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민섬서>
저자: 정약용(1762--1836)
만학의 비조이자 조선후기 실학의 집대성자인 다산 정약용이 폭정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세계를 목도하고 유배지에서 눈물로 쓴 <이도의
바이블> 소년시절부터 목민관인 부친을 따라 여러 지방을 전전하면서 백성을 다스리는 마음 자세를 배우고, 벼슬길에 오른 후에도 곡산부사
등 직접 농민들의 세계를 체험한 후 전 남갈진의 유배지에서 체험한 비참한 민중들의 세계를 보면서, 관직의 부임에서 근무, 이직할 때까지
지방관으로서 가져야 할 기본자세 및 실천해야 할 정책의 내용을 서술하고, 지방사회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수령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할
저술이다.
생애
조선후기 실학의 집대성자. 경기도 광주군 마현에서 남인 가정에서 태어나 이익의 제자들인 권철신과 이기환으로부터 성호학을 배우고
경세치용의 학문에 뜻을 둔다. 지방수령인 부친을 따라 여러 지방을 전전하고 20세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른다.
그의 생애는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어볼 수 있는데, 전반기는 대략 그의 나이 40세까지로 정조의 생존기간이며, 정조 사후 그의 후반기
인생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당시 호학의 군주이자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정조는 정약용을 항상 곁에 두고 총애한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해
젊은 학자들을 대거 기용하고, 서자. 중인들 중 재능있는 자를 뽑아 벼슬을 주는 등 파격적인 정공. 이서구는 모두 서자출신으로 규장각
검서를 지냈다.
한편 이벽에게서 서학과 서양학문을 접하고 상당한 과학지식을 쌓는다. 정조는 억울하게 죽은 부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1년에 몇
차례씩 수원에 행차했는데, 이때 한강에 놓인 배다리는 그의 작품이다. 또한 사도세자를 위해 수원성을 쌓는데 기중기와 활차(도르레).
고륜(바퀴달린 달구지) 따위를 발명하여 정조를 감탄케 했다. 그에 대한 정조의 신임은 확고하여 정조는 명재상인 채제공--이기환--정약용
라인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항상마가 따르듯, 천주교 신자인 윤지충이 모친상 때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 의식을 거행했다는 이유로
신해박해(1791)가 일어나자 첫번째로 시련을 겪게 되고, 1794년에도 두번째의 오해를 받게 된다. 그러나 그는 서양의 학문에 관심이 있을 뿐
천주교 신앙에는 뜻이 없음을 밝히고 정조의 관대함으로 무사했다.
이 무렵 정조는 백성을 수탈하는 관리의 부정을 막기 위해 노심초사했고, 민란이 가장 빈번했던 곡산부사로 정약용을 보내자 그는 조세와
부역을 공평히 하고 옥사를 너그럽게 다스려 유능한 목민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그에 대한 중상이 계속되어 고향인 마재로 돌아온다.
어느 여름날 정조가 보낸 사자가 사립문을 두드리며 한서선 열 권을 내밀었다. <<다섯 권은 집안에 보관하시고 다섯권은 제목을 써서
올리라는 성상의 당부이옵니다.>> 정약용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으나 2주 후 정조의 승하 소식을 듣는다.
자신의 두 버팀목이었던 체제공과 정조가 1799년과 1800년에 잇따라 사망하자 정약용은 물 떠난 고기 신세가 되었고, 정조를 도와 흔들리던
왕조개혁의 꿈은 물거품이 된다.
정조가 죽은 다음해 1801년 신유박해에서 셋째형 약종은 옥사했고 둘째형 약전도 흑산도로 유배당했으며, 그는 전라도 강진으로 18년간의
기나긴 형극의 길을 떠난다. 그러나 어디서도 유배당한 죄인을 상대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읍내 주막집 노파만이 다산을 가련하게
여겨 방을 내주었다. 유배의 괴로운 심정을 술로 달래던 다산은 초당이 있던 이 마을의 윤규로 등3형제를 가르치면서 그들의 아버지인
윤박의 초빙으로 1808년 다산초당으로 옮겨 여기서 저술작업에 전념했다.
그는 여기서 괸리의 부정, 조정의 부패와 무능으로 인한 지방농민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이를 시로 읊기도 하고 책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나온 책이 그의 대표작인 1표 2서, 즉국가제도의 전반적 개혁안을 담은 <경세유표> 지방수령의 부정을 막기 위해 쓴 <목민심서>
형벌을 공정하게 하기 위한 방책을 밝힌 <흠흠신서>가 그것이다. 이중에서도 특히 <목민심서>는 탐관오리들에게 수탈당하고 굶주려 죽어가는
백성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하며 토로한 목민관이 지켜야할 금과옥조다. 그런데도 <목민심서>에서 제시한 그의
방안을 수용하기는 커녕 읽어주지도 않는 현실을 통탄했다. <<알아주는 자는 적고 비방하려는 자는 많으나, 만약 천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한줌의 불쏘시개로 불태워버려도 좋다.>>
그는 74세를 일기로 500여 권의 방대한 저술(여유당전서)을 남긴 채 천수를 다했다.
다산의 사상
우리 나라 학술사상사에서 다산의 위치는 <경세치용학파>와 <이용후생학파>의 두 조류를 통합한 <집대성자>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다산은
성호학파의 경세치용적 실학사상을 계승하는 한편으로 연암학파의 이용후생 사상도 수용하여 서양문화의 수용에 있어서 진보적인 자세를
취했다.
다산학, 즉 다산의 사상은 은 6경 4서에 대한 <경학연구>와 1표 2서에 나타나는 <경세학 연구>로 정리된다. 경학은 경세학의 기초로서 6경
4서학에 담겨진 철학적 과제들에 대한 다산의 해석을 말하는데, 지나치게 전문적이어서 여기서는 생략하고 다산의 일반적인 사상을 1.성리학
비판 2.실증주의 3. 실용주의 4. 민주주의관 5. 민생론 6. 변화의 수용으로 요약해본다.
1. 그는 기존의 성리학을 통렬히 비판했다. 그는 <<이기론은 세상을 마치도록 다투고 자손에게 전해도 끝이 없으니 인생에 일이 많은데
그대와 나는 이를 할 겨를이 없다>> 고 하여 주자의 경전해석을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전통적인 정주학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으로 학문의
위상을 정립했으며, 성리학이나 훈고학. 문장학. 과거학. 술수학 등은 현실에서 이탈한 것일 뿐만 아니라 수사학적 본원유학을 가리는
것이라 하여 철저히 배격했다. 이런 의미에서 다산학은 근세수사학, 또는 개신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장차 6경 4서에 대한
종합적이고도 독창적인 경학연구로 발전했다.
2. 그는 철저하게 원전에의 복귀를 주장했다. 그는 유학의 성론이 낙선구도하려는 고시심에서 나왔으나 불교(선종)의 영향을 받아 공자의
본래정신과 어긋난 것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가 이처럼 경전자체에 돌아가는, 즉 수사지구 론을 강조한 것은 진실성을 학문적으로 관철하기
위한 비판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3. 다산의 그러한 실증적 근본취지는 실용에 있다. 수사지구론자체가 경전해석을 통해서 당시의 구도적 관념체계가 갖는 현실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그는 경전주석에 있어 훈고학적 실증을 중시하는 입장과, 청나라 고증학의 해석방법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서학의
과학적 사고와 신앙체계까지 수용하여 객관적 사실에서 대한 분석적 입장과 실증적 방법을 통해 인간 또는 사회적인 가치 속에서 실용의
목적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4. 다산은 그의 논문 <탕론>에서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가까운 체재개획론을 폈다. <<천하란 어찌하여 있는 것인가? 다섯 집이인이
되는데, 거기서 장으로 추대된 자가 인장이 되고 5린이 이가 되는데 여기서 장으로 추대된 자가 이장이 되고 9후 8백이 화합하지 못하면
그들이 의논하여 천자를 개선한다. 어찌 신하로서 임금을 쫓아버린다고 하겠는가.>> 이는 제왕도 간접선거를 통해 민중이 선출해야 하며,
뽑힌 사람이 적당치 않으면 개선한다는 것이니 주권재민과 다를 바 없다. 그는 또한 당시의 계급제도를 강력히 비판했다. <<나의 소망이
있다면 온 나라 안이 모두 양반이 되게 하는 것이니, 곧 온 나라 안에 양반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근대적인 평등관과 다를 바 없다.
5. 그의 민생사상은 제도개혁론으로 나타난다. 그의 <목민심서> 는 백성의 삶을 구제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방법과 제도를 체계화한
것이고, <경세유표>도 국가의 정치제도를 개혁하는 방안이며, 치옥에 대한 주의와 규범을 제시한 <흠흠신서> 등에 그의 치인의 이념이 담겨
있다.
6. 그는 변화에 대한 과감한 수용을 주장했다. 서양의 과학기술에 적극적이어서 한강의 주교 설치, 기하학의 원리를 이용한 수원성의
축조, 종두법의 연구와 실험 등 그의 곽학정신은 높이 평가된다. 또한 역사와 지리에도 깊은 관심을 두고 주체적인 입장을 제시했다.
<목민심서>의 내용
다산은 어릴 적 부친이 지방 관을 역임했고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관리로서의 경험, 곡산 등 지방관리로서 경험, 유배지에서의 생생한
체험을 바탕으로 지방장관이 지켜야 할 준칙을 서술한 이 책은 전체가 12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고, 각 항목은 6개 조항으로 나누어 모두
72개의 조목으로 분류했다. 먼저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부임편: 제배, 치장, 사조, 계행, 상관, 이사
2. 율기편: 칙궁,청심,제가,병객,절용,낙시
3. 봉공편: 첨하,수법,예제,보문,공납,왕역
4. 애민편: 양로,자유,진궁,애상,관질,구재
5. 이전편: 속리,어중,용인,거현,찰물,고공
6. 호전편: 전정,세법,곡부,호적,평부,권농
7. 예전편: 제사,빈객,교민,홍학,변등,과예
8. 병전편: 첨정,연졸,수병,권무,응변,어구
9. 현전편: 청송,단옥,신형,휼수,금폭,제해
10. 공전편: 산림,천택,선해,수성,도로,장작
11.진황편: 비자,권분,규모,설시,보력,준사
12. 해관편: 체대,귀장,원류,걸유,은졸,유애
앞 4편은 총론으로 관리들의 몸가짐과 기본태도, 다음6편은 각론으로 실무에 관한 사항, 끝 2편은 물러갈 때의 태도 등에 관한 것이다.
각 조의 서두에는 지방수령으로서 지켜야 할 원칙과 규범들이 간단명료하게 지적되고, 그다음에는 설정된 규범들에 대한 상세하고 구체적인
설명과 그 역사적 연원에 대한 분석을 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 고금을 통해 유명한 사업과 공적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논평하여 첨부했다.
즉 <목민심서>의 체제와 내용을 일관하여 말하면 지방관리의 부임으로부터 해임에 이르기까지 전 기간을 통해 반드시 준수하고 집행해야 할
실무상 문제들을 조항으로 설정하고 자신의 심오한 식견과 진보적 견해를 가지고 진지하게 해설해 놓았다.
그러나 <목민심서> 서문에 쓴 바와 같이 다산은 결코 <목민심서>에 제기한 모든 문제들이 다 실현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며 또 당시의
실정으로는 실현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민심서>으 근저에는 지배자들을 증오하며 일반 백성들을 동정하고 사랑하는 저자의
민주주의적 애민사상과 국가의 부강을 염원하고 외래 침략자를 반대하는 애국사상이 전편에 흐르고 있다.
이와 같은 애민사상은 다산의 민주주의적 균민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다산은 원래 인간이란 모두 완전히 평등하고 신분적 차별과 빈부의
차이가 없었으며, 지배계급도 후세에 와서 백성 자신들이 스스로의 생활상 요구에 의해 선발된 것이며 따라서 지배자들은 마땅히 백성을
위해 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목> <탕론> <전론>의 논문에서는 한때 급진적 개혁성향을 보기도 했다.
다산은 본서의 서술에서 균민사상에 기초한 일반백성과 지배계급 간의 관계에 대한 정당한 관점에 입각하여 지방관리들이 준수해야 할
행정적 제원칙과 규범들을 제기했다. 그는 지방수령들이 마땅히 <백성의 소망을 이루어줄 결심을 굳게 가다듬고 매일 매일 맡은 바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의관을 단정히 하고 목민할 연구를 하며, 여유시간만 있으면 반드시 정신을 가드듬고 백성들의 생활을 편안하게
할 방도를 연구하여야 한다.>>
다산은 떠 당시 정치제도의 모순성과 아울러 그것이 봉건적 신분제도와 결부되어 있음을 밝혔고,농민을 부담지우던 각종의 과세제도에
반대, 항의하는 한편 법규에 대해서는 <<백성을 계몽시키지 않고 형벌을 가한다는 것은 백성을 잡기 위해 그물질하는 것과도 같다>>고 하여
백성에 대한 어떤 박해와 가렴주구도 반대했다.
그는 지방수령이 부임하면 그 즉시로 백성들이 관청에 와서 어려움을 제소할 수 있도록 하고, 동시에 선비와 백성들의 고통을 물어 좋은
의견을 제기하도록 조처를 취해 수령 자신이 백성을 수탈하지 말며, 아전.토호들의 중간착취를 근절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다산은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의 성품을 매우 중요시했다.전편에 걸쳐 각 조항마다 관리들의 품성을 바로잡기 위한 문제들을 상세히
언급했다. <<고을을 다스리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니 가정을 단속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고을을 다스릴 것인가>>라고 하면서 수령은
자신을 수양하고 가정을 단속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지방수령이 된 자는 사치하지 말고 검소하며, 부화방탕하지 말고 명예와 재물을 탐내지 말며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선물로 보낸 물건이 아무리 사소하다 할지라도 이것을 통해 은정관계가 맺어지니 사정이 작용하게 된다>>고 하면서 뇌물행위가 가져오는
커다란 부작용에 대해 경고했다. 또한 다산은 나라의 부강한 발전과 백성들의 유족한 생활을 염원했다. 그는 전제개혁을 비롯한 일련의
사회경제적 개혁과 함께 국가의 생산력 발전에 대해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우선 사회적인 모든 모순을 토지제도에서 발견하여 당시의
문란하고 불공평한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새로운 토지제도를 설정할 것을 주장했다. 그 근저에는 <전론>을 비롯한 몇몇 논문들에서 발표한
<균전제> 사상이 깔려 있다.
또한 <호전>을 비롯한 여러 편들에서, 그리고 산림.하천.영선.도로.수공업 등을 전문적으로 취급한 <공전>에서 경제 각 분야에 선진기술을
적극 도입하게 하여 조선의 농업과 함께 임업.광업.수공업.교통.운수 및 상업유통 등을 발전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대책을 논했다.
다음으로 다산은 국가의 융성발전을 위해 전 국가적으로 인재를 선출해야 한다 하면서 인재선발의 원칙을 논했고, 세계추세에 따른
국방론으로 국가가 외국의 침공을 받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야 하며, 백성들이 생산에서 유리되지 않고
훈련됨으로써 비상시에 대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는 우리 나라의 역사를 통해 창조된 수많은 애국적 사실과 인물을 예로 들어 백성을 계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았다. 또한 나라와
백성을 위해 용감하게 싸우다가 전사한 사람들을 널리 조사하여 그들의 업적을 높이 칭송해주는 동시에 그들의 자제들을 국가적으로
보호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와 같이 다산은 백성들에 대한 애국사상의 배양에 깊은 관심을 갖고 역대 우리 나라 인물들을 평가하면서
특히 이순신 장군의 공적을 높이 찬양하고 그의 훌륭한 인품과 애국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상의 유교사상에 기초한 내용은 목민관들이 지방의 관료체제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사항을 간단히 제기하고 그 해답과 주석을 붙인
것이다.
다산은 <목민심서>를 엮고 나서 <<한 백성이라고 그 혜택입기를 바라는 것이 나의 마음이다>> 라고 밝혔듯이 전편에 걸쳐 그의 지고지순한
애국사상이 흐르고 있다.
유배지에 탐관오리들에게 수탈당하고 굶주리는 백성들의 비참한 모습을 보고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어, 뭔가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현실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던 중에 나온 결실이 바로 <목민심서>다.
다산사상의 현대적 의의
다산은 평생의 학문연구를 통해 유학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관리로서의 자신의 경륜을 펼친다는 <사>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의거하여
<경학> 과 <경세학> 연구에 몰두했으며 그 결과는 <지인> (인재를 관리로 등용하는 것) 과 <안민>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의 개혁안을 요약해보면 군주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정부의 권한을 강화하고, 군주권의 기본이 되는 농민층의 생활을 안정시키면서
양반귀족이나 지방토호층의 중간탈을 배제하려는 것으로 개혁의 방향을 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상공업의 발달이 점차 진전되는
추세에 있었지만 그에게 있어 아직 국가의 주요산업은 농업이었고, 그의 개혁안 역시 농민의 고통을 해소하는데 초점을 맞추었던 것이다.
다산은 한때 <전론> <탕론> <원목> 등을 통해 혁명적 개혁한을 제시해 부정부패가 만연한 조선후기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한 것
같다. 실제로 1817년에 국가개혁의 전반적인 개혁안을 담은 <경세유표> 의 집필에 들어가기도 했지만, 이러한 근본적 해결책은 실현이
요원한 것이어서 너무나 절박한 현실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라도 목민관들의 양심에 호소해
백성들의 어려움을 덜어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후 다산의 사상은 각종 사회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는데, 당시 농민들의 주장과 다산의 개혁안은 공통점이 많았다. 그러나 농민들이
아래로부터의 급진적인 혁명을 주장한 반면, 다산은 위로부터의 개혁을 주장한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위로부터의 개혁이
다산사상의 특징이라면 <목민심서>는 이러한 다산사상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이후 집권층이 나라를 개혁할 때면 으레 이책을
교과서로 삼을 만큼 조선후기 이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뒷날 위당 정인보는 <<다산선생 한 사람에 대한 고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심혼의 명예 내지 전 조선 성쇠존망에 대한 연구>> 라고 평가했고 고종이 <목민심서> 등 다산의 저서가 망라되어
있는 <여유당전서> 한 질을 사본해 바치라는 영을 내릴 정도로 이 책은 시대를 넘는 고전이 되어 오늘날 그의 학문은 다산학이라는 이름으로
국제적인 관심이 되어 있다.
<목민심서> 의 모든 구절구절들이 공인들이 실천해야 할 금과옥조이나, 그중에서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절실히 다가오는 다산의 말씀을
재음미하면서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자
<<벼슬 중에서도 목민관의 벼슬이 가장 어려운 벼슬이다.>>
<<관청의 약속이 믿어지지 않으면 백성들이 그 명령을 두렵게 여기지 않을 것이니 한 약속은 반드시 미덥게 해야 한다.>>
<<한밤중 주고 받은 뇌물도 아침이면 드러난다.>>
<<지금 세상에서 지극히 천하고 하소연할 곳 없는 자는 백성이지만 세상에서 무겁기가 높은 산과 같은 자도 또한 백성이다. 백성을 잘
받들면 세상에 무서울 것도 못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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