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이백(701-762)
중국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시인인 이백의 시집이다. 고매한 이상과 원대한 정치포부, 이를 실천할 만한 탁월한 학문과 재질이 있음에도
현실에 의해 좌절되자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잊은 듯 홀연히 입선구도 한 이백의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삶을 일상적 사유로부터
벗어나는 초월적 의지의 실현의 장으로 파악한다. 이에 따라 그의 시에는 이미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좀처럼 감지되지 않는 인간사회
질서의 상당부분이 인간을 속박하는 실체로 지적되고 있으며, 이로부터의 초월만이 진실한 자유라는 주제가 제시된다. 그의 시는 기교
면에서도 중국 시의 한 전기를 이루고 있다.
* 생애와 작품
술과 달 의 시인 이백, 그는 과연 천재 인가, 광인 인가? 이백은 중국 당나라 시인으로 두보와 함께 이두 로 일컬어진다. 이백은 시선
, 두보는 시성 , 왕유는 시불 이라고 한다. 그의 어머니가 꿈에서 태백성을 보고 출산했기 때문에 자를 태백이라 했다.
조상들은 대대로 농서 성기에 살았으나 이백은 중앙아시아의 쇄엽에서 출생했다. 이백은 당의 현종과 거의 동시대 사람으로 현종은
전반기(개원연대)에는 측천무후의 횡포로 어지러운 나라를 중흥하고 태평성대를 이룩한 현명한 군중였다. 그러나 후반기(천보연대)에는
정사를 명문 구귀족 출신인 이임보에게 넘기고 양귀비와의 사랑놀음에 빠졌다. 이 시대에 바로 시선 이백과 시성 두보가 있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경전 및 제자백가의 학설을 배우고, 호방한 성품을 지닌 그는 일찍 검술을 닦았으며 도교에 심취하여
선계에 관심을 갖기도 했다. 또 어려서부터 시문에 천재성을 발휘한다. 한편 26세 때 한 자루의 칼을 지닌 채 양친에게 하직하고 멀리
고향을 떠나... 대장부의 뜻을 펴고자 유랑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재주를 떨쳐 임금을 보좌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겠다 는 정치를 포부를
펴고자 동정호를 거쳐 여산금릉양주 등 한바탕 각지를 돌고 안육에 와서는 재상을 지냈던 허어사의 손녀딸을 아내로 맞고 10년
정도 정착했다. 그후 산동에서 공소부 등 5명과 조래산에 들어가 은거하면서 술과 시로 나날을 보냈는데, 이들을 죽계육일 이라 한다.
그후 다시 10년간을 방랑하다가 절강에서 도사 오균을 알게 되었는데, 오균이 먼저 현종의 부름을 받았고 이백은 그의 천거로 42세 때
현종의 부름을 받는다. 이백은 너무 기뻐 (남릉에서 애들과 이별하고 서울로 가노라(남릉별아동입경))라는 시에서 양천대소하면서 문을
차고 나가노라. 이 장부가 아무렴 촌에 묻혀 살소냐? 라고 호기롭게 읊었다. 현종은 그를 정중히 맞이했으나 한림이라는 높지 않은 벼슬을
주었다. 그는 자기의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자질, 그리고 고매한 이상을 가지고 나라에 공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당의 궁중은 타락하고 부패했으며 음흉하고 간악한 소인배들이 가득했으므로 청명하고 방탕한 이백은 적응할 수가 없었다. 결국
3년간의 궁중생활에서 이상을 펴지 못하고 오직 구토와 비분만을 느끼며 폭음을 일삼았다. 마침내는 궁중에서의 전권자인 환관 고력사에게
술취한 이백이 자기의 신발을 벗기게 하는 물의를 일으키고 마침내 궁중을 떠난다.
두보가 (음중 8선가)에서 당시의 이백을 다음과 같이 읊었다. 이백은 한 말의 술에 백 편의 시를 짓고 장안거리 술집에 쓰러져 자며 천자가
불러도 배 타고 갈 생각 않고 자기는 주정뱅이 시선 이라고 자칭한다. 그의 생에 가운데 가장 영광스러운 관직생활은 이렇게 2,3년 만에
끝난다. 3년간 한림생활을 하면서 봉건상류계층의 부패한 생활과 어두운 현실을 직시하고 자신의 울분을 토로하는 시를 창작하기 시작했다.
장안을 만나 다시 방랑길에 오른 이백은 낙양에서 11살 아래의 두보를 만나 친교를 맺었다. 두 사람의 만남은 짧았지만 불후의 우정의
금자탑을 세웠다.
한편 타락무능부패에 시들던 당은 안녹산의 난 으로 내부의 모순과 파탄이 노출되고 무고한 백성들은 더욱 도탄에 빠졌다.
현종은 사천으로 도망가고 숙종이 즉위했다. 이에 그의 정치 참여 욕구는 더욱 강해져, 이때 숙종의 동생 영왕이 반란군을 치고자 군사를
일으키고 이백을 부르자 애국적 정열로 충만했던 그는 쾌히 수락하고 참가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영왕인 형인 숙종의 임금자리를 노렸다는
반역죄로 몰리게 되자 한때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뒤에 감형되었다. 벼락 같은 웃음을 터뜨리며 낙관적이던 이백도 58세에 이러한 혹독한
벌이 떨어지자 귀양가던 도중 한 평생 눈에 눈물 보인 적이 없건만 이곳에서 하염없이 흐니끼게 되누나 라고 슬퍼했다. 말년에는 강남을
주유하다가 친척집에서 죽었다.
이백의 일생을 결산하면 평생 술을 마셨고 방탕했으며 오직 시문만을 남긴 시선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게 그의 본의는 아니었다. 그의
이상과 포부는 충국애민경세제민을 위해 자기의 학식과 자질과 호방한 성품을 마음껏 펴고 은퇴하는 것이었다.
* 이백의 사상
천재와 광인을 가름하는 선을 긋기는 어렵다고 한다. 나는 본래 초나라의 미치광이 라고 자칭한 이백은 너무나 비범한 천재라 하겠다.
따라서 그의 참모습을 한마디로 파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분방한 낭만주의와 격렬한 현실주의를 동시에 지녔으며 탈속적인 도가사상
과 아울러 경세제민의 유가사상 에 투철했다.
고매한 이상과 원대한 정치포부를 품었으며 또 이를 실천할 만한 탁월한 학문과 재질을 지니고 열렬하게 현실참여를 희구했음에도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잊은 듯 홀연히 입선구도하고자 은퇴한 이백이었다. 예술창작에서도 대답하게 초월하고 부정하고 기발한 창조세계를
펼친 그는 늘 나라를 편안케 하고(안사직) 백성을 구한다(제창생) 고 염원하면서도 항상 통음고가한 데카당스에 묻혔던 것이다.
그의 인간성과 같이 그의 시도 걷잡을 수 없이 다난하고 모순과 광기에 차 있다. 그의 말대로 세상이 온통 모순과 광기에 찼으니 자기도
광인으로 광가를 부를 수밖에 없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백은 우리 나라 동요에도 있듯이 암흑의 밤하늘에서도 청명한 달에서 놀기를 사랑했고 온 세상에 청신한 기운이 소생하고 이에
따라 대아의 서풍이 넘치기를 갈구했으며, 자기가 바로 그 일을 성취해야 한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이백은 (고풍)에서 대아의 문학사상이
오래 진작되지 않았거늘 나마저 시들면 누가 펴리오 하고 읊기도 했다.
이백의 사상의 바탕은 유가 와 도가 였다. 한마디로 써주면 나가서 일하고 안 써주면 물러나 숨는다(용행사장) 는 태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백의 본뜻이나 이상은 용행 인 유가적인 면에 있었다. 그의 시를 통해 그가 얼마나 입공보국 안사직 제창생(백성을 제도하고
나라를 안녕케 한다) 하고 싶었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미혹한 군주와 혼탁한 사회는 그를 알아 써주지 않고 도리어 그를 몰아냈다.
그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다. 일찍부터 정치에 포부를 가진 내가 특별나게 용안을 우러러 모시게 되었거늘 흰 구슬을 쉬파리가 더럽힘으로써
홀연 황제와 신하가 갈라서게 되었다. 그는 자기를 몰아낸 타락한 간신배들을 쉬파리에 자기를 흰 구슬에 비유했다. 흰 구슬에 무슨
잘못이 있는가, 오로지 쉬파리가 원죄를 씌운 것이다.
충정과 정의가 간사와 사악에게 패배를 당했다. 이에 방탕하고 정열적인 이백은 사장 탈속구도 의 도가 쪽으로 기울었다. 현실적으로
유가의 이상을 구현하지 못하고 오직 실의와 비분에 차 술로 수심을 달랬으므로 그의 시 속에는 도가적 또는 낭만적 일면이 더 잘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의 시 속에 있는 그의 유가적 이상을 잘 찾아야 한다.
이백의 예술은 사상감정이 탁월한 학식과 세련된 표현으로 승화된 주옥이라 하겠다. 그는 육조시, 특히
도연명사영운강엄포조 등의 시문학 전통을 계승, 발전시키고 그 위에 대담하고 기발한 자기 세계를 창조했다.
이백의 격앙된 낭만주의는 굴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겠으나, 단 그것을 굴원에게는 없는 도가적 탈속입경의 경지로 잘 다듬었으며 또
무위자연을 따라 청진한 시풍과 운치를 넘치게 했음이 특색이다.
속세와 소인배에 대해 실망한 그는 자연과 산천을, 특히 밤의 달 을 사랑했으며, 자질구레한 협잡과 간교에 진절머리를 낸 그의 표현에서도
호방하기 짝이 없었다.
현재 전하는 이백의 시문으로는 여러 종류가 있으나 청의 왕기가 여러가지 책을 모아서 집주한 (이태백문집주) 30권이 가장 널리 읽히고
있다.
* 이백의 작품세계와 (이백시선)
문학이나 음악미술 등 모든 예술은 내용과 형식이 잘 조화됨으로써 완성된다. 시도 마찬가지다. 내용인 사상만이 강하고 형식인
표현이 빈약해도 안되지만, 반대로 표현형식이 사상 내용을 위축시켜도 안된다. 건안 이후 중국의 시문학은 대체로 형식미에만 흘렀다.
시상이나 기골 있는 정신은 위축되고 겉으로만 화려하고 잔재주로 꾸며진 시가가 판을 쳤다. 그러나 당대에 들어서면서 점차로 기골 있는
문장정신과 사상을 담은 글을 되찾기 시작했다. 즉, 고문운동이다.
한유와 유종원이 산문에서 형식적인 큰 성과를 거두었음은 잘 알려져 있다. 한편 시문단에서도 초당 이후 점차로 속이 빈 형식주의에
반대하는 기풍이 짙어졌으며, 그중에서도 진자양은 이론과 작품 면에서 시를 뜬 구름잡기에서 끌어내려 현실적인 바탕 위에 올려놓고자
진력했다.
이백의 문학관도 그와 같았다. 건안 이래의 기미염려한 시는 진중할 바 못된다. 나의 뜻도 공자가 시 3백 편을 산출했듯이 대아 같은
정도의 시를 지어 천년 길게 빛을 남기고자 한다. 이백이 말하는 대아 같은 정도의 시란 다름이 아니라 사상고 기골이 있고 현실적으로
국가와 민족에 이바지할 수 있는 시를 말한다. 즉, 안사직 제창생 하는 데 적극 참여하고 이바지하는 대도의 시문학을 말한다. 이백은
적어도 사내 대장부가 하는 문학활동이거늘 쓸데없는 허튼 소리나 자질구레한 말재주는 문학이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기에 이백의 시는
위대한 사상이나 정치적 포부나 고매한 이상이 용솟음치는 정열을 담아내기 위해 대자연 원시림에다가 큰 도끼로 덤썩덤썩 찍어냈던 것이다.
그럼으로써 스케일이 크고 다이내믹한 내용과 형식이 조화될 수가 있었으며,거대하고 청신한 그의 사상과 생명이 때묻지 않고 영겁의 생명을
지닌 자연 속에 안심하고 깃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이백은 시문학에 있어 획기적인 표현과 예술상의 혁신을 가져왔다.
혁신과 창작은 물론 올바른 전통 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백의 적극적인 낭만주의에 가장 영향을 준 선배는 역시 굴원이었다. 굴원은
뛰어난 재능과 고매한 정치이상을 가지고 있었으면섣 현실적으로는 불운했고, 제 눈으로 자기의 조국이 간악한 무리들 손에 빠진 채 쇠망의
구렁으로 전락해가는 참상을 보고 분개하면서 시를 지었던 것이다. 이백은 굴원의 낭만정신, 조국애, 부패한 통치자들에 대한 반항정신과
불만에 공감했고, 따라서 그의 표현상의 수법도 많이 배우고 계승했다.
특히 굴원이 민간의 시가를 잘 따서 높이 쓴 태도나 신화전설 등을 활용하고 낭만의 환상적인 세계를 마냥 펼쳤던 수법을 이백은
착실히 배웠으며, 그의 기상천외한 도가적 상상력을 시에서 잘 살리는 데 성공했다. 즉, 현실과 이상을 자유자재로 내왕하는 수법은 굴원의
(초사)와 낭만주의의 특성이었던 것이다.
끝없이 크고 청신한 자연에서 자기에 맞는 표현의 자유를 얻은 이외에도 이백은 자연 속에서 간악하고 음흉하고 옹졸한 인간사회의 추악을
말끔히 씻고 해탈함으로써 참된 삶 을 간직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따라서 그는 조국의 웅장하고 수려한 명산대천을 찾아 사랑했고,
청진하고 소박한 자연의 풍물과 더불어 대화를 나눈 것이다. 즉 이백은 자연을 인격화하고 그 속에서 감정과 영기를 느낀다.
새들은 높이 날아 간 곳이 없고
조각구름은 홀로 사라질세
오로지 경정산 너만이 싫다 않고
마주 보아 주노나
경정산만이 자기의 고독과 적막을 이해해주고 또한 자기를 지켜보아주고 있었다.
이백에게 있어 청명한 달은 뗄 수 없는 존재였다. 달아 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 우리 나라 아이들의 입에까지 오른 달과
이태백, 그는 달을 청진의 상징으로 믿었으리라.
날 저물어 푸른 산에서 내려오니
산의 달이 나를 따라 돌아오더라
암흑이 덮인 인간사회에 달이라도 있으니 구원을 받는다는 심정이 나타난 듯하다. 자연을 정관하고 섬세하게 느끼며 대화를 나누던 이백은
일면 산을 밀어젖히고 바다를 뒤엎는 듯한 과장된 표현수법을 잘 썼다.
백발 삼천장 씨름따라 이렇듯 길던가!
부귀공명이 길다면 한수의 물이 응당 서북으로 흐르리다!
촉으로 가는 길은 험난하구나.
푸른 하늘 오르기보다 더욱 험난하구나!
이러한 과장된 표현은 그의 자유분방한 낭만정신의 소산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이러한 과장되고 격렬한 표현을 하지 않고서는 풀릴 수 없는
그의 강렬한 사상과 감정의 열도를 생각해보아야 하겠다. 특히 선과 악을 얼버무리고 시비를 가리지 못하는 부패한 무리들에 대한 반항과,
몽롱한 인간들의 잠을 깨우고 제정신이 들게 하기 위한 기발한 수법이라고 이해해야 하겠다.
이백은 형식적인 구속을 싫어했다. 따라서 현존하는 약 1천여 수의 시 가운데서 형식적으로 가장 까다로운 율시는 80여 수이고, 대부분은
고체시가행악부시같이 형식적 구속이 적은 것들이며 민간의 시가를 잘 흡수한 평이한 것들도 많았다. 특히 150여 수에 달하는
악부시는 평이하면서도 영묘하게 언어를 구사하여 참신한 뜻과 시정을 담아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게 한다. 현실과 이상, 전통과 독창,
고매한 낭만정신과 초탈한 선도사상으로 승화시킨다.
이백의 시 가운데 인구에 회자되는 몇 수를 들어본다.
산중문답
어째서 푸른 산중에 사느냐 물어봐도
대답이 없어 빙그레 마음이 한가롭다
복숭화꽃 흘러 물 따라 묘연히 갈세
인간세상 아닌 별천지 있네
자야오가
장안 하늘에는 허허 달빛이 마냥 퍼지고
거리 집집마다 밤새 다듬이소리 요란해
소슬한 가을바람 불어 멈추지 않으니
모두가 옥문관 넘나드는 애타는 정이리!
어느날 북쪽 오랑캐 평정하고
그리운 임 싸움터에서 돌아오리!
월하독작 1수
꽃 속에 술단지 마주 놓고
짝없이 혼자 술잔 드네
밝은 달님 잔 속에 맞이하니
달과 나와 그림자 셋이어라
달님은 본시 술 못하고
그림자 건성 떠돌지만
잠시나마 달과 그림자 동반하고
모름지기 봄철 한때나 즐기고서
내가 노래하면 달님은 서성대고
내가 춤을 추면 그림자 흔들어대네
깨어서는 함께 어울려 놀고
취해서는 각자 흩어져 가네
아득한 은하에서 다시 만나리
* 문학사적 위치와 영향
이백은 문학사상 앞선 시기의 낭만주의 시가의 성과를 계승하고 발전시켜 새로운 최고봉을 이룩했다. 그는 시가 발전사에서 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민중들의 구비문학에 의해 창간된 신화전설에서 싹을 틔운 낭만주의 문학형태는 전국시대 굴원의 시가 창작에서 집대성되었다. 물론 장자의
산문에 나타난 환상적인 우화가 낭만주의 문학사조에 미친 영향도 소홀히 할 수 없다. 한대시기와 위진남북조 시기에 창작된 악부민요, 예를
들면 (목란의 노래) 등에서 낭만주의 시가는 거족적인 발걸음을 내디디게 되었다. 도연명과 같은 문인들과 남북조 시기 수이전체 소설은
낭만주의 문학의 내용을 풍부하게 했다. 이렇게 낭만주의 문학사조가 전승되어오다가 이백 때에 이르러 낭만주의 시가의 고조를 이루게
되었다. 이것은 문학발전의 내재적 법칙에 의해 나타난 필연적 결과로서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반항정신과 호방한 성격을 갖고 있는 이백의 시가는 당대 전성기의 낙관적 창조정신과 봉건질서에 불만스러워하는 민중들의 정서가 반영되고
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잘 나타내기 위해 분투하는 가운데 이백은 낭만주의적 표현수법을 풍부하게 했으며 시가의 형상수준을 높이는 데 큰
기여를 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성과는 이백이 굴원 이후 낭만주의 시가를 새로운 경지로 이끌어 올렸다는 훌륭한 증좌가 된다.
이백은 당시의 시가를 혁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진자앙의 시가혁신론을 계승하고 또한 실천을 통해 당대의 시가로 하여금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그는 옛사람의 글을 그대로 답습하는 형식주의적 문풍과 타협없는 투쟁을 전개했으며, 제량의 궁정체 시풍이 머리를 들지
못하게 했다.
이백이 후세사람들과 후기문학에 준 영향은 매우 크다. 그의 이름은 당대에 널리 알려졌으며, 심지어 그의 시집이 거의 집집마다 있었다고
한다. 한유 등 시인들은 그의 시를 높이 평가했으며, 그의 시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흡수하여 독창적 시풍격을 창조했다. 이하의 낭만주의적
시풍은 이백의 시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 역시 분명하다. 송대의 소식과 신기질을 중심으로 하는 호방과는 이백의 시 풍격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영향은 청대시인들을 놓고 말해도 예외가 될 수 없다. 자유를 열망하고 나라와 인민을 사랑하며 호방한 풍격을 이룩한 시인은
역사적으로 사랑을 받았다. 그에 관한 수많은 전설은 그에 대한 인민들의 애정을 잘 반영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