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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자유론>: 저자: 밀(1806 - 1873)

 밀이  내가 쓴 어느 책보다도 오랜 생명을 가질 것이다 라고 말한 이 저서는 사실상 그의 부인과의 합작품으로서, 자유의 중요성과 그
한계를 논한 근대자유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위대한 고전이다. 밀은 사회주의적 자유주의 체제를 옹호한 최초의 자유주의 이론가로
자유주의의 민주적 개혁 및 경제체제로서의 사회주의에 찬성하지만, 그가 자유에의 위협이라고 본  순수한 다수의 지배 에는 반대한다. 이
책에서 밀은 개인은 근본적으로 자유로운 존재이고 한 개인의 자유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경우에만 보장될 수 있다고 본다.

     생애
  만족한 바보보다 불만족한 소크라테스가 낫다 며 육체적 쾌락보다 정신적 쾌락을 우선했던 밀.
 그는 영국의 철학자 . 정치학자 . 경제학자로 런던에서 출생했다. 공리주의 사상가 밀의 아들로서 공리주의 사상의 계승자가 되도록 기대한
그의 아버지가 기울인 조기 천재교육은 유명하다. 3세 때 그리스 어를, 8세 때 라틴 어를 배우고 이를 기초로 역사와 문학서적을 널리
섭렵했다. 12세때부터는 그 범위가 철학 . 논리학 . 정치학 . 경제학에까지 확대되었으며 각 분야에 대한 깊이 있는 토론이 아버지와
계속되었다고 한다.
 14세 때 1년 정도 도불하여 스포츠를 즐기고 자연을 벗삼아 지낸 적이 있는데, 이것은 그에 일생에 걸친 취미가 되었다. 15세에 귀국한 후
벤담주의의 저작인 뒤몽의 <입법론>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되어 공리주의 사상가가 되기고 결심했다. 1822년에는 벤담주의를 연구하기 위해
동지들과 <공리주의자협회>를 만들고 <웨스트민스터 평론지> 등에 많은 기고를 했다. 다음해인 23년에는 아버지가 근무하던 동인도회사에
입사하여 회사가 해산될 때까지 35년간 근무했다. 그러나 공리주의 사상 보급을 위한 활동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밀 자서전>에 의하면 20세 가을에 그는 어떤 일에도 기쁨을 느끼지 못하고 공리주의적 개혁에도 열정을 가질 수 없게 되는 등 정신적
위기를 체험한다. 이는 영국 사교계의 저급한 도덕수준을 전혀 알지 못하고 고전파 경제학의 사익추구 개념을 너무나 성선설적인 것으로만
해석하고 있었던 것에 대한 반성이었으므로 종래의 공리주의 사상을 수정할 필요를 통감하게 되었다.
 그는 낭만주의의 계보에 서 있는 콜리지와 칼라일의 저작을 열심히 읽고 정치제도의 상대성과 역사성을 주장한 논리

에 반면의 진리를 인정하게 되었으며 또한 프랑스의 생 시몽파와 콩트 등과의 교류를 통해 자연과학과 사회과학의 차이, 또는 사유재산
제도와 이를 절대적인 것으로 전제하는 고전파 경제학의 한계를 깨닫게 되었다. 이는 후에 그가 영국 사회주의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하는
배경이 된다.
 1830년 새로운 사상추구를 향한 모색을 계속하고 있던 그는 후에 아내가 된 테일러와 만났다. 테일러는 미모와 지적 교양으로 밀의 인생의
지주가 되었으나, 밀의 사상내용에까지 영향을 끼쳤는지의 여부는 연구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어쨌든 그의 새로운 사상은 <런던평론>과 <런던웨스트민스터 평론>에 기고한 글들로 나타났는데, 특히 <벤담론>과 <콜리지론>은 그의
사상전환을 일단 총결산하는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는 벤담주의를 18세기 계몽사상의 전형으로 평가하면서도 그에 대한 19세기적 반동인
콜리지에도 일정한 평가를 부여하는 공리주의 수정의 입장을 확립한 것이다.
 1843년에는 <논리학 체계>를 완성하고, 더 나아가 혁명운동이 유럽을 휩쓴 1848년에 출판된 <경제학 원리>에서는 사유재산제도와 경쟁에
입각한 경제체제를 당연한 전제로 삼아온 종래의 경제학에 대해 분배형태는 인위적 . 역사적인 것이라는 등의 문제를 제기했으며, 또한
경제적 진보에 국민성의 차이라는 요인을 도입하는 등 고전파 경제학을 대담하게 수정하고자 했다.
 <자유론>은 모든 개인의 자유의 보장으로서 꿈꾸어진 민주주의가 결과적으로는 다수자의 전제를 가져오고, 모든 개인은 평균화하고
몰개성적이 되며 자유는 압박되고 인간성의 위기시대가 도래한다는 경세의 책이었다. 이렇듯 그는 인간정신의 자유와 개성에 최대의 가치를
부여했는데, 이러한 관점에서 <경제학 원리>도 저술되었다. 이 책에서 그는 급속한 경제발전의 시기보다도 사람들이 여가를 향수할 수 있는
정지상태 쪽이 바람직하며, 또한 공산주의와 사유재산제에 대한 시비도 어느 쪽이 인간의 자유와 개성을 보장하는가로 판정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말년의 밀은 하원의원으로서 선거권의 확장운동에 몰두했으며, 특히 역사상 처음으로 여성참정권을 제안했다. 의원직을 물러난 후
집필활동을 계속하면서 남프랑스의 자연 속에서 곤충학자 파브르와 교유하며 지내다가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시대적 배경과 밀의 사상적 변천
 밀이 살고 있던 시대에는 생 시몽, 푸리에, 오언 등의 사회주의 사상이 노동자계급으로 침투하고 있었고, 자본주의의 발전으로 자본가
계급과 노동자 계급간의 갈등이 격화됨으로써 자유주의는 새로운 변용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1848년에는 <공산당 선언>도 나왔다. 이러한
시대 환경 속에서 밀은 예부터 자유주의와 사회주의의 사이에서 고민하고 사회적 자유의 밑바탕을 분명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유론>이 밀의 사상 속에서 차지한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밀의 사상적 과정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면, 즉 인식론 . 인성론 측면과 사회사상의 방면으로 나누어서 고찰하는 것이 편리하다.
 먼저 인식론과 인성론의 방면으로부터 본다면, 그가 어린 시절부터 은사가 되는 벤담과 그의 부친을 통해 습득하게 된 사상은 로크, 흄
등의 경험주의 의 인식론이며 또한 쾌락주의적 인성론과 공리주의적 윤리관이었다.
 그런데 그의 사상편력의 제2기는 앞 시기의 사상에 대해 자기나름의 비판과 반발을 보이는 시기다. 이 시기는 1826년으로부터 27년에
걸쳐서 시작되었는데, 그는 그의 <자서전> 속에서 <내 정신사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이 시기의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그는 이 시기에
이르러 콜리지를 통해 독일의 이상주의 사상에 접하게 됨으로써 지금까지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였던 벤담주의에 대해 불만과 약점을 발견하고
이것의 보충을 이상주의에서 찾으

려 했던 것이다. 이 시기를 가장 잘 나타내고 있는 것은 1838년 <벤담론>과 1840년의 <콜리지론>일 것이다. 그는 전자에서 벤담의 공리주의
사상을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으며, 후자에서는 독일의 이상주의에 대해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고 있다.
 밀의 사상편력의 제3기는 대체로 1840년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는 제2기에 대한 일종의 반동으로서  벤담주의 에의 복귀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저작은 1863년의 <해밀턴 철학의 검토>이다. 그리고 <자유론>이 바로 이 시기의 저작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그가 제3기에서 제1기로 다시 복귀했다고는 하지만 제2기에서 경험한 이상주의적 경향은 결코 제3기에 있어서도 소실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그의 사상적 방면을 살펴보면 여기서도 대체로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은 사상의 변천이 보여지고 있다. 그의 제1기에 있어서는
벤담의 자유방임주의가 그의 사상을 일관하는 근본원리였다. 다음으로 그의 사상편력의 제2기에 있어서의 그는 상당히 개인의 자유에 대해서
예외를 인정하고 사회주의로 기울었다. 이러한 경향을 보여주는 것은 1848년의 <경제학 원리>일 것이다. 그런데 사상편력의 제3기에
있어서는 다시 그의 자유에의 동경이 힘차게 되살아나 간섭주의에 대해 강력하게 맞섰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것이 <자유론>, 1861년의
<대의정치론>이며, 또한 유고인 <사회주의론>이다. 이처럼 <자유론>은 그의 자유주의 문헌의 대표작이다.
     <자유론>의 내용
 밀의 자서전에 의하면 <자유론>은 1854년 하나의 논설로 씌어졌으나 1855년 1월 로마의 카피톨 계단을 올라가면서 그것을 한 권으로
고쳐쓰리라 마음먹었다. 그뒤 두 번이나 써서 밀쳐두었다가 가끔 꺼내서 수정하여 결국 전부를 고쳐 썼다 한

다. 그 자신, 이처럼 주의 깊고 정성스럽게 수정한 것은 달리 없다고 말하고 있다. 간행은 1859년으로, 그 전해에는 35년간 일해 온
동인도회사를 물러나고 또  남프랑스 여행중에 사랑하는 아내가 급사하는 슬픔을 당했다. <자유론>은 그녀의 협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녀에게 바쳐진 것이었다.
 <자유론>은 5장으로 되어 있다. 제1장은 <서론>으로 전편에 걸친 개괄적 설명을 하고 있다. 종래에는 정치적 지배자들의 권력행사에
여러모로 제한을 가하기만 하면 국민의 자유는 당연히 보장될 것으로 생각되었으나 이러한 낙관적인 생각은 쉽게 실현되지 못했으며 새로이
다수결의 횡포 라는 현상이 목격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압제는 반드시 정부기관뿐만 아니라  여론의 압력 이라는 것도 있다. 민주주의가 확대되어갈 때 경계해야 할 것은 교육을
많이 받지 못한 다수자가 수를 이용하여 소수자의 의견을 억압하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의 이론이 동요하지 않기 위해서는 일정한 원리의
확립이 필요한데, #1 사상의 자유 #2 생활계획을 세울 수 있는 자유와 취미의 자유, 일을 할 수 있는 자유 #3 개인과 개인의 단결의 자유다.
 제2장은 <자유론> 중에서 가장 핵심을 차지하는 부분으로  사상과 언론의 자유 를 밝히고 있다. 밀은 우선 권력을 장악한 정부가 국민의
이름으로서 자유에 간섭하는 것을 비난한다. 그는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논할 때는 이 문제를 일단 둘로 나누어서 고찰해보아야 한다고
전제하고 있다.
 (1) 박해를 받는 사상이 정당하고 현재의 지배적 사상이 잘못된 경우이다. 정당한 사상을 혹은 기타의 부당한 힘으로써 억압해서는 안된다.
비록 현재의 지배적인 사상이 향후에도 영원히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없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지배적인 사상의 변화가 불가피한
것이라면, 비록 현재의 지배적인 사상이라 할지라도 독선으로 흐르기보다 보다 더 나은 사상의 출현을 위해 사상의 문을 넓게 열어놓는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일 이단자의 주장을 계속 무자비하게 탄압한

다면 미래에 더 좋은 사상의 출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2) 박해를 받는 사상이 잘못될 수가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경우도 탄압을 가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의 사상은 비록
어느 시기에는 정당시된다 할지하도 오랜 시일이 경과하게 되면 마침내  죽어버린 독단 이 되어 생생한 진리가 될 수 없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진리가 생기를 잃어버리게 되면 그것은 이미 진정한 의미에서 진리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형식상으로는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일단 생기를 잃어버린 사상은 다시 그 진리성이 되살아나도록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반대의견과의 정정당당한 토론을
통해서만 비로소 가능하다. 바로 여기에 반대론은 설사 잘못이 있다 할지라도 너그러이 그 존재를 허용해야 할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제3장은 <행복의 한 요소로서의 개성>에 관해 논하고 있다.
밀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요컨대 일차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관계되지 않는 일에 대해서는 개인이 자기를 주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런 경우에 개성의 주장은
인간 행복의 주요한 요소이며, 실제로 개성의 말살은 개인과 사회 진보의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나를 결여하게 된다.
 제4장은 <개인에 대한 사회의 권위의 한계>에 관해 논하고 있다. 이 장에서는 앞 장에 이어 대체 어떠한 행위가 자유로워야 하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행위를 두 경우, 즉 주로 이해관계를 가지는 것이 개인인 경우와 사회인 경우로 나누어서 전자의 행위는
자유로워야 하지만 후자의 행위에 대해서는 사회가 이것에 간섭할 권한이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개인의 행위를  오직 자기에게만
관계되는 행위 와  다른 사람들에게 관계되는 행위 로 나누어, 오직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만 국가의 간섭을 인정하려고 했다.
 제5장에서는 일상생활에서의 많은 실례를 들어 앞 장에서 말한 자유의 한계에 관한 원리의 설명을 보충하고 있다. 즉, 이러한 실례로서
상행위, 자유무역론,독약매매, 술주정꾼의 취체, 매음과

도박의 유혹 등을 들어 자유의 한계를 논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설명하려는 것은 이 책의 핵심을 이루는 두 논점의 의의와 한계를 더한층
명료하게 하려는 데 있다. #1 개인은 그 행위가 그 자신 이외의 어떤 사람의 이해에도 관계되지 않는 한 사회의 제재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요, #2다른 사람의 이익을 해치는 행위에 관해서는 개인은 당연해 사회에 대해서 사회적 또는 법률적 형벌을 가해야 되겠다고 생각할
때는 그렇게 해도 무관하다는 것이다.
     사상적 평가
 본래 자유주의는 근대사회의 시작과 함께 봉건적 특권에 대항하여 신흥 시민계급으로부터 요구되었던 것이다. 당시 자유주의는 자유방임을
주장했는데, 자본주의의 상승기에는 그것이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임을 실현하는 길이기도 했다.
 공리주의자 벤담은 인간을 이기심에 의해 움직이는, 또는 쾌락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려는 충동에 의해서 움직이는 동물로 간주해왔다.
그러나 <자유론>에 나타나고 있는 인간관은 이와 크게 다르다. 즉, 밀은 인간을 결코 쾌락과 고통의 충동에서 필연적으로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목적을 의식하여 자유로이 취사선택할 수 있는  이성자 로 보고 있다. 또한 밀에 있어서의 인간은 단지 이성자일 뿐만 아니라 각
이성자는 또한 판이한 개을을 가지는 존재로 간주되어 있다.
 또한 밀은 적어도 사상과 언론의 자유에 관한 한 그 자유는 어떤 사실의 수단이 됨으로써 가치있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고유한
가치를 가지는 것으로 본다. 물론 자유라는 것은 인격의 성장과 진리의 천명을 위한다는 의미에서 수단의 하나라고 볼 수는 있다. 그러나
이때의 수단은 그 목적이 인격이며 영적

인 것이기 때문에 다른 것의 수단과는 결코 동일시될 수 없는 성질의 것으로 보았다. 또한 밀은 인간에게 자유가 부여되어야 한다는 근거를
인격의 성장 에 두었으므로 이 인격의 성장을 위해서는 매우 광범위한 간섭의 범위를 인정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유론>은 자유의 이론에 관한 대표적인 문헌일 뿐만 아니라 또한 일면에 있어서는 간섭의 원리를 분명히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밀은 인간생활에서 아무리 자유가 귀중한 것이라 할지라도 자기를 노예로 팔아버리려는 자유마저 인정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이런 경우에서 말하는 자유란 종래의 자유주의에서 생각했던  강제 없는 상태 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적극적인 힘 을 의미한다.
 이상을 요약해보면 밀은 자유주의를 이상주의 위에다 건설하려했다고 볼 수가 있다. 그는 자유주의라는 사회사상으로부터 인간과 사회는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를 논했다. 그리하여 사회와 인간의 이상으로부터 자유주의의 타당성을 주장하려고 한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의 사상은 3단계의 편력과정을 거치고 있는데, 만일 그가 여전히 벤담처럼 인식론에서는 경험주의를, 인성론에 있어서는 쾌락주의를,
그리고 윤리관에서는 공리주의를 계속 취하고 있었다면, 그와 같은 자유주의는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다.
 래스키가  밀은 민주주의자였다. 그러나 그만큼 민주주의 해악을 비판한 사람도 없다. 그는 개인주의자였다. 그러나 그 누구라 할지라도
그만큼 자유방임주의의 지나침에 대해 적의를 품은 사람도 없었다 고 말한 것처럼 그에 대한 엄밀한 평가가 어려운 측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