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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 전집

윤동주 전집
  작가 : 윤동주(1917--1945)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로 시작되는 서시를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윤동주의 시는 어둡고 혼탁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맑고 순결한 인간정신이 지닌 아름다움을 더욱 선연하게 일깨워주었다. 그리고 험난한 질곡의 시대를 온몸으로 견디며 순수한 영혼의 울림을
담아낸 그의 시세계는, 암흑기 민족문학의 마지막 등불로서 겨레의 가슴을 울린 그의 생애와 함께 우리 문학사에 이미 하나의 전설이
되어버렸다.

    영원한 청년시인
망명의 땅 간도에서 태어나 일본의 후쿠오카 감옥에서 29세의 나이로 눈을 감기까지 암울했던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견디며 맑고 깨끗한
영혼을 간직했던 민족시인 윤동주.
그는 북간도 용정시 명동촌의 두 선각자의 혈통있는 집안, 즉 교회 장로이자 소학교 교사인 윤영석과 독립운동가인 김약연 선생의 누이인
김용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명동촌은 농촌이긴 했으나, 1900년대에 선각자들이 이주해오면서 종교교육 그리고
독립운동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의 외조부 김약연 선생은 명동소학교와 명동중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인들에게
민족혼을 일깨워주었다.
윤동주의 조부인 윤하현 선생은 김약연 선생을 돕고 있었는데, 김약연 선생이 간도사회의 정신적 구심점이었다면, 윤하현 선생은 실질적인
면에서 주위의 일을 원만하게 잘 이끌어나갔다. 이런 관계로 김약연 선생의 누이인 김용과 동주의 아버지가 혼례를 올리는 것은 당연했다.
당시 그의 부친은 16세, 모친은 20세였다.
동주는 1925년 9세 때에 명동소학교에 입학하여 고 문익환 목사와 후에 일본의 후쿠오카 감옥에서 함께 옥사한 고종사촌 송몽규 등과 같은
학급에서 공부했다. 이미 이때부터 동요와 동시를 발표하는 등 문학적 재능을 나타냈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부근에 있던 중국의
관립 소학교를 1년간 다녔다.
그후 가족이 용정시내로 이사하자 이곳에 있던 은진중학교에 입학한 그는 거기에서도 다재다능한 면모를 보여주었다. 1935년 평양에 있는
숭실 중학교로 편입하여, 교내 문예부에서 펴내는 잡지에 시 <공상>을 발표하기도 했는데, 이 시는 그의 작품 가운데 처음으로 활자화된
것이다. 다음해에 학교가 폐교를 당하자, 용정으로 돌아와 일본인이 경영하던 광명학원 4학년으로 편입했다. 이 무렵에 <카톨릭 소년>지에
동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대학진학 문제로 부친과 심각한 갈등을 겪게 된다. 부친은 의대 지망을 원했으나 동주는 문과를 지망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 대립은
심각한 것으로 동주는 단식투쟁을 하게 되고 보다 못한 동주의 외삼촌인 김약연 선생의 중재로 동주는 1938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입학했다.
27년의 그의 삶 중에서 4년의 연희전문 시절이 가장 풍요롭고 자유로웠던 것 같다. 고향에서는 볼 수 없었던 무궁화가 만발한 캠퍼스에서
그는 산책을 즐기며 사색의 깊이를 더해갔고, 문학역사^5,23철학 등으로 독서의 폭을 넓혀갔다. 당시의 살벌한 상황에서 기독계
계통인 연희전문(현제 연세대학교)은 다른 학교에 비해 다소 분위기가 자유로웠다.
엄격한 기숙사 생활 속에서도 봄이면 논두렁을 거닐면서 농부들과 담소하고, 여름에는 별이 총총한 밤하늘과 대화를 나누며, 가을에는
단풍잎 하나하나에 시간과 장소를 기록해두며 그의 시세계를 구축해갔다. 그리고 최현배이양하손진태 등의 훌륭한 선생의
가르침은 그의 정신적 토양을 살찌게 했다.
동주는 졸업기념으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자필 시집 3부를 만들어 영문과 교수이던 이양하와 2년 후배인 정병욱에게 각각 1부씩
증정하고, 자신이 한 부를 가졌다. 총 19시가 수록되어 있으며 1941년 11월 5일 쓴 <별 헤는 밤>이 마지막 작품으로 되어있고, 시집의
서문을 대신하여 쓴 <서시>가 11월 20일자로 되어있다. 그러나 3부 중 동주와 이양하 선생 것은 행방을 알 길이 없고, 정병욱이 보관한
유일본이 남아 있어 시인 윤동주의 존재를 증명했다.
1942년 일본의 도시샤대학 영문과에 편입하여 1943년 7월 첫학기를 마치고 고종사촌 손몽규와 함께 귀향길에 오르기 직전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 죄명은 <독립운동>, 동주는 2년, 송몽규는 2년 6개월을 언도받아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후쿠오카 형무소의 시약실에서는 성분을 알 수 없는 주사를 자주 맞았다고 한다. 동주의 사망통지를 받고 가족들이 형무소에 도착했을 때
50여 명의 한국인 죄수들이 주사를 맞고 있었으며, 그속에 있던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가 <<저놈들이 주사를 맞으라고 해서 맞았더니 이
모양이 되었고, 동주도 그 모양으로...>>하고 흐느꼈다고 한다.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두고 동주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운명했다 한다. 유해는 북간도의 용정에 묻혔고, 1968년 모교인
연세대학교 교정에 시비가 세워졌으며, 1985년 <월간문학사>에서 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1994년 8월 29일 고향인 용정시
명동촌에 생가가 복원되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시인 윤동주는 이렇게 일제의 감옥에서 외롭게 죽어갔다. 머나먼 고향 땅과 그리운 사람들을 지상에
남겨두고.

    동주의 시세계와 주요작품
동주의 작품으로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것은 모두 111편이다. 그 중 35편 정도가 동시의 범주에 속한다. 한 시인의 작품세계를 옳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작품형성의 토양이 되는 시인 자신의 전기적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윤동주의 시세계를 접하고자 할 때 그의 동시세계에
대한 선행연구는 훗날의 시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바람직하다.
그의 동시가 집중적으로 씌어진 것은 평양 숭실중에서 용정으로 낙향한 1936년에서부터 연희전문에 입학할 때인 1938년에 이르는 3년간의
기간이다.

  누나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 줌 넣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1936년에 씌어진 이 시에서 노래되고 있는 것은 그리움의 정이다. 누나는 지금 이곳에 있지 않다. 누나는 <<눈이 아니 오는 나라>>에
가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이 오는 나라>>에 살고 있는 나와는 만날 수가 없다. 누나는 눈이 오는 나라가 아닌 곳에 살고 있기 때문에
글씨도 쓰지 않고 우표도 붙이지 않고 편지를 부칠 수도 있는 것이다.
<<눈이 오는 나라>>와 <<눈이 아니 오는 나라>>와의 거리감 때문에 그리움의 정이 싹트게 된다. 동주의 시에서 느끼게 되는 이 그리움의
미학은 거의 시 전편을 일관하고 있다.

  슬픔의 미학
동주의 천진난만한 동시의 세계는 동주가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이양하 선생에게 영시를 배우고, 최현배 선생에게 조선어와 민족의식을
배우면서 변화하게 된다. 식민지적 상황의 인식과 자기자신에 대한 성찰을 통하여 그가 발견해낸 자아는 슬픔으로 얼룩진 것이었다.

  아우의 인상화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어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앳된 손을 잡으며
<<늬는 자라서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아우의 얼굴을 <슬픈 그림>으로 파악하고 있는 이 시에서 느껴지는 것은 삶의 비극성을 어쩔 수 없이 감내한 자의 눈에 지친 안쓰러운
육친의 정이다.
아우와의 대화형식으로 된 이 시는 자라서 결코 올바른 자유를 누릴 수 없을 아우의 <<사람이 되지>>라는 대답을 통하여 이들 형제를
둘러싸고 있는 육친의 정과 암울한 분위기가 숙명적으로 교차된다. 아우의 천진난만한 얼굴에서 <슬픔>을 바라보는 형의 심중은 아픈
것이다. 그리고 이들 형제의 대화는 형제만의 차원을 떠나 민족이 공유하는 아픔으로 인식된다. 그리하여 이 비극적 상황의 인식은 넓게
확산된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슬픔의 포즈가 고개를 숙이는 것이라면, 희망의 포즈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르는 것이다. 그리고 슬픔과 희망은 커다란 편차를 보이는
것 같지만 가까운 거리에 접해 있다. 아니, 슬픔과 희망은 항상 한쪽 손을 마주잡고 있는 다정한 친구의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동주가 내면으로부터 고개를 치켜들었을 때 그의 눈앞에 나타난 대상들은 모두가 지상을 떠난 것들이다. 그것은 하늘이며 별이며 달이다.
바람과 구름이었다.

산 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자화상>에서

이 시의 화자는 외딴 우물을 찾아가 가만히 그 속을 들여다본다. 그 속에는 밝은 달과 흐르는 구름, 그리고 파아란 바람, 가을의 정황들이
투영되어 있다. 동주는 우물이라는 이미지를 통하여 내면의식을 조명해 보여준다. 자기성찰의 모멘트가 마련된 것이다. 우물이라는 자기
투영물 속에 나타나는 것은 모두가 자연상태, 그대로 완벽한 균형의 상태를 보여주는 달과 구름과 하늘 그리고 바람이다.
그러나 우물 속에 나타나는 대상들이 그런 균형과 조화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대상만은 아니다. 거기엔 한 사나이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나이는 균형과 조화의 천상물과는 달리 연민과 갈등 속에 빠져 있다. 동주가 자기자신을 바라보는 눈망울은 나르시스적인 자기 연민의
정을 담고 있다. 그러면서 인간의 심연에 깃든 근원적인 고독을 실재하는 것으로 파악하기보다는, 현실의 배면에 잠겨버린 과거의 것으로
인식한다.
그렇다면 그가 갈등이나 연민의 정으로부터 벗어나 도달하고자 하는 지향점은 무엇인가? 지상의 내가 도달하고자 하는 곳은 천상의 하늘과
바람과 별의 세계였다.

  초월에의 의지
1941년은 동주에게 있어서 착잡한 감회를 불러 일으킨 한해였던 것 같다. 대학생활을 마무리해야 하고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은 점점 악화되었다. 청순하고도 아름다운 천상물들인 하늘과 바람과 별을 지향하는 그의 시 작업은 도도히 흐르는 시대의 탁류 속에서
더욱 외로운 작업일 수밖에 없었다.

  길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일제의 탄압이 갈수록 엄중해지는 상황에서 시대적 현실을 반영한 작품을 쓴다는 것은 많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동주는 어두운 현실에 침묵하지 않고, 지식인으로서 추구해야 할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탐색을 함으로써 깊은 역사의식과 민족의식을
반영했다. 이상과 현실이 괴리된 속에서도 부단히 이상적 가치실현을 위한 자아의 고뇌와 의지를 일치시키려는 인간의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
시공을 초월한 공감을 준다.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교회의 장로였던 동주는 기독교 신앙 위에서 성장했으며, 그의 시도 대부분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씌어졌다.
십자가는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신하기 위해 매달린 형틀을 가리키는데, 사랑과 봉사와 헌신 등의 기독교 정신을 상징한다. 이 시는 일제
강점하에서 겪는 민족적 수난에 대하여 동주가 혼자서 그 비극의 속죄양이 되기를 자원하고 나선 순교자적 심정과 염원을 잘 나타내고 있다.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서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흘리며 조용히 민족의 부활을 염원하고자 한다. 표현면에서 <행복한>과 <꽃처럼>이 주는
역설은 비장한 최후를 오히려 황홀한 경지로 승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민족의 제단 앞에 개인을 부정하고 자기를 내어바치는 순결정신을
노래했다.

  죄의식과 부끄러움
동주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 건너가기 직전에 쓴 <서시>는 그의 삶에 대한 준엄한 태도가 잘 나타나 있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하는 이 시에는 일종의 비장감 같은 것이 서려 있다. 특히 <죽는 날까지>라는 어구가 어떠한
타협이나 불의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를 보여준다. 잎새에 이는 바람을 보면서도 괴로움을 느끼는 것이다. <잎새에 이는 바람>의
동적 이미지에 의해 흐트러질지도 모를 심적 안정상태 때문에 그는 괴로울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의 도덕적 견실과 결백의 지향을
아름다운 언어로 시화한 것이다.
그러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다짐했던 동주의 단호한 의지는 현실의 왜곡된 상황에 직면하여 좌절을 맞게 된다. 동주의
시에서 나타나는 <죄의식>과 <부끄럼>은 여기서 연유된다.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 이십사년 일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나의 거울을 닦는 행위는 아픈 자기성찰의 표현이다. 암담한 상황 속을 걸어가고 있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은 동주의 모습이며 망국민의
자화상이다. <거울 속에 나타나온> 모습은 일견 슬프게 보일지라도 <내>가 감당할 역사의 몫인 것이다.

    암흑기의 마지막 별
흔히 1940년대 초반을 우리 나라 문학의 암흑기라고 문학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간은 동주의 가장 빛나는 시들이 창작된 거의
1941--42년에 이르는 2년간이다. 1948년에 이 시집이 발간되지 않았더라면 동주는 영영 망각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일제말 우리 문학을 그 질식상태에서 구원하고 그 단절의 위기를 극복하는 십자가를 짊어졌다. 이런 의미에서 동주의 문학사적 의의를
<암흑기의 마지막 별>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동주만큼 민족과 시대의 어려움을 철저하게 내면화하여 별처럼 결정케 한 시인도 드물다. 그는 민족의 부끄러움을 지고한 정신주의로
승화하여 사색의 밤하늘에 별로 수놓았다. 그가 지향하는 지순한 세계의 도달점은 하늘이었다. 그리고 천상물에 도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그의 시였다. 시를 통해서 동주는 슬프고 부끄럽고 괴로운 자아와 하늘과 바람과 별들의 세계를 일체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망명의 땅 간도에서 태어나 이 땅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사랑하고 시를 통하여 순정한 정신을 노래한 시인 윤동주, 서강쪽 들판을 걸으며
인생의 참된 의미를, 그리고 유구한 정신의 불빛을 밝혀올린 그는, 한 줌의 재가 되어 용정 동산마루에 묻혔지만 육신보다 영원한 그의 시는
살아서 오히려 밝은 삶을 누리고 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연희전문 졸업을 앞두고 졸업기념으로 만든 자필시집 3권 중 하나는 동주 자신이 갖고 다른 두 권은 이양하 선생과 연희전문 2년 후배이자
서울대 교수를 지낸 정병욱 선생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그중 두 권은 지금도 행방을 알 길이 없어 자칫하면 한국문학사에서 동주의 존재가 묻힐 뻔했다. 훗날 정병욱 선생은 <<내가 평생
해낸 일 가운데 가장 보람있고 자랑스러운 일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려줄 수 있게 한
일이라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일본에서 동주가 검거된 후 정병욱 선생은 학병에 끌려가게 되었다. 피차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자 정병욱 선생은 시집을 어머니에게 맡기며,
자기나 동주가 돌아올 때까지 소중히 간직해 줄 것을 부탁했다 한다. 그리고 동주나 내가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거든
연희전문학교로 보내어 세상에 알리도록 해달라고 유언처럼 남겨놓고 떠났다고 한다.
다행히 살아서 돌아오니 어머님은 명주 보자기에 겹겹이 싸서 간직해두었다가 그에게 꺼내주셨다 한다. 이렇게 해서 1948년 1월 30일
정지용의 서문이 실려 있는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정음사에서 정식으로 간행되어, 동주의 시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