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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장 가정의 즐거움

    1. 생물은 생물답게

  어떠한 문명도 그 마지막 가치가 어떤 것인가 하는 판단은 그것이 어떠한 모양의
남편이나 아내나 아버지나 어머니를 만들어 내는가 하는 점에 있다고 나는 오래
전부터 생각하고 있다. 이 극히 간단한 점을 건드리지 않고는 온갖 문명이 이룩한
사적, 다시 말해서 예술, 철학, 물질적 생활 같은 것은 아무런 뜻도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내 생각으로는 온갖 문명이 이룩해 놓은 공적은 보다 좋은 남편이나 아내나
아버지나 어머니를 만들기 위한 단순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90퍼센트까지가 남편이나 아내이며, 모두 부모를 가지고 있는 한, 또한 결혼과 가정이
인간 생활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는 한, 보다 좋은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를
만들어 내는 문명은 보다 행복한 인간 생활을 향해 나가고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또한 보다 높은 문명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의 주위에서 살고 있는 남녀의 소질이 어떠냐 하는 것은 그들이 이룩하는
일보다도 훨씬 중대한 것으로, 어떠한 소녀라도 그녀에게 보다 좋은 남편을 얻게
해 주는 문명이라면 그것이 어떠한 문명이라도 감사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일은
상대적인 문제여서, 이상적인 남편이나 아내나 부모는 어떠한 시대나 어떤 나라에도
있다. 아마 우수한 남편이나 아내를 얻는 가장 좋은 방법은 우학생일 것이고, 그것에
의하여 우리는 아내나 남편을 교육시키는 많은 수고를 덜 수 있는 것이다. 한편
가정을 무시하고 가정을 열등한 지위로 내모는 문명은 보다 보잘것 없는 산물을
만들어 내기 쉬운 것이다.
  내 사고 방식이 생물적으로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 나는
생물적이다. 그러나 모든 남녀 또한 그러하다. 그러니까 (생물답게 해 나가자)는 것은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싫든 좋든 간에 인간은 모두 생물답게
살아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비록 뚜렷이 의식하고 있지는 않겠지만,
생물로서 행복하며, 생물로서 성을 내며, 생물로서 야심을 갖고, 생물로서
종교적이며, 또한 생물로서 평화를 사랑하는 것이다. 생물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사람은 누구나 태어났을 때는 갓난아기이며, 어머니의 젖을 먹고 자라 결혼해서 다시
어린 아기를 낳는다는 사실을 애써 회피할 수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여자의 뱃속에서
태어나서, 대개의 남자는 일생을 통하여 모두 여자와 함께 살고, 또한 자녀들의
아버지인 것이며, 모든 여자도 또한 여자의 뱃속에서 태어나서, 대개의 여자들은 일생
동안 남자와 함께 살며, 또한 어린 아기를 낳는 것이다. 자기의 종자를 영원히
종속시키기 위하여 종자를 만들어 내는 것을 거부하는 나무나 꽃이 있듯이 사람들
가운데도 부모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떠한 나무도
종자로부터 자라는 것을 거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거부할 수는 없다. 이리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기본적인 사실에
이르는 것이다. 즉, 인생의 가장 원시적인 관계는 남녀와 그 아이와의 관게인 것이며,
어떠한 인생 철학이라고 할지라도 이같은 본질적인 관계를 문제로 삼지않는 한
철학으로서 만족한다고는 할 수 없으며, 오히려 철학이라고도 부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남녀간의 관계만으로는 충분하다고 할 수 없다. 남녀간의 관계는 반드시
아기를 낳는 일에 귀착해야만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만다.
어떠한 문명도 아기를 갖는다는 권리를 남녀로부터 뺏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이것은 오늘날 극히 진지한 문제이다. 결혼을 기뻐하지 않는 남녀가 오늘날에도
상당히 많고, 또 설사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어떠한 이유로든지 아기를 낳는 것을
피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바는, 그 이유가
어디에 있건 남녀가 아기를 갖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대해 범할 수 있는 가장 큰 죄악이라는 점이다. 만일 아기를 갖지 못하는 이유가 몸에
있다면 그 몸이 어딘가가 잘못되어 상태가 나빠졌기 때문이다. 생활비가 많이 들기
때문이라면 생활비를 많이 쓰고 있다는 것이 잘못인 것이다. 만일 결혼이라는 것에
대한 사고 방식의 표준이 너무 높기 때문이라면, 그 지나치게 높은 표준 자체가 나쁜
것이다. 그릇된 개인주의 철학 때문이라면 그 개인주의 철학이 좋지 않은 것이다.
만일 또한 사회 제도의 모든 기구에 그 원인이 있다면 사회 조직의 모든 기구가 좋지
못한 것이다.
  앞으로 생물학이 좀더 진보하여 생물로서의 인간이 좀더 잘 이해되게 된다면 아마도
21세기의 남녀는 내가 말하는 바를 진실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나는 확신하고
있거니와, 19세기가 자연과학의 비교론의 세기였던 것처럼 21세기는 생물학의 세기가
될 것이다. 인간이 자기 자신을 좀더 잘 이해하고,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본능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헛된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내가 말하는 것과 같은 단순한
예지를 좀더 높이 평가하게 될 것이다.
  역사가 시작된 뒤로 남자는 여자와 사는 것을 누구에게서도 배운 저근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남자는 여자 없이는 살 수 없었다. 여자 없이는 아무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환다는 사실을 안다면 여성을 너무 멸시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고 말할 수는 없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어머니로서, 아내로서, 또한 딸로서 남자는 여자에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설사 결혼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윌리엄 워즈워드처럼
자기의 누이동생에게 의지해야 하며 또, 허버트 스펜스(영국의 철학자,
1820 __ 1903)처럼 가정부에게 신세를 져야만 하는 것이다. 자기의 어머니나 그 누이와
적절한 관계를 이룩할 수 없었다면 제 아무리 훌륭한 철학이라 하더라도 워즈워드의
영혼을 구할 수는 없었을 것이고, 가정부와의 사이조차 적절한 관계를 만들 수
없었더라면, 신이여 스펜스에게 자비를 내리소서.
  여성과 적절한 관계를 이룩하지 못하고 비뚤어진 도덕적인 생활을 보낸
사람들에게는 어딘지 모르게 초라하고 안스러운 데가 있는 것이다. 오스카
와일드조차도 (남자는 여자와 함께는 살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여자 없이도 살 수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기에 인간의 예지는 힌두교 이야기의 작자와 20세기
첫 무렵에 살았던 오스카 와일드와의 사이에 단 한 걸음도 진보하지 않은 것처럼
생각된다. 왜냐하면 힌두교의 창조설의 작자는 이미 4천 년 전 옛날에 본질적으로는
오늘날과 조금도 다름없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창조설에 의하면, 신은 여자를 만들 때 꽃의 아름다움, 새의 노래 소리,
무지개의 빛, 산들바람의 입맞춤, 파도의 웃음, 양의 온순함, 여우의 교활함, 구름의
방종, 소나기의 번덕스러움과 같은 것들을 들어 그것들을 여성의 몸 속에 짜넣은 다음
아내로 삼도록 남자에게 주었다고 한다.
  아내를 얻은 힌두교의 아담은 행복했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땅 위를 뛰놀며
돌아다녔다. 그런데 며칠 뒤 아담이 하느님 앞에 와서 말하기를 (이 여자를 다른 데로
보내 주십시오.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고 했다. 하느님은 그 말을 듣고
그녀를 다른 데로 떼어 보냈다.
  그러자, 아담은 쓸쓸해져서 역시 마음이 즐겁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자 아담은
또다시 하느님을 찾아와 말하기를 (제 아내를 다시 저에게 돌려 주십시오. 그녀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다시금 하느님은 그의 원을 받아들여 그에게 이브를
돌려 주었다. 며칠이 지난 뒤 다시금 아담은 하느님 앞에 나타나 간청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이 이브를 제발 저에게서 데려가 주십시오. 맹세코
말씀드립니다만, 그녀와는 도저히 함께 살 수가 없습니다) 신으로서의 무한한
지혜로서 그것은 이번에도 들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마침내 아담이 네 번째로
찾아와서 여성의 반려가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노라고 호소했을 때 하느님은
아담을 향하여, 다시는 마음이 변하지 않을 것, 좋건 나쁘건 그녀와 운명을 함께
할 것, 또 되도록 좋은 방법을 마련하여 이 땅 위에서 함께 살 것을 약속하게 했다.
  이 광경은 오늘날이라 할지라도 본질적으로는 별로 다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2. 독신 생활은 문명의 기형

  인간은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 살며 행복할 수는 없는 존재이며, 반드시 자기
주위에 있어 자기보다는 커다란 집단과 결합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가정에서부터
우리는 출발해야 한다. 자아라는 것은 그 자신의 크기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정신적 사회적인 활동이 행해지는 한 고립된 자아보다는 좀더 큰
자기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떠한 시대, 어떠한 나라에 있어서도 또한 어떤 형태의 정부에 있어서도
참된 생활로서 다소의 의의를 지닌 것이라면, 결코 그 나라나 그 시대와 꼭 같은
넓이와 폭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다 더 큰 자아)라고 부르는 바의 보다
작은 환경 속에 있는 것이어서 그것은 친지들이나 활동 범위에 의하여 정해지기
마련인 것이다. 이같은 사회적인 단위 속에서 사람은 살고, 사람은 움직이고, 사람은
존재하기 마련인 것이다. 이같은 사회적인 단위는 하나의 교구일 수도 있을 것이고,
학교나 감옥이나 회사나 비밀 결사 또는 자선단체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사회적 단위로서의 가정을 대신할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완전히 가정을
밀어내 버리게 되는 경우도 있다. 종교 그 자체도, 아니 때로는 커다란 정치 운동도
인간의 모든 존재를 소모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이같은 온갖 집단 가운데서
유독 가정만이 자연스럽고 생물학적으로 진실하고 만족스럽고 의의가 있는 유일한
생활 단위로서 부동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터이다.
  사람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이미 가정이 있게 마련이며, 또한 그 뒤의 일생도 가정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가정을 자연스러운 곳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핏줄이라는 것이 있어서 앞서 말한 보다 큰 자아라는 사상을 뚜렷하고 참된 것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에 이를 가리켜 생물학적인 진실이라고 나는 말하는 바이다. 이
가정이라는 자연적인 집단 생활을 잘해 나갈 수 없는 사람은 그밖의 집단 생활에서
성공할 가망이 없는 것이다. 공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제자는 모름지기 집 안에서는 효도를 다해야 하며, 사회에 나가서는 공손할 줄
알아야 하며, 성실하고 믿음성이 있고 널리 사람들을 사랑하고 인에 친하고, 행한
뒤에 아직도 여력이 있으면 글을 읽어야 한다.

  이러한 가정의 집단 생활의 중요성을 떠나서 생각하면 인간이 자기의 뜻을 나타내고
자기 자신을 충실하게 하고, 자기가 타고난 개성을 최고 수준까지 발전시킬 수 있는
것은 알맞은 이성의 짝에게서 받는, 빈틈없이 잘 조화된 따뜻한 마음씨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남자보다도 강한 생물적인 감각을 갖고 있는 여자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중국의 처녀는 모두 잠재의식적으로 붉은 결혼용 속치마와 꽃가마를 꿈꾸고 있고,
서구의 처녀들은 누구나 결혼식 때 쓸 면사포와 결혼식에서 울리는 종소리를 꿈꾸고
있다. 인위적인 문명의 힘으로 쉽게 쫓아내기에는 여성에게는 너무나도 강력한 모성적
본능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나는 확신한다. 자연의 뜻은 여성이 어머니가 되는 것을
바라고 있으며, 아내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어머니가 되어야 하고, 여성은 그러므로
여러 가지 정신적 도덕적 특질을 날 때부터 타고난 것이다. 진정 이러한 특질이
어머니로서의 구실을 다하도록 여성을 이끌어 주고 모성 본능 속에 올바르게 나타나고
또한 결합되어 있는 것이며, 이를테면 여성이 지닌 현실주의, 판단력, 번거롭고
귀찮은 일에 대한 참을성 어리고 연약한 것에 대한 사랑, 남을 돌봐 주기를 좋아하는
성품, 강렬한 동물적 사랑과 증오, 또 굉장히 자기 본위이며 울기 잘하는 감상적인
성벽, 일반적인 사물에 대한 개인적인 견해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므로 철학 자연의
의도에서 벗어나서 여성의 모든 생명의 강한 특질이며 또한 기본적 표현인 모성적인
본능을 도외시 하고 여성을 행복하게 하려 한다면 터무니 없는 잘못된 생각이다.
그리하여 아무리 무식한 여자도, 건전한 교육을 받은 부인도, 모성 본능은 결코
억압되는 일 없이 어렸을 때에 이미 그 싹이 트고, 청춘 시절에 이르러 더욱 더
강렬해지게 마련이다.
  이와는 반대로 부성 본능은 서른 살이 넘기 전에는 거의 나타나는 일이 없다. 어떤
경우라도 다섯 살짜리 아들이나 딸을 갖게 될 무렵까지는 거의 부성 본능을 의식하지
않는다.
  스물 다섯 살쯤 된 사나이가 아버지가 되고 싶어 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다만
어느 집 어느 처녀와 사랑을 하게 되어 우연히 아기가 태어난 것에 지나지 않으며,
아내의 생각은 일로 가득 차 있는 데 비해 남편은 모든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서른 살쯤 되어야 겨우 시장에도 데리고 가고 친구의 앞에서 자랑도 할 수 있는
딸이나 아들이 자기에게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때 비로소
자기가 아버지라는 실감이 나게 되는 것이다. 스물이나 스물 다섯 살의 사나이로서
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을 흐뭇하게 여기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아니,
흐뭇해하기는 커녕 그런 일은 거의 생각하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여성에게
있어서는 어머니가 되었다는 것, 또는 어머니가 되리라는 것조차도 그녀의 생애에서
가장 심각한 사건이며, 여성의 심신 전체에 변화를 가져오고 그 영향은 여성의
성질이나 습관까지도 바꾸고 마는 것이다. 여성이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고대하게
되면 그녀의 세계는 완전히 달라지고 만다. 이렇게 되면 무엇을 그녀가 생각하거나
인생의 사명이나 생활의 목적에 대하여 아무런 의문도 갖지 않게 된다.
  이때 그 여성은 세상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가 맡은 바 구실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어느 부유한 중국인의 집에
태어나 아무런 부자유를 모르고 응석받이로 귀엽게 자란 외딸이 있었는데, 어른이 된
뒤에 자기의 아기가 병들어 있는 동안 몇 달씩이나 잠을 자지 않고 정성껏 간호한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자연의 설계에 있어서는 이토록 강한 부성 본능은 필요하지
않는 것이다. 남성에게는 그러한 본능은 주어져 있지 않다. 대체로 남성이라는 것은
오리의 수놈이나 거위의 수놈처럼 수컷으로서의 책임을 다하는 외에는 태어난 자식에
대하여는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러나 여성은 이와 같은 생존의 중심동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또한 그녀가 맡은 바 구실을 다하지 못할 때에는 심리적으로 가장 괴로와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 문명은 수많은 훌륭한 여성이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미혼인 채로 지내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는데, 여성에 대해서 이
얼마나 어리석은 문명인가. 새삼스럽게 재론할 필요조차 없다.
  결국 우리에게는 (어떻게 살면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있을 뿐이다.
외형적인 생활의 피상적인 영달을 넘어서 좀더 높은 곳, 남녀 본성의 깊숙이 가로놓여
있는 근원에 부딪쳐 거기서 정당한 배출구를 찾아내지 못한다면 누구를 막론하고
인간은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없다.
  개인적 경력이 형태로 표현되는 하나의 이상으로서의 독신 생활에는 무언가
개인주의적 경향이 있을 뿐만 아니라, 어리석기 그지없는 주지주의적인 점이 있는데,
이 후자 때문에 독신주의는 배척을 받아 마땅한 것이다. 일단 자기가 좋아서 쓸데없는
주지주의자가 되는 고집스러운 독신주의자나 미혼 여성은 그 외형적인 공적에 너무
지나치게 열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가정 생활 외에 무엇인가 좋은 대용물 속에서
행복을 찾아낼 수 있고 깊은 만족을 맛볼 수 있는 지적, 예술적, 직업적인 흥미를
찾아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이것을 부정한다. 만족한 생활을 할 수 없는 대신 그 대용을 (경력)이라든가,
개인적인 공적이라든가, 동물 학대 반대 같은 일로 메꾸고 결혼도 하지 않고 아기도
갖지 않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의 개인주의적 행동은 어쩐지 어리석고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느껴진다. 이러한 것은 심리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경우에
나타난다. 노처녀들이 호랑이 잔등에 있는 채찍 자국을 보고 그 어떤 잔인한 학대라도
받은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하여 서커스의 지배인에게 호랑이를 너무 잔인하게 다루지
말라고 호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녀들의 항의는 호랑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종족에게 향하여진 전혀 당치도 않은 모성 본능에서 오는 것으로서 마치 호랑이
자신이 약간의 매질로 욕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착각하고 있다. 이러한 여성들은
인생의 어느 한 점만을 헛되이 손으로 더듬으면서, 자기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이
그럴 듯하게 여겨지도록 열심히 노력하고 있을 따름이다.
  정치적, 문화적, 예술적 공적에 대해서 치러지는 보수는 그러한 것들을 만들어 낸
사람들의 창백하고 지적인 독선에 그치지만, 자기의 자식들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을
보는 기쁨을 말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진실이다. 얼마나 많은 저작자나
예술가가 늙은 뒤에 자기가 이룩해 놓은 일에 흐뭇해 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이룩해 놓은 일을 평하여, 노인의 소일거리에 지나지
않으며 주로 생활해 나가기 위해 마지 못해 한 일이라고 흉을 보고 있는 것일까.
  허버트 스펜스는 그가 숨을 거두기 며칠 전, 18권이나 되는 그의 저서인
(종합철학)을 무릎 위에 올려 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 차가운 책의 무게를 느꼈을
때 책보다는 손자 편이 더 좋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현명한 가정부인 엘리아는
스펜스의 저서와 그 (꿈 속의 아이들)을 기꺼이 바꾸지는 않았을 것인가. 과연 설탕의
대용품이라든가 버터의 대용품, 솜의 대용품은 실로 보잘것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대용품에 이르러서는 참으로 비참한 일임에 틀림없다. 존 D 록펠러는 넓은
범위에 걸쳐서 인류의 행복에 크게 이바지 했으니까 그의 마음 속에 도덕적, 미적
만족이 있었으리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동시에 이같은 도덕적, 미적
만족은 극히 박약한 것이어서 골프장에서 힘센 윈스트록이라도 치는 날에는 쉽게
뒤집혀 버리게 마련이며, 결국 참되고 영속적인 만족을 준 것은 아들인 제2세
록펠러였으리라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행복이란 대부분 자기에게 알맞은 일, 즉 자기가 몰두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는 일이다. 어떤 직업에 종사하고 있는 남녀의 90퍼센트가 과연
그들이 진실로 자기를 바칠 수 있는 일을 찾아냈을까. 세상에는 흔히 (나는 내가 하는
일이 재미있답니다) 하고 제법 잘난 체 큰 소리를 치지만, 그런 말은 대부분 약간
에누리해서 들어야 한다. 아무도 (내 가정을 사랑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너무나
뻔히 잘 아는 일이기 때문이다. 보통 사무원들은 중국 여성이 아기를 낳을 때와 매우
비슷한 심정으로 자기 직장에 다니고 있다. 모두 그렇게 하니, 난들 어떻게 다른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는 심정이다. (내가 하는 일은 재미가 있다)고 모두들 말하지만
그러한 말은 엘리베이터 안내원이나 교환양이나 치과의사의 경우는 새빨간
거짓말이며, 편집자나 부동산 관리인이나 주식 중개인의 경우는 과장된 허풍이라고
할 수 있다. 발명이나 발견의 일에 종사하고 있는 북극탐험가나 연구실에서 일하는
과학자는 별도로 치고, 자기가 하는 일이 자기 성품에 맞아서 좋아한다는 것은 우리가
바람직한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말의 형용을 고려해서 생각하더라도
일에 대한 사랑과 어린아이에 대한 모성애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의 천직이 무엇일까 하고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것저것 직업을 바꾸지만,
어머니는 어린아이들을 기르고 지도하는 여성으로서의 평생의 일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는다.
  여성 독자들은 내가 말한 뜻을 잘 알아들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정을
지켜 나가는 무거운 짐은 결국 여성들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데, 내가
더욱 더 가정에 대하여 강조하는 것을 보고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내가 짐작한 일이고 또 제목이다. 그러니까 결국 앞으로의 문제는 누가
여성에 대해 보다 친절한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것은
사회적인 공적이라는 뜻에서의 여성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참다운
뜻에 관한 여성의 행복이기 때문이다. 직업에 적합하다느니 능력이 있으니 하는
문제를 놓고 보더라도, 여성이 어머니로서 꼭 어울리는 것 이상으로 자기가 맡은 일에
꼭 들어맞는 은행장은 적다고 나는 믿는다. 무능한 과장, 무능한 지배인, 무능한
은행가, 무능한 은행장이라는 것은 있지만, 무능한 어머니란 우선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니까 여성은 본디 모성적으로 태어난 것이며 또한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또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늘날 미국 대학에서 공부하는 여학생들의 여성으로서의 이상은 바른 길에서
벗어나 동요된 점은 있지만 대다수의 여학생들은 솔직하게 결혼하고 싶다고 말하며,
인생을 건전하게 바라보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다. 내 눈에
비치는 이상적인 여성은 화장품과 수학을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이며,
남녀동권론자보다는 여성다운 여성이다. 그녀들에게 화장품을 주라. 그리고, 공자가
말했듯이 행하고 남는 힘이 있으면 수학 연구에 몰두하게 하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보통 일반 남녀의 이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임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이 세상에는 뛰어나게 유능한 남자가 있는 것처럼 뛰어나게 유능한 여성도
있다. 이 사람들의 창조력은 인류 사회의 참다운 진보에 공헌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특수한 여성이 아니라, 보통 여성을 보고 결혼을 이상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아기를 낳고, 또한 부엌일을 할 것을 나는 요구하고 싶다. 그리고 또한 남성을 보고
예술 따위는 잊어버리고, 머리를 깎아 주거나, 구두닦이를 하거나, 도둑을 잡거나,
땜질을 하거나, 급사 노릇을 해서 가족들의 식생활을 위하여 어김없이 돈을 벌도록
나는 요구하고 싶다. 남자나 여자 가운데 어느 편이고 아기를 낳아 젖먹여 기르고
홍역의 탈 없이 보살펴 주고 선량하고 어진 시민으로서 길러내야만 하는데, 남자는
아기를 낳는 일은 전혀 할 수 없고, 아기를 안아 주거나 목욕을 시켜 주는 일은 아예
성가신 힘든 일인 만큼, 아무래도 이런 일은 여자가 맡아서 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보통 남녀가 할 수 있는 일로서 아기를 낳는 일과 이발, 구두닦이, 백화점
문지기와의 그 어느 쪽이 고상한 일인지 나는 알 수 없다. 자기들의 남편은
백화점에서 낯선 사람들을 위해 문을 열어 주는데 그 부인이 집 안에서 접시를 씻는
일을 싫어할 수는 없다. 옛날에는 남성들이 판매장의 일을 맡아 보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젊은 여성들이 많이 진출하여 남성 대신 점원이 되는 바람에 남성은 그만
문지기 일을 맡게 되고 만 것이다. 그러니까,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맡은 일을
비교적 고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근무한다면, 이 사회는 그들을 환영할 것이다.
  무슨 일이나 생활해 나가는 하나의 수단이라고 생각하면, 일에 귀천의 구별은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손님들의 모자를 맡는 일이 자기 남편의 양말을 깁는 일보다 더
필요하고 로맨틱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지 않겠는가. 모자를 맡는 일을 보는 처녀와
가정에서 양말을 깁는 아내와의 다른 점은 바로 다음과 같은 점에 있다. 즉 양말을
깁는 아내에게는 자기의 특권으로서 운명을 좌우하는 남편이 있는 데 비해 모자를
맡는 처녀에게는 그런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그 양말을 신는 사람은 여자에게
그런 일을 시킨 만큼의 가치 있는 사람이기를 바라는 바이지만, 이와 동시에 남편의
양말 따위는 아내가 수선할 만한 것도 못 된다고 대충 그렇게 결정해 버리고 이것을
내던져 버린다면 이것은 너무나 부당한 비판론이라고 할 수 있다. 남자들이란 모두가
그렇게까지 값없는 존재는 아니다.
  문제의 요점은 바로 다음 한 가지 점에 있다. 즉 가정에는 다음 세대가 될 자녀들을
길러서 가르쳐야 할 중요하고 또한 신성한 일이 있는데도 그런 가정 생활이
여성에게는 너무나 저급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생각해 버린다는 것은, 건전한
사회인의 태도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성과 가정과 모성을 충분히
존경하지 않는 저급한 교양을 지닌 가정이 아니고서는 이러한 일은 있을 수 없다.



    3. 성적인 매력에 대하여

  여성의 권리와 그 사회적 특권의 증대가 겉으로는 인정되고 있지만 여성은 아직
마땅한 대우를 받고 있지 못하다고 나는 언제나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심지어
오늘날의 미국 사회에 있어서조차도 그러하다. 내가 느낀 이 인상이 틀린 것이라면
좋겠다. 그리고 여성의 권리가 커짐과 더불어 여성을 숭배하는 관념도 줄어들지
않기를 나는 바란다. 도대체 여성을 숭배한다는 것, 즉 참된 의미에서의 여성 존경은
여성에게 돈을 쓰게 하거나, 가고 싶은 곳에 가게 하거나, 실무를 보게 하거나,
투표를 하게 하는 것과는 반드시 병행하지 않는다. 구 대륙의 한 시민이며 구대륙적인
생각을 지니고 있는 나는 평소부터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세상에는 중요한 일도
있고, 아무래도 좋은 일도 있게 마련인데, 미국 여성은 구대륙에서 살고 있는 동성과
비교해 보면 아무래도 좋은 일에 있어서는 모든 일이 앞서고 있지만 중요한 면에서는
여전히 똑같은 위치에 놓여져 있다. 어쨌든 유럽보다는 미국에서 여성 숭배 사상이
보다 더 강하고 보다 더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고는 말할 수 없다.
  미국 여성이 지니고 있는 참된 주관은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 전통적인 왕좌, 즉
가정이라는 것으로부터 오는 것이며, 가정 안에서 가족을 지키고 보호하는 행복한
천사로서 통솔자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 나는 이같은 천사를 본 일이 있는데, 그것은
오직 신성한 가정 안에서 뿐이다. 가정 안이라야 부엌과 객실 사이를 조용히 왔다갔다
하며 가족에 몸을 바치는 가정 주부의 모습이 있다. 가정 안이라야 부인은 어딘지
모르게 빛을 내게 마련이고 이런 것은 사무실에서는 아예 어울리지도 않고 또 생각할
수도 없는 모습일 것이다.
  그것은 다만 사무용 자켓을 입었을 때보다 비단옷을 입고 있는 편이 더 매력 있고
우아하다는 단지 그것 뿐이겠는가. 아니면 단순한 나의 공상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가정에 있어서의 여성은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 있는 것과 같다는 점에 깊이 음미할
바가 있다. 여성에게 사무복을 입히면 남자들은 비판할 수 있는 권리를 행사하며,
동료로서 그녀들을 바라보게 마련이다. 그러나, 여성에게 얇은 명주 크레이프나 비단
모슬린으로 만든 부인복을 입혀서 하루 일곱 시간의 노동 시간 중 한 시간쯤 사무실
안을 조용히 거닐게 하여 보라. 남자들은 경쟁 의식을 버리고 여성에 위압되고
감탄하여 제대로 말도 못하게 되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판에 박은 일을 하라고 하면
여성은 실로 재빨리 요령을 알아 이러한 종류의 일을 하는 데는 남성보다 훨씬 뛰어난
일손이 된다. 그러나 사무실 직원들이 누군가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차라도 함께
마시게 되어 장면이 바뀌게 되면 여성은 당장 그 자리에서 자기네 본디의 모습으로
돌아가, 동료나 상사를 보고 머리를 손질하라느니, 비듬을 없애려면 어떤 로션이 가장
좋다느니 하는 것을 가르쳐 주게 마련이다. 사무실에서 여성의 말씨는 공손하지만
한 걸음만 사무실 밖으로 나오면 당당한 태도로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다.
  남성 된 입장에서 솔직히 말한다면... 굳이 꾸며서 말을 할 필요도 없지만 공공
생활 속에 여성이 그 모습을 나타낸 뒤로 사무실이나 거리나 할 것 없이 매우
우아하고 상냥한 기분이 더해져서 남자들에게는 참으로 고맙게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무실 안에서 주고 받는 말소리도 조용해지고 빛깔도 화려해지고 책상도
깨끗해졌다.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성적인 매력이나, 남자들이 그 성적인 매력을 찾는
기분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지만, 그래도 미국의 남자들은 다른 나라의 남성들에
비하면 퍽 많은 덕을 보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미국 여성들은 이를테면
중국 여성들과 비교해 볼 때 성적인 매력이라는 점에서만은 훨씬 노력을 하여, 이성을
기쁘게 해 주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양 사회에서는 너무나 성적인
것을 생각하게 되어 여성 그 자체를 너무 가볍게 취급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서양 여성들이 머리를 매만질 때에는 중국 여성과 마찬가지로 상당히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얼굴 화장을 하게 되면 중국 여성보다는 훨씬 대범하게 하며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식사를 가려서 하고, 운동을 하고, 얼굴에 맛사지를 하고, 날씬하게 아름다와지기
위해 광고를 읽는 따위의 일에는 정성을 다한다. 또한 허리의 곡선을 아름답게 하기
위해 침대 속에서 두 다리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데 있어서는 중국 여성보다는 훨씬
열심이다. 중국 여성이라면 감히 상상도 못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얼굴의
주름살을 펴고 머리를 물들인다. 로션이나 향수를 사는 데 쓰는 돈도 중국 여성들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지는 않다. 그리하여 화장 도구가 또한 굉장하다. 예를 들면 낮에
바르는 크림, 털구멍에 바르는 크림, 레몬 크림, 볕에 그을리는 것을 막는 기름,
주름살 펴는 기름, 거북이 알에서 짜낸 기름, 그밖에 생각할 수 있는 온갖 종류의
향유를 들 수 있다.
  생각컨대 미국 여성들에게는 시간과 돈이 넉넉하다는 단지 그 하나의 이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그녀들은 남자들을 즐겁게 해 주기 위해 옷을 입고,
그녀들 자신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옷을 벗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는 이와는 반대로
남성을 즐겁게 하기 위해 옷을 벗고 자기 자신을 위해 옷을 입는 것인지, 또는 두
가지 경우가 다같이 해당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중국 여성들이 그렇게 못하는 것은
미국 여성들처럼 현대적인 화장 도구를 충분히 손에 넣을 수가 없다는 단지 그 이유
때문일 것이다. 다같이 이성을 끌려고 바라는 여성에게 인종이 다르다고 차별을 짓는
일을 나로서는 도저히 할 수가 없다. 지금부터 50년 전만 해도 중국 여성은 발가락을
구부려 단단히 매어 남자들을 기쁘게 해주려고 눈물겨운 고생을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이같은 전족을 폐지하고 기꺼이 하이힐을 신게 되었다.
  예술가는 남녀 육체의 해부학을 평등하게 연구하지만, 남성의 육체에 관한 연구를
영리상의 계산에 잘 맞도록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운 일인 듯 싶다. 극장은
인간을 벌거벗기는 곳이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남자의 마음을 괴롭히기 위해 여자를
벌거벗기는 것이지, 여자를 괴롭히기 위해 남자를 벌거벗기는 일은 우선 없다고 본다.
예술적인 동시에 도덕적인 것을 취지로 삼는 고급 쇼우의 경우에도 여성은 에술적이고
남자는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며, 여자는 도덕적인 존재가 되라, 남자는 에술적인
존재가 되ㅏ고 주장하지는 않는다(간단한 코메디에 나오는 남자 배우들은 언제나
손님들을 웃길 생각만 하고 있다. 예술적이라고 생각되는 무용에서조차도 그러하다)
돈벌이를 하려고 광고를 낸다. 그러면 저절로 테마가 잡힌다. 그것을 언제까지나
겉모양만 바꾸어서 상연하고 있다.
  그러니까 오늘날에는 어떤 남자 배우가 에술적인 존재가 되려고 원한다면 잡지를
한 권 사다가 광고난을 한 번 죽 훑어 보기만 하면, 그밖에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 결과 여성들 편에서는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너무도 강하게 느낀
나머지 마침내는 자기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성적 교의를 받아 들여 자기를
위축시키고 성적 매력을 발휘하기 위해 몸을 마사지 하게 되고 엄격한 훈련을 달게
받기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더욱 더 아름다운 세계에 이바지 하려 하는
것이다. 좀더 마음씨가 좋지 못한 여성의 경우에는 남자를 사로잡아서 놓지 않는
유일한 방법은 성적인 매력에 있을 뿐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생각한다. 성적인 매력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것은 여성이 본디
타고난 자질에 대한 미숙하고 덜된 사고 방식이다. 이런 미숙한 생각은 연애나 결혼의
품격에 대해서는 어떤 나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따라서 연애관이나 결혼관도
잘못된 불완전한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것으로는 여성은 한 집안의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그보다는 오히려 남성의 상대 노릇이나 해주는 존재쯤으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여성은 아내인 동시에 어머니이다. 그런데, 성을 그토록
그토록 지나치게 강조하면 남성의 상대로서의 여성이 지닌 의의가, 어머니로서의
의의를 내쫓아 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나는 주장한다. 여성은 어머니가 됨으로써
비로소 최고의 모습에 이르게 되는 것이며, 스스로 즐겨 어머니가 되기를 회피하는
아내는 순식간에 그 존엄성과 성실성의 대부분을 잃게 되어 남성의 한낱 노리개가
되는 위험 속에 빠지고 만다. 내 의견으로는 자식을 낳지 못한 아내는 첩에 지나지
않으며, 비록 첩이라 하더라도 아기가 있으면 어엿한 아내이다. 법이야 뭐라고 하든
사실이 그러하다. 아이만 있으면 정실부인이 아닌 여성의 입장도 고귀하고
신성해지지만 아이가 없으면 아내의 위치도 낮은 곳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런데
요즘의 부인네들 가운데는 얼굴과 몸맵시의 아름다움을 잃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피임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아는 사실이다.
  애욕의 본능이라고는 하나 인간 생활을 품부히 하기 위해 그에 알맞은 적당한
일만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정도가 지나치면 여성 자신이 오히려 손해를 본다.
성적인 매력을 유지하려고 하는 노력은 아무래도 여성이 신경을 쓰는 일이며 남성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성적인 매력을 지나치게 강조하게 되면 또한 공평하지 못한 일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즉 아름다움과 젊음을 지나치게 존중하면 중년 부인은 백발과
세월의 흐름을 적으로 돌리고 이길 가망이 없는 싸움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한 중국의 시인은 일찌기 우리에게 이렇게 일깨워 주었다. 청춘의 샘이란 한 조각의
허망이다. 아직까지 그 누구도 (태양을 사람의 힘으로 움직이고) 지나가는 (청춘을
되불러 올 수는 없었다)라고 하였다. 중년 부인이 그 성적인 매력을 유지하려고
조바심을 하며 애를 태우는 것은 시간의 흐름과 맹렬하게 겨루는 것을 뜻하며 전혀
무의미한 일이다. 다만 유우머만이 이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노령과 백발을
적으로 돌리고 이길 가망이 없는 싸움을 벌이는 어리석음을 깨달았으면, 무엇 때문에
백발을 아름답다고 하지 않는가. 그러기에 주계영은 이렇게 노래했다.

  늙으매 헤일 수 없는 수백 개의
  흰 머리칼 막을 재간도 없네,
  한탄한들 무엇하랴, 가는 세월에,
  늙어가는 그대로가 또한 흉일세.

  참으로 옳은 생각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 미국식 사고 방식은 모두 자연스럽지
못하고 또 공평하지도 못하다. 중량급 선수가 몇 년 뒤에는 젊은 도전자에게 선수권을
물려 주고 뛰어난 경마용 말도 늙게 되면 나이 어린 말에게 지위를 넘겨 주어야 하는
것처럼 부인도 늙게 되면 젊은 여성과 겨루어 보았자 누가 이기고 질 것인가는 뻔한
일인 만큼 그런 것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만일 그런 짓을 하면 결국 자기 자신의
성과 싸우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머니나 나이든 여성들에게는 불쾌한 이야기다. 성적인 매력의
문제로 중년 부인들이 자기들보다 젊은 여성들과 대립한다는 것은 가망없고 위험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여성에게는 성보다도 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느니만큼 더욱
어리석게 생각된다. 구애라든가 구혼은 대부분의 경우 아무래도 육체적인 매력에서
비롯되는 것이지만 성년이 된 남녀는 이미 그런 매력에만 사로잡힐 나이는 아닐
것이다.
  인간은 온갖 동물들 가운데에서 가장 성애가 강한 동물이다. 그러나 이 성애의 본능
외에 가정 생활을 영위하는 데서 비롯된 그와 마찬가지로 강한 이미로서의 본능이
있다. 성애의 본능과 어버이로서의 본능은 대다수의 동물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것인데, 가족의 시초는 긴팔원숭이의 생활 속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미술, 영화, 연극을 구경하고 언제나 성적인 자극을 거듭하여 너무나도 변질적인 교양
속에 빠져 성애 본능이 어버이로서의 본능을 짓누르게 되면 위험한 일이다.
  그러한 습성을 기르게 되면 가족적인 이상이 잊혀지기 쉽고, 게다가 개인주의적인
사상까지 곁들여 갖게 되면 결과는 더욱 좋지 않다. 그러기에 그러한 사회에서는
결혼은 기괴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대개 결혼식을 알리는 종소리로 모든 일은
경사롭게 끝나는 것인데, 이와 함께 그러한 키스는 끝나고 마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사회에는 남성의 짝이지 아기 어머니가 아니라는 이상한 여성이 나타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이상적인 여성이란 완전한 육체적인 균형과 매력있는 젊은 여성을 뜻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요람 옆에 서 있을 때만큼 여성이
아름다운 때는 없다. 아기를 품에 안고 너댓 살 된 어린이의 손을 잡고 걸을 때만큼
여성이 진지하고 위엄있어 보이는 때는 없다. 전날에 내가 본 적이 있는 유럽의 어느
화가가 그린 그림의 광경인데, 어머니가 베개를 베고 침대에 누워 가슴께에 있는 갓난
아이와 놀고 있는, 그때만큼 여성이 행복한 때는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모성에 대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 오히려 너무 심각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래도 괜찮다. 왜냐하면 중국인에게는 심리적인 컴플렉스 같은 것은
아랑곳없는 일이니까 별로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다. 저 정신분석학적인 오이디푸스식
인과 관계나 아버지와 딸, 어머니와 아들 사이의 컴플렉스 따위를 끌어내 보았자,
중국인의 안목으로 본다면 우스꽝스럽고 믿을 만한 것이 못된다.
  나는 여기서 밝혀 두지만 나의 여성관은 이러한 심각한 모성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다만 단순히 중국인의 가정 이상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4. 중국인의 가정이상

  저 창세기의 이야기는 완전히 다시 고쳐 써야 한다고 나는 아무래도 그렇게
생각한다. 중국 소설 (홍루몽)을 보면 주인공이 귀공자 가보옥 소년은 다정다감하고
나약한 소년으로 매우 여자 친구를 좋아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사촌누이들에게 몹시
마음을 불태우지만, 자기가 아직 나이 어린 소년임을 한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말을 했다. (여자는 물로 만들어진 것이고, 남자는 흙으로 빚어진 것이다) 그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그가 좋아하는 여자들이 모두 사랑스럽고 정숙하고 영리한 데 비해 그
자신이나 그의 남자 친구들은 모두 못생기고, 머리가 나쁘고, 성미가 괴팍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일 창세기의 이야기를 쓴 작자가 이 가보옥 소년이어서 그가
말하는 바를 알고 있었다면 창세기는 전혀 다른 것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창세기에서는 하느님은 한줌의 흙을 집어들어 사람의 모습으로 빚은 다음
콧구멍으로 숨을 불어 넣었다고 했다. 이라하여 아담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그
아담은 이내 부서지기 시작하여 끝내는 가루가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물을
길어다가 흙을 개었다. 아담의 몸 속으로 흘러들어간 물이 이브라고 불리어진
것이었다. 즉 이브라는 이름의 물을 몸 속에 간직하게 됨으로써 아담은 비로소 완전한
인간이 되었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적어도 결혼이라는 것의 성질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여성은 물이요, 남성은 흙이니 물은 흙 속에 스며들어 형태를 이루게
된다. 또 흙은 물을 머금고 물에게 자기의 물질을 제공하고, 물은 그 속에서
움직이고, 살아서, 물의 물다운 소임을 다하는 것이다.
  모두 다 아는 사실이지만, 중국인의 사회와 중국인의 생활은 가족 제도 위에
조직되어 있다. 이 제도가 모든 중국인의 생활 형태를 결정하고 또한 이에 빛을 주고
있다. 이러한 가정의 이상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까. 이 문제는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중국인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이와 반대로 외국인
연구자들은 이 문제에 간섭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는 가족 제도를 온갖 사회적, 정치적 생활의 기본이라고 했으며, 이에 철학적인
기초를 세워준 인물로서 널리 알려져 있는데, 그는 온갖 인간 관계의 기본으로서
부부관계나 효도, 조상의 무덤에 해마다 성묘하는 일, 조상 숭배 또는 가묘의 제도
따위를 크게 강조했던 것이다.
  중국인의 조상 숭배는 이미 몇 사람의 논자에 의해 종교라고 불리어지고 있다.
나도 우선 이 설이 거의 옳다고 믿고 있다. 그 가운데서 종교적이 아닌 점은 중국의
조상숭배가 초자연적인 요소를 몰아내고, 또는 그것을 몹시 가볍게 취급하고 있는
점이다. 초자연적인 것을 거의 건드리지 않고 생각한다면 중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조상 숭배는 기독교, 불교, 회교이 있어서의 신불에 대한 신앙과 병존할 수 있다.
조상 숭배 의식은 종교의 모습을 취하지만 생각컨대 온갖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외형적인 상징과 형식을 갖추어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당연한 일이고 또한
이유가 있는 일이다.
  그것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조상의 이름을 새긴 한 자 너댓치의 네모진 나무로 만든
위패에 중국인이 바치는 존경은 영국의 우표 딱지에 임금님의 초상이 그려져 있는
것에 비하여 보다 종교적이라고도, 보다 종교적이 아니라고도 말할 수는 없다. 따지고
보면 위패도 우표나 같은 것이다. 우선 첫째로 이러한 조상의 영혼은 신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으로 생각되고 있어, 이 세상에서 늙었을 때 자손들이
보살피고 받들었듯이 죽은 뒤에도 여전히 보살피고 받드는 것이라고 중국인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사람들은 죽은 이의 영혼에 대하여 무언가
달라고도 하지 않고, 병을 낫게 해달라고 빌지도 않고, 또한 소중히 받드는 쪽과
소중한 대접을 받는 편 사이에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신불의 은혜로 얻어지는
공덕이라는 것도 찾아볼 수 없다. 둘째로는, 이 조상을 소중히 받드는 식전은 다만
그럴 만한 일정한 날에 가족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세상을 떠난 조상이 살았을 때
가족들에게 베풀어 준 일을 추억하고 기뻐하며 고인에 대한 경건한 추상에 잠기는
하나의 기회에 불과한 것이다. 고작해야 고인 생전의 생일 잔치 대신쯤 되는 것이지만
그 근본 정신에 있어서는 어버이의 생일 축하나 미국에서 행해지고 있는 (어머니
날)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다.
  가족 제도의 이상은 필연적으로 하나하나의 개인주의 이상과는 철저하게 대립되는
것이다.
  결국 아무도 완전한 고립 생활을 보낼 수는 없다. 그러한 하나의 개인이라는 사고
방식에는 아무런 진실도 없다. 여기에 한 개인이 있다고 할 경우, 아들도 아니고
형제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이같은
하나의 개인이라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하나의 추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런데
중국인의 머리는 생물답게 사물을 생각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인간의
생물적인 관계를 맨 먼저 생각한다. 그리하여 가족은 인간 생활의 자연적인 생물
단위가 되고 결혼 그 자체도 하나의 가족 안에서 생기는 사건이 되고 마는 것이며,
개인적인 사건은 아닌 것이다.
  내가 먼저 (내 나라 내 국민)에서 이와 같은 가족지상주의가 가져오는 폐단을
지적한 일이 있었다. 생각컨대 그 가족지상주의는 확대된 이기주의 형태가 되어
나라에 손해를 끼치게 되겠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폐단은 인간 사회의 온갖
제도에 모두 있는 것이며 중국의 가족제도에 있다면, 서양의 개인주의에도
국가주의에도 있을 것으로, 모두가 인간성의 결함에서 오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국가보다는 위대하고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지만,
가족보다 위대하고 중요한 존재라고 생각된 일은 없다. 왜냐하면 가족을 떠나서는
인간은 참된 존재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유럽에 있어서의 개인주의나 국가주의에 대하여 중국에는 가족 관념이라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는 인간은 하나의 개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고 가족의 일원으로서
커다란 가족 생활의 흐름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내가 말하려는 유전설인 것이다. 인류 생활을 전체로서 생각하면
여러 가지 종족으로 구성된 생명의 흐름이라고 생각되지만, 인간이 직접 사물을
느끼고 직접 사물을 보는 것은 가족이라는 생명의 흐름에서인 것이다. 중국인도
서양인도 똑같이 말하는데, 그 말에 의하면 그 (가족의 나무)라는 말이 있으며,
인간의 일생은 모두 이 나무의 한 마디나 한 가지에 지나지 않으며, 그 가지는 큰
줄기에 붙어서 무성해지고 가지의 힘에 의하여 본 나무를 더욱 무성하게 하여
영생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아무래도 하나의 발전 또는 계속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이며,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는 모두 가족사 가운데의 한 구실이나
한 대목을 맡아 출연하여 가족 전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자기 자신에게도 가족
생활에도 치욕이나 영광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가족 생활에는 매우 심원한 변화와 명암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 자신이 어린 시절,
청춘 시절, 성년 시절, 그리고 노년을 이 가족 안에서 보낸다. 우선 태어나면 가족의
보살핌을 받는데서부터 시작하여, 이어 가족들을 보살피고, 늙게 되면 또다시
가족들의 신세를 지게 되는 것이다. 우선 가족들에게 복종하고 가족들을 존경하는
데서 시작하여 나이가 들어 감에 따라 이제까지와는 반대로 복종과 존경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광경 속에 여성들이 있으면 더욱 생활의 묘미는 늘어간다. 몇 대나
계속되는 이같은 가족 생활에 있어서 여성은 장식물도 장난감도 아니며 또한
본질적으로 아내의 자격으로 끼어드는 것도 아니다. 여성은 가족이라는 나무에서
절대로 없어서는 안될 한 부분인 것이며, 이같은 여성이 있음으로써 가족 생활이
오래오래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가족의 하나하나의 나뭇가지가 얼마나
강해지는가 하는 것은 그 집에 시집온 여성과, 그 며느리가 가족의 후손에게 주는
핏줄이 어떤가에 관계됨이 매우 크다. 접목하는 정원사가 좋은 종류의 나무를
고르려고 애쓰는 것처럼, 현명한 가장은 혈통이 좋은 며느리를 고르는 데 어지간히
신중하다.
  누구나 상당히 심각하게 느끼고 있는 일이지만 남자의 일생, 특히 그 가정 생활은
아내가 어떤가에 따라 어떻게도 되는 것이어서, 장래의 가족 전체의 성격은 그녀에
의하여 결정이 되는 것이다. 손자의 건강이나, 가족의 일원으로서 받게 될 가정
교육이 어떠냐 하는 것은(중국에서는 이 점을 매우 강조한다) 완전한 며느리 자신이
받아온 가정 교육에 달려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종의 막연한 형태 없는
우생제도이며, 유전의 신념에 의하여 흔히 가문이라는 것을 특히 강조하는데, 어떠한
경우라도 부모나 조부모의 눈으로 보아서 며느리가 건강하고 아름답고 좋은 가정
교육을 받고 자라났기를 바라는 심정이 표준이 되는 것이다. 대체로 부지런하여 일
잘하고 예의 범절이 좋아야 한다는, 예로부터 내려오는 아름다운 전통에 맞는 가정
교육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유럽인이 좋은 가문에서 며느리를 데려 오는 것과 같은
뜻이다)  유감스럽게도 때로는 데려온 며느리가 예의 범절도 모르는 보잘것 없는
여자라는 사실을 부모가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며느리의 친정 부모들의 가정 교육이 나빴음을 은근히 원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딸이 시집가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예의범절을 잘 가르쳐야 할 의무는
오로지 친정 부모에게 있는 것이며, 이를테면 딸이 시집을 가서 음식을 만드는 법도
모르고, 설날에 먹는 맛있는 푸딩을 만드는 방법도 모른다면 그야말로 큰일인 것이다.
  중국의 가족 제도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인생유전에 따르면 영생 불사라는 것은
거의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것 같다. 작은 가방을 들고 학교에 다니는 손자의
모습을 바라보는 할아버지는 누구나 다 정말 자기가 어린이가 되어 이 세상에 또다시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고, 어린의의 손을 만져 보고 그 뺨을 꼬집어 보고는
자기 자신의 혈육이 거기에 있다고 느낄 것이다. 자기의 생애는 (가족의 나무)의 한
마디가 영원에서 영원으로 흘러가는 가족이라는 큰 생명의 흐름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느낄 수 있음으로써 기꺼이 죽어갈 수 있는 것이다. 아들이나 딸들이
어엿하게 결혼하는 것을 살아 있는 동안에 부모들이 몹시 보고 싶어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죽은 뒤에 묻힐 묏자리나 훌륭한 관을 고르거나
하는 것보다는 훨씬 중대한 일인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아들이나 딸들이 어떤 모양의 처녀와 젊은이들과 결혼할 것인가
하는 것을 살아 있는 동안에 자신의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자식들이 앞으로 어떤
생활을 하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을 전혀 짐작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며느리나 사위가 매우 만족하고 있는 것 같으면 아무런 여한도 없이 눈을 감고 기꺼이
죽음의 길을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인생관을 가지게 된 결과 무슨 일에나 깊이가 있는 관찰을 하게 된다.
왜냐하면 인생은 개인이 나고 죽는 것과 함께 나고 죽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축구 경기에서 센터나 퀘터백이 패했더라도 경기는 계속되기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인생의 성패는 또다시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된다.
  중국인이 목표로 삼는 생활 이상은 조상을 욕되게 하지 않도록 살며, 또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돌아오지 않는 아들을 갖는 데 있다. 중국의 관리는 관직을 떠남에 있어
흔히 이런 말을 한다.

  아들이 있으니 모든 것이 흐뭇하고
  관직에서 떠나니 몸이 가볍도다.

  우리에게 닥쳐오는 가장 나쁜 비운은 아마도 (가족의 명예를 유지)할 수도 없고,
가족의 재산조차도 지키지 못할 것 같은 어리석은 아들을 갖는 일일 것이다. 백만
장자인 아버지도 방탕한 아들을 갖게 되면 일생 동안에 걸쳐 만들어 놓은 재산도
이미 다 써 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아들이 실패하면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즐거움을 장래에 걸고 있는 과부는 다섯 살쯤 된 훌륭한
아들만 있으면, 빈곤, 굴종, 때로는 박해까지도 몇 년이고 참고 견디어 낼 수 있다.
 중국의 역사는 문헌을 죽 훑어보면 온갖 궁핍과 박해를 견디어 가면서 자기의 아들이
어른이 되어 한 집안을 이루게 되기를 기다리거나, 또 어떤 경우에는 훌륭한 시민으로
출세하는 날을 즐거운 마음으로 고대하는 많은 과부를 볼 수가 있다. 과부들이 대개는
남자보다, 현실적인 여성 특유의 감각으로 어린이들에게 충분한 성품 교육이나 도덕
교육을 하는 데 성공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나는 때때로 생각하게 되는데 아버지라는
것은 어린 아이의 교육에 대해서만 말한다면 전혀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아닌가 싶다.
과부란 맨 마지막으로 웃을 수 있기에 그 웃음이 가장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가족 제도에서 인생을 이런 모양으로 안배한다는 것은 인간 생활의 생물적인 여러
면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참으로 좋은 일이다. 공자가 주로 말하려고 한
것도 결국 이것이다. 공자도 생각했듯이 위정자의 궁극적인 이상은 이상스럽게도
생물적인 것이었다.

  인을 이루면 늙어서는 화평을 즐기고 젊어서는 정절을 배워,
  안에는 원녀가 없고, 밖에는 광부가 없다.

  이것이 공자의 말 가운데 가끔 나오는 말안데, 단순한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위정자의 최종 목표를 나타낸 말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의의는 자못 큰 바가 있다.
  이것은 대경, 즉 (본능의 충족)이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인간주의적인 철학이다.
공자는 인간이 지닌 온갖 본능이 우선 나무랄 데 없이 충족되기를 요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만족한 생활 속에서 정신적인 평화를 유지할 수
있으며, 또한 정신적인 평화만이 참된 평화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치를 필요 없는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일종의 정치적인 이상이다. 대개 그것은 인간성에 깊이 뿌리를
박고 흔들리지 않는 평화이기 때문이다.



    5. 우아한 노경으로

  내가 보는 바로는 중국의 가족 제도는 노인이나 어린이들에 대하여 특별히 마음을
써서 주로 그것을 바탕삼아 마련되어 있다. 이것은 즉 유년 시대, 소년 시대, 노년
시대는 인간의 생애의 절반을 차지하는 것이므로, 어린이와 노년이 만족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라는 사고 방식이다. 어린이들은 무력하여 자기 자신을 돌볼
힘이 작은 것은 사실이지만, 한편 또 노인과 비교해 볼 때 물질적인 위안이 없어도
능히 즐겁게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물질적인 궁핍을 거의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가난한 집 아이들은
부자집 아이들보다 행복하지 않더라도 그에 못지 않게 행복할 수도 있다. 맨발로
다니는 일도 있지만, 그렇게 다니는 것이 재미있게 느껴질 뿐 고생스럽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노인에게 있어서는 맨발로 다닌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고통이다. 그것은 아이들에는 커다란 생명력, 즉 젊음의 약동이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슬픈 일도 있겠지만 곧 잊어버리고 만다. 노인처럼 돈 걱정을 하지 않고, 큰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번거로운 생각도 하지 않는다. 돈 많은 과부는 자유공채를
사모으지만, 아이들은 고작해야 장난감 총을 사려고 담배 경품권을 모을 정도일
것이다.
  이 두 가지 종류의 수집의 재미를 비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아직 모든
어른들처럼 새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의 습관도
아직 정해져 있지 않고 어떤 특별한 상표가 붙은 커피만을 마시는 것도 아니며, 눈에
띄는 것에는 무엇에나 손을 내밀게 마련이다.
  인종에 대한 편견도 거의 없을 정도이고, 종교적 편견 따위는 아예 갖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사상이나 관념이 어떠한 선배의 잘못에 빠진 이도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청소년에 비해 노인은 두려워하는 관념도 뚜렷하고, 즐기고 좋아하는 것도
엄격하게 범위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아이는 보다 훨씬 더 가족들의 보살핌을
받아야만 한다.
  노인에 대한 이같은 다정한 태도는 중국인의 원시적인 감정 속에 이미 다소 존재해
있다. 이러한 느낌을 유럽인에게서 찾으려고 한다면 오직 저 기사도의 정신, 부인에
대한 친절한 마음 정도이다. 그러나 엣날의 중국인에게 기사도가 있었다면, 부인이나
어린이들에게 발휘된 것이 아니라 노인에게 대해 발휘된 것이었다. 이 기사도적인
마음은 맹자가 말한 다음과 같은 말 가운데 뚜렷이 나타나 있다.

  효도의 의로써 말하면 백발 노인이 짐을 진 모습이 길에 보이지 않아야 한다.

  이 말은 선정의 마지막 목표를 나타낸 말이다. 맹자는 또 이 세상에서 가장 무력한
종류의 사람들을 이같이 말하고 있다. 즉 (과부, 홀아비, 고아, 자손이 없는 노인)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 종류의 사람들 가운데에 맨 먼저 든 두 종류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미혼 남녀를 없애려는 시정에 의하여 구제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고아들을
어떻게 다루면 되겠는가 하는 데 대해서는 내가 알고 있는 한 맹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득한 옛날부터 고아원이라는 것은 양로금과 함께 늘 존재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고아원과 양로금이 다같이 가정의 보잘것 없는 대용물이라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 오직 가정만이 어린이와 늙은이에 대해 충분한 보호를
해줄 수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어린이의 경우에는 각별히 신경을 써 가며 돌보아줄 것도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대체의 자연으로부터 주어진 부모의 사랑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은 낮은 곳으로 흐르게 마련이요, 높은 곳으로는 흐르지 않는다)고
중국인이 언제나 말해 온 바와 같이, 사랑은 내리사랑이어서 부모나 조부모에 대한
애정은 다소 수양에 의하여 얻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은 자식을
사랑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배워서 수양을 쌓은 인간은 자기의 어버이를 사랑하게
된다. 그리하여, 노인을 사랑하고 공경하라는 가르침은 마침내 온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교리가 되었다. 그리고 몇몇 사람의 논자들이 말하는 것을 믿는다면,
늙은 양친을 돌보는 자격을 갖고 싶어하는 마음은 마침내 실제로 열렬한 일반 사회의
요망이 된 것이다.
  중국인에게 있어서 가장 큰 유감으로 생각되는 일은 임종의 자리에 누운 부모에게
약초나 고깃국을 마련해 드려서 마지막 효도를 다할 기회를 영원히 잃는다거나, 또는
그 부모가 돌아가실 때 그 자리에 있지 못하는 일이다. 나이가 쉰, 예순이 된 고관이
부모를 고향에서 모셔다가 도시에서 자기와 함께 살게 하면서 (밤마다 자리에 드는
것을 보고 아침마다 문안 인사를 드릴) 수 없다면, 돌이켜 생각할 때 부끄럽기 이를
데 없는 마음의 죄를 진 것이 되므로, 친구나 동료들에게 언제나 거북한 변명을
하거나 해명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유감스러운 심정은 모처럼 고향에 돌아왔으나
때가 늦어서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 지은 다음 두 줄의 감회에 잘 나타나
있다.

  나무는 조용히 있기를 원하나 바람이 멎지 않고,
  자식은 봉양하려고 하나 부모는 기다리지 않는다.

  사람이 만일 이 세상을 한 편의 시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애의 황혼이 질 무렵을
가장 행복한 때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을 너무 두려워하여 오래 살려고
애를 태우는 일도 없이 오히려 자진해서 노경이 오기를 기다려, 생애 가운데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절을 천천히 만들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동양인의 생활과 유럽인의 생활과를 여러 가지로 애써 비교 대조해 보지만, 나이에
대한 동양인의 사고 방식을 빼놓고는 절대적인 차이는 찾아볼 수 없다. 이 생각의
차이는 매우 뚜렷하게 달라서 중간적인 것이 끼여들 여지가 없다. 성, 여성, 일,
오락 또는 성공 같은 것에 대한 동양인의 태도가 서양인과 다른 것은 모두 비교상의
문제다. 중국인의 부부 관계도 본질적으로는 서구인의 그것과 그다지 다를 바 없고,
부자간의 관계도 역시 그러하다. 개인적인 자유나 민주주의적인 사상 또는 백성과
지배자와의 관계에서조차 결국은 그다지 다른 점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나이에 대한 중국인의 태도에 이르러서는 서구인과는 절대적으로 다르다.
  이 점에 대해서만은 동서는 정반대의 사고 방식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남의 나이를
묻거나 자기의 나이를 말하거나 할 때의 태도를 보면 이런 점이 매우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중국에서는 공용으로 사람을 불렀을 경우 그 이름을 묻고 난 뒤 맨먼저 묻는
것은,
  (연세는 얼만가요?)
  하는 말이다. 그때 상대편이 (스물 세 살입니다)라든가 (스물 여덟 살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무언가 말하기 어려운 듯이 머뭇거리고 있으면, 물어본 쪽은 대부분의 경우
상대편을 위로하면서, (아직 앞날이 창창하신 데다가 앞으로 언젠가는 노인이 되실
테니까요) 하고 말하게 마련이다. 또한 만일 서른 다섯 살이라든가 서른 여덟
살이라고 대답하면 깊이 존경하는 태도로 대뜸 (아, 그러십니까) 하고 말한다. 나이가
많음을 말하면 할수록 묻는 편에서는 태도가 엄숙해진다. 그러다가 쉰 몇 살이라고
말하기라도 하게 되면 묻는 편에서는 대뜸 음성을 낮추어 공손하게 존경하는 태도를
보인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할 수만 있다면 중국에 가서 살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인 것이며, 중국에서는 머리가 허옇게 세면 심지어 거지까지도 특별히 친절한
대우를 받는다. 중년에 접어든 사람들은 쉰 살이 되는 생일, 바꾸어 말하면 인생의
반세기가 된 것을 알리는 날은 모든 계급의 사람들을 다같이 기쁘게 한다. 이순(예순
살)의 나이는 쉰 살 때보다 더 행복하고 위대하며, 미수(여든 여덟 살)의 생일을
축하할 수 있는 사람은 실제로 하늘로부터 각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으로서 존경받게
된다. 흰 수염을 기르는 것은 할아버지가 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할아버지가 되었다든가 쉰 살이 넘었다든가 하는 필요한 자격도 갖추지 못하고 흰
수염을 기르면 남에게 뒷손가락질을 받을 염려가 있다.
  이런 풍습 때문에 젊은이들이 노인의 태도나 위엄이나 견식을 흉내내어 자기의 진짜
나이보다 더 나이들어 보이고 싶어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몇몇 사람의 젊은 중국 문인들을 알고 있는데, 그들은 이제 중학교를 갓
졸업한, 아무리 보아도 스물 한 살에서부터 스물 다섯 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젊은이들인데도 잡지에 글을 쓰는 것을 보면 (청년은 무엇을 읽어야 하며, 또 무엇을
읽어서는 안 되는가) 따위의 말을 해서 짐짓 어버이다운 친절한 마음으로 젊은이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유혹에 대해 논하기도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국인 모두가 이같이 노령을 존경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들이 빨리
나이가 들기를 원하고, 언제나 나이 들어 보이기를 바라는 심정을 능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첫째로, 이야기를 하는 것은 노인이 가진 특권이다. 젊은이들은
노인이 이야기하는 동안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들어야만 한다. 중국의 속담에도
있듯이 (젊은이에게는 귀는 있지만 입은 없다) 서른 살 된 사람이 이야기를 할 때에는
스무 살 된 젊은이는 듣는 편이 되지만, 그 서른 살 된 사람도 마흔 살 된 사람이
이야기를 할 때는 말없이 듣고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누구나 이야기를 할 때는
남들이 들어주기를 바라는 것인 만큼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어디를 가거나 남들이
이야기를 들어 줄 기회가 많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이것은 매우 공평한 인생의
게임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언젠가는 나이를 먹을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설교를 하다가도 할머니가 말을 시작하면 곧 자기가
하던 이야기를 그치고 정중한 태도로 자세를 고쳐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때 아버지는
할머니의 처지를 부럽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 그것이 좋은 것이다. (네가 길을
건너온 것보다 나는 좀더 많은 다리를 건넜단다) 하고 노인이기 때문에 말할 수 있는
것을 무슨 권리로 젊은이가 감히 입을 열겠는가. 남에게 이야기를 할 어떤 권리를
젊은이가 가졌단 말인가.
  아직 결혼하지 않은 처녀나 중년 부인이 자기의 나이를 말하기를 싫어하는 심정은
잘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젊음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은 극히 자연스러운 감정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처녀들도 나이가 스물 두 살이 되었는데도 아직 결혼도 못했고, 약혼도 하지
못하고 있으면 나이에 대해서 다소 겁을 먹게 마련이다. 세월은 사정없이 지나간다.
독일 사람들은 이런 것을 무서운 마감 시간이라고 하는데, 자기 혼자 뒤에 처져
있다는 불안한 심정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밤늦게 문이 닫혀진 뒤에 공원 안에 혼자
남겨지게 되었을 때 느끼는 그런 불안한 기분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의 일생을 통해 가장 긴 해는 스물 아홉 살 때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스물 아홉 살이라는 나이는 3년, 4년, 때로는 5년이나 계속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것을 떠나서 남에게 자기의 진짜 나이를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남이 연장자라고 생각하도록 하지 못하고 어찌 현명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한 나이도 아직 어린 사람이 어떻게 인생이나
결혼이나 또는 세상의 여러 가지 참된 가치에 대해 진짜 지식을 얻을 수 있겠는가.
유럽인의 모든 생활 방식이 젊음을 존중하고, 따라서 그들 남녀로 하여금 자기의 진짜
나이를 말하기를 꺼리게 하는 것은 수긍이 간다. 하나도 나무랄 데 없는, 능률적이고,
활동적인 마흔 다섯 살 된 여비서도 그녀의 진짜 나이를 알게 되면 당장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고 만다. 그러나 참으로 괴상한 핑계도 다 있다. 자기의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하여 진짜 나이를 감추려고 하다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니겠는가! 형편이
이러고야 인생 그 자체도, 젊음의 존귀함도, 모두 하잘것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내
생각으로는 이것은 절대로 무의미한 일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틀림없이 직장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여성은 사무실에 있는
것보다는 가정에 머물러 있는 편이 나이에 대해서 좀더 존경을 받을 것임을 나는 굳게
믿는 바이다. 그러나, 미국 사람들이 일이니 능률이니 공명이니 하는 것에 그다지
사로잡히지 않게 되기까지는 이런 상태에서 벗어날 길은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인의
아버지가 인생의 이상적인 거처를 사무실보다는 가정에서 구하고, 중국인 부모들을
본따서 자기에게는 이미 자기를 대신할 수 있는 훌륭한 아들이 있으므로 자랑스럽게
그들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다고 절대 편안한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공언할 수 있게
되는 날 비로소 즐거운 노년이 찾아오기를 고대하며, 쉰 살이 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튼튼하고 건강한 미국의 노인들이 (나는 젊다)고 남에게 이야기하고, 또는 다른
사람에게서 (젊다) 하는 말을 들었을 때에는 그 참된 뜻은 건강하다는 뜻으로, 이것은
아무래도 언어학적인 재난인 것 같다. 늙어서 건강을 즐긴다는 것, 바꾸어 말하면
(늙을수록 더욱 건강)하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큰 행복이다. 그러나 (건강하고
젊다)는 식으로 말을 하게 되면, 신비로운 매력이 없어질 뿐더러 나아가서는 표현
방법이 불완전한 만큼, 노년 그 자체까지도 불완전한 것인 듯한 결과가 되고 만다.
결국 이 세상을 바라볼 때, (홍안백발)의 노인을 그리는 것이다. 미국 사람들
가운데는 중국인의 복록수신의 그림을 본 사람이 많을 것이다. 높은 이마에 얼굴빛이
불그레하고 흰 수염을 기르고 그리고 빙그레 웃고 있는 그 모습! 이 노인의 그림은
정말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 앞가슴께까지 늘어진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평화롭고
흐뭇한 얼굴로 그것을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다. 존경을 한몸에 모으고 있기 때문에
푸멳이 갖추어졌고, 아무도 그의 지위를 의심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유유자적 무릇
모든 사람의 눈물을 알고 있기 때문에 자애에 넘쳐 있다.
  늙어서도 활동력이 왕성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노익장)이라는 찬사를 드린다.
  미국에서는 훌륭한 흰 수염을 기른 노인네의 모습은 여간해서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런 노인들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서로 짜기라도 한 것처럼 일찌기 내 앞에
나타나 본 일이 없다. 아니 꼭 한 번 뉴우저어지 주에서, 이만하면 머리를 숙일
만하다고 생각되는 흰 수염을 기른 노인을 본 일이 있다. 이런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은
아마도 안전면도칼 탓인지도 모른다. 중국의 산들이 생각 없는 농부들에 의하여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고 만 것과 같은 형상이어서 한탄스럽고 사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중국의 농부들은 중국 북부 지방의 아름다운 숲을 완전히 벌거벗기어 미국
노인의 턱처럼 보기 흉한 대머리 산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미국 사람들이 여기에 눈을 떠서 다같이 옛날처럼 되도록 나무를 심을 계획에 참가
한다면 미국에는 아직도 개척할 수 있는 보고가 있다. 보아서 즐겁고 듣기에 즐거운
아름다움과 예지의 보고가 있다. 미국에는 수염 기른 노인네란 이미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저 염소수염을 기른 엉클 샘도 이미 없어졌다. 누구나 다 안전면도칼로 흰
수염을 깎아버리고, 품위 있게 긴 수염을 늘이는 것도 그만두고, 번들번들한 턱을
어루만지면서 로이드 안경 속에서 날카로운 눈초리를 번득이면서 하잘것 없는
애송이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다. 저 흰 수염을 늘어뜨린 노대인에 비해
얼마나 초라한 모습인가!
  미국의 노인들은 오늘날 여전히 바쁘고 활동적인 생활을 하고 싶어 하는데, 그것은
어이없을 만큼 강력해진 개인주의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그들의 긍지이며 독립을 사랑하는 마음이며, 자식들의 신세를
지게 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태도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은 그들의 헌법
속에서 많은 인권에 대해 규정을 했지만 이상하게도 자식에게 봉양받는 권리는 잊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효양에서 오는 권리이며 의무인 것이다. 젊었을 때는,
자식 때문에 무척 고생도 했고, 자식이 아플 때에는 몇 날 밤씩이나 잠도 자지 않고
간호를 했으며, 아직 말도 못할 때부터 기저귀를 빨고, 1세기의 4분의 1이나 걸려서
자식을 길러 훌륭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친 세상의 어버이들이 늙은 뒤에
자식들이 보살펴 주고 사랑하고 공경하는 것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누가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도대체 우리는 한 개인으로서의 자기나 자기의 자랑을 가정
생활이라는 기획 전체 속에서 잊어버릴 수는 없는 것일까. 생각하면 그러한 가정에서
어렸을 때는 부모의 품에서 자라나고, 다음에는 반대로 자기 자시글 훌륭하게 키우고,
이번에는 그 자식의 보살핌을 받게 되어 있는 것이다. 모든 인생관이 가정 안에서의
상호 부조에 그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중국인에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독립이라는
뜻을 모른다. 그러므로 인생의 노년기에 접어 들면서 자식들에게 기대고 살아 간다는
것은 하나도 부끄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어버이를 보살필 수 있는 자식이
있다는 것은 행복된 일이라고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인의 세상사는 이것 외에
재미가 없다고 할 수 있다. 늙은 어버이에 대한 효양을 중국인이 언제나 생각하고
있는 것은 어버이에게 은공을 갚아야겠다는 한결같은 정성 때문이다. 친구에게 진
빚에는 한도가 있지만 어버이로부터 받은 은혜에는 한도가 없다. 효도에 대해서
중국인이 쓴 글을 보면 기저귀를 빤다는 말이 여러 번 되풀이 해서 나온다. 이것은
우리들 자신이 어버이가 되었을 때 뼈에 사무치게 느껴지는 말이다. 그러니까
어버이가 노경에 이르렀을 때 받드는 자식들에게 의지하여 맛있는 음식을 먹고 상
위에 차려놓은 좋아하는 음식을 즐긴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효양의
의무를 다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어버이를 받들어 모시는
것과 호텔의 손님의 시중을 드는 것과를 비교하거나 하는 것은 신성함을 모독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면 다음에 드는 글은 자식이 가정에서 어버이에 대하여 해야 할
의무에 대해서 말한 것인데, 도석석이 쓴 글로서 옛날의 학교 교과서로서 굉장히
유명한 어느 수신 책에 들어 있는 것이다.

  여름에 어버이를 섬기려면, 곁에 모시고 서서 부체질을 하여 더위와 파리와 모기를
몰아 내야만 합니다.
  겨울에는 잠자리를 따뜻하게 마련해 드리고, 난로에 불이 잘 타고 있는지 언제나
난로를 살펴보도록 해야 됩니다. 들창이나 문에 구멍이나 틈이 없는가, 그 사이로
바람이 들어오지나 않는가를 잘 조사하여 어버이의 만족과 기쁨을 사도록 애써야만
합니다.
  자식이 열 살이 지나면 아침에는 어버이가 일어나시기 전에 일어나 세수를 한 뒤
어버이의 침실로 가서 간밤에 편안히 주무셨는지 아침 문안을 드려야 합니다.
  만일 어버이가 벌써 일어나 계시거든 우선 아침 인사를 드린 다음 다시 절을 하고
그 방에서 나와야 합니다. 밤에는 자리에 들기 전에 먼저 어버이의 자리부터 보살펴
드리고 어버이가 편히 잠이 드실 때까지 곁에 모시고 있다가 혼곤히 잠이 드시면
머리맡의 커어튼을 쳐 드리고 조용히 물러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누구나 중국의 노인이나 노부가, 조부가 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중국의 프롤레타리아 작가들은 이러한 것들을 (봉건적)이라고 말하고 몹시
비웃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중국의 노신사들로 하여금 누구나 집착을 갖게 하고, 근대
중국은 이제 보잘것 없는 나라가 되었다고 생각하게 하기에 충분한 매력이 있는
것이다.
  자기 원대로 오래 살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누구나 다 나이를 먹게 된다. 이것이
바로 중요한 점이다. 인간이 추상의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글자
그대로 독립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어리석은 개인주의를 깨끗이 없애
버린다면 (인생의 황금 시대는 늙어가는 미래에 있으며, 지나가 버린 아무것도
몰랐던 젊은 시대에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입장으로 되돌아와 인생의 계획을 세워야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만일 이와 반대되는 태도를 취한다면 시간이라는
무자비한 코오스 위에서 참혹한 경주를 벌이고 있는 셈이 되는 것이며(그러나 본인은
그런 줄 모르고), 언제나 자기네보다 앞쪽에 있는 거싀 환경에 위협을 받을 것이고,
물론 이길 가망도 없고, 결국은 모두 지고 말게 되는 것이다. 그 어느 누구도 몸이
늙어가는 것을 실제로 막을 도리는 없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늙어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스스로를 속이는 일일 뿐이다. 구태여 자연에
대해서 반항할 필요는 없는 것이니까 점잖게 나이를 먹어가는 편이 좋다.
  인생의 교향악은 평화, 고요함, 안락, 정신적인 만족이라는 위대한 피날레로 끝내야
하는 것이며, 찢어진 북이나 찌그러진 심벌 소리로 끝내서는 안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