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이상학 서설(Prolegomena)
저자 : 칸트(Immanul Kant, 1724--1804)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잘 조화시켜 종합적 인식론을 전개한 칸트. 3대 비판 철학서인 <순수이성비판>(인식론),
<실천이성비판>(도덕론), <판단력비판>(미학)을 통해 근대 비판철학을 창시한 그가 1781년 펴낸 <순수이성비판>이 철학적 사유의 새로운
장을 마련하긴 했으나 호의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자, 자신의 저작에 대한 몇가지 오해를 풀기 위해 같은 주제를 재구성하여 새로 쓴 저작이
이 책이다. 이후 이 책은 세계철학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자신의 완성을 서두르지 않은 철학사의 별
<<깊은 성찰을 하면 할수록 나에게 경탄과 존경심을 일으키는 두 가지는 <하늘에 반짝이는 별>과 <내 마음 속의 도덕률>이다.>>
이 말은 칸트의 <실천이성비판>에 나오는 말이다.
80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학문에 전념했던 칸트는 1724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나, 평생 동안 고향에서 40마일 밖을 나가본 적이
없었다. 그의 양친은 모두 루터 교 경건파의 독실한 신자였다. 칸트가 평생을 경건한 종교적 분위기 속에서 깨끗한 일생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이러한 분위기의 영향인 듯하다. 특히 인자하고 믿음이 돈독한 그의 어머니로부터 받은 감화는 그의 전생을 지배했다.
칸트의 어머니는 8살의 칸트를, 당시 학문과 신앙이 깊었던 슐츠 교수가 운영하는 경건주의 학교에 입학시켜 8년동안 교육을 시켰다. 경건한
분위기 속에서 칸트는 라틴 어를 비롯한 인문계 과목을 열심히 공부했는데, 그가 일생 동안 라틴 어 고전을 좋아하게 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졸업 후 슐츠 교수가 재직하고 있던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의 철학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학문의 길에 오르는 날을 누구보다도
손꼽아 기다리던 그의 어머니는 친구의 병을 간호하다 감염되어 40세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칸트는 이 대학에서 30대 초반의 크누첸 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학문에 열중했다. 여기서 철학분야 외에도 수학과 물리학에 흥미를 느껴
뉴턴을 탐닉하기도 했다. 대학 졸업논문에서 칸트는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권위라 할지라도 진리의 발견에 저촉되면 존중하지
않는다.>>라든가, <<내가 걸어갈 길을 나는 이미 정했다. 나는 나의 길을 가겠다. 아무도 나의 앞길을 방해하지는 못할 것이다>>라고 밝혀,
그의 학문에 임하는 확고한 자세를 보여주었다.
대학을 마친 가난한 이 서생은 귀족들의 자제들을 가르치는 가정교사 생활을 9년 동안 하게 된다. 그후 모교인 쾨니히스베르크 대학에서
무급 강사생활을 15년간이나 했는데, 이 기간은 그의 학문적 영역을 넓히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수학과 물리학에서 시작된 강의는
논리학형이상학도덕철학 등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고, 유머와 박진감 넘치는 강의는 일반인군인들까지도 청강하게
만들었다. 이즈음 베를린 대학 등에서 그를 교수로 초빙하기 위해 많은 특권을 제시하기도 했으나, 그는 고향에서 조용하고 평화롭게 자신의
철학을 완성하고 싶어 이를 모두 거절했다.
당시 뉴턴의 사유방법과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대립적으로 보고있던 그는, 뉴턴을 지지하고 라이프니츠의 철학을 비판하는 입장에 선다.
마침내 1770년 15년간의 모교 강사생활을 마감하고, 논리학형이상학 교수로 임명되었다. 그때 나이 46세로, 라이프니츠가 21세,
니체가 24세에 각각 교수가 된 것에 비하면 출발은 늦었으나, 칸트는 자신의 사상을 완성하는 데 결코 서두르지 않는 대기만성의 길을 간다.
이후 10년 동안 침묵 끝에 1781년 <순수이성비판>을 선보임으로써 그의 비판철학 시대의 문을 열었다.
1804년 80세에 그는 물에 탄 포도주를 조금 마신 후 <<이것으로 족하다(Es ist gut)>>라는 말을 남기고 운명했다.
시인 하이네는 <<그는 언제나 밝은 눈으로 세상을 보고, 인생의 즐거운 면을 받아들였다. 그의 얼굴은 좀처럼 흐려지는 일이 없었고, 그의
마음은 언제나 고요한 호수처럼 평온을 잃은 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근대철학의 위기 : 독단론과 회의주의
중세 천년의 사상적 기초는 신학이었고 철학은 신학의 시녀 역할에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중세가 무너지고 자연과학의 발달로 과학의
시대가 열리자, 신 대신 인간 자신의 탐구에 의해 인간과 우주에 관한 인식문제가 해결되리라는 믿음이 널리 퍼졌다. 그리하여 철학의
중심문제는 인간과 세계에 대한 진리의 원천이 되는 인간 자신의 능력, 특히 <이성>적인 능력에 대한 탐구로 향하게 된다. 근대철학의
특징인 이성주의, 또는 주체주의가 그것이다.
<이성>에 대한 논의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 이래 많이 논의되어왔으나, 철학의 주요문제로 등장한 것은 합리론의 창시자인 데카르트부터다.
이성을 확고한 진리의 기준으로 하여 연역적으로 추론해가는 과학적 방법을 세우고자 했던 합리론은 <<이성은 과연 절대적으로 오류를
범하지 않는가?>>라는 주장을 내세운 영국 경험론의 도전을 받게 된다. 베이컨에 의해 시작된 경험론은 흄에 이르러 근대과학의 출발점이자
이성주의 중심인 <인과관계>에 대해서조차 부정하게 되고, 이로 인해 자연과학의 객관적 타당성조차도 의심하게 되었다. <이성>의 기초 위에
건설되었던 근대철학도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음은 당연했다.
이성주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던 칸트는 흄을 만나면서 <독단의 잠>으로부터 깨어나 경험론을 경험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이성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으며, 과학적 지식의 객관적 타당성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문제는 이성주의의 독단론적 오류를 경계하면서도,
경험주의가 안고 있는 회의주의로부터 벗어나 학문이 객관적 타당성 위에서 건설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칸트의 비판 철학 :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이런 상황에서 칸트는 처음으로 질문을 다시 시작했다. 즉 <인간은 무엇을 알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인간은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 라는 세 가지 철학적 과제를 제기한다.
첫째 과제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이 <순수이성비판>이고, 둘째 과제의 내용은 인간의 윤리와 도덕 등의 문제로 이는 <실천이성비판>에서
다루어지며, 세번째 과제는 미와 예술에 관한 내용으로 <판단력비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하는 종교철학
문제는 <인간학>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순수이성 비판
칸트 이전의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의 인식론(앎에 관한 이론), 즉 과학적 지식이 어떻게 성립하는가에 관한 이론은 각각 그 근거를 <이성>과
<경험> 중 어느 하나만을 강조하는 일면성을 띠어왔다. 그 결과 합리론은 <독단론>으로, 경험주의는 흄에 이르러 모든 앎이 불확실하다는
<회의론>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러한 근대철학의 위기에서 칸트는 합리론과 경험론을 결합하여 종합적 인식론을 전개했다. 즉, 그는 외부의 사물을 인식하는데는 감각적
<경험>이 필요하나, 감각적으로 주어지지 않는 자유인격도덕법칙 등을 인식하는 데는 <이성>의 우월성을 인정했다. 이처럼 그는
인식의 <내용>면에 있어서는 <경험론>을 수용하고, 인식의 <형식>면에 있어서는 <합리론>을 수용하여 <종합적 인식론>을 전개했다.
앎의 능동주의
앞서의 합리론과 경험론은 모두 앎의 <대상>을 중심으로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존재하고 있는 대상을 우리의 <주관>을 철저히 <배제>한 채,
있는 그대로 파악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물론 자연과학에서는 외부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고찰하여 사물과 사물 사이에 존재하는
규칙이나 원리를 발견해도 된다.
그러나 철학은 다소 다르다. 대상들(객체)은 주체(인간)에게 판단자료를 제공해줄 뿐 그것을 진리로 구성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체 자신의
시각이나 인식구조에 달려 있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진정 앎의 과정에서 우리의 인식주관은 단순히 사물의 모습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작용만을 하는 것이 아니고, 확실한 앎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감각자료(객체)를 질서 있게 배열하고 체계화하며 일반화시키는
작업을 우리(주체)가 <능동적>으로 수행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식의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정신>의 능동적인
작업이며, 이런 점에서 앎이란 정신의 창조적 산물이다. 앎의 <수동주의>에서 앎의 <능동주의>로의 전환을, 인식론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 한다. 이 말은 중세의 세계관인 천동설을 지동설로 바꾼 물리학의 코페르니쿠스의 사고전환을 비유하여 쓴 말이다.
자연과학의 두 축이 태양과 지구라면, 철학에서는 주체와 객체라 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 이전에는 우리 눈에 관찰된 것은 지구의
움직임이 아니라 태양의 움직임이었기에, <<태양이 지구를 돈다>>라는 믿음은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 이래
망원경을 사용한 과학적 관찰에 의하면 이와 정반대였다.
같은 논리로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관찰한 사물의 모습을 그 사물의 진정한 모습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관찰된 어떤 사물은 이미 관찰자의
시각구조에 의해서 변형되어 수용된다. 인간이 관찰하는 모든 객체는 주체인 인간의 인식구조나 관점에 따라 재구성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인식한 사물과 사물의 본래 모습은 다를 수밖에 없다. 사물의 본래 모습을 칸트는 <물자체>라고 불렀는데, 이 물자체를 우리는 결코
알 수가 없다. 물자체는 우리의 인식과정에서 우리의 목적에 맞게 변형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합리론과 경험론은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선험적 종합판단
칸트 철학에 자주 등장하는 <선험적 종합판단>이 중요한 것은 이와 같은 흐름에서다. <선험적>이란 말은 경험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고, <종합판단>이란 대개는 경험적이고 후천적인 것을 의미한다. 칸트는 보편타당한 인식의 성립은 경험과 선험의 종합으로써만
이루어진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인식대상으로서의 현상은 경험이 가능한 것들이지만, 이러한 현상에 대해 참된 인식이 성립되기까지
주체적으로 작용하는 감성오성이성은 선험적으로 주어진 능력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칸트가 고민한 문제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을 추가해주면서도 언제나 확실하고 타당한 판단은 있을 수 없는가였는데, 그에
대한 대답은 <있다>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선험적 종합판단>이다. 그는 인간이 진리에 이르는 길을 진리 밖에서 찾지 않고, 선험적
종합판단을 통해서 찾고자 했다. 이러한 발상의 전환으로 흄이 철저하게 해체했던 진리의 개념을 새로이 재건했다.
그러나 <순수이성비판>에 담겨 있는 인식의 대전환은 코페르니쿠스처럼 찬반양론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비판자들은 이 책의 내용이
일관성도 없고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에 칸트는 2년 후인 1783년에 이 책을 보다 쉽게 설명한 <형이상학 서설>을 내놓았으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이 책에서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제기한 사고의 혁명을 다소 완화한 방법으로 서술하고 있으며, 4가지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순수 수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순수 자연과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형이상학 일반은 어떻게 가능한가? 학으로서의
형이상학은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문제에 대한 대답을 서술하고 있다.
<실천이성비판>
이 책은 주로 윤리와 도덕에 관한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에서는 대상인식으로 향하는 순수이성(이론이성)이 음미되고, 경험을 초월한
물자체를 다루었던 종래의 독단적 형이상학이 부정되었다. <의지>를 규정하는 실천이성을 검토한 이 책에서는 불가지의 물자체가 바로
철학적 탐구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인간은 경험적 요소에 좌우되지 않고, 오로지 의무에 바탕을 두고 행동해야 한다는
엄숙하고 형식주의적인 도덕을 확립했다.
칸트는 이 책에서 모든 인간에게 해당하는 <보편타당한 윤리원칙)을 찾으려 했다. <<너는 언제나 네 의지의 준칙이 보편적인 입법원리로서
타당하게 행동하라>>는 유명한 말이 여기에 들어 있다. 즉, 어떤 행동을 하려고 하는 너의 의지가 법으로 제정되어도 좋을 만큼 보편적인
것이라면, 그대로 행동하라는 것이다. 남이 내게 해주길 원하는 대로 남에게 해주라는 속담과 비슷하다.
<판단력비판>
이 책에서는 크게 두 가지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하나는 미에 관한 문제로 최초로 체계적인 미학을 제시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자연에서
목적론의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다. 여기서 칸트는 자연적 필연의 세계와 도덕적 자유의 세계를 목적론적 관점에서 통합을 시도한다.
자연계와 도덕계의 통일을 과제로 하는 이 책은 칸트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파악하고자 할 때에 매우 중요한 책이다.
사상의 근대화를 가져온 철학자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칸트는 근대철학의 위기 속에서 근대적 인간과 진리를 확고하게 재건함으로써, 근대적 사고의 기반을 다시 다지고
근대철학을 위기에서 구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 그는 인간을 진리 인식의 중심의 위치로 복귀시켰던 것이다. 이것이 칸트가 철학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라 할 수 있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인식에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성취했다고 자랑스럽게 주장했다. 이는 우리의 인식이 대상 세계에
근거해서 이루어진다는 종래의 지배적인 입장에 대해, 칸트는 오히려 우리의 인식에 의해서 대상세계가 규정된다고 사고의 전환을 촉구했던
것이다. 즉, 마음이 대상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마음을 따른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칸트가 인식의 성립에 관해서 언급한 영역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감성 안에 들어온 것에 국한된다. 칸트는 이를 <현상>이라고 했다.
즉, 우리의 인식과 경험에 관해서 그 타당성을 언급할 수 있는 영역은 이 현상을 다루는 <현상계>에 국한된다. 그는 이 현상계 너머의 영역,
즉 감성에 들어오기 전의 영역을 <물자체>라 했고 이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는 불가지론의 입장을 취했다.
이는 두고두고 칸트 철학의 아킬레스건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 점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칸트 이후의 피히테^5.23^ 셸링^5.23^ 헤겔 등 독일
관념론자들과 마르크스에 의해 이루어졌다.
칸트의 자기 관리
5척 단구의 키, 가느다란 목, 큰 두상, 시력이 상실된 한쪽 눈, 연약한 신경, 허약한 체질, 이상이 80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간 칸트의 외형적
모습이다. 이런 자신의 신체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는 강한 의지력으로 건강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자신을 잘 관리하여 건강한 정신을
소유할 수 있었다.
보통 저녁 10시경에 잠자리에 들어 7시간 취침한 후 5시에 기상했다. 40년간 근무한 하인 람페는 5시 5분 전에 주인을 깨우기로 되어
있는데, 좀더 자게 해달라고 사정해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것은 하인의 절대 권한에 속했고, 만약 사정을 들어주면 후에 주인에게 책망을
들었다.
아침은 차 두 잔으로 해결하고 오전엔 연구 및 강의를 한 후 유일한 식사인 점심을 했다. 오후엔 손님들을 받고, 저녁때는 회색 코트를 입고
등나무 지팡이를 든 채 그 유명한 산책길에 나선다. 훗날 <칸트의 산책로>로 명명된 그 길을 산책하며 사색에 잠겼고, 중요한 착상이
떠오르면 수첩에 적어두곤 했다. 그가 산책로에 나타나면 인근 마을 사람들이 시계를 맞추었다 한다. 그런데 그의 이러한 철저한 산책시간을
지키지 못한 적이 있었는데, 루소가 지은 교육학 명저인 <에밀>에 심취했을 때였다. 이로 인해 그의 산책시간에 맞춰 준비하던 마을
주부들의 식사가 모두 늦어졌음은 물론이다.
산보 후 취침할 때까지 독서에 들어간다. 이렇게 그의 하루는 조용히 막을 내리곤 했다. 평생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어 그의 경험의 세계는
극도로 국한되었고 그가 본 것이란 오로지 책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단조로운 겉모습과는 달리, 그는 풍요로운 내면세계 속에 진리의 궁전을
짓고 대우주를 사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