 사상은 성호학파의 토지경제 사상과는 또 다른 실학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생애와 작품활동
  절약보다  소비  가 생산을 촉진시킨다  는 박제가의 상업관은  소비가 곧 미덕  임을 내세운 케인즈의 이론을 연상케하는, 그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조선 후기 실학자 박제가는 우부승지를 지낸 박평의 서자로 태어나, 소년시절부터 시. 서. 화에 뛰어나 문명을 떨쳤으나, 조선시대의
신분차별은 그의 출세길을 막고 있었다. 10살 때 부친의  죽음으로 인해 모친은 삯바느질로 생계를 유지하며 남매를 키워 나갔다. 그는
그림. 글씨 그리고 시로써 자신의 처지를 달래곤 했는데 중국의 불운한 시인 굴원의  이소경  을 읽곤 했다 한다.
 소년시절부터 날린 그의 명성으로 19세 때부터는 박지원 등의 북학파들과 교유할 수 있었는데,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현실의 비리를 알게
되었고 경구치세의 학문에 눈을 떴다. 그는 국가개혁을 시도했던 신라의 최치원, 조선의 조헌을 추앙하면서 자기 나름대로의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그 당시 유교적 절대 계몽군주인 정조는 학풍을 진작시키고 국가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규장각  (현재 창덕궁 내 비원에서 가장 경관이
빼어난 부용정 맞은편에 위치)을 설치했는데, 정조는 박제가. 이덕무. 이서구. 유득공 등 실력있는 서자들을 규장각의 검서 직책에 등용하여
학문적 보좌를 받았다. 이에 박제가는 규장각에 소장된 책들을 밤낮 없이 읽어가며 동료들과 토론을 즐겼다. 이후 13년간 임금을
보좌하면서, 지나친 독서로 시력을 잃기도 했다.
 그는 규장각에 들기 전인 29세 때(1778) 채제공의 수행원으로 중국을 다녀온 것을 포함하여 모두 4차례나 청을 방문했다. 이때 청의
이주원. 반정균 등과 사귀며 식견을 넓혔으며, 처음 방문 후 이용후생을 위한 방략으로  북학의  를 저술하였다. 그는 정조에게 양반.
유학자들을 도태시켜 생산계층으로 전환시키고, 상공업의 국가적 장려를 통해 부국을 꾀할 것을 건의하였으나, 국가정책으로 시행되기에는
보수세력의 벽이 너무 두꺼웠다.
 그러나 두 차례나 그의 북학이론에 관심을 보여주었던 정조는 그를 부여현감이라는 외직으로 돌리고, 49세 때  북학의  를 간추려 올리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박제가는  진북학의  를 올렸다.
 하지만 정조가 죽자 상황은 반전되어 안동김씨들은 정조의 측근 세력인 남인 시파를 몰아내고, 정권을 잡으면서 천주교를 구실로 반대편을
탄압하였다.
 그 와중에서 박제가도 4년간의 유배를 떠나게 된다. 그리고 유배에서 풀려난 지 한달 후, 나라의 부강을 위해 중상주의를 제창했던 개혁자
박제가는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쓸쓸하게 이승에서의 생을 마감했다.
   실학사상
 조선 후기에 발생한 실학의 학문적 성격과 실학파들의 사상에  대해서는 본서 제1권의 이익과 정약용 편에서 소개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실학파 중에서도 박제가와 그 주변인물들이 주장했던 상공업 중심의 부국안민론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농촌의 건전한 발전을 토대로 한 사회개혁을 주장한 경세치용학파(유형원. 이익. 정약용)와는 달리, 서울의 도심적 분위기에서 자란 일파는
상공업의 발전을 통하여 사회의 번영을 이룩해보려는 이용후생의 학문적 경향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실학의 새로운 발전모습인데, 이것을
북학  (박제가의  북학의  에서 유래)이라고도 한다.
 이용후생을 대표하는 학자로는 유수원이 있는데, 그의 저술인  우서  에서 문답의 형식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개혁안을
체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다음으로 박지원을 들 수 있는데, 그가 지은  열하일기  는 1780년에 청나라로 가는 사신을 수행했을 때의
여행기로서 그 문물의 소개를 통하여 자기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홍대용은 청에 다녀온 후  연기  라는 기행문을 썼고, 특히 실옹과
허자의 문답형식으로 우주와 인간의 문제 등을 논한 그의  의산문답 은 많은 주목을 끌었다.
 이들과 거의 같은 시대에 활약했던 박제가와 이덕무도 각기 청에 갔던 견문을 쓴  북학의  와  연기  가 있는데, 특히  북학의  는 단순한
기행문이 아니라, 항목별로 그 시대가 당면한 제반문제의 개혁을 언급한 명저다.
 이들은 대체로 청의 수도인 연경에 다녀온 일이 있어 그 기행문을 남기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 보고 들은 청 문화의 우수성을 인식하고,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청의 문화를 먼저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북학자들의 주장에서 중요한 것은 청의 문화에 대한 예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개혁에 대한 강한 의욕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의 저서에는 당시의 양반사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있었다.
 그들은 노동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양반유학자를 비판하는 반면에 상공업이나 농업을 높이 평가하였다. 특히 상공업의 발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기술향상으로 생산을 촉진시키고, 수레나 배와 같은 교통수단을 발전시켜 국내외에 있어서의 상품을 원활하게 함으로써
국가의 경쟁력을 증강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상공업은 신분적 차별 없이 이에 종사할 수 있어야 하며, 균등한 교육에 의해 직업적 관리를
양성하여, 그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이상적 관료기구를 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신분제도를 완전히 폐지하고, 개인의 능력에 따른
분업을 실시하여 국민의 생활을 안정시킬 것을 주장한 것이다.
    북학의  의 내용
 본서는  내편  과  외편  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편  에서는 청의 차. 선. 도로. 교량. 목축. 시정 등 생활주변의 기구. 시설 등의
문제를 39개항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우리도 빈곤을 벗어나서 부강하게 살려면 이와 같은 청의 문물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외편  에서는 밭거름. 뽕. 농잠총론. 과거론. 재부론. 병론 등 17항의 정책과 제도에 관한 것을 수록하여 농업정책을 개선하고 선박을
이용해서 해외 여러 나라와 무역하여 국가의 부강을 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박제가는  북학의  서문에서  청의 습속 중에서 우리 나라에서 시행할 만한 것과 날마다 쓰기에 편리한 것을 듣고 보는 대로 적고, 이로운
것과 폐가 되는 것을 논한 다음, 맹자가 진량에 대해 말한 것을 본따서  북학의 라 이름한다  고 밝히고 있다. 진량은 전국시대에 남중국에
살았던 농본주의자로, 북중국의 공자 학문을 배우겠다는 뜻으로  북학 이라 했는데, 박제가는 청의 문화를 배운다는 뜻으로  북학 이라
이름한 것 같다.
   상업의 중요성
  내편  의 시정항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상업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현재 논자들은 백성들이 오직 상리만을 숭상하는데, 모든 백성을 귀농시켜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상업은 사민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사농고의 유무를 상통시키는 것이니, 상업은 1/4 이상이 된다. 어민은 고기를 잡으면서 농업에 종사할 수 없고, 협민은 나무하면서 농업에
종사할 수 없다. 이제 모든 백성들이 농업에만 종사한다면 농민의 생활은 더욱 어려울 것이다.
 이어서 그는 종래의 미덕으로 간주되던 절약과 근검을 배격하였다. 즉,  쓸 줄 모르면 생산할 줄 모르고, 생산할 줄 모르면 민생은 더욱
피폐해진다  고 하면서 상업과 농업 및 수공업의 유기적 관계를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재물은 샘물과 같다. 퍼내면 차 있고 버려두면 마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비단옷을 입지 않으면 나라에 비단짜는 사람이 없게
되어 여공이 적어지고, 깨진 그릇을 버리지 않고 기교를 좋아하지 않으면 공장과 도야의 일이 없어져 기술과 재주도 사라지게 된다. 또
농사가 황폐해서 농법을 잃고 상리가 박하여 그 업을 잃으면 사민이 모두 곤궁해져서 서로 유기적인 협조가 무너진다.
 그는 상업이 발달하려면 차선과 도로를 개선하고 교통을 편리하게 한 후, 물자의 거래를 촉진시켜야 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특히 차선
항에서 그는 이 교통수단을 과학적으로 연구하여 보급시킬 것을 역설하고, 교통이 발달되면 전국적인 시장이 형성되어 상품유통이
활발해지고 물가의 평준화가 이루어져, 화폐의 유통이 촉진된다고 보았다. 또 서양의 중상주의처럼 수입을 제한하고 수출장려를
강조하였으며, 상품규격을 통일하고, 금은의 축적이 국부의 기초이므로 은의 해외유출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국제무역의 중요성
  외편  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통상을 통하여 개국할 것을 주장한  통강남 절강상박의  항이다. 쇄국시대에 개국을 부르짖은 이 글은
청과 통상을 시작하여 결국엔 해외 여러 나라와 통상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서해안에 무역항을 개설하여 밀무역을 양성화시키고, 중국의 산동 방향과 절강. 광동 등 남중국의 물자 집산지와 무역을 하고, 더 국력이
자라게 되면 그 대상국을 확장시켜 일본이나 서양 여러 나라와도 통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어역항에서는 외국어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통상활동에 필요한 중국어. 일본어. 만주어. 몽고어를 사대부에게 습득시키라 하고, 아울러
외국무역의 이점까지도 덧붙였다.
 생활의 개선과 외국무역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상업적 농업과 수공업을 통한, 질적으로 우수하고 양적으로 충분한 상품생산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다. 이것을 위해 그는 강력한 국가적 후원 아래 발달된 청나라의 농업. 수공업기술과 도구를 받아들여, 서울
주변에서 농업시험장과 철공소를 두어 새로운 농. 공업기술을 연구. 보급하여야 하며, 국가의 지원 아래 상품의 대량생산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론만이 아니고 그는 몸소 생활필수품의 제조기술과 영농방법을 직접 연구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려면 우선백성들의 고식적인 의식구조를 개조하고, 번거로운 습속을 간소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전통적인 주자학의 공리공담을 배격하고, 풍수지리설따위의 허위성을 폭로하기도 했다.
 이상에서 박제가가  북학의  에서 논술한 국내상업 및 외국무역의 장려. 수입금지 및 수출장려. 은의 해외유출 금지, 대량생산, 제품규격의
규제, 전국적 시장확대, 농공상업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후원에 대한 견해는 서구의 중상주의 정책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
   사상적 평가
  북학의  를 읽다 보면 두 가지 점이 거슬린다. 첫째는 중국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되 우리의 전통과 문화를 고려하는 지혜가 부족하고,
또 하나는 중국문화에 심취한 나머지 우리말을 버리고 중국말을 배워야만 중국문화를 빨리 배울 수 있다는 비주체적인 입장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단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고전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것은 다음의 몇 가지 점 때문일 것이다.
 첫번째는 과거제도. 국방제도 등 부국강병을 위한 적극적인 방안을 제시하여 사회구원의 의지를 밝힌 점이다. 그는  북학의 서문에서  지금
백성의 생활이 날마다 곤궁해지고 나라의 재물이 날마다 궁핍해지고 있다. 그런데도 사대부들은 소매에 손만 끼고 앉아서 이를 구하기 위해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고 통탄하고 있다.
 두번째는 근대지향성을 들 수 있다. 상공업의 발달, 금속화폐의 유통촉진, 신분제의 해소, 외국무역의 강화, 문호개방 등은 19세기 후반의
개화사상가인 박규수. 김옥균 등에게 영향을 줌으로써, 우리 나라 개화사상에 미친 영향이 크다.
 세번째는 피지배 대중의 이익을 대변한 사상이라는 점이다. 지배계층의 원리인 성리학이 강조하던 수기치인의 범위를 넘어, 정치. 경제.
군사 등 각 분야에서 민본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피지배계층의 이익을 신장시키기 위한 각종 이론을 제시한 점은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현실개혁적 조처들이 한때 정조의 관심을 끌었으나, 그것이 현실정치 속에 구현되기에는 보수주의자들의 저항이 너무
집요했다. 따라서 그의 사상이 실현되기까지는 수많은 세월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서 또 우리 역사의 비극적인 한 단면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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