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야
작가 : 모순(1896--1981)
1930년대 초, 중국에까지 몰아닥친 세계 경제공황의 영향하에 국내 민족자본가들의 산업이 외판자본가들에 의해 도산되고 붕괴되는 과정을
민족자본가의 파산과정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좌익작가인 모순은 1930년 5월에서 7월까지, 퇴폐와 배금주의 물결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상해를 주된 무대로 하여, 70여 명의 다양한 계급의 인물을 등장시켜 30년대 중국의 한 축도를 그리고 있다.
중국 혁명문학가의 삶
위대한 중국 혁명문학가인 모순은 노신곽말약과 함께 중국 현대문학 개척자의 한 사람이다. 본명은 심덕홍으로 상해에서 가까운
절강성 동향현에서 출생했다. 개화파 한 의사였던 아버지를 10세에 사별하고, 고전문학을 즐기는 인텔리 여성인 어머니에게서 교양을
배웠다.
중학시절에 맞은 신해혁명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이의 영향으로 학생들의 개혁요구를 거부하는 학교당국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한 죄로
제적을 당하기도 했다. 이후 전학하여 중학교를 졸업하고, 북경대학교 예과를 수료한 뒤 가정형편이 어려워 공부를 계속하지 못하고, 상해의
상무인서관에서 주로 체홉, 톨스토이, 버나드 쇼의 작품의 번역을 담당했다. 이때부터 그의 초기 문학활동이 시작되었다.
54운동 때 진독수 등에게 영향을 받고, 중국 공산당혁명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모순은 중국 신문학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섰다.
1920년 정진탁주작인 등과 함께 최초의 신문학 운동단체인 <문학연구회>를 결성하여 <사실주의 문학>과 <인생을 위한 문학>을
주창하면서 당시의 <예술을 위한 예술>을 반대했다. 그러면서 중국 현대문학의 기초를 구축해갔다. 그리고 <소설월보>라는 잡지를 인수하여
문학연구회의 기관지로 바꾸었다.
이후 서양 각 유파의 근대문학과 그 사조를 정열적으로 번역소개했고, 아울러 작가육성에 힘을 기울였다. 1921년에는 상해에서
공산주의 운동에 참가했다. 한동안 상해대학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마르크스주의에 가까운 문예이론을 발표했다.
1926년 <대혁명>에 즈음해 광동으로 갔으며, 후에 혁명정부에 참여했으나 혁명이 좌절된 후 칩거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최초의 작품인
<환멸> <동요> <추구>의 3부작 장편소설 <식>을 간행하여 작가로 재출발했다. <식>은 <54운동>부터 <대혁명>시기까지를 배경으로 각
유형의 소자산계급 지식청년들의 형상을 묘사했다.
1928년에 그는 체포 위협과 자신의 비관적인 심리상태에서 벗어나고자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기서 그는 단편소설집 <들장미>를 저술하고
다음에는 <식>과 유사한 소재를 택한 <무지개>를 발표했는데, <식>이 비관적 정서에 치우쳐 있다면, <무지개>는 대중적 형명투쟁에의 참가가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점을 낙관적인 색채로 그리고 있다.
1930년 귀국한 모순은 노신이 주도한 <좌익작가연맹>에 참가하여 문예활동을 계속하는 한편, 곽말약 등 우파작가들과 논쟁을 벌이면서
비평활동에도 정열을 쏟았다. 그는 관념적 언어를 구사하기보다는 작가와 긴밀한 농민 및 소시민을 우선적으로 묘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신병으로 요양하면서 중국 현대문학사상 최고의 현실주의 소설로 평가되는 장편소설<자야>(1933)를 완성했다. 이 작품은 상해와 그
근교 농촌을 무대로 하여 1930년대 초기 중국사회의 전체상을 남김없이 묘사한 웅대한 장편소설이다. 작가의 의도가 완전히 반영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시대를 대표하는 모든 계층의 인물이 정확하게 배치되어 있고, 반식민지 상태에 있는 중국의 경제파탄을 직시하는 작가의
시각이 예리하며, 혁명의 어렴풋한 태동 조짐을 읽어낼 수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소상인의 몰락을 그린 <임씨상정>, 농민의 궁핍상을 그린 <봄누에>를 발표했다. <봄누에>는 1933년에 발표한 <추수>
<잔동>과 함께 <농촌 3부곡>이라 불린다.
1936년 좌익작가연맹이 해산된 후 모순은 문예계의 항일민족전선을 구축하는 데 열중했고, 홍콩신강중경 등 각지를 전전하며
쉬지 않고 펜을 들어 <자야>의 뒤를 있는 미완성 장편소설 <낙엽은 2월의 꽃처럼 붉다>와, 한 여성의 수기를 빌려 중경의 어두운 면을 그린
장편소설 <부식>, 기록문학인 <견문잡기>, 그리고 희곡 <청명전후> 등을 발표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1949년 이래 문화부장관 및 작가협회 주석에 취임한 그는 문화행정을 책임지는 지위에 있었으나, 1981년 3월
27일에 작고했다.
작품의 시대적 상황
작가는 1939년 <자야는 어떻게 씌어졌는가?>라는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혁명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고, 중국 사회성질 논쟁이 격렬하게 진행되던 해였다. 나는 그때 소설의 형식을 빌어 다음 세
가지 방면에 대해서 쓰려고 했다.
첫째는 민족공업이 제국주의 경제침략의 압박과 세계적인 경제공황의 영향, 그리고 농촌이 파산된 상황 아래서 스스로를 보존하고자 더욱
잔혹한 수단으로 노동자에 대한 착취를 강화하고 있으며, 둘째로 이로 인하여 노동자 계급의 경제적정치적 투쟁이 발생했고, 셋째로는
당시의 남북대전과 농촌경제의 파탄 및 농민폭동이 민족공업의 공황을 더욱 심화시켜간다는 점이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하에 씌어진 이 작품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의 중국 사회성질 논쟁과 남북대전의 성격을 개괄적이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중국 사회성질 논쟁
이 논쟁은 1927년 모택동과 장개석의 국공합작이 분열되면서 중국혁명의 침체기에 접어든 후, 중국사회의 기본적 성질은 무엇이며
사회발전의 원인과 결과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에 따른 혁명의 성격은 무엇이고 그 전략과 전술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둘러싸고 학자들과
정치가들 사이에 벌어졌던 논쟁이다.
이 논쟁을 크개 3가지로 구분해보면 첫째, 중국은 여전히 봉건사회라는 인식하에 반봉건 부르주아 혁명을 주장한 파, 둘째 중국은
반봉건반식민지적 상태이므로 반제 반봉건의 민족민주혁명을 주장한 파, 셋째로 중국은 이미 완벽한 자본주의가 되었으므로 사회주의
혁명을 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파 등이다. 이 논쟁 중 주도적인 대립세력을 구축했던 파는 둘째와 셋째였다.
이러한 논전의 영향을 모순은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자야>에 나타나 있듯이 민족자본가, 매판 금융자본가, 그리고 노동자 등 각 계급의
위상과 관계, 역사적 역할 등은 중국 사회성질 논쟁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남북대전
남북대전은 1930년 5월부터 10월에 걸쳐 장개석을 수반으로 하는 남경의 국민정부군(중앙군)과 이들의 전횡적 통치에 반발하는
풍옥상염석산백숭희이종인 등의 반장연합군 사이에 벌어진 내전으로, 비록 그 기간은 약 4개월에 불과했지만, 양측이
동원한 병력수사상자수전선의 길이 등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규모가 큰 전쟁이었다.
전쟁이 확대되자 기업가대지주 등은 모두 재산을 공채투기에 쏟아 극심한 혼란이 발생했다. 결국 전쟁은 중앙군의 승리로
마무리되었고,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 정부는 반대파를 제거하고 일당독재의 기반을 공고히 한다.
1930년 상해
당시 상해는 외국 조계지를 중심으로 기형적으로 발달한 서구문물이 그 화려함을 다하고 있는 <동방의 국제도시>였으나, 외국인
투자기업들과 매판자본가들의 가혹한 착취와 열악한 노동조건으로 인해 노동쟁의가 쉴새없이 발생하고, 잦은 군벌전쟁과 기아질병
등을 피해 도시로 몰려든 농민들이 빈민층을 형성하고 있는, 중국의 모든 문제점을 축소해놓은 전형적인 무대였다.
모순은 이 작품에서 매판자본민족자본계급혁명운동가와 노동대중의 세 측면을 묘사하려 했다.
1930년대 혼란한 중국사회 묘사
자야는 본래 자시(오후 11시에서 오전 1시)를 지칭하는 말로 <한밤중>을 의미한다. 작품은 주인공인 민족자본가 오손보가 매판자본가
조백도에게 패배당하고, 매판자본가 세력이 중국을 지배하게 되는 경과를 전개하고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한다면 중국의 상황이 바로
<한밤중>에 해당한다.
작품은 시간적으로 1930년 5월에서 7월까지, 그리고 당시 제국주의 세력의 외국 조계지를 중심으로 퇴폐와 배금주의 물결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 상해를 주된 무대로 하여, 70여 명의 다양한 계급의 인물을 등장시켜 30년대 중국의 한 축도를 그리고 있다.
1930년 장개석이 풍옥산염석산 등 군벌과 대규모적인 혼전을 벌이는 사이에, 공산당은 도처에서 농촌폭동을 일으키고 근로자들의
파업을 선동하고 있었다. 그해 7월 공산군의 팽덕회 부대는 장사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작품의 이야기는 바로 이 같은 사회적인 혼란의 소용돌이를 배경으로 시작된다. 당시 상해는 공업이 중대한 타격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공채시장의 공채가격도 폭락하거나 폭등했다.
주인공인 오손보는 민족공업을 발전시키겠다는 야심과 모험정신, 그리고 뛰어난 수단을 지니고 있는 민족 자본가계급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남다른 생활경력과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유럽과 아메리카를 다니면서 얻은 지식이 있고, 뛰어난 지혜와 계책과 수완이 있어 가정과
조직에서 위엄이 있었다.
그는 중국의 공업이 서양인들의 손에 들어가는 이유는 기업을 경영할 줄 모르기 때문이라고 간주하고, 자신의 욕망실현을 위해 언제나 자기
기업을 확충하려 했다. 그는 추호의 동정심도 없이 주위의 비단공장과 제사공장 등을 손에 넣고, 왕화보 등과 결탁하여 익중신탁은행을
설립한 후 8개의 작은 공장을 차례로 매수하여 자신의 왕국을 구축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대규모의 공장을 경영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현금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염려하던 대로 현금이 부족하게 되자
모든 공장들이 제대로 가동될 수가 없게 된다. 결국 작은 공장들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중국산 명주실이 외국에서 배척당하는 등 불황이 가중되자 오손보는 노동자들을 더 다그치게 되고, 노동자들의 반발은
파업으로까지 이어진다. 이에 대해 오손보는 어용노조를 설립하여 노동운동을 탄압하고, 자기 돈으로 병력을 요청하여 농민운동을 진압하려
하지만 결국 실패한다.
막다른 골목의 오손보는 모험을 하는 수밖에 없었고, 자기가 가지고 있던 8개의 공장을 몽땅 중국에 있는 일본과 영국의 기업에 넘겨주고
자기는 채권투기시장에 끼어들어 횡재하려는 꿈을 꾼다. 그래서 매판자본가이자 채권시장의 <마왕>인 조백도가 설치한 올가미인 채권시장에
발을 들여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를 알고 있는 오손보는 조백도의 야심을 꺾기 위해 공장집까지 저당을 잡혀 조백도의 책략에 대항하고자 한다. 그러나
믿었던 매형 두죽재까지 몰래 조백도와 결탁함으로써 오손보는 마침내 파산하고 상해를 떠나고 만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당시 민족자본가들이 처한 시대적인 상황과 압력 때문에 필연적으로 파산할 수밖에 없는 역사의 비극을 그렸다.
좌익혁명을 내세운 정치소설
이 작품은 1930년대 반식민 상태인 중국에서 민족자본가의 산업이 외세와 결탁한 매판자본가들에 의해 붕괴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반
식민지체제하에서 민족자본가의 진로가 얼마나 참담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선 이 작품은 스케일이 매우 방대하다. 등장인물이 70여 명이나 되고 구성도 복잡하다. 작품에서는 민족자산계급과 제국주의의 세력간의
투쟁, 민족자산계급과 봉건세력간의 대결, 민족자산계급 내부의 갈등, 민족자산계급과 노동계급간의 모순, 지주계급과 농민간의 갈등 등
복잡다단한 사회적 모순을 심각하게 묘사했다. 그리고 자산계급사회의 축도인 상해에서의 냉혹한 금전관계, 자산계급사회의 이중성 등을
통하여 새벽이 도래하기 전 중국의 사회적 현실을 아주 폭넓게 반영했다.
특히 작품의 주인공인 오손보의 형상은 아주 성공적으로 부각되었다. 1930년대 초기 반식민지적 중국사회에서 민족자산계급의 전형으로
묘사된 그를 통하여 제국주의와 매판자본계급의 압박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자본주의의 길로 나아가려는 민족자산계급의 제반 성격과, 벗어날
수 없는 역사적 운명으로 인해 파산되고 마는 중국 민족자산계급의 공통적인 운명을 읽을 수 있다.
한가지 약점으로 지적되는 것은 작가의 술회처럼 소설의 4장이 혁명역량이 발흥하고 있는 농촌현상을 그릴 의도였으나, 극히 단편적이고
구성에 있어 전체 줄거리와 긴밀한 내적 유기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1930년 당시 중국의 각 계급의 생생한 모습, 정치경제적 상황, 도덕적 풍조, 사상적
동요, 복잡하고 첨예한 모순 속에서 서로 얽혀 있는 각 인물들의 성격을 섬세하고 생동적으로 형상화하여 30년대의 사회사를 한 폭의
그림처럼 그린, 중국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뛰어난 장편소설로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