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my blog with Bloglovin FraisGout: February 2020

이것이 행복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칼 힐티
  현대의 예언자라고 불리워지는 스위스의 사상가이자
법학자. 이론보다는 인생을 관조하고 사색하는 생활 철학의
길을 열어 보임. 주요 저서로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병든
정신"등이 있음.

  완성을 추구하는 충동으로 이 세상에서 완성이
이루어진 적은 없다. 그러나 완성을 추구하여 싸우는
영혼은 언제나 만족을 얻는다. 행복을 진실로
우리들이 모든 사상의 열쇠이다. 스스로 그것을
바라고, 개인의 노력으로 그것에 도달할 수 없을 때는 다수의
사람들과 공동으로 합심해서라도 추구하는 것이다.
  행복은 학문의 탐구, 노력, 모든 국가적인 것, 또는
신앙적인 시설의 궁극적 거점이 되는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에 대해 제멋대로 해석을 하고 있지만
행복이야말로 인간 생활의 지상 목표인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어떻게 해서라도 행복하게 되고
싶은 것이다. 가장 엄격한 스토아주의일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단념함으로써 그들 유파대로의 행복을 얻으려고 하고
있으며, 극단적으로 이 세상살이의 속된 습성에서 탈피하려는
그리스도교인들까지도 별개의 생활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염세주의자들도 결국은 그들의 비밀스러운
자랑을 간직하는 행복을 느끼고 있다. 불교 신자들도
무, 즉 무의식 중에 행복을 찾고 있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만큼은 이 세상에 만인 공통의 것은
없을 것이다.
  미적 추구자나 또한 그들에게 위대한 모범을 보인
괴테도 이미 자기 생활과 작품에서 증명한 것처럼
이따금 물질적 향락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실로 그들의 새로운 유파는 사실은 미적이라고
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이론적으로 억지를 써서
미적이라고 주장하는 위험한 길을 더듬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행복을 추구하는 인사들에 대해서 우리들은
다만 실제로 그런 종류의 행복의 여러 가지 조건을
유례없이 풍부하게 갖추어 놓고 있었던 그들의 우상인
괴테의 말을 들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우리들의 생활은 고생과 일 그것뿐이었다고
하겠다. 나의 75년간의 생활에서 진실로 즐거웠던
것은 겨우 4주일 동안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75년간 겨우 28일간의 행복인 것이다.
미적인 향락을 즐긴 사람들을 볼 때, 그야말로
빈궁생활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참으로
고생만을 일삼던 정직한 날품팔이 노동자라도
한 평생을 끝마침에 있어서 그런 비참하고 가련한
증언을 남기지는 않았으리라.
  자신의 소망을 그 상상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서 조정하는 법을, 인간은 나중에
가서야 저절로 경험에 의해 비로소 배우게 되는 것이다.
  건강한 자연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느낌은 학자나
저술가, 또는 예술가들의 여름철에 지친 표정을
보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들에겐 항상 휴양이
필요하고, 더구나 그 휴양을 하기 위한
여행 중에 다른 일에 관해서는 무슨 이야기든 즐겁게
얘기를 하면서도, 그들의 인생 이론에 따른다면
그야말로 인간 최고의 기쁨이고 동시에 인류의 최대
보물인 자연으로 돌아가서의 핵심에 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 어쨌든 자연으로 돌아가서 그 조용한 멋을
알고 소박한 생활을 사랑하는 취미의 시대가
지금 또다시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적당한 걱정거리, 그리고 그것에서 해방이 된다는
것, 그것이 인간의 행복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경험을 쌓게
된 사람들의 말에 따른다면 인생에 있어서
진실로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악천후의 어렵고 고통스런
나날의 연속이 아니라, 도리어 갈라질 듯한
초록의 하늘을 가리는 한 점의 구름도 찾을 수 없는
일상적 하루하루의 연속이다.
  오늘날의 염세적인 기분의 원인은, 그 대부분이
'행복은 도망쳐 버리기 쉬운 것이어서 좀처럼 예기한
것과 같은 행복은 얻어지지 않는다'라고 하는 경험이
있다. 실제로 지금 도처에 퍼져 있는 염치없는
현실주의라는 것은 대개 그것에 의해서 행복하게
되리라는 확신의 결과가 아니라,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한 절망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더라도
아마 잘못은 아닐 것이다. 아무런 결과도 없는
일이나 소위 덕이라는 것도 영혼의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 아니고 공공의 사업이나 선행, 애국
또한 그 모두가 거짓을 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거나 인생의 올바른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가 우선 일체의 우상을 팽개쳐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가문이라든가 처지, 습관 등에
의해서 얻은 편견을 모조리 버린다는 것이 진실된
행복에의 첫번째 관문인 것이다. 극히 드물게 볼 수
있는 행복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인 멕시코 국왕
막스처럼 '어떤 진리가 아닌 것, 혹은 편견을
버린다면 반드시 그 다음에는 행복감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라고 잘라 말하는 것은 정당한 판단이다. 그것은
또한 어두운 길에서 볼 수 있는 이정표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들은 아마도 올바른 길을 찾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덕은 행복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청렴한 로베스피엘이 칭찬한 그런
우상을 버려라. 덕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연
그대로의 마음 속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기 위해서 덕이라는 관념은 전혀
불필요한 것이며, 극히 부족한 두뇌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허영심이 강한 사람들까지도 결국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허영심이란
것은 대체적으로 자기의 가치에 대한 판단의 불확실성
때문에 생기는 것인 만큼 언제나 타인의 확인이
필요한 것이다.
  언제나 자신의 의무에 충실한 사람의 부끄럽지 않은
양심은 부드러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베개와
같은 것이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들은 항상 그런 양심의 소유자에게 축복의
꽃다발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지만, 아직은 그런
거룩한 분을 발견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단 하루만이라도 자신의 의무를 완전히
수행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랑, 사랑은 원래 신성의 일부이기에
인간의 마음에는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가진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으리라. 인간의 마음속에 그려진
사랑의 희미한 그림자만으로 인간에게 행복을 줄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오직 이따금 있는 것이고,
또 항상 타인의 의지에 의해서 사랑을 되돌려 준다고
하는 매우 불확실한 전제 아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어린이, 아니 실로 동물의
새끼들마저도 사랑에 대한 본능을 가지고 있고 또
사랑에는 민감하다. 그러나 그들이 차츰 성장함에
따라서 모름지기 하나의 예외도 없이 환멸의 슬픔을
맛보게 되는 것만큼 비참한 것은 없다. 더구나 극히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행복의 근본적인 요소로써 '일'을 빼놓을 수는
없다. 일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행복 중의 가장 큰
요소의 한 가지인 것이다. 인간이 행복하고 싶다면 한
주일에 엿새 동안에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기의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빵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성공의 두 가지 전제를 피하는 자는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이다.
일을 하지 않고는 실제에 있어서 이 세상에서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일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행복인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행복을
반드시 수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잘못이다.
  인간의 공상이란 별난 이상을 안고 있다고 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아마 쉴 틈 없이 일하는
천국이나 지상낙원 따위를 상상할 수는 없으리라.
  실제로 우리들은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 같다.
현명한 사람일수록 자기가 하는 일의 결점을 알고
있는 법이다.
  그날 할 일을 마치고 나서 보라. 모든 일은 잘 되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다. 스스로 노동자라고 자랑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러나 노동을 찬미하는 노래 그
이면에는 자신이나 타인이 일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하는 채찍질과 같은 촉진제가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대개는 모두 가능하다면 정규적인
노동시간을 감축시킬 생각을 하고 있다. 만약 일을
한다는 것 그 자체가 본디 행복과 똑같은 의미라고
한다면 그들은 가능하다면 일하는 시간을
연장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자들 중에서도 가장 기묘한 것은
아마 행복을 염세주의자에서 찾으려고 하는 자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가장 비천한 인간도 아니다.
그들 중에는 대개 일종의 과대망상증 환자가 많다.
  모든 일을 팽개쳐 버리고 자신을 포함해서 일체를
악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장엄하게 들릴 것이다.
그 악인 중에서도 스스로를 악인이라고 보고 그렇게
고백하는 자가 사실은 가장 선량한 사람이라고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타인이
악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에 진정으로 만족감을
느낀다면, 그런 대로 그는 무엇인가 선량하고 올바른
통로에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영속적인 상태로서의 염세주의는 대개의
경우, 단지 찢어진 철학의 외투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고 그 찢어진 구멍에서는 인간의 허영심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대식가인 괴물을 언제나
양육하지 않고는 도저히 행복이라는 목표에 접근할 수
없다. 가장 불행한 자는 단지 어떤 종교적인
종파에 소속하는 것으로써 행복을 얻으려고 하면서
결국은 속았다고 느낌으로써 크게 실망하는
사람들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겔추어 교수는 그의 저서 중에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대체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신앙인은 일주일에 한
번 최고의 은총을 얻기 위해 나가는 왕실 근무자가
있다. 즉 인간이 이따금 인류에게 봉사하면서 사회를
위해서 선행을 한다는 것은 남은 시간 즉, 여생을
안락하게 지내기 위한 이기심을 기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가 있고 나서부터 찾아 헤맨 행복의 길,
역사에서는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대개가 스스로의 인생 경험에 의해서 많거나
혹은 적은 그것들을 알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인간은 그 길에서는 도저히 행복다운 행복을
찾아낼 수 없었다. 물론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성스러운 계단에 숨겨진 욕망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행복의 또 다른 조건 중에서
원리적인 세계 질서에 대한 굳은 신앙을 들 수
있겠다.
  그런 질서 없이 세계는 단지 우연에 의해서 혹은
약자에 대해 그야말로 잔인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엄격한 자연법칙에 의해서 지배되고, 또
인간의 책략과 폭력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개인의 행복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세계 질서 속에서의 사람들은 폭력을
휘두르든가, 폭력을 참고 견디든가, 아니면 쇠토막이
되든가 쇠판이 되어 얻어맞는 역할을 하는 것밖에
다른 수가 없다. 그런 것들은 고상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울리지 않는 비참한 상태임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엄밀히 말해서 인간은 이기주의자이거나, 혹은
위선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철학에 대한 완전한
결론을 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불완전하지만 유일한, 구제의 방도는
총의 폭력으로 지배되는 세계국가의 건설인 것이고,
그것은 전세계의 소위 문화 국민을 포괄해서 최소한
그들 사이의 전쟁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황제시대의 로마제국, 또는 나폴레옹 1세의 주된
생각이 그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모든 국법 및 국제법을 그런 식으로 최후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생각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사람들의 머리에 떠오르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인간을 개인적으로는 동물로, 정치적으로는 노예로
격하시키는 그런 인생관의 진리성은 약간만
고상한 사상의 소유자라면, 다만 그 마음 속 깊은
데서 치솟아 올라오는 감정적인 항의만으로도 그것을
부정할 것이 틀림없다.
  설령 역사가 언제나 되풀이돼서 그 무가치성을
문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하더라도
윤리적인 세계 질서의 존재는 충분히 증명된 것이
아니므로 그런 인생관을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들은 단테의 신곡 중의 '지옥의
문'에 기록된 구절을 전해 줄 수밖에 없다.
  "우리들은 슬픔의 시가지 입구, 우리들은 영원한
고뇌에의 입구, 우리들은 멸망하는 겨레의 입구,
너희들이 여기에 들어가려면 일체의 소망을 버려라."
  단테의 지옥에 표현되고 있는 여러 가지 묘사를
살펴보면 이 세상에서의 오늘날의 현실주의적인
인간의 생활과 비슷한 점을 많이 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19세기 독일의 시인인 가이벨의 시에
나타난 것과도 같다.
  "미소를 잊기 위해 /거기까지 내려가지 않아도 된다
/내가 노래하는 모든 고통 모든 고민 /공포와
아픔을 나는 이 세상에서 /이 프로레츠에서
찾았노라."
  그것과는 달리, 윤리적인 세계질서를 수리화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행복에의 길은 바로 여기에 열려 있다! 그 이후는
마음 속 깊은 곳에 꿋꿋한 한 가지 신념이 자리를
잡게 되어 영원한 평화와 확신을 얻게 된다. 그런
것들은 밖에서 불어오는 폭풍우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더 그 힘이 증대되어 간다.
이전에는 오만하기도 했고 또 낙담할 때도 있었던
마음 그 자체가 지금은 굳게 뭉친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오직 매일 일어나는 일에서 빚어지는
감정적인 것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도록
노력하면 된다. 그리고 굳게 부동의 신념을 지니고
생활하면서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고 활동을 하는
생활에서 행복을 깨달으면서 매일 매일의 보수를 받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올바른 길이 생기는 법이다.
  소위 믿음이 철저한 사람들에게 있는 결점은,
언제나 감정에 빠지기 쉬운 행동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천성인 마음의 쾌락주의가 다만 경건한 체
겉치레의 옷을 입은 것뿐이고,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은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그러한 성스러운 마음의 뒷면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것은 때묻은 향악욕뿐. 다만 그런 것은 형체만 다소
다를 뿐인 것이다. 어쨌거나 이것은 사람이 항상
경건하게 모실 우상도 아니고, 그것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숭배하게끔 할 만한 우상 또한 아니다.
  숭배해야 할 것은 오히려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건전한 생활이다. 올바르게 일을 해서 흘리는
땀이야말로 항상 새롭게 솟아나는 부단의 힘과 정신의
쾌활성을 갖게 하는 비밀이고 그런 것들이
모아짐으로써 진실된 행복감을 만들 수 있다. 실로
건강이라는 것도 최근의 의학에서의 연구 결과에서
알려진 것처럼, 본디 피할 수 없는 적에 대한 훌륭한
저항 방편인 것이다.
  그러나 그 저항력에도 머지 않다 밝혀지겠지만
순수한 물질적인 성질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동시에
도덕적인 성질을 지닌 것이어서 여러 가지 도덕적인
속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인간의 부단한 힘은 땀을 흘리고 일하는 데서
생겨난다.
  요컨대 당신에게 힘이 있는 한 앞날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힘과 수명이 일치된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는 인간의 말년에 있어서 가장 희망적인
일이다.
  윤리적인 세계 질서의 존재에 대한 확신, 그런
질서를 지키면서 일을 한다는 것, 그 두 가지는
내적으로 불가분의 것이다. 거기에다가 다음에 언급할
제3의 것을 첨가해서! 이 세 가지 이외의 모든
것은 대체로 부차적인 것인 만큼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사람들이 오직 진지하게
처신한다면 각 개인이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 여러
모의 필요성에 자연스럽게 응해지는 것일 테니까.
  이 세상에 있어서의 윤리적인 세계 질서의 실현은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개인과 가족에 의해서 이루어는 것이지 처음부터
단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각 개인은
단체 속에서 그 자신의 위치를 차지하고 그 위치를
확보 해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때에 태만한
태도는 용납되지 않는다. 단테의 작품이나
성서에서처럼 천지의 출현을 묘사하는 참으로 시적인
정경에서 천사는 그 모두가 활발하고 결단성이 빠르고
간결하게 말을 하는 것이다. 결코 감상적으로
넋두리를 하지 않는 것은 그야말로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인생에 있어서 항상 용기와
겸손한 태도를 지닐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약간은
이상하게 느껴지는 사도 바울의 말, '나는 약할 때
강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 중의
한가지만으로는 각 개인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기쁨은 자진해서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올바른 생활만 한다면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돈이 들지 않았는데 필요에
따라서 얻어지는 기쁨의 최상의 기쁨이다! 이것을
맛볼 수 있다면, 당신은 다만 두 가지 일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견뎌낼 수가 있으리라. 그
두 가지란 걱정거리와 죄를 짓는 일이다.
  참다운 선이라는 것은 먼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떠한 선도 처음부터 웃는 표정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올바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걸어갈 길은 모두가 이미 열려 있는 문을
통해서만 통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교제는 인생 경험이 원숙한 경지에
이른 당신에게 있어서도 역시 어려운 문제이고
또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이리라. 때문에 당신은 결코
타인을 미워해서도 안 된다. 또 쉽게 숭배해서도
안 된다. 그들의 의견이나 요구 판단 등을 지나치게
중시해도 안 된다. 그들을 심판해서도 안 되고
심판을 받아서도 안 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이 세상에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기대해서도 안 되고 세상을 지나치게 겁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을 올바르게 보고, 선을
인정하고, 악은 무력한 것이며 영속성이 없고, 머지
않아 자멸하는 것이라고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와 함께 마지막으로 말해 두고 싶은 것으로 이
세상에서의 일을 그다지 중요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해두어야겠다.
  당신들이 '오직 하늘에 머리를 두고' 살아가기만
한다면, 이 세상의 수많은 일들은 어떻게 되어
가거나 신경이 쓰이지 않게 된다. 중요한 일이 잘만
되어 간다면 사소한 일쯤은 중요시하지 않아도
된다. 대개는 사소한 일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특히
타인이나 타인의 판단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헛되이 괴로워하고 있는 자가 가장 훌륭하다고
인정되고 있는 부류도 많이 있다. 때문에 그들은
평상시의 일을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도 훨씬 어려운
것으로 만들고 있다. 소위 이러한 처세론은
그밖에도 얼마든지 더 첨가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이미 기술한 것처럼 본래
불필요한 것이다. 그 이유는 위에서 서술한 것과 같은
토대에서 오직 자연스럽게 더구나 각 개인의 필요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소중한 것은 그 토대인 만큼, 그것이 없다면 모처럼의
처세론도 실행이 불가능하다.
  당신들은 이 세상에서 일컫는 교훈 또는 그것에
관한 훌륭한 책들마저 그다지 중시하지를 않는다.
그러나 그런 교훈도 어떠한 신념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고, 그런 신념은 또 어떤 인생관에서의 필연적인
사물인 만큼 그런 인생관이야말로 당신이 무엇보다도
먼저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교훈은 과연 그 말이 아름답고, 귀에
솔깃한 것이며 읽기에, 또는 카드에 썼을 때는
멋지게 보이지만,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격언 수집가를 위해서
그 이상의 재료를 제공하는 대신에 오히려 독자에게
또 한가지를 소중한 진리를 알려주고 싶다. 즉
불행한 인간의 생활에는 언제나 수반된다는 점이다.
약간은 역설적일지도 모르겠지만 불행은 행복을
위해서 필요하다.
  사실상의 경험에서 나타나듯이 불행은 대개 피할 수
없는 끈이므로 당신들도 어떤 방편으로든지
반드시 그것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생에
있어서 달관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운명과의 완전한
화해뿐이다. 그것은 저 '넘치는 흐름'과 같은 확실한
마음의 평화인 만큼 그리스도도 그의 제자들에게
이것만은 약속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외면적으로 곤란하기 짝이 없던
마지막 대화에서 깊은 감정을 토로하면서 얘기한
것도 그러한 마음의 평화이다. 때문에 진실된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에는 외부의 사정 따위는 오로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무감각증을 터득해서 그러한
외부에서 새기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그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 유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형제여, 다시 말하지만 인간이란 세상살이에서
괴로움이나 불행을 피할 수는 없다. 그것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럴 경우 먼저 생각을
신중히 해야만 한다. 그 다음에는 일시적인 감정을
초월해서 부동의 신념을 가지는 거이다. 불행은 세
가지 목적이 있고, 동시에 세 가지 단계를 형성하고
있다. 첫째는 벌인데 그것은 여러 가지 행위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니 그런 행위 그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벌이 반드시 행위의 뒤를
따르는 것은 마치 논리적인 귀결이 논리적인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다음은 정화, 이것은 사람이 불행에 의해서 보다
충실하고 진지하게 되고, 진리에 대한 보다 커다란
감수성 때문에 성립하는 과정이다.
  마지막 단계는 자기 시련과 강화이다. 이것은
자신의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함으로써
행해진다. 이러한 경험을 여러번 되풀이함으로써
비로소 당신은 자신 속에 올바른 용기를 솟아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만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겸손이다.

     아직도 그 문을 열지 못하는가

  언제나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무엇인가 조그만한 불안이 끝없이 신변을 감돌고
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노년기가 되면 그 사람의
인상에도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또 당연한
보상이라고 할까, 그들은 그 행복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언제나 불안에 사로잡힌 심정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그 과정이
어떻든 그 자체가 부단한 행복으로 느낄 수 있는
바탕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속되는
고난은 인간을 무정하게 만든다. 때로는 본디 고결한
인사라도 지나치게 자주 고난에 직면했기 때문에
실제보다도 무정한 사람으로 보일 때가 있다. 굳은
인정의 연결도 불행한 삶에서 맺어진다. 인간이 서로
고난을 겪으면서 신의를 잃지 않는다면 어떤
장애에도 굴하지 않는 보배를 얻었다고 하겠다. 그
보배는 진실된 우정이다.
  착한 사람은 행복해야만 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이 세상은 그렇게 움직이고 있지 않으니 그것은
확실히 수수께끼라 하겠고, 그 수수께끼가 실로
수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올바른 길을 가지 못하게
한다.
  "지난날은 신앙에 용맹스러웠던 예수의 증인,
가난한 근심과 위험 속을 헤매는 것을 사람들은
보았다. 이 세상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귀인, 곤궁의
나날을 보냈다. 왕족 중의 왕, 그들 인간들은
십자가에 못박았다."
  실제가 바로 그렇다. 하지만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여러분은 그것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것에 대하여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각오를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평생 행복을 발견할 수
없으리라. 행복은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사자인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그 광경을 보면 겁을 집어먹고
되돌아선다. 그리고는 오히려 행복에는 미치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손에 넣고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경험에 의해서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 즉 향락을 탐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상상력은 현실을 훨씬 앞질러 가는
것, 상상력이 미리 그릴 수 있을 만큼 실제의
고통이 더 심했던 일은 절대로 없었다.
  가장 심한 고통의 순간은 대개 고맙게도 감각이
둔해져서, 고통을 여러번 경험한 사람은 그 고통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고 있다.
그리고 첫째 불행은 그 다음에 닥친 불행을 견뎌내게
하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고통은
'각각 멋진 행복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말해도 좋다.
  고통에 대한 정신적인 싸움은 도리어 인간을
강건하게 만들어 주며, 정신적으로 아니 아마
육체적으로도 건강하게 해준다. 자기 자신을 어느
정도 가차없이 다루는 것, 즉 네가 좋아하건
싫어하건 너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일러 줄 수 있다는 것이 참다운
생활에는 진실로 필요하다. 진리에 대한 사랑과
정의에 대한 용기, 그것이 모름지기 진실된 교육의
기둥이다. 그것이 없다면 교육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사실 천국에 들어가는 것마저 힘이 필요하니,
용기 있게 힘을 쓰는 자, 그 사람은 들어갈 수 있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의 용기가 가장 필요한
것이다. 이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행복이란
하나님과 함께 있다. 그 영역에 도달할 수 있는 힘은
영혼의 소리인 용기이다. 이 세상에는 그 이상의
행복은 없는 것이다. 만약 그런 조짐을 지니지 않은
행복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갖고
싶지 않으리라."
  이기심을 버리고, 영원을 파악해서, 사랑에
이끌려서 이 세상일을 단순한 수단이라고 보고 이것을
지배하라! 이것만이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행복한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행복은 한 가지 현실이며
한 가지 사실이기도 하다. 그밖의 모든 행복은 꿈처럼
상상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러한 꿈은 젊은
시절은 몰라도 나이를 먹으면 누구라도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한 행복은 또한 우리들이 끊임없이 자기의
능력이 미치는 대로 항상 자신을 격려하며, 강제로
요구하는 것에서는 얻어질 수 없다. 오히려 우리들이
다시 이러한 인생관을 신봉하고 단연코 이
인생관을 실행해서 다른 것은 돌아보지도 않는다면
그때 행복은 자연 우리들을 찾아오게 된다. 즉
내적인 흐름이라는 것이 이러한 것이고, 이 흐름은
나이를 먹을수록 차츰 강해져서 우리들 자신의
정신이 성숙한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타인에게 흘러
그에게 나누어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생활이 어떠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려면 반드시 그 목표에 도달하는 일이 필요하다.
또 실제로 우리들은 그것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결심하고 나서 맨 첫 단계를
정복했다면, 단테가 말한 것처럼 '올라간다'는 것에서
커다란 기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정화의 산'의 기슭, 거기서 다시 올라가려고 할 때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어떤 댓가로 요구하는
대로 지불하겠다는 굳은 결심과 명백한 선언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들어가지
못한다. 그것보다 쉬운 길로 아직은 어느 누구도
행복에 도달한 사람이 없다.
  일체를 버려라, 그러면 일체를 발견하리라!
  이런 결심의 대가는 나중에 비로소, 그것도 조금씩
되돌려 받을 수 있다. 처음부터 당장 그 전액을
돌려 받는 자는 한 명도 없다.
  괴테 역시 그의 풍부한 생활을 영위하는 동안에
과연 여러번 행복에 접근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렇게 말하리라. 우리들이 잘 살아야 칠십
년 혹은 건강한 사람도 고작 팔십 년이면 종말을
고하게 되지만, 그리고 그 한평생이 비록 괴롭고
고통스러웠고 또 노동으로 일관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행복한 한평생이었다고.
  이것이 행복이다!

순간적인 행복, 지복의 한 조각으로 충분하다

루드비히 마르쿠제
  독일의 사상가이자 저술가. 부친이 유태인이었기
때문에 망명생활을 했으나, 정형적인 저널리스트적
감각을 지닌 경쾌한 문체로 많은 저서를 남김.
대표작으로 "플라톤과 디오니시오스" "미국의 철학"
"외설에 대하여" 등이 있음.

     최초의 행복의 철학자 한스

  최초의 행복에 관한 철학자는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사람일까? 이 물음에 대답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그러나 성은 몰라도 이름만은 알고 있다. 한스, 보다
정확하게는 '행복한 한스'가 그의 이름이다.
'행복한 한스'는 오래 전부터 독일에서 구전되어 온
옛날 이야기의 하나로, 야콥 그림과 빌헤름 그림
형제가 19세기 초에 수집 간행한 독일의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동화책"에 수록되어 있다. 영국의
시인 오든(1907__73)은 이 책의 동화들은 성서
다음으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해 왔다.
  한스는 원래 철학자라고 불릴 만한 사람은 아니다.
그에 대해 알려진 한에서는 그는 평범한
기술자지만, 그렇다고 일을 하면서 철학을 하는 그런
사람도 아니다. 하지만 그가 도제시절을 끝내고
어머니가 기다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겪는
모험, 이 모험이 그후의 모든 철학자의 행복에 대한
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한스는 체험을 통해 위대한
철학적 발견을 한 것이다. 그것은 어떠한
발견이었을까?
  이 대답은 한스가 쓴 책이나 그가 한 말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여행 노정에 감추어져 있다.
  한스는 7년 동안 일한 끝에 고향의 어머니에게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는 매우 건실했으므로 그의
스승은 많은 보수를 주었다. 스승은 한스에게 그의
머리통만한 금덩어리를 주었다. 한스는 이 보물을
보자기에 싸서 등에 짊어졌다. 그러자 그는 매우
행복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한스는 금덩어리가 너무
무거워 귀찮아졌다. 그리고 이제는 금덩어리에서
기쁨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런데 마침 저쪽에서 말을
탄 사람이 왔다. 말은 얼마나 멋진가! 걷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가만히 올라타고 있으면 데려다
주는 것이다. 뾰족한 돌에 발을 상하는 일도 없고
구두도 못쓰게 되지 않는다. 그래서 한스는
금덩어리와 말을 맞바꾸었다. 그러자 한스는 매우
매우 행복했다.
  갑자기 악마가 그를 공격했다. 악마는 말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말은 그를 떨어뜨렸다. 그래서
그는 말이 보기 싫어졌다. 그런데 마침 농부가 암소를
끌고 지나갔다. 암소는 얼마나 좋은가! 천천히
뒤따라가기만 하면 되고, 게다가 밀크나 버터나
치즈는 마음대로 먹을 수 있다. 한스는 말과 암소를
맞바꾸었다. 그러고 나니 한스는 더욱 행복했다.
  낮이 되자 무척 더워졌다. 늪을 빠져나가는 길은 꼭
한 시간이 걸렸고 혀가 입천장에 말라붙었다.
이런 때를 암소를 끌고 가는 게 아닌가. 그래서 그는
소를 나무에 묶고 젖 밑에 그의 가죽모자를
놓았다. 그러나 젖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게다가 소는 몹시 화를 내고 뒷발로 그의 머리를 세게
걷어찼다. 한스는 소가 싫어졌다. 그런데 마침
이번에는 고깃간 주인이 돼지를 끌고 지나갔다.
돼지는 얼마나 좋은가! 돼지고기는 쇠고기보다 훨씬 맛있다.
게다가 순대는! 한스는 소와 돼지를 맞바꾸었다.
그러자 한스는 더욱 행복했다.
  한스가 다음에 만난 사람은 일주일 동안 먹이를
잔뜩 먹인 매를 들고 가는 사람이었다. 이런! 매는
얼마나 멋진가! 게다가 이 매는 조금도 이상한 점이
없다. 그가 소와 바꾼 돼지는 지금 처음으로 듣는
이야기지만 이웃 마을의 이장집에서 훔친 거라고 하지
않는가. 그는 돼지가 싫어졌다. 그는 벌써부터
매고기구이와 그 기름과 좋은 쿠션을 만들 수 있는 그
흰털을 탐내고 있었다. 그는 시끄러운 돼지를
주고 매를 넘겨받았다. 그러자 그는 매우 행복했다.
  마침내 한스는 고향 앞마을에 이르렀다. 여기에서
그는 쾌활하게 가위를 갈고 있는 한 사내를 보게
된다. 이 사내는 참으로 유쾌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가위 가는 일보다 더 좋은 장사는 없기
때문이었다. 한스는 매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매와 숫돌 두개를 맞바꾸었다. 그러자 한스는
더욱더 행복했다.
  걸음을 옮겨 놓을 때마다 숫돌의 무게는 더해 갔다.
한스는 피곤하고 목이 말랐다. 그는 숫돌이 매우
짐스러워졌다. 간신히 우물을 발견하고 숫돌을
우물가에 놓고 물을 먹으려고 몸을 굽혔다. 그런데
그가 몸을 움직이면서 조심하지
않았는지 숫돌이 우물 속으로 빠져 물 속에
가라앉았다. 그러자 그는 다시 행복했다. 그래서 그는
무릎을 꿇고 앉아 행복의 눈물을 흘리면서
조물주에게 감사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말했다.
'나는 행운아야, 어려울 때마다 구원자가 나타나다니.'
  마음도 가볍게 모든 걱정에서 해방되어 행복한
마음으로 그는 집에 닿았다. "행복한 한스"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프랑스 말 "Le Bonheur;행복"

  요컨대 한스의 경험은 인간이면 누구나 언젠가는
겪는 일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의 행복은
금덩어리나 돼지나 숫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은 많다. 그러나
어떠한 부라도 모든 면에서 인간을 행복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그것이 어떠한 것이든 그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보라, 옷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라고 말한다든가, 보라, 왕국이다! 이것이
행복이다! 라고 환성을 올릴 수는 없다. 어쩌면
그것은 나를 불행하게 만들지도 모르고, 부분적으로는
나를 행복하게 만들지만 나머지 부분에는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할지 모른다. 다시 말하면 '행복이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어떤 부를
가리키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 한스의 위대한
경험이다.
  한스의 여행을 계기로 분명해진 이 진리를 우리는
거듭하여 새롭게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이라는 것은 그 시대, 그 계급의 특징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매우 구체적인 관념 속에서 자라나기
때문이다. 행복은 때로는 마법사의 모습으로
구현되고, 때로는 카에사르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19세기에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 행복은 찬양 받는
거장이나 절대적인 지배력을 가진 로스차일드의
모습이었다. 현대의 행복은 소문이 파다한 범죄
조직의 보스라든가 영화 스타에 의해 대표된다.
이러한 행복의 구현에 대한 신앙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물론 한편으로는 모든 사람들이 그 찬란한 빛은
사실은 속임수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 배운
이론 때문에 태양이 움직인다는 인상이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 속임수라는 것을 알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행복이 압도적인
힘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광휘와 행복의 구별을
한스에게 가르쳐 준 그의 경험은 무의미한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누구든 광휘를 동경하면서도 동시에
빛나는 것은 흔히 행복의 마네킹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있는 것이다. 마네킹은 몸에 걸친 옷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 옷이 아니다.
타레이랑은 무수한 사람들이 행복의 구현자로 생각한
나폴레옹에 대해 "황제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라고 말했다.
  광휘의 허망함을 체험한 사람은 한스만이 아니었다.
후에 불타라고 불린 인도의 왕자는 상상할 수도
없는 광휘를 버렸다. 그것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톨스토이는 유력한 대지주,
찬양 받는 예술가라는 광휘를 포기했다. 그것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분명히
시인을 행복을 노래해 왔다. 그러나 그때 그들의
방법은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 포기한 광휘를
노래하는 것이었다. 행복을 간접적으로 묘사하는 이
방법의 뛰어난 예가 있다. 모파상의 단펀소설
"르 보느와르"가 그것이다.
  수잔느 드 슐몽은 프랑스 난시에서 태어난 젊고
아름답고 부유한 처녀였다. 그녀는 로트링겐의
귀족이었다. 아버지는 이 도시의 경기병 연대
연대장이었으며, 이 연대에는 수잔느가 미치도록
사랑하는 미남 하사관이 있었다. 온 나라의 의젓한
가문의 청년들이 그녀의 사랑을 애걸했다. 그러나
그녀는 농부의 아들인 그 미남 하사관과 손을 맞잡고
달아났다. 그녀의 부모는 그후로 딸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모파상이 수잔느 드 슐몽의 이야기를 하게 한
작중인물은 달아난 지 50년이 지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문명사회를 등진 코르시카에 살고 있었다.
그곳은 세계의 끝이라고 할 만한 미개지였다. 그녀가
사는 오두막집은 양쪽에서 바위가 불쑥 나온 좁고
어두운 산골짜기에 외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그곳에는 길다운 길도 없었고 먼 마을까지 나가지
않으면 여인숙도 없었다. 모든 것을 삼켜 버리는
무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 황량한 토지에는
죽음의 발자국 소리마저 들리는 듯했다.
  약간의 짚더미가 수잔느의 침대였다. 묽은 감자
수프가 그녀의 식사였다. 50년 전에 그녀가 난시에서
이곳까지 따라온 남편은 지금은 귀도 들리지 않는
82세의 노인이 되었다. 광휘의 그림자조차도 남지
않은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그녀는 50년이
지난 지금 "이분은 나를 정말로 행복하게
해주셨어요"(귀머거리 노인도 함께 있었으나 아무
말도 듣지 못했다)라고 고백하는 것이었다. 모파상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이 고백을 되풀이한다. "그는
그녀의 인생을 구석구석까지 행복으로 가득 채웠던 것이다."
  그녀가 버린 찬란한 모든 것, 그녀가 조금도 불평을
하지 않는 주위의 황야를 생각하면, 이 행복이
얼마나 멋진 것인가를 짐작 할 수 있다.

     행복은 그대 안에 있다

  수잔느의 경우에는 백발 노인이기는 하지만
변함없는 행복의 구현자 애인이 있다. 그러나
숫돌까지 잃어버린 한스에게는 어디를 보아도 행복을 안겨 줄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만일 한스가 후에 여행에서 겪은
모험을 해석하려고 한다면 그가 빠져나오기 힘든
오류의 미궁에 빠질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만일 그가(만일의 경우의 이야기지만)그 동안에
너무 슬픈 시나 음울한 철학서적을 읽기라도 한다면
그는 언젠가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생각할 중대한
위험에 마주칠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참된 행복이다. 금덩어리가
차례차례 모양을 바꾸다가 마지막으로 숫돌이 우물
속으로 떨어질 때 나는 가장 행복했다'라고.
  그러자 한스여, 이것은 진리가 아니다! 숫돌을
잃었을 때의 그대는 그보다 앞서서 금덩어리, 말,
돼지, 매, 숫돌을 차례로 빛나는 것이냐고 하는
남들의 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어디까지나 자신의
경험에 충실하라. 그것이 최선이 방법이다. 그대는
그때 여행을 하며 변증법 철학의 과정을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한 덩어리의 금이나 두 개의 숫돌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며, 심지어 불행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는 진리를
배운 것이다. 또한 그대는 외적으로 아무 이유가
없더라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다시
말하면 행복은 이것이나 저것 속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다. 한스여, 그대는 이 점을 배운 것이다. 행복은
그대 안에 있다. 이것이 바로 그대가 여행에서
얻게 된 값진 교훈이다.
  이렇게 해서 한스 이후로 모든 철학자가 이 교훈과
맞겨루게 되었다. 그 중에는 이 교훈을
과대평가하고 '그대의 마음속에서 생긴 것은 충실하고
강력하며 또한 성장하여 끝까지 따라다닌다'
고 믿은 사람도 있었다. 이러한 사람들은 만일 행복이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라면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충실하지도 않고 강력하지도 않으며 마지막까지
성장하는 일은 결코 없다는 것은 보통 있는 일이
아닌가. 오늘 어떤 감정이 모든 것을 밀어내고 불쑥
떠오른다. 내일은 이 감정이 이집트의 미이라보다도
더 완전하게 죽어 버린다. 그래서 내일은 속속들이
찾아보아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이 감정은 부실하다.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행복도 이 감정 못지 않게
부실하다. 그렇다. 행복이 그대 안에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첫걸음이다. 그러나 그 이상은 아니다.
한스는 행복과 불행에 대해 중요한 경험을 한
발견자들의 정상에 설 만한 공적이 있다. 그러나
처음은 어디까지나 처음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행복할 때 나는 한스의 '행복은 그대 안에
있다'는 지혜에 찬성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행복을
찾아 방황하게 된다면 나는 우선 '나의 어디에 행복이
있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힐 것이다. 한스의
위대한 발견 뒤에 갑자기 미발견의 광대한 영역, 곧
자아가 예감되는 것이다.
  그 안에 행복이 깃들어 있다는 신비로운 영역
'자아'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 왔다. 이
영역을 규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점에 한없는
매력을 느낀 노자를 비롯하여 규명이 불가능한 것
속의 규명이 가능한 부분에 관심을 기울인 프로이트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2천년 동안에 걸쳐 위대한
심리학자들이 작성한 자아의 지도는 18세기 이전에
지구를 그린 지도와 흡사하다. 각 지도는 때로는
엉뚱할 만큼 비슷하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영혼의 지도 대부분에는 지도 제작자가
여기에 구멍을 뚫으면 행복은 스스로 솟아 나온다고
생각한 곳에 표를 해 두었다. 그러나 자아의 지도가
일치하는 경우가 드문 것처럼, 사람들이 행복의
샘이라고 지정한 장소도 일치하는 경우가 드물다.
  자아라는 거대한 세계의 어디에서 행복이
솟아 나오는가 하는 점에서 사람들의 의견은 천차만별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한스의 이야기도 대답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스의 위대한 행복의 심취자
에피쿠로스는 이 문제에 그 나름으로 대답하려 했다.

     에피쿠로스의 처방(명령과 금지)

  성자 아우구스티누스와 성자가 아닌 마르크스의
찬양을 받은 이 고대의 계몽가는 행복의 십자군을
거느리고 있다. 그가 행복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각별히 권한 무기의 하나는 이성이었다.
  다음과 같은 경우를 가정해 보자. 어떤 사람이
파티에 초대를 받았는데, 거기에 가면 매력적인
대화도 고급 술도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은 고급 술이나 매력적인 대화에는 흥미가
없다고 하자. 또 한 가지 가정을 덧붙여서, 이 사람은
술을 마시면 쾌활해지는 것이 아니라 피곤을
느끼는 체질이어서 술을 마시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하자. 이러한 경우, 대화를 위해서는
음주를 단념한다는 별로 달갑지 못한 체념이
강요된다. 에피큐리언의 행복은 이러한 금욕을
바탕으로 한다. 이것은 행복의 단념은 아니다. 보다 큰 행복을
위해 다른 행복을 단념하는 것이다.
  가정한 이야기를 계속하기로 하자. 예의 파티에서
술을 단념한 에피큐리언의 옆에 역시 술을 마시지
않으면서 술을 못마시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 사람은 예컨대
매력적인 대화를 즐기기 위해 음주를 단념한 것이
아니라 가정이나 종교시간에 음주는 죄악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술을 마시지 않는 경우였다.
  술을 들지 않는 이 두 사람, 곧 행복을 위해
삼가하는 한 사람과 어떤 미신 때문에 들지 않는 또
한 사람은 두 사람 앞에 놓인 빈 술잔만을 본다면
비슷하다. 그러나 이와 같이 비슷하다고 하더라도
빈 술잔을 놓고 있는 두 사람의 단념의 의미는
다르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두 사람의 체념은
서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에피쿠로스의 위대성은 체념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체념을 찬양하지는 않았다. 그는 행복을
체념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위해 체념하는 것이다.
어떠한 쾌락, 어떠한 환희, 어떠한 행복이든 그
자체로서의 악이 아니다. 이것이 모든 에피큐리언의
기본 입장이다. 그리고 에피쿠로스가 위가 주는
행복을 찬양한 것은 당시 이미 이러한 행복을
대대적으로 부인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떤
청년이 에피쿠로스에게 "저는 방자한 성적 쾌락을
구하는 충동을 억누를 수가 없습니다"라고 고백했다.
이에 대해 에피쿠로스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과도해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말하기
시작하지만, 이에 앞서 원칙적으로 상대의 말을
시인하는 놀라운 발언을 한다. 자네의 욕망에
따르라고... 물론 이 말에 이어 "그러나"라는 말이
나오고, 이 "그러나" 다음에 욕망에 따를 때
고려해야 될 사항이 길게 나열된다. 그렇지만 여기에
나오는 금지 일람표가 의미 있는 것은 쾌락, 기쁨,
행복을 초래하는 모든 것을 원칙적으로 시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절대적'인 미덕, 곧 행복에
앞서서 그 정당성이 증명되어야 하는 미덕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덕을 찬양하라'는 것은 '미덕이
행복에 기여한다면'이라는 단서가 붙을 때이고,
'그렇지 않으면 손을 떼라'는 것이다. 이 스승의 문장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독창적인 문장(가장
오해받기 쉬운 것이기도 하지만) 중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방탕자의 쾌락이 그 사람을 고통과
공포로부터 벗어난 경지로 드높여 준다면(단지 이
경우뿐이지만)이러한 쾌락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미덕이란 모든 암초를 피해서
행복에의 길을 안전하고 확실하게 향해 하도록 할
임무가 있는 조타수에 지나지 않는다. 에피쿠로스는
'이성'이라는 조타수, '미덕'이라는 조타수에게는
매우 냉담했다. 어디를 향해 키를 돌리는가? 라는
것이 전부였다. 선을 향해서? "만일 미식이나
사랑이나 음악의 즐거움, 모든 아름다운 사람의
모습을 바라볼 때의 가슴 설레임을 제외한다면, 나는
선이라고 부를 만한 일을 알지 못한다."
  에피큐리언의 '미덕'이 갖는 행복이라는 독특한
향기는 언제나 기억하고 있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현명하면서도 쾌활한 금욕주의자는 욕구의 재고
조사를 해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아쉬운 생각 없이 단념할 수 있는 욕구와 단념할
수 없는 욕구를 알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분명해진 일은 '어떤 사람에게는 당연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의미가 없는 욕망이 있다'는 것이었다.
무의미한 것으로서 고대의 주석자들은 왕권과
기념비에 대한 욕망을 들고 있다. 또한 에피쿠로스는
당연한 욕구를 불가결한 욕구와 자연적 욕구로
나누었다. 불가결한 욕구 중의 하나는 갈증이다.
분명히 당연하기는 하지만 불가결한 것은 아닌
욕구로서 에피쿠로스는 미식을 들었다. 오늘날이라면
이러한 심리학은 유치하다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눈에는 유치하게 보이더라도 그
배후에는 커다란 성과를 약속하는 원리가 살아 있다.
다시 말하면 불행을 초래하는 충동 중에서 어느
것을 쉽게 제거할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 충동의
체계를 규명하는 원리이다. 이 충동의 심리학은
불구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행복한 삶에의 의지를 가진
사람에 의해 탄생되었다.
  '무엇을 단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은 행복의
이론에서 항상 커다란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에피큐리언적인 체념과 행복을 적대시하는 부정론자
사이의 경계선은 언제나 명확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에는 세계 사상 매우 유명한 인물 디오게네스가
있었다. 그는 큰 통 속에서 살았다. 또한 그는
젊은 농부가 손으로 물을 떠 마시는 것을 보고
바가지를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도대체 어떠한
이유로 이 괴상한 그리스 사람은 편안하지 못한 생활을 하게
되었는가? 제멋대로 사는 부랑자이고 문화의
경멸자라고 비난받은 디오게네스를 나는 오히려
궁전의 쾌적함과 결부된 온갖 번잡함에 진저리를 내는
섬세하고 다감한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분명히
순수한 향락을 탐구하면서 큰 통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절조 높은 생활을! 섭생을 지켜라! 문화와 거리를
가져라! 에피쿠리언의 제3의 명령은 '숨어서
살아라!' 이다. 이것은 사회의 압박으로부터,
그러니까 사회의 칭찬으로부터도 그 오류로부터도
멀어지라는 것이다. 사회의 오류나 어리석음이나
비열한 거짓말이나 책이라는 형태로 그대들에게
밀려오는 것을 결코 허용하지 말라. 이러한 말은 가장
엄격한 은둔생활을 엿보게 하지 않는가? 이렇게
본다면 다시금 에피큐리언과 그 적들을 혼동하기
쉽다. 그들은 열광적으로 행복을 찬양하는 자와
음율하게 행복을 부정하는 자를 혼동할 만큼 서로
비슷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에피쿠로스의 '숨어서 살아라'라는 말에서는
신랄함이나 반항적 은둔성은 볼 수 없으나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예컨대 고대 중국인이 생각한, 도시에
사는 것보다는 산 속에서 사는 것이 갖는 여덟
가지 장점과 같은 것이다. 이 장점은 어떤 것인가?
인습에 사로잡혀 필요가 전혀 없다. 쓸데없는
손님을 만나지 않아도 된다. 배신 잘하는 인간의
마음에 조심할 필요가 없다. 공인에 대한 쓸데없는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된다... 고대 중국의
에피쿠로스라고 해도 좋을 인물은 이렇게 말한다.
  이 '숨어서 살아라'는 먼 나라의 황량한 카르스트
고원에서 살면서 죽음을 선취하려고 한 중세의
수도자들의 은거와는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숨어서 살았으나 그것은 삶을 끝까지
즐기기 위해서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독방에
가두려고 한 것은 결코 아니다. 에피큐리언의 동산의
은둔처는 인간 적대시의 본거지가 아니었다.
에피큐리언의 우정에 대한 열광은 '숨어서 살아라'
하는 것이 행복 없는 인간 세상을 싫어하는 것이 아님을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에피쿠로스의 말과 행동은 각별히 불안했던 시대에
대한 당연한 반응이었다. 이른바 격동의 시대에는
숨어서 사는 것이 특별한 매력을 가졌었다. 말하자면
알렉산드로스 같은 위대한 사람들이 역사책에 그
이름을 기록하는 시대에는 에피쿠로스 같은 언제나
보잘것없는 사람들은 운이 나쁘면 두 달마다 짐을
싸들고 피난을 가야 한다. 저 유명한 알렉산드로스의
대제국이 건설되었다가 붕괴되는 동안에
에피쿠로스는, 청년기에는 사모스로부터 아테네로,
아테네로부터 코로폰으로, 코로폰으로부터 레스포스
섬의 뮈틸레네로, 그리고 뮈틸레네로부터 소아시아의
란프사코스로 전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와
같이 끊임없는 이주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쨌든
이러한 이민이 세계사가 만들어지는 현장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떨어지고 싶다는 갈망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아니다. 역시
철학자인 제논은 마케도니아 왕의 측근이었다. 이
시대는 철학가 외교관이 되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이 점에서 그의 후예, 곧
"현세의 위대한 인간에게는 길을 양보해야 한다"고
말한 2천년 후의 에피큐리언인 니체와 입장이 같았다.
  현자는 정치에 관계하거나 지배자가 될 생각은 하지
말라고 에피쿠로스는 말한다. 현자 에피쿠로스는
숨어서 행복하게 산 것이다.

     행복한 사람, 불타

  불행에 둘러싸인 불타의 여러 가지 호칭 중에
'행복한 자'라는 호칭이 있다. 무엇이 그를 행복하게
만들었는가? '구원의 지복을 즐기고' 있었을 때 그는
행복했다. 구원에는 무엇으로부터의 구원과
무엇을 위한 구원이라는 두 자기가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구원이 불타를 행복하게 만들었다. 불타는
불행으로부터 구원되고 불행으로부터 자유로워진
다음에 비로소 길이 열린 그 무엇에로 구원된 것이다.
이 사람의 소극적인 행복은 처음에는 극단적인
불행으로 채색되어 있었으나 이때를 경계로 해서 그는
적극적인 행복에 둘러싸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고뇌와 오뇌의 소멸이라는 지복의 상태를
일생 동안 지복의 감정을 갖고 즐길 수는 없다.
소크라테스도 족쇄가 다리에 파고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는 단 하루도 행복하게 지내지 못했을
것이다. 앞에서 말한 이야기를 하고 30분쯤 후에 그는 행복한
다리 따위는 까맣게 잊었을 것이다. 행복한
불타가 구원의 지복을 향수 했다면 그는 무엇인가의
부재 때문만이 아니라 무엇인가가 현재 존재하기
때문에 지복을 느꼈을 것이다.
  불타의 행복에 붙인 인도의 고유명사는 열반이다.
열반은 단지 무, 곧 모든 불행의 제거만이 아니라
동시에 확고하게 존재하는 그 무엇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인간을 구원하고 더 나아가 충일을 느끼게
하는 특별한 행복이다. 이 충일에 이르는 구원은
하루를 보내고 등불을 끌 때, 그리고 충일을 왜곡하던
하루의 배경이 사라질 때, 많은 사람들이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열반은 현세에 실존하는 자가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신비주의자들이 제가끔 다른
이름을 붙이고 있는 현세의 체험이다. 그러나
신비주의자의 체험인 열반에 신비적인 요소는 없다.
등산하는 사람은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헐떡거리면서 산정에 설 때, 갑자기 강력한 숨결이
전신을 감싼다. 이 숨결은 별이나 만년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의 몸 안을 뚫고 지나간다. 그리고
그는 구원의 지복을 누리는 것이다. 이 지복한
감정에는 눈이나 귀나 코나 그밖의 무수한 감각이
받아들이는 모든 것이 관계된다. 이러한 구원은 산에
오르지 않더라도 경험할 수 있다. 꽃피는 들에 서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언덕의 능선에 시선을 돌린다.
그러면 구원의 행복이 바람이 되어 불어오는 것이다.
위대한 신비주의자들은 구원을 위해 산정이나
꽃피는 들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행복에의
비상을 훈련에 의해 터득하고 소도구 없이 성취한다.
그들은 위대한 시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내면에 삶의
충일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대지나 여러
감각은 스스로의 행복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러한 행복을 불타는 터득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모두 코끼리를 만지고 있는 장님과
같다. 한 사람은 머리를, 또 한 사람은 코를, 또
한사람은 꼬리를 만지며 "코끼리는 이런 거다"
"아니야, 코끼리란 이런 거야"하고 싸움을 벌이는
장님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의해야 할
 것은 불타는 코끼리의 외관에 대해서는 전혀
가르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무엇이 중요한가? 코산계의 신사바나무 숲에
머물렀을 때, 불타는 나뭇잎 몇 개를 따서 들고
제자들에게 물었다.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이
나뭇잎과 이 숲 속에 있는 다른 나뭇잎과 어느 것이
많은가?" "스승이여, 스승께서 들고 계신 나뭇잎은
얼마 되지 않으므로 숲속의 나뭇잎이 더 많습니다."
"이와 마찬가지이다. 내가 알고 여러분에게 전하지
않은 것이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것보다 훨씬 많다.
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하지 않았는가? 전한다
하더라도 여러분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으며, 불성에의
전환을 촉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현세로부터의
이탈, 모든 쾌락의 망각, 덧없는 것의 소멸, 평화,
인식, 자각, 열반으로 이끌어 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전하지 않은 것이다."
  불타는 위대한 계몽가였지 결코 인생에 등을 돌린
허무주의자는 아니었다. 행복한 자 불타는 발을
물에 담그고 추위에 떨고 있는 불행한 고행자들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개구리나
거북이, 물뱀이나 악어나 그밖의 수중동물은 모두
극락으로 갈 것이다!" 이 행복한 자는 모든
자기학대를 거부했다. 그것은 학대받는 피조물을
불행으로 이끌어 갈 뿐, 열반의 행복으로 인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는 에페쿠로스의 적이 아니었다. 그는 물론
행복에의 길의 개척자는 아니었다. 그는 모든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어떻게
하면 살아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는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단순한 순간적인 환상이 아닌 절대적 자유를 누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삶을 부정하면서 동시에 영속적
행복 속에서 살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열반의
상태가 인간 일생의 상태가 될 수 있는가?
  이러한 역설은 불타가 단지 불행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과 인생을 긍정했음을 보여 준다.
그는 유럽의 어느 누구보다도 수미일관하다. 곧, 그는
불행으로부터 현세의 삶의 영역을 제외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는 자신의 정합성을
유지하기 위한 희생도 하지 않았다. 그는 행복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행복의 추구에 열중하는 사람은 불타에게서 강력한
적을 발견하지 못한다. 불타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어둠에 이름을 붙일 용기가 없었던 많은
몽상가들보다 훨씬 친절한 우정의 얼굴이다.

     불행한 여우

  '행복'이라는 말을 듣고 떫은 듯이 낯을 찡그리고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행복의 경멸자는 아니다.
  그렇긴 해도 행복을 중요시하지 않거나 나아가 이를
무시하는 사람들의 수는 상당하다. 또한 이러한
사람들이 배출되는 배경도 다양하다. 선천적인
행복불감증이라는 이상 증세가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자연이 행복을 위한 기관을 갖추지 못한
인간을 탄생시킬 가능성은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행복에 대한 냉담성은 자연의
장난이고 기형이다.
  보다 확고한 기반 위에서 이야기를 계속한다면,
우선 이러한 냉담성은 그 사회에 불고 있는 차가운
바람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진리와 정의에 대한
불감증을 일으킨 것은 자연이 아니라 실증주의라는
사상적 풍토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진리나
정의는 그 내용이 무엇보다도 역사와 함께 변화하는
전통에 좌우되는 추상명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이 행복을 어떤
사람에게는 즐거운 모든 것, 예컨대 애플파이라든가, 핀으로 찌른
나비표본이라든가, 유명인과의 교제라든가,
우표수집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포괄하는
집합명사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사상적 풍토는 행복을 진지하게 생각하는
데에는 별로 적합하지 않다. 게다가 아주 옛적부터
행복을 과소평가 하는 것이 때로는 매우 효과적임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발견을 한 것은 저 악명 높은
여우로, 그는 먹고 싶어 죽겠는데 입이 닿지 않는
포도를, 저것은 틀림없이 실 것이라고 단정해 버린
것으로 유명하다.
  그리스의 우화작가 이솝이 이야기하는 이 여우는
어느 더운 여름날, 과수원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었다. 높은 가지에 매달린 잘 익은 포도송이 아래에
이른 여우는 이 포도라면 자기의 갈증을 말끔히
가시게 할 것이라고 환성을 올렸다. 그래서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달려나가 훌쩍 뛰어올랐다. 그러나
포도에는 닿지 않았다. 여우는 여러 번 거듭해서
시도했다. 유혹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여우는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여우는 고개를 쳐들고
거만하게 코를 내밀고 점잖게 그 자리를 떠나면서
말했다. "저 포도는 틀림없이 실 거야."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여우는 어떻게 해서든지 포도를
먹고 싶었다. 그 포도가 얼마나 단지 여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여우는 이 포도를 딸 수 없었다.
너무 높은 것에 매달려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여우는 딜레마에 빠졌다. 여우는 한편으로는 포도에
닿을 수 없었고, 또 한편으로는 포도 생각을 머리
속에서 털어 버릴 수가 없었다. 이때 여우는 탈출구가
하나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탈출구란 욕망의
대상을 파괴해 버리는 것이었다.
  그 방법은 두 가지, 곧 객관적인 방법과 주관적
방법이 있다. 즉, 포도를 실제로 흔적도 없이 으깨
버리는, 적어도 먹을 수 없게 만드는 방법과 포도는
그대로 놓아두지만 자기의 상상 속에서 말에 의해
가치 없는 것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포도가 이미
존재하자 않을 때에도, 내가 그것을 시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포도는 이미 나의 마음을 끌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다시 말하면 손을 닿지 않는 포도를 으깨
버리는 행위에 악의의 기쁨, 위해를 가하는
기쁨의 가장 깊은 하나의 뿌리가 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한에서 가장 대규모의 위해는 세계를
파멸시키는 것이리라. 언제나 되풀이하여 나타나는
세계 멸망의 표상은 아마도 행복을 거부하는 세계가
멸망하기를 바라는 소망일 것이다. 현대 심리학이
상당히 주목하는 파괴 충동은 어느 정도까지는 손이
닿지 않는 포도를 파괴해 버리려는 충동이다.
  지금까지 어쩔 수 없는 체념을 충분히 보상할 만큼
만족스러운 파괴에 성공한 사람은 권좌에 있던
세계적으로 유명한 방화범들이었다. 그들만이
자기들을 만족시켜 주지 않는 세계를 불태워 버리는
것으로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었다. 만일 네가 황제로
로마를 불타오르게 했다면, 그것은 다른
방법으로는 기독교를 처리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리라. 나치스는  처음부터 그들이
직면한 상황이 절망적이라고 생각했더라도 아마
전쟁을 일으켰을 것이다.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제2의
기회는 독일이 세계를 제패하지 못할지는 모르더라도
이미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느 나라도
세계를 제패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히틀러 문학에서 볼 수 있는 세계 멸망의 풍조는
모든 것이 멸망하면 말할 것도 없이 독일인도 이미
존재하지 않겠지만 러시아나 영국, 미국 등
세계사적인 주역들도 이미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허무에 대한 쾌감이었다. 어떠한 혁명에서나 이러한
방화범들이 하나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그들에
의해 혁명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은 악의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욕망은 갖고 있더라도 스케일이 작은 사람은 자기
손이 닿지 않는 것을 헐뜯고 단 포도송이를 시다고
말함으로써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이것만으로는 별로 소용이 없다. 자기보다
행복한 이웃이 단 포도를 먹고 입맛을 다시는 모양은
누구나 매일 보는 것이다. 이럴 때에 자기는
누릴 수 없는 것이라는 관념을 변함없이 견지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개인적인 미망에 갇힌 광인은
불유쾌한 현실에 대해서는 안전하다. 그들에게는 이
현실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보다
정상적인 사람은 집단적 광기에 의해 구제된다.
집단적 광기는 신학자나 철학자가 만들어 내는 것이다.
그들만이 광기를 진리고 드높이고 경험을 확고하게
제의할 수 있었다. 그들은 필요하면 언제든지 단
포도를 신포도로 바꾸어 놓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손도 대지 않고 그들은
유혹으로부터 그 매력을 박탈하고 만족할 수 없는
인간으로부터 어쩔 수 없는 체념이라는 괴로움을
빼앗아 갔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저 포도는 시다고
말한 여우는 인류에게 최대의 선행을 베푼
자들의 대열에 끼일 수 있겠다. 이 여우는 고전적인
'행복한 한스'와 함께 역시 고전적인 '불행한
여우'로서 기념비를 세울 만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이 여우의 정체는 반드시 선행자만은
아니다. 물론 이 여우는 많은 점에서 인생의 무거운
짐을 벗겨 주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본다면
인간으로 하여금 그 비참한 상태에 적응하게
한 것이다. 분명히 이 여우는 인간으로 하여금 크고 작은 무수한
어쩔 수 없는 체념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행복과 불행에 대해서도 자신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무신경하게 만든 것이다. 이 여우는
사람들을 주어진 상황 속에 가둬 두고 동경을, 그리고
동경과 함께 모든 가능성을 축출한 것이다. 이
여우는 행복 부재의 상태를 고정시켰다. 그리고
신포도에 의해 비참한 체념의 고전적 존재가 되었다.
  사실상 가장 열광적인 행복의 적은 이 여우에게
공감하는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행복에의
동경을 축출할 결심을 한 인간은 인생에 어떠한
가능성이 있는가를 생각하는 일을 좋아하지 않는다.
행복을 생각하면 불안해지는 것이다. 행복을 생각하면
행복이 없는 일상이 멋없어지고 게다가 일년에
몇 번밖에 없는 가난한 축제마저도 시시해지는
것이다. 또한 행복을 생각하면 자신의 운명에 대해
분개하는 사람도 있다. 요컨대 행복에 대해 사색하면
사람들은 그 나름의 가난과 결핍을 상기하게 되어
세계의 평화가 교란되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갖지
못한 자와 마찬가지로 많은 가진 자들도 행복에
대해 무한한 분노를 느낀다. 행복이 스크린에 비칠
때에는 누구나 재미있게 구경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의 은밀한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결국 영화에 지나지 않고 이것은
누구나가 승낙한 약속인 것이다. 게다가 영화관 안은
어둡다. 어두우면 아무도 자기를 보지 못한다.
  진지한 인간과 행복의 관계는 비밀의 관계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사람은 행복을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자처럼
다루는 것이다.
  항상 변함이 없는 행복, 생애에 걸친 행복은 두
피안의 선취에만 있을 수 있다.
곧, 천국이든가 유토피아에만 존재할 수 있다. 탄식의
골짜기인 이 세상은 여러 가지 제도와 기구를
통과하는 오랜 행군이다. 영원한 행복, 지복 중의
지복은 하늘의 피안과 현세의 피안이라는 두 피안의
어느 쪽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의 눈으로
보아서는 인생에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종교의 창립자나 철학자는 매력적인 세계를
꾸며내기는 했으나, 이것은 가장 엄격한 형식을
갖춘 맹신에 지나지 않는다.
  개별적인 인간이 획득할 수 있는 지복은 순간적이고
매우 한정된 지복이다. 예컨대 내가
어린아이였을 때, 내 부모는 매년 우리를 북해로
데리고 갔다. 도착하자마자 나는 바닷가로 뛰어나가
지복의 감정에 사로잡혔다. 또 다른 순간적인 지복의
예를 든다면, "아이다"에서 지하실에 갇힌
사랑하는 두 사람이 부르는 마지막 듀엣을 들을
때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복 다음에는 전락(신비적
합일로부터의 전락이기도 하다)이 뒤따른다. 사랑의
예는 이 정도로 해 두자. 내가 차를 타고 가다가
헐리우드에서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을 때, 내
왼손은 가는 근육으로 간신히 붙어 있었다. 팔은
부목을 대어 버팀대 위에 올려 놓여졌다. 나에게는
마약의 일종인 판트폰이 투여되었다. 나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이때만큼 편안한 지복감을
강렬하게 느꼈을 때가 없다. 그런데 그후에 약효가
사라지는 전락의 시간이 닥쳤다. 나는 현대의 마약
상습자들도 그때의 나와 동일한 지복감을
맛보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들이 전락도 이에
앞서는 지복감에 대응하리라.
  나에게 내 인생의 경험을(애정만은 빼놓고)
요약하라고 한다면, 나는 인생에는 지복의 순간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다고 말하겠다. 보호받는 생활
속의 행복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부질없는
노력이다. 인간은 이런 데서 의미를 발견할 수는
없다. 위대한 종교의 창립자나 철학자는 가끔 인간의
행복에 보호받는 생활을 덧붙였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으며 차츰 비참한 해석을 받게
되었다. 무의미한 인생을 보낼 수는 없다고 믿는
사람은 자살하는 길밖에 없다. 무의미란 언제까지나
보호해 줄 것이 없다는 의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순간적인 행복, 지복의 한 조각으로 충분한
것이다. 인간은 보다 겸손해지는 것을 배워야 한다.

행복이라는 말은 조심성 없는 표현이다

행복이라는 말은 조심성 없는 표현이다
    이투루 쇼펜하우어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헤겔의 이성주의에
반대하여 의지의 형이상학설을 주장. 주요저서로
"의지와 이념의 세계" "도덕의 기초" 등이 있음.

  세상의 행복이라는 것은 거기에 내재하는 오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권 제49장이 분명히
파헤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금 이 문제를
차분히 생각해 보는 데 있어, 나는 나의 철학이
지향하고 있는 그런 고도의 형이상학적, 윤리학적
입장에 굳이 서려고는 생각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이
전개하려고 하는 해석은 이를테면 일종의 타협의
산물이다. 왜냐하면, 이 글은 세상의 일반적인 경험에
바탕을 두는 입장에 서 있고 이로 말미암아
생기는 잘못도 그대로 남겨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이 해석상의 가치는 제한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든 행복이라는 말은 조심성이 없는 표현이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완전한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끝없이 넓은 까닭도 있으나, 내가 이제까지 말해 온
것을 헛되이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나의 일관된
관점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모든 시대의 현자는 언제나 같은
말을 해왔고, 어리석은 자는 (그러니까 결국
모든 시대의 대다수 사람들은) 현자가 가르친 것과는
반대의 언제나 같은 행위를 해왔다. 앞으로도
역시 같은 상태가 계속될 것이다. 그리하여, 볼테르는
말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본 것과 같은
어리석고 질이 낮은 상태대로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인간의 행복,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는 우주의 모든 살아 있는 상태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은 분명히 그 사람 자신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기쁨이나 슬픔이 여기에 직접
나타난다. 즉, 가장 먼저 그 사람이 감각, 욕망,
그리고 사고의 결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반해, 그 사람의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은
단순히 간접적인 영향을 줄 뿐이다. 그러므로
외부로부터의 움직임이나 그 관계가 같은 조건이라고
해도 사람에 따라서는 각기 다른 자극을 주어,
설령 같은 환경 아래 놓여져 있더라도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직접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의 표상, 감정, 그리고 욕망의
움직임이며, 외부의 사물은 이러한 움직임이 그 사람
내부에서 일어나게 함으로써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먼저 각자가 그
세계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사람의 생각의 차이에
따라 세계는 가난하고, 답답하고, 평면적이며, 또는
풍성하고, 재미있고, 뜻깊은 것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많은 사람이 타인의 생활 가운데서
재미있어 보이는 일을 부러워하고 있지만 오히려 다른
사람이 그러한 사실을 말할 때 그 일에 얼마나 흥미를
갖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이해력이야말로
부러워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은, 기지가 뛰어난 사람이
그렇듯 흥미 있게 표현한 그와 같은 일이라 할지라도
 평면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에 의해
포착되었을 때에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세계의 한 점에
지나지 않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이 명백하게 나타나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쓰여진 괴테나
바이런의 많은 시들 안에서다. 머리가 좋지 않은
독자는 그야말로 보잘것 없는 일상적인 사건에서
그렇듯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낸 시인들의
상상력을 자신들의 것으로 하기 이전에 그들
시인들의 미적 감각을 부러워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을 것이다.
  같은 물체를 보고도 우울증에 빠져 있는 사람은
비극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흥미 있는 갈등을 느끼게
되고 점액질의 사람은 하찮은 것이라고 치부할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즉 모든 충실한 현재는 물 속의
산소와 수소처럼 아무리 양자가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을지라도 양자의 절반에서, 즉 주관과 객관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형성된다.
  객관이 되는 절반이 완전히 같다고 해도 나머지
절반인 주관이 전혀 다른 경우, 또는 주관과 객관이
전도된 그 반대의 경우에도 현실은 전혀 다른 상태로
나타나게 된다.
  객관이 되는 절반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나머지
절반인 주관의 질이 좋지 않고 평면적인 것이라면
현실은 보기 흉할 뿐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고장이라고 해도 기후 조건이 좋지 않다거나 분위기가
형편없는 암실의 반사광으로 나타내져서는 아름답다고
생각되어지지 않는 것과 같은 사정에 처해지는
것이다.
  이를 보다 분명히 구명해 보기로 하자.
  잔디로 덮여 있는 야외 무대 위에서 어떤 배우는
왕후로, 다른 배우는 고문관으로, 또 어떤 배우는
하인, 병사, 장군 등으로 출연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구분으로 외적인 구분일 뿐이다. 그 내부, 이런
현상의 중핵에는 모든 점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 즉
고생이 끊일 사이가 없는 배우가 숨어 있는
것이다.
  삶 그 자체도 이와 같다. 무대 위에서의 자위나
재산 정도의 구분을 통해 각자에게는 그 배역에
어울리는 동작, 즉 연기를 해야 하는 역할이 부여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행복이나 쾌감의 내적
구분은 이와 같은 지위나 재산 정도에 따른 구분과
일치될 수는 없다. 여기에도 고생이 끊일 날이 없는
어리석은 독백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인간의 괴로움이나 고민의 빛깔은 분명히 그
소재면에서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형식적인
면에서는, 즉 본질적인 면에서는 누구나 거의 같다.
이러한 괴로움이나 고민은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코 지위나 재산의 유무, 다시
말해서 출연하는 배우의 연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현재 갖고 있는 것, 사라져 가는
것은 모두 언제든지 직접적으로 의식의 흐름 속에
니타나는 것뿐이다. 따라서 의식의 상태가 우선
본질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 속에 펼쳐지는 갖가지 형상보다도
의식의 상태 바로 그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평면적인 의식 속에 나타나는 온갖 화려함이나 즐거움
같은 것은 불편한 감옥 속에서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의 의식보다 빈약하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에 있어서의 객관이
되는 절반은 운명의 수중에 놓여 있어 변하기 쉽다.
그러나 주관이 되는 절반은 우리 자신인 까닭에
본질적으로는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의 삶은 외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 하나의 테마에 따르는
일련의 바리에이션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개성으로부터 탈출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일단 놓여진 환경하에서는 자연현상이 그
본성대로 변경을 허용하지 않는 방법에 따라 선정한
범위 내에서 그대로 엉거주춤하고 서 있는 동물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인간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 사람의
개성에 따라 각자에게 주어지는 행복의 많고 적음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다. 특히, 사람의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울 만큼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분명히 정해져 있다.
  그 사람의 정신력이 빈약하면 외부로부터의 모든
노력, 즉 인류나 행운이 그 사람을 위해 행해 온
모든 노력으로도 그 사람에게 평면적인 즐거움이나
쾌감 이상의 것을 안겨 줄 수 없다.
  그 사람은 감각적인 기쁨이나 친밀하고 화기애애한
가정에서의 생활, 수준이 낮은 사교활동이나 속된
여자에 만족 할 수밖에 없다. 흔히 말하는 교양을
지니는 것도 전체적으로 볼 때 사람이 자리잡고 있는
범위를 다소 확대할 수 있다 해도, 그렇게 눈에 띄게
할 수는 없는 것처럼 외부에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장 고상하고 다양하며 거기에다 오래
지속되는 것은 정신적인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이 문제에 대하여
그릇된 생각을 갖게 마련인데 그것도 그 무렵의
정신력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생각해 보아도 우리가 누리고 있는 행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개성에 의존하고 있는가가 분명해진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 또는 다른 사람의 눈에 투영되는 우리의
모습에 의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운명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자기의
내부에, 비록 그것이 무형의 것이라 해도 재산을
지니고
있는 이상 우리는 운명에 의지하여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이에 비하여 어리석은 인간은
언제까지나 어리석을 인간이고, 평면적이고 우둔한
인간은 언제까지나 그대로일 뿐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행복이나 즐거움에 있어서도
주관적인 것일 객관적인 것보다 훨씬 본질적인
것임은 '굶주림이 가장 좋은 요리인이다'라고 하는
격언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노인이 젊은이가
찬미하는 여신상을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하여, 천재나 성자의 생활 방법을 터득하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확충되고 있다.
  특히, 건강하다는 것은 모든 외적 가치를 훨씬 뛰어
넘는 의의가 있다. 때문에 건강한 거지가 병든
왕보다 행복할 것이다. 완전한 건강과 신체 조직의
컨디션 조절로써 생긴 차분하고 명랑한 성격,
사물의 내부에까지 침투하여 이것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오성, 절도 있는 부드러운 의지, 바른 양심
등은 어떤 지위나 재산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값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 자신만의 것, 즉 그 사람이
고독할 때 아무도 그 사람에게 무엇을 주거나 또는
그 사람으로부터 빼앗을 수 없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자기의 소유물이나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투영되는가 하는 것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 매우 고독한 처지에
놓이더라도 자기의 정신이나 상상력을 상대로 하여
이를 이겨낼 수 있는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설령 사교다,
연극이나 영화감상이다, 여행이다 해서 연거푸
어떤 변화를 추구해도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는
무료함을 내부로부터 몰아낼 수가 없다.
  선량하고 절도가 있고, 거기에다가 부드러운 성격을
지닌 사람은 불우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이를
극복할 수 있으나, 탐욕스럽고 질투심이 강하고
악의에 찬 사람은 제 아무리 재산이 많다고 해도 이에
만족하지 못한다.
  하물며, 이상할 정도로 정적이고 품위 있는 개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는 보통 사람이 정신없이
빠져들고 있는 즐거움의 거의 모두가 필요하지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귀찮고 신경질 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사치스러운 물건이 잘
팔리는 것을 보고 '내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그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소'라고 말했다.
  우리가 행복을 누리는 데 있어서 인격은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조건이며 본질적인 것이다. 그 까닭은,
인격은 언제나 모든 것에 우선해서 존재하며 또한
모든 상황에 걸쳐서 활동하며 나아가서 인격은 다른
두 항목의 재화, 즉 지위나 재산처럼 운명에 좌우되지
않으며 우리로부터 빼앗아 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인격의 가치는 다른 두 항목의 가치가 다분히
상대적인 것과는 달리 절대적이다.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볼 때 사람은 외부에서 어떤 힘이 작용되기는
힘든 존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인격의 범위 내에서 되도록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인격에 상응하는 노력을 쌓아
자기의 인격이 포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자신을
단련하여 다른 모든 조치를 가급적 피하며, 이것이라면
인격에 어울리는 정도의 지위, 직업 및 생활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헤라클레스가 무색할 정도로 근육이 발달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만일 이 사람의 외부의 어떤 사정에
의해 자질구레한 데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수공업에
종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되거나, 이 사람으로서는
전혀 엉뚱한 도저히 무리라고 생각되는 고상한 연구나
두뇌 노동에 쫓겨 이 사람이 본디 지니고 있는
강인한 체력이나 완력을 쓸 수 없게 된다면, 이
사람은 평생 동안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이상으로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는 지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찮은 일에 종사하거나, 그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육체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까닭에
지성을 연마하는 것과 그것을 이용하는 것도
불가능한 그런 사람은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특히 젊은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사고의
오류, 다시 말해서 사실은 그렇지도 않으면서도
자신은 모든 면에 있어서 강하다고 생각하는 미망의
위험은 피해야 할 것이다.
  재산의 첫째 항목이 다른 두 항목보다도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에 입각해서 생각해 볼 때
재산을 늘리는 것 이상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그러나 평범한 의미에서의 재산도 그것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면 오히려 우리의 행복을 그르치는
결과를 낳는다. 때문에 돈이 많은 사람은 자기를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정신적인 일에 종사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을
단련시켜 오지 않았으며, 따라서 정신을 단련시키는
일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두말 할 것도 없이 현실적인 자연스러운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이상의 재산의 축적은 우리의
쾌감을 상승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지 못한다. 오히려
지나친 재산의 축적은 비대해진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는 각종 배려에
의해 쾌감의 상승 작용이 방해받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건전한 정신의 함양에
힘을 기울이기보다는 재산을 증식시키는 데 더
열심이다. 실제로는 정신을 함양하는 것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즉 소유물 보다 훨씬 더 행복에
기여하고 있건만...
  많은 사람들이 마치 개미처럼 부지런히 움직이며,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재산을 늘리기 위해 쉬지
않고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자기가
안을 수 있는 가시권내의 좁은 범위를 뛰어넘어
사물을 바르게 볼 수 없는 그들의 정신은 공허하며,
이는 결국 다른 사물 모두에 대해서도 감동할 수
없게 만든다. 인간의 최대의 낙인 정신적인 즐거움을
그들은 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감추어져 있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이
행복을 누리는 데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란
보편적으로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분량에 지나지
않는다는, 단순한 그러한 이유에서 괴로움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사람의 대부분도 괴로움과의
싸움을 현재에도 하고 있는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역시
불행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오락이라고 하는 사냥감을 향해 공통의
사냥이 행해지게 되는데, 그것도 우선은 여러 가지
종류의 놀이나 감각적 즐거움에서 비롯되어 드디어는
주색의 탐닉에 이르게 된다.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해온 좋은 가문의
아들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짧은 기간 동안에 탕진하고 만다. 이러한
낭비의 원인은 정신적인 빈곤과 공허함에서
생기는 것이다.
  외면적으로는 풍요로우나 내면적으로는 빈곤한 채
세상에 보내어져, 외부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외면적인 풍요로써 내면적인 빈곤을
메꾸어 가려는 헛수고를 계속하는 청년들은, 마치
젊은 여성의 분비물로 스테미너를 강하게 하려고
눈물겨운 수고를 하고 있는 노인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면 결국 내면적인 빈곤이
외면적인 빈곤마저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나는 젊었을 때 어쩌다가 낡고 오래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의 내용 가운데 '많이 웃는
사람은 행복하고 많이 우는 사람은 불행하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 말은 그 표현이 너무 평범하고
속되어서 언뜻 생각하면 우리에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렇지만, 나는 평범하면서도 속된 그
표현 속에 진리를 꿰뚫어보는 예지가 번뜩이고 있는
이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의식의 내부에 명랑함이 들어와
자리잡을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두어야
한다. 명랑함은 마음의 문에 빗장을 걸어두고 있을
때에는 절대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러 가지 많은 생각 때문에 고민하는
것으로 향상을 기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기 힘든 반면, 명랑함은 보다
확실하고 직접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수확이다.
명랑함만이 말하자면 행복의 진성화폐이고 그밖의
것은 단순한 은행권에 지나지 않는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 까닭은, 명랑함만이 지금 이 순간에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랑함은 그 본질에 있어 두 가지 무한의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불가분의 '현재'라고 하는
형식 가운데에 놓여진 것으로서는 가장 값진
보물이다.
  나무 같은 것이 부쩍부쩍 자라기 위해서는 바람에
흔들린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현상을 가장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는 라틴어의 다음 법칙은 매우
적절하다. '모든 운동은 그것이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그만큼 운동량은 더욱 많아진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행복이 그때그때의 기분과
건강상태에 따라 얼마나 좌우되느냐 하는 것은 같은
외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혹은 같은
사건에 접하게 되더라도 건강하고 평온한 때 받는
인상과 질병 때문에 마음이 우울할 때는 인상을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가 있다.
  사물이 개관적인 기준에 따라 실제로는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 우리의
판단 기준, 즉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사물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도
하고 또는 불행하게도 한다. 에픽테토스는 이것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견해가
사람으로 하여금 망설이게 하는 것이다.' 우울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열 가지 계획 중 아홉 가지가
성공했다고 해도 성공한 쪽을 기뻐하지 않고, 실패한
한 가지 사실에 마음을 기울여 우울한 기분에 사로
잡힌다. 그런데 그 반대로 한 가지가 성공하고
나머지 아홉 가지가 실패했을 경우 명랑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한 가지만이라도 성공한
사실로써 마음을 위로하고 명랑한 마음을 가지려고
한다.
  그러나 우울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람, 즉
음울하고 화를 잘내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명랑하고 고민이 적은 사람에 비해, 분명히 머리
속으로 상상하고 있는 재난이나 괴로움에 직면했을
때는 참을성이 부족하겠지만 실제의 재난이나 괴로움
따위에 직면해서는 잘 견디어낼 수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언제나 최악의 사태를 두려워하여 그 언젠가
닥쳐올지도 모르는 사태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는 까닭에, 사물을 언제나 긍정적으로
보고 밝은 전망만 세우고 있는 사람에 비해 오류를
범하는 일이 적기 때문이다.

  어림잡아 행복의 두 가지 적은 괴로움과 무료함일
것이다. 이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우리가 두 적 가운데 한 쪽을 멀리 하는 일에
성공한다면 다른 한 쪽의 적에게도 다가가는 그 반대의
노력은 올바르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은 이 양자 사이에서 강약의
차이는 있겠지만 진동하고 있는 상태와 다름없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두 적은 항상 대치해 있어 한
쪽이 외적 또는 객관적이면 다른 쪽은 내적 또는
주관적이라고 하는 대립과 항쟁의 맞물림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외적으로는 재난과 결핍이 고통을 낳으며, 이에
비해 안정과 풍요로움이 무료를 낳는다. 이에 따라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 재난, 즉 고통과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는 데 대해 부유층 사람들은 언제나
거기에다가 실제로 그들의 투쟁의 대상, 즉 무료함을
자기들의 생활권 밖으로 몰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편 내적 또는 주관적 항쟁은 개개의 인간에게
있어서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에 대한 감수성이
대립관계를 이루고, 거기에다가 그 감수성은 그
사람의 정신력으로써 정해진다는 사실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즉 정신이 맑지 못한 사람은 감수성이 예민하지
못하여 외적인 자극에 둔감하며, 이런 사람은
각양각색의 괴로움이나 슬픔에 대한 반응도 약하다.
정신이 맑지 못하면 그것을 반증이나 하듯이
사람들의 얼굴에 그 내면이 공허하다는 징후가 뚜렷이
나타난다.
  정신세계가 풍요로운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고통이 없고, 궁색하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되도록이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난 받지 않는 생활을 추구한다.
  어디에도 매어 있지 않는 여가는, 그것을 분명히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는 한 인간생활의 꽃이다.
오히려 과일이라고 하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자기 자신의 내부에
어떤 올바른 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짐스러워 숨이
막힐 정도로 권태로워 하고 있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일 뿐이며, 이들에게는
자유로운 여가도 결국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적은 양의 수입으로, 또는
수입 없이 견딜 수 있는 나라가 가장 살기 좋은
나라이듯이 자기의 내부에 재산을 충분히 저축하여
자기를 지키기 위하여 외부로부터 매우 적은 양의
유입 밖에는 필요로 하지 않는, 아니면 전혀 아무것도
들여오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 까닭은 외부로부터 어떤 물건을 받아들이려면
비용도 많이 들 뿐만 아니라 그에 속박될 수도 있는
데다가 싫다는 감정에 사로잡힐 위험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유입된 물건은
결국에 있어 자기 고장의 산물에 대한 일시적인
애용품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나 외부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별로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매우 좁다. 결국 누구나 자기 한 사람에 국한시킬
수밖에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 어떤 사람이
혼자 있느냐 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더 이상 장난할 시간이 없다

더 이상 장난할 시간이 없다
    휴 프레이더
  인간성 개발에 초점을 둔 책들로 유명한 미국의
베스트셀러 작가. 주요 저서로 "나에게 쓰는 편지"
"나는 대지를 만지고, 대지는 나를 만지고" "사랑과
용기에 대하여" 등이 있음.

  행복해지기는 쉽다. 어려운 것은 우리 자신에게서
불행을 떠나 보내는 일이다. 우리는 모든 걸 다
쉽게 포기해도 불행만은 포기하지 못한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이성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행복을
등지는 것은 얼핏 보면 아주 당연한 일인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불행에 관심을 기울이고, 더
구체적으로 불행을 지속시키는 생각의 근거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에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불행을
정당화하려는 이유들은 어떤 것일까?
  이 세상을 행복한 마음으로 살 수 있다는 생각은
현실적인 것일까? 이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한
장소가 아니라는 사실은 외면 할 수 없는 진리로 보인다.
지금까지 당신은 아마도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려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지내 왔을 것이다.
어떤 경우이든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면
그것은 득이 되지 않고, 우리가 추구하던 일도 결국 해가
된다는 것이 세상 사는 이치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기대하고 추구하는 일을 그만
둘 수는 없으리라. 불행한 결과를 가져오는
것들을 생각해 보자. 헛된 꿈, 크고 작은 부, 명예, 권력,
맛있는 음식, 강렬한 쾌락...
그 무엇이든 상관없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
결과는 한결같이 비참한 것이다.
  그러면 욕심 없이 천천히 꾸준하게 노력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노력의 결실은, 비록
끈기 있게 애써서 얻었다 해도 결국 빼앗기고 만다는 것이
세상의 대체적인 이치이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었다. 그들 인생의
종착지에는 한결같이 상실과 외로움, 고통스런 죽음이
기다릴 뿐이라는 인식이 오랫동안 전해 내려 왔다. 어떻게
해야만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종말에서
진정으로 벗어날 수 있겠는가? 혹시 당신의 인생도 그런
종말을 맞으리라 예측하고 있진 않은가?
  또한 우리를 죽음으로 이끄는 긴 세월은 어떤가? 그 긴
시간들이 어김없이 우리를 이끌어 가는 마지막
장소는 과연 가치 있는 곳일까? 나이가 몇이든 여기 이
세상에서 보는 것 가운데 믿을 만한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오늘 유치원의 놀이터에서 누군가가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해도 내일이면
다른 아이와 놀게 될 것이다. 부모들은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자식들을 돌보지 않고, 또 아이들이
자라서 어른이 되면 이번에는 자신의 부모를 버린다. 삶의
모든 여정에서 온갖 형태로 강자는 약자를
먹이로 삼는다. 자연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답지만 모든
자연 현상은 자기 아닌 다른 것의 희생으로
이어져 간다. 물론 모든 현상이 절대적으로 이러한
법칙대로 움직이는 건 아니다. 그러나 몇몇
예외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세계의 본질임엔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행복해질 수 없는 이유는
세계의 이런 본질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자연히
떠오른다. 확실히 그런 것 같다. 그렇지 않은가?
하지만 만일 그밖의 다른 길이 있다고 우리가 그 다른 길을
택하는 것은 과연 '정당한' 일일까?
  하루에도 수천 번씩 행복을 희구하는 우리의 마음은
이보다 훨씬 더 강한, 행복해질까 두려워하는
마음 때문에 스러져 버린다. 아주 작은 활기조차 조금
오래 지속되었다 싶으면 두려움 때문에 제지하게
된다. 우리가 완전한 자유를 만끽하고, 샤워하며 노래
부르고, 남에게 들릴 만큼 큰 소리로 휘파람을
불게 되면 곧바로 해묵은 걱정이 스멀스멀 우리 속으로
스며든다. 우리의 변덕스러운 기분은 금세
의심에 사로잡혀 버린다.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도움을 받는다는 확신도 없이 우리는 다시
심각한 마음 상태로 되돌아가야 한다.
  행복은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건강, 자식들과 그밖의
인생의 모든 측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이다. 나는 개개인의 마음 상태가 전체에게 끼치는
영향을 알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행복의 역할에 대한 내 의견을 알리는 것이다.
만일 행복에 관한 책을 찾아 공부하느라 애쓰는
독자가 있다면, 또 행복에 대해 생각할 형편이 아니어서
그런 책 얘기를 너무 불공평하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나 개인이 느끼고 있는 행복에
대한 생각이 그런 이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리라 생각한다. 나는 그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라고 권하고 싶다. 마음이야말로 우리가
해답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공부 방법을 찾아 고심하는
것이 고심하지 않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낫다는 것이다.
  행복한 생각의 효과를 진정으로 아는 이는 누구인가?
행복은 열린 마음에 다가서서 남몰래 용기를
불어넣고 희망을 준다는 말이 사실일까? 나는 그렇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내가 진정으로 사랑할 때
나와 같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어김없이 느낄 수 있고, 돈독해지는 가족
혹은 동료의식 속에서 진정한 힘은 부드러움이며, 그것이
담고 있는 메시지란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 속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나는
행복해지는 것이 좋을 뿐 아니라 정당하다고
믿는다. 나는 경험을 통해서 나 개인이 상냥해질 수 있는
오직 한 가지 길은 바로 내가 행복해지는
것임을 안다.

     지속적인 행복

  영원한 행복은 없다는 믿음을 아주 폭넓고 깊게
뿌리 박혀 있어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생은 냉혹한
현실일 뿐이다. 어떤 성스러운 종교학자가 나타난 영원한
행복을 설교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믿지 않고
오히려 그를 사기꾼이나 허풍선이라고 생각한다. 왜 안
그러겠는가? 단 하루라도 '완전한 평화'를
체험해 본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일생 동안 완벽한
평화를 구가한다는 것은 엉터리이고 어리석은
일로 보인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지속적으로 행복해지는 일은
바라지도 않는다고들 한다. 하지만 하고 싶은 것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재미있는 의문이
떠오른다. 이 글을 적당히 학구적인 분위기와
권위를 가지고 시작하기 위해 우선 행복의 정의를 내리는
편이 낫겠다.
  미리엄 웹스터 Memiam--Webster 사전에는 행복의
지속성에 대해 이렇게 쓰려 있다. '상대적인
영원함으로 특징지어지는 평안한 상태... 그리고 이
상태를 지속시키려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바람이
특징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의 정의는 행복이 발생하는
'장소'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마음이
만족스러운 상태...'
  사전이란 일상적으로 단어가 사용되는 용례를 알려줄
뿐이지만, 내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행운, 번성과 그밖의 세속적인 성공의 여러
형태를 행복의 근거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어의
용법뿐만 아니라 어떻게 이 '마음의 만족'이 생기고
사라지는지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도 제시한다.
우리가 지속시키려는 흡족한 마음의 상태는 '아름다운'
느낌이지만 이것은 외부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는가 하는 데 달려 있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아침인가! 얼마나 멋진 하루인가!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 있구나."
  그러나 우리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우리는 더 좋은 차를 갖고
싶어한다. 하지만 더 좋은 차로 느껴지는 흡족함은 얼마나
오래 갈까? 더 좋은 집도 갖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 집이 언제까지 그렇게 좋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행복의 지속을 바라는 자연스런 소망'을
가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행복은 지속되지 않는다고
믿는 사실이 신기하지 않은가? 정신을 차리고
상황을 살펴보면 지속되어 온 행복은 결국 불행의 주제가
되고 만다.
  '버팔로 모는 목동이 롤러 스케이트를 탈 수는 없다.
하지만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행복해 질 수
있다'는 노래 가사가 있다. 중요한 것은 행복해지려는
마음이다.

     행복의 근거

  행복을 자아내는 마음의 상태는 하루를 어수선하게
만드는 쓸데없는 일들을 가볍고 수월하게
스쳐지나갈 줄 아는 마음이다. 그것은 산들바람처럼 모든
것에 새롭게 생기를 불어넣고 아무것도
방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행복한 존재 그 자체이다. 이런
마음은 타인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그 무엇을
갖고 있다. 이에 반대되는 마음 상태란 끊임없이 온갖
일들에 얽히고 설켜 하루의 일을 엉망으로
만드는 마음이다. 불행한 마음은 무절제하고 흥분을
잘하며 무엇보다도 겁에 질려 있다. 마음의
일관성도 갖지 못하고, 내면의 평온한 지향점도 찾지
못하며 무슨 문제라도 일어나면 금방 나쁜 예감에
사로잡힌다.
  마음은 충분히 다스릴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의 생각은 너무 혼란스럽고 상처받기 쉬워서
하루 내내 두꺼운 막으로 가리워진 상태로 사람들을
바라보며 지낸다. 그래서 우리는 사림들의 마음
속에 담겨 있는 진실한 생각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꼭 알아야 할 것은 마음의
본성이다. 예를 들어 갓난아기가 어린이들은 우리를
기쁘게 한다. 이것은 우리가 마음의 문을 열고
아이들 마음 속의 순진무구함을 바라보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옳고 그름의 판단을 유보한 시선으로
아이들을 봄으로써 금방 그 순수함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가치 있는 일들이 그러하듯이 결코 성급한 마음으로는
아이들을 기를 수 없다. 먼동이 트는 새벽의
침묵 속에 조용히 아무것도 하지 않고,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 우리는 땅이 눈뜨는
소리를 듣는다. 빛과 그림자가 변해 가는 신비로운 순간을
목격한다. 이것은 조금만 성급한 마음이
되어도 놓쳐 버리기 쉬운 은밀한 기쁨이다. 서두르면
불행해진다. 당신의 마음 속에 깃든 사랑의
마음은 아주 고요하다. 이것은 신체적으로 굼뜬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평화 속에서 움직임이
없는 상태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행동의 본보기로 삼는 것은
어리석다. 아이들은 세상에 나올 때 행복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것들을 제대로 갖추고 나온 게 아니지만 어쩌면
그런 것들을 다 갖추었다고 할 수도 있다.
아이들은 우리 어른이 잃어버린 특별한 힘, 특히 정신의
힘을 가지고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아이들을 보면 지나칠 만큼 분주하고 온갖 것에 관심을
쏟으면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마음속에는 단 한 가지 목표만이 있어야 한다.
  과거에 얽매일 이유가 없는 자유로운 아이들이
통찰력은 어른들을 가르치는데, 특별한 방법을 쓰는
것은 아니고 행동으로 직접 보여 준다. 아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뚜렷한 한 가지 목적을 표현한다.
다섯 살 짜리 아이는 손가락을 이용해서 벽에 그림자로
형상을 만들지 못한다. 5개월 된 아기는 벽에
비친 그림자가 움직일 때마다 그것을 잡으려 애쓸
것이다. 하지만 두 아이 모두 손가락으로 노는 법을
안다는 것은 확실하다. 아이들은 확실히 결단력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것에 대해서 단 한 가지
결정을 내리기 때문이다. 두 아이는 다른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 이 모든 것--테이블 세팅, 손님들,
음식--을 단일한 눈을 통해 파악했다.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이 흥미로웠던 그는 즐겁게 놀 수 있는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성숙해 감에 따라 이와 반대되는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독립적이고 한정된 기능을 맡기 시작한다. 그날 저녁까지
리넨 냅킨은 단 한 가지 용도로밖에 쓰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밖에 다른 즐거움을 주진 못했다.
대부분의 어른들은 이 한계를 지운 잣대 안으로
어느새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을 가두어 버린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인 출세에 그다지 득이 되지 않는
사람들과는 친밀한 교제를 하려 하지 않는 분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인간관계란 이용하기
위해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보는
것은 상당히 불행한 일이다. 이에 반해 어린
아이의 시선으로는 사람들의 신체적 결함마저도 상당한
흥미와 기쁨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아이들은
아주 특별한 관심을 보이거나 또는 아주 무심하다. 이것은
불행에 대한 판단에서 비롯된 태도가
아니다. 나는 최근에 네 살 짜리 아이들 몇 명을 보았다.
그애들은 수영장에서 놀고 있었는데 보통은
자기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렸겠으나 내가 본 그날은 심한
다운증후군을 앓는 어른들 주위만 맴돌았다.
이 네 살바기 아이들은 지금까지 한 번도 다운증후군을
앓는 사람들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이
노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나중에 그 애들이 재잘대는
소리를 듣고서 나는 그들이 어른들의
고통스러운 질병을 본 것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편견이 없고 객관적이기
때문에 수영장에 온 그들과 다른 사람들과의 다른 점을
아주 정확하게 보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들의
얘기에는 대꾸를 하거나 비난할 만큼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이들은 아주 재미있게 놀았고,
아이들의 관심이란 오직 그 재미라는 것뿐이었다.

     생각을 만드는 현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다. 다만 생각이 그렇게 만들
뿐이다.' 이 얼마나 위안이 되는 말인가?
이 말은 우리가 상황을 지배할 힘이 없다는 것이 분명하다
해도 생각만큼은 완벽하게 컨트롤 할 수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행복의 열쇠는 마음을 좋은
생각으로 채운다고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자신의 모든 것이 훌륭하며 일어나는 일마다 축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부질없다. 이것은 엄격하고
공정한 판단에 위배되는 것이 분명하므로 내면의 혼란만
일으킬 뿐이다.
  생각이 그것을 그렇게 만든다. 생각이 세상에 옷을
입히는 것이다. 정작 세상은 의외로 우리의
행복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에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세상은 우리에게 영향을 주게
되는 것이다.
  조단은 태어난 지 다섯 달이 되자 유모차에 누워 있는
것보다 앉아 있는 걸 더 좋아했다. 그래서
나는 그 애를 보행기 위에 앉혀 놓았다. 물론 아이의
다리는 걷기에는 아직 약했다. 어느날 아내와
내가 부엌에 들어가 아이를 돌보지 못했을 때 친구가
현관에서 집안으로 막 들어오다 목욕탕에서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다. 다행스럽게도
그녀가 곧바로 목욕탕으로 달려가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조단이 욕조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서
욕조의 바닥에서 천장까지 샅샅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살피는 걸 발견했다. 아마 조단은 바로 그
순간 걷기 시작하기로 마음먹었을 것이다.
목욕탕의 욕조 속으로 그녀는 곧장 뛰어들어갔다. 말할
필요도 없이 그녀는 물 아래 가라앉은 아이를
보자 기겁을 했다. 그녀는 아이를 끌어내고, 우리를
소리쳐 부르고, 우리가 아이의 젖은 몸을 닦아줄
동안 큰 소리로 야단을 쳤다. 나는 아이가 조금도 당황한
기색이 아니라는 걸 알아챘다. 우리는 조단이
울음을 터뜨릴 것이라 예상했으나 그는 끝내 울지
않았다. 게다가 보행기에 다시 옮겨 놓자 그는 재빨리
욕조 쪽으로 나아갔다. 우리는 황급히 안전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그 아이의 생각 속엔 수영을 하지
못하면서 물 속에 눕는 것은 '나쁘다'라는 선입견이
심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아이는 얼마 전까지
엄마의 자궁 속에 잠겨 있던 기억을 더듬으며 물 속에 눕는
느낌이 '좋은' 것이라는 것을 알았음이
분명하다.

  아주 간단하게, 당신이 화를 내고 있는 동안은 행복해질
틈이 없다. 그러나  그 당시의 심정은
분노야말로 아주 중요하다고 믿는 상태이다. 분노가
우리의 가장 자연스런, 그리고 필요한 감정이기
때문에 셀 수 없이 많은 형태로 '화를 내는 일은
중요하다'는 단언이 이루어지는 걸 들어 왔다. 이
익숙해진 생각에 의문을 품지 않는 한 결코 하루 종일
평화롭게 보내는 일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화를 낼 합당한 이유는 언제나 마음
속에 떠오르는 법이므로 평화로워진다는 것은
부질없는 희망처럼 보일 것이다.
  분노는 절대로 마음의 가장 밑바닥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위선적인 행위 없이도 충분히
사라질 수 있다. 당신이 진심으로 원하는 바를 알게 되면
마음속에 자리한 가짜 열정과 해묵은
비통함의 흔적까지 말끔히 없애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미리 그 기초작업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처럼 그들의 진실된 감정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좀처럼 그들의
진실된 감정이 깃든 자리에 다가갈 수가 없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묻는 것으로
가능해진다.
  첫번째 단계는 욕을 퍼붓는 것보다는 혼란스러운
느낌일 때가 훨씬 좋다. 당신의 몸이 나와 타인을
공격하는 욕망을 드러내도록 방관하지 말라. 당신이
침울해진 이유가 다른 사람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을 그만두게 되면 당신은 분명히 소중한 시간을 아낄
수 있다. 그러나 물론 그것 하나만으로
겉으로 드러나는 감정을 없애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아주 작은 분노라도 일어나면 당신은 즉시
마음을 바꾸어 이 분노를 가만히 들여다보아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신은 계속해서 분노야말로
자신의 진실된 느낌이라고 믿게 될 것이다.
  분노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당신은 그것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알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마음속에 감춰져 있는 위대하고 올바른
힘을 제대로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행복이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생각에 쉽게
동의한다. 그러면서도 전혀 그렇게 살지는 못한다.
그 근거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드러나는 태도 속에서
분명히 찾을 수 있다. 우리는 그 증거를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행복이 마음의 문제라는 사실을 자꾸만
거부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사소하고
진부한 사실 때문에 정말 가치 있고 소중한 것들을 잃어
버리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한다. 그래서 행복을
저지하는 데 전력투구한다.
  모든 비평이 비평가를 공격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진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 아닌 다른 사람들이 보잘것
없게 보여야 자신이 더 훌륭하고 근사해 보인다고
믿는다. 자신의 결정적인 이미지를 자신에게서 찾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늘 자신을 버리고, 우리가 대상으로
삼는 사람에게 판단의 잣대를 들이댐으로써
그 비교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형성하려 한다.
마음속에서 이러한 생각을 없애 버리는 일은
가능하다. 만일 타인과 비교해 자신을 평가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언제나 만족할 수 없다.
왜냐하면 스스로의 의견을 끊임없는 판단을 통해서
지속시킨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어느날
문득 우리가 타인을 공격하는 일을 잊어버리고 모든 이가
선량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상당히 오랫동안 우리는 조금이라도 함부로 다루어지면
상처받아 왔다는 생각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우리는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을 모두 들추어낼
수 있고 그들이 한 일, 그들이 게을리 한 일을
샅샅이 기억해낼 수 있다. 우리가 강조하려고 결정한
행위의 규칙이 다른 이에게보다 자신에게 더
쉬운 것이면 우리는 타인에게 겨누었던 공격의 총구를
돌려 우리 자신에게 향하도록 규칙 자체를
고친다. 이것을 우리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 이라
부르고, 자기 외의 다른 이는 이보다 더 큰
잘못이 있다는 식으로 이 규칙을 자세히 살피게 된다.
사고방식의 전도로 공격해야 할 대상이 누가
되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러나 불행한 경우 공격적인
생각은 한 가지의 분명한 요인이 된다.
비난의 표적이 우리 자신이든 타인이든 어떤 사물이든
상황이든 그 결과는 정신적인 상처로 남는다.
  모든 생각은 돌고 돈다. 우리가 아무리 자책에서
벗어나려 해도 우리의 죄를 믿는 한 여전히 우리
마음에는 죄책감이 석연찮게 남아 있다. 내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죄책감은 자기 부정을
무의식적으로 행동화함으로써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에게 우리가 아는 잘못을 알려준다고 해도
부정적인 생각은 수그러들지 않는다. 우리의 판단력은
환기시키면서 얻어지는 정의감과 약간의 신체적
마비증상을 제외하면 무력감일 뿐이다. 그 무력감은 이제
문제들이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서 우리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다른 이의 마음에까지
확산되었다는 느낌이다. 우리의 불행한 마음속으로
더 강한 자의식이 꾸역꾸역 밀려든다. 우리가 비난의 말을
입밖에 냄으로써 그 부정적인 인식을
꺼낸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바깥으로
표출한다고 해서 마음속의 부담감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럴수록 그것은 더욱 강조되고 강화되어
마음속에 더 오래 남을 것이고, 이제는 그것으로
슬픔이 하나 더 느는 것이며, 슬픔과 짝을 이뤄
배신감까지 뒤따르게 된다. 우리는 비록 미약할지라도
다른 사람은 공격해 왔다. 그 사람 또한 우리처럼 열심히
노력했을 텐데 말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타인에 대한 적개심 없이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고 솔직해질 수 있다. 베개를
던지거나 소리를 지르고, 공기가 맑은 곳에서 산책하거나
운동을 함으로써 몸의 긴장을 풀고 머릿속을
말끔하게 하는 것이 내부의 감정을 다스리는 방법일 수도
있다. 행동으로 옮기는 이러한 방법은 아무런
해가 없다. 왜냐하면 이런 방법은 다른 사람들을 동요시켜
문제를 복잡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이리저리 얽히게 만드는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세워야 할 규칙이란 '비난하는 생각을 마음에
남겨두지 말아라, 즉 그 싹을 뽑고 마음에 난
상처를 한시바삐 어루만져주라'는 것이다. 이것은
누구에게도 아무런 손해를 입히지 않는다. 우리가
자신이나 타인을 진심으로 용서하는 마음이 되면
마음속에 암초처럼 남아 있던 불안들이 떠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지금 당장 실행하는 것이 좋다. 이유는
간단하다. 당신이 타인의 약점에 너무 오래
집착하다 보면 당신의 마음은 불행한 생각으로 점점 더
깊게 물들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응용하라고 제안한 것 중에 가장 어려운
부분은 '나쁜 생각을 자아내는 싹을 자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 제안을 실행하는 절차가 복잡하기
때문이 아니라 의외로 비난하는 버릇이 우리
마음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탓이다. 나는 언젠가 아주
열심히 일하는 친구를 살펴본 적이 있다.
그녀는 몇 분이나 몇 시간 동안이 아니라 몇 달에 걸쳐서
지나칠 만큼 일을 해댔다. 일에 대한 지나친
열중은 그녀가 자신의 부모--수년 전에 돌아가시긴
했으나--를 조금씩 용서하게 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마흔이 되었을 즈음 그녀는 자신의 어린시절의
비통한 추억이 너무나 마음 속 깊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과 거친 관계를, 그것도 오래
지속시키지도 못하는 관계를 맺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그후로 과거의 기억에 비추어
사람들을 판단하는 습관을 버리고 아버지의
행동을 기준으로 삼아 남자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평가하는 버릇을 그만두게 되었다.
  그녀는 일일 프로그램을 실행했다. 늘 공책을 가지고
다니면서 분노가 표출될 때의 모든 증세를
일일이 적는 것이었다--좌절감, 비난, 분노, 악의
등등--그녀는 하루를 마감하면서 자신이
적어 내려간 목록을 읽고 하나하나 마음으로 들여다보면서
자신을 화나게 했던 사람이나 상황에 대한
진정한 느낌이 어떤 것이었나 되새겨 보았다. 이렇게
6-7개월을 실행하자 그녀 내면에 아주 유쾌한
변화가 오기 시작했음을 물론, 난생 처음으로 새롭고 오래
지속될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친구처럼 꾸준히 노력하려 하지
않는다. 변화가 즉각적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다시 예전의 방식으로 도망치듯 되돌아가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이 친구는 자신 비통함의 찌꺼기를
계속 마음에 묻고 다니는 한, 조금이라도 타인을 향한
악의가 남아 있는 한, 인생의 기쁨이란 무너지기
쉬운 불안한 것이라는 인식을 하게 된 것이다.
  새로운 인간관계를 시작하자마자 그녀는 해묵은 분노가
아직도 조금은 남아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곧장 자신이 진실로 열망하는 것과
문득문득 나타나는 감정을 비교해 보았다. 그녀는
자신은 물론 그 누구에게도 해가 될 생각을 가슴속에
하나도 품지 않게 될 때까지 이 방법을
되풀이했다.
  우리는 '잔인할 만큼' 정직해야 하며 심지어 신중히
거론되어야 할 것마저도 즉시 말해 버려 자신의
숨기고 싶은 비밀까지도 들추어내야 한다. 이에 반해
단순한 진실 속에 살게 되면 이렇게 매일매일
던지는 질문들이 자신의 포용성과 사랑을 구하는 것에
국한되고, 그럼으로써 우리는 느낀 것을
곧이곧대로 말로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부정직하다는
것을 마음으로 알게 된다.
  선택은 우리가 한다. 우리는 자신의 이해력과 선의를
살펴볼 수 있고 사랑의 마음으로 반응할 수도
있으며, 익숙한 자의식이 들추어내는 '잔인한 진실'을
대답할 수도 있다. 다수가 하는 선택에는 실수란
없다. 그리고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약간의 불안감과
걱정, 수치심, 오해를 느끼면서도 예기치 않은
인간관계에서 탈없이 견디는 이유가 된다.
  우리의 진실된 시선은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아름답게
물들이고 우리의 전 생애를 쉽사리 평화로운
분위기로 변화시킬 수 있다. 비통에 젖어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변했다는 것은 너무나 놀라운
일이다. 우리가 아침마다 하는 허드렛일, 직업, 벽에 못
박는 일, 아이 돌보기, 저녁에 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은 연민과 기대의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고 마지못해 하는 힘겨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에서 인생의 고결한 면이
드러난다. 간단한 사실은, 부드러운 시선이
우리가 걸어가야 할 세상을 더욱 부드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책 가운데 하나인 중국의
"역경"에서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고요함은
산처럼 크다.' 자신과 타인을 안정된 마음으로 좋은 점만
보려고 노력하면 이제껏 느꼈던 부정적인
면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를 알게 된다. 그것은 태양이
떠오르면 가뭇없이 자취를 감추는 한갖 그늘에
불과하다.

     지금 이 순간의 행복

  우리의 경험 속에 산재한 많은 단정하는 버릇, 동요,
쓸데없는 정신적인 흔들림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지나친 관심에서 초래된다. 평온해지기 위해 필요한
또 하나의 단어는 '현재'이다. 오직 현재만이
우리가 단단한 지반 위에 설 수 있도록 지켜 준다. 동시에
현재를 중시함으로써 더욱 폭넓은 시야를
얻게 된다. 즉 우리의 근심, 걱정을 사라지게 하는 곳도
바로 현재라는 공간이다. 어떤 사람이
일생 동안 어떤 것을 외면하며 보냈다면 그에겐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고 단정하기 쉽다. 이것은
뿌리치기 힘든 유혹이다. 그러나 당신이 설 자리가 아무리
오래된 전통 깊은 장소라 하더라도 그곳에
머무는 한 괴로울 것이다.
  현재에 대한 두려움은 우리가 멈춰서서 바라보는 것을
망설이는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이러한
태도로 우리는 늘 기회가 오면 주춤거리고, 반대로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의 것은 서둘러 쫓아다닌다.
정신적으로 우리는 지나친 기대감과 소심한 낙담
사이에서 갈피를 못잡는 것이 습관화되어 있다. 마치
해안에 부서지는 파도처럼 이룬 것 하나 없이 포말로
흩어져 되돌아가는 모습이다. 우리가 실행에
옮기는 행위란 희생, 수난의 형태이거나 아니면 결국에는
아무런 가치도 없고 오랫동안 만족감도
주지 못하는 일들이다. 한 번 돌진하고는 곧 흔적없이
사라져 가는 식이다. 형태는 다양하게 변하지만
그 기본 양식은 한결같고 변화가 없다. 무엇이든 지금
현재에 머무는 편이 정신적으로 낫다.
  우리는 평생 동안 똑같은 일에 대해 매번 같은 실수를
하면서도 그것을 절대로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매번 사정을 설명하고 변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가슴에 묻어 두고 그 일에 집착 할
필요는 없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결코 다시는 똑같지
않을 것임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현재만이 실재한다는 사실은 얼마나 무해하고 순결한가?
  우리의 삶은 현재라는 알려진 지점에서 생성된다.
이곳이 바로 시간의 방해를 벗어나서 실재로
들어가는 장소이다. 우리의 생각이 과거의 회한에 젖어
있고 미래의 설계에 빠져 있다면 우리는 제대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거의 죽은 거나
마찬가지이다. 이것은 죄는 아니지만 불행한 일임에는
틀림없다. 우리가 실제로 사는 기간은 끊임없는 현재의
연속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삶의 질은 우리가
현재에 얼마나 잘 응답하는가에 영향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 대부분은 이를 알지 못한다.
  잠시 동안 내가 아주 직설적이 되는 것을 허용해 주기
바란다. 나는 당신들에게 언제쯤 자신의
겉모습에 매달려 분투하는 일을 그만둘 거냐고 묻고
싶다. 언제 당신의 아이들과 즐겁게 놀아줄건가?
일생 동안 한번쯤 같이 술을 마시자고 제안해 본 친구라도
있는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다른
이에게서 이런 제안을 받아본 적도 별로 없을 것이다.
당신의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산들바람의 숨결을
처음으로 느낀 때가 언제였나? 언제쯤이 되어야 당신은
음식 맛을 제대로 음미하며 식사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당신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당신이
미래에 대해서 발견할 수 있는 전부란, 미래는
여전히 미래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왜 당신은 아직도 맛난
음식을 생각하듯 그렇게 자꾸만 마음속에
미래를 되새기는가? 이러한 당신의 생활은 끊기 쉬운
습관은 아니다. 하지만 당신은 정말 가치 있는
모든 것을 잃어 버릴 생활태도를 끝내 버리지 못해 죽음의
순간이 다가와서야 왜 자신이 사랑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는지 안타까워지는 것이다.
  우리에겐 더 이상 장난할 시간이 없다. 이제 죄책감과
의무감을 끊어 버리자. 노래를 부르자.
살아가야 할 삶과 즐겁게 지낼 사람들이 있다. 마음의
눈으로 보면 당신은 이 모든 자질구레함과
혼돈스러움을 벗어난 세상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늘 행복하게 사는 것은 정말 가능한 일이다.
어디 가능하기만 하겠는가? 그런 생각으로 인생을 시작해
보자.
  우리는 여기서 당신이 인생에 가까이 가는 태도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당신은 여지껏 인생에 제대로
다가서지 못했다. 행복한 삶이 어디에 있는지 아직도
자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디에서 행복을
찾는가? 당신은 아직 제대로 묻지조차 못한 행복에 대해
수없이 추측해 본다. 당신은 지금 이러한 추측
속에서 살고 있다. 당신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거의 모든
것은 이 가정들에서 유래한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이 책이 다른 책과 다르다면, 당신은 한가지
사실을 꼭 이해해야 한다. 즉 과거에 당신이
살아왔던 일상적인 방식으로 인생을 살아가려면 상당히
많은 노력이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당신이 노력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완전히 자신을
바쳐 노력하기로 맹세했다면, 이 모든 것들은
차츰 놀랄 만큼 수월해질 것이다. 희생, 단조롭고 힘든
일, 퉁명스러움, 고통, 긴장은 당신이 애써야만
하는 노력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가입해야 할 단체도,
지지해야 할 강령도, 따라야 할 사람이나
책도, 돈을 줄 이유도 없다.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
순간에 내려야 한다. 결단은 이렇게 간단하다.
  '나는 시작하겠다.'
  그러면 당신은 무얼 시작해야 하는가? 이제 당신은
친절해지도록 애써야만 한다. 친절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친절해지는 것이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 행복해지기 위해서 노력해야 하지만
투쟁할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경험을 한 적이 있다. 그러면 그들은 현재에
마음을 여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갑자기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한동안은 마치 딴 사람이 된 듯이
행동한다. 그러나 얼마 안 가 변화된 모습을 쉽게 잃어
버리고 왜 그 자각이 희미해졌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게 된다. 당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내가 당신의 삶에 대해 얘기하는 바를
그냥 덧붙이는 말처럼 듣지 말라. 이것도 바로 당신의
삶이다.
  행복, 친절, 평화라는 당신의 목표는 절대로 부차적인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은 자신의 삶을
평화롭게 만들려는 희망을 갖지 못한다. 또한 서두르느라
시간을 허비하고 화를 내는 데 시간을
버린다. 조급함이나 성마름은 당신이 행복해질 기회를
얻는 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물론 당신은
실수를 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실수를 할까 겁내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당신의 삶의 목적이 이제
마음 깊은 곳에 확고히 뿌리내리게 된다면, 혹시 잘못한
걸 알게 되더라도 틀림없이 문제 삼아야 할
한 가지 사실만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잘못된 것은
무엇인가?
  말이란 아주 얄팍하다. 말이 실속 있게 되려면 경험이
필요하다. 지속적으로 노력하면 그런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처음에는 어렴풋한 이해의 반짝임을
체험하지만 당신이 잊었던 새로운 행복감은 이제
다가올 것이다. 변화의 여행을 처음 시작할 때는 이러한
느낌이 흡사 마술에 걸린 것처럼 명멸할
것이다. 하지만 점차적으로 당신은 모든 사건과 상황이
각각 독립적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러면서 마침내 분명한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행복해지는 것 외에 우리에게
올바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들은 나에게 잘 보이려고
얌전하게 행동할 필요가 없다. 나는 자유롭다.'

아직도 행복은 가능한가

아직도 행복은 가능한가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와 더불어 19세기 러시아 문학을
대표하는 세계적 문호. 엄격한 그리스도교의
금욕주의에 바탕한 톨스토이이즘으로 유명한
사상가이기도 함. 대표작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리나"
"부활" 등이 있음.

  모든 사람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의 행복만을
위해서 살고 있다. 매일 자신의 행복에 대한
희구를 느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끼지 못할 것이다. 산다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행복을 바라고 행복을 얻는다는 것은 산다는 것,
바로 그 자체이다. 사람은 자기 자신 속에서,
개인으로서의 자기 안에서만 생명을 느끼는 존재이다.
따라서 사람은 우선 자기가 희구하는 행복이란
자기 개인의 행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상상한다. 사람은
우선 자기만이 살고 있고, 자신만이 참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여러 존재의 생명은 자기
자신의 생명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상상한다.
즉 생명에 유사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이다.
자기를 둘러싼 다른 여러 존재의 생명은
자기의 생존 조건의 하나라고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보통의 인간이 타인의 재난을 바라지 않는 것은
단지 남의 오뇌를 바라보는 것이 자기의 행복을 해치게
되기 때문인 것이다. 동시에 남의 행복을
희망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자기 자신의 행복을 바라는
경우와는 전혀 다르다. 즉 남의 행복을
희망하고 그 사람을 위해서 행복한 생활을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남의 행복이 자기 자신의
행복을 증진시켜 주기 때문에 그것을 희망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중요하고 없어서는 안 될 것은
자기 자신의 것이라고 느껴지는 생명의 행복, 즉 자기
일신의 행복뿐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의 행복을 얻으려고 노력하면서 그
행복이 다른 여러 존재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곧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 다른 존재를
관찰하고 연구하면, 그들 모두가--사람뿐만
아니라 동물까지도--생명에 대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과 똑같은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또한 살아 있는 모든 것이
자기 자신의 작은 행복을 위해서라면 모든
다른 존재의 훨씬 큰 행복이나 생명까지도 아무렇지 않게
빼앗아 버리려 마음먹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고, 그것을 깨닫는 동시에 아무래도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그런데 그는 그것이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단 하나나 열 개의
존재뿐만 아니라 이 세상에 수없이 생존하는 온갖 존재는
각자가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시시각각 자기 일신의 생명만이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근절시키려고 노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것을 알면 그
사람은 자기에게 있어서 생명을 이해하는 유일한
이정표가 되고 있는 자기 일신의 행복이라는 것이 그냥
쉽사리 손에 들어오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확실히 제3자에 의하여 빼앗기게 되리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오래 살면 살수록 이런 생각은 경험에
의하여 더욱더 강하게 각인 된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가령 사람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무런 걱정도 없고, 다른 개성을 상대로
훌륭히 싸울 수 있는 유리한 조건에 놓여 있다 하더라도
이성과 경험은 지체없이 다음의 사실을 보여줄
것이다. 즉 사람이 개인의 쾌락이라는 형식으로 인생에서
빼앗아 오는 이러한 행복의 유사품은 참된
행복이 아니라 언제나 쾌락과 떼어놓을 수 없는 고뇌의
더욱 절실한 체험을 제공하기 위해 주어진
행복의 견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은 오래
살면 살수록 쾌락이 차츰 줄어들고, 권태와
포만, 노고와 고뇌가 더욱더 늘어가는 것을 명료하게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아직 그것뿐만 아니다.
자기 힘의 쇠약과 건강의 쇠퇴함을 느끼기 시작하든지,
사람들의 질병,  노쇠,  죽음 따위를 보든지 하면
그 사람은 이제까지 참되고 충실한 생명이 있는 것으로
느끼고 있던 자기 자신의 존재조차도 한 순간
한 순간, 일거수 일투족이 쇠약으로, 노쇠로, 사멸로
접근해 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또 자기의 생명이 서로 싸우는 다른 존재에
의하여 파괴당하는 것 같은 수많은 사건을
만나거나 고통을 증가하는 것 같은 경우를 만나는 것
말고도 생명 그 자체의 본질상 언제나 죽음을
향하여 다가가고 있다는 것, 즉 개인의 생명과 더불어
어떠한 행복의 가능성도 용인되지 않는 상태로
차츰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은 또한
자기 자신, 자기 인격(즉 거기에서만 그가
생명을 느끼고 있는 것)이 싸우면 안 되는 상대와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온 세계를 상대로
언제나 고통으로 끝나기 마련인 쾌락을 추구하며 저지할
수 없는 생명을 저지하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또 그 자신, 그 자신의
인격(즉 그가 오로지 그것만을 위해서 행복과
생명을 희망하는 것 그 자체)이 행복이나 생명을 가질 수
없음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가 얻기를
바라는 것, 즉 행복과 생명은 그가 느끼지도 못하고 느낄
수도 없는 존재--그 실재에 관하여 알 수도
없고 또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그와 전혀 관계가 없는
존재--그러한 존재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 자기에게 있어서
이것만이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것, 자기 생각으로
이것만이 참으로 살아 있는 것이라고 여겨지는 것,
이것만이 그는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필요하지도
않고 중요하지도 않으며, 살아 있는 것으로 느껴지지도
않는 것, 즉 언제나 싸움이 끊이지 않고
변화하는 여러 존재의 이 온 세계, 이것이야말로 참된
생명이고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에 의하여 유일한 것이라고 느껴지고 또한 사람의
모든 활동의 원동력이 되는 생명이라는 것은
사실 있을 수 없는 기만적인 존재이며, 그의 밖에
있으면서 그가 사랑하지도 않고 느끼지도 않으며,
전혀 알지도 못하는 생명이야말로 유일한 참된 생명이라
할 수 있다.

  우리들은 생명의 느낌을 사람으로서의 존재 속에서
관찰하고 시간 속에서 이를 연구함으로써, 참된
생명이라는 것은 마치 곡식의 낟알 속에 보존되어 있는
것같이 언제나 사람 안에 보존되어 있다가
때가 오면 표현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알고 있다. 동물적
개성이 사람을 자기 자신의 행복 쪽으로 계속
끌고 가는 데 반하여 이성적 의식은 개인적 행복이
불가능함을 알려 주고 다른 행복을 가르쳐 준다.
거기에 참된 생명의 발현이 있다. 사람은 먼 저편에
나타난 행복에 눈을 주지만 그것을 볼 수 있는
힘은 없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이 행복을 믿지 않고
개인적 행복 쪽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이성적
의식은 개인적 행복의 불가능을 나타내는 경우에 이르면
참으로 명확하고 또한 단정적이 된다.
그리하여 사람은 다시 개인적 행복을 부정하고 자신에게
제시되고 있는 이 새로운 행복을 응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성적 행복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적 행복은 완전히 버림받게 되고, 개인적
존재를 계속해 나가기가 불가능하게 된다. 이리하여
사람의 마음 속에서 이성적 의식과 동물적 존재
사이에 새로운 관계가 성립된다. 그리고 사람은 참된 인간
생활을 향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동물적 개성과 이성적 의식과의 관계 속에서 나타난
사람의 참된 생활은 동물적 개성의 행복을
부정했을 때에 비로소 개시된다. 그리고 동물적 개성의
행복에 대한 부정은 이성적 의식이 눈을 떴을
때 시작된다.
  그러면 이성적 의식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가? "요한
복음"에 의하면 '로고스',즉 '말씀'(로고스란
이성, 예지, 말씀이라는 뜻이다)이란 뜻이 맨 처음이었고,
만물이 그 속에 있으며 그것을 통하여
생겨났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성은 다른 모든 것을
정의하고, 다른 어떠한 것에 의해서도
정의될 수 없다는 말로 시작된다.
  이성은 정의될 수 없다. 또 우리는 이것을 정의 내릴
필요도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이성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성밖에 알고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서로 접촉하는 경우, 우선 다른
그 어느 것보다도 훨씬 많이 우리들 일동에게 보편적인
이 이성의 평등한 필요성을 믿는다.
이성이야말로 살아 있는 우리들을 하나로 결부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기초라고 우리는 확신한다. 우리는
이성을 무엇보다도 정확하게, 무엇보다도 빨리 알아
낸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만 그러한
것들이 분명히 우리가 알고 있는 이성의 법칙과
합치한다는 것을 알 때에 비로소 아는 것이 된다.
우리는 이성을 알고 있다. 아니, 알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이성을 알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이성이야말로 이성적 존재--즉 인간--가 생활함에
있어서 필연적으로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법칙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인간에게 있어서 생활의
기준이 되는 법칙 그 자체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동물의 경우, 동물이 자라나고 번식하기
위해서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법칙과 아주
똑같은 법칙이고 식물의 경우, 나무나 풀이 자라나서 꽃을
피우기 위해서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법칙과 똑같은 법칙이다.
  흔히 있을 수 있는 그릇된 생각은 우리들 자신이 행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우리들의 눈에 비치기만
하는 우리들의 동물적 육체의 자기 법칙에 대한 종속이
인생인 양 생각하는 점에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이성적 의식에 결부되어 있는 우리들의 동물적
육체에 관한 한, 이 법칙은 식물이나 결정체나
천체에서 행해지고 있는 경우와 마찬가지고 전혀
무의식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에 반하여
우리들의 생명에 관한 법칙은 우리가 어디서도 보지
못하고 또 볼 수도 없는 법칙이다. 그것은 어쩌면
성취될 수 없는 것이지만, 우리들의 생활 속에서 우리의
손에 의해 착착 실행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 이 법칙을 실행하고 동물적
육체를 이성의 법칙에 종속시키는 것,
거기에 우리의 참된 생활이 있다. 우리들의 행복과 인생이
우리들의 동물적 개성을 이성의 법칙에
종속시키는 데 있는 것이라는 이 한 가지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우리들의 동물적 개성의 행복이나
존재를 인생의 전부로 보고 우리들 앞에 놓인 인생의 일을
거절한다면, 우리들은 참된 행복과 참된
인생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내몰고, 우리와 전혀 무관하게
행하게 되므로 우리의 인생일 수 없는 외적인
동물적 활동의 존재를 그 대신 받드는 것이 된다.

  인생은 행복에 대한 희구이다. 행복에 대한 희구가 곧
인생이다. 모든 사람이 언제나 인생을 이렇게
해석해 왔고 앞으로도 역시 이렇게 해석해 나갈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생활은 사람으로서의 참된
행복의 희구, 곧 인생의 참된 생활인 것이다. 그러나
대중--사색하지 않는 사람들--은 인간의
행복을 자기의 동물적 개성의 행복에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동물은 자기의 육체만을 위해서 살 수가 있다. 그
무엇도 동물이 그와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동물은 개체로서의 자신을 만족시켜
무의식적으로 자기 종족에 대하여 봉사하며
자기의 개성을 망각한다. 그러나 이성을 가진 사람은
자기의 육체만을 위해서 살 수가 없다.
  만일 사람이 개성으로서의 자기만의 행복을 희구하고,
개성으로서의 자신만을 사랑할 마음밖에
가지고 있지 않다면, 그도 또한 다른 동물이 알지
못하듯이 다른 여러 존재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를 것이다. 일시적이나마 행복에 대한
희구가 동물적 자아의 요구에 대한 만족을
목적으로 하는 것같이 여겨질 때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물론 잘못이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의 동물적
자아 속에서 일어난 일을 이성적 의식의 활동 목적으로
인정하는 데서 생긴다. 즉 사람이 꿈에서
깨어난 뒤에도 꿈에서 본 것에 의하여 지도를 받으며
행동하는 경우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셈이다.
  세상의 보통 사람들은 개인의 행복을 부정하는 것이
인간의 위대한 행위이고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개인의 행복을 버리는 것은 미덕도 아니고 위대한
행위도 아니다. 그것은 인간 생활의 불가피한
조건일 따름이다. 사람은 자신을 전세계로부터 완전히
떨어진 한 개인으로서 의식하는 동시에 다른
사람도 역시 전세계로부터 떨어진 개인으로 인정하고
상호간의 관계도 인정하며, 자기 개인의 행복에
대한 덧없음을 인정하면서 오로지 이성적 의식을
만족시킬 수 있는 행복만을 진실한 행복으로
인정한다.
  동물에 있어서는 개인의 행복을 목적으로 하지 않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이 행복에 거슬리는 행위는
삶의 부정이다. 그러나 인간에 있어서는 완전히
정반대이다. 한 개인의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
행하여지는 인간의 활동이야말로 인간 생활의 철저한
부정이다.
  생존은 비참하고 유한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이성적
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동물에게 있어서는
개성으로서의 행복과 자기로부터 발생하는 그
개성으로서의 존속이 생활의 최고 목적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개성은 생존의 한 단계에서 지나지
않고, 그 단계에서 자기의 개인적 행복과 일치하지
않는 인생의 참도니 행복이 그에게 계시된다.
  그릇된 세속적 가르침에 중독된 사람에게는 자기에게나
남들에게나 자연스럽게 찾아볼 수 있는
동물적 개성의 요구가 간단명료한 듯이 보이지만, 그와는
달리 새롭고 눈에 보이지 않는 이성적 의식의
요구는 전자와 완전히 상반되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리고
이러한 요구의 만족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노력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복잡하고도 애매한 것같이 여겨진다. 뚜렷이 눈에
보이는 인생관을 버리고, 볼 수도 없는 의식에 몸을
맡긴다는 것은 무섭기도 하거니와 기분도 나쁘다.
그것은 마치 갓난아기가 자기 출생을 느낄 수 있다면
태어날 때에 두렵고 불안한 느낌, 그것과도
같으리라. 그러나 눈에 보이는 인생관은 죽음으로
인도하는 데 반하여 볼 수 없는 의식만이 생명을
준다는 것이 명료할 때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생활에의 첫발과 인간의 생활은 마굿간에서 주인에게
끌려나와 마구가 채워지는 말에게 일어나는
일과 똑같다. 마굿간에서 끌려나온 말은 바깥의 빛을 보고
자유로운 기분을 느낀다. 그리하여 말은
그 자유 속에 참된 생활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곧
수레를 끌게 마련이다. 말은 자기 등에 실린
짐의 무게를 느낀다. 따라서 만일 이 말이 자유롭게
달리는 것을 자기의 참된 생활로 생각한다면 마구
몸부림치고 마구 쓰러지며 때로는 죽어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죽지 않는다면 이러한
처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다음 두 가지밖에 없다.
즉 무거운 짐을 그대고 끌고 가면서 짐의
무게를 그다지 느끼지 않고 끌고 가는 것이 괴롭기는커녕
오히려 즐겁다는 것을 발견하든지, 아니면
끝까지 고집을 부리다가 주인에 의해 방앗간으로 끌려가
밧줄에 벽에 꽁꽁 묶여 수레가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면 괴로워하면서 암흑 속의 한 곳을 계속 걷는
것이다. 이 경우에도 말의 힘이 헛되이 소비되지는
않는다. 말은 마지못해 자기의 일을 수행하지만 이것에
대하여서도 법칙이 실행된다. 요컨대 말은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를 택할 것이다. 양자의 차이는
다만 전자가 자발적으로 일하는 것에 비해
후자는 괴로워하면서 마지못해 일하는 데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의 참된 생활을 이어 나가기
위해서는 개성의 행복을 거절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면, 개성이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가?"
자기의 동물적 존재를 인생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이 개성적 의식이 참된 생활의
구현을 방해한다. 그러면 도대체 이 의식은
무엇 때문에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자기의 생명과 종족의 보존이라는
목적을 향하여 돌진하는 동물에게 있을 법한
꼭같은 질문으로 대답할 수 있다.
  "도대체" 하고 동물은 물을 것이다. "내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상대하여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이 물질, 이 기계적, 물리적, 화학적 그 밖의 여러
법칙이라는 것은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가? 만일
나의 사명이 동물 생활의 존재라 한다면, 내가 정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 유형.무형의 장애물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있는 것인가?"
  동물적 자아는 결코 장애물이 아니라, 인간의 참된
행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동물적 자아는 인간에게 있어서 그가 일을 하는 데 필요한
도구이다. 말하자면 인간에게 있어서
동물적 자아는 행복을 파고들기 위해서 이성적 존재에게
주어진 삽과도 같은 것이다. 즉 파는 사이에
날이 무디어져서 다시 갈고, 이리하여 소모시켜야 할
성질의 것이지 깨끗이 닦아 보관해 두어야 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성장을 위해서 인간에게 주어진
재능이지 보존을 위해서 주어진 헛된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목숨을 잃으면 얻으리라."
  이성적 의식은 이 의식에 의해 계시되고 있는 참된 행복
속에서 자기의 참된 생명을 발견하기 위해
인간에게 주어진 것이다. 이 참된 행복--즉, 선--속에서
생명을 발견하는 사람은 생명을 지닐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고 좁게 구획된 동물적 자아의 행복
속에서 생명을 발견하는 사람은 그 사실만으로
생명을 잃고 마는 것이다.
  개인적 행복을 희구하는 것을 인생으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아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태양은 이미 생명이 싹트기 시작한 것에만 생명을
가져다 준다.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에도
생명이 왜 . 언제 . 어디서 싹트는가, 그것에 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은 오늘날까지 단 한 명도 없다.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다. 생명은 곧 생명이다. 모든 것의
근원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그 발생
상태를 알 수 있겠는가? 인간에게 있어서 발생하고
멸망하는 것은 살아 있지 않은 것, 시간과 공간
속에 나타나는 것, 그것뿐이다.

  "나의 생활은 행복을 희구하는 일이다." 하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말한다. "행복은 만인이 자기
자신보다 나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내 손안에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살아 있는 만물은 모두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있다. 따라서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나를 사랑하게 하려는 이 노력은 결국
헛수고이다. 헛수고이지만, 나는 달리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몇 세기가 지난 뒤 사람들은 발광체까지의 거리를
측정하고 그 무게를 추정하고 태양이나 별의
성분을 조사했으나, 개인적 행복의 요구와 이 행복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온 인류의 생활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아지고 5천년 이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미해결인 채로 남아 있다.
  이성적 의식은 각 개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 당신은 행복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사람이 그들 자신보다도 당신을 더
사랑할 경우에만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말한 뒤에 이 이성적 의식은 사람에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두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기 때문이다"라고 가르쳐 준다. 따라서
이성적 의식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계시된
유일한 행복은 같은 의식에 의하여 다시 덮여 가려지게
된다.
  몇 세기가 또 흘러간다. 그러나 인생의 행복에 대한
수수께끼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인 채로 남아 있다. 그렇다고 하지만
이 수수께끼는 이미 아득한 옛날에
해결 지어진 것이다.
  실제로 개인적 생존의 행복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첫째로 그것은 개인적 행복을
희구하는 인간 상호간의 생존경쟁이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불가능을 없애고 행복을 얻기 쉬운 것이
되도록 하려면, 자기의 개인적 행복에 대한 욕구를 다른
모든 존재의 행복에 대한 욕구로 바꿀 수
있음을 우리들 마음 속에서 승인하기만 하면 된다.
'인생은 개인적 행복의 희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생관으로 세계를 볼 때 사람은 거기서 서로
멸망시키려는 불합리한 생존경쟁을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그것과 전혀 다른 것을 발견하고자
한다면, 즉 생존경쟁의 우발적인 현상과 더불어
이들 존재의 끊임없는 상호부조--이것이 없이는 세계의
존재 그 자체를 생각할 수 없게 되어 버리는
상호부조를 발견하고자 한다면 자기의 생활이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한 희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개인적 생활을 참담하게 하고 인간의 행복을
불가능하게 하는 둘째 원인은 생명을 낭비하고 포만과
고뇌를 수반하는 외관상의 쾌락이다. 사람은 자시의
생활을 다른 사람의 행복에 대한 희구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쾌락에 대한
환상과도 같은 갈망은 당장에 분쇄되고,
동물적 자아의 밑없는 독에 물을 채우기 위해서 쏟은
무익하고 괴로운 활동에 이성의 법칙과 완전히
일치하고, 다른 여러 존재의 생명을 유지하려는 그의 참된
행복에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활동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생명의 활동을 멸망시키는
개인적 오뇌의 고민은 의심할 나위 없이 유익하고
가장 유쾌한 활동을 불러일으키는 다른 사람에 대한
동정의 감정으로 바뀔 것이다.
  개인적 생활을 참담하게 하는 셋째 원인은 죽음의
공포이다. 우리들은 자기 생활의 참뜻을 자기의
동물적 자아의 행복에 대한 희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존재의 행복에 대한 희구에 있는 것으로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그렇게 하면 죽음이라는 괴물은
영원히 사람의 눈에서 사라져 버리게 될
것이다.
  명심하라. 죽음의 공포는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참된
생명의 행복도 상실되지나 않을까 하는 불안과
공포에서 비롯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만일
자기의 행복을 다른 여러 존재의 행복 속에서
상상할 수만 있다면, 즉 우리가 자기 자신보다도 다른
모든 존재를 더 사랑할 수만 있다면, 자기를
위해서만 살고 있는 사람이 생각하고 있듯이 죽음이
행복과 생명의 단절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여러 존재의 행복과 생명은 다른
여러 존재를 위해서 살고 있는 사람의 행복에
의해서 쉽사리 절멸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생명의 희생에 의하여 더욱더 향상되기도 하고
강화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릇된 생각에 빠진 사람의 의식은 흥분하여 이렇게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것은 삶의 거부이다.
자살과 다름없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이성적 의식은 "그런 것은 내가 알
바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내가 알기로는
인생이란 그와 같은 것이고 그 밖의 인생은 없다. 아니,
있을 수 없다. 그리고 나는 그런 생활이야말로
인간에게 있어서나 온 세계에 있어서 참된 인생이며
행복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또 종전의
세계관에 따르면 나의 생활이나 모든 생물의 생활이
악이고 어리석은 것이었음에 반하여 이 생각에
따르면 나의 생활이나 모든 생물의 생활이 악이고
어리석은 것이었음에 반하여 이 생각에 따르면
그것은 인간의 마음에 심어진 이성적 법칙을 실현하는
것이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또 나는
무한으로까지 증대될 수 있는 각 존재의 최대 행복은 모든
사람 각자에게 봉사하도록 하는 이 법칙 --
모든 사람이 상부상조한다는 이 법칙--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것은 이론으로서는 생각할 수 있는 법칙이지만,
실제로 행할 수 있는 법칙이 될 수 없다" 하고
그릇된 생각에 빠진 사람의 의식은 대답한다.
  "현재 다른 사람들은 그들 자신 이상으로 나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나도 자신 이상으로
그들을 사랑하거나 그들을 위해서 자신의 쾌락을 던져
버리고 고통에 몸을 맡길 수 없다. 나는 이성의
법칙 따위는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자신을 위해서 쾌락을
구하고, 자신을 위해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리고 현재 인간들 사이에서는 생존경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만일 나 혼자만이 싸우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나를 짓밟고 말 것이다. 가령 모든
사람의 최대 행복이 어떤 방법으로 상상
속에서 얻어진다 할지라도, 그런 것은 나에게는 아무래도
좋다. 현재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나 자신에
있어서의 실제적인 행복이다"라고 그릇된 의식은
말한다.
  이성적 의식은 대답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당신이 쾌락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당신 스스로 구하지 않고 남들로부터 받았을
때에야 비로소 그것이 당신에게 있어서 행복이 될
것이라는 사실과, 당신 자신이 자기를 위해서 그
쾌락을 잡았을 때에는 현재와 같이 그것은 포만이 되고
고통의 원인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남이 현실의 고통에서 당신을 해방시켜 줄 때, 비로소
당신은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당신처럼 상상 속 고통의 공포 때문에
스스로 자기의 생명을 끊는 것 같은 짓을
되풀이하는 경우에는 단연코 그런 해방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알고 있다. 모든 사람이 나만을 사랑해 주고 나
또한 나 자신밖에 사랑하지 않는 생활,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쾌락을 얻고 고통과 죽음에서 나 혼자만이
벗어나기를 원하는 생활은 최대의 고통인
동시에 부단한 고통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또 나는 알고 있다. 아무리 애쓴다 하더라도 자기의
생명의 법칙과 일치된 생활을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행복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우리들의
생명의 법칙은 싸움이 아니라 그와 전혀 반대로
모든 생물간에서 이루어지는 상호부조인 것을. 그리고
우리들의 생명의 법칙은 싸움이 아니라 그와
전혀 반대로 모든 생물간에서 이루어지는 상호부조인
것을.
  "그러나 나는 개성으로서의 자기 속에만 생명이 있음을
알고 있다. 다른 모든 존재의 행복 속에
자기의 생명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다"라고 그릇된 의식은 이야기한다.
  이성적 의식은 대답한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다만 이제까지 악하고
불합리하다고 밖에 여겨지지 않던 나의 생활과 세계의
생활이 지금은 내가 나 자신 속에서 인정하고 있는 동일한
이성의 법칙에 복종함으로써 동일한 행복을
희구하며 살고 있는 일개의 합리적인 완전체와 같이
여겨지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 다른 존재의 행복
속에서 자기의 행복을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남을 위해서 일하고 괴로워하는 가운데서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릇된 의식이 강하게 반발한다.
  그러나 한번 이 자비의 감정에 몸을 맡기기만 하면,
개인적 쾌락과 같은 것은 당장에 그 사람에게
있어서 아무런 뜻도 없게 되고, 그의 생활력은 남의
행복을 위한 노고와 고통으로 옮아가고 만다.
그리고 이 고통도 노고도 그에게 행복이 된다.
  이성을 가진 사람은 자기 자신의 행복에 대한 희구를
억제하고 다른 존재의 행복에 대한 희구를
그것에 대치시키는 것의 가능성을 정신적으로
인정한다면, 자기의 생활은 이제까지의 어리석음과
비참함을 벗어 던진 합리적이고 행복한 것이 되리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또한 다른
사람들이나 다른 존재 속에서 같은 생활관념을 인정하는
동시에 이제까지 광적이고 잔인한 것으로
여겨지던 온 세계, 온 인류의 생활이 갑자기 인간만이
희구할 수 있는 최고의 합리적인 행복의
원천이라는 것을 마찬가지로 인정할 수 있다. 즉
이제까지의 무의미하고 공허한 것이 그에게 있어서
합리적인 뜻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세계 인류의 생활 목적은 전세계
모든 존재의 끝없는 결합과 광명으로 여겨질 것이다. 그는
전세계, 전인류의 생활이 결합과 광명화를
향하여 끊임없이 나아가고, 이 결합과 광명화의 과정에서
우선 인간이, 그리고 모든 존재가 차츰
이성의 법칙에 따르는 동안 인생의 행복, 개인의 행복은
행복에 대한 희구에 의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서의 법칙을 바탕으로 각자가 모든 사람의
행복을 희구함으로써 얻어진다는, 인간만이
이해할 수 있는 대진리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아니다. 자기 자신의 행복에 대한
희구를 억제하고 다른 존재의 행복에 대한 희구를
그것에 대치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사람은
차츰 개성을 부정하는 정도를 배가시키고
활동의 목적을 자신으로부터 다른 존재로 이동시키는
것이 전인류와 인간에게 가장 가까운 온갖 생물의
진보의 운동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은 또한 인생의 발달은 세계 인류가
단지 이성에 따름으로써 적의와 불화에서 조화와
결합으로 차츰 다가가는 데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인류 가운데 후세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뛰어난 사람들은 타인의 행복을
위해서 자기의 존재를 희생시키는 모범을 보여주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은 오로지
이성의 요구에 의해서만 자기가 인정한 일들이 실제로 이
세상에서 행해지고 있고, 인류의 과거 생활에
의하여 증명되고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이것만이 아니다. 이성보다도,
역사보다도 더욱 강하고 더욱 큰 설득력을 가지고 이런
사실을 마치 다른 샘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가리켜 보이는 것이다. 다름이 아니라 그것은
이성이 그에게 가리켜 보이고 있고, 또 그의 마음속에서
사랑에 의하여 표출되는 활동으로, 단적으로
지고의 행복 그 자체로 직접 잡아 끌듯 끌어당기는 그의
마음의 희구이다.

  사람의 삶은 행복에 대한 희구이고 그가 희구하는
대상은 반드시 그에게 주어진다. 인간이면서도
동물의 수준으로 타락했을 때에만 그는 죽음과 고통을
역력히 본다. 그리고 그때, 죽음과 고통은
괴물처럼 사방에서 그에게 소리를 질러 이성의 법칙을
좇은 사랑 속에 모습을 드러내는 인간적인 삶의
유일한 길로 그를 내몬다. 죽음과 고통은 자기의 삶의
법칙에 대한 인간의 침범에 지나지 않는다.
이 법칙을 좇아 사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이나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행복에 대한 희구이고, 그가 희구하는
대상은 반드시 그에게 주어진다. 죽음이 될 수
없는 삶과, 악이 될 수 없는 행복이 바로 그것이다.

행복에 대한 단장

행복에 대한 단장
    알랭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평론가. 본명은 Emile Auguste
Chartier.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헤겔, 루소
등의 사상을 훌륭하게 발전시킨 사상가로 언급되나
평생을 고교교사로 생활함. 주요 저서로 "행복에
대한 단장" 등이 있음.

     슬픈 마리

  주기적인 우울증에 관하여, 특히 어떤 심리학 교수가
진료소에서 발견한 저 슬픈 마리와 즐거운
마리에 대하여 반성해 보는 것도 흥미 없는 일은 아닐
것이다. 이 이야기는 벌써 잊어 버렸지만 보존해
둘 만한 가치가 있다. 이 아가씨는 시계처럼 정확하여 한
주일 동안은 즐거워하고, 다음 한 주일
동안은 슬퍼하는 것이었다. 즐거워할 때에는 모든 일이
잘 되었다. 비오는 날도 활짝 개인 날고
마찬가지로 좋아하고, 사소한 우정의 표시도 좋아서 어쩔
줄 몰랐다. 애정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면
"나는 얼마나 행복한가!"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녀에게는 불쾌한 감정이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그녀의 보잘것없는 생각도, 마치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꽃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권장하고 싶은 상태였다. 현자도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항아리에 두 개의 손잡이가
있는 것처럼, 어떠한 일에나 두 가지 면이 있다. 나쁘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나쁘게 보인다. 좋다고
생각하면 언제나 좋게 보인다. 행복하려는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한 주일 후에는 모든 기분이 변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맥이 풀렸다. 무슨 일에 대해서나
흥미를 가질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다 시들했다.
이미 행복이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애정도
믿지 않았다. 자기는 아무에게도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고
불평하고, 그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를 우매하고 못난 여자라고
단정했다. 자기의 이러한 병을 생각하고는 그 병을
더치게 했다. 그리고 이 사실에 대해서는 자기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일종의 무서운 방법으로
조금씩 자살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나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고요? 그렇지만 나는
당신의 연극에 넘어가지 않아요."하고 그녀는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이었다. 칭찬을 받고 나서는
놀린다고 생각하고, 친절한 대답을 들으면 모욕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비밀은 엉큼한 흉계였다.
불행한 자에게는 아무리 좋은 일도 시시하게 보이므로,
이와 같이 상상에서 오는 마음의 병은 치료 할
길이 없다. 행복을 얻으려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의지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 심리학 교수는 용감한 자를 위해 더욱 무서운
교훈, 더욱 두려운 시련을 발견했다. 이런
인간의 주기적인 심리활동에 대해 많은 관찰과 측정을
하는 동안에, 하루는 혈구를 입방체로 세어
보았다. 그러자 분명한 법칙이 나타났다. 기쁨을 느끼는
기간의 마지막 무렵에는 다시 많아지는
것이었다. 혈구의 다과--이것이 저 상상에서 오는 환각의
원인이었다. 이리하여 의사는 그녀의
까다로운 불평에 대하여 "안심하세요, 내일이면 행복하게
돼요."라고 대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말을 조금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자기를 사실상 슬프게만 생각하려고 드는 친구가, 이에
대하여 나에게 말했다. "뻔하지 않는가.
우리로서는 어떻게 할 수가 없네. 생각만으로 혈구를
만들어 낼 수는 없네. 그러니 어떠한 철학도
소용없네. 이 커다란 세계는 여름과 겨울, 비오는 날과
개인 날--이렇게 그 법칙에 따라서 우리에게
기쁨과 슬픔을 줄 걸세. 행복하게 되려는 나의 욕구는
산책하고 싶다는 욕구와 다를 것이 없네. 내가
저 골짜기에 비가 오도록 할 수는 없으니 말일세. 그리고
내가 내 마음속에 울적한 벌레를 기르는 것도
아니네. 나는 그것을 참고 있네. 그리고 내가 참고 있음을
알고 있네. 이건 좋은 위로가 되네!"
  이것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엄격한 판단이나
슬픈 예언이나 쓰라린 추억을 되짚어 보면,
자기의 슬픔을 잘 알 수가 있다. 이를테면 슬픔을 맛보는
격이다. 그리고 슬픔 속에 혈구가 문제된다는
것을 잘 알게 되면, 자기의 판단 같은 것은 문제시하지
않을 것이다. 슬픔을 몸 안에 처넣으면, 그것은
아무런 가식도 없는 한갖 피로나 또는 병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에게 기만을 당하느니, 차라리 위병을
앓는 편이 낫지 않을까? 감정이 날카로운 자는 이론도
진정제도 함께 배격한다. 내가 말하는 이 방법을
사용하면 동시에 두 가지의 치료법에 길이 열리는 것이니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닌가.

     신경쇠약

  이즈음과 같은 우기에 남자의 기분은--여자의 기분도
그렇지만--날씨처럼 변덕스럽다. 학식도
많고 분별력도 있는 친구가 어제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어쩐지 요즈음은 기분이 개이지 않네 그려. 일이나
트럼프를 하면, 머릿속에 떠오르는 여러 가지
이유로 해서 기쁜가 하면 금세 슬퍼지고 슬픈가 하면 곧
기뻐지면서, 이렇게 고양이 눈동자보다 더
빨리 기분이 변하네. 그 원인이란 다름이 아니고 편지를
써야 한다거나, 전차 시간을 놓친다거나,
외투가 너무 무겁다거나 하는 정도일세. 그런데 그 때문에
진짜 불행이라도 당한 것처럼 생각되네.
사리를 가려 그까짓 일은 아무래도 무방하다고 타일러도
막무가내일세. 나의 판단력은 젖은 대고처럼
전혀 쓸모가 없네. 결국 나는 스스로 신경쇠약이라고
진단을 내려 버렸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뭐 크게 떠들 것 없이 사물을 잘 이해하도록 하세.
누구나 자네와 같은 입장에 있네. 다만 자네는 불행에 대해
날카로운 센스를 갖고 있다는 것이 다를 뿐이네.
지나치게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왜 기뻐지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하는가를 따지려고 하네 그려.
자네가 언제나 초조감을 느끼는 것은 자네의 기쁨이나
슬픔이 자네가 생각하고 있는 원인에서는 얼른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일세.
  실은 행복이나 불행에 원인이란 있을 수 없네. 모든
것이 우리의 육신과 그 작용에 달려 있네.
아무리 건장한 체격도 대개는 식사, 보행, 주의력, 독서,
날씨 등의 형편에 따라서 날마다 긴장에서
침체로, 침체에서 긴장으로 옮아가는 걸세. 자네 기분은
그것에 의해 마치 파도 위에 떠 있는 배처럼
올라갔다 가라앉았다 하네. 그런 것은 대개 보잘것없는
걸세. 무슨 일이나 손에 잡고 있으면 조금도
마음에 걸리지 않는데, 그것을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여유가 생겨 곰곰이 생각하면 곧 자질구레한 그
이유라는 것이 나타나는 법이라네. 그런데 자네들은
그것이 결과인데도 원인이라고 생각하네. 민감한
사람은, 슬프거나 즐겁거나 반드시 그 이유를
생각해 낸다네. 그리하여 하나의 이유가 두 개의 목적에
유용할 수도 있네.
  몸이 약했던 파스칼은 별의 수가 많아서 무서워졌네.
그가 별을 쳐다보면서 숭고한 전율을 느낀 것은
 무의식중에 창가에서 추위에 떨었기 때문일 걸세.
대담한 시인이라면 여자친구나 되는 듯 이 별과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걸세. 그리고 두 사람 다 별이
총총한 하늘에 대해 엄청난 말을 할 테지. 문제도
되지 않는 엄청난 말을 스피노자는 말했네. 인간이 정념을
갖지 않은 적이 없지만, 현명한 자들은
마음속에 오묘한 사상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에 비하면
정념은 보잘것없는 것이 되어 버린다고.
스피노자의 어려운 논리를 따르지 않더라도 그의 본을
받아, 음악이나 그림이나 재미있는 이야기와
같은 행복을 담뿍 간직할 수가 있네. 이에 비하면 우리의
우수와 같은 것은 눈에 차지 않을 걸세.
사교가는 약간의 의무감에 의해 자기의 분노를 잊을 수
있네. 우리는 알차고 유용한 일이나 책이나
친구들을 좀더 이용하지 않고 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할 걸세. 아무튼 가치 있는 것에 여전히
별로 흥미를 찾지 않는 것은 아마도 일반적인 그리고
중대한 결과를 가져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라네.
우리는 그런 가치 있는 것에 기대를 거네. 마땅히 바랄
것이 무엇임을 알고 이를 바라는 것도 때로는
훌륭한 일이라네."

     불쾌감

  격분한 어조대로 말하자면, 자기 자신을 할퀴는 것이
가장 좋다. 그것은 스스로 자기의 불행을
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테면 자기 자신에게 복수를
하는 셈이다. 아이들은 처음에 이런 수법을
곧잘 쓴다. 자기가 우는 것에 골을 내어 더욱 극성스럽게
운다.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들은 괴롭힘으로써 더욱
고약해지는 사람이 있다. 자기가 고약한 자가 되기
때문에, 남도 고약해지게 하는 것이다. 그는 책을 읽어도
잘 알 수 없어, 자기가 생각해도 창피한
일이므로, 다시는 책을 읽지 않으려고 맹세한다.
쓸데없이 고집을 부린다. 계속해서 기침을 한다.
기억 속에서도 모욕을 찾아낸다. 스스로 모가 난다.
확신도 없이 해보고 나서 실패하고는 한번 해볼만
했는데 이것도 운수 소관이지 하고 말한다. 도처에 찌푸린
얼굴을 해보이며 사람을 싫어한다. 남에게
불쾌한 인상을 주면서 남들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것을
의아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억지로 잠을
잔다. 아무리 큰 기쁨일지라도 일단 의심을 해본다.
만사가 다 귀찮다는 표정으로 사사건건 반대를
한다. 그는 불쾌로써 불쾌를 조성한다. 그리하여 이런
입장에서 자기 자신을 판단한다. "나는 소견이
좁고 인색하다. 기억력도 쇠퇴되고 어느 새 나이도 먹어
버렸다." 그는 일부러 불쾌한 얼굴을 하고
거울에 비쳐 본다. 이러한 것들이 불쾌감의 함정인
것이다.
  나는 "살을 에는 듯한 추위로군. 그러나 건강에는
이것이 제일이야." 하고 말하는 사람을 경멸할 수
없다. 우리가 이 이상 더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바람이 북동쪽에서 불어올 때, 손을 비비는 것은
이중으로 좋은 일이다. 이 경우에 본능은 지혜만큼이나
가치가 있으며, 육체의 반응은 우리에게 기쁨을
표출한다. 추위에 대항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으니,
그것은 추위에 만족하는 일이다. 그리고 기쁨을
달관한 스피노자투로 말하자면, "내가 만족을 느끼고
있는 것은 따스해졌기 때문이 아니다. 만족을
느끼고 있기 때문에 따스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기쁨을 찾기 어려우면, 우선 기쁨을 축적할
일이다. 즉 그것을 손에 넣기 전에 고맙다고
해야 한다. 희망은, 희망한 이유가 이루어지게 하고, 좋은
징조는 실물을 나타나게 하기 때문이다.
"까마귀가 우는 소리도 당신의 기분 여하에 따라서 행복이
될 수 있다"라고 에피크테토스는 말했다.
불쾌한 사람을 만나면 웃어 보일 일이다. 그리고 잠을
자고 싶으면 잘 수 있다고 확신해야 한다.
누구에게나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적은 자기 자신인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일종의 미치광이에 대해 말해 왔다.
그러나 미치광이란 우리들의 오류가 확대된 것에
불과하다. 단지 잠깐 나타나 보일 따름인 불쾌한 동작
속에도 박해에 대한 집념이 응축되어 나타나
있다. 나는 이러한 광기가 우리들의 반응을 지배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어떤 상해에 기인함을 부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초조해 한다는 것은, 자기 무덤을 판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미치광이들
속에서, 우리들의 교훈이 되는 것을 찾아볼 뿐이다. 이
경우에 그것은 확대경을 통한 것처럼 커 보이는
저 두려운 오류이다. 이 가련한 인간들은 자문자답을
한다. 그들은 혼자서 비극을 연출하고 있다.
이것은 반드시 효과를 나타내는 마법의 주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까닭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헤라클레스

  인간이 곤란을 헤치고 나가는 데 힘이 되는 것은 자기의
의지뿐이라는 것은, 종교나 기적이나
불행과 함께 옛날부터 있는 관념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본질상 의지 자체와 동시에 언급될 수 있는
관념이기도 하다. 의지의 힘은 결과에 의해 입증되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는 자기를 노예로 간주하게
될 때까지 스스로 이러한 입증을 해 보여주었다. 그는
자기가 노예라고 믿었을 때에는 부질없이
살아가느니 차라리 목숨을 끊는 편을 택했던 것이다. 이
옛이야기는 매우 아름답다. 나는 아이들에게
외부에서 오는 압력을 이겨내는 법을 배우도록 하기 위해
헤라클레스의 사적을 암송시키고 싶다.
왜냐하면 이것이야말로 산다는 것이며, 이와 다른 태도는
비겁하기 짝이 없고 단지 죽음을 연장하고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나는 삶을 극복해 가면서 스스로 반성하고, 그릇된 길에
접어든 골목에서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며,
자기의 잘못을 찾아 진심으로 자기 자신을 책망하는
소년을 좋아한다. 그러나 주위의 사물이나 사람들
가운데서, 언제나 무슨 트집을 찾아내는 인간의 탈을 쓴
자동기계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기쁨을 찾아볼 수 없다. 주위의
사물이나 사람들은 이 불행한 인간 같은 것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인간의
생각은 추운 겨울날의 나무 잎사귀처럼, 바람에
불려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나는 자기의 외부에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결코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데 비하여, 자기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나는
바보였어..." 하고 뉘우치는 사람들은 자기의
경험을 소화하여, 굳세고 쾌활한 얼굴을 하고 있음을 보고
감탄하게 된다.
  경험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음을 무겁게 하고
또 하나는 가볍게 한다. 침울한 사냥꾼은
토끼를 놓치고는 "내 운수니까 할 수 없지"하고 말을
잇는다. "이런 꼴은 나만 당하지."
  그러나 쾌활한 사냥꾼은 토끼가 날쌔게 줄행랑을 치는
모습을 보고 감탄한다. 그는 토끼의 천직은
인간의 찌개 냄비에 고기를 제공하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속담에는 사나이다운 지혜가 많다. 나의
할머니는 언제나 "제비는 구워진 새가 되어 땅에
떨어지지는 않는다."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의미심장한 말이다. 잠자리를 마련했기 때문에 잠들 수가
있는 것이다. 바보는 "내가 음악을 좋아하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하고 말한다. 그러나 우선 음악을
해볼 일이다. 처음부터 음악을 좋아할 수는
없는 것이다.
  모든 사물은 우리의 뜻에 어긋나 있다. 아니
모든 사물은 우리에게 무관심하여
문제시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대지의
표면은 인간의 활동이 없으면 가시밭과
질병으로 뒤덮일 것이다. 적도 아니지만 동지도 아니다.
인간의 편의 되는 것은, 인간의 활동뿐이다.
그러나 공포를 자아내는 것은 희망이다. 그러므로 우연한
성공을 거두는 것은 몹시 상서롭지 못한
실마리가 된다. 신을 축복하는 자가 이윽고 신을 저주하게
된다. 그러한 태도는 신혼부부가 한동안
구청장이나 교회의 문지기를 좋아하는 것과 같다. 그들은
교회의 사환이 식이 끝난 후에 어떤 표정을
하고 촛불을 껐는지 보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어느 날
향수를 파는 소녀가 미소를 짓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녀는 가게의 문을 닫으면서 동시에 미소를
그쳤다. 가게의 큰문을 닫는 상인의 모습도 볼만한
일이다. 알 수 없는 사물--인간도 포함하여--이 그 고유의
법칙을 우리에게 표시하자마자 (인간은
그 법칙에 좇아서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일에 착수한다. 그러나 어떤 존재가
우리에게 호의를 약속하자마자 우리는 인식을 박탈당하고
희망밖에는 의지할 것이 없어진다. 모든
존재는 그 전조나 반영에 있어서보다 막후의 풍부한
생활이 더 아름답고 친근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정력적인 사람들은 곤경과 변화를 사랑한다. 평화는 여러
가지 힘 사이에 존재한다.

     느릅나무

  나무를 좋아하는 한 사나이가 나와 함께 정원을
거닐면서 이렇게 말했다. "잎이 돋아나기
시작했어요. 얼마 안 가서 느릅나무에 작은 송충이가
붙어서 잎사귀를 모두 먹어 버릴 테지요. 그렇게
되면 나무는 폐를 떼어낸 것처럼 결단이 나요. 질식하지
않으려고 새로운 잎사귀가 나와서, 이를테면
봄을 두 번 맞이하는 격이 되지요. 그래서 나무는
기진맥진하게 되니, 2__3년 후에는 새잎이
돋아나지 못하고 죽어 버릴 거요."
  그는 100년이나 묵은 느릅나무를 가리키며, 이처럼 그
나무가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쓸어 버려야죠. 그까짓 송충이쯤 맥을 못 쓸
테니까요. 한 마리 죽일 수 있다면, 백 마리나 천
마리도 죽일 수 있을 테죠."
  그는 말했다. "천 마리 정도의 송충이는 문제가
아니지요. 그러나 몇 백만 마리나 되거든요.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요."
  나는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돈이 많지 않소? 돈만
있으면 사람을 살 수 있을 텐데 뭐가 문제요?
열 사람의 안부가 열흘만 일하면 송충이쯤 몇 마리라도
퇴치시킬 수 있을 거요. 이렇게 아름다운
느릅나무를 살리기 위해서는 2 - 3백 프랑쯤 던진들
어떻소?"
  "돈이야 있지요. 그런데 일손이 모자라고... 저 높은
나뭇가지를 다 어떻게 한담? 선정할 줄 아는
사람이 있어야 할 텐데. 이 근처에는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는 두 사람뿐이오."
  "두 사람이라도 족해요. 그 두 사람에게 높은
나뭇가지를 맡겨요. 그리고 별로 익숙하지 못한 다른
사람에게는 사닥다리를 쓰도록 해요. 나무 전부를 다
소생시킬 수 없을지라도, 적어도 두세 대는 건질
수 있을 거요."
  그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용기가 나지 않는군요. 내가
할 일은 따로 있을 것 같소. 그놈의 송충이들이 보기
싫어 잠깐 여기를 떠야겠소"
  나는 대답했다. "상상력의 힘이란 무서운 거요. 당신은
싸우기도 전에 이미 지고 있소. 손이 미치는
데까지 있는 힘을 다해야 하오. 일이 귀찮고 인간이
연약한 것을 생각한다면 아무것도 못하오.
그러므로 우선 행동해 보고 나서 자기 행위에 대해 생각해
볼 일이오. 석공을 봐요. 잠자코 연장을
놀리고 있소. 큰 돌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소. 그러나
머지않아 집이 서고 계단에서는 아이들이 뛰놀게
되어요. 나는 언젠가 한 직공이 두께가 15센티나 되는
강철에 구멍을 뚫기 위해 손잡이가 구부러진
줄칼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보고 감탄했소. 그는 연신
휘파람을 불면서 연장을 돌리고 있었소. 먼지처럼
부서진 강철의 부스러기가 휘날리고 있었소. 나는 대담한
이 사나이에게 경탄하였소. 벌써 10년 전
일이오. 그는 이 구멍을 뚫고, 그 밖에도 강철에 많은
구멍을 뚫을 거요. 송충이는 당신에게 교훈을
주고 있소. 느릅나무에 비교하면 송충이 같은 것은
아무것도 아니오. 그러나 조금씩 깎아 먹고 있는
동안에 산 전체를 결단내는 거요. 작은 힘이나마 의지하고
벌레에 대해서는 벌레가 된 심정으로 싸워야
하오. 무수한 원인이 당신의 편이 되어 있소. 그렇지
않다면 느릅나무는 벌써 없어졌을 거요. 운명이란
변화무쌍한 것이오. 손가락 끝을 약간 움직이기만 해도
새로운 세계가 나타날 수 있소. 아무리 작은
노력이라도 무한한 성과를 가져올 수 있구요. 이
느릅나무를 심은 사람들은 인생이 짧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을 거요. 당신도 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다만 자기 발 밑만을 주의하고 대담하게 행동을
개시해요. 그렇게 되면 느릅나무도 살릴 수 있을 거요."

     행동

  경쟁을 하는 사람은 누구나 고생이 막심하다. 공치기를
하는 사람도 그렇고 권투를 하는 사람도
그렇다. 책을 보면 인간은 쾌락을 구한다고 쓰여 있지만
이것은 분명치 않다. 오히려 고통을 구하고
고통을 사랑하는 듯이 보인다. 늙은 디오게네스는 "가장
좋은 것은 고통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그런 사람은 자기가 구하는 고통 속에서 쾌락을
발견한다고 말할 터이지만, 그것은 억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이 발견하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행복일 것이다. 그런데 쾌락과 행복은 속박과
자유가 다른 것처럼 매우 다른 것이다.
  인간은 행동하기를 원하되 복종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자진하여 그토록 고생하는 사람들도 강제
노동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자기 자신에게 닥쳐올 불행을
좋아할 사람도 없고, 궁핍을 느끼기를
좋아할 사람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자기가 자유롭게
고생하는 일이라면 곧 만족을 느낀다. 나는 지금
이러한 한담을 쓰고 있다. 붓대로 밥을 먹어야 하는
저술가라면 매우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무에게도 강제를 받지 않는다. 자진하여 하는 일은
즐겁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나는 행복하다.
권투선수도 남에게 얻어 맞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진하여 얻어맞는 것은 좋아한다. 우리
자신의 뜻에 좇아서 싸울 때에는 어려운 승리보다 더
즐거운 것은 없다. 사실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은
힘뿐이다. 헤라클레스는 괴물을 찾아내어 이를
분쇄함으로써 자기의 힘을 자신에게 입증했다. 그러나
사랑에 빠지자마자, 그는 자신의 노예 상태와 쾌락의 힘을
느끼게 되었다. 인간은 누구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환락에서 서글픔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구두쇠는 많은 쾌락을 희생시킨다. 그리고 첫째로
쾌락에 대해 승리함으로써, 그리고 거기서 힘을
축적함으로써 커다란 행복감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그는
이 힘을 자기 자신으로부터 얻고 싶은
것이다. 유산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 만일 구두쇠라면,
그는 더욱 비참한 수전노이다. 왜냐하면 무릇
행복이란 본질적으로 포에지이며, 포에지는 행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선반으로부터 떨어지는
떡덩이와 같은 행복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법이다. 행복을
자기 힘으로 만들고 싶어한다. 아이들은
우리들의 정원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모래산이나 밀짚
같은 것으로 스스로 훌륭한 정원을 만든다. 자기
스스로 수집하지 않은 수집가를 생각할 수 있을까?
  전쟁을 하는 재미는 전쟁을 하는 데 있다. 무장을
하자마자 각자는 분명히 자유를 갖게 된다.
그리하여 병사들은 강제로 싸우게 하는 사령부 같은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자기의
자유를 느끼자마자 새로운 생활 속에 뛰어들어가 거기서
취미를 발견하게 된다. 죽음은 무서워할
필요도 있지만, 동시에 죽음을 기다리고 나중에는 죽음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죽음에
선수를 써서, 이를테면 격투장 안에 죽음을 불러들이는
자는 자기가 죽음보다 강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병사들은 죽음을 기다리는 것보다 죽음을
찾아나서는 편이 훨씬 쉽다는 것을 저마다 잘 알고
있다. 또한 인간은 시간이 가져다 주는 운명보다도 자기
손으로 만들어 나가는 운명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전쟁 속에는 포에지가 있어, 그 때문에 사람들은
벌써 적까지도 미워하지 않게 된다.
전쟁이나 모든 정념을 올바로 이해하게 하는 것은 이
자유의 도취이다. 페스트는 강제된 것이지만,
전쟁은 도박처럼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신중한
것만으로는 충분한 평화가 보장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정의에 대한 사랑으로써, 평화를
참아 나가는 것이다. 그것은 정의를 만들어 내는 것이
다리나 터널을 만드는 것보다 더욱 어렵기 때문이다.
평화가 있다면 오직 그 때문이다.

     행동하는 자

  나의 취미에서 본다면 치안국장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는 언제나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조건하에서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때는 불이다, 어느 때는
수해다, 어느 때는 사태다, 압사다 하고 사건이 연달아
일어난다. 이어서 진흙 구덩이다, 먼지
투성이다, 병이다, 가난이다, 또 때로는 싸움이다,
경우에는 따라서는 열광이다. 이 행복한 사람은
끊임없이 분명한 행동을 필요로 하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에게 일반적인 규칙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종이 부스러기 같은 서류도 필요없다. 그런
것은 이른바 관리들에게 맡겨 둔다. 그는
지각과 행동 자체이다. 이 지각과 행동이라는 두 개의
수문이 열릴 때 생명의 강은 인간의 마음을
가벼운 날개처럼 운반해 간다. 거기에 유희의 비밀이
있다. 트럼프 놀이를 한다. 그것은 생명을
지각에서 행동에로 옮기는 것이다. 축구를 한다. 더욱
좋은 일이다. 예견할 수 없는 새로운 소재 위에,
재빨리 어떤 행동을 실행하는 것--이것이 인간의 생활을
크게 충족시켜 준다. 그리고 보면 도대체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시간을 회한을 삼켜 버린다. 사람들은 흔히
도적이나 강도의 정신생활은 어떤 것일까? 하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는 그들에게는 정신생활 같은
것은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무엇을 노리고
있던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자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능력은 자기의 발 밑과 손톱을 살피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러므로 형벌의 관념이나 그밖의
어떠한 관념도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 눈멀고
귀먹은 기계는 무섭기 짝이 없다. 그러나
누구에게 있어서도 행위는 의식을 지워 버린다. 이
에누리없는 폭력은 나무꾼의 도끼의 일격과 통하는
데가 있다. 정치가의 태도에는 그다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결국 그러한 면이 발견되는 경우가 가끔
있다. 도끼처럼 탄탄한고 둔감한 인간을 보더라도, 그
인간이 그다지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기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별로 무섭지는 않을 것이다.
힘은 동정심을 갖지 않는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조차 동정을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투쟁인가? 인간이 행동 속에 깊이
빠지려는 것이다. 인간의 사상이란 발차하면
어두워지는 전차의 전등과 같은 것이다. 이것은 깊은
사상을 두고 하는 말이다. 거기서 놀랄 만한
행동의 힘이 나온다. 그 힘은 마음의 등불을 지워 버리기
때문에 좋도록 자기를 합리화한다. 이에
의하여 많은 비천한 정념--우울병, 염세관 혹은 음모,
위선, 원한, 또는 공상적인 사랑이라든지,
닳고닳은 악덕이라든지, 온갖 반성에 의해 생기는
보잘것없는 정념들이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행동의
흐름 속에서 정의도 또한 사라져 버린다.
  치안국장은 수해나 화재와 싸우는 것과 같은 수법으로
폭동과 싸운다. 폭동도 또한 자기의 등불을
꺼버린다. 흉포하기 짝이 없는 암흑이다. 그 때문에
곤봉으로 고문을 하는 형리가 있는가 하면, 고백을
청취하는 재판관도 있었던 것이다. 의자에 묶여서 숨이
끊어지는 고통을 맛보고, 노의 움직임에 따라
거기서 죽어간 조향수가 있는가 하면, 그들은 몽둥이로
때리는 자들도 있었던 것이다. 몽둥이질을 하는
자들은 몽둥이 이외의 것은 생각지 않았다. 어떤 야만
상태라도, 일단 이루어지면 그것은 계속될
것이다. 치안국장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가장
소중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무위는 모든
약덕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미덕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임금님의 권태

  생활의 다소 고생이 되더라도 너무 평탄한 길은 걷지
않는 것이 좋다. 임금님들이 만사가 생각대로
되는 것이라면 참 가엾은 존재라고 하겠다. 그리고 신이
어디엔가 있다면 신경쇠약에 걸려 있을
것이다. 옛날에는 신들도 나그네의 차림을 하고,
사람들의 문을 노크하러 왔다고 한다. 아마도
시장가나 갈증이나 애정을 느끼는 일에 다소의 행복을
맛보기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들이 자기의
전능의 힘을 조금이라도 생각했다면, 그러한 것은
아무짝에도 못 쓴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시간과
공간까지도 폐지하고, 자기의 욕심을 눌러 없애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요컨대
그는 권태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후부터 그는 목을
매든가 물 속에 몸을 던지거나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수면의 숲 속에 있는
미인처럼 잠들고 있었을 것이다. 행복이란
분명히 자기 자신에 대해 눈뜨게 하는 불안이나 정념,
또한 어느 정도의 고통을 언제나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의 세계보다 상상력에 의한 편이 더욱 행복한
경우가 많다. 이것은 실제의 행복을 손에 넣으면
이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하여 주저앉아 버리기
때문이다. 재물에는 두 가지가 있다. 주저앉게
하는 재물은 인간을 권태롭게 만든다. 마음을 즐겁게 하는
재물을 다시 계획이나 일을 요구한다.
그것은 농부가 몹시 갖고 싶어하다가 겨우 소유한 밭과도
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은 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쉬고 있는 힘이 아니라
행동하고 있는 힘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인간은 아무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미 만들어진 행복을 갖고 가보라. 그는
병자처럼 고개를 흔들 것이다. 음악을 듣는 것보다
자기가 직접 음악을 하는 것을 더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어려운 것이란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중에 어떤 애로가 있을 적마다
그것은 피를 끊게 하고 정열을 불타게 한다.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라면 누가 올림픽의
월계관을 탐낼 것인가? 그런 것은 아무도 탐내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질 우려가 없다면, 누가 트럼프
놀이를 하려고 하겠는가? 여기서 신하들과 트럼프 놀이를
하는 늙은 임금이 있다고 하자. 임금은
놀이에 지면 화를 낸다. 신하들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신하들이 트럼프 놀이를 하는
방법을 잘 깨치고 나서는 왕은 결코 지는 법이 없다.
그러자 이번에는 왕이 트럼프를 내던지고 만다.
왕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말을 탄다. 사냥하러 가는
것이다. 그러자 그것은 어디까지나 임금의
사냥이다. 짐승들이 저절로 임금의 발 밑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사슴도 역시 신하이다.
  나는 많은 임금들을 알고 있다. 그들은 작은 왕국의
작은 임금들이다. 너무 귀여움을 받고, 아첨을
당하고, 금이야 옥이야 하고 자라난 가정의
임금님들이다. 그들에게는 무엇이건 갖고 싶다고 생각할
틈이 없다. 조심스러운 눈이 그들의 생각을 벌써
알아차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작은 쥬피터
(그리스 신화의 올림푸스 신족의 왕. 제우스의 라틴어
이름)들은, 무슨 일을 해서든지 화를 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은 방해물을 생각해 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욕망을
만들어 냈다. 그리하여 정월달의 태양처럼
마음이 변했다.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고집을 부렸다.
그리고 너무나 권태로워 죽어 버리지 않고
있다면, 여러분들에게 이런 펑탄한 왕국을 지배할 것을
명령하지 않기를 바란다. 험준한 산길을 통해
인도해 주기를 바란다. 우물과 같은 눈과, 쇠 침대와 같은
이마를 갖고, 행길에서 자기 귀의 그림자를
보았다고 해서 즉시 멈춰 서는 그런 안다루시(스페인
남부지방의 이름)의 좋은 당나귀를 길동무로 삼아
주지 않기를 바란다.

     아리스토텔레스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진하여 하는
것이 기분이 좋아지는 기본이 된다. 그러나
사탕은 입 속에서 녹이기만 하면, 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맛이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와
같은 방법으로 행복을 맛보려고 하다가 실패하는 것이다.
음악을 듣기만 하고, 자기가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별로 재미가 없다. 그러므로 어떤 현명한 사람은
음악을 귀로 맛보는 것이 아니라 목으로
맛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름다운 그림에서 느끼는
즐거움까지도 자기 자신이 끄적끄적 그려본다던가,
그림을 수집하지 않으면 과히 보람이 없는 휴식의
즐거움에 지나지 않는다. 즐거움은 단지 받아들이는
데 있지 않고 탐구하고 정복하는데 있다. 사람들은 연극을
보러 가지만 그들은 실지로 말하는 것
이상으로 권태로워 한다. 그렇다면 자기 스스로 제작해 볼
일이다. 적어도 자기 스스로 출연해 볼
필요가 있다. 출연도 일종의 제작이다. 누구나 사교계의
희극을 상기할 터이지만, 거기서는 배우가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나는 인형 연극에 대해서만
생각하던 행복한 몇 주일을 상기한다. 그러나 미리
말해 두거니와, 나는 조그마한 나이프로 나무 뿌리에
고리대금업자나 군인이나, 처녀나 노파를
아로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친구들은 거기에 옷을
입혔다. 나는 구경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비평은 그들에게 맡겨 버렸다. 그런 것은 보잘것없는
즐거움이다. 그러나 그것은 조금이라고 그들이
스스로 생각해 냈다는 점에서 역시 즐거운 것이다.
  우리는 행복해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행복이 자기를 피한다고 한다.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서 얻은 행복에 대한 말이라면 사실이다. 얻은
행복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가 손수 만드는 행복이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가 손수 만드는 행복은 절대로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 그것은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배워야 하는 것이다.
알면 알수록 더욱 더 많이 배우게 된다. 여기서 라틴어
학자들의 즐거움도 우러난다. 라틴어 학자들이
누리는 그러한 즐거움에는 끝이 없다. 학식이 진전함에
따라서 즐거움이 증가한다. 음악가의 즐거움도
마찬가지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은 놀랄 만한
말을 했다. 즉 참도니 음악가란 음악을 즐기는
사람이며, 참된 정치가란 정치를 즐기는 사람이라고.
"즐거움은 힘의 표시이다"라고 그는 말했다. 이
말은 우리를 이론 밖으로 끌어내는 언어의 완벽성으로
하여 높이 울려 온다. 몇 번이나 무시를
당했지만 끄덕하지 않는 이 놀라운 천재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 점을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어떤
행동에 있어서나 참된 진보의 표시는 사람들이 거기서
느낄 수 있는 쾌락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볼 때,
일만이 유일하고 충분한 즐거움이다. 나는 여기서 힘의
결과인 동시에 힘의 원천이기도 한 자유로운
일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억지로 참을
것이 아니라 행동할지어다.
  석공들이 열심히 자기의 조그마한 집을 만드는 것을
누구나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이 돌
하나하나를 고르고 있는 것을 잘 보아야 한다. 이러한
즐거움은 또한 어떤 직업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직공은 언제나 생각해 내고 배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직공이 자기가 만들 물건에 대해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고, 자기가 만든 물건을 소유하지도 않으면
배우기 위해 별로 애쓰지도 않고, 언제나
같은 일을 되풀이하게 되면, 기계적인 행동이 권태를
일으킬 뿐만 아니라 큰 혼란도 가져온다. 이와는
반대로 일의 연관성이라든가, 오늘의 농작물이 내일의
수확을 약속하는 것이 농부들의 행복을
자아낸다. 나는 물론 자유롭게 자립하고 있는 농부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많은 수고가 따라야
하는 이러한 행복에 대해 사람들은 저마다 크게
반대한다. 그나마 언제나 다른 사람으로부터 얻는
행복을 누리고 싶다는 얕은 생각에서 그러는 것이다.
디오게네스가 말한 바와 같이, 괴로움이 오히려
나은 것이다. 그러나 정신은 이 모순을 짊어지려고 하지
않는다. 정신은 이 모순을 극복해야 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우리는 고통의 반사인 쾌락을
만들어 내야 하는 것이다.

     과장된 말

  가끔 길가에서 햇볕을 쪼이거나 발길을 질질 끌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깨비 같은 인간을 만나게
된다. 이처럼 늙어빠지고 당장 죽을 것만 같은 사람을
보면, 처음에는 어떤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렇게 말하면서 도망친다. "저 도깨비
같은 늙은이는 왜 진작 죽지 않은 걸까?"
그러나 본인은 역시 살고 싶은 것이다. 햇볕을 쪼이고
있는 것이다. 죽고 싶지 않은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우리들의 사고에 있어서의 어려운 길이다. 반성은
대체로 여기서 걸려 넘어지고 상처를 받아
초조해지며, 오류의 기로 접어든다. 이러한 일은 흔히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광경을 목격한 후에 조심스럽게 올바른 길을
찾고 있을 때, 나는 한 사람의 친구를 만났다.
그는 눈에 노기를 띠고 말도 변변히 못하면서 덜덜 떨고
있었다. 이윽고 그는 큰소리로 말했다. "모든
일이 비참하기 짝이 없네. 건강한 친구들은 병이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네. 매우 두려워하고 있네.
그리하여 자기 공포 이외에는 아무것도 잃지 않으려고
하네. 공포를 남김없이 씹어 보고 있는 것일세.
저 병신들을 보게. 그들은 죽는 편이 훨씬 나을 걸세.
그런데 결코 죽음을 택하지 않네. 죽음을 저만치
밀어 버리고 있는 걸세. 그리고 이 공포가 병을 더욱
더치게 하네. 자네는 살아가기가 이렇게 괴로운데
어찌하여 죽음을 두려워하는가, 하고 말하네. 그러나
죽음과 공포를 동시에 미워할 수는 없네. 우리는
이렇게 하여 죽어가는 것일세."
  그가 말한 것은 그에게는 어디까지나 분명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들면,
그렇게 생각되는 것이다. 불행해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려운 일은 행복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행복해지려고 노력하지 않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그와 반대이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지 않으면 호랑이를 잡을 수 없다.
  나에게도 이 소란스러운 웅변을 경계해야 할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밝은 척하는 그릇된 빛으로 나를
기만한다. 자기가 구제할 길이 없는 불행 속에 갇혀
있다는 것을 스스로 몇 번이나 한탄했는지 모른다.
왜? 아마도 현혹되었던가, 지쳐 있었던가, 혹은 하늘의
구름에 그늘진 한 여자의 눈 때문이었으리라.
그것은 또 고작해야 어떤 하찮은 생각 때문이거나 어딘가
기분이 나빴던 때문이거나, 얼굴 표정이나
말투에서 미루어 보아 허영심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에게나 이런 기괴한 어리석음이 있는
것이다. 1년만 지나고 보면 태연스럽게 웃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즉 눈물, 흐느낌, 위장, 심장, 배, 결렬한 동작, 근육의
경직 등이 추리 가운데 들어오면, 정념은
우리를 기만한다고. 단순한 사람은 몇 번이나 거기에
걸려든다. 그러나 나는 이 그릇된 빛은 오래지
않아서 곧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그것을
곧 없애 버리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떠들어대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내 목소리가 나에게 얼마나 강한 영향을
주는가를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자기 자신에 대해
희극배우로서가 아니라, 그저 있는 그대로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또한 병이나 죽음은 누구에게나 흔히 있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여기 거역하는 것은 인간답지
않은 그릇된 태도임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참된 인간적인
태도는 어떤 방식으로나 반드시 인간인
자기와 자연의 추세에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분노를 키우고 분노에
키워지는 불평 불만 속에 뛰어드는 경솔한 짓을 해서는
안 된다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야말로 지옥
가운데서 빙빙 도는 격이다. 그러나 악마는 곧 나
자신이며, 갈퀴를 들고 있는 것도 나 자신이다.

     너 자신을 알라!

  나는 어제 이런 광고를 읽었다. '위대한 비결, 인생에
성공하고, 인심을 움직여서 이를 유리하게
이용하는 정확한 방법. 문제는 누구든지 갖고 있는 생명의
액체에 있다. 다만 그 사용법을 아는 것은
유명한 X선생이다. 10프랑으로 교수함, 앞으로 사업에
성공 못하는 사람은, 10프랑의 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운운...' 이것을 실은
신문사는 무료로 광고를 내주었을 리가 만무한
즉, 자액의 상인인 성공의 선생에게는 손님이 꽤 있었던가
보다.
  나는 이 선생은 분명히 본인이 자부하고 있는 것
이상으로 용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액체의
이야기는 덮어 두더라도, 그는 대체 어떤 수작을 하는
것일까? 만일 그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확신을 준다면 그것만으로도 대견하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손님들은 전에는 태산처럼 꿈쩍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던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비겁함은 커다란 장애이며, 그리고 유일한
장애인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아마도 무의식중에,
손님들에게 주의, 반성, 질서, 방법 등에 대해
관심을 갖게 할 것이다. 이른바 액체의 방사와 같은 것도
누구에게나 혹은 어떤 사물을 강하게
상상하는 것이리라. 선생은 점차로 손님들을 유도하여
그들의 주의를 집중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끌고
갈 것이다. 다만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돈을 벌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첫째로 이 방법에 의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일--즉 자기의 과거, 실패, 피로, 뱃속의
형편 등을 생각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곧 그때까지 시시로 증가하고 있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된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욕설을 퍼붓는 것으로 자기의 생활을 낭비하고 있는
것일까. 둘째로 그들은 자기가 원하고 있는 것,
주위의 상황이나 사람들의 일을 진지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생각하게 되어 흔히 꿈속에서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함께 뒤범벅이 되거나 혼합되어 버리는 일이
없게 된다. 그후에 성공이 찾아오는 것은
뜻밖의 일이 아니다.
  그 선생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우연한 일을 나는
문제시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와 반대되는 우연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 일반적으로 누구나
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 때문에 자기를
그르치는 것이다. 인간은 시종일관하는 존재가 아니다.
보통 동지보다 적을 애써 기르고 있는 것이다.
저 사나이는 나에게 악의를 품고 있다고 당신은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편은, 그런 것은 벌써
옛날에 잊어버리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조금도
그것을 잊지 않고 있다. 다만 당신의 얼굴
색으로 그에게 그의 의무를 생각나게 할 뿐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 외에는 거의 적이 없다. 그는
그릇된 판단이나, 기우나, 절망이나, 자기에 대한
비과학적인 언사 등을 하여 자기의 가장 큰 적이
되어 있다. 어떤 사람에게 다만 "당신의 운명은 당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 충분히 10프랑
정도의 가치는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시대에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델포이(고대 그리스의 도시.
아폴론의 신전이 있었다)에 아폴로의 예고를 받아 모든
일에 조언을 하고 돈을 받는 일종의 무녀가
있었다. 신은 우리들의 자액의 상인보다 정직하여 그
비결을 신전의 정면 바람벽에 써 붙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일이 자기에게 유리한지 불리한지 알려고 자기
운명에 대해 물으러 왔을 때에는, 신전에
들어가기 전에 만인에게 가치 있는 다음과 같은 심원한
신탁을 읽을 수 있었다. 즉, '너 자신을 알라!'

     우정

  우정에는 놀라운 기쁨이 깃들어 있다. 기쁨이 전염하는
것이라는 사실에 주목하면, 이것은 곧
이해할 수 있다. 내가 있는 것이 친구에게 조금이라도
기쁨을 준다면, 그 기쁨을 복 이번에는 내가
기쁨을 느낀다. 이와 같이 각자가 남에게 주는 기쁨은 그
본인에게로 되돌아온다. 동시에 기쁨의 보물
창고가 개방되어 두사람 다 이렇게 생각한다--나는 내
마음속에 행복을 갖고 있었지만, 그것을 별로
유용하게 사용하지 못했다.
  기쁨의 원천이 마음속에 있음을 인정한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무슨 일에 대해서나
불만스러워 억지로 웃기 위해 서로 접촉하는 사람들처럼
서글픈 것은 없다. 그러나 만족을 느끼고 있는
사람도 혼자 있으면, 이윽고 자기를 만족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즉 그의 기쁨은
곧 잠들어 버린다. 그리하여 일종의 백치 상태, 무감각
상태에 도달한다. 내부의 감정은 외부의 운동을
필요로 한다. 만일 어떤 폭군이 권력을 존중할 것을
가르치려고 나를 투옥시킨다면, 나는 날마다
혼자서 웃는 것으로 건강법을 삼을 것이다. 나는 발을
훈련하는 것처럼 나의 기쁨을 훈련시킬 것이다.
  여기에 한 묶음의 죽은 나뭇가지가 있다고 하자. 그것은
외관상 흙덩이처럼 생기가 없다. 그대로
버려 두면 나중에는 흙이 되어 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
나뭇가지는, 태양에서 받아들인 열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성냥개비라도 켜 대어 보라. 당장 불탈 것이다.
  그것은 이를테면 단지 문을 흔들어서 죄수의 잠을
깨우기만 하면 족한 것이다. 이와 같이 기쁨을
눈뜨게 하기 위해서는 일종의 계기가 필요하다.
갓난아기가 처음 웃을 때에, 그 웃음은 어떤 의사
표시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행복을 느껴서 웃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웃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먹는 일이 즐거운 것처럼, 웃는 일이
즐거운 것이다. 그러나 우선 먹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웃음에 대해서만 진실인 것은 아니다.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일기 위해서도
말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혼자 있는 한, 자기 자신일 수가
없다. 어리석은 모럴리스트들은 사랑이란
자기를 저버리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너무나 단순한
견해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빠져나갈수록 더욱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자기가
살고 있다는 것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그대의 나무를 구렁텅이 속에서 그대로 썩혀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승리

  인간은 행복을 찾기 시작하자마자, 이것을 발견할 수
없는 운명에 빠져 버린다. 그리고 이것은
당연하다. 행복이란 쇼윈도 속의 물건처럼, 우리가
선택하여 돈을 내고 집으로 갖고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행복은, 당신이 그것을 손에 갖고 있지
못하면 행복할 수가 없다. 만일 당신의 이것을
외부 세계에서 찾으면, 결코 아무것도 행복한 모습을
취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행복에 대해서는
추리할 수도 예견할 수도 없다. 그것은 지금 현재 갖고
있어야 한다. 행복이 미래 속에 있는 것처럼
여겨질 때에는 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이 이미 행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을
갖는다는 것은 곧 행복을 의미한다.
  시인들은 흔히 사물을 설명하는 방법이 서툴다. 나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음절이나
운율을 맞추는 일에만 너무 고심하기 때문에 진부한
말밖에는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행복은 먼 미래에 있는 한 아름답게 빛나고
있지만, 그것을 잡아 보면 조금도 좋은 것이
못 된다고. 마치 무지개를 잡거나 샘물을 바닥에 붓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조잡한
표현이다. 행복을 좇아가는 것은 말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행복을 자기 주위에서 찾는 사람들을
특히 서글프게 하는 것은, 그들이 조금도 행복을 원할
엄두가 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트럼프 놀이를
하는 것이 나에게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은 내가 트럼프
놀이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권투나 검술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음악도 마찬가지로, 우선 처음에
어느 정도의 곤란을 극복한 사람에게만 그
즐거움을 주게 마련이다. 독서도 마찬가지이다. 발자크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처음에는 지루하기 때문이다. 게으른 독자의 태도를 보면
매우 재미있다. 소리 내며 페이지를 들쳐
본다. 몇 줄 읽다가 책을 던져 버린다. 독서의 행복은
예견하기 어려운 것으로 경험을 쌓은
독서가들까지도 스스로 놀랄 정도이다. 학문은 멀리서
바라보면 조금도 즐겁지 않다. 그러므로 그
안으로 걸어서 들어가야 한다. 처음에는 강제가 필요하며
곤란이 필요하다. 규칙적인 노력과 승리에
계속되는 승리--이것이야말로 분명한 행복의 공식이다.
그리고 트럼프 놀이나 음악이나 전쟁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여럿이 행동하는 경우에 행복은
생기를 띤다.
  그러나 행동, 노력, 승리하고 하는 같은 마크를 언제나
갖고 있는 고독한 행복도 있다. 예컨대
수전노나 수집가의 행복이 이와 흡사하다. 그리고 이
양자는 서로 닮아 있다. 수전노가 옛 금화를
탐낼 때 특히 그렇지만, 탐욕이 악덕으로 간주되는 데
반하여 칠보나 상아나 그림이나 진본 같은 것을
유리창 속에 진열하는 사람이 도리어 치하를 받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책을 더럽힐까 봐 읽지 않는
책의 수집가가 있는데, 금화를 다른 즐거움과 바꾸려고
하지 않는 책의 수집가가 있는데, 금화를 다른
즐거움과 바꾸려고 하지 않는 수전노는 사람들이
조소한다. 사실은 이런 행복도 다른 모든 행복과
마찬가지로 멀리서는 맛볼 수가 없는 것이다. 우표 수집을
좋아하는 것은 우표 수집가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그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권투를 좋아하는 것은 권투선수이고 사냥을
좋아하는 것은 사냥꾼이며, 정치를 좋아하는 것은
정치가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행동에 있어서만
행복한 것이다. 즉 인간은 자기가 자기에게 부여하는
규율에 의해서만 행복한 것이다. 요컨대 축구
경기의 경우나 학문 연구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 수련을
받아들이는 데서 행복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임무는 멀리서 보면 재미가 없다. 뿐만 아니라 불쾌감을
느끼게까지 한다. 행복이란 칭찬을 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오는 칭찬인 것이다.

  행복해지기를 원하고 이를 위해 애쓸 필요가 있다. 다만
행복이 들어올 수 있는 문을 열어 놓기만
하고 방관자의 태도에 머물러 있으면, 그것은 서글픈
일이다.
  도시 사람들에게 시골이 즐거운 것은 시골에 직접 가기
때문이다. 행동은 욕구를 수반한다. 우리는
몸소 행하지 않는 것을 바랄 수 없으며, 고립무원의
기대는 언제나 서글픈 것이다. 그러므로 각자가
남에게 꾸어준 것과 같은 행복을 기다리고 있으면
사생활은 언제나 비참한 것이다.
  누구나 가정의 폭군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기주의자는 자기 행복으로써 주위 사람들을
지배하는 법률로 삼는 것이라고 생각할 터이지만, 그것은
너무나 단순한 생각이다. 사물은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이기주의자가 슬픔을 느끼게 되는 것은
행복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살려고 하지 죽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은 나는 행복하다고 말하며,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다. 만일
각자가 재에 대하여 불평하지 않고, 장작을
때기만 해도 그 사회는 훨씬 살기 좋아질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데 마침 비가 오고 있다. 지붕 위에
빗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무수한
작은 도랑들이 지절댄다. 공기는 씻겨서 걸러진 것 같다.
구름은 아름답게 뜯어 놓은 솜을 닮았다.
이런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말한다. 비는 추수를 모두 망쳐
놓는다고. 또 다른 사람은 말한다. 만물이 흙탕으로
더렵혀진다고. 그리고 제삼의 사람은 말한다.
풀밭 위에 앉는 것은 매우 유쾌한 일인데 하고. 물론이다.
그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당신이 불평을
터뜨려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내가 불평하는 그 비는
집안에까지 나를 쫓아온다. 그러므로 비가 올
때야말로 명랑한 얼굴을 하고 싶은 것이다. 일기가 나쁠
때에는 즐거운 얼굴을 할 일이다.
  불행해지고 불만스러워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즐겁게 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왕자처럼 가만히 앉아 있으면 된다. 행복을 상품처럼
여기거나 무게를 달아보는 눈초리는, 모든 것에
권태의 빛을 던지게 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모든 선물을
경멸하는 일종의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행복은 보기만 해도 아름다운 것이다.
어린애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서 노는 데 열중한다. 자기를 위해 남들이
놀아 주기를 기다리지 않는다. 물론
어린이들도 화가 나면 얼굴 표정이 변한다. 그것은 어떠한
기쁨도 거절하는 얼굴이다. 다행히 이들은
곧 잊어버린다. 그러나 절대로 화낸 얼굴을 바꾸지 않는
어른들을 누구나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거기는 그럴 듯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나도 잘 안다.
행복하게 된다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에 대한 투쟁이다. 이 투쟁에서 지는
경우도 있다. 극복할 수 없는 사건이나
스토아주의의 초심자들에게는 당해 낼 수 없는 불행이
있다. 그러나 있는 힘을 다해서 싸운 연후가
아니면 결코 패배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아마도 가장 분명한 의무일 것이다. 특히 나에게
분명한 것은 행복해지려고 원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비관주의는 기분에 속하고, 낙관주의는 의지에
속한다. 본질적으로 유쾌하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기분이란 언제나 언짢은
법이다. 그리고 모든 행복은 의지와 자제로 되어
있다. 어떠한 경우에도 변명은 노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