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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전

동경대전
   저자: 최제우(1824-1864)
 시천주 사상으로 외래종교사상을 수용하여 주체적인 민족종교로 창시한 동학의 바이블인 <동경대전>은, 창시자인 최제우가 지은 동학의
경전으로 <포덕문><논학문><수덕문><불연기연>의 네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시의 천주교 잠입과 서세동점을 직시한 최제우는 이 책에서
인내천으로 표방되는 동양의 전통적 인도주의와, 서교에서 영향받은 종교적 요소를 적절히 조화하여 서학에 대비한 동학의 교리와 사상
전반을 압축하여 서술하고 있다.

   생애와 작품활동
경북 경주의 명문가문에서 태어난 최제우의 어릴적 이름은 복술이고, 제우는  어리석은 중생을 구한다 는 뜻으로 35세때 스스로 고친
이름이다. 어릴적부터 두뇌가 명석하고 용모가 수려했던 그는 최치원의 28대 후손이라는 양반으로의 자부심과 서자로서의 열등감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적서의 차별로 출세의 길이 막힌 상황에서 고민을 거듭하다, 민간신앙을 통한 입신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20세 이후부터는 전국을 주유하면서 삼정문란과 외세의 침략으로 비참한 민중생활을 목격했다. 구세제민의 뜻을 품고 방랑을 계속한 그는
천명 을 알기 위해 1856년(32세) 여름에 양산 통도사 뒤 천성산에서 단을 쌓고  천주강령 을 염원하는 49재를 올리다가, 이틀만에 숙부의
죽음을 신통으로 알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과연 숙부가 작고해서 초상을 치르고 있었다.
그 다음에 다시 천성산에 들어가 지성으로 49재를 올렸으나 응답을 얻지 못하고, 1859년 처자를 거느리고 부친이 글을 가르치던 경주 구미산
아래의 용담정으로 이사하였다. 이때 이름을  제우 라 개명하였다. 그가 용담정으로 들어간 지 6개월이 지난 1860년(36세)에 몸이 마구
떨리고 가눌 수 없는 어떤 황홀한 경지에서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다.
그후 최제우는 마음을 가다듬어 기를 다루는 공부에 열중하였다. 그후 <용담가><교훈가> 등 한글가사를 지어 전파하고 마음속에 한울님을
모시는 일에 열중하였다. 다음해에는 정식으로  지극한 기운이 지금 이르러 크게 내리도록 비나이다. 한울님을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생토록 잊지 아니하면 온갖 일을 알게 되나이다 라는 주문을 지어 늘 염송했다 한다. 그리고 그 도를  천도  또는  동학 이라 했다.
그는 열심히 주변 사람들에게 동학의 가르쳤다. 1861년 정부의 눈총을 피해 전라도 남원 은적암에서 <권학가>를 지어 돌리고, 이듬해 3월
다시 경주로 돌아와 적극적으로 포교를 하였다. 이때 최시형이 찾아왔는데, 가문이나 학식은 보잘것없어도 지성으로 수도에 힘써온 그를
후계자로 심중에 두었다. 이에 감격한 최시형은 더욱 분발하여 수도와 포교에 힘쓰게 되었다.
반면에 동학이 널리 전파되자 정부의 감시가 더욱 심해졌고, 드디어 그해 9월 수운은 체포되었다. 그러자 수백 명의 제자들이 찾아가서
수운의 가르침은 민속을 해치지 않는다 고 탄원하여 무죄석방 되었다. 1863년(39세) 8월 최시형에게 도통을 물려주었는데, 이 무렵
조정에서는 동학의 신도들이 놀랍게 늘어나는 것을 두려움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12월 최제우는 23명의 제자들과 함께 체포되어
달성공원에서 혹세무민과 좌도난정으로, 득도한 지 3년 만인 나이 40세에 처형되었다.
그후 2대 교주 최시형은 최제우가 남긴 글을 정리하여 <동경국전>과<용담유사>를 간행하는 등 교리의 체계화와 교세확장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1894년 우리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동학놈민 전쟁이 일어났고, 최시형은 1897년 손병희를 후계자로 정하고 1898년 한성감옥에서
순교하였다.
조선에서 점차 일본의 지위가 굳어지자, 교도 중 이용구는 동학의 기반을 이용하여 진보회를 조직, 친일정당으로 활동하자 손병희는 교명을
천도교로 개칭하고(1905년), 망명했던 일본에서 귀국하여 교풍쇄신에 착수하였다. 그는 인내천사상과 보국안민광제창생을 기치로 하여
지상에 천국을 세우기 위해 노력하였고, 1919년 천도교인 15명과 그리스도교인 16인, 불교도 2인이 31운동을 일으켰으나, 그후 일제의
탄압으로 천도교는 쇠퇴하였다.
   동학의 발생과 그 사상
조선 후기 사상계의 혼란 속에서 나타난 두 가지 움직임이 있었다면 하나는  천주교 의 전파요, 다른 하나는 동학의 발생이다. 천주교가
서울을 중심으로 퍼져간 반면, 동학은 농촌 속에서 자라났다.
동학은 매우 강렬한 민족주의적 성격을 가진 종교로서, 당시 서양 제국주의의 위협과 천주교의 유포 등 대외적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최제우가 양반사회의 유교사상을 극복하고 천주교에 대항하고자 유불선 3교를 융합하여 새로운 종교를 개창하였다.
동학이란 명칭 자체도 서학, 즉 천주교에 대항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또한 동학은 초세속적이고 윤리적인 종교였다. 우선 그 교리는 당시의 민심을 반영하여 인심이 곧 천심이라는  인내천 의 사상을 기본으로
하였는데, 이는 동양의 전통적인 경천사상과 밀접한 것으로, 그 가운데서도 특히 운수관으로 표현되는  천운순환론 과 인도가 천도에
합치해야 한다는  도덕론 이 핵심을 이루었다. 따라서 천운에의 순종과 천도에의 합치를 통해서 모든 인간은 군자가 될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일체의 신분계급을 떠난  평등사상 을 주장한 셈이다. 동학이 주로 농민 등 억압받는 피지배층 사이에서 열렬히 신봉된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농민들은 종교로부터 이러한 윤리적 측면보다는 현실구복적인 이익을 갈구하고 있었다. 따라서 동학은 질병의 치료, 길흉에 대한
예언 등 당시 유행했던 민간신앙의 요소를 흡수하였다. 이와 같은 동학은 인내천의 윤리사상과 현실구복적인 성격을 모두 갖추고 있었는데,
이 가운데 전자는 주로 잔반 등 지식층을 위한 것이었고, 후자는 무지한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니, 경전 역시 한문으로 된
<동경대전>과 한글로 된 노래집인 <용담유사>의 두 가지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 두 사상을 하나로 체계회시킨 매개체는  귀신관 이었다. 귀신은 전통적인 경천사상과 연결되는 동시에 민간신앙에서도 전승되어 오는
관념적 실체로서, 우주만물의 성쇠나 사철의 변화 등은 모두 이 귀신의 조화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또 동학에서는 이 귀신을
기로 파악함으로써 주자학의 기철학과 접합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기본구조를 바탕으로 불교도교의 신비적 요소와 천주교의 형식까지
수용하였던 것이다.
   <동경대전>의 내용
<동경대전>은 <포덕문> <논학문> <수덕문> <불연기연장> 등이고, 주문과 시문으로 된 부록을 합쳐서 총 4,846자로 된 작은 책이다. 이 책의
자매지인 <용담유사>는 순한글 가사집이다. 이 책은 최제우가 저작한 것이나, 그의 언행을 그의 제자들이 모은 부분도 있다. 이 책의
중심사상은 <포덕문>과 <논학문>이다.
   <포덕문>
포덕문에서 밝혀진 최제우의 역사관은 #1자연에 대한 감사도 알지 못했던 우부우민의 상고시대를 설명하고 #2하늘을 공경하고 천리에
순응하던 요순시대의 중고시대를 흠모하고 #3천명에 순종치 않고 각자의 의지대로 움직이는 군대의 시대로 나누어 보았다.
또 최제우는 이 시대를  불순도덕 미지시운 의 시대로 보고, 동학의 출현을 역사적 필연으로 보았다. 이것은 자기 의사로서가 아니라 상제의
명령에 의해 자기가 태어나서 천명을 전하는 것이라고 했다. 더구나 서양의 세력이 승승장구하니, 보구안민할 계책은 이 포덕문에서 찾아야
한다고 했다.
   <논학문>
논학문은 학문을 논한 글이다. 여기에 나오는 그의 종교체험의 순간 기록을 보자. 
 이해 사월, 몸이 마구 떨리면서 밖으로는 신령과 서로 맞닿는 기운이 몸을 감싸고, 안으로는 신기한 말씀에 의한 가르침이 있었다. 그러나
애써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들으려고 해도 들리지 않으므로 마음은 더욱 이상스럽기만 하였다. 이윽고 마음을 가다듬고 기운을 바로잡은
뒤에  어찌하여 이처럼 저에게 나타나십니까? 라고 묻자  내 뜻이 곧 네 뜻이기   문이다. 대체 사람들이 무엇을 알랴... 라고 하느님이
대답했다.
여기서  오심 즉 여심 과  수심정기 와 문답식의 주문해설이 그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 내용은  한울님 을 위한 것이 대부분인데, 한울님을
위하는 마음가짐 자체가 인간이 어떤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의 태만을 경계했다. 또 주문은 천주의 글자가 되는 것이기에,
주문을 외울 때는 자세가 단정하고 마음이 경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덕문>
수덕문은 덕을 닦는 것으로, 수도의 방법과 절차를 설명한 것이다. 이 글에선 최제우의 덕행과 제자들이 덕을 쌓는 것을 찬미한 내용들이다.
또 최제우의 가문과 용담성지를 예찬한 것이 많다.  아름답다, 우리 도의 보람이여. 붓을 들어 글을 쓰면 사람들은 왕희지 필적인가
의심하고, 입을 열어 시구를 읊으니 누가 초부인 줄 알랴, 허물을 뉘우친 이 사람은 재벌의 부력을 탐내지 않는다,  공경과 정성을 다하여
가르치는 말이니 어기지 말라 는 문구가 들어 있다.
   <불연기연장>
불연기연장에는 우주만유는 그 생성과정에서 두가지의 상반된 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만물은 분산고립된 것이 아니고 서로
연결된 일체의 것이며,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부단히 성장발전하는 것으로서, 한울님에 의해서 기연의 통일원리를 찾아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상적 가치
이책에 흐르고 있는 기본사상은 인간지상주의로 인격향상을 설한 것이다. 이는  성실해라   신의를 생명같이 지켜라 등으로, 이러한
가르침은 인격의 위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으로 요약되는 것이다.
이 <동경대전>은 천도교라는 한 교회의 경전에 그치지 않고 19세기 중엽 한국사상의 근대화과정을 그 서민적 차원에서 대표하는 명저요,
서구세력의 아시아 침략에 대한  저항적 민족주의 를 구체화한 고전이기도 하다.
이 책의 가치는 어떤 한 종교의 신앙고백이나 교리서술의 부분보다, 오히려 당시 혼란한 사회에 대한 사회비판에 있다고 보여진다. 더구나
이 경전은 현실정치에 대한 신랄한 비판으로 가득 차있고, 위기의 역사의식과 메시아 사상이 서민의식의 차원에서 표현된 데 사상적 의의가
있다. 
조선 후기의 서민대중의 사상적 풍토와 그 전환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있어 이만큼 뚜렷한 역사의식과 현실비판을 담은 책은 드물다.
동학사상은 그것이 한문교양에서 소외된 서민의 반항의식을 대표하기 때문에, 그 안에는 민간신앙적 요소가 다분히 존재하고
유불^5,23선이 혼재하나, 그것이 동양사상의 가치를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양반지배층의 주자학 위주의 단조로운
사상풍토와 한문학의 고식적인 동맥경화증 가운데서 독특한 민간신앙의 모습으로 평민문학의 한 국면을 장식했다는 점에서도 근대적 의식의
선봉으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이 경전은 1894년 동학혁명에서 그 사상적 근거가 되었고, 천도교가 적극 참여한 31운동시에도 민족자주의 지침이 되었으며,
일제강점하에도 민족사상의 근간으로서, 항일독립정신의 역사적 원천으로서 그 위력을 발휘해왔다.
오늘날 일제 어용학자들이 조작해놓은 왜곡된 역사관을 바로잡고, 민족자주의 사상적 기초를 세우는 데 이 동학의 명저는 귀중한 고전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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