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
작가: 홍명희(1888--1969)
이 작품은 벽초 홍명희의 유일한 문학작품으로, 1928년부터 1939년 까지 <조선일보>에 몇 차례 중단되면서 연재되었던 일제 치하의 대하
역사소설이다. 조선 명종 때에 황해도를 무대로 하여 탐관오리와 토호세력과 맞서 싸웠던 의적 임꺽정의 활약상을 그린 이 작품은, 소설에
드러나 서민사대부궁중의 생활모습과 토속적인 표현들이 매우 풍부하여 민속학이나 국문학의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비록 미완성의 작품으로 남았지만, 민중사관이 뒷받침된 웅장한 규모와 섬세한 필치가 교향악을 이루고 있다.
이광수최남선과 함께 조선의 3천재
벽초 홍명희는 한국 역사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연 <임꺽정>의 작가이자, 신간회 운동의 주역으로 한국 근대문학사와 민족해방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도 그에 합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인물이다.
해방 후 월북하여 북한에서 고위직을 역임했기에, 그동안 그에 대한 논의는 금기시되어왔다. 그러나 최근 남북관계의 진전에 따라 그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다.
그의 생애를 출생 이후 1918년 중국으로부터 귀국할 때가지의 수학과 방랑의 시기, 1919년 31운동 이후 신간회 운동으로 인해
투옥되는 1929년까지의 사회적 활동기, 그후 식민지 시대 말까지 지조를 지키며 <임꺽정>의 집필에 몰두하던 은둔기, 그리고 해방 정국과
북한에서의 활동기로 나누어 살펴본다.
수학방랑시대
충북 괴산에서 홍범식과 어머니 송씨의 4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증조부는 판서를, 조부는 참판을, 한일합병시 자결한 부친
홍범식은 금산 군수를 지냈다. 그리고 그 아들 홍기문은 국문학자로 월북 후 북한에서 사회과학 원장을 지냈고, 손자 홍석중은 조부의 뒤를
이어 북한에서 역사 소설가로 활약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홍명희 일가의 족보는 한국근현대 지성사의 변천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축도라
할 수 있다.
유난히 허약했던 벽초는 3살 때 어머니를 잃었다. 5살 때부터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특히 그의 비상한 기억력은
일생 동안 화제가 되었는데, 최남선이나 정인보 등도 탄복을 했다 한다. 그는 10살부터 <삼국지><수호지> 등 중국 고전소설을 탐독했다.
훗날 그의 <임꺽정>은 이 당시 독서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
13세 때, 민비의 일족인 16살의 민씨 부인과 조혼을 했다. 민씨부인은 매우 총명한 여성이어서, 평생 동안 남편의 사랑을 받았다. 고향에서
한문공부를 하던 벽초는 14살에 서울로 올라와 중교의숙에서 처음으로 신학문을 접하게 된다. 18세인 1905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지내던 중 무료함을 이기기 위해 50권의 <사전춘추>를 독파했다 한다. <사전춘추>란 춘추의 <좌씨전><공양전><곡량전>과 남송의
호원이 지은 <호씨전>을 말한다. 마을에 머물던 일본인 부부에게 일본어를 배우면서 일본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1906년에 그는 동경의 다이세이 중학에 입학했다. 재학시절 벽초는 하루 이틀에 책 한권을 독파할 정도로 광적인 독서열을 보였다. 특히
침통하고 사색적이며 인생의 맛이 들어 있는 러시아 문학, 그중에서도 설교에 가까운 톨스토이 작품보다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애독했다. 그리고 영국의 시인 바이런의 작품과 당시 일본문단의 독보적인 존재였던 <도련님>의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작품에 탐닉했다.
홍명희의 일본 유학시절에 또 한가지 주목할 만한 사실은 문일평이광수최남선과의 만남이다. 문일평은 벽초와 동갑이었고,
이광수는 네 살 아래, 최남선은 두 살 아래다. 문일평과 이광수는 명치학원 중학부의 동급생이었다. 당시 이광수는 벽초를 통해 러시아
문학을 접하게 되고, 독서량이나 문학적 식견에 있어 벽초를 자기의 지도자로 생각했다. 이광수가 최남선을 알게 된 것도 벽초를
통해서였다.
이러한 동경 유학시절의 만남을 계기로 최남선과 이광수는 귀국하여 2인 문단시대를 열게 되고, 벽초는 활발하지는 않지만 이들과 함께
문단생활을 했다. 이들은 이때부터 <조선의 3천재>로 불렸다.
재학중 성적이 출중했던 벽초는 졸업을 목전에 둔 1910년 봄 돌연 귀국하고 만다. 5년간의 일본유학은 여러모로 충격적 체험이었다.
전통적인 분위기를 떠나 독신생활을 하면서, 근대적인 학교교육을 발전적으로 받는
한편,당시 일본문단과 사상계에 풍미하고 있던 첨단적인 사조에 접하게 된 것이다. 우선 러시아 문학은 강렬한 현실의식과 진지한
인생탐구의 정신을 심어주었고, 바이런이나 일본문학은 그 악마주의적인 반항성과 퇴폐성으로 그로 하여금 내면적 갈등을 겪게 했다.
그러나 을사조약 이후 몰락해가던 조국의 운명은 그의 정신적 방황에 종지부를 찍게 했다. 문학에 대한 열정도 사라지고, 무언가 근본적인
방향전환을 모색하기 위해 돌연 귀국한 그에게 충격적인 사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귀국 후 최남선의 권유로 <소년>지에 번역문을 싣기도 하면서 소일하던 중, 1910년 8월 29일 마침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당시 금산 군수로 재직하고 있던 그의 부친 홍범식은 <<나라가 망했구나, 나는 죽음으로써 충성을 다하련다>> 하는 유서를 남기고 소나무
가지에 목을 매고 죽었다. 벽초는 부친의 유언을 각골명심하여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아 자식들 앞에서 <<나는 <임꺽정>을 쓴 작가도 아니고,
학자도 아니다. 홍범식의 아들, 애국자다>>라고 말했다 한다.
3년상을 마친 벽초는 1912년 중국 상해로 향했다. 당시 중국은 1911년 신해혁명의 성공으로 동양에서 최초로 공화정이 실시되는 등 정치적
변혁을 겪고 있었는데, 이러한 중국의 혁명이 우리민족의 독립에 새로운 전환을 가져올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다. 또 위당 정인보와의
친분도 작용했을 것이다.
상해에서 정인보문일평조소앙 등과 함께 지내며 신규식박은식 선생 등도 만날 수 있었다. 독립운동의 재원확보를 위해
1914년부터 3년간 싱가포르에 머물기도 했다. 상해로 돌아와 단재 신채호를 만나 그의 학식과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깊은 신뢰를 갖게 된다.
1918년 7년간의 방랑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한 후 모처럼 안온한 분위기 속에서 지친 심신을 회복하며 장남인 기문의 교육에 주력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고, 이듬해 일어난 31운동으로 벽초의 인생에 새로운 전환기를 맞게 된다.
신간회 활동기
32세 되던 해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괴산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면서 고난에 찬 민족해방운동의 도정에 본격적으로 들어선다.
동경에서 <28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이광수, 31운동 당시 <31독립선언서>를 기초한 최남선 등이 그와 동고동락을 같이
했던 인사들이란 점을 감안할때, 벽초가 한동안의 칩거상태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홍명회와 숙부 2명, 그리고 아우가
주도한 괴산에서의 시위운동은 뜨겁게 폭발했으나, 결국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부친 순국 후 급격히 기울기
시작한 가세는 그가 감옥에 있는 동안 말이 아니었다.
옥고를 치른 벽초는 대가족을 이끌고 서울로 상경하여 셋집을 전전했다. 생계를 위해 교단에 서기도 하고 언론계에 몸담기도 했지만,
세상이 다 아는 벽초의 가난은 해방 후까지 계속되었다. 1923년에는 사회주의 사상 단체인 신사상연구회 및 그 후신인 화요회에 주요 멤버로
참여했다. 민족지로 출발한 <동아일보>가 식민통치에 타협적인 경향을 보이자 대대적인 불매운동이 일어났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동아일보>는 민족주의자인 남강 이승훈을 사장으로, 홍명회를 주필 겸 편집국장으로 초빙했다. 이후 <동아일보>는 사내의 분위기와 논조가
달라지게 되었다. 한국 신문사상 최초로 신춘문예를 공모했던 것도 이때였다. 당시 중국에 망명중이던 신채호의 논문, <조선역사상 일천년래
대사건> 등을 <동아일보>에 게재해준 것도 벽초였다.
그러나 <동아일보> 사주인 김성수는 사내 분위기가 진정되자, 여론무마용으로 초빙했던 이승훈 사장을 5개월 만에 고문으로 밀어내고,
자신이 사장으로 들어앉아 경영과 편집의 전권을 장악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벽초는 의욕을 잃고 1925년 사직서를 내고 <시대일보>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나 <시대일보>가 재정난으로 다음해 폐간되자. 벽초는 조만식 선생의 후임으로 정주 오산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오산학교는 이승훈
선생이 설립한 민족교육의 전당으로 <동아일보>에 함께 재직했던 인연이 작용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벽초가 겨울방학을 맞아 상경했을 때,
신간회 창립논의가 활발하여 벽초는 더이상 학교에만 전념할 수 없었다. 학교를 자주 비우고 신간회 설립에 분주하자. 이승훈과 갈등이 생겨
결국 채 1년도 안되어 오산학교 교장직을 사임하고 말았다.
이후 벽초는 신간회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한편, 1928년 10월 <조선일보>에 대하 역사장편소설 <임꺽정>을 연재함으로써 작가의 길로
들어선다.
또한 벽초는 당시 문단에서 세력을 떨치던 카프(KAPF)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카프 운동에 대한 동정을 표시했다. 이는 그가 해방
이후 좌익 문인단체인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으로 추대된 것과 상통한다.
1927년 2월에 창립되어 1931년 5월까지 존속했던 신간회는 민족해방 운동가로서의 벽초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가장 큰 기대를 걸고
활동했던 무대였다. 신간회의 창립과 활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던 벽초는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위한
민중대회를 준비하다가 검거되어 2차 투옥되었다. 그리고 1932년 1월 출소했다.
세상에 나온 벽초는 특별한 상황변화가 없는 한 국내에서의 민족해방운동은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하고 독서와 <임꺽정>에 몰두한다.
<임꺽정> 집필
좀처럼 붓을 들지 않던 벽초가 <조선일보>에 장기간 <임꺽정>을 연재하게 된 경위에 대해 그는 후일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글쎄 그게 그 전에 안재홍씨 등이 <조선일보>에 계실 땐데 한달에 생활비로 얼마씩 준다고 해요. 그런데 그냥 줄 수는 없으니 그 대신
글을 무엇이든지 쓰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그때는 생활이 좀 궁한 때라 그걸 쓰기 시작한 것입니다.>>
첫 회분이 1928년 1월 21일 처음으로 연재되었는데 서두의 <머리말씀>에서 <<자, 임꺽정이의 이야기를 붓으로 쓰기 시작하겠습니다. 쓴다
쓴다 하고 질감스럽게 쓰지 않고 끌어오던 이야기를 지금부터 쓰기 시작합니다>>라고 한 것을 보면 <조선일보>측의 원고청탁은 연재가
시작되기 훨신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은 1929년 12월 26일 까지 307회에 걸쳐 연재되었다. 그러다가 1929년 12월 23일 벽초가 신간회 민중대회
사건으로 돌연 검거되자, 인기 연재소설이 중단될 위기에 처한 <조선일보>측에서 당국과 교섭을 벌인 결과, 벽초는 며칠 동안 경기도
경찰서의 유치장에서 집필할 수 있었다. 그러나 12월 24일 구속 수감되자 연재는 중단되고 말았다.
이후 1932년 12월 1일부터 1939년 7월 4일까지 단속적으로 연재되다가 1940년 <조광> 10월호에 1회분을 연재했다. 그러나 결국 붓을 꺾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장장 13년간에 걸친 이 대작은 아쉽게도 미완성으로 끝났다. 815해방 후 좌익운동에 가담하여 최대의
문인단체였던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1947년 민주독립당 위원장에 오른 뒤 이듬해 민주독립당을 이끌고 월북했다.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참가했고, 남한의 정세가 악화되자 월남하지 않고 그대로 북한에 남았다. 북한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국평화통일 위원장 등을 역임한 뒤 부수상까지 지냈다.
조선 중기 사회를 그린 미완성 역사소설
자, 임꺽정의 이야기를 붓으로 쓰기 시작하겠습니다. 쓴다 쓴다하고 질감스럽게 쓰지 않고 끌어오던 이야기를 지금부터야 쓰기 시작합니다.
각설, 명종대왕 시절에 경기도 양주땅 백정의 아들 임꺽정이란 장사가 있어^5,5,5^
<봉단편>
연산군 때 거제도로 유배당한 홍문관 교리 이장곤은 유배지에서 함흥으로 탈출한다. 한 처녀에게 물을 얻어 마시고 <<저런 처녀에게
장가들어 시골에 묻혀 지내면 죽을 고생도 아니할 것이지>> 하고 생각한다. 그는 그녀의 뒤를 따라가 신분을 숨긴 채 함흥 고리백정의
사위가 된다. 그는 봉단을 아내로 맞아 금실 좋은 부부생활을 한다. 그러던 중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그는 상경하여 동부승지로 승진하고
봉단이는 숙부인이 된다.
본래 학식 있는 백정으로서 이장곤의 청으로 함께 상경한 봉단의 숙부 양주팔은 묘향산 구경을 갔다가, 그곳에서 도인을 만나 천문지리와
음양술수를 받고 서울로 돌아온다. 그리고 이장곤의 주선으로 재취하여 서울에서 가정을 이루고 소일삼아 갖바치일(가죽신 제조)을 하게
된다. 뒤이어 상경한 봉단의 외사촌 임돌이도 양주팔의 주선으로 양주 백정의 데릴사위로 들어간다.
<피장편>
혜화문 문턱 초가집에 사는 갖바치 양주팔은 미천하나 문식이 높아 조광조 등 당대의 양반들이 드나들었다. 이장곤의 연출로 대사헌 조광조
등과 교유하게 된 갖바치는 정변을 예견하고 조광조에게 낙향할 것을 권유하나 망설이고 있던 조광조는 기묘사화를 당해 사사되고 만다.
봉단의 외사촌 임돌에게는 이쁜이와 꺽정이 남매가 있었는데, 딸은 갖바치의 아들 금동이와 혼인하게 된다. 갖바치는 성질이 사나워
걱정거리인 꺽정이의 인물됨을 알아보고 맡아 기르기로 한다. 임꺽정은 한 동네에 사는 이봉학박유복과 더불어 의형제를 맺고
갖바치에게서 글을 배운다.
꺽정이는 한 노인을 만나 검술을 배운다. 선생은 그에게 <<악한것을 미워하는 것은 곧 착한 일이라, 그 미움은 금하는 것이 아니로되 까닭
없는 미움으로 인명을 살해함은 천벌을 면치 못할 일이다>>라고 일러주고 제자로 허락한다. 그리고 이봉학은 활쏘기에 비상한 재능을
발휘하고, 박유복은 창던지기의 명수가 된다.
그뒤 임꺽정은 입산하여 병해대사가 된 갖바치를 따라 각처를 유람하게 된다. 백두산에 이르러 거기에 살던 운총과 황천왕동이 남매를 만나
후에 운총과 혼인을 맺은 뒤 임꺽정은 양주로 돌아온다. 그리고 병해대사는 죽산 칠장사를 찾아간다.
여러 중들이 일어서면서 법당 마루에 나선 대사의 모양을 보니 머리에는 금광이 둘려 있고 몸에는 서기가 어리어 있는 것같이 보였다.
<<생불이 강림하신 것을 눈이 없어 몰랐습니다.>>
하고 여러 중들이 나란히 합장배례를 드리고 있었다. 이리하여 병해대사는 칠장사에서 생불대접을 받고 지내게 되었다.
<양반편>
중종 이후 양반사회는 전쟁으로 혼미를 거듭한다. 명종이 즉위해 대왕대비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외척인 윤원형이 우의정이 되어
실권을 장악한다. 게다가 문정왕후가 불교를 믿어 궁중불사가 지나쳐 나랏일을 그르쳤다.
한편 중 보우는 불교를 신봉하는 대왕대비의 신임을 빙자하여 불사를 크게 일으키는데, 양주 회암사에서 재를 올리던 그의 앞에 홀연히
병해대사가 임꺽정을 거느리고 나타나 꾸짖고 사라진다.
그 사이 장년의 가장이 된 임꺽정은 이봉학으로부터 을묘왜변의 소식을 뜯고 출전하고자 하나, 백정이라는 신분 때문에 군총에 뽑히지
못한다. 할 수 없이 홀로 향하게 되고 위기에 빠진 이봉학을 구출해준다.
<의형제편>
농민의 유복자로 태어난 행랑어멈이 된 편모 밑에서 자라난 박유복은 부친을 죽게 한 원수를 갚기 위해 노첨지를 죽인다. 관가에 쫓기자
도주하다가 도둑 오가의 수양딸을 얻어 청석골에 눌러 살게 된다.
청석골 인근에 사는 머슴 곽오주는 장꾼들을 털던 오가를 때려 눕힌 뒤, 보복하러 나온 박유복과 힘자랑을 하다가 의형제를 맺게 된다.
그뒤 주인집의 주선으로 이웃 마을의 젊은 과부에게 장가를 들게 된다. 아내가 해산 끝에 죽고 말자, 그는 동냥젖으로 아기를 키우려 한다.
그러나 배고파 밤새 보채는 아기를 달래다 못해 순간적으로 죽이고, 청석골 화적패가 된다.
소금장수인 천하장사 길막봉이는 자형을 불구로 만든 청석골 도둑 곽오주를 때려잡아 관가에 넘기려 한다. 그러나 평소 길막동과 안면이
있는 임꺽정이 청석골에 와 이들을 화해시킨다. 다시금 소금장수 길에 나선 길막동은 안성처녀 귀련과 정을 통하여, 그 집안의 데릴사위로
들어간다. 그러나 장모의 구박이 심하여 처가를 떠나 청석골에 들어오게 된다.
백두산 태생이라 나는 듯이 걸음이 빠른 황천왕동이는 매부인 임꺽정의 집에서 장기로 소일한다. 어느 날 장기의 명수라는 봉산의 백이방을
찾아나섰다가, 천하일색인 딸의 배필을 구하려는 백이방의 까다로운 사위 취재를 통과하여 장가를 들게 된다. 그리고 그 덕분에 봉산에서
장교가 된다.
김해 역졸의 아들로 태어나 비참한 생활을 전전하던 배돌석은 뛰어난 솜씨의 돌팔매로 호랑이를 잡은 덕분에 경천역 역졸이 된다. 그는
호환으로 과부가 된 여자를 재취로 맞게 되고, 그러던중 부정한 아내를 살해하고 도망하다가 체포된다. 그러나 때마침 황천왕동에게 와 있던
박유복이 구해주어 청석골로 도피한다. 한편 황천왕동이는 이 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귀양을 가게 된다.
왜변 후 전라감사로 부임한 이윤경의 휘하에서 비장이 된 이봉학은 왜선을 퇴치하는 등의 공로로 제주의 정의현감으로 승진하게 된다. 그는
전주에서 사랑을 맺은 기생 계향을 부실로 맞아들여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이윤경이 주선으로 상경하여 오위부장이 된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결국은 임진별장으로 좌천되고 만다.
아전 출신인 서림은 평양감영 수지국 장사로서, 진상품을 관장하고 있었다. 그는 본래 교활한 위인이어서 자주 진상품을 빼돌리다 들키자,
도주하던 끝에 청석골 화적패를 만나게 된다. 그들에게 평양 진상 봉물의 내막과 탈취할 계책을 가르쳐주어 성공하자, 서림은 그 공로로
청석골에서 두령이 된다.
양주 임꺽정의 집에 평양 진상봉물이 있다는 것이 탄로나서 가족들이 투옥되자, 임꺽정은 청석골 두령들과 함께 이를 밀고한 이웃집 최서방
일가를 참살하고, 감옥을 부순 뒤 식솔들을 이끌고 청석골에 들어온다. 뒤이어 사건에 연루된 임진별장 이몽학과 귀양에서 풀려난
황전왕동이도 이에 가담하게 된다. 청석골에 모인 일당은 아내를 데리러 간 길막봉이가 투옥되자 그를 구해낸다. 그리고 칠장사를 찾아가
세상을 떠난 병해대사의 불상 앞에서 의형제를 맺는다.
<화적편>
청석골 화적패의 대장으로 추대된 꺽정이는 상경하여 기생 소홍과 정을 맺는 한편, 빚에 몰린 양반의 딸 박씨를 구해내 첩으로 삼는다.
또한 원판서의 딸을 구해내 첩으로 삼고, 이웃의 사나운 과부 김씨와 싸운 끝에 그녀 역시 첩으로 삼고 지낸다. 그러다가 처자의 성화에 못
이겨 청석골로 돌아간다.
송도 송악산에 단오굿 구경을 간 청석골 두령들은 그곳에서 납치당한 황천왕동이의 아내를 구해낸 끝에 살인을 저지르게 되어 관군에게
쫓긴다. 그리고 서림의 계책으로 치성 드리러 와 있는 상궁을 인질로 삼고 시간을 끌다가 부하들을 거느리고 기세도 당당하게 진군한
임꺽정의 구원을 받아 모면하게 된다.
임꺽정 일당은 가짜 금부도사 행세를 하며, 봉산군수를 체포하려 하기도 하고 신임 군수의 도임승차를 습격하기도 하며, 황해감사의 사촌을
자처하고 각 읍을 돌며 사기행각을 벌이는 등 지방관원들을 괴롭힌다. 그후 상경한 임꺽정은 기생 소홍의 집으로 습격해온 포교들을
물리치고 무사히 서울을 탈출한다. 그러나 그의 첩들은 체포되어 관비가 되고 다만 임꺽정을 따르려는 소홍은 청석골에서 지내게 된다.
청석골을 지나가다가 화적패에게 붙들린 종실 서자 단천령이 신기에 가까운 솜씨로 피리를 불어 그들을 감동시킨다. 이에 임꺽정은 그
보답으로 단천령에게 자신의 신표를 주어 다른 화적패의 습격을 받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청석골 두령들은 신임 봉산군수를 살해하고자, 평산 이춘동의 집에 머물면서 기회를 엿본다. 그러나 서울에서 체포된 서림이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그 계획을 자백하는 바람에 군사 5백 명의 습격을 받는다. 임꺽정 일당은 접전 끝에 이를 물리치고 무사히 청석골에
돌아오게 된다.
청석골 화적패를 소탕하기 위해 조정에서 관군을 파견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임꺽정 일당은 오가와 졸개들만을 남겨두고 해주와 재령
등지로 도피한다. 그러나 거처가 옹색하여 다시 자모산성에 근거를 마련하고 지내게 된다. 한편 고집을 피워 청석골에 남은 오가는 죽은
아내만을 생각하며 지내게 된다. 임꺽정에게서 버림을 받은 데다가 관군의 습격 소식까지 전해듣게 된 졸개들은 동요하여 하나하나 청석골을
버리고 떠난다.
이야기는 여기서 중단되어 미완성으로 남는다.
풍부한 고유어로 전통의 현재화 성공
<임꺽정>은 발표 당시부터 좌우파 문인 모두로부터 찬사를 받을 정도로 좌우합작의 결정판이었다.
이 작품에 대해 정비석 선생은 <<홍명회씨의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어휘는 실로 경탄해 마지못하려니와, 향토미가 풍부한 순 조선식 문장의
미와 절실한 묘사의 진실성은 천의무봉한 바 있다. 발표된 분량만으로도 조선 최대의 장편이요, 어휘의 풍부한 점으로나 또는 내용의 예술적
향기로나 이미 우리 문학의 고전이다>>라고 말했다.
기록에 남은 야사야담전설은 물론 구전된 이야기도 다채롭게 활용하여 토속적인 정서를 표출했고, 문체에 있어서도 민중의
말투, 관청의 문체, 세련된 묘사 등 다양하게 구사했다. 전통사회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동원하고 상황에 맞는 어법과 어휘를 구사하여
백과사전적인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울러 동양의 보편적인 이야기 문학과도 접맥시켜 전통의 현재화에 성공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정인보 선생은 <<그 웅대한 규모와 세련된 필치는 조선문학 중의 거탑>>이라고 평가한 바 있는데, 화적패가 나타나게 되는 당시의
정치적 혼란상을 폭넓게 묘사하고 또 양반사회에서 천민사회에 이르는 광범위한 인물설정, 조선시대 풍속의 치밀한 재구성 등으로
역사소설의 새로움 지평을 열었다.
소외된 하층민의 저항과 사회적 모순을 타파하려는 인간의 삶과 의지를 주제로 하고 있는 이 작품은 기존 왕조사 중심의 역사소설과는 크게
다르다. 작품의 저변에 활달하고 낙천적인 민중정서가 흐르고 있다. 특히 천민들의 강한 생명력은 작품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 보인 작가의 리얼리즘은 1970년대 들어 황석영의 <장길산>이나 김주영의 <객주>등의 장편 역사소설로 계승된다. 이 작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