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 행복이다
칼 힐티
현대의 예언자라고 불리워지는 스위스의 사상가이자
법학자. 이론보다는 인생을 관조하고 사색하는 생활 철학의
길을 열어 보임. 주요 저서로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병든
정신"등이 있음.
완성을 추구하는 충동으로 이 세상에서 완성이
이루어진 적은 없다. 그러나 완성을 추구하여 싸우는
영혼은 언제나 만족을 얻는다. 행복을 진실로
우리들이 모든 사상의 열쇠이다. 스스로 그것을
바라고, 개인의 노력으로 그것에 도달할 수 없을 때는 다수의
사람들과 공동으로 합심해서라도 추구하는 것이다.
행복은 학문의 탐구, 노력, 모든 국가적인 것, 또는
신앙적인 시설의 궁극적 거점이 되는 것이다.
인간들은 행복에 대해 제멋대로 해석을 하고 있지만
행복이야말로 인간 생활의 지상 목표인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어떻게 해서라도 행복하게 되고
싶은 것이다. 가장 엄격한 스토아주의일지라도
다른 사람들이 행복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단념함으로써 그들 유파대로의 행복을 얻으려고 하고
있으며, 극단적으로 이 세상살이의 속된 습성에서 탈피하려는
그리스도교인들까지도 별개의 생활 속에서 행복을
추구하고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염세주의자들도 결국은 그들의 비밀스러운
자랑을 간직하는 행복을 느끼고 있다. 불교 신자들도
무, 즉 무의식 중에 행복을 찾고 있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것만큼은 이 세상에 만인 공통의 것은
없을 것이다.
미적 추구자나 또한 그들에게 위대한 모범을 보인
괴테도 이미 자기 생활과 작품에서 증명한 것처럼
이따금 물질적 향락에 대한 생각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실로 그들의 새로운 유파는 사실은 미적이라고
할 수 없는 많은 것을 이론적으로 억지를 써서
미적이라고 주장하는 위험한 길을 더듬어 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행복을 추구하는 인사들에 대해서 우리들은
다만 실제로 그런 종류의 행복의 여러 가지 조건을
유례없이 풍부하게 갖추어 놓고 있었던 그들의 우상인
괴테의 말을 들어 볼 필요가 있다.
"결국 우리들의 생활은 고생과 일 그것뿐이었다고
하겠다. 나의 75년간의 생활에서 진실로 즐거웠던
것은 겨우 4주일 동안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75년간 겨우 28일간의 행복인 것이다.
미적인 향락을 즐긴 사람들을 볼 때, 그야말로
빈궁생활에 허덕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참으로
고생만을 일삼던 정직한 날품팔이 노동자라도
한 평생을 끝마침에 있어서 그런 비참하고 가련한
증언을 남기지는 않았으리라.
자신의 소망을 그 상상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 맞추어서 조정하는 법을, 인간은 나중에
가서야 저절로 경험에 의해 비로소 배우게 되는 것이다.
건강한 자연을 받아들이려고 하는 느낌은 학자나
저술가, 또는 예술가들의 여름철에 지친 표정을
보는 것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그들에겐 항상 휴양이
필요하고, 더구나 그 휴양을 하기 위한
여행 중에 다른 일에 관해서는 무슨 이야기든 즐겁게
얘기를 하면서도, 그들의 인생 이론에 따른다면
그야말로 인간 최고의 기쁨이고 동시에 인류의 최대
보물인 자연으로 돌아가서의 핵심에 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 어쨌든 자연으로 돌아가서 그 조용한 멋을
알고 소박한 생활을 사랑하는 취미의 시대가
지금 또다시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적당한 걱정거리, 그리고 그것에서 해방이 된다는
것, 그것이 인간의 행복 중에서도 매우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경험을 쌓게
된 사람들의 말에 따른다면 인생에 있어서
진실로 견디기 어려운 것은 악천후의 어렵고 고통스런
나날의 연속이 아니라, 도리어 갈라질 듯한
초록의 하늘을 가리는 한 점의 구름도 찾을 수 없는
일상적 하루하루의 연속이다.
오늘날의 염세적인 기분의 원인은, 그 대부분이
'행복은 도망쳐 버리기 쉬운 것이어서 좀처럼 예기한
것과 같은 행복은 얻어지지 않는다'라고 하는 경험이
있다. 실제로 지금 도처에 퍼져 있는 염치없는
현실주의라는 것은 대개 그것에 의해서 행복하게
되리라는 확신의 결과가 아니라, 그 밖의 모든 것에
대한 절망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더라도
아마 잘못은 아닐 것이다. 아무런 결과도 없는
일이나 소위 덕이라는 것도 영혼의 평화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 아니고 공공의 사업이나 선행, 애국
또한 그 모두가 거짓을 담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거나 인생의 올바른 길을 가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가 우선 일체의 우상을 팽개쳐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가문이라든가 처지, 습관 등에
의해서 얻은 편견을 모조리 버린다는 것이 진실된
행복에의 첫번째 관문인 것이다. 극히 드물게 볼 수
있는 행복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인 멕시코 국왕
막스처럼 '어떤 진리가 아닌 것, 혹은 편견을
버린다면 반드시 그 다음에는 행복감이 뒤따르게 되는
것'이라고 잘라 말하는 것은 정당한 판단이다. 그것은
또한 어두운 길에서 볼 수 있는 이정표이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들은 아마도 올바른 길을 찾아낼
수가 없을 것이다.
덕은 행복한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청렴한 로베스피엘이 칭찬한 그런
우상을 버려라. 덕이라는 것은 인간의 자연
그대로의 마음 속에 머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만족하기 위해서 덕이라는 관념은 전혀
불필요한 것이며, 극히 부족한 두뇌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허영심이 강한 사람들까지도 결국 자신에게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허영심이란
것은 대체적으로 자기의 가치에 대한 판단의 불확실성
때문에 생기는 것인 만큼 언제나 타인의 확인이
필요한 것이다.
언제나 자신의 의무에 충실한 사람의 부끄럽지 않은
양심은 부드러운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베개와
같은 것이라는 속담이 있다.
우리들은 항상 그런 양심의 소유자에게 축복의
꽃다발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지만, 아직은 그런
거룩한 분을 발견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단 하루만이라도 자신의 의무를 완전히
수행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랑, 사랑은 원래 신성의 일부이기에
인간의 마음에는 생길 수 없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가진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으리라. 인간의 마음속에 그려진
사랑의 희미한 그림자만으로 인간에게 행복을 줄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오직 이따금 있는 것이고,
또 항상 타인의 의지에 의해서 사랑을 되돌려 준다고
하는 매우 불확실한 전제 아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어린이, 아니 실로 동물의
새끼들마저도 사랑에 대한 본능을 가지고 있고 또
사랑에는 민감하다. 그러나 그들이 차츰 성장함에
따라서 모름지기 하나의 예외도 없이 환멸의 슬픔을
맛보게 되는 것만큼 비참한 것은 없다. 더구나 극히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행복의 근본적인 요소로써 '일'을 빼놓을 수는
없다. 일을 한다는 것은 인간의 행복 중의 가장 큰
요소의 한 가지인 것이다. 인간이 행복하고 싶다면 한
주일에 엿새 동안에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기의 이마에 땀을 흘리면서 빵을 먹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성공의 두 가지 전제를 피하는 자는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 중에서 가장 어리석은 자이다.
일을 하지 않고는 실제에 있어서 이 세상에서의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 일을 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행복인 것이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행복을
반드시 수반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 또한
잘못이다.
인간의 공상이란 별난 이상을 안고 있다고 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아마 쉴 틈 없이 일하는
천국이나 지상낙원 따위를 상상할 수는 없으리라.
실제로 우리들은 이렇게 말해도 좋을 것 같다.
현명한 사람일수록 자기가 하는 일의 결점을 알고
있는 법이다.
그날 할 일을 마치고 나서 보라. 모든 일은 잘 되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지금까지
한 사람도 없었다. 스스로 노동자라고 자랑하는
사람들까지도, 그러나 노동을 찬미하는 노래 그
이면에는 자신이나 타인이 일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도록 하는 채찍질과 같은 촉진제가 숨겨져 있기
마련이다. 대개는 모두 가능하다면 정규적인
노동시간을 감축시킬 생각을 하고 있다. 만약 일을
한다는 것 그 자체가 본디 행복과 똑같은 의미라고
한다면 그들은 가능하다면 일하는 시간을
연장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자들 중에서도 가장 기묘한 것은
아마 행복을 염세주의자에서 찾으려고 하는 자일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가장 비천한 인간도 아니다.
그들 중에는 대개 일종의 과대망상증 환자가 많다.
모든 일을 팽개쳐 버리고 자신을 포함해서 일체를
악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장엄하게 들릴 것이다.
그 악인 중에서도 스스로를 악인이라고 보고 그렇게
고백하는 자가 사실은 가장 선량한 사람이라고
내세우고 있다. 그리고 실제로 그가 타인이
악인이라고 생각한다는 사실에 진정으로 만족감을
느낀다면, 그런 대로 그는 무엇인가 선량하고 올바른
통로에 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영속적인 상태로서의 염세주의는 대개의
경우, 단지 찢어진 철학의 외투와 같은 것에 지나지
않고 그 찢어진 구멍에서는 인간의 허영심이 얼굴을
내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대식가인 괴물을 언제나
양육하지 않고는 도저히 행복이라는 목표에 접근할 수
없다. 가장 불행한 자는 단지 어떤 종교적인
종파에 소속하는 것으로써 행복을 얻으려고 하면서
결국은 속았다고 느낌으로써 크게 실망하는
사람들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겔추어 교수는 그의 저서 중에서
이렇게 말한 바가 있다.
"대체적으로 교회에 나가는 신앙인은 일주일에 한
번 최고의 은총을 얻기 위해 나가는 왕실 근무자가
있다. 즉 인간이 이따금 인류에게 봉사하면서 사회를
위해서 선행을 한다는 것은 남은 시간 즉, 여생을
안락하게 지내기 위한 이기심을 기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의 역사가 있고 나서부터 찾아 헤맨 행복의 길,
역사에서는 그것을 발견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들은 대개가 스스로의 인생 경험에 의해서 많거나
혹은 적은 그것들을 알 수 있으리라.
그러나 인간은 그 길에서는 도저히 행복다운 행복을
찾아낼 수 없었다. 물론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
성스러운 계단에 숨겨진 욕망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행복의 또 다른 조건 중에서
원리적인 세계 질서에 대한 굳은 신앙을 들 수
있겠다.
그런 질서 없이 세계는 단지 우연에 의해서 혹은
약자에 대해 그야말로 잔인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엄격한 자연법칙에 의해서 지배되고, 또
인간의 책략과 폭력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개인의 행복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
세계 질서 속에서의 사람들은 폭력을
휘두르든가, 폭력을 참고 견디든가, 아니면 쇠토막이
되든가 쇠판이 되어 얻어맞는 역할을 하는 것밖에
다른 수가 없다. 그런 것들은 고상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울리지 않는 비참한 상태임은 두말 할
필요도 없다.
엄밀히 말해서 인간은 이기주의자이거나, 혹은
위선자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그렇게 되지 않는 것은 자신의 철학에 대한 완전한
결론을 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불완전하지만 유일한, 구제의 방도는
총의 폭력으로 지배되는 세계국가의 건설인 것이고,
그것은 전세계의 소위 문화 국민을 포괄해서 최소한
그들 사이의 전쟁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황제시대의 로마제국, 또는 나폴레옹 1세의 주된
생각이 그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모든 국법 및 국제법을 그런 식으로 최후적으로
만들려고 하는 생각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사람들의 머리에 떠오르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인간을 개인적으로는 동물로, 정치적으로는 노예로
격하시키는 그런 인생관의 진리성은 약간만
고상한 사상의 소유자라면, 다만 그 마음 속 깊은
데서 치솟아 올라오는 감정적인 항의만으로도 그것을
부정할 것이 틀림없다.
설령 역사가 언제나 되풀이돼서 그 무가치성을
문자로 표현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그렇게 하더라도
윤리적인 세계 질서의 존재는 충분히 증명된 것이
아니므로 그런 인생관을 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들은 단테의 신곡 중의 '지옥의
문'에 기록된 구절을 전해 줄 수밖에 없다.
"우리들은 슬픔의 시가지 입구, 우리들은 영원한
고뇌에의 입구, 우리들은 멸망하는 겨레의 입구,
너희들이 여기에 들어가려면 일체의 소망을 버려라."
단테의 지옥에 표현되고 있는 여러 가지 묘사를
살펴보면 이 세상에서의 오늘날의 현실주의적인
인간의 생활과 비슷한 점을 많이 볼 수 있다.
그것은 마치 19세기 독일의 시인인 가이벨의 시에
나타난 것과도 같다.
"미소를 잊기 위해 /거기까지 내려가지 않아도 된다
/내가 노래하는 모든 고통 모든 고민 /공포와
아픔을 나는 이 세상에서 /이 프로레츠에서
찾았노라."
그것과는 달리, 윤리적인 세계질서를 수리화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행복에의 길은 바로 여기에 열려 있다! 그 이후는
마음 속 깊은 곳에 꿋꿋한 한 가지 신념이 자리를
잡게 되어 영원한 평화와 확신을 얻게 된다. 그런
것들은 밖에서 불어오는 폭풍우에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오히려 더 그 힘이 증대되어 간다.
이전에는 오만하기도 했고 또 낙담할 때도 있었던
마음 그 자체가 지금은 굳게 뭉친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오직 매일 일어나는 일에서 빚어지는
감정적인 것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도록
노력하면 된다. 그리고 굳게 부동의 신념을 지니고
생활하면서 감정의 지배를 받지 않고 활동을 하는
생활에서 행복을 깨달으면서 매일 매일의 보수를 받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비로소 올바른 길이 생기는 법이다.
소위 믿음이 철저한 사람들에게 있는 결점은,
언제나 감정에 빠지기 쉬운 행동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천성인 마음의 쾌락주의가 다만 경건한 체
겉치레의 옷을 입은 것뿐이고, 마음의 가장 깊은
곳은 아무런 변화도 없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그러한 성스러운 마음의 뒷면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것은 때묻은 향악욕뿐. 다만 그런 것은 형체만 다소
다를 뿐인 것이다. 어쨌거나 이것은 사람이 항상
경건하게 모실 우상도 아니고, 그것으로 인해 자기
자신을 숭배하게끔 할 만한 우상 또한 아니다.
숭배해야 할 것은 오히려 가장 자연스럽고 가장
건전한 생활이다. 올바르게 일을 해서 흘리는
땀이야말로 항상 새롭게 솟아나는 부단의 힘과 정신의
쾌활성을 갖게 하는 비밀이고 그런 것들이
모아짐으로써 진실된 행복감을 만들 수 있다. 실로
건강이라는 것도 최근의 의학에서의 연구 결과에서
알려진 것처럼, 본디 피할 수 없는 적에 대한 훌륭한
저항 방편인 것이다.
그러나 그 저항력에도 머지 않다 밝혀지겠지만
순수한 물질적인 성질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동시에
도덕적인 성질을 지닌 것이어서 여러 가지 도덕적인
속성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인간의 부단한 힘은 땀을 흘리고 일하는 데서
생겨난다.
요컨대 당신에게 힘이 있는 한 앞날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힘과 수명이 일치된다는 것이다.
그런 상태는 인간의 말년에 있어서 가장 희망적인
일이다.
윤리적인 세계 질서의 존재에 대한 확신, 그런
질서를 지키면서 일을 한다는 것, 그 두 가지는
내적으로 불가분의 것이다. 거기에다가 다음에 언급할
제3의 것을 첨가해서! 이 세 가지 이외의 모든
것은 대체로 부차적인 것인 만큼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사람들이 오직 진지하게
처신한다면 각 개인이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 여러
모의 필요성에 자연스럽게 응해지는 것일 테니까.
이 세상에 있어서의 윤리적인 세계 질서의 실현은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그것은
개인과 가족에 의해서 이루어는 것이지 처음부터
단체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각 개인은
단체 속에서 그 자신의 위치를 차지하고 그 위치를
확보 해놓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럴 때에 태만한
태도는 용납되지 않는다. 단테의 작품이나
성서에서처럼 천지의 출현을 묘사하는 참으로 시적인
정경에서 천사는 그 모두가 활발하고 결단성이 빠르고
간결하게 말을 하는 것이다. 결코 감상적으로
넋두리를 하지 않는 것은 그야말로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인생에 있어서 항상 용기와
겸손한 태도를 지닐 필요가 있다. 그것은 약간은
이상하게 느껴지는 사도 바울의 말, '나는 약할 때
강하다'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그 중의
한가지만으로는 각 개인에게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기쁨은 자진해서 추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올바른 생활만 한다면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다.
가장 단순하면서도 돈이 들지 않았는데 필요에
따라서 얻어지는 기쁨의 최상의 기쁨이다! 이것을
맛볼 수 있다면, 당신은 다만 두 가지 일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견뎌낼 수가 있으리라. 그
두 가지란 걱정거리와 죄를 짓는 일이다.
참다운 선이라는 것은 먼저 작은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어떠한 선도 처음부터 웃는 표정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올바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걸어갈 길은 모두가 이미 열려 있는 문을
통해서만 통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교제는 인생 경험이 원숙한 경지에
이른 당신에게 있어서도 역시 어려운 문제이고
또 생각할 여지가 있는 것이리라. 때문에 당신은 결코
타인을 미워해서도 안 된다. 또 쉽게 숭배해서도
안 된다. 그들의 의견이나 요구 판단 등을 지나치게
중시해도 안 된다. 그들을 심판해서도 안 되고
심판을 받아서도 안 된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은, 이 세상에서 지나치게 많은 것을
기대해서도 안 되고 세상을 지나치게 겁내서도 안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을 올바르게 보고, 선을
인정하고, 악은 무력한 것이며 영속성이 없고, 머지
않아 자멸하는 것이라고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그와 함께 마지막으로 말해 두고 싶은 것으로 이
세상에서의 일을 그다지 중요시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해두어야겠다.
당신들이 '오직 하늘에 머리를 두고' 살아가기만
한다면, 이 세상의 수많은 일들은 어떻게 되어
가거나 신경이 쓰이지 않게 된다. 중요한 일이 잘만
되어 간다면 사소한 일쯤은 중요시하지 않아도
된다. 대개는 사소한 일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특히
타인이나 타인의 판단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헛되이 괴로워하고 있는 자가 가장 훌륭하다고
인정되고 있는 부류도 많이 있다. 때문에 그들은
평상시의 일을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도 훨씬 어려운
것으로 만들고 있다. 소위 이러한 처세론은
그밖에도 얼마든지 더 첨가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이미 기술한 것처럼 본래
불필요한 것이다. 그 이유는 위에서 서술한 것과 같은
토대에서 오직 자연스럽게 더구나 각 개인의 필요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 경우
소중한 것은 그 토대인 만큼, 그것이 없다면 모처럼의
처세론도 실행이 불가능하다.
당신들은 이 세상에서 일컫는 교훈 또는 그것에
관한 훌륭한 책들마저 그다지 중시하지를 않는다.
그러나 그런 교훈도 어떠한 신념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고, 그런 신념은 또 어떤 인생관에서의 필연적인
사물인 만큼 그런 인생관이야말로 당신이 무엇보다도
먼저 획득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교훈은 과연 그 말이 아름답고, 귀에
솔깃한 것이며 읽기에, 또는 카드에 썼을 때는
멋지게 보이지만,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격언 수집가를 위해서
그 이상의 재료를 제공하는 대신에 오히려 독자에게
또 한가지를 소중한 진리를 알려주고 싶다. 즉
불행한 인간의 생활에는 언제나 수반된다는 점이다.
약간은 역설적일지도 모르겠지만 불행은 행복을
위해서 필요하다.
사실상의 경험에서 나타나듯이 불행은 대개 피할 수
없는 끈이므로 당신들도 어떤 방편으로든지
반드시 그것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생에
있어서 달관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운명과의 완전한
화해뿐이다. 그것은 저 '넘치는 흐름'과 같은 확실한
마음의 평화인 만큼 그리스도도 그의 제자들에게
이것만은 약속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그의 외면적으로 곤란하기 짝이 없던
마지막 대화에서 깊은 감정을 토로하면서 얘기한
것도 그러한 마음의 평화이다. 때문에 진실된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에는 외부의 사정 따위는 오로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
스토아 철학에서는 무감각증을 터득해서 그러한
외부에서 새기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고,
그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다른
방법으로 유효하게 해결할 수 있었다.
형제여, 다시 말하지만 인간이란 세상살이에서
괴로움이나 불행을 피할 수는 없다. 그것과 타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럴 경우 먼저 생각을
신중히 해야만 한다. 그 다음에는 일시적인 감정을
초월해서 부동의 신념을 가지는 거이다. 불행은 세
가지 목적이 있고, 동시에 세 가지 단계를 형성하고
있다. 첫째는 벌인데 그것은 여러 가지 행위에서 오는
자연스러운 귀결이니 그런 행위 그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벌이 반드시 행위의 뒤를
따르는 것은 마치 논리적인 귀결이 논리적인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다음은 정화, 이것은 사람이 불행에 의해서 보다
충실하고 진지하게 되고, 진리에 대한 보다 커다란
감수성 때문에 성립하는 과정이다.
마지막 단계는 자기 시련과 강화이다. 이것은
자신의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함으로써
행해진다. 이러한 경험을 여러번 되풀이함으로써
비로소 당신은 자신 속에 올바른 용기를 솟아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만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겸손이다.
아직도 그 문을 열지 못하는가
언제나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무엇인가 조그만한 불안이 끝없이 신변을 감돌고
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노년기가 되면 그 사람의
인상에도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또 당연한
보상이라고 할까, 그들은 그 행복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언제나 불안에 사로잡힌 심정을 지닌
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과정에 있어서 그 과정이
어떻든 그 자체가 부단한 행복으로 느낄 수 있는
바탕이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속되는
고난은 인간을 무정하게 만든다. 때로는 본디 고결한
인사라도 지나치게 자주 고난에 직면했기 때문에
실제보다도 무정한 사람으로 보일 때가 있다. 굳은
인정의 연결도 불행한 삶에서 맺어진다. 인간이 서로
고난을 겪으면서 신의를 잃지 않는다면 어떤
장애에도 굴하지 않는 보배를 얻었다고 하겠다. 그
보배는 진실된 우정이다.
착한 사람은 행복해야만 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이 세상은 그렇게 움직이고 있지 않으니 그것은
확실히 수수께끼라 하겠고, 그 수수께끼가 실로
수많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올바른 길을 가지 못하게
한다.
"지난날은 신앙에 용맹스러웠던 예수의 증인,
가난한 근심과 위험 속을 헤매는 것을 사람들은
보았다. 이 세상에서는 적합하지 않은 귀인, 곤궁의
나날을 보냈다. 왕족 중의 왕, 그들 인간들은
십자가에 못박았다."
실제가 바로 그렇다. 하지만 친애하는 독자 여러분!
여러분은 그것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라고
그것에 대하여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각오를
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평생 행복을 발견할 수
없으리라. 행복은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사자인
것이다. 사람들은 대개 그 광경을 보면 겁을 집어먹고
되돌아선다. 그리고는 오히려 행복에는 미치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손에 넣고는 그것으로 만족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들은 경험에 의해서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 즉 향락을 탐하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상상력은 현실을 훨씬 앞질러 가는
것, 상상력이 미리 그릴 수 있을 만큼 실제의
고통이 더 심했던 일은 절대로 없었다.
가장 심한 고통의 순간은 대개 고맙게도 감각이
둔해져서, 고통을 여러번 경험한 사람은 그 고통을
쉽게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누구라도 알고 있다.
그리고 첫째 불행은 그 다음에 닥친 불행을 견뎌내게
하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고통은
'각각 멋진 행복으로 들어가는 문'이라고 말해도 좋다.
고통에 대한 정신적인 싸움은 도리어 인간을
강건하게 만들어 주며, 정신적으로 아니 아마
육체적으로도 건강하게 해준다. 자기 자신을 어느
정도 가차없이 다루는 것, 즉 네가 좋아하건
싫어하건 너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일러 줄 수 있다는 것이 참다운
생활에는 진실로 필요하다. 진리에 대한 사랑과
정의에 대한 용기, 그것이 모름지기 진실된 교육의
기둥이다. 그것이 없다면 교육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사실 천국에 들어가는 것마저 힘이 필요하니,
용기 있게 힘을 쓰는 자, 그 사람은 들어갈 수 있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인간의 용기가 가장 필요한
것이다. 이 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행복이란
하나님과 함께 있다. 그 영역에 도달할 수 있는 힘은
영혼의 소리인 용기이다. 이 세상에는 그 이상의
행복은 없는 것이다. 만약 그런 조짐을 지니지 않은
행복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것을 갖고
싶지 않으리라."
이기심을 버리고, 영원을 파악해서, 사랑에
이끌려서 이 세상일을 단순한 수단이라고 보고 이것을
지배하라! 이것만이 이 세상에서 있을 수 있는 행복한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행복은 한 가지 현실이며
한 가지 사실이기도 하다. 그밖의 모든 행복은 꿈처럼
상상으로 그린 그림이다. 이러한 꿈은 젊은
시절은 몰라도 나이를 먹으면 누구라도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면 안 된다.
진정한 행복은 또한 우리들이 끊임없이 자기의
능력이 미치는 대로 항상 자신을 격려하며, 강제로
요구하는 것에서는 얻어질 수 없다. 오히려 우리들이
다시 이러한 인생관을 신봉하고 단연코 이
인생관을 실행해서 다른 것은 돌아보지도 않는다면
그때 행복은 자연 우리들을 찾아오게 된다. 즉
내적인 흐름이라는 것이 이러한 것이고, 이 흐름은
나이를 먹을수록 차츰 강해져서 우리들 자신의
정신이 성숙한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타인에게 흘러
그에게 나누어줄 수도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생활이 어떠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하려면 반드시 그 목표에 도달하는 일이 필요하다.
또 실제로 우리들은 그것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결심하고 나서 맨 첫 단계를
정복했다면, 단테가 말한 것처럼 '올라간다'는 것에서
커다란 기쁨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정화의 산'의 기슭, 거기서 다시 올라가려고 할 때
진정한 행복을 위해서는 어떤 댓가로 요구하는
대로 지불하겠다는 굳은 결심과 명백한 선언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들어가지
못한다. 그것보다 쉬운 길로 아직은 어느 누구도
행복에 도달한 사람이 없다.
일체를 버려라, 그러면 일체를 발견하리라!
이런 결심의 대가는 나중에 비로소, 그것도 조금씩
되돌려 받을 수 있다. 처음부터 당장 그 전액을
돌려 받는 자는 한 명도 없다.
괴테 역시 그의 풍부한 생활을 영위하는 동안에
과연 여러번 행복에 접근한 적은 있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이렇게 말하리라. 우리들이 잘 살아야 칠십
년 혹은 건강한 사람도 고작 팔십 년이면 종말을
고하게 되지만, 그리고 그 한평생이 비록 괴롭고
고통스러웠고 또 노동으로 일관했지만 그래도 그것은
행복한 한평생이었다고.
이것이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