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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한집

<파한집>
   작가: 이인로(1152--1120)

  고려 중기 문신 이인로가 쓴 최초의 시화 수필집. 이름나 문인들과 승려들의 시문을 제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사명감에서 씌어진 책으로,
고려 중기까지의 시의 역사를 조감하면서 구체적인 작가와 작품에 대해서는 물론, 시학의 근본문제까지 자세하게 논의 하고 있다. 아울러
고려 문화의 일반적인 특징을 살필 수 있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귀중한 자료들을 제공하고 있다.


     죽림고회의 중심인물
  이인로는 고려 의종 때 7대 80년 동안 국권을 장악했던 문벌귀족인 인주 이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잃고 고승인 요일 밑에서
자랐다. 그의 가문은 그 자신도 자랑스럽게 여긴 쟁쟁한 문벌귀족이었으나, 그는 크게 출세하지는 못했다.
  청년기에 무신정권의 공포정치를 피해 한때 승려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곧 환속하여 29세에는 문과시험에 장원급제한 뒤 문극겸의 천거로
하림원에 보직되어 14년간 근무했다. 당시의 이름난 선비인 오세재임춘조통황보항함순이담지 등과
죽림고회를 조직하고 시와 술을 즐겼다. 이는 중국 진대에 문학을 사랑하고 술과 거문고를 즐기면서 세상을 등지고 죽림에 모여서 청담을
나누었던 중국의 <죽림7현>을 흠모한 문학모임이었다.
 그후 벼슬은 다소 높아졌으나 순탄치만은 않았다. 관직에 매력을 가졌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또 당시 집권층인 최씨 일파에 대해서도
호의적이 아니었다. <고려사>에 <<성격이 편협하고 급하여 크게 쓰이지 못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성격적으로도 시대 흐름에 거슬린
듯하다. 이런 면에서 최씨 정권하에서 승승장구하던 이규보와는 대조적이다.
 이런 연유에서인지 그는 인간관계를 인연의 결과로 보고 임금과 어진 재상의 만남을 우연이 아닌 필연으로 보아 <<하늘이 내린 품성은
나면서부터 지니고 있어, 물건에 따라 옮길 수 없다>> <<대개 초목은 그 토질이 맞지 않으면 그 품성을 발휘하지 못한다>>라는 글을 남겼다.
또한 관직을 원하면서도 구걸하지 않고 시와 술로 자위하는 자세를 견지했다.
  이인로는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이 이룩한 문학이 지속되고 더욱 세련되기를 바랐다. 특히 예종 때 군신이 함께 어울려 시를 주고 받으며
풍류를 즐기던 일을 두고두고 동경하면서 자기 시대에도 그 기풍이 재현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졌다.
  그의 생각에는 의종 때가 문인들의 황금기였던 반면, 명종 때의 문학은 암흑가로 여겨졌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의종을 찬양하고 그 시대를
그리워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점점 쇠약해지는 문학을 보존하기 위해 틈틈이 모은 시들과 문인들의 동향을 기록해 나갔다. 그러한 노력의
결정이 <파한집>으로 나타났다.
  이런 면에서 <파한집>은 그의 문학적 고백을 담고 당시 문단의 증언을 엮은 단편집이라 할 수 있다. 이를 두고 국문학사상에서는 <<수필적
평론집으로선 맨 최초의 것>>으로 규정하면서 <<13세기 고려 문단에 혜성처럼 빛나는 평론집의 효시>>라고 평가하고 있다.

     무신정권하의 문인들
  1170년 정중부에 의해 무신의 난이 일어나서 많은 문인들이 화를 입게 되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무신란의 학살에서 살아남은
문인들은 현실을 도피하여 문학에 몰두하다 보니, 오히려 문학이 더욱 풍부할 수 있었다. 현실도피가 문학발전의 계기가 되었다는 견해는
오세재임춘이인로 등의 경우를 보면 어느정도 수긍이 간다.
   죽림고회
  무신정권의 공포 속에서 제도권의 안락함보다는 자연 속에서 시문을 사랑하고 그 속에서 가치를 찾고자 한 시문 숭상자들이 있었다. 그
가운데 오세재가 좌장격이고, 이인로가 대변자 노릇을 했으며 임춘은 가장 불우한 삶을 살았다.
  특히 오세재는 이인로가 <파한집>에서 송곳을 꽂을 만한 땅도 없다고 표현할 만큼 궁핍한 생활을 했다. 평생을 백성들의 고충에 공감하고
집권층의 방자와 횡포에 비판의 노래를 부르면서 그의 문학생활을 계속한 듯하다. 50세에 과거에 합격했으나 그의 날카로운 비판의식이
문제가 되어 관리로 등용되지 못하고, 정권으로 부터 거부당했다. 그후 비참한 모습으로 경주에서 객사하게 된다.
  30대에 요절한 임춘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무신란으로 전가족이 타격을 입었고, 과거에 몇번 응시했으나 계속 낙방했다. 그러나
그는 그로 인해 자신을 잃거나 수치로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과거시험에서의 문장과 자신의 문학세계의 지향점이 다를 뿐, 오히려
후자에 대해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춘의 생각은 문학수업이란 모름지기 고문을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것이지, 자구 놀림에 지나지
않는 과거시험의 글이란 <문학>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이인로는 관직에 재직한 점에서 다소 다르나, 출세지향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가 오세재를 천거한 점, 임춘을
위해 유문집을 편찬하는 등 불우한 동료문인들에 대해 깊은 동정심을 가진 것도 이런 맥락이다.
    관직지향파
  반면 당시 <계관시인>과 같은 존재였던 이규보는 최충헌 정권에 접근하여 문학적 영예와 관료로서의 명예를 함께 누렸다. 자기 삶의
경험에 입각해서 현실을 인식하고 시대적민족적인 문제의식과 함께 만날 때 바람직한 문학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입신출세에 너무 집착하여 권력에 아부한 지조 없는 문인이라는 비판이 뒤따랐다. 이규보의 천거로 중용된 최자 역시
집권자들의 구미에 맞는 문학활동을 했다. 시문숭상파들의 보수적인 태도와는 달리 새로운 시의식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구했다.

    고려인의 삶을 보여주는 최초의 시화집
  <파한집>은 시화를 모은 책이다. 시를 짓는 데 따르는 일화에다 시평을 곁들이고 이따금 작가론이나 문학일반론까지 곁들여 전에 볼 수
없었던 책을 구성했다. 요즘 말로 표현하면 일종의 수필이다. 문학용어로는 <패관문학>이라 하는데, 일정한 체계를 갖추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써모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산만한 감도 없지 않으나, 자세히 음미해보면 문학에 대한 그의 일관된 주장을 볼 수 있다.
  이 책에는 서문이 없고, 정여령이라는 사람이 자기 고향의 경치를 그린 그림을 보고 즉석에서 아주 짜임새 있는 시를 지어 당대의
명사들을 감탄케 했다는 일화를 싣고 있다. 그 다음에 명성 높은 송나라 승려 혜홍의 작품에 기대를 걸었다가 실망을 했다고 하는 부분도
있다. 그리고 얼마 동안은 자기가 시를 지은 사연을 늘어놓았다. 계속 이런 식으로 시에 관한 일화를 쓰고 작품을 소개하고 평을 했다.
  상중하 3권으로 엮어져 있는데 구체적으로 나누면 상권 25화, 중권 25화, 하권 33화, 도합 83화가 된다.
시문그림글씨역사인물지리풍물에 대하여 두루 기록하여 시로 연결시켰다. 이 책에는
자작시(13화)가 많이 들어 있다. 이중 파한집 상권에 나오는 한 부분을 부담없이 읽어보자.
    청학동과 도화
  지리산은 두류산이라고도 한다. 북 쪽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꽃 같은 봉우리와 꽃받침 같은 골짜기가 계속 잇닿아 전라도 남원에
이르렀는데, 10여 고을에 걸쳐 수천 리 길이 서리고 얽혀 열흘에서 한 달정도는 걸려야 그 산 경계선에 닿을 수 있다. 옛 전설에,
  <<지리산 속에 청학동이란 곳이 있는데 그곳으로 들어가는 길이 너무 좁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이다. 기다시피하여 수십 리쯤
들어가면 비로소 넓은 곳이 나타난다. 주위는 모두 기름진 밭과 땅으로 되어 있어 씨 뿌려 농사짓기에 알맞고, 우거진 숲속에는 푸른 학이
살고 있어서 청학동이라고 부르고, 대개 이곳은 옛날 현실도피적인 선비들이 살던 곳으로 아직도 가시덤불속 빈터에 허물어진 담과 무너진
웅덩이가 더러 남아 있다>>고 전한다.
  오래 전 나는 사촌형인 최상국과 함께 세상의 인연을 끊고 은둔생활로 일생을 보낼 뜻이 있어서 이 청학동을 찾기로 약속했다.
  두세 마리의 소에 소지품을 넣은 대바구니를 싣고 들어가, 속세와 인연을 끊으려 했다. 마침내 화엄사를 거쳐 화개현의 신흥사에 묵게
되었다. 지나는 곳마다 선경이었다. 온갖 바위가 다투어 솟고 골짜기마다 맑은 물이 소리내며 흘렀다. 대나무 울타리를 한 집들도 복숭아꽃,
살구꽃에 어리어 정말 인간이 사는 곳이 아닌 듯했다.
  그러나 청학동이라는 마을은 끝내 찾지 못하여 하는수없이 바윗돌에 다음과 같은 시를 새기고 돌아오고 말았다.
 두류산은 드높이 구름 위에 높이 솟고
 온갖 바위와 골짜기는 회계산(중국의 명산)처럼 아름답구나.
 지팡이에 의지하여 청학동을 찾으려 했으나
 속절없는 원숭이 울음소리만 숲속에 들리네
 누각은 희미한데 삼산(중국의 산이름)은 안 보이고
 이끼 낀 바위에 글씨 넉자만 희미하구나
 묻노니 선경이 어디메뇨
 물에 떠가는 꽃잎이 사람만 어지럽히네.
 어제는 우연히 도연명의 문집을 읽다가 <도화원기>가 눈에 띄어 여러 번 외어보았다.
  <<진나라 때 무릉에 사는 한 어부가 골짜기의 물길을 따라 가다가 길을 잃고 복숭아꽃이 만발한 숲을 발견한다. 숲 끝은 강상류에서
끝났고 그 곳에는 산이 있었다. 산에는 작은 동굴이 하나 있었는데 그속으로 희미한 불빛이 보였다. 어부는 즉시 배에서 내려 동굴 속을
따라들어갔다. 그러자 탁 트인 평화로운 낙원이 펼쳐졌다.
  그곳 사람들은 모두 기쁨에 찬 얼굴로 살고 있었는데 진나라때 난리를 피에 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도 살기가 좋아 500여년의 세월
동안 바깥 세상일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어부는 며칠 동안 극진한 대접을 받고 <바깥 세상에 나가서 말하지 말라>는 당부를 받고 돌아온다. 어부의 보고를 받은 읍의 태수는
어부가 표시해둔 길을 따라 찾아 보았으나 실패했고, 그후 유자기라는 사람도 시도해보았으나 찾지 못했다>>(파한집에는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으나 필자가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 좀더 덧붙였음).
  이것은 그가 지은 <도화원기>의 요지다. 후세 사람들은 이걸 미화하여 단청색으로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노래를 지어 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도원이란 신선들이 사는 세계로, 신선이 타는 수레인 우거표륜을 타고 갈 수 있는 곳으로만 여기고 있는데, 이것은 그
기록을 잘못 읽은 까닭이다.
  도화원은 진실로 청학동과 다름없는 것이다. 어치 유자기 같은 선비를 데리고 가서 찾을 수 있겠는가?>>
  이상이 <파한집>에 나오는 일부분이다. 청학은 선인들이 타고 다니는 수레를 말하는데 이 글은 도연명의 <도화원기>에 나오는
<도화원>이나 지리산의 <청학동>이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임을 내세운 글로, 무신정권하의 선비들의 은둔적인 풍조를 엿볼 수 있다.
  아마 청학동은 고려 때부터 우리 나라의 이상향으로 알려진 듯하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적 고향은 중국의 무릉도원, 유럽의 아틀란티스,
아메리카의 엘도라도와는 달리 전쟁의 화를 피하고 굶주림을 면하는 가난한 이상향이었던 듯하다.
  이밖에도 경주의 옛 풍속을 기술하고 평양의 산하와 인물을 묘사하며, 수도인 개경의 궁궐사원 들의 풍물을 기록하고 있어,
고려문화의 일반을 보여주는 자료가 된다. 그리고 또 내용 중에는 시와는 별관계가 없는 역사상의 빠진 일들을 기록하고 있어 역사연구에도
도움을 주는 책이다.

   복고주의적 문학관이 담긴 패관 문학집
  우리 나라 역대의 우수한 문인들의 시가와 작품들을 정리하여 남기지 않는다면 잊혀져 후세에 전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이인로가 엮은
이 책은 일종의 패관문학집이다.
  여기서 <패관>이란 중국 한나라 때 일반에 떠도는 민담을 수집하여 민심을 파악하고자 파견한 관리를 말하는데, 이들에 의해 기록된
문학을 패관문학이라 한다. <파한집>은 우리 나라 최초의 시화집으로 신라와 고려에 걸쳐 여러 풍속과 일화를 담고 있어 문학적 가치가
높다.
  한편 그의 문학세계는 선명한 회화성을 통하여 탈속의 경지를 모색했으며, 문은 중국 한유의 고문을 따랐고, 시는 소식(소동파)를
숭상했다. 그는 산문에서든 시에서든 <용사>를 소중하게 여겼다. 용사란 과거 명문의 표현이나. 관련사실을 자신의 의도대로 재활용하는
창작방식이다. 즉 문학의 고전적인 규범과 가치를 배우되 혁신할 줄 알아야 한다는 보수적인 성향을 띠었다. 그러기에 문학수련의 가장 좋은
방법은 옛사람의 명문을 읽어서 자기것으로 하는 데 있다고 했다. 특히 그는 소식을 계승하고자 했는데, 소식이 썼던 말, 소식과 관련된
고사를 우선적으로 택하면서 자기 작품을 장식했다.
  그는 <<세상일 중에서 빈부나 귀천으로 높고 낮음을 정할 수 없는 것이 오직 문장뿐이다. 대개 완성된 문장은 해와 달이 하늘을 곱게 하고
구름과 안개가 공주에서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것 같다>>고 말하여 예술지향주의적인 신념을 표현했다. 그는 해와 달처럼 아름다운 표현은
과거의 고전적인 명문에 이미 구현된 것으로 보고, 그것을 충실하게 배우고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옛 사람들은 비록 뛰어난 재주가 있어도 감히 경망스럽게 손을 놀리지 않고, 반드시 갈고 닦은 공을 더한 다음에야 광채가 생기도록
해서 무지개처럼 천고에 빛날 수 있었다>>는 말 속에 이인로의 충고가 요약되어 있다. 생각이 떠오른다고 해서 함부로 시를 써내는 태도를
배격했다. 오랫동안 수련을 쌓으며 애써 갈고 닦아야 한다면서 글자 한자 한자를 안배하기에 밤낮으로 힘을 다한 사람, 한 해 동안 시 세
편만을 써서 줄곧 고치기만 한 사람의 경우까지 들었다.
  그렇다고 이인로가 고인을 본받는 것이 최선임을 주장한 것은 아니다. <<고인이 이르지 못한 데서 신의를 창출해 묘한 경지에 이르는>>
것이 최고의 목표라고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불가능하므로 실현가능한 차선책을 택해 용사를 정묘하게 해 고인의 표현을 가져와서 새로운
효과가 나게 활용하자고 제안했다. 이는 <<문을 닫아 걸고 황산곡소동파 두 문집을 읽은 연후라야 시어가 힘차게 되고 시운이
뚜렷해져서 작시의 삼매에 들게 되었다>>는 자신의 경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
  최초의 시화집인 <파한집>을 저술하여 한국문학사에 본격적인 비평문학의 길을 연 그는 누구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자기 나름의
문학세계를 구축하고 무지개처럼 영롱한 표현을 이룩해, 현실을 떠나지 않고서도 문학 속에다가 은거할 곳을 마련했다.
  <파한집>이 나온 이후로 곧 뒤이어 최자가 이를 보완하여 <보한집>을 저술했다. 그후 순수한 시화집은 아니지만 이제현의 <낙옹비설>이
나왔고, 조선의 서거정의 <동인시화>가 시화라는 이름을 정식으로 붙이고 나왔는데 그 이후로는 많은 시화집들이 쏟아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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