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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르튀프

<타르튀프 Tartuffe>
   작가: 몰리에르(Jean Moliere, 1622--1673)

 희극작가이자 배우로 평생을 연극에 바친 몰리에르가 거짓 종교가의 위선과 그 위선에 속아 넘어가는 어리석음을 그린 5막의 희극. 종교를
모독했다는 이유로 5년간이나 공개상연이 금지되었던 이 작품은 풍속희극의 단초를 제시하고 성격희극을 완성했다고 평가되고 있다. 삶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연극이었던 몰리에르는 이 작품 속에서 위선의 문제를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관련시켜 고찰함과 동시에, 인간본성의
문제를 형상화함으로써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라는 현대적 문제를 선구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연극에 바친 순교자적인 삶
 몰리에르는 문화예술의 후원자였던 프랑스의 루이 14세 치하에서 활약한 코르네유, 라신과 더불어 프랑스 3대 고전작가로, 부유한 궁정
실내장식업자의 장남으로 태어나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부친은 아들이 가업을 잇기를 희망했으나 몰리에르는 경제적으로 보장된 삶을
포기하고 연극인의 길을 택하는 21세의 회심 이후 그의 삶은 오로지 연극만을 위해 존재하게 된다.
 학업을 마칠 무렵 재능있는 여배우 마들렌 베자르와 함께 <유명극단>을 창립하여 예명을 몰리에르라고 했다. 이 극단은 흥행에 실패하여
빚만 잔뜩 지게 되었고, 그는 한때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극단은 결국 13년 동안의 지방 유랑의 길에 나서게 되는데, 지방귀족의 도움을
받으며 차츰 실력을 쌓아 리옹에 본거지를 두는 유력한 지방극단으로 성장했다. 그동안 그는 극단 경영자로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동시에
이탈리아 즉흥극의 계통을 있는 연기술 작극법을 익힌 것으로 짐작된다. 1658년이 되어서야 파리에 진출하여 루브르 궁전의 루이 14세
앞에서 공연하여 인정을 받았다. 이로 인해 왕실 소유의 프티 부르봉 극장 사용을 허가받았다.
 다음해에 참신한 풍자희극 <웃음거리 재녀>의 성공으로 기반을 쌓았고, 이어서 아르놀프라는 개성적 인물을 창조한 <여인학교>로 명성을
드높였다. 그는 <우수한 극시인>의 자격으로 국왕으로부터 연금을 받고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았으나 한편으로는 많은 적들을 만들었다.
사교계나 배우작가들이 악의에 찬 중상과 비판을 가해오기도 했으나 그는 용감히 싸웠으며, 이러한 투쟁속에서도 극단원들의 생활을
보살피고 왕을 즐겁게 했어야만 했다. 이 눈부신 활동과 과로의 생활 속에서 그는 13년 동안 30편에 가까운 작품을 썼는데 그 대부분이
5막극이었다.
 1662년 마들렌의 여동생(혹은 딸)과 결혼했으나 21년 연하인 이 젊은 아내와의 가정생활은 원만치 못했다. 1664년에 발표한 <타르튀프>는
거짓신앙을 묘사했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모독이라 하여 신자들로부터 비난을 받아 상연금지되었다. 그후 무대에 올린 <돈 주앙>은 사태를
한층 악화시켰다. 이로 인해 교회측에서는 <타르튀프>를 5년, <돈 주앙>을 평생 동안 상연금지시켰다.
 당국과의 싸움에서 몰리에르는 극단을 혼자 이끌어갈 수 밖에 없었다. 배우도 작가도 확보할 수 없었던 그는 더 많은 작품을 씀으로써
작가의 부족을 메워나갔다. 드디어 1966년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인간혐오자>를 발표했는데, 처음부터 식견 있는 관객들로부터
걸작으로 평가되었다. 그후에도 <구두쇠>, <여학자들>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의학 풍자희극 <상상병 환자>가 그의 최후의 작품으로, 그 상연에서 건강악화를 무릅쓰고 주인공역을 맡은 그는 연기 도중 발작을
일으켰으나 즉흥적 연기로 위장하여 버텨나갔다. 그러나 기어이 무대 위에 쓰러져 실려나가고 각혈 끝에 숨을 거두었다. 임종때 아내
아르망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목사의 입회도 허락되지 않았다 한다.
 그의 사후 아르망드는 배우들을 이끌고 게네고 극장으로 옮겼으나 국왕의 명령으로 경쟁관계에 있던 오텔 드 부르고뉴 극장과 합병함으로써
새로이 <국왕의 극장>이 결성되었다. 이것은 현재의 국립극장 코메디 프랑세즈의 전신이다.
 그의 작품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극장의 가장 중요한 레퍼토리로서 상연을 거듭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의 작품들이 시대풍속에 대한
예민한 시각과 비판정신에 뒷받침되어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인간상을 묘사했기 때문으로 평가되고 있다.

    시대적 배경과 작품세계
르네상스 시대 다음에 오는 문학의 흐름은 고전주의였다. 프랑스적인 것의 정수는 고전주의에서 발견할 수 있다. 프랑스 고전주의는
고대와의 밀착에도 불구하고 그 나름대로 근대적이고 또 엄밀히 말해 프랑스적이다. 문학을 한 인간이 자신의 정체성에 도전하는 치열한
지적 추구의 과정이라고 볼 때, 프랑스 고전주의도 근대의 여명기에 프랑스 인이 펼쳤던 이 지적 모험의 증언이며 인간과 세계에 대해
프랑스 인이 가졌던 인식의 영원한 유형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태양왕 루이 14세
 프랑스의 당시 집권자는 <태양왕>을 자처한 절대군주 루이 14세로, 그는 화려한 궁정생활을 영위하여 유럽 군주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이다. 그는 6개의 궁전 중에서도 특히 파리에서 떨어진 베르사유 궁전을 좋아하여 그곳에 하나의 작은 우주를 꾸몄다.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왕을 중심으로 한 궁정귀족들이 낮에는 산책과 수렵, 밤에는 연회와 무도회가 열리는 등 사치와 방종한 생활이
계속되었다. 이곳에는 자연스럽게 미와 기지, 사교와 에티켓, 연극과 문학이 집결되었다.
 루이 14세 자신이 청년시절에 소설과 시를 애독하고 춤과 스포츠에 열중했으므로 그는 프랑스의 문학과 예술을 후원하여 번성하게 되었다.
루이 13세 때인 1635년에 프랑스 아카데미가 창설되고 동시에 작가가 지켜야 할 <삼단일 법칙>과 <순수성의 법칙>등 문학법칙이 제정되었다.
삼단일 법칙이란 하루 동안에 동일한 장소에서 한 사건이 행해져야 한다는 규칙이고, 순수성의 법칙이란 비극은 비극적인 요소로만 그리고
희극은 희극적인 요소로만 작품을 써야 한다는 규칙을 말한다.
 이 규칙 밑에서 이른바 프랑스의 3대 고전주의 작가, 즉 <르 시드>의 작가 코르네유와 <페드르>의 작가 라신, 그리고 <인간혐오자>와
<타르튀프>의 작가 몰리에르가 탄생하게 된다.
   작품세계
 앞의 두사람이 비극의 대가였던 반면 프랑스의 모든 희극적 전통은 몰리에르에게 흘러 들어와서 새롭게 흘러나온다. 그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희극적 유산을 흡수하여 그것을 근대적으로 재창조하기에 성공한, 그리하여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 현재성을 잃지 않고 있는 희극의
가장 높은 봉우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예술적 승리는 단순한 천재성의 결과만은 아니었다. 12년간의 긴 유랑극단 생활을 통한 연극적 수련을 거쳐 파리로
입성했을 때, 그가 내세운 희극은 당시의 규범주의자들의 요구에 배치되는 가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고상한 웃음과 로마네스크한 줄거리의
요구에 대해서는 당대 풍속에 대한 가차없는 풍자를, 오락으로서의 희극개념에 대해서는 현실참여로서의 희극개념을 작품의 실제를 통해
보여주었고, 그래서 그는 더욱 어려운 역경의 연속 속에 빠져들었다.
 적대적인 연극인들의 끝없는 질시, 현학적인 문사들의 이론적 시비, 종교계의 도덕적 규탄은 끝없이 지속되어, 그는 언제나 논쟁과 모함의
와중에 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그는 자신이 선택한 예술의 지향을 끝내 포기하지 않았고, 현실의 벽을 뚫고 나가는 예술적 방법에 대한
탐구를 계속하면서 그것을 통한 반성과 갱신의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작품들은 바로 그런 삶의 형상물들이기에 일회적인 천재성을
뛰어넘는 풍요와 깊이를 역설적으로 획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종교가의 위선적 행위 비판
 <위선자>란 부제를 가진 이 5막4짜리 운문극은 거짓신앙을 풍자한 내용으로 인해 그 공개상연을 위해 5년 동안 투쟁해야 할 만큼 문제가
되었던 작품이다. 작가는 여기서 인간의 악덕과 당시의 파리 사교계를 활보하고 다녔던 위선자들을 가차없이 풍자하고, 타르튀프와 같은
위선자가 없어질 때 프랑스가 더욱 번영하리라는 점과, 국왕이 그들의 도움 없이도 진실과 허위를 식별할 수 있음을 암시했다. 어쨌든 이
작품으로 인해 <타르튀프>의 이름은 현재에도 <위선자>를 뜻하는 보통명사로 사용될 만큼 널리 알려져 있다.
   제1막
 돈 많은 소시민 오르공은 전처의 소생 둘을 데리고 젊은 에르밀과 재혼했다. 이 오르공의 집에는 얼마 전부터 종교가인 타르튀프가
동거하고 있다. 그는 거지와 같이 떠도는 신세로 이 집에 들어왔으나, 오르공과 오르공의 어머니는 그를 성인군자처럼 모신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가 위선자요, 사기꾼으로 비쳐지고 있다. 시골에서 돌아와서도 오르공은 가족의 안부보다는 타르튀프의 건강에 대해 더
관심을 가지는 형편이다. 주위에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오르공의 생각을 바꿀 수는 없다.
   제2막
 광신자인 오르공은 딸 마리안을 그녀의 애인에게서 떨어지게 하여 타르튀프의 아내가 되게 하려고 생각한다. 마리안은 슬픔에 잠기지만
하녀인 도린이 마음 약한 그녀에게 용기를 주며 함께 저항하자고 말한다.
   제3막
 오르공의 후처인 에르밀도 타르튀프에게 마리안과의 결혼의사를 포기하라고 말하는데, 오랫동안 에르밀에게 마음을 두고 있던 타르튀프는
두 사람만 있는 자리에서 그 유명한 <<아아, 믿음이 깊다고 해서 감정조차 없는 것은 아니지요, 어디까지나 나는 사내입니다>>라며 에르밀을
유혹한다. 그 현장을 우연히 보게 된 오르공의 아들 다미스는 타르튀프를 비난하며 오르공에게 모든 사실을 폭로한다. 그러나 오르공은
아들의 말을 믿지 않고 타르튀프의 교묘한 거짓말을 그대로 믿는다. 그는 오히려 아들을 꾸중하고 자기의 재산 전부를 타르튀프에게
증여한다.
   제4막
  딸과 타르튀프의 결혼을 서둘러 성사시키려는 남편 오르공을 보고 에르밀은 한 가지 꾀를 낸다. 남편을 테이블 밑에 숨겨두고 타르튀프를
불러들여  그의 구애에 응하는 척한다. 처음에는 의심을 품고 있던 타르튀프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본색을 드러내어 에르밀을 품에
안으려 한다. 오르공은 그제서야 자신이 속았음을 깨닫고 이 사기꾼을 쫓아내려 한다. 그러나 타르튀프는 뻔뻔스럽게 <<자네가 이 집에서
나가주게>>라고 말한다. 이미 이 집의 재산 전부는 타르튀프의 것이었다.
   제5막
 오르공은 자기 입장이 불리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정치상의 비밀문서가 들어 있는 상자도 타르튀프에게 넘겨 준 터였다. 사기꾼은 그 문서를
국왕에게 공개하며 오르공을 고소한다. 오르공은 체포되기 전에 도망가야만 했다. 타르튀프는 경찰관을 데리고 거드름을 피우며 등장하여
오르공을 국적 취급을 한다. 그러나 경찰관이 체포한 것은 뜻밖에도 타르튀프였다.
 이자야말로 당국이 수사하던 죄인임이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국왕폐하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시기 때문에 절대로 사기꾼의 술책에는
속지 않으신다>>고 경찰관은 말한다. 왕은 오르공을 용서하고 마리안은 발레르와 결혼하게 된다.

     5년간 공개상연이 금지된 문제작
 이 작품은 1664년 국왕 루이 14세가 베르사유 궁전에서 개최한 대제전 때에 처음으로 공연되었다. 악덕 종교가 위선자를 신랄하게 꼬집은
이 작품은 종교인들의 반감을 사서 상연이 금지되었다. 그후부터 몰리에르는 국왕에게 계속 탄원했으나 1669년이 되어서야 공개상연이
정식으로 허락되었다. 어쨌던 이 작품은 통렬한 풍자극으로서 몰리에르의 걸작 중의 하나이며 그 공연은 전대미문의 대성공을 거두었다.
   탁월한 성격묘사
 이전의 희극이 줄거리나 대사, 그리고 몸짓 등 외부적인 수단으로 관객들에게 호소하려 했던 반면, 몰리에르는 성격에 모든 바탕을 두고
인간의 약점을 폭로함으로써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내려 했다. 성격의 묘사, 이것이 그가 추구했던 목적이었고 인간정신의 이면과 동기,
그리고 원동력을 심리적 리얼리즘으로 포착함으로써 당대 인간들의 평범함과 복잡함을 그려냈으며, 등장인물 하나하나에 강한 개성을
부여하고 있다.
   비판정신
 그의 작품에는 비극작가인 코르네유나 라신의 작품에서 발견하기 어려운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이 번쩍인다. 두 비극작가가 주로 인간의
고뇌와 격정을 묘사한 반면, 몰리에르는 인간과 사회의 보편적인 악과 약점을 비판했다. 그는 관객이나 독자들을 웃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거기에 날카로운 비판을 가한다. 그는 이러한 풍속의 비판적 묘사를 통해서 인간을 개조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당시의 수많은 풍속을
풍자한 작가 가운데 몰리에르만이 뚜렷하게 그의 위치를 지니고 있는 이유도 그의 내부에 있는 강한 도덕적 욕구 때문이다.
 그러나 군주제도나 교회의 권위, 그리고 귀족의 특권 등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태도를 완화하는 보수주의적인 측면도 있었다.
   자연애
 그는 인간의 본능을 바른 것으로 믿었으며 라블레나 몽테뉴와 같이 자연은 선하며 또한 만능이라고 생각했다. 자연과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며 불행과 웃음거리를 동반하는 것임을 알고 있었다. 자연의 법칙에 따르는 젊은이들을 편들고 이를 막는 어른들을 언제나 곯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본능에 한계를 두어 이성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점도 놓치지 않았다.
 이러한 점들이 그의 작품들로 하여금 그의 시대와 인간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이해하도록 하고, 이 총체적인 비전을 통해 한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는 독창성을 획득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