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my blog with Bloglovin FraisGout: 제3장 인간의 동물적 유전
Showing posts with label 제3장 인간의 동물적 유전. Show all posts
Showing posts with label 제3장 인간의 동물적 유전. Show all posts

제3장 인간의 동물적 유전

    1. 원숭이의 서사시

  그러나 이 생물학적 인간관이 우리를 도와서 우리들로 하여금 인생의 아름다움과
리듬을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면, 동시에 그것은 또한 인생의 보잘것 없는 한계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생물학적 인간관은 동물로서의 인간의 실상이 한층 더
분명하게 묘사되어 인간 자신과 인간계의 사상의 진보를 한층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동물을 조상으로 해서 출발하고 있는 인간성을 보다 진실하게 보다 깊이
이해한다면 사물에 대한 동정심이 깊어져서 대범한 냉소주의까지도 거기서 생기게
된다.
  이것은 네안데르탈인과 북경인의 자손이며, 더 거슬러 올라가서 유인원의
자손이라는 것을 조용히 상기해 보면, 이른바 인간 희극의 감각이라고 불리어지는
인간의 원숭이 꾀에 결국 감탄도 하고 또 동시에 인간의 원죄와 한계를 스스로 비웃는
능력도 생기게 된다. 이것은 클래런스 데이의 계발적인 논문 (이 유인원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사상이다. 이 논문을 읽고 있으면 우리들의 모든 동포... 예를
들면 검열관, 선전부의 간부들, 파시스트의 편집자, 나치의 라디오 아나운서,
상원의원과 입법자, 독재가, 경제 전문가, 국제회의의 대표, 그리고 남의 생활에
간섭하려는 모든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이 생각된다.
그러한 사람들을 이해하고 사랑스러움을 알게 되므로 자연 그러한 사람들을 용서할
마음이 생기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중국인이 쓴 원숭이의 대서사시(서유기)의 예지와 통찰력을
한층 더 높이 평가하고 싶다. 인류사의 진보를 다음과 같은 관점에서 바라보면 한층
더 잘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즉 인류사는 그 불완전한 반인간적 동물들의
서방정토 순례행에 비슷한 점이 매우 많다. 즉 인간의 지력을 나타내는 원숭이인
손오공보다 더 저급한 성질을 나타내는 저팔계, 상식을 대표하는 사오정, 예지와
정도를 대표하는 삼장법사의 일행이 그것이다. 현장법사는 이 진기한 시종들의 보호를
받으면서 불전을 얻기 위하여 중국에서 천축으로 여행의 길을 떠난다. 이 너무나도
불완전한 동물들의 모임은 어리석음과 장난기로 언제나 위험에 빠지기도 하고
어이없는 꼴을 당하게 되는데, 인류 진보사를 잘 고찰해 보면, 그 본질에 있어서는
이 한 무리의 순례행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 장난꾸러기인 원숭이, 색을 좋아하는
멧돼지, 이들은 불쌍하고 부족한 존재로 그 모자라는 정신력과 그 열정 때문에 만난
신고를 죄다 맛보는 것인데, 현장법사는 몇 번씩이나 그들을 나무라기도 하고 또 벌을
주어야만 했던 것이다.
  인간의 가지가지의 본능, 즉 박지 약행, 노여움, 복수, 성급함, 호색, 너그러운
마음의 결핍, 특히 자만심, 겸양적 정신의 결여, 이러한 것들을 인간이 성자의 경지를
목표로 삼고 난행하는 이 순레행 중에 끊임없이 나타난다. 파괴성이 늘어감과 더불어
기술도 또한 진보한다.
  우리는 오늘날 신통력을 가진 손오공 못지 않게 구름 위를 다닐 수도 있고,
공중에서 재주를 넘을 수도 있다(현대어로는 공중회전)  원숭이의 다리에서 털을 뽑아
무수히 많은 새끼 원숭이들로 바꿔서 적을 괴롭힐 수도 있고, 삼엄한 천국의 문을
두드려 천문지기를 난폭하게 쫓아버리고는 신들이 앉아 있는 자리의 한 자리를 청할
수도 있는 것이다.
  손오공은 영리하였지만 역시 자만심도 강했다. 천계를 밀고 들어갈 만한 신통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천국에서 평화롭게 지내기에는 정신의 건전함과 그 평형 절제가
부족했다. 지상의 생물들과 함께 살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좋은 동물이었지만
천국에서 신들과 함께 살기에는 좀 그 선량함이 부족하다. 조잡하고 난폭하며 장난을
좋아하여 반역적인 성벽이 손오공에게는 있었다. 이른바 옥에 티라고 하겠다. 오공이
순례의 일행에 끼이기 전의 이야기인데, 그가 천국으로 밀고 들어갔을 때 동물원의
우리를 파괴하고 길거리로 뛰어나온 성난 사자와도 같이 천국에 대공황을 일으킨
일이 있는데, 그것도 그 성벽에서 나온 것이다. 어떻게도 다스릴 수 없는 장난을
즐기는 성질을 타고났기 때문에 서천황후 왕모가 천국의 신들과 신선들을 불러 들여
베푼 1년에 한 번 있는 큰 잔치를 쑥밭으로 만들어 놓고 말았다. 이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것을 분개한 오공은 신의 사자를 가장하여 잔치가 열린 장소로 향하는
과족선인을 붙잡아 잔치 장소가 바뀌었다고 거짓말을 해서 엉뚱한 곳으로 쫓아 버린
다음 그 선인 모양으로 변장을 하고 그 잔치 장소로 왔다. 다른 많은 신들도 이런
식으로 속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안마당으로 들어가 보니 오공은 맨 첫번째로 온
손님인 모양이었다. 복도에 늘어놓은 신주 독을 지키고 있는 하인들 외에는 아무도
없다. 그러자 이번에는 잠자는 벌레로 변신하여 그 하인들을 쏘아 잠들게 해 놓고
그 많은 술독에 든 신주를 말끔히 마셔 버렸다. 얼근한 기분으로 잔치자리로 비틀비틀
들어가 식탁 위에 죽 늘어놓은 불로 불사의 복숭아를 모두 먹어 치우고 말았다.
손님들이 도착하여 엉망이 되어버린 잔치상을 발견하였을 때에는 오공은 어느새 그
자리를 나와 다른 약탈품을 찾아서 태상노선의 집으로 침입하여 불로 불사의 선단을
훔쳐 먹으려고 하고 있다. 변장한 채 오공은 드디어 천국을 떠났다. 술이 취해서
행패를 부린 일에 대한 보복이 무서운 탓도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잔치에 초대받지
못한 일이 분했던 것이다. 그런 다음 자기가 왕이 되어 뽐내고 있을 수 있는 원숭이
나라로 돌아와 조그만 원숭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모두 하였으며, 깃발에
(제천대성)이라고 크게 써서 천국에 대항하여 반기를 휘날리었다. 이와 같이 해서
오공과 천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지게 된 것인데 관음보살이 구름 위에서 아련한
꽃가지 하나로 오공을 때려 눕혔기 때문에 그만 오공은 신에게 사로잡히고 말았다.
  손오공처럼 우리 인간도 영원히 반역을 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관음보살의 아련한
꽃가지에 얻어 맞아 정복되고 말 때까지는 인간의 마음에는 평화와 겸양의 마음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과학이 우주의 구석구석까지 탐구하기까지에는 인간은 참된
겸양의 가르침을 배울 수 없을 것이다. (서유기)에서도 오공은 사로잡힌 뒤에도
여전히 배반을 일으켜 천국의 왕, 옥황상제에게 어째서 자기에게 좀더 높은 천국의
직책을 주지 않느냐고 덤벼든다. 그리고 오공은 석가여래 즉 부처님과의 마지막
내기로 해서 겸양의 미덕을 배우지 않으면 아니 되었던 것이다. 신통력으로 지구의
끝까지 가보일 테니 그것을 해내거든 자기에게 (제천대성)의 칭호를 주고, 해내지
못하거든 깨끗이 항복하겠다는 오공 대 부처님의 내기다. 이 한 마디를 남기고 오공은
공중으로 훌쩍 날아올라 번갯불처럼 대륙을 뛰어넘어 다섯 봉우리가 있는 산까지
이르게 되었다. 여기야말로 지구상의 생물이 일찌기 발자취를 남긴 일이 없는
극지임에 틀림없다고 오공은 생각하였다.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는 증거로 한가운데
봉우리 밑에 오줌을 누고, 일은 다 되었다고 의기양양해서 돌아와 부처님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 그 말을 듣자 부처님은 한쪽 손을 펴고 그 가운데 손가락 밑둥에서
나는 오줌 냄새를 오공에게 맡아 보라고 한 다음, 너는 아까부터 내 손바닥에서 한
걸음도 뛰어나가지를 못한 것이라는 말을 들려 주었다.
  오공이 겸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겨우 이때부터의 일이다. 그 뒤 5백년
동안 쇠사슬로 바위에 꽁꽁 묶여 있다가 현장법사의 구원을 받아 그 순례행의 일원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이 오공은 우리들 인간의 모습이다. 그 자만심과 장난질은 멎지 않았지만
역시 매우 사랑스러운 동물이다. 인간성의 약점과 결함이 모두 갖추어져 있지만
이것 역시 매우 사랑스러운 존재가 아니겠는가.



    2. 원숭이의 모양을 본따서

  이렇게 되고 보면, 인간은 신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어졌다는 성서적인 견해를
고집하는 것을 집어치우고 인간은 원숭이의 모양을 본떠서 만들어진 사실을 알게
된다. 또 인간이 완전한 신의 모습에서 멀리 동떨어져 있는 것은 마치 개미와
인간과의 상이쯤의 것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인간은 매우 영리한 동물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시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때에 따라서 그 영리하다는 것을 지나치게
내세운다. 인간에게 정신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물학자라는 것이 나타나서 이러한 것을 인간에게 가르쳐 주었다. 적어도
명백한 사변능력이라는 점에 한하여 말한다면, 정신이라는 것은 결국 훨씬 늦게
발달한 것으로 넓은 의미의 정신 작용에 관한 섬유조직에 내포되어 있는 것
가운데에는 이른바 정신이라는 것 이외에 일련의 동물적 본능 또는 야만 본능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것은 정신보다 훨씬 강력하며, 인간이 개인적으로 또 인간의 집단
생활 속에서 어째서 그릇된 행위를 하는가, 하는 설명을 여기서 얻을 수 있다.
  인간이 매우 자랑거리로 여기고 있는 인간 정신이란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이렇게 해서 한층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우선 그것은 비교적 현명한 정신이긴
하지만 또한 불완전한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두개골 진화의 자취를 더듬어 보면 그것의 척추골을 확대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 기능은 척추의 기능과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는
위험을 자각하고 외계의 환경에 대응하여 생명을 유지하는 것에 있는 것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고의 기능은 보통 극히 빈약하게 되어 있다. 벨포어 경은 (인간의 두뇌는 돼지의
코와 마찬가지로 먹을 것을 찾는 기관이다)라고 했는데, 경은 이 경구 한 마디로
후세에 전해져야 할 인물이다. 나는 이것을 진짜로 빈정된 말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도리어 인간을 널리 이해한 말이라고 보고 싶다.
  우선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발생론적 입장에서부터 배우기로 하자.
불완전함이라고 해야겠는가? 그러나 신이여, 틀림없이 그렇습니다. 그러나 신은
인간을 이렇게 밖엔 만들어 주지 못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 요는 다음과 같은 사실에 있다... 태고의 우리
조상은 타잔처럼 헤엄을 치기도 하고, 기기도 하고, 원시림 사이를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뛰어 다니기도 하고, 또 거미원숭이처럼 한쪽 팔이나 다리로 나무에 매달려
있기도 했던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그 하나하나의 진화 단계에 관해서 생각하면
오히려 놀랄 만큼 완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야만이기는 커녕 지나치게
진보한 결과 문명의 폐해를 다시 조정하지 않으면 안될 곤란한 과정에 당면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가 그 문명을 만들어 내기 시작하자 생물을 창조해 낸 조물주까지도 어이없이
할 정도의 발전상을 보여준 것이다. 자연에 대한 적응이라는 말을 꺼낸다면 자연계의
모든 생물은 놀랄 만큼 완전한 것이다. 적응이 불완전한 것은 모두 자연계에서
절멸되고 만다.
  그러나 이제 우리 인간은 이 이상 자연에 적응하라는 명령은 받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즉 이른바 문명이라는 것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나면서부터의 본능 그 자체는 모두가 다 나무랄 것 없이 훌륭한 것이며 건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사회에서는 모든 본능을 야만이라고 부른다. 어떤 쥐도 도둑질을
한다. 그러나 도둑질을 한다고 해서 쥐가 도덕적이 되거나 부도덕적이 된다고는 할 수
없다. 개는 모두 짖는다. 고양이는 모두 밤에 집에 돌아오지 않으며 그 손에 닿는
것은 닥치는 대로 아무거나 할퀸다. 사자는 먹을 것이라면 무엇이나 다 죽인다. 말은
모두 위협을 느끼면 뛰어서 달아난다. 거북은 모두 하루의 가장 좋은 시간을 잠으로
보내며, 곤충과 파충류, 조류, 짐승류는 모두 공공연히 생식 행위를 한다. 이제
이것을 문명의 용어를 빌어 나타내자면 쥐는 모두 도둑놈, 개는 모두 지나치게
떠들고, 고양이는 모두 작은 만족이라고까지 할 수 없다면 불량한 남편이다. 사자도
호랑이도 모두 살인자요, 말은 겁장이, 거북은 게으름뱅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곤충,
파충류, 조류, 짐승류 등이 자연적인 생식기능을 영위할 때에는 외설이라는 것이
된다.
  이 얼마나 대대적인 가치가 있는 전환이냐! 이렇게 생각하니까 신이 무슨 까닭으로
인간을 이렇게까지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었을까 하고 생각할수록 놀라게 되는
것이다(너무나 이야기가 다르지 않은가!)



    3. 생자 필멸의 변

  인간은 반드시 멸하는 육체다... 이 사실의 결과로써 다음과 같은 중대한 일이
일어난다. 첫째로 위라는 것, 강건한 근육이라는 것, 호기적인 정신이라는 것이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기초적인 것이어서 인류 문명의 성질에 심심한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어서 아무도 생각해 본 사람은 없지만, 이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지 않으면 인간과 그 문명을 이해할 수 없다.
  왕후거나 서민이거나를 막론하고 인간은 몯 5척이나 또는 6척의 육체와 50년이나
또는 60년의 수명을 가지고 있다. 이 신이 부여한 사실에서 모든 민주주의, 모든
시가, 모든 철학은 생겨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대체로 이 정도가 아주 많았다.
인간의 키는 너무 크지도 않고 너무 작지도 않다. 적어도 나는 5피이트 4인치로 극히
만족하고 있다. 50년이나 또는 60년이라는 시간은 나에게는 무섭게 긴 시간인 것처럼
생각된다. 실제로 그것은 2대나 3대에 걸치는 문제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니까
벌써 나이 많은 할아버지가 있었고, 머지않아 그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게 되고
대신 우리들 자신이 할아버지가 된다. 그러나 또 다른 조그마한 아이들이 태어난다.
이러한 식이다. 그러나 이것으로 모든 일은 완전한 것같이 생각된다. 중국의 옛
속담에 (만경의 땅이 있어도 다섯 자의 잠자리에서 잔다)라는 것이 있는데, 세상
모든 일의 철리는 이 속에 들어 있다. 국왕이라 할지라도 침대가 훨씬 길어서
7피이트 이상이나 필요하다고는 생각할 수는 없지 않은가. 밤에는 그 침대에 들어가
몸을 눕혀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왕에 못지 않은 훌륭한 신분이다. 또 제아무리
돈이 많다고 하더라도 성서에 이른바 70의 수명을 넘은 자는 많지 않다. 70을 넘으면
중국어의 (고희)라고 불리어질 나이이다. 그래서 중국의 옛말에 (인생 70에 고래회)란
말이 있다.
  재산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이다. 인생에 대해서는 누구나 다 자기 몫을 가지고
태어나지만 인생의 저당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인생이라는
것을 좀더 가볍게 생각할 수가 있다. 즉 우리는 이 지구상의 영원한 거주자가 아니라
잠시 동안의 지나가는 과객이다. 또 모두가 지구상의 손님으로서 수확 수취인도 되고
토지 소유자도 되고 소작인도 된다. 그러니까 임자라는 말은 좀 이상해진다. 임자라는
말은 좀 괘씸하다. 아무도 정말로 집을 소유하는 사람도 없고 밭을 소유하는 사람도
없다. 중국의  어느 시인은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황금을 이루는 산기슭의 미전이여!
  새로 온 자 남이 간 곡식을 거둬들인다.
  그러나 추수를 기뻐하지 말라, 새로 온 자여.
  남이 또 기다린다. 그대의 뒤에서!

  죽음의 평등을 즐기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그러나 죽음이 없다면
나폴레옹에게는 센트헬레나도 아무 의미가 없는 하찮은 존재일 것이며, 지금쯤은
유럽이 어떻게 되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영웅과 정복자의 전기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고, 비록 전기가 나왔다 하더라도 전기 작가는 주인공에 대해서 좀더 가혹하고
동정이 가지 않는 필치에 놀랄 것이다. 위인, 영웅을 너그러운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죽었기 때문이다. 죽어서 이 세상에 없기 때문에 그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위대해진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어느 장례식에나 (인류 평등)이라는 네
글자를 쓴 기를 세우고 간다.
  무상관은 모두 중국의 시의 배경이 되어 있다. 사구의 시도 대부분이 그렇다. 즉
인생의 실상을 사물에 비유하면 아름다운 해질녘에 일엽 편주에 노를 잡고 강을
내리는 그 배 안의 한 마당 꿈에 지나지 않는다. 꽃도 피었다가 지고, 달도 찼다가
기울며 인생도 또한 고고의 소리를 지르며 사람이 되어 태어나서 성숙해지면 다음에
오는 사람에게 자리를 미루어 주고는 죽어간다. 이처럼 똑같은 일을 거듭하면서
동식물계의 영원한 행진에 끼는 것이다.
  속세의 공허함을 알게 될 때에는 인간은 그때 비로소 철학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
장자는 일찌기 나비가 된 꿈을 꾼 일이 있었다는 말을 한 일 있다. 그가 꿈속에서는
날개를 펄럭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도 들고, 모든 것이 현실 같은 느낌이 들었으나,
꿈을 깨고 보니 여전히 자신은 장자이며 자기만이 진실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깊이 생각에 잠겼다. 나비가 된 꿈을 꾼 장자가 진짜 장자인지, 혹은
꿈 속에서 장자가 된 나비가 진짜 장자인지, 꿈이 나비인지 나비가 꿈인지, 나비가
장자인지 장자가 나비인지, 인생은 본디 일장의 꿈, 인간은 영겁의 강을 흘러가는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 그 어느 기슭에서 배에 몸을 싣고 하류에서 배 타기를
기다리는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해서 어딘가에서 또 배를 내리는 나그네와도
같은 것이다. 인생은 남가의 꿈인가, 과객을 태운 뱃길인가? 그렇지 않으면 배우
자신이 자기가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도 거의 깨닫지 못하는 무대에 지나지 않는가.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이러한 감상이 없다면 인간의 시가의 절반은 그 맋을 잃게
되고 말 것이다. 중국의 선철인 유대성은 그의 벗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모든 것 중에서 우리가 가장 마음을 쓰는 것은 관리가 되려는 것이고, 가장
업신여기는 것은 배우가 되는 생각이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이러한 생각이 모두
어리석은 것이라고 여겨진다. 무대의 배우들이 저마다 현실의 인간이라고는
믿으면서도, 노래를 부르고 울고 서로 욕하고 농담을 던지는 것을 나는 여러 번 본
적이 있다. 그러나 현실은 이처럼 연출되는 옛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인물로
분장하는 배우 그 자신들이다. 그들에게도 모두 부모도 처자도 있으며 모두가 다 그
부모나 처자를 양육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욕도 하고, 농을 해서 그 먹을 것을 벌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그들 자신이 분장하려는 진짜 무대의 인물인 것이다. 배우들 중에는
관복을 입고, 관리의 모자를 쓰고, 자기의 연기로 자기들을 진짜 관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나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런 만큼 이것이 연극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생각한다. 서로 인사를 하거나 절을 하거나 자리에 앉거나
이야기를 하거나 주위를 둘러보거나 하는 동안, 아니 엄숙한 관리로 분장하여 그
앞에서 죄인들이 벌벌 떨고 있을 때에도, 노래를 부르거나 울거나 웃거나 욕을 하거나
농을 하거나 하여 부모와 처자를 부양해야 하는 하찮은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아아, 자기의 오장육부와 오관(즉 본능과 감정)이 모두 연극에
지배될 때까지 자기들은 실은 배우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어떤 연극, 어떤
배역, 어떤 대본, 어떤 대사의 어떤 액센트와 어떤 형에 온갖 정신을 쏟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는 많은 것이다.



    4. 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

  인간에게는 위라고 하는 밑바닥이 없는 굴이 있다. 이것은 인간이 동물이기 때문에
생기는 가장 중요한 사실의 하나이다. 그것은 인류의 모든 문명을 다채롭게 하고
있다. 중국의 쾌락주의자 이입 옹은 생활의 잔반을 논한 저서의 식물편 서문 가운데서
인간에게 이 밑바닥 없는 굴이 있다는 것에 불평을 늘어 놓고 있다.

  인체의 모든 기관, 즉 귀, 눈, 코, 혀, 손, 발, 동체 등은 모두 필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나도 알고 있다. 그런데 아무 필요도 없는데 조물주에게서 받은
기관이 둘 있다. 입과 위가 그것이다. 이것이 있는 탓으로 인류는 오랫동안 고생을
하고 괴로움을 받아 온 것이다. 이 입이 있고 위가 있는 탓으로 먹고 살아간다는
문제가 복잡하고 번거로와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 생활에 교활한 거짓말과
정직하지 못한 것이 생기게 되었다. 이러한 것들이 생기게 되자 여기에 형법이 생기게
된다. 그러면 국왕은 어진 정사를 베풀어 서민을 보호할 수 없게 되고, 부모들은
마음대로 어버이로서의 사랑을 발휘할 수 없게 되고, 친절한 조물주까지도 자기 뜻에
어긋난 행동을 해야만 하게 된다. 이런 일들은 모두 창조할 때에 조물주가 인체의
설계에 조금 앞을 내대보는 선견의 명이 부족한 데서 온 결과이다. 즉 인간에게 입과
위가 있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식물은 입과 위가 없어도 생활할 수 있고, 바위와
흙은 아무 영양도 섭취하지 않고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면 어째서 인간은 입과 위라는
두 개의 쓸데없는 기관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없어서는
안될 것이라면 어째서 어류나 패류가 물에서 영양분을 섭취하고 귀뚜라미나 매미가
이슬에서 영양분을 섭취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만들어 주지 않았던가. 이러한
것들은 그 모두가 이슬이나 물로 성장하고 정력을 얻고 헤엄도 치고 날고 뛰고 노래를
부르지 않는가. 만약 그렇게 만들어졌다면 살아가느라고 이렇게 쩔쩔 맬 필요도 없을
것이며 또 인간의 슬픔도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조물주는 인간에게
이 두 가지 기관을 준 데다가 여러 가지 식욕과 욕망도 준 것이다. 그 덕택으로 굴은
밑바닥이 없다는 정도가 아니라, 영원히 찰 줄을 모르는 골짜기나 아니면 바다처럼
되어 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불충분하면서도 이 두 기관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다른 여러 기관은 모든 힘을 다 기울여 일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몇 번이고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래도 조물주를 비난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조물주도 이 잘못을 반드시 후회 했을 것임은 나도 알고 있지만, 이제 와서는 이미
저질러 놓은 일이라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것쯤은 느끼고 있을 것이다. 설계나 견본이
벌써 다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저런 것들을 모두 생각해 보면 법률이나 제도를
제정할 때 매우 신중한 태도로 임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는가!

  채워 줘야 될 이 밑없는 독이 이미 존재해 있는 이상 어떻게도 할 도리가 없다.
위가 있다고 하는 사실은 아무리 과소 평가를 해도 인류사의 코오스를 다채롭게 하고
있다. 공자는 인간성을 너그러운 태도로 해석하여 이 대욕망을 둘이라고 했다. 영양과
생식, 좀더 쉬운 말로 하면 먹을 것과 성이다. 성에서 용케 빠져나온 사람은 많지만
어떠한 성자라도 먹고 마시지 않고 살아온 사람은 아직껏 없었다. 금욕 생활을 닦은
고행자는 있지만 어떠한 정신적인 인간이라도 네댓 시간 이상이나 먹을 것을 잊어
버릴 수는 없다. 몇 시간마다 꼬박꼬박 머리에 떠오르는 불변 부동의 반복 행위는
(언제 먹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것은 적어도 하루에 세 번은 일어난다. 어떤 때에는
네 번 다섯 번이나 일어난다. 국제 회의에서 제아무리 중요하고도 긴급한 정치 정세를
논의하고 있을 때에도 오찬을 위해서는 회의를 쉬지 않으면 안된다. 국회는 식사
시간에 지장이 없도록 회의 일정을 조정해야 한다. 오륙 시간 이상이나 계속되기도
하고 점심 시간과 서로 겹치게 되는 대관식은 공중에게 불편을 주게 된다 하여 대번에
비난을 사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위를 갖고 있으므로 할아버지에 대하여 정식으로
경의를 표하려고 한다면 고작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안은 그를 위해 한자리를
베풀어 생신의 축연을 열어 드리는 일이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다. 식사를 하는 자리에 모이는 벗들은 평화로운 마음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고급 연와탕(금사연의 둥우리로 만든 중국 고급 요리의
이름)이나 맛좋은 죽면은 열중된 토론을 식히고, 과격한 의견의 대립을 누그려 주기
쉬운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제아무리 사이가 좋은 친구라 할지라도 배가 고플
때 두 사람을 함께 있게 해 보라. 반드시 싸우고 헤어지고 말 것이 뻔하다. 맛좋은
음식을 나누어 먹는 효과는 몇 시간 뿐이 아니라, 몇 주일 또는 몇 달씩 계속된다.
삼사 개월 전에 굉장한 식사 대접을 해준 그 어느 사람의 저서에 대해 그다지 좋지
않은 평을 하는 것은 누구나 다 좀 망설이게 된다. 인간성에 깊은 판단력을 가지고
있는 중국인 사이에서 모든 싸움이나 말다툼이 재판소에서가 아니라 식탁 위에서
해결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중국인은 말다툼이 일어난 이상 식탁 위에서 그것을
해결할 뿐만 아니라 같은 수단으로 말다툼이 일어나는 것을 예방까지도 한다. 이것이
중국인의 생활법이다. 중국에서는 때때로 음식을 차리거나 잔치를 벌여 모든 사람들의
환심을 산다. 사실 이 식사라는 것은 정계에서 성공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안전한
안내자이다. 누군가가 통계를 내보는 사람이 있다면, 친구에게 한턱 내는 식사의 수와
관계에서 출세하는 율이나 속도 사이에 절대적 상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먹고 마시는 문제가 우리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실로 근본적인 것이 있다.
즉 혁명, 평화, 전쟁, 애국심, 국제적 이해,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서부터 인간의 사회
생활의 모든 조직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프랑스 혁명의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루소, 볼테르, 디드로였던가. 천만에, 오직 먹을 것이다. 러시아
혁명과 소비에트 제도를 실험한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또다시 말하면 오직 먹을
것이다. 전쟁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폴레옹은 (군대는 그 위로 싸운다)라고 하였는데
이 말에는 그의 예지의 본질적인 깊이 깃들어 있다. 횡경막 아래에 평화가 없을 때
(평화, 평화) 하고 외쳐 본댔자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이 말은 개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국가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백성이 굶주렸을 때 많은 제국이
허물어지고, 어떠한 강력 정권도 공포 정치도 모두 쓰러지고 말았다. 굶주리게 되면
백성은 일하기를 거부하고, 상원의원은 토론하기를 거부하고, 대통령까지도 국가를
통치하기를 거부한다. 가정에서 맛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겠다는 기대 없이, 온
세상의 어느 가장이 무엇 때문에 온 종일 땀을 흘리며 사무소에서 일을 하겠는가.
그래서 (마음으로 통하는 가장 좋은 길은 위다)라는 옛 속담이 생긴 것이다. 식욕이
만족하면 정신은 훨씬 온건해지고 마음이 편해지고 색욕도 생기고 안식도 생긴다.
새로 지은 양복이며 구두, 새로 그린 눈썹이나 의자의 새 커버 등을 남편이 봐 주지
않고 모른 체한다고 어느 아내나 곧잘 불평하지만, 맛좋은 비프스틱이나 맛좋은
오므라이스를 남편이 모른 체한다고 불평을 말하는 아내는 없을 것이다.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어렸을 때의 먹던 맛좋은 음식에 대한 기호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내가 어디선지 한 말이지만, 엉클 샘(미국의 별칭)에 대한 충성은
도너츠, 햄, 스위트 포테이토에 대한 충성이고, 조국에 대한 독일 사람의 충성은 달걀
과자와 크리스마스의 빵과자에 대한 충성이다.
  산해 진미라면 중국인은 그만 정신을 잃을 정도로 열중하고 만다. 중국ㄹ인은 위와
창자가 맛있는 것으로 꽉차게 되면 인생은 참 좋은 것이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이런
위에서 정신적인 행복이 넘치고 빛나는 것이다. 중국인은 본능에 의존한다. 그리고 그
본능은 중국인에게 말하기를 (위만 편안하면 세상 만사는 모두 편안하다) 본능에 가장
가까운 생활과 그것을 좀더 당당하게 인정할 만한 철학을 중국인을 위해 내가
주장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 어디에선가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중국인적인
행복관은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고, 편히 자며, 아름답다)에 있다. 저녁밥을
맛있게 먹고 잠자리에 들 때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중국의 그 어느 한 시인이
(배불리 먹은 위야말로 위대한 것, 그밖의 것은 있으나마나)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철학을 가진 중국인은 음식을 먹는 데 있어 점잔을 빼는 일이 없고
또 입맛을 쩍쩍 다시기를 삼가지 않는다. 중국인은 맛좋은 고기국을 한 입 마시면
정말 맛있다는 듯이 입맛을 다신다. 물론 서양식 식탁의 예법으로 따져 보면 정말로
버릇없는 짓일 것이다. 그러나 탈은 이 서양식 식탁의 예법이라고 하는 놈인데,
소리를 내지 않고 수우프를 마시거나, 즐거운 표정이라곤 전혀 나타내지 않은 채
조용히 식사를 해야 한다고 하는 예법이야말로 요리법의 진보를 막아 버린 참된
이유가 아니겠는가. 나는 사실 그렇게 생각한다. 어째서 서양 사람들은 식탁에 마주
앉으면 그렇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처량한 얼굴을 하고 점잔을 빼며 거만을 떠는
것일까? 통통한 닭 다리를 손에 들고 그것을 맛있게 뜯어 먹는다는 그 기막힌 맛을
대부분의 미국인은 모른다. 뱃속에서는 아주 비참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런
말은 한마디도 입 밖에 내지 못하고 나이프와 포오크로 점잖게 고기를 써는 흉내를
내고 있다. 닭고기 맛이 정말 좋다면 그런 짓을 하는 것은 죄악이다. 이른바 식탁의
예법 때문에 아이들이 입맛을 다시는 것을 그 어머니로부터 못하게 꾸중을 들었다면
벌써 이 아이는 여기서 인생의 슬픔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이 된다. 이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기쁨을 표현하지 않으면 기쁨을 느끼는 작용까지도 나중에는 멎어 버리고
그 다음에는 소화불량, 우울증, 그 밖에 성인의 생활에 특히 많은 모든 정신상의
질환이 생기게 된다. 이것이 인간의 심리인 것이다. 모름지기 프랑스 사람을
모방해서, 급사가 맛있는 송아지 고기 카틀렛을 가지고 왔을 때에는 우선 (아!) 하고
감탄한 다음, 처음 한 입을 먹고 나서는 (음음...) 하고 동물과 똑같은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이 좋다. 식사를 즐기는 데 무엇이 부끄러울 것인가! 정상적이며 건강한
식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무엇이 부끄럽단 말이냐. 그런데 중국인은 그렇지 않다.
식탁의 예법은 나쁘지만 맛있는 음식을 마음껏 기뻐하는 것이다.
  인간 생활의 참된 기쁨이라고 하는 것은 그 수가 극히 적은 것이지만 음식은 그
중의 하나라는 것이 된다. 이 굶주림의 본능은 성이라는 다른 본능보다도 금지나
사회적 법규에 억눌리는 일이 비교적 적다. 또 일반적으로 말하면 음식물에
관하여서는 도덕 문제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것은 참으로 좋은 일이다.
성에 관한 경우와는 달라서 음식물에 관해서는 점잔을 뺄 필요는 훨씬 적다. 철학자도
시인도 상인도 예술가도 모두 같은 식탁을 둘러싸고 앉아서 당당히 모든 사람이 보는
데서 아무 부끄러워 할 것도 없이 영양 기능을 다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물론 어떤 야만족은 식사에 관하여 수치감이 대단히 발달해 있어서
혼자가 아니면 식사를 안한다고 하는 것도 알려져 있다. 성의 본능은 나중에 고찰할
작정이지만, 적어도 여기서 말하는 한 가지 본능, 즉 식욕은 구속되는 수가 적은 만큼
여러 가지 형태의 도착이나 정신 착란이나 범죄 행위가 일어나는 수도 적다. 다같이
본능이라고 하지만 식욕과 성욕을 비교해 보면 그 사회적 함축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굶주림의 본능이라는 것이 내가
이제까지 말해 온 바와 조금도 다름이 없으며, 인간의 심리 생활을 혼란케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는 은혜 그 자체인 본능이란 즉 이 식욕의 본능이다. 왜냐하면
누구나가 다 허심탄회하게 다룰 수 있는 유일 무이한 본능이기 때문이다.
  이 본능에는 억제라는 문제가 없기 때문에 신경통이니 정신병이니 도착이니 하는
것이 이에 관련되어 발생하지 않는다. 찻잔이 입술에서 미끄러지는 수가 가끔 있지만
일단 음식물이 입 속으로 들어가면 옆으로 새어나오는 일은 비교적 적다. 모든
사람들이 음식물을 섭취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가 다 선뜻 인정하는 바이지만 성의
본능이 되고 보면 그렇지 못하다. 또 이 굶주림의 본능은 충족이 되어도 성가신
문제는 일어나지 않는다. 최악의 경우라도 소화불량에 빠지는 사람이 생기거나,
위궤양이나 간경화증이 나타나거나, 자기 스스로의 이빨로 무덤을 파는 유의 사람이
다소 생기거나 할 정도이다. 요즘의 중국의 고관대작에는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그러나 별로 부끄럽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똑같은 이유로 음식물 때문에 일어나는 사회적 범죄는 성의 경우보다 훨씬 적다.
형법에는 간통, 이혼, 폭행에 관해서 굉장히 많은 조문이 있지만 음식의 불법,
부도덕, 부정이라는 죄는 형법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최악의 경우라도 남자들이
냉장고 속에 든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막으려고
냉장고에 못질을 했다고 해서 교수형에 처한다는 일도 없을 것이다. 또 이러한 사건이
늘 발생하게 되면 재판관도 충분히 동정을 갖게 될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한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굶주림에 허덕이는 민중에게는 동정이
가지만 수도원의 수녀에게는 동정이 가지 않는다.
  성의 문제에 관해서는 세상 사람들은 무서울 만큼 무지하지만, 음식물의 문제가
되고 보면 그런 경우는 별로 없다. 그러므로 나의 이같은 생각은 절대로 쓸데없는
일은 아니다. 만주인의 가정에서는 딸이 결혼하기 전에 요리법과 아울러 성애의
기교를 딸애에게 가르치는 것인데 다른 나라에서는 이 문제가 어느 정도이겠는가.
음식물의 문제는 지식의 햇빛을 받고 있지만, 성은 아직도 옛날 이야기와 신화와 미신
속에 싸여 있다. 음식물의 문제에 관해서는 햇빛이 빛나고 있으나, 성의 문제에
관해서는 햇빛이 희미하게 비칠 분이다.
  한편으로 사람에게 모래 주머니, 모이 주머니, 반추동물의 제4위니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 만일 이러한 기관이 갖추어져 있다면 인간 사회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이제와는 다른 것으로 되어 있을 것이다. 사실 현재와는 전혀
다른 인종이 나타나 있을 것이다. 위관이니 모래 주머니니 하는 것을 갖추고 있다면
인류는 닭이나 아기양처럼 극히 평화롭고 만족스럽고 순한 성질을 띠고 있을 것이다.
부리가 생겨서 심미감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설치류 동물과 같은 이가
자라나 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되면 씨와 열매만으로 족하게 되어 푸른 산허리에서
풀을 뜯어 먹는 생활을 영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자연은 얼마든지 풍요하기
때문이다. 먹을 것을 찾아서 싸우거나 싸움에 진 자를 물어 뜯을 필요는 없게
되므로, 인류는 오늘날 보는 바와 같은 무서운 호전적인 동물로는 되어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음식물과 기질 사이에는 자연 관계에 있어 상상 이상의 밀접한 관게가 있다.
초식 동물은 모두가 천성이 평화롭다... 양, 말, 소, 코끼리, 참새 등등. 그러나 육식
동물은 모두가 전투자들이다. 늑대, 사자, 호랑이, 독수리 등등이 그러하다. 인간이
만일 초식 동물이었다면 그 성질은 분명히 더 온순하였으리라. 자연은 싸움의 필요가
없는 곳에 호전적인 기질을 만들어 내지는 않는다. 수탉은 지금도 싸우지만 그것은
먹을 것을 위한 싸움이 아니라 암탉을 위해서 싸우는 것이다. 물론 인간 사회의
남성간에도 여전히 다소 이러한 종류의 투쟁이 행해지고는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은 오늘날 유럽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은 수출용 통조림을 둘러싼 투쟁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나는 원숭이가 원숭이를 잡아 먹는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지만 사람들이 서로 잡아
먹는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인류학은 모든 증거를 들어 사람을 먹는 풍습이 상당히
널리 행해지고 있었다는 것을 명백히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우리들 육식류의
조상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아직도 여러 가지 의미에서 서로 잡아 먹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이상하게 들릴 까닭은 없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사회적으로 국제적으로
식인종에 관해서 특히 써야 할 점은 사람을 죽인다는 것의 선악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즉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은 아니지만 피할 수 없는 악이라는
것을 시인하면서도 죽어 넘어진 적의 맛좋은 허리 고기, 갈비살, 간장 등을 먹고 그
살육에서 그 어떤 성과를 얻으려고 한다. 식인종과 문명인의 차이는 식인종이 적을
죽여서 먹는 데 비해, 문명은 적을 죽여서 묻고, 그 유해 위에 십자가를 안치하고,
그 영혼을 위하여 기도를 올리는 점에 있는 것 같다. 이렇듯 인간의 자존심과
성급함에 하나 더 어리석음이 가해진 것이다.
  인간이 완성되어 가는 도중에 있다는 것을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즉 이 말은
현재로서는 인간은 용서할 수 있는 불완전한 점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그것이
인간의 참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이 모래 주머니적인 기질을 발휘하게
되기까지는 참된 의미에서 문명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나는 현재의 인류에 육식
동물과 초식 동물의 두 가지를 보고 있다. 다정한 기질을 가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과, 초식 동물적인 인간은 자기 자신이 할 일을 생각하면서 일생을 보내지만,
육식 동물적인 인간은 남의 생활에 간섭함으로써 자기의 생계를 세운다. 나는 10년
전에 한 4개월 동안 정치의 맛을 본 다음 마침내 그것과 관계를 끊게 되었는데,
그것도 내 성질이 육식 동물적이 아니라는 것을 재빨리 발견했기 때문이다. 물론
맛좋은 비프스틱만은 좋아하지만. 세상 사람의 절반은 자기의 일을 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나머지 절반은 남에게 자기의 일을 시키기 위해서거나 또는 다른 사람이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거나 그 둘 중의 한 가지 때문에 살고 있다. 육식
동물적 인간의 특징은 권투, 통나무 굴리기, 줄다리기와 같은 일에 절대적인 기쁨을
느끼고 있는 데 있다. 그  외에 또 사람을 배반하거나, 되속이거나, 앞지르거나 하는
일, 이러한 일은 모두 진정한 재미와 실력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겠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헛된 수작이라는 것을 고백해 둔다. 그러나 이 모두가 본능의
문제다. 어떻게도 할 수 없다. 권투가적 본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은 그 본능을
향략하고 만끽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동시에 참된 창조적 재능, 즉 자기 자신의
일을 하고, 자기 자신의 문제를 아는 재능은 보통 발달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얼마나 많은 유유하고도 고요한 호학지사, 또는 초식 동물적 교수들이 경쟁 마당에서
승리를 얻으려는 욕망과 능력이 결핍되어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사람들을 참으로 찬미한다. 세계의 모든 창조적 예술가들은 남의 일에 마음을
쓰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일에 마음을 쓰는 편이 훨씬 훌륭한 태도이며, 그것이 초식
동물에 속하는 일이라는 의견을 세워볼 수는 없는 것일까. 인류의 참된 진보는 육식
동물적인 인간에 대해서 초식 동물적인 Home sapiens(인류)를 늘리는데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당분간은 육식 동물이 지배할 것이 틀림없다. 튼튼한 근육을 믿는
세계에서는 그렇게 될 것이 틀림없다.



    5.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

  인간의 정신(지능)은 조물주가 창조한 것 중에서 아마도 가장 고상한 산물일
것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인정하는 말이다. 긴 수학의
방정식으로 우주의 곡면공간을 증명할 수 있는 알베르트 아인쉬타인과 같은 지능,
축음기와 활동 사진을 발명할 수 있었던 에디슨과 같은 지능, 접근해 오는 별과
멀어져 가는 별의 빛을 측정하거나 눈에 보이지 않는 자원의 구조를 논하거나 하는
그밖의 물리학자들의 지능, 혹은 천연색 활동사진기를 발명한 사람의 지능, 이러한
사람들의 지능을 가리켜서 말할 때에는 특히 그런 느낌이 깊어진다. 목적도 없고,
변하기 쉽고, 무턱대고 찾는 호기심을 원숭이가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보면 인간은
자기가 태어난 우주를 이해할 수 있는 고상하고 찬란한 지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그러나 보통 사람의 정신은 고상하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애교가 있다. 만일 보통
사람의 정신이 고상한 것이었다면 인간은 죄도 약점도 실수도 없는 완전한 이성적
존재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겠지만, 그러한 세계는 그 얼마나 하찮은 세계일 것이냐!
그렇게 되면 인간은 짐승처럼 매력이 없는 동물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다. 나는 죄
없는 성인에게는 도무지 흥미를 가질 수 없다. 나는 이러한 휴머니스트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불합리성도 있고 모순도 있고 어리석은 행위도 있고 야단법석도 있고
축제에는 들떠 돌아다니기도 하고 편견과 고집과 건망증이 있다. 인간의 재미있는
점은 바로 이 점에 있는 것이다. 만일 인간의 번뇌가 모두 일률적으로 완전하다면
새해마다 새로운 결심을 할 필요는 없다. 섣달 그믐날 밤에 그 해의 처음에 결심한
일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실행한 것이 3분의 1, 실행하지 못한 것이 3분의 1, 나머지
3분의 1은 무엇이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는다. 이러한 점에 인간 생활의 아름다운
점이 있는 것이다. 맨 마지막까지 틀림없이 실행할 계획이라면 벌써 재미가 없다.
전쟁에 나가는 장군이 싸우기 전부터 벌써 승리할 것을 똑똑히 알고 사상자의 정확한
수까지 예언할 수 있다면 전쟁에 대한 모든 흥미를 잃고 말 것이다. 전쟁을 하기는
커녕 전쟁이고 뭐고 모두 포기해 버릴지도 모른다. 만일 상대편의 머리가 좋든 나쁘든
무관심하든 간에 착오가 없는 머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아무도 장기를 둘 사람은
없으리라. 만일 소설 중의 각 인물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 확실한 결론을 예언할 수 있다면 모든 소설은 차마 읽을 흥미가 나지 않을
것이다.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결국 이러한 것이다. 어느 변하기 쉬운, 어떻게 될지
짐작할 수도 없는 사람의 마음이 여기에 있다. 진전하는 환경의 미로를 더듬어 가면서
그 어느 순간에 어떤 변하기 쉽고, 또는 어떻게 될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결단을
내리는 것을 독자가 쫓아간다는 그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너그러워지지 못하는 가혹하고 엄격한 아버지에게는 인간적인 인상이 없어지고,
행실이 좋지 못한 남편이라도 언제까지나 좋지 못한 행실만 되풀이 한다면 독자들은
대번에 싫증을 느끼고 만다. 누가 부탁을 해도 어떤 미인을 위해 가극을 작곡할 수는
없다고 버티던 유명하고 교만하기 짝없던 작곡가라 할지라도 자기가 매우 싫어하는
경쟁 상대인 작곡가가 그 일을 맡으려고 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 즉시로 그 일에
착수하게 되는 법이다. 또 어떤 과학자는 신문에 그의 글을 싣기를 오늘날까지 줄곧
거절해 왔으나 경쟁 상대인 과학자의 발표 논문에서 글자 하나가 빠진 것을 발견하면
평소의 곧은 마음을 잊어버리고 속속 논문을 발표하기 시작한다. 이 두 경우를 상상해
보라. 여기에서 우리는 정신이라는 묘한 인간성에 비로소 부딪칠 수 있는 것이다.
  인간 정신이라는 것에 매력이 있는 것은 거기에 불합리성이 있고 구제할 수 없는
편견과 변덕과 예측할 수 없는 신비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이 진리를 모른다면
1세기에 걸친 인류 심리학의 연구도 결국 헛된 일이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의 정신
가운데는 아직도 원숭이와 같은 목적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 헤매는 지성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인류 정신의 진화를 생각해 보자. 인간의 정신은 본디는 위험을 발견하여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기관이었다. 이 정신이 마침내는 논리학이나 정확한 수학적 방정식을
이해하게 된 것은 단순한 우연에 지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신이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정신은 음식물의 냄새를
맡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음식물의 냄새를 맡은 뒤에 추상적인 수학 공식의
냄새도 맡을 수 있다면 더욱 다행한 일이다. 인간의 두뇌도 마찬가지이지만...
더듬이를 가진 낙지나 불가사리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더듬이는 진리를
찾아서 그것을 먹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오늘날 아직도 진리를 (생각한다)기보다는
(느낀다)라는 말을 쓴다. 두뇌는 다른 감각 기관과 함께 여러 가지 더듬이를
구성한다. 그 더듬이가 어떻게 해서 진리를 느끼느냐 하는 문제는 눈의 망막 속에
있는 시자홍의 커다란 신비로 되어 있다. 두뇌가 그 공동적 감각 기관으로부터
떨어져서 이른바 추상적 사색에 빠질 때마다, 위리엄 제임스가 말한 이른바 지각적
현실로부터 떨어져서 개념적 현실 속으로 도망쳐 들어가 활력과 인간미를 잃게 되어
그만 나쁘게 되고 만다. 우리는 모두 정신의 진짜 기능은 사고하는데 있다는 그릇된
생각 때문에 애를 쓰고 있다. (사고)라는 말의 개념 그 자체를 정정하지 않는 한
이러한 오해를 하다가는 철학은 반드시 중대한 잘못에 빠지고 말 것이다. 이러한
오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서재를 나와서 시장의 군중을 바라보는 학자는 환멸을
느끼기 쉽다. 사고라는 것이 우리의 일상 행위에 그 무슨 중대한 관계라도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착각이다.
  인간의 정신은 현재 보는 바와 같이 애교가 있고 불합리한대로의 모습이 훨씬 좋다.
인간이 모두 다 완전 무결한 이성적 동물이 되어 있는 세계란 보기도 싫다. 그렇다면
나는 과학적 진보를 믿지 않는다는 것인가, 아니다. 다만 성인 군자적인 완전 무결을
믿지 않을 뿐이다. 나는 주지론에 반대하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고,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다만 인생과 사랑에 빠지고 있을 쁜이다. 어디까지나 지성을
믿지 않는 것이다. 독자여, 이러한 세계를 상상해 보라. 신문에는 살인 기사도 나지
않고, 모든 인간은 전지전능하며 불이라곤 난 적이 없고, 비행기 사고도 없고, 남편은
아내를 버린 일도 없고, 합창대의 처녀와 눈이 맞아 도망치는 목사도 없고, 사랑
때문에 왕위를 버리는 왕도 없으며, 결심을 바꾸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사람들은
모두 윤리적인 정확성을 가지고 열 살 때 스스로 짜낸 계획을 실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그러한 세계. 이렇게 되면 이 즐거운 인간 세계와도 그만 작별이다! 인생의
모든 자극과 무상함은 그만 사라지고 말 것이다. 죄도 없어지고, 잘못도 없어지고,
인간적인 약점도 없어지고, 정열이 폭발하는 일도 없어지고, 번뇌도 발생하지 않고,
편견도 변칙도 없어지고, 가장 불행한 것은 놀라움까지도 없어진다. 그러므로 그 결과
문학도 없어지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사오 만의 관중이 하나도 빠짐없이 어느 말이
이길 것인가를 알고 있는 경마와 같은 것이 되고 만다. 차례가 뒤바뀌는 것은 장애
경마에 없어서는 안될 정말 재미난 점이지만 이에 못지않게 인간의 무상은 인생의
진짜 맛이다. 고집스럽고도 편견이 없는 존스턴 박사와 같은 존재를 상상해 보라.
우리가 모두 완전 무결한 이성적 동물이라면 완전한 예지로 성장해 가지 않고 그
대신 자동 인형으로 퇴화할 뿐이다. 그렇게 되면 인간의 정신은 어떤 노동을 가스
미터와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기록할 구실을 할 뿐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인간적이
아니다. 인간적이 아닌 것은 어느 것이나 다 나쁘다.
  독자는 내가 필사적으로 인간의 약점을 변호하고 악덕을 미덕이라고 우겨대고
있다고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은 그렇지가 않다. 완전히 이성적인 정신의
발달에서 오는 행위의 정확성에서 우리가 무언가 얻는 것이 있다면, 다른 한편 우리는
인생의 재미와 다채로움을 잃어야 한다. 세상의 남편이나 아내가 도덕적 본보기라는
생활을 하고 있는 것처럼 재미없는 일은 없다. 이러한 완전히 이성적인 사회가
언제까지나 완전히 존속하기에는 알맞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정말 그대로지만 그런
식으로 존속해 본댔자 과연 얼마만한 가치가 있을 것인가. 단연 질서 정연한 사회를
맞이하라. 그러나 지나치게 질서정연하지는 말라!
  복도에 역사상의 대인물의 상들을 쭉 세워 놓은 어느 기념관을 한 바퀴 돌며 그들이
살아 있던 때를 상기해 보라. 그러면 행위의 합리성이라는 것은 아마 그
위인들에게서는 그림자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에 빠진 그 줄리어스 시이저... 한 여성 때문에 실로 대제국을 잊어버릴 만큼
꼴사납게 이성을 잃고 만 위대한 줄리어스 시어저(앤토니는 완전히 잊어버렸다).
시나이 산에서 신과 함께 더불어 40일이나 걸리어 법률과 계명을 새겨 판 신성한
석판을 홧김에 깨뜨려 버린 그 모세... 이런 행위에 이르러서는 모세도 그 신을
저버리고 그가 없을 때 황금의 소를 예배하기에 이른 그 이스라엘 백성들보다도
이성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다윗 왕... 그는 잔인해졌는가 하면 너그러워지고,
신앙심이 깊어졌는가 하면 또 그 신앙심이 없어지고, 신을 예배하고는 죄를 범했고
회개하는 시편을 쓰고는 또다시 신을 에배하였다. 지혜의 화신이라고 불리어지는
솔로몬 왕은, 그 아들에 대해서는 전혀 무력하였다... 공자는 방문객에 대해서 집에
없다고 하고는 방문객이 돌아가려고 아직 문전에 서 있을 때 집에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2층에서 노래를 불렀다. ... 겟세마네 동산에서 눈물을 흘렸고, 십자가 위에
그의 의심을 남겨 놓은 예수. 아내에게 (둘째로 좋은 침대)를 남겨 주고 죽은
셰익스피어. ... 밀턴은 17세의 아내와 살 수 없게 되었으므로 이혼론을 썼다. 비난을
받자 이번에는 (아레오파기키카)를 발표하여 맹렬한 언론 자유의 옹호를 부르짖었다.
... 괴테는 19세의 아들을 옆에 세워 놓고 아내와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조나단
스위프트와 스텔라, ... 입센과 아멜리 바르다하(그는 이성을 보존하였다... 본인을
위해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이성보다도 정열이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 아니겠는가.
이상의 위인들에게는 사랑스러운 인간성을 준 것은 그 이성이 아니라 이성의 결여가
아니었을까? 유족의 자녀들의 붓으로 엮어진 그 조상에 대한 중국인의
(물고자약전)이나 전기적 스케치 따위는 정말 차마 읽을 수 없을 만큼 흥미가 없고,
진실미가 없다. 모든 조상을 이상할 정도로 완전하고 도덕적인 인물로 보이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중국을 논한 나의 저서에 대한 중국 동포의 혹평은 내가 중국인을
너무나도 인간적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것, 중국인의 힘과 더불어 그 약점을
드러냈다는 것이었다.
  중국 동포(적어도 소관사)들은 만일 내가 중국을 유교의 성자들만이 살고 있는
천국처럼 그려내고 이성의 황금시대를 구가하고 있는 것처럼 묘사했다면 좀더 효과
있는 중국 선전이 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참으로 관리들의 어리석음이란 한정도
없다. ... 그러나 전기에 담겨 있는 매력 그 자체, 혹 읽은 만한 가치 그 자체는
우리들 범인과 아주 비슷한 대인물의 인간적 측면을 묘사하는 데 있는 것이다. 전기에
묘사되는 온갖 무리한 행위의 단편은 우리들의 현실감을 수긍케 하기에 족한 빛이다.
리튼 스트래치 전이 성공한 것은 오직 이 때문이다.
  말할 나위 없이 건전한 정신이 훌륭한 실례로 나타나는 예는 영국인의 경우다.
영국인의 윤리는 신통치 않지만 위험을 발견하여 몸을 지키기에는 가장 알맞은
더듬이를 머리 속에 갖고 있다. 영국인의 국가적 행위나 이성의 역사를 통해서 나는
윤리적인 것이라곤 거의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의 대학, 헌법, 영국 교회 따위는
모두가 다 주워 모은 목판공과 같은 것으로 역사적 성장의 과정 속에서 저절로 점점
커져 간 것이다. 대영제국의 힘 그 자체도 영국인의 작용이 결여되고 전혀 다른
사람의 견해를 이해하는 능력이 결핍되며 자기가 하는 방법만이 유일한 옳은 방법이고
자기가 먹는 음식만이 유일한 맛있는 음식이라고 확신하고 있는데 있는 것이다.
  만일 영국 국민이 합리적으로 사물을 생각하는 것을 배우고 강력한 자기 신뢰를
잃는다면 그 순간 대영제국은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의심을 품게 되면 아무도 세계 정복을 바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영국인의 국왕에
대한 태도, 그 충성, 그 말할 수 없이 순진한 정애에 대해서 생각해 보더라도 그
내용은 절대로 공허하고 엉성한 것이다. 국왕이라 할지라도 국민에게 언론의 자유를
빼앗기고 그렇게 되게끔 적당히 행동하며 적당히 왕위를 내버리도록 대체적인 희망을
국민들로부터 받는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 엘리자베드 시대의 영국이 대영제국을
수호하기 위해 해적이 필요해졌을 때 엘리자베드 여왕은 그 사태에 대처하기에 족한
해적을 만들 수 있었다. 더우기 해적을 칭찬하기까지 했다.
  영국 어느 시대에 있어서나 적당한 적에 대하여 적당한 동맹국과 함께 적당한 쪽에
서서 적당한 때에 적당한 싸움을 해 왔다. 그리고는 언제나 그렇지 않다고 주장해
왔다. 이러한 역극을 능히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논리가 아니다. 그런 것을
논리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것이야말로 더듬이의 덕택이다.
  영국인은 얼굴이 불그스레하다. 그것은 필시 런던의 안개와 크리켓에서 오는 것일
게다. 매우 건강한 피부는 인간의 사려, 즉 일생을 통해서 자기가 걸어가야 할 길을
감지하는 과정에 있어서 반드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법이다. 그런데 영국인이 그
건강한 피부로 사물을 생각하는 것처럼 중국인은 그 현묘한 창자로 생각한다. 이것은
중국에서는 꽤 일반적으로 인정하는 사실이다. 우리 중국인은 실제로 창자로 생각을
한다는 것을 몸소 체득하고 있다. 중국의 시인이나 철학자들은 (만복의 사상),
(만복의 학식), 또는 (만복의 시문)을 가진 사람이라고 불리어지고 있고, 또는
(만복의 애상), (분노), (회한), (분만), 혹은 (사모)를 가진 사람들이라고도
불리어지고 있다. 멀리 헤어져 있는 중국인 애인들이 서로 편지를 쓸 때 (수장이
미어져 백절이 된다)고 하고, 마지막 이별에는 (단장)이라는 말을 쓴다. 중국의
학자가 논문이나 연설을 위해 자기의 사상을 정리하여, 그것을 아직 지상에 발표하지
않을 때에는 (복안)이 되어 있다는 말을 쓴다. 그 사상을 모두 뱃속에서 정리하였다는
말이다. 정말 뱃속 재주를 부린 것이다. 이것은 물론 극히 엄격한 의미에서도
과학적이어서 그 사실 여부를 실증할 수도 있다.
  현대 심리학자가 인간의 정서적 성질이나 조직을 한층 더 잘 알게 되면 특히
그렇다. 그러나 중국인은 과학적 증명은 소용이 없다. 중국인은 다만 배로 느끼는
것이다. 중국 음악의 멜로디가 정서적인 성질을 많이 띤 것은 가수의 횡격막 아래에서
소리가 나오기 때문이라고 하는 사실은 음미하기만 하면 그 유현한 정취가 담긴 중국
음악을 누구나 다 이해할 수 있다.
  인간의 지능이 자연계나 인간 관계 이외의 모든 문제를 다룰 때의 능력을 우리는
경시해서는 안된다. 과학의 정복에 관해서는 나는 낙관적이지만 인간적인 문제를
다루는 비판적 정신이 어디까지 전반적인 발전을 할 것인가, 혼은 인류는 과연 여러
가지 번뇌의 영역을 훨씬 초월하는 항심과 오성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의 여부에
관하여서는 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개개인으로서의 인류는 매우 고도의 발달을
하였을지도 모르지만 사회의 집단으로서는 여전히 아직도 원시적 욕정에 사로잡혀,
때때로 원시시대로의 후퇴와 야만적인 본능을 드러내고 있고, 또 간헐적인 광신과
집단적 히스테리의 파도에 휩쓸려 드는 때가 가끔 있다.
  정신분석 학자는 정신병을 고치는 데 있어 환자에게 그 과거를 회상케 하고 그들의
생애를 객관적으로 보게 하는 방법을 쓰는 수가 많다. 인류도 그 과거를 좀더
생각한다면 아마 좀더 자기의 모습을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에게는
동물적 유전이 있다는 것, 또는 극히 동물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동물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다소는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동물의 우화나 수필, 즉 (이이솝
이야기)나 초오서의 (조류의 국회)나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 아나톨 프랑스의
(펭귄 섬) 등을 읽으면 인간 자신의 모습을 똑똑히 알 수 있는 것처럼, 인간의 동물적
유전이라는 것을 알면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기 쉽게 된다. 이들 동물의 우화는
이이솝의 시대에는 훌륭한 것이었지만 기원 4천 년 후에도 역시 그 가치를 잃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 사태를 고칠 수 있겠는가. 비판적 정신은 너무도 약하고
너무도 차다. 머리로 생각하는 것은 별로 신통하지 못하고 이성도 그다지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한다. 오직 여기에 이른바 중용적인 사려 분별이라는 것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따뜻한 정에 타고 정서도 풍부하며 직각적인 사고 방식이어서, 인간이 그
조상과 똑같은 형으로 들어가지 못하도록 발전시켜 줌으로써만 인간은 구원을 받게
된다. 나는 사상 교육보다는 오히려 감각과 정서 교육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