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사학자가 쓴 과학철학책. 쿤은 과학발전의 역사가 과학자들의 수세기에 걸친 연구업적의 단순한 누적이 아니라 과학발전의 혁명성을
강조한다. <<정치제도가 그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때 혁명이 일어나듯이 과학에서도 혁명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패러다임><정상과학> 등의 개념들로 특징지어지는 토머스 쿤의 과학관은 <<과학혁명 - 새로운 패러다임을 갖는 정상과학의 전통수립
- 변칙성 및 정상과학의 위기의 출현 - 과학혁명>>의 변증법적 과정으로 해석하고 과학연구에 있어서의 과학혁명과 정상과학의 상호보완적
기능을 강조한다.
생애
20세기 최고의 미국출신 과학사학자과학철학자. 1922년 오하이오 주 신시내티에서 태어나 1943년 물리학 전공으로 하버드
대학을 최우수졸업하고 과학연구 및 개발연구소(OSRD)에서 2년간 일한 뒤 모교 대학원 물리학과로 되돌아가서 학위과정을 밟았다.
<과학혁명의 구조> 서언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는 화학자이면서 과학사에도 조예가 깊었던 모교의 코넌트 총장이 개설한 비자연과학계열
대상의 자연과학계론 강의를 도와주면서 과학의 역사적 측면에 깊은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 결과 그는 박사학위 논문완성을 눈앞에
두었을 때 전공인 물리학을 버리고 과학사로 뛰어들었다.
쿤의 과학사에 대한 관심은 1948년 하버드 대학의 교양과정 및 과학사의 강사조교수 경력을 거치면서 과학사상의 혁명적 변화들에
대한 깊은 이해로 이어진다.
그리하여 10여 년간의 철학심리학^5,23언어학사회학 분야의 폭넓은 독서와 토론을 하는 과정에서 그의 과학혁명의 이론은
점차 형태를 갖추게 된다.
<코페르니쿠스 혁명(The Copernican Revolution)>으로 학문적 업적을 인정받은 그는 1956년 버클리 대학으로 옮겨 과학사 과정의 개설을
주도하게 된다. 그리고 2년뒤 스탠퍼드 대학의 행동 과학고등연구센터에서 사회과학자들과 생활한 것을 계기로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을
창안한다. 현대의 MIT에서 언어학 및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쿤의 과학관
쿤의 과학관은 근본적으로 과학적 지식의 발전이 혁명적이라는 데 요지를 둠으로써 과학의 진보가 누적적이라는 종래의 귀납주의적
과학관을 뿌리째 흔들어놓았다. 쿤은 과학혁명들사이에서 과학자들이 통상적으로 수행하는 안정된 과학활동을 가리켜 정상과학이라
규정하는데, 이러한 정상과학에서 <과학자사회>는 <패러다임>(동시대의 학자들이 동일대상에 대해 가지는
신념가치관준거채계)에 의존하는 것이 특징이다.
쿤의 과학관에 있어서의 과학혁명은 하나의 정상과학이 심각한 이상현상들의 빈번한 발생에 의해 위기에 처해 붕괴될 때 일어나는
현상으로 그 결과는 새로운 정상과학의 출현을 가져온다. 다시 말하면 쿤은 과학발전의 역사를 검토해볼 때 오늘날의 과학이 수세기에 걸친
과학자들의 연구업적의 단순한 누적이 아님을 지적하고, 그들 과학자 집단은 일관된 과학관을 가진 단일집단도 아니었음을 패러다임의
개념과 과학혁명으로 설명했다.
그는 이 책에서 천문학물리학 등 주로 자연과학분야의 역사적 자료를 분석하면서 과학발전의 역사를 <과학 혁명 - 새로운
패러다임을 갖는 정상과학의 전통수립 - 이상의 생성 및 정상과학의 위기출현 - 과학혁명...>의 변증법적 과정으로 해석하고, 과학연구에
있어서의 과학혁명과 정상과학의 상호보완적 기능을 강조하는 과학관을 가지고 있다.
<과학혁명의 구조>의 내용
이 책은 1962년에 초판이 나오고 1969년에 후기를 참가하여 재판되었다.
내용의 구성은 서언과 본문 13장 그리고 후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처음 출판된 이래 과학사과학철학은 물론 일반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연구자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의 영향력은 얼마나 많은 분야의 연구자들이 그의 해석에 공감하고
<패러다임><과학혁명><정상과학의 위기> 등을 인용하며 발전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는가를 보면 알 수 있다.
한마디로 과학사학자가 쓴 과학철학책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 책은 역사와 과학의 본질에 대한 혁명적인 서술을 담고 있다. 과학사는
우화나 연대기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고, 과학사가 완성된 과학의 성취에 관한 연구에서, 연구활동 자체에 대한 동적인 연구로 바뀔 때 참된
과학의 모습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쿤에 따르면 과학의 발전은 늘어나는 과학지식이 차곡차곡 쌓여가는 직선적 과정이 아니다. 따라서 낡은
과학이 버려졌다 해서 뒤에 나온 과학보다 덜 과학적인 것이 아니다.
과학의 본질을 이해하려면 기존과학이 새 과학에 의해 대치되는 과학혁명의 구조를 밝혀야 한다는 것이다. 쿤의 과학사 서술에서의
중심개념은 <패러다임(paradigm)>이다. 패러다임은 복잡하고 까다로운 뜻을 가진데다가 쿤 자신이 여러가지로 다르게 쓰고 있어 혼란이
빚어지고 있다. 패러다임은 어떤 <과학자 사회(scientific community)>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가치관신념준거체계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패러다임은 어떤 과학의 학파에 정합성을 주는 모델이다.
패러다임에 바탕을 둔 연구를 <정상과학(normal science)>이라 한다. 반대로 정상과학은 패러다임을 위해 바쳐진다. 패러다임이 있기 전의
과학은 여러가지 학설이 분분해서 어지럽기 짝이 없다. 일단 패러다임이 확립되면 난맥상이 정립된다.
그러나 정상과학은 완성된 과학이 아니다. 남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수수께끼풀이(puzzle solving)이다. 이것은 패러다임을 다듬고
명세화하는 작업으로서 사실수집, 기구사용, 상수결정, 이론의 정식화 등이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상과학은 점점 확고해진다.
그러나 어느 단계에서 정상과학에는 <이상(anomaly)>이 생기고 새로운 것이 불가피하게 나온다. 이것은 정상과학을 지배하는 패러다임이
예상하는 바가 어긋나는 경우이고 이것은 새로운 과학적 발견으로 발전한다. 이상이 계속 늘어나면 심각한 사태가 되며 정상과학에 위기가
닥쳐온다.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새로운 이론들이 쏟아져나온다. 그러면 원래의 패러다임은 빛을 잃고 어느덧 패러다임의 형성 이전과 비슷한 이론의
난립이 일어난다. 이에 정상과학은 이론의 특수한 수정에 의해 모순을 제거하려는 응급조치를 하게 된다. 이러는 동안 이상을 좀더 잘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출현하고 낡은 패러다임과의 경쟁이 벌어진다. 새 패러다임이 과학자들의 집단적 개종과 충성을 얻어
득세하면 낡은 과학은 무너지고 새로운 패러다임에 토대를 둔 새 정상과학이 성립한다. 이것이 곧 <과학혁명>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이동은 누적적 과정이 아니다. 곧, 과학혁명은 낡은 패러다임의 개선이나 연장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다른
해결방법과 목표를 채택하는 것이다. 쿤은 기존정치제도가 기능을 발휘하지 못해 위기가 조성된 끝에 반대진영이 민중의 지지를 얻어
구제도를 뒤엎는 정치혁명과 과학혁명을 비교하고 있다. 패러다임이 변하면 세계관도 달라진다. 혁명 전후의 세계관과학방법은 같은
표준으로 비교될 수 없는 것이므로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넘어가는 논리적인 길은 없다. 논리의 규칙과 사용된 자료 자체가 변하는 것이다.
쿤에 따르면 과학혁명은 기존질서와 단절하고 사물을 보는 새 방법으로서의 게슈탈트 전환(Gestalt switch)이다. 그러므로 과학자들이
현상의 앙상블을 어떻게 보는가에 의해 달라진다. 과학혁명에서 과학의 논리적 구조보다 과학자들이 속해 있는 사회의 심리학과 사회학이
중요시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포퍼(과학철학자)와의 논쟁
<과학혁명의 구조>는 초판의 출간과 더불어 열광적인 찬사와 비판의 대상이 되었으며,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쿤 혁명>을 일으켰다.
패러다임을 중심으로 한 쿤의 독특한 과학관은 과학자로서의 현장경험과 해박한 역사지식의 산물이므로 역사가들에게는 환영을 받았으나
철학자들에게서는 강한 반발이 나왔다. 그의 접근은 너무나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철학에 큰 바람을 일으켜 혁명적 과학철학의
출현을 가져왔다.
이 저서에 대해 철학자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인 것은 그가 중요한 철학문제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쿤은 귀납적인 과학관을
맹렬히 공격한다. 과학은 자료를 충분히 수집해서 일반화한 결과가 아니며, 과학자가 갖고 있는 선입관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법칙은 실험조작을 하기 전에 미리 패러다임에 의해 추측되는 것이라고 그는 본다.
1960년대 말 포퍼 및 그의 제자들과 쿤 사이에 벌어진 논쟁은 정상과학을 둘러싼 것이었다. 포퍼에 따르면 정상과학은 과학에 필수적인
비판적 사고를 갖고 있지 않으며 수수께끼를 푸는 데 만족하므로 위험하다는 것이다. 쿤은 중요한 것은 오히려 정상과학이라고 응수하면서,
비판적 토론은 철학이나 사회과학에 해당하는 것이며 자연과학에서의 토론은 패러다임이 성립하면 끝나고 위기가 닥칠 때 비로소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과학의 역사를 추측과 반박, 이론과 실험의 싸움터로 보는 반증주의자 포퍼는, 진리는 한꺼번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판을 견디지
못하고 오류를 드러내는, 즉 반증되는 이론들을 탈락시키는 과정들을 거치며 추구해가는 것이라고 믿는 학자다.
포퍼의 과학관이 반증의 과정을 통해 지식의 진보가 이루어진다고 가정했듯이 그 사회철학도 혁명을 통한 급격한 변혁 대신 점진적인
사회발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포퍼의 과학적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열린 사회의 청사진은 과학의 발전이 전통 과학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차곡차곡 누적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반기를 든 쿤과의 대결이 불가피했다. 쿤은 기존 정치제도가 거기서 파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을 때 혁명이 일어나듯 자연과학에서도 혁명은 일어난다는 주장을 폈다.
특정한 시기의 과학자 집단이 인정한 문제해결의 모델 패러다임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증가할 경우 혁신적인 과학자들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들고나오고, 경쟁상태를 지나 새 것이 낡은 것을 급기야 대체하게 된다. 이러한 패러다임의 교체가 바로 과학혁명이라고 쿤은
주장했다.
또한 쿤은 실증주의적 과학철학에도 신랄한 비판을 가한다. 그는 고전적인 검증이론, 포퍼(Karl Popper)의 반증이론, 네이글(Emrst
Nagel)의 확률적 견해에 대해 모조리 부정적이다. 그가 보기에 중립적 관찰언어란 존재하지 않으며, 과학이론의 검증을 위한 절대적 기준은
없다. 또 패러다임의 붕괴는 반증에 의한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패러다임은 반증되기 전에 대치되는 것이다.
평가
그는 상대주의주관주의비합리주의자라는 비난을 받는다. 그는 서로 다른 이론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다른 언어문화공동체의
구성원과 같이 둘 다 옳을 수 있다고 했는데, 문화의 경우에는 이것이 상대주의지만 과학에 적용하면 그렇지 않다고 변명한다. 그는 과학이
<억측과 논박>을 통해 오류를 고쳐가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객관적 진리에 도달한다는 포퍼에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주관주의자비합리주의자임을 부인한다.
이와 같은 쿤의 입장은 1970년에 나온 제2판의 <후기>에 종합되었다. 그의 주장은 논쟁 끝에 많이 무디어졌으며 적지 않은 논리적 결함을
드러냈으나 과학사가의 통찰력이 철학자들에게 잘 이해되지 않는 안타까움도 있었다. 어쨌든 역사를 무시하고 논리만 고집하던 과학철학은
쿤에 의해 궤도수정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포퍼가 발견의 논리를 강조한 데 비해 쿤은 과학자 사회의 심리학사회학이 중요하다고 고집한다. 여기서 쿤은 과학사회학으로
발전할 소지를 마련하고 있다. 실제로 사회학자들은 곧 쿤의 패러다임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쿤이야말로 과학이 지식사회학의 범위
밖에 있다는 통설을 깨고 과학의 사회학적 연구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다는 평을 받는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과학혁명의 구조>는 20세기 지성사에 획기적 이정표를 제시하는 현대의 고전으로 평가된다. 쿤의 깊은 지혜와
뛰어난 통찰력은 이미 뚜렷한 업적을 나타냈으며, 그가 끼친 영향은 본래의 영역인 과학사 및 과학철학의 범주를 넘어
인물사회예술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퍼지고 있다.
특히 쿤의 패러다임은 생물학역사학경제학인류학 특히 문학사미술사정치사 등에서 환영을 받았다.
왜냐하면 이들 분야에서는 오래 전부터 <혁명적인 단절로 점철된 전통적 기간의 연속>이라는 서술방식을 써왔고, 쿤 자신이 그의 과학사
서술을 여기서 빌려왔으니 당연한 일이다. 쿤의 위대함은 오히려 과학만은 다르게 발전하리라는 소박한 믿음을 깨뜨린 데 있다.
최근 수년 동안 새로운 책의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고 하는데, <<아마도 새 책은 과학기술혁명이 제기한 두 가지 주요과제를 다루게 될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 그는 건강이 악화된 상태여서 그의 마지막 저작이 될지도 모르는 이번의 연구결과가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