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llow my blog with Bloglovin FraisGout: 제1장 깨우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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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깨우침

    1. 인생에 다가서는 길

  이제부터 내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중국의 옛부터 내려오는 사물에 대한 견해이다.
독창적인 견해란 나로서는 피하려고 해도 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중국인
가운데서 가장 뛰어나고 슬기로운 사람들의 눈에 비치어, 민족적인 예지와 문학
작품이 되어 나타난 인생관이나 자연관에 대해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것과는 다른 특정한 시대에 어떤 한가한 생활에서 생겨난 여유있는 철학이라는
것을 나는 너무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이와 같은 인생관이야말로
본질적으로는 진실한 인생관이며, 사람들이란 한 꺼풀 벗기고 보면 누구나 똑같은
것처럼 어느 나라에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모든 인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다는 생각을 금할 수가 없다.
  나는 여기서 중국의 시인이나 철인들이 그들의 상식과 현실주의와 시감에 의하여
평가한 중국인 나름의 인생관을 독자들에게 소개해야겠다고 생각한다. 또한 저
기독교가 아닌, 이교도의 세계에 있어서의 어떤 종류의 아름다움, 즉 인생의 애상,
미, 공포, 희극의 느낌을 그려보고 싶다. 대개 이러한 이교도적인 미감은 동물로서의
인간의 존재가 보잘것 없다고 강하게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으로서의 긍지를
잃지 않고 있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에 비치게 마련인 것이다.
  중국의 철인들은 한 눈을 뜬 채 꿈을 꾸는 사람들이다. 그는 사랑과 달콤하게
비양거리는 눈으로 인생을 바라본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회의 사상과 다정한 인종의
정신을 한데 섞어서 잠들고, 잠들었다가는 다시 눈을 뜨며 깨어 있을 때보다도 잠들고
있는 편이 더 사물을 생생하게 느끼고, 따라서 잠이 깨어 있을 때의 인생에 꿈나라의
황홀한 느낌을 지니게 하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잡다한
일이며 스스로의 노력이 헛된 것임을 한 눈은 뜨고 한 눈은 감은 채 관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속에서 살아가려는 결의를 할 만한 현실감만은 간신히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환상이 없기에 환멸을 느끼는 일도 적고 큰 소망을 간직하고 있지 않기에 실망하는
일도 별로 없다. 이러한 심경에 중국인의 정신은 해방되어 있는 것이다.
  어째서 내가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중국의 문학과 철학의 분야를 더듬어 볼 때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중국인으로서 바라는 교양의 가장 높은
이상은 언제나 현명한 자의 각성을 지니고 대관정신을 갖고 초연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심경에서 고매한 정신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러한 고매한 정신을 지닐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너그럽게 비양거리며 세상을
살고 명성이나 부귀나 공명을 얻고 싶다는 우혹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더러 마침내는
죽음의 운명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런 매사에 초연한
대관정신으로부터 자유위 감각이며 표랑에 대한 애착, 긍지와 아무것에도 구애되지
않는 탸연함과 고요한 마음이 비롯되는 것이다. 따찌고 보면 우리네 중국인들이
강렬하게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은 다만 이런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는 자유로운
마음과 초연한 정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내가 말하는 철학을 유럽인들이 지지하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말해 보았자 아무런
유익함도 없다. 유럽인의 생활을 이해하려면 나면서부터 지닌 순수한 유럽인의
입장에서, 즉 유럽인으로서의 심성과 그 육체적인 특질과 신경 조직을 가진 입장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틀림없이 유럽인의 신경은 중국인의 신경이 견디기 어려운
많은 일에 능히 견디어 낼 수 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즉 미국인이
참지 못하는 일이라도 중국인이라면 참을 수 있는 법이다. 또한 그래야 마땅한
것이며, 우리들은 모두가 저마다 다르게 태어나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비교의 문제이다. 미국인의 분망한 생활 속에는 많은 부족함이 있어도, 그들도
모르기는 해도 일이 없는 대낮에는 높고 아름다운 나무 그늘 아래서 풀밭에 벌렁
드러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히 있고 싶다는 거룩한 희망을 아마도 갖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흔히 세상에서 (잠을 깨라, 살아라) 하고 외치는데 그런 말을 외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은 인간답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소수의 현명한 미국인들이 하루에
몇 시간쯤은 꿈을 꾸면서 지내고 싶다고 바라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따지고 보면
미국인들 모두가 나쁘다고 비난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미국인들이 방금 내가
말한 그런 식으로 살아 나가려면 미국인의 생활을 어떤 모양으로 조정하면 좋으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될 따름이다.
  우리는 중국인 전체로서 생각하고 있는 철학이나 생활 방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좋든 나쁘든 이 세계에는 중국인적 철학이나 생활 방식과 비슷한 것이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중국인들은 아주 색다른 사고 방식에 의하여 전혀 새로운 인생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대개 어떠한 국민의 문화도 그들의 정신상의 산물이라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러므로 서구문화의 세계와는 인종적으로도 다르고
역사적으로도 고립되어 있는 한 국민의 사고방식이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들은 인생
문제에 대해서 새로이 해답을 기대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더 나아가 서로 다른 두
개의 것을 가까이 하게 하는 새로운 방법, 또는 더 나아가 인생 문제 그 자체의
새로운 취급 방법을 구할 권리가 있는 것이다.
  중국인적 사고 방식 가운데는, 적어도 역사에 나타나 있는 바에 의하면 좋은 점도
있지만 결함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가운데는 빛나는 예술도 있고 보잘것
없는 과학도 있다. 위대한 상식도 있는가 하면 유치한 논리도 있다. 인생에 대한
섬세하고 여성적인 잔소리는 있지만 학자적인 철학은 없다. 세상에 알려져 있는
바로는 중국 국민성은 아주 실제적이고 빈틈이 없다고 한다. 그리고 또한 중국 예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은 중국의 민족성에는 깊은 감수성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아주 소수의 사람들은 심원한 시적 철학적 정조가 있음을 인정하고 있는 터이다.
적어도 중국인은 사물을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국민으로서 유명하다. 이 말은
중국인들에게는 위대한 철학이 있고 또한 몇 사람 안 되지만 철학자가 있다는 것을
표시하고도 남음이 있다.
  어느 국민이 몇 명의 철학자를 갖고 있다는 것은 그다지 신기한 일은 아니지만 온
나라 국민성이 사물을 철학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은 굉장한 일인 것이다. 어쨌든
중국인을 한 국민으로서 생각한다면 실제적이라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철학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설사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천 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친 능률적인
생활의 고혈압을 능히 견디어 낸 백성은 중국인을 빼놓고는 달리 없음이 분명하다.
4천 년 동안이나 능률적인 생활을 계속하면 웬만한 국민들은 다 지쳐 버리게
마련이다.
  이러한 국민성을 가졌기에 다음과 같은 중대한 결과가 빚어지게 된다. 즉 유럽인들
중에는 미친 사람이 굉장히 많아서 정신병원에 수용되지만 중국에는 정신병자가 아주
드물어 오히려 우리들은 미친 사람을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문학에 대한 지식만
있다면 이러한 사실은 누구나 증명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내가 목표로 하는 바는
바로 이 점인 것이다. 그렇다, 중국인은 천하태평의, 명랑하다고 여겨지기까지 하는
철학을 갖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철학적인 마음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그들의 현명하고 유쾌한 생활 철학인 것이다.



    2. 의사과학적 공식

  이상과 같은 생활 철학을 낳은 중국인의 마음의 구성을 탐색하는 일부터 시작하기로
하자. 생활 철학이란 위대한 현실주의, 충분하지 못한 이상주의, 강한 유우머 감각,
그리고 자연과 인생에 대한 고도의 시적 감수성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모두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로 나뉘어져 있는 것 같다.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는 인류의 발전을 이루는 두 가지의 크나큰 힘이다. 인간성이라는 진흙은
이상주의라는 물로 부드럽게 반죽되어 어떤 모양으로든지 마음대로 모양이 바뀔 수
있게 만들어져 있다. 그러나 흙이 흙으로 굳어져 있는 까닭은 결국 그 흙 자체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정기로 증발하고 말지 않겠는가.
  이상주의와 현실주의의 힘은 모든 인간적 활동, 다시 말해서 개인적 사회적 국민적
활동 속에서 서로 끌어당기며 진실의 발달은 이 두 가지 성분이 알맞게 고루 잘
섞여야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진흙은 이상적인 형태로 바꾸기가 자유롭고
세공하기 쉬운 상태에 놓여져 있다. 절반은 축축하게 젖었고 절반은 말라서
단단하지도 않고 다루기가 힘들지도 않으며 또한 녹아서 진탕이 되어 버리는 일도
없다.
  가장 건전한 국민, 이를테면 영국인 같은 국민들은 현실주의와 이상주의를 알맞은
비율로 가지고 있다. 그것을 흙으로 비유하면 진흙은 너무 단단해져서 조각가가
세공하기에 알맞은 정도를 지나쳤다고 하는 일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형태를 보전할
수도 없을 정도로 질척한 것도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세계의 나라들 가운데는
언제나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있는 나라가 있는데 그것은 아직 알맞게 조화되어
있지 않은 외국 사상이라는 액체가 진흙 속에 들어가 그 진흙 자체가 모양을 보전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막연하여 비판력이 없는 이상주의는 언제나 웃음거리의 원인이 된다. 지나치게
그것이 많으면 인류에게 있어 위험한 경우가 있다. 공상적인 이상을 헛되이
쫓아다니다가 결국은 아무런 이로운 점도 없어졌다는 것이 그 결과이다. 어떤 사회나
민족 가운데 그러한 환상적 이상주의자가 너무 많으면 틀림없이 혁명이 일어나게 되고
말 것이다. 인간 사회라는 것은 바라는 바가 너무도 많은 부부와도 같은 것이어서
일정한 장소에 살아도 곧 싫증이 나서 석 달에 한 번은 반드시 이사를 하지 않으면
못 배기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사를 하는 것도 그 이유인즉 어떤 장소도 이상적이
못되고 자기가 살지 않는 곳은 다만 자기가 살지 않으니까 좋게 보인다는 매우
간단한 것이다.
  그러나 퍽 다행스러운 것은 사람에게는 또 유우머를 이해하는 힘이 주어져 있으며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인간의 꿈을 비판하고 그 꿈을 현실 세계와 접촉시킬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사람이 꿈을 꾼다는 것은 필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꿈을 웃으며 바라볼 수 있다는 것도 또한 필요한 일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크나큰 능력이다. 더우기 중국인은 충분히 이 능력을 지니고 있다.
  나는 인류의 진보와 기구와 그 역사적 변천을 나타내는 공식에 관해서 가끔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될 것이다.

  현실 - 뀸 = 동물
  현실 + 꿈 = 심통(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이상주의)
  현실 + 유우머 = 현실주의(보수주의라고도 한다)
  꿈 - 유우머 = 광신
  꿈 + 유우머 = 환상
  현실 + 꿈 + 유우머 = 예지

  그러므로 예지, 바꾸어 말하면 최고형의 사고 방식은 우리들의 꿈 또는 이상주의를
현실 그 자체에 뿌리박은 우수한 유우머 감각으로 부드럽게 하는 점이 있다.
  이상은 의사과학적 공식의 수박 겉핥기의 모험적 시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우리들은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이 여러 국민의 성격을 해부해 보기로 하자.
  내가 (의사과학적)이란 말을 쓴 것은 인간계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일이나 인간의
여러 가지 개성과 관계 있는 것을 표현하려는 모든 죽은 공식이나 기계적인 공식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계에서 일어난 여러 가지 사건을 엄정한 공식에 뜯어
맞추려고 하는 행위는 그 자체가 벌써 유우머 감각을 잃고, 그렇기 때문에 또한
지혜가 결핍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내 말은 세상에서 이러한 일이 행해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실제로 그것은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의사과학적인 것이 오늘날
세상에 너무나도 많은 까닭은 여기에 있다.
  심리학자는 사람의 IQ 또는 PQ(작업 지수의 뚯)를 규정할 수 있으나 그것은 극히
빈약한 세계다. 다시 말해서 전문가들이 모여들어서 자기의 전문과는 전혀 다른
인간학을 그 수중에 넣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은 그 어떤 의견을 밝히는
간편한 도해적 방법에 지나지 않는 것을 인정하고 상품의 광고 수단으로서 과학이라는
신성한 이름을 함부로 휘두르지 않는 한 아무 폐해도 없는 것이다. 아래에 드는 것은
몇몇 나라의 국민성을 표시하는 나의 공식인데 그것은 전혀 나 한 개인의 것으로,
입증이니 증명이니 하는 것은 전혀 할 수 없다. 많은 통계적 사실이나 계수에 의하여
자기의 의견을 실증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 한 누구나 내 공식을 논의하고
변경하거나 또는 독자 스스로의 공식을 덧붙여도 괜찮다.
  여기서 (R)은 현실(또는 현실주의)이라는 뜻, (D)는 꿈(또는 이상주의)이라는 뜻,
(H)는 유우머 감각, 그리고 중요한 요소를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겠는데(S)로서 감수
성2을 나타내는 약자로 해두겠다. 또한 4는 (비정상적으로 고도)라는 뜻, 3은
(고도)라는 뜻, 2는 (충분), 1은 (적다)라는 표시이다. 이렇게 해서 몇몇 나라의
국민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아래와 같은 의사과학적 공식을 얻었다. 인간과 인간
사회는 그 구성을 달리함에 따라 각각 다른 행동을 한다. 그것은 마치 황산염과
황화물 또는 일산화탄소와 이산화탄소가 서로 다른 작용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내가 언제나 흥미를 느끼는 것은 인간 사회나 국가가 같은 조건 아래에 있으면서 그
얼마나 다른 행동을 하는가를 관찰하는 일이다. 화학작 명칭처럼 (유모라이드)니
(유모레이트)니 하는 말을 말을 발명할 수는 없으니까 다음과 같은 식으로 표시하기로
하자. 즉 (현실주의 3개, 꿈 2개, 유우머 감각 2개, 감수성 1개를 합치면 영국인이
된다)는 식으로. 이 식으로 나가면,

  R3  D2  H2  S1_영국인
  R2  D3  H3  S3_프랑스인
  R3  D3  H2  S1_미국인
  R3  D4  H1  S2_독인인
  R2  D4  H1  S1_러시아인
  R2  D3  H1  S1_일본인
  R4  D1  H3  S3_중국인

  이탈리아인, 스페인인, 인도인, 그 밖의 국민에 관해서는 나는 그다지 잘 알지
못하니까 그 국민적 성격의 공식을 시도할 수 조차도 없다. 또 앞에 든 공식은 보는
바와 같이 위태롭기 짝이 없는 것이어서, 언젠가는 내 머리 위에 비난의 폭풍우가
떨어질 것을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아마 이러한 공식은 권위가
있다고 하기보다는 남을 성나게 하기에 족한 정도일 것이다. 장차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고 또 새로운 인상이 생기게 되면 나 한 개인의 소용을 위하여 이러한 공식들을
점점 변경해 갈 것을 약속해 둔다. 우선 현재로서는 가치가 있다고 할 뿐이다.
말하자면 내 지식의 진보와 무지의 간격을 나타내는 기록인 것이다. 여기에서 다소의
관찰을 해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유우머 감각과 감수성에 있어서는 중국인은
프랑스인에 가장 가깝다고 나는 보고 있는데, 이것은 프랑스인의 책을 쓰는 방법이나
식사하는 것을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그러나 또 프랑스인의 한층 더 변덕스러운
성격은 중국인 이상으로 풍부한 이상주의에서 온 것으로 그것은 추상적 관념을
좋아한다는 형체로 나타나 있다(문학, 예술, 정치, 운동 따위에 있어서의 그들의
선언문을 상기해 봄이 좋다)
  중국인의 현실주의는 R4니까 이것으로 보면 중국인은 가장 현실적인 국민이라는
셈이다. 인생의 규범이나 이상에 대한 중국인의 생각은 그 무엇인가에 방해되어
그다지 변화하지 않는다. D1이 그것을 말해 주고 있다. 중국인의 유우머 감각과
감수성에 대해서 현실주의와 마찬가지로 많은 점수를 준 것은 아마도 내가 중국인과
너무 가까운 입장에 있어서 인상이 선명한 탓이리라. 중국인의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것은 거의 증명할 필요조차도 없다. 중국의 산문이나 시, 그림의 모든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여 주고 있다. 일본인과 독일인은 비교적 유우머 감각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매우 비슷하다(두 나라 사람들의 전체적 인상이 그렇다) 그러나 어느 국민의 어느
특징에 대해서도 (제로)라는 점수를 준다는 것은 실제에 있어 불가능하다. 중국
국민의 이상주의에 대해서도 (제로)라는 점수를 줄 수는 없다.
  결국은 모두가 다 정도 문제다. 어느 국민에 이러저러한 성질이 전혀 결여되어
있다고 단정하는 따위는 그 국민에 대한 깊은 지식이 있고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나는 일본인과 독일인에게 H0를 주지 않고 H1을 준 것인데
직관적으로 옳은 점수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양 국민은 다른 국민보다 유우머
감각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현재 정치적으로 고민하고 또 과거에 있어서도
그랬었다고 나는 믿고 있다.
  프러시아의 추밀고문관은 얼마나 추밀고문관이라고 불리어지기를 바라고 있으며
그 제복과 훈장을 그 얼마나 사랑했는가! (논리적 필연)(때로 (신성한) 필연이니
(깨끗한) 필연이니 하고 불리는 수가 많다)만을 확신하게 되면, 즉 어떠한 종류의
목표의 주위를 밑돌지 않고 너무나 직선적으로 그 목표에 덤벼들려고 조급히 구는
경향에 빠지게 되면 사람은 때로 엉뚱한 곳까지 가 버리고 말게 되는 수가 많다.
논리적 필연성에 대한 신념이라는 것은 중요한 것에 대한 신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믿고 그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일본인의
이상주의에 대해서 D3를 준 것은 그들의 이러한 성격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다.
  이상주의라고 해도 내용은 나라에 따라서 각각 다를 것이다. 저 유우머 감각이라는
것도 실제로는 매우 범위가 넓은 변화를 내포하고 있다. 미국의 이상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에는 흥미 있는 상관 관계가 있어서 다같이 3이라는 좋은 점수를 주었다. 그리고
이 사실이야말로 미국인의 정력적 특성의 근원이 되는 것이다.
  미국인적인 이상주의란 무엇인가 하는 이 문제는 오히려 미국인으로 하여금 찾게
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미국인을 보고 있으면 언제나 무슨 일인가에 열중하고
있다. 이 이상주의의 대부분은 매우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미국인이 훌륭한 이상이나 언어에 감동되기 쉽다는 의미에서의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그 중에는 지레 짐작에 지나지 않는 것도 있는 것이다. 미국인이 말하는 유우머라는
것은 대륙에서 말하는 의미의 유우머와는 뜻이 다르다.
  그러나 나는 실제로 생각하는 것이지만 독자들이 잘 아는 바와 같은 예의 그 미국적
기질, 즉 익살을 좋아하는 기질이나 타고난 풍부한 상식, 그러한 것은 미국 국민의
가장 큰 자산이다. 장차 위기 변동이 닥쳐올 때 저 제임스 브라이스(1838 __ 1922,
영국의 사학가, 외교관, 옥스퍼드 대학교수, 하원의원을 거쳐 주미대사를 지냈음)가
말한 것처럼 풍부한 상식이 미극인에게는 긴요한 것이다. 이것이 있음으로써 미국인은
위기를 뚫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미국인의 감수성에 대해서는 좋지
못한 점수를 준다. 왜냐하면 미국인은 여러 가지 사물에 대해서 꽤 둔감한 것 같은
인상을 나에게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이렇다 저렇다 말다툼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결국 말꼬리를 잡아 말다툼을 하게 될 터이니까.
  영국인은 전체적으로 보아서 가장 건전한 민족인 것 같다. 시험 삼아 영국인에게
내가 준 (R3 D2)와 프랑스인에게  준 (R2 D3)를 비교해 보라. 나는 단연 영국인 편을
든다. (R3 D2)는 안정감을 의미한다. 내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공식은 (R3 D2 H3
S2)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도를 지나친 이상주의나 감수성은 모두 좋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나는 영국인의 감수성에 대해서는 S1라는 점수를 주었는데
이것이 너무도 나쁜 점수라고 한다 해도 그 비난을 받을 사람은 영국인 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대체 영국인은 사물에 민감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를테면 기쁨, 행복,
노여움, 만족 같은 느낌을 영국인은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이제 새삼스럽게 논의한다는
그것부터가 벌써 어리석은 일이다. 보라, 영국인은 언제 어떠한 경우라도 단연
무뚝뚝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이와 같은 공식이 작가와 시인에게도 매일반으로 적용된다고 생각하며 몇
사람의 저명한 인물형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셰익스피어_R4  D4  H3  S4
  하이네_R3  D3  H4  S3
  쉘리_R1  D4  H1  S4
  포우_R3  D4  H1  S4
  이백_R1  D3  H2  S4
  두보_R3  D3  H2  S4
  소동파_R3  D2  H4  S3

  이것은 붓이 가는 대로 쓴 것에 불과하다. 모든 시인에게는 분명히 고도의 감수성이
있다고 한다. 사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시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앨런 포우는
불가사의한 공상적인 상상력을 가진 건전한 천재로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는 추리를
좋아하지 않았던가?
  중국의 민족성에 대한 나의 공식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된다.
  R4  D1  H3  S3
  이 공식에서 고도의 감수성를 나타내는 S3에 관해서 우선 생각해 보겠는데, 이것이
있음으로써 중국인은 상당히 예술가적인 태도로 인생을 친할 수 있고 지상의 생활은
아름다우며 따라서 인생을 깊이 사랑해야 한다는 확신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는 그 이상의 의의가 있다. 그것은 실제에 있어서 중국인은 예술가적 태도로
철학에까지 친근성이 있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또한 중국의 철학자의
인생관은 그 본질에 있어 시인적인 인생관이어서, 중국에서는 철학은 시로 이어지는
것으로, 유럽에서와 같이 과학에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내가 말하려는 바를 음미해 준다면 인생의 애락과 그 색채의 변천에 대한
중국인의 고도의 감수성이 있음으로써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밝은 철학이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뚜렷해질 것이다. 우리가 인생을 비극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가버리는 봄의 애상을 가슴 깊이 느끼는 데서 오는 것으로, 인생에 대한 미묘하게도
다정한 감각은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시드는 꽃을 애처롭게 생각하는 다정한
마음에서 생기는 것이다. 우선 애수와 패배의 감회가 있고, 그런 다음에 그 옛날의
노회 철학자의 각성과 홍소가 있는 것이다.
  반면 중국인에게는 강한 현실주의를 나타내는 R4가 있다. 이 R4는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 즉 덤불 속의 두 마리 새보다 손 안에 있는 한 마리의 새가
더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현실주의라는 것은,
인생은 덧없으면서도 아름답다는 에술가의 확신을 더욱 굳게 해주기도 하고 보충해
주기도 하는 것으로, 그들이 인생으로부터 완전히 도피해 버리려는 태도를 구해 주고
있다. 몽상가는 말한다. (인생은 한 마당의 꿈이다)라고. 그러면 현실주의자는 이에
대답한다. (옳은 말이다. 그렇다면 이 꿈을 되도록 아름답게 살아 보자)고. 그러나
잠에서 깨어난 자의 현실주의는 시인의 현실주의이지, 사업가의 현실주의는 아니다.
  노회 철학자의 홍소는 이미 머리를 처들고 턱을 내밀고 노래를 부르며 성공에의
길을 돌진하는 저 저돌적인 청년들의 홍소는 아니다. 그것은 보기 좋게 자란 흰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인자하고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노인의 홍소다. 그러한
몽상가는 평화를 사랑한다. 아무도 꿈 때문에 싸울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는 동료
몽상가들과 더불어 합리적이고도 보다 나은 생활을 하려고 한층 더 열성을 기울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인생의 격한 긴장감은 누그러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주의적 감각의 주요한 작용은 필요치 않은 것을 모두 생활
철학으로부터 몰아내 버리는 데 있다. 다시 말해서 공상의 날개를 타고 공상적인
아름다운 몽환 세계로 날아가는 것은 좋으나 지나치게 나가서 가공의 세계로 날아가
버리지 않도록, 말하자면 인생의 목덜미를 잡아 누르는 그러한 작용이 현실주의인
것이다. 결국 인생의 예지란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배제하는 데 있고, 여러 가지
철학 문제를 바로 다음과 같은 몇 개의 것으로 줄여 버리는 것이다. 즉 가정의
즐거운(남편과 아내와 아이들과의 관게), 생활의 즐거움, 자연의 즐거움, 인류 문화에
접촉하는 즐거움으로 단순화 하는 것과 그밖의 모든 방면이 다른 과학적 훈련이나
무익한 지식 추구 따위를 몷아내 버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중국의 철학자에게는 인생 문제란 아주 그 수가 적고, 단순한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또 형이상학에는 참을 수 없게 되었다는 증거이며, 인생 그 자체의
실제적 의미를 조금도 가져다 주지 못하는 지식의 추구에 견디어 내지 못하게 된
증거이다. 그것은 또한 지식을 얻거나 물건을 얻는 데 있어서 모든 인간적 활동은
우선 인생 그 자체에 비추어 보고 그 필요성의 여부를 물어야 할 것이며, 생활의
목적에 효용이 있느냐 없느냐를 검토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거듭 말해두거니와
여기서 중대한 결론이 나오게 되는 것으로, 산다는 것의 목적은 그 어떤 형이상학적
실체가 아니라 바로 인생 그 자체인 것이다.
  중국인은 이와 같은 현실주의를 나면서부터 지니고 있어 논리나 이지 그 자체에
대해서 깊은 의혹을 품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있어서 철학은 인생 그 자체에 직접
결부되는 긴밀한 감정의 문제가 되는 것이어서 어떠한 체계에 얽매이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굳건한 현실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순연한 동물적
감각이어서 이성 그 자체를 부수어 이해하기 힘들고, 완미한 철학 체계가 출현하지
못하게 하는 사려 분별이다.
  중국에는 유교, 도교, 불교의 세 종교가 있어서 그 모두가 굉장히 큰 조직을
가지고는 있지만, 중국인 특유의 강인한 상식은 그 어느 종교도 미력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으며, 인생의 행복이란 무엇인가 하는 평범한 문제로 이 세 종교를 끌어내려
버리고 말았다. 대체로 중국인은 지나치게 외곬으로 생각하려고 들지 않으며, 어느
단일적인 관념이나 신앙이나 또는 철학의 학파를 진심으로 믿으려고 하지 않는
인간이다. 공자의 어떤 친구 하나가 자기는 행동을 하기 전에 언제나 세 번
생각한다고 말했을 때 공자는 재치있게 대답했다. (두 번이면 족하다)고. 철학의 한
학파를 받드는 학도는 철학의 한 연구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인생의
학도다. 아니 어쩌면 그 스승일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문화와 철학에서 결국 다음과 같은 결론이 나온다.
  중국인은 유럽인보다도 자연과 어린아이에 가까운 방법으로 생활하고 있다.
거기에는 본능과 정서가 자유로이 해방되어 있고, 지적 생활에 대항하여 감각 생활이
고조되어 있다. 육체에의 집착과 자존 정신, 시원한 예지와 어리석을 정도의 쾌활함,
대단한 궤변력과 어린이와 같은 소박함, 이러한 것들이 기묘하게 서로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중국 철학의 특질은 다음과 같은 세 점에 있다고 말하고 싶다.
첫째로 인생을 모두 예술로서 보는 천부의 재능, 둘째로 단순 철학에의 의식적 회귀,
세째로 중용적 생활의 이상, 이 마지막 산물은 좀 이상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농민이면서 방랑자인 시인에 대한 숭배를 의미한다.



    3. 이상으로서의 자유인

  정신적으로 말하면 동양과 서양의 혼혈아라고 할 만한 내 입장에서 말한다면 인간의
위엄은 인간이 짐승과는 다른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사실에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인간에게는 유희적인 호기심과 지식을 탐구하는 타고난 재능이 있다. 둘째로는
여러 가지 꿈과 높은 이상주의가 있다(막연하여 두서가 없고 한낱 자만에 그치는
경우도 있지만 어쨌든 대견한 일이다)  세째로 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이 유우머의
감각으로 꿈을 수정하고 보다 늠름하고 건강한 현실주의로 이상주의를 억제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점이다. 끝으로 인간은 동물과 같이 기계적이며 일률적으로 환경에
반응하지 않고 자진해서 자기 자신의 반응을 어떻게 할 것인가 결정하여 자신의
의지로 환경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과 자유를 갖고 있다.
  이 맨 끝의 사실은 인간의 개성은 마침내 기계적인 법칙에 복종시킬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인간의 마음이라는 것은 영원히 딱 잡아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없고 포착하기도 어렵고 예언하기도 어려운 것이어서, 정신이 돌아버린
심리학자나 독신인 경제학자들이 억지로 인간에게 강요하려고 하는 기계적인 법칙이나
유물론적 변증법에서 어떻게든지 빠져나가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인간이라는 존재는 기묘하고 꿈이 많은 유우머러스하고 변덕스러운
동물이라고 하겠다.
  나의 최근 저서인 (내 나라 내 국민)에서 (노회한 철학자)를 예찬하려고 했다는
것이, 독자 여러분이 받은 에누리 없는 인상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에 대한
에누리 없는 인상으로서 자유민을 예찬하는 데 저자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해
준다면 나로서는 그 이상 더 바랄 바가 없다고 생각한다. 부디 그래 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얼핏 보기에는 간단한 것처럼 보여도 세상일이란 그렇게 단순하게 처리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와 개인적인 자유가 몹시 위협을 받고 있는 현시대에 살면서
잘 훈련되어 있고 순종적이며 조직화 되고 획일적인 노무자들의 무리 속에서 번호
순서대로 지급되는 신세를 면하려면 오직 이 자유민과 자유민적인 정신을 갖는
것밖에는 아마 없을 것이다. 자유민이야말로 독재주의에 있어서는 가장 무서운 마지막
적일 것이다. 자유민이야말로 인간의 위엄과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뽑히고 뽑힌
투사들이며, 마지막까지 정복될 수 없는 사람들일 것이다. 인간의 모든 근대 문명은
오로지 자유민에게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줄 안다.
  중국인으로서 나는 말하는 것이지만 어떤 문명이건 인위에서 자연으로 진보하여
의식적으로 소박한 사색과 생활로 돌아오게 되기 전에는 이를 완전한 문명이라고
부를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또한 나는 어떠한 인간이건 현명한 자의 지혜를 터득한
다음 어리석은 자의 슬기를 몸에 익히어 우선 인생의 비극을 먼저 느끼고 있어서
인생의 희극을 깨닫게 되어 큰소리로 웃을 수 있는 철학자가 되기 전에는 그를
현명하다고는 부르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큰소리로 웃을 수 있게 되기 전에
울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슬픔을 맛보는 데서 깨달음이 생기고, 그 깨달음에서 따뜻한
마음과 너그러움을 아울러 지닌 철학자의 홍소가 터져 나오게 마련이다.
  이 세상은 너무나도 엄숙한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너무나도 엄숙한 것이기에
현명하고 명랑한 철학이 필요한 것이다. 만일 니이체가 쓴 말로 무엇인가를 부를 수
있다면 중국인의 생활 철학이야말로 진정 명랑한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결국 명랑한 철학만이 심원한 철학인 것이다. 서양의 엄숙한 인생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데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나의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철학이
지닌 유일한 기능은 어떤 것인가 하면 세상의 일반 실업가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도 더 가볍고 명랑하게 인생을 이해하는 것을 가르치는 데 있다고 본다. 그것은
곧 나이가 쉰 살이나 되어 은퇴하려면 할 수 있는데 은퇴도 하지 않는 실업가는 내가
보기에는 철학가라고는 여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다만 우연히 떠오른 생각이
아니라 나에게 있어서는 근본적인 사고 방식인 것이다.
  인간이 이같이 가볍고 명랑한 정신에 물들었을 때야말로 세계는 한층 더 평화롭고
온당한 생활을 즐길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이다. 현대인은 이 인생을 너무나 엄숙하게
대한다. 너무 엄숙하게 대하기 때문에 이 세계는 골치 아픈 일투성이가 되는 것이다.
그러기에 인생을 진심으로 즐길 수 있도록 하고, 인간의 기질이 좀더 온당하고
평화롭고 또한 냉정한 것이 되게 하려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은가 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아마도 이것은 한 학파의 철학이라고 하기보다는 중국 민족의 철학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것이야말로 공자보다도 위대하고 노자보다도 위대한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철학에는 공자, 노자, 그밖의 엣날 철학자들이
주장한 것 이상의 것이 있기 때문이다.
  이 철학은 이들 사상의 원천에서부터 솟아나와서 그것을 한 개의 전체적인 것으로
조화시켜 그들이 지닌 예지의 추상적인 요령을 따서, 현대인이면 누구나 알 수 있고,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실제적인 생활법을 창조한 것이다. 중국의 문학, 예술,
철학들을 일관해서 맥맥히 흐르는 메시지이며 가르침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가장 끈질기고, 가장 색다르고, 가장 필요한 중국 사상의 되풀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