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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비자

<한비자>
   저자: 한비자(BC 280--233)

 전국시대의 법가주의사상을 종합하고 이를 사상적으로 체계화한 인물이 바로 한비자다. 법가사상은 3파로 나뉘어진다. 곧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고(법치주의), 관리를 다스리기 위해서는 <술>이 필요하며(술치주의), 군주에게는 절대적인<세>가
필수적(세치주의)이라고 보는 사상인데, 이는 한비자에 의하여 <법술>이론으로 집대성되었다. 주관성이 개입될 수지가 있는 온정적
이물장치를 극력 배격하고, 특히 <관료주의에 의한 국가 권력의 농단>의 가능성에 주목하여 군주에 의한 관료의 통제술과 객관적이고 엄격한
법치를 통한 군주의 절대공권력의 확보를 말하고 있다.

     생애

 한비자는 전국시대 한왕 안의 서자로 출생했다. 그의 어머니는 신분이 낮은 출신이었기 때문에 그가 비록 왕족이 었지만 왕실에서 대우받지
못하는 불운한 처지었다. 이 같은 불행한 소년기를 가졌기에 일찍부터 학문연구에 눈을 돌렸다. 그가 태어난 한나라는 전국7웅(?? ??  ??)
중의 하나로 가장 문화수준이 낮은 소국이었다. 한비(한비자의 본명)는 당대의 석학인 순자에게 배우기 위해 제나라의 수도 임치로 그를
찾아갔다. 순자는 조나라 출신으로 이곳에 와서 학자의 우두머리인 제주에 초빙되어 있었다.
 한비는 순자에게서 학문을 배우는 동안 후일 진나라의 재상이 된 이사는 물론, 이곳에서 유가.도가.명가.법가.묵가 등 여러 학파의 학문을
두루 흡수,비판하면서 부국강병의 설을 체계화했다. 그의 학설을 현실정치에 적용하려면 국왕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그는 문장을 모은
저서<한비자>는 55편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의하면 이 한비자의 저서 중 <고분>과 <오두>를 우연히 진시황이 보게 되어 <<이 책이야말로 내가 기다리던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다>>고 감탄했다 한다. 이때 이사가 진시황에게 <<한비를 얻고 싶으면 한나라를 공격하라,
그러면 반드시 한비를 사신으로 보내올 것이다>>고 건의하자 예상대로 한나라는 한비를 사신으로 보내 화친을 빌었다. 이때 한비는 진시황을
움직여 위험에 빠진 한나라를 구할 기회를 보고 있었다.
 한편 이사는 진시왕이 한비를 중용할 것을 두려워하여 왕에게 모함했으나, 진시황은 그의 인물됨을 아껴 투옥시키는 데 그쳤다. 그러나
옥에 갇힌 한비에게 이사는 독약을 보내 자살할 것을 강요하자, 한비는 그의 결백을 입중하기 위해진시황을 만나볼 기회를 간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진시황이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그에게 석방명령을 내렸을 때는 이미 그가 자살한 후였다.
 이처럼 한비자는 전국시대 말기에 태어나 조국의 멸망을 바로 눈앞에 두고 죽어간 사상가로서, 중앙집권적 봉건 전제정치체제의 확립을
위해 <형명>과 <법술>이론을 집대성한 자이다.

     사상적 배경

 법가사상은 춘추전국시대의 전환기적 사회변혁에 가장 잘 부합되고, 실시할 경우 효과가 바로 나타나는 사상이었기 때문에 각국의
군주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춘추전국시대에 법가사상이 발전한 지역은 주로 제나라와 한.위.조 삼진 지역이다.
 그런데 제나라에서 발전한 법가사상은 주로 경제적 발전을 위한 북ㄱ정책에 그 목표를 두고 있는 데 반해, 한.위.조에서는 법가사상이
종앙집권적 왕권의 강화와 강병적ㅇ책에 초점을 맞추면서 기논의 사상을 철저히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라 한겠다. 그러므로 제나라의
관중이 지은 <관자>에 보면,군주는 백성을 위해 경제적인 부강을 추구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중농정책을 실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백성의 도덕심도 경제에 바탕을 두었으므로 의식이 족해야만 예절을 안다고 했다. 공업과 상업은 큰 이익을 가져올 수 있으므로 국영으로
운영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전국시대에 들어와 위나라는 먼저 변법을 시행하여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법치주의자들이 삼진에 많은 것은 바로 진의 분가와 분가된 3국의
왕권강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삼진의 법가사상은 3파고 나위어지는데, <법치주의> <술치주의> <세치주의>가 곧 이것이며, 이는 한비자에
의해 <법술>이론으로 집대성되었다.
 <법치주의>를 내세운 자는 이사와 상앙으로, 이들은 법률을 제정하여 이를 근본으로 삼고 엄한 형벌과 큰 상을 수단으로 하여 엄격히
백성을 통제하고 군권을 강화하여 부국강병책을 추진했다. 이사는 위나라의 문후를 섬겨 변법을 추진했고 상앙은 진나라 효공을 도와 2차에
걸친 개혁을 단해하여 진의 통일기반을 마련했다.
 <술치주의>는 한나라 신불해가 주장한 것으로 권모술수를 이용한 일종의 통치기술이다. 신하를 통솔하고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여 상벌을
가하고 임금을 두렵게 여김으로써 잘못을 저지르지 못하게 했다. 그는 한나라의 재상으로 발탁되어 한나라 발전에 공을 세웠다.
 <세치주의>를 내세운 사람은 조나라 출신 신도다. 신도는 군주의 절대적 세력이 곧 군주세력의 원천임을 강조하고, 신하가 군주에 복종하는
것은 군주의 세력이지 결코 군주의 덕행이나 재능 때문이 아님을 주장했다.
 이상과 같은 전국시대의 법가주의 사상을 종합하고 이를 사상적으로 체계화한 인물이 바로 한비자다. 한비자가 죽은 지 15년후에 전한의
사가 사마천은 <사기열전>에서 <<한비는 <형명,법술의학>을 좋아했는데 그 돌아감은 황로사상에 근본한다. 이사와 더불어 함께 순자를
섬기었다>>고 기록했다.
 한비자는 한나라 공자로 진시황 때 재상이 된 이사와 함께 순자의 제자로서 성악설을 사상적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한비자는 유가의
<덕치주의>나 <예교주의>를 배척하고 법치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법치의 기본은 <엄형주의>와 철저한 <신상필벌>을 원칙으로 했다.
 군왕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부강한 나라이고 이를 위해서는 강한 군대가 필요하고 부국을 위한 농업생산의 발전을 내세워 상업과 공업을
말업으로 억압했다. 한비자는 법치의 운영방법으로 술치와 세치를 함께 사용해야 함을 강조했다. 즉, 백성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고 관리를 부리기 위해서는 <술>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법.술.세>는 제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이라고 했다.
 한편 한비자는 <형명동참>이란 용어를 많이 쓰고 있는데 간단히 말하면 신하들이 하는 말(명)과 실제의 공로(형)를 비교하여, 서로
부합하면 상을 주고 그렇지 않으면 가차없이 벌을 주어 신하들의 망언이나 악행을 방지하고 그 책임을 분명하고자 하는 것으로 한비자의
<형명론>은 명가의 실재론과 상통한다.

     <한비자>의 내용

 <한비자>는 한비의 저서로 처음 한자라 불렀는데 당의 한유도 한자라 불렀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 송대 이후 한비자라 부르기
시작했다. <한비자>는 총 55편으로 총 10만 어로 엮어져 있으며, 논문체 문답체 문장과 설화.우화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부분의 한비가
저술한 것이나 일부는 그의 후학들이 쓴 것도 있다.
 55편 중 한비자의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몇 편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한비자의 사상은 <법술론>으로 대표된다. 여기서 <법>이란 법령을 뜻하고,이 법이야말로 국가통치의 근본이 된다고
강조했다. 법은 백성이 따라야 할 절대적인 기준이 되어야 하며 아무리 평범한 군주라도 법의 운용만 잘 터득하면 훌륭한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것이데, 여기서 <술>이란 법을 운용하는 방법을 말한다. 술은 군주의 가슴에 품고 이것 저것을 비교하여 남몰래 신하를 제어하는
것으로서, 술은 남에게 절대로 보여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하의 말이 진실인가를 꿰뚫어보는 재주가 있어야 한다. 신하를 실험하기 위해 의심스러운 말을 하여 속여도 보고 알면서도 모르는
체 시험도 해본다. 이렇게 하여서 신하의 본성을 알아볼 수 있으며 간계를 부리지 못하도록 사전에 막는 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1. <이병>편: 밝은 임금은 형과 덕 두 대의 손잡이를 자고 신하를 다스려야한다. 신하 된 자는 벌을 두려워하고 상타기를 기뻐하는 데
그원리를 둔다. 여기서 벌이란 형이요 상이란 덕이다. 이 형과 덕의 두 개 손잡이만 있으면 신하를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다. 만약 군주가
상벌의 권한을 스스로 행사하지 않고 신하에게 맡기게 되면 백성은 그 신하를 두려워하고 군주를 만만히 본다. 이렇게 되면 백성의 인심은
군주에게서 신하에게로 향하게 된다. 그러므로 군주는 이 두 개의 손잡이를 절대로 놓아서는 안된다.
   2. <비내>편: 군주는 남을 믿어서는 안된다. 남을 믿으면 자기가 남에게 눌린다. 신하는 위엄있는 기세에 눌려 부득이 명령에 따를
뿐이지 같은 핏줄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신하란 것은 언제나 군주에게 달려들 기회를 노리고 있다. 이 같은 신하 위에 앉아
편안히 생각하기 때문에 군주의 지위가 위태로워지고 죽음을 당하기도 한다. 군주가 아들과 아내를 덮어놓고 믿으면 뱃속 검은 신하는
아들이나 아내를 이용하여 사사로운 욕심을 채우려고 한다. 그러므로 군주는 아들과 아내까지고 믿어서는 아니되니 세상에 누구를 믿을
것인가.
 나라에서 조칙으로 태자를 봉하면 그 태자를 옹립한 자들은 임금이 일찍 죽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아내란
윈래 같은 핏줄이 아니기 때문에 사랑하면 가까위지고 사랑하지 않으면 멀어진다. 재난은 사랑하는 데서 생긴다
 의사가 환자의 상처를 빨아내는 것은 육친의 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돈이 생기기 때문이다. 수레를 만드는 사람이 모든 사람이 수레를
갖기 원하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이 부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3. <고분>편: 중신이란 군주의 명령 없이 마음대로 하고 법을 무시하고 제 욕심을 채우며 국가의 재산으로 제 배를 채우고 군주를
제마음대로 움직이는 자다. 그러므로 임금 된 자는 중신의 비밀을 꿰뚫을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곧 <술>이다. 한비자는
계속하여 <<군주여, 눈을 뜨라>>고 힘주어 강조한다. 군주의 눈을 가리는 중신을 제거해야 한다고 <고분>편에서 일깨우고 있다.
   4. <설난>편: 의견을 말하기 힘든 것은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내 편의 의견에 맞추기 어려운 데 있다. 진언하는 자는 계획을 비밀히
진해  켜야 성공하며 비미링 새면 실패한다. 그러므로 군주가 비밀히 계획하는 일에 말이 미치면 그 의견을 말한 이는 몸이 위태롭다.
진언할 때는 그 상대의 의견에 맞지 않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5. <오두>.<십과>편: 오두란 다섯 마리의 해충을 말한다. 나라를 좀먹는 다섯 마리의 해충과같은 부류의 인간을 다음과 같이 들고 있다.
 (1) 옛 성현을 칭송하며 인의를 빌어 차용해 쓰고 복장과 말을 꾸며하는 자.
 (2) 거짓말을 꾸며 외국의 힘을 빌어 제 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유세가.
 (3) 사재를 모아 유력자에게 아부하며 전사의 공로를 묵살하는 측근자.
 (4) 무리를 모아 의협을 내세우며 그것으로서 이름을 얻으려하며 국법을 어기는 협객.
 (5) 변변치 못한 그릇을 만들어 팔아서 사치품을 사모았다가 때를 보아 폭리를 얻고 농민이 애써 얻는 것과 같은 이익을 힘들이지 않고
한순간 얻는 상인들이라고 지적했다.
 한편 십과란 임금이 몸을 망치는 열 가지의 잘못을 말한다.
 (1) 조그만 업적을 세우는 데 정신을 잃는 것
 (2) 조그만 이익에 얽매이는 것
 (3) 감정이 나는 대로 난폭한 행동을 하는 것
 (4) 음악에 빠지는 것
 (5) 지나친 욕심
 (6) 여락에 빠지는 것
 (7) 본거지를 비워놓고 놀러다니는 것
 (8) 충신의 의견을 듣지 않는 것
 (9) 외적인 힘에만 의지하는 것
 (10) 힘이 없는 주제에 남에게 무례하게 하는 것
 이상의 열 가지는 임금 된 자가 범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의의 및 영향

 우리는 앞에서 유가와 도가 그리고 여기서 법가사상을 살펴보았다. 비교적 성격이 온화한 중국 남부지방에서는 노자와 장자의 낭만적
자유주의가 어울리고, 중앙평야의 사람들은 공자와 후학들이 창도한 중용의 인도주의적 교리에 마음이 끌렸으며, 완고한 북방사람들은
법가의 이론과 실천에 집착했다. 법가의 사상가들 중에서도 한비자는 다른 사람들보다 결코 독창적이지 못했지만, 그는 부지런한 학자기질과
날카로운 사색가의 자질을 겸유했고 역사의 진보를 믿었다.
 한비자의 사상은 관료제도를 통한 절대군주 정치와 신상필벌을 통한 엄격한 법의 시행,그리고 속국의 경제적 자족 등의 특색을 지닌다.
크고 작은 모든 사회적 갈등의 궁극적 해소를 위해 한비자는 <절대국가의 공권력>의 창출을 요청했다. 그는 현명한 군주는 고대사회를
모범삼아서는 안되며 현실상황을 직시하여 봉건제를 타파하고 관료제를 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분명히 법제와 폭정을 구분하고 형벌로써
형벌을 없애자는 그의 주장은 뛰어난 점이 있다. 부역의 경감을 제창한 것도 빈민들에게는 유리했다.
 그러나 상벌만능을 고취시켜 윤리더덕의 역할을 과소평가한 것은 오류였다. 그리고 통일된 법령에 의해 학술의 발전을 저해하고 인심을
억압한 것은 반문명적이었다. 군주는 최고 입법자이자 또한 법률에 구속받지 않는다는 <공법>은 사실상 가장 큰 사법이었다. 그것은 결코
평등이 아니었으며 심각한 불평등을 포함하고 있었다. 군주 전제제도에 대한 한비의 구상은 민중의 희망에 유리한 점도 있었지만, 그 주된
목적은 군주의 통치를 보호하고 유지하며 강화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민주의 목숨은 완전히 군주에게 달려 있는 것이다.
 한비자의 이러한 학설은 중국의 군주 전제제도의 기본형식을 구축했으며 또한 역대 제왕들에게 행위의 기준을 제공했다. 진나라의 정치가
법가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한나라 때에는 유가와 법가를 개조하여 양유음법의 통지정책을 실시했다. 그리하여
유가로서 교화를 장악하고 법가로서 관리들을 다스렸으며, 이데올로기적으로는 유가의 사상을 제창했으나 현실정치에는 법가의 제도를
실행했다.
 이후로도 역대왕조는 기본적으로 이를 계승하고 바꾸지 않았다. 비록 한비자의 이름은 아주 적게 취급되었고, 취급되었을 때도 계속
비판받았으나, 제왕통치와 강화에는 한비자의 사상이 오랫동안 막강하게 존재해왔음을 느끼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전제제도가 중국역사에 있어 반드시 지나가야만 되었던 길이었다면 이 멀고 긴 길을 가는데 한비자의 정치설계는 컫란
생명력과 재생력을 부여했다고.
 생각해보면 전국시대에 있어 제자백가가 나와 제각기 천하평정을 외쳤지만 결국은 한비자의  형명법술 정치가 주효하여 진시황이 6국을
병합하여 천하통일을 일단 달성하게 된 것은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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