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my blog with Bloglovin FraisGout: 행복이라는 말은 조심성 없는 표현이다
Showing posts with label 행복이라는 말은 조심성 없는 표현이다.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행복이라는 말은 조심성 없는 표현이다. Show all posts

행복이라는 말은 조심성 없는 표현이다

행복이라는 말은 조심성 없는 표현이다
    이투루 쇼펜하우어
  독일의 염세주의 철학자. 헤겔의 이성주의에
반대하여 의지의 형이상학설을 주장. 주요저서로
"의지와 이념의 세계" "도덕의 기초" 등이 있음.

  세상의 행복이라는 것은 거기에 내재하는 오류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나의 저서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2권 제49장이 분명히
파헤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다시금 이 문제를
차분히 생각해 보는 데 있어, 나는 나의 철학이
지향하고 있는 그런 고도의 형이상학적, 윤리학적
입장에 굳이 서려고는 생각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이
전개하려고 하는 해석은 이를테면 일종의 타협의
산물이다. 왜냐하면, 이 글은 세상의 일반적인 경험에
바탕을 두는 입장에 서 있고 이로 말미암아
생기는 잘못도 그대로 남겨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이 해석상의 가치는 제한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쨌든 행복이라는 말은 조심성이 없는 표현이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완전한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기서 다루는 주제가
끝없이 넓은 까닭도 있으나, 내가 이제까지 말해 온
것을 헛되이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나의 일관된
관점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모든 시대의 현자는 언제나 같은
말을 해왔고, 어리석은 자는 (그러니까 결국
모든 시대의 대다수 사람들은) 현자가 가르친 것과는
반대의 언제나 같은 행위를 해왔다. 앞으로도
역시 같은 상태가 계속될 것이다. 그리하여, 볼테르는
말했다.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본 것과 같은
어리석고 질이 낮은 상태대로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인간의 행복, 아니 그뿐만이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는 우주의 모든 살아 있는 상태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은 분명히 그 사람 자신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 기쁨이나 슬픔이 여기에 직접
나타난다. 즉, 가장 먼저 그 사람이 감각, 욕망,
그리고 사고의 결과로써 나타나는 것이다.
  이에 반해, 그 사람의 외부에 존재하고 있는 것들은
단순히 간접적인 영향을 줄 뿐이다. 그러므로
외부로부터의 움직임이나 그 관계가 같은 조건이라고
해도 사람에 따라서는 각기 다른 자극을 주어,
설령 같은 환경 아래 놓여져 있더라도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 된다.
  왜냐하면 사람이 직접적으로 부딪치게 되는 것은 그
사람 자신의 표상, 감정, 그리고 욕망의
움직임이며, 외부의 사물은 이러한 움직임이 그 사람
내부에서 일어나게 함으로써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는 먼저 각자가 그
세계를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사람의 생각의 차이에
따라 세계는 가난하고, 답답하고, 평면적이며, 또는
풍성하고, 재미있고, 뜻깊은 것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많은 사람이 타인의 생활 가운데서
재미있어 보이는 일을 부러워하고 있지만 오히려 다른
사람이 그러한 사실을 말할 때 그 일에 얼마나 흥미를
갖고 있는가를 나타내는 이해력이야말로
부러워할 만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럴 수밖에 없는 까닭은, 기지가 뛰어난 사람이
그렇듯 흥미 있게 표현한 그와 같은 일이라 할지라도
 평면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에 의해
포착되었을 때에는 너무나도 일상적인 세계의 한 점에
지나지 않는 사실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현상이 명백하게 나타나는 것은 실제로
일어난 사실에 바탕을 두고 쓰여진 괴테나
바이런의 많은 시들 안에서다. 머리가 좋지 않은
독자는 그야말로 보잘것 없는 일상적인 사건에서
그렇듯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 낸 시인들의
상상력을 자신들의 것으로 하기 이전에 그들
시인들의 미적 감각을 부러워하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없을 것이다.
  같은 물체를 보고도 우울증에 빠져 있는 사람은
비극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낙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흥미 있는 갈등을 느끼게
되고 점액질의 사람은 하찮은 것이라고 치부할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즉 모든 충실한 현재는 물 속의
산소와 수소처럼 아무리 양자가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을지라도 양자의 절반에서, 즉 주관과 객관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에서 형성된다.
  객관이 되는 절반이 완전히 같다고 해도 나머지
절반인 주관이 전혀 다른 경우, 또는 주관과 객관이
전도된 그 반대의 경우에도 현실은 전혀 다른 상태로
나타나게 된다.
  객관이 되는 절반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나머지
절반인 주관의 질이 좋지 않고 평면적인 것이라면
현실은 보기 흉할 뿐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고장이라고 해도 기후 조건이 좋지 않다거나 분위기가
형편없는 암실의 반사광으로 나타내져서는 아름답다고
생각되어지지 않는 것과 같은 사정에 처해지는
것이다.
  이를 보다 분명히 구명해 보기로 하자.
  잔디로 덮여 있는 야외 무대 위에서 어떤 배우는
왕후로, 다른 배우는 고문관으로, 또 어떤 배우는
하인, 병사, 장군 등으로 출연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구분으로 외적인 구분일 뿐이다. 그 내부, 이런
현상의 중핵에는 모든 점에 있어서 차이가 없는, 즉
고생이 끊일 사이가 없는 배우가 숨어 있는
것이다.
  삶 그 자체도 이와 같다. 무대 위에서의 자위나
재산 정도의 구분을 통해 각자에게는 그 배역에
어울리는 동작, 즉 연기를 해야 하는 역할이 부여된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행복이나 쾌감의 내적
구분은 이와 같은 지위나 재산 정도에 따른 구분과
일치될 수는 없다. 여기에도 고생이 끊일 날이 없는
어리석은 독백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인간의 괴로움이나 고민의 빛깔은 분명히 그
소재면에서는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형식적인
면에서는, 즉 본질적인 면에서는 누구나 거의 같다.
이러한 괴로움이나 고민은 사람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결코 지위나 재산의 유무, 다시
말해서 출연하는 배우의 연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현재 갖고 있는 것, 사라져 가는
것은 모두 언제든지 직접적으로 의식의 흐름 속에
니타나는 것뿐이다. 따라서 의식의 상태가 우선
본질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경우 문제가
되는 것은 의식 속에 펼쳐지는 갖가지 형상보다도
의식의 상태 바로 그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의
평면적인 의식 속에 나타나는 온갖 화려함이나 즐거움
같은 것은 불편한 감옥 속에서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의 의식보다 빈약하다.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에 있어서의 객관이
되는 절반은 운명의 수중에 놓여 있어 변하기 쉽다.
그러나 주관이 되는 절반은 우리 자신인 까닭에
본질적으로는 변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계로 인하여
모든 사람의 삶은 외적인 변화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는 하나의 테마에 따르는
일련의 바리에이션과 비교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의 개성으로부터 탈출할 수는 없다.
이것은 일단 놓여진 환경하에서는 자연현상이 그
본성대로 변경을 허용하지 않는 방법에 따라 선정한
범위 내에서 그대로 엉거주춤하고 서 있는 동물의
상태와 같은 것이다.
  인간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그 사람의
개성에 따라 각자에게 주어지는 행복의 많고 적음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다. 특히, 사람의 정신력에는
한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만족스러울 만큼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능력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것은 분명히 정해져 있다.
  그 사람의 정신력이 빈약하면 외부로부터의 모든
노력, 즉 인류나 행운이 그 사람을 위해 행해 온
모든 노력으로도 그 사람에게 평면적인 즐거움이나
쾌감 이상의 것을 안겨 줄 수 없다.
  그 사람은 감각적인 기쁨이나 친밀하고 화기애애한
가정에서의 생활, 수준이 낮은 사교활동이나 속된
여자에 만족 할 수밖에 없다. 흔히 말하는 교양을
지니는 것도 전체적으로 볼 때 사람이 자리잡고 있는
범위를 다소 확대할 수 있다 해도, 그렇게 눈에 띄게
할 수는 없는 것처럼 외부에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가장 고상하고 다양하며 거기에다 오래
지속되는 것은 정신적인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이 문제에 대하여
그릇된 생각을 갖게 마련인데 그것도 그 무렵의
정신력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런 것으로 미루어
생각해 보아도 우리가 누리고 있는 행복이라는 것이

얼마나 개성에 의존하고 있는가가 분명해진다.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 또는 다른 사람의 눈에 투영되는 우리의
모습에 의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운명은 바꿀 수 있는 것이다. 자기의
내부에, 비록 그것이 무형의 것이라 해도 재산을
지니고
있는 이상 우리는 운명에 의지하여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이에 비하여 어리석은 인간은
언제까지나 어리석을 인간이고, 평면적이고 우둔한
인간은 언제까지나 그대로일 뿐이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행복이나 즐거움에 있어서도
주관적인 것일 객관적인 것보다 훨씬 본질적인
것임은 '굶주림이 가장 좋은 요리인이다'라고 하는
격언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노인이 젊은이가
찬미하는 여신상을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하여, 천재나 성자의 생활 방법을 터득하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확충되고 있다.
  특히, 건강하다는 것은 모든 외적 가치를 훨씬 뛰어
넘는 의의가 있다. 때문에 건강한 거지가 병든
왕보다 행복할 것이다. 완전한 건강과 신체 조직의
컨디션 조절로써 생긴 차분하고 명랑한 성격,
사물의 내부에까지 침투하여 이것을 올바르게
파악하는 오성, 절도 있는 부드러운 의지, 바른 양심
등은 어떤 지위나 재산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값진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자기 자신만의 것, 즉 그 사람이
고독할 때 아무도 그 사람에게 무엇을 주거나 또는
그 사람으로부터 빼앗을 수 없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자기의 소유물이나 그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투영되는가 하는 것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정신력이 강한 사람이 매우 고독한 처지에
놓이더라도 자기의 정신이나 상상력을 상대로 하여
이를 이겨낼 수 있는 반면, 어리석은 사람은 설령 사교다,
연극이나 영화감상이다, 여행이다 해서 연거푸
어떤 변화를 추구해도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는
무료함을 내부로부터 몰아낼 수가 없다.
  선량하고 절도가 있고, 거기에다가 부드러운 성격을
지닌 사람은 불우한 환경에 처하더라도 이를
극복할 수 있으나, 탐욕스럽고 질투심이 강하고
악의에 찬 사람은 제 아무리 재산이 많다고 해도 이에
만족하지 못한다.
  하물며, 이상할 정도로 정적이고 품위 있는 개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는 보통 사람이 정신없이
빠져들고 있는 즐거움의 거의 모두가 필요하지 않은
것일 뿐만 아니라, 귀찮고 신경질 나게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사치스러운 물건이 잘
팔리는 것을 보고 '내가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그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소'라고 말했다.
  우리가 행복을 누리는 데 있어서 인격은 무엇보다도
우선하는 조건이며 본질적인 것이다. 그 까닭은,
인격은 언제나 모든 것에 우선해서 존재하며 또한
모든 상황에 걸쳐서 활동하며 나아가서 인격은 다른
두 항목의 재화, 즉 지위나 재산처럼 운명에 좌우되지
않으며 우리로부터 빼앗아 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인격의 가치는 다른 두 항목의 가치가 다분히
상대적인 것과는 달리 절대적이다. 이러한 사정에
비추어 볼 때 사람은 외부에서 어떤 힘이 작용되기는
힘든 존재인 것만은 분명하다. 중요한 것은
주어진 인격의 범위 내에서 되도록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인격에 상응하는 노력을 쌓아
자기의 인격이 포용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자신을
단련하여 다른 모든 조치를 가급적 피하며, 이것이라면
인격에 어울리는 정도의 지위, 직업 및 생활방법을
선택하는 것이다.

  헤라클레스가 무색할 정도로 근육이 발달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만일 이 사람의 외부의 어떤 사정에
의해 자질구레한 데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수공업에
종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되거나, 이 사람으로서는
전혀 엉뚱한 도저히 무리라고 생각되는 고상한 연구나
두뇌 노동에 쫓겨 이 사람이 본디 지니고 있는
강인한 체력이나 완력을 쓸 수 없게 된다면, 이
사람은 평생 동안 자신이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이상으로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는 사람은 다음과
같은 사람일 것이다. 어디에 내놓아도 부족함이
없는 지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찮은 일에 종사하거나, 그 사람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육체노동에 종사하고 있는 까닭에
지성을 연마하는 것과 그것을 이용하는 것도
불가능한 그런 사람은 자신을 불행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지만, 특히 젊은 사람들이 범하기 쉬운 사고의
오류, 다시 말해서 사실은 그렇지도 않으면서도
자신은 모든 면에 있어서 강하다고 생각하는 미망의
위험은 피해야 할 것이다.
  재산의 첫째 항목이 다른 두 항목보다도 매우
중요하다고 하는 사실에 입각해서 생각해 볼 때
재산을 늘리는 것 이상으로, 건강을 유지하고 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그러나 평범한 의미에서의 재산도 그것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면 오히려 우리의 행복을 그르치는
결과를 낳는다. 때문에 돈이 많은 사람은 자기를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그들이
정신적인 일에 종사할 수 있을 정도의 정신을
단련시켜 오지 않았으며, 따라서 정신을 단련시키는
일에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두말 할 것도 없이 현실적인 자연스러운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이상의 재산의 축적은 우리의
쾌감을 상승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지 못한다. 오히려
지나친 재산의 축적은 비대해진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서 필연적으로 뒤따를 수밖에 없는 각종 배려에
의해 쾌감의 상승 작용이 방해받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건전한 정신의 함양에
힘을 기울이기보다는 재산을 증식시키는 데 더
열심이다. 실제로는 정신을 함양하는 것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 즉 소유물 보다 훨씬 더 행복에
기여하고 있건만...
  많은 사람들이 마치 개미처럼 부지런히 움직이며,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재산을 늘리기 위해 쉬지
않고 활동하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자기가
안을 수 있는 가시권내의 좁은 범위를 뛰어넘어
사물을 바르게 볼 수 없는 그들의 정신은 공허하며,
이는 결국 다른 사물 모두에 대해서도 감동할 수
없게 만든다. 인간의 최대의 낙인 정신적인 즐거움을
그들은 누릴 수가 없는 것이다.
  자기 자신에게 감추어져 있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이
행복을 누리는 데 있어서 가장 본질적인 것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란
보편적으로는 별로 대수롭지 않은 분량에 지나지
않는다는, 단순한 그러한 이유에서 괴로움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사람의 대부분도 괴로움과의
싸움을 현재에도 하고 있는 사람과 비교해 볼 때 역시
불행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리하여 오락이라고 하는 사냥감을 향해 공통의
사냥이 행해지게 되는데, 그것도 우선은 여러 가지
종류의 놀이나 감각적 즐거움에서 비롯되어 드디어는
주색의 탐닉에 이르게 된다.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는 생활을 해온 좋은 가문의
아들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유산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짧은 기간 동안에 탕진하고 만다. 이러한
낭비의 원인은 정신적인 빈곤과 공허함에서
생기는 것이다.
  외면적으로는 풍요로우나 내면적으로는 빈곤한 채
세상에 보내어져, 외부로부터 모든 것을
받아들이면서 외면적인 풍요로써 내면적인 빈곤을
메꾸어 가려는 헛수고를 계속하는 청년들은, 마치
젊은 여성의 분비물로 스테미너를 강하게 하려고
눈물겨운 수고를 하고 있는 노인과 다를 바 없다.
이러한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면 결국 내면적인 빈곤이
외면적인 빈곤마저 불러들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다.

  나는 젊었을 때 어쩌다가 낡고 오래된 책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 책의 내용 가운데 '많이 웃는
사람은 행복하고 많이 우는 사람은 불행하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이 말은 그 표현이 너무 평범하고
속되어서 언뜻 생각하면 우리에게 별다른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렇지만, 나는 평범하면서도 속된 그
표현 속에 진리를 꿰뚫어보는 예지가 번뜩이고 있는
이 말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의식의 내부에 명랑함이 들어와
자리잡을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두어야
한다. 명랑함은 마음의 문에 빗장을 걸어두고 있을
때에는 절대로 들어올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여러 가지 많은 생각 때문에 고민하는
것으로 향상을 기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기 힘든 반면, 명랑함은 보다
확실하고 직접적으로 획득할 수 있는 수확이다.
명랑함만이 말하자면 행복의 진성화폐이고 그밖의
것은 단순한 은행권에 지나지 않는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 그 까닭은, 명랑함만이 지금 이 순간에
사람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랑함은 그 본질에 있어 두 가지 무한의
시간 사이에 존재하는 불가분의 '현재'라고 하는
형식 가운데에 놓여진 것으로서는 가장 값진
보물이다.
  나무 같은 것이 부쩍부쩍 자라기 위해서는 바람에
흔들린 필요가 있다. 이러한 현상을 가장 간결한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는 라틴어의 다음 법칙은 매우
적절하다. '모든 운동은 그것이 빨라지면
빨라질수록 그만큼 운동량은 더욱 많아진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행복이 그때그때의 기분과
건강상태에 따라 얼마나 좌우되느냐 하는 것은 같은
외적인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혹은 같은
사건에 접하게 되더라도 건강하고 평온한 때 받는
인상과 질병 때문에 마음이 우울할 때는 인상을
비교해 보면 쉽게 알 수가 있다.
  사물이 개관적인 기준에 따라 실제로는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 우리의
판단 기준, 즉 주관적인 기준에 따라 사물이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도
하고 또는 불행하게도 한다. 에픽테토스는 이것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에 대한 견해가
사람으로 하여금 망설이게 하는 것이다.' 우울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열 가지 계획 중 아홉 가지가
성공했다고 해도 성공한 쪽을 기뻐하지 않고, 실패한
한 가지 사실에 마음을 기울여 우울한 기분에 사로
잡힌다. 그런데 그 반대로 한 가지가 성공하고
나머지 아홉 가지가 실패했을 경우 명랑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한 가지만이라도 성공한
사실로써 마음을 위로하고 명랑한 마음을 가지려고
한다.
  그러나 우울한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람, 즉
음울하고 화를 잘내는 성격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명랑하고 고민이 적은 사람에 비해, 분명히 머리
속으로 상상하고 있는 재난이나 괴로움에 직면했을
때는 참을성이 부족하겠지만 실제의 재난이나 괴로움
따위에 직면해서는 잘 견디어낼 수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물을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은
언제나 최악의 사태를 두려워하여 그 언젠가
닥쳐올지도 모르는 사태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는 까닭에, 사물을 언제나 긍정적으로
보고 밝은 전망만 세우고 있는 사람에 비해 오류를
범하는 일이 적기 때문이다.

  어림잡아 행복의 두 가지 적은 괴로움과 무료함일
것이다. 이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우리가 두 적 가운데 한 쪽을 멀리 하는 일에
성공한다면 다른 한 쪽의 적에게도 다가가는 그 반대의
노력은 올바르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의 생활은 이 양자 사이에서 강약의
차이는 있겠지만 진동하고 있는 상태와 다름없다.
어째서 그러냐 하면, 두 적은 항상 대치해 있어 한
쪽이 외적 또는 객관적이면 다른 쪽은 내적 또는
주관적이라고 하는 대립과 항쟁의 맞물림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외적으로는 재난과 결핍이 고통을 낳으며, 이에
비해 안정과 풍요로움이 무료를 낳는다. 이에 따라
가난한 계층의 사람들이 재난, 즉 고통과 끊임없이
투쟁하고 있는 데 대해 부유층 사람들은 언제나
거기에다가 실제로 그들의 투쟁의 대상, 즉 무료함을
자기들의 생활권 밖으로 몰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도전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한편 내적 또는 주관적 항쟁은 개개의 인간에게
있어서는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에 대한 감수성이
대립관계를 이루고, 거기에다가 그 감수성은 그
사람의 정신력으로써 정해진다는 사실에 의해
좌우되고 있다.
  즉 정신이 맑지 못한 사람은 감수성이 예민하지
못하여 외적인 자극에 둔감하며, 이런 사람은
각양각색의 괴로움이나 슬픔에 대한 반응도 약하다.
정신이 맑지 못하면 그것을 반증이나 하듯이
사람들의 얼굴에 그 내면이 공허하다는 징후가 뚜렷이
나타난다.
  정신세계가 풍요로운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고통이 없고, 궁색하지 않으며, 그러면서도 되도록이면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난 받지 않는 생활을 추구한다.
  어디에도 매어 있지 않는 여가는, 그것을 분명히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는 한 인간생활의 꽃이다.
오히려 과일이라고 하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자기 자신의 내부에
어떤 올바른 것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짐스러워 숨이
막힐 정도로 권태로워 하고 있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일 뿐이며, 이들에게는
자유로운 여가도 결국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는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적은 양의 수입으로, 또는
수입 없이 견딜 수 있는 나라가 가장 살기 좋은
나라이듯이 자기의 내부에 재산을 충분히 저축하여
자기를 지키기 위하여 외부로부터 매우 적은 양의
유입 밖에는 필요로 하지 않는, 아니면 전혀 아무것도
들여오지 않아도 되는 사람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 까닭은 외부로부터 어떤 물건을 받아들이려면
비용도 많이 들 뿐만 아니라 그에 속박될 수도 있는
데다가 싫다는 감정에 사로잡힐 위험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유입된 물건은
결국에 있어 자기 고장의 산물에 대한 일시적인
애용품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나 외부의 어떤 것에
대해서도 별로 많은 것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의 범위는
매우 좁다. 결국 누구나 자기 한 사람에 국한시킬
수밖에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지금 어떤 사람이
혼자 있느냐 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