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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상고사

<조선상고사>
   저자: 신채호(1880-1936)
독립운동가, 역사학자인 신채호가 중국 중심의 역사관과 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되어가던 한국사를 바로잡기 위해, 중세의 역사관을 극복하고
근대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저술한 한국근대사학의 이정표. 자료의 해석과 역사서술의 객관성사실성종합성들을 강조함으로써,
한국사학을 근대적인 사학으로 끌어올린 이 책에서, 단재는 새로운 민족주의 사관에 입각하여 단군시대로부터 백제 멸망과 그
부흥운동까지의 한국고대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 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하였다.

   생애와 작품활동
 내가 죽으면 시체가 왜놈들의 발끝에 채이지 않도록 화장하여 재를 바다에 뿌려달라 며, 평생을 일제와의 비타협적인 투쟁에 일생을 바친
독립투사 단재 신채호. 한편으로 근대적 민족주의 사관을 확립한 역사가 단재 신채호. 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여기서는 역사가로서의
단재의 모습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충남 대덕군에서 신숙주의 18대손으로 태어났다. 신규식(상해임시정부 국무총리대신), 신건식 주중대사, 신석우(조선일보 사장),
신백우(서로군정서 참모), 신기선(대한제국 학부대신) 등은 모두 그의 집안 사람들이다.
25세게 국립대학인 성균관의 교수가 되었으나, 당시의 정세는 한가하게 학문을 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구국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1905년 장지연의 초청을 받아 <독립신문>의 후신인 <황성신문>의 논설기자로 입사하여 계몽운동에 나서나, 이 신문은  시일야방성대곡 이
문제가 되어 폐간당했다. 그러자 <대한매일신보> 양기탁의 초청으로 이 신문에서 활동하게 된다. 당시 <대한매일신보>는 외국인이
발행인이었기 때문에 사전검열을 받지 않아도 되었다. 따라서 단재는 여기서 애국심과 국권회복을 고취시키는 열정적인 글들을 쓸 수
있었다.
단재는 1907년 중국 양계초의 <이태리 건국  3걸전>을 번역,간행하고, 한국역사상의 3걸로 을지문덕이순신최영을 뽑아 그들의
전기를 저술하였다. 그가 이 같은 인물들의 전기를 쓴 것은  우리 나라의 청년들이 이러한 영웅들의 행동을 본받아 일제침략자들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는 데 영웅적으로 투쟁하도록 고취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그는 1908년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 이라는 사론을 발표하여 지식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는데, 이 글을 통하여 그는 전통적인
유교사관을 통렬히 비판하는 한편, 새롭게 침투해오던 일본인들의 식민주의 사관에 대해서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
1910년 나라가 완전히 무너지자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여 그곳의 독립지사들과 협력하여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 <해조신문>을 간행하나,
재정의 어려움과 언론에 대한 동포의 인식이 부족하여 이 신문 발행은 여러 차례 중단을 거듭했다. 이때 상해에 먼저 자리잡은
신규식박은식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그곳에서 신한청년단과 박달학원에서 청년들에게 우리 역사를 가르쳐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한편,
우리 나라 상고사의 연구에도 열중하였다. 예전의 우리 역사가 결코 퇴영적이 아니요, 고조선고구려 등이 강대한 중국에 맞서 영토를
보존해온 역사적 사실을 통해, 민족사관을 정립하는 제 온 정열을 쏟았다.
그는 이국땅에서 학문연구와 독립운동을 병행하면서 10년 세월을 보냈다. 이 사이 국내에서는 31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를 북경에서
맞이한 단재는 조선민중이 직접 나서서 독립운동을 전개한 사실에 큰 감명을 받고 역사의 주체로서 새롭게 뜨오르고 있는  민중 을 발견하게
된다.
상해에 수립된 임시정부에 그는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서로 망명정부의 주도권을 잡기에만 열중하는 이승만을 임시정부가 대통령으로
선출하자, 이를 인정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동지들과 함께 <신대한>이라는 신문을 만들어 임시정부를 맹렬히 비난하였다.
1922년 무력 급진노선의 의열단 단장인 김원봉의 부탁으로 그가 보낸 무정부주의 이론가인 유자명과 함께 의열단의 혁명운동의 이념과
방법을 천명하는 선언문을 집필하는데, 이듬해  조선혁명선언 을 완성한다.
 조선혁명선언 은 단재의 비타협적 민족주의 사상과 유자명의 무정부 이론의 결합으로 볼 수 있는데, 이로 인해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에
관심을 갖게 된다.
 조선혁명선언 에서 그는 강력한 일제침략세력과 맞서려면 파괴암살 등 폭력적 방법이 외교운동이나 문화운동과 같은 미온적인
방법보다 효과적임을 역설했다. 또 민족자본의 육성이나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를 통해 독립을 성취해야 한다는  준비론 에도 비판을
가했다. 이러한 혁명적 수단을 강조하는 그의 논리는 일제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할 만큼 격렬했고, 의열단원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다.
임시정부 내의 분열에 실망을 느끼고 한때 절에 들어가 <대승기신론>을 읽으며 침잠했던 단재는, 그의 사명이 조선사연구에 있음을 깨닫고
다시 하산하여 조선사연구에 몰두한다. 그는 조선역사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평생 동안 고심했는데, 단재사학이 일관되게 추진한 것 중의
하나가 중국에 대한  사대 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 이야기만 나오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을 통탄하곤 했다.
한편 국내의 친지들은 그의 글을 좀더 보급하기 위해 이미 발표된 글을 모아 간행하는 한편, 미발표된 원고들을 찾아 신문지상에
발표하였다. 즉, <임꺽정>의 저자 홍명희는 <동아일보>에 발표했던 단재의 조선사 관계논문을 묶어 1930년 <조선사연구초>를 간행했고,
안재홍은 단재가 1920년대 초에 써놓았던 <조선상고사>를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하였으며, 1910년대 후반으로 추정되는
<조선상고문화사>도 1931-1932년에 <조선일보>에 연재하였다.
감옥에서도 계속되었던 조선사연구에 대한 그의 정열은 1936년(56세) 여순감옥에서 순국함으로써 일단락이 되었지만, 일제가 싫어 평생 동안
고개를 쳐들고 세수를 하였따는 그의 기백은 그의 독립투쟁이나 역사서술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단재의 역사관
단재의 역사학과 역사관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독사신론>으로 대표되는 1905-1908년까지의 시기이고,
#2<조선상고문화사>로 대표되는 1909-1920년대 초까지의 시기이고, #3<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로 대표되는 1920년대 전반기인데, 그
이후는 그가 무정부주의자로 기울어져 주목할만한 역사서술이 없다.
   <독사신론>
이 글은 한국근대사학의 성립과정에서 민족주의사관을 처음 제시한 글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이 글의 서문에서  국가의 역사는 민족의
소장성쇠의 상태를 서술한 것 이라고 말하고 ,  민족을 버리면 역사가 없을지며 역사를 버리면 민족의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을지니,
오호라 역사가의 책임이 막중할진저 라고 하여 역사서술의 주체를  민족 으로 상정하였다. 이는 중세의 왕조중심사관을 극복하고 민족사관을
정립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독사신론>은 주자학적 정통론과 사대주의적인 존화사관을 철저히 비판하였다. 그는 당시의
단군-기자-마한-신라로 이어지는 정통론은  노예의 헛소리 라고 비판하고, 단군-부여-고구려의 역사를 더 강조하였다. 이는 부여-고구려
주족설이라 하는데, 그가 이런 이론을 내세운 것은 부여나 고구려족이 살았던 만주의 고토에 대한 수복의식과 강자중심역사중심의
역사관의 발로라 보여지는데, 이는 그의 사회진화론적 현실인식에서 비롯된다.
한편 <독사신론>에서 주목할 점은 당시 일본인들이 주장하던 임나일본부설을  한국을 옛날부터 자기 소유물로 인정하여 한국을 침략하기
위해 만들어낸 근거없는 소리에 불과한 것 이라 비판하여, 한국 근대역사학의 또 하나의 과제였떤 식민주의 사관의 투쟁을 시작한 최초의
글이라는 점이다.
   <조선상고문화사>
이 책은 단군조선 2천년 역사를 서술한 것이다. 이 글의 근저에 흐르는 사상은  국수보전론 이다. 여기서  국수 란 그 나라에 역사적으로
전래하는 풍습습관법률제도 등의 정신을 가리키는 것으로, 단재는 국민정신의 유지와 애국심의 환기는 이 국수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따.
이 이론은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 크게 확산되면서  국수 의 상징으로서 특히  단군숭배 의 기운이 일어나 1909년 대종교가 창건되었다.
그리고 1910녀대에 들어서는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있던 독립운동가들의 대다수가 대종교에 입교하는 현상을 낳기도 했다.
   <조선상고사><조선사연구초>
단재사학의 대표적인 글이다. <조선상고사>의 서문에서 단재는 역사의 정의에 대해  아와 비아 의 투쟁으로 밝히고 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단순히 아와 비아의 투쟁을 역사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밑바닥에 깔린 투쟁의 정신사를 역사로 보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단재의 역사관의 특징적인 모습이 보인다. 즉, 단재는  조선역사상 일천 년래 제일사건 에서 한국사를
선교불교독립사상진보사상 대 유교사대주의보수사상 의 대립축으로 보면서, 양자가 대결하여 후자의
승리로 귀결된 결정적인 사건이  묘청의 난 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역사를 정신사사상사 중심으로 파악하고 있었는데, 이처럼
단재의 관념사관적 성격이 강하게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조선상고사>내용
<조선상고사>는 단군시대부터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까지를 총 12편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조선상고사>는 과거의 가치관이나
역사관을 부정하고 새로운 역사관 위에서 우리의역사를 재평가하였다. 여기에는 강력한 민족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역사관이 이
책의 서론인 <총론>에 잘 나타나 있다.
제1편 총론에서는 단재의 역사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에는 역사의 정의와 조선사의 범위, 역사의 3대 원소 등이 나타나   는데, 현대의
시각에서 볼 때 비판의 여지가 없지 않으나, 당시로서는 혁명적 견해였다. 먼저 역사의 정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역사란 무엇이요? 인루사회의 아와 비아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여 공간부터 확대되는 심적활동의 상황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인류의 그리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 하면 조선민족의 그리되어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무엇을  아 라 하며 무엇을  비아 라
하느뇨? 깊이 팔 것 없이 얕게 말하자면, 무릇 주관적 위치에 선자를  아 라 하고 그외에는  이바 라고 하나니, 그러므로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니라
이를 정리하면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정신사 라는 것이다. 즉, 그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을 사물의 모순 및 상극관계에서 파악하고
있는데, 이는 헤겔의 변증법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이어서 그는 역사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기 위해서는 사료의 수집비판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실증주의적 역사방법론을 강조하고,  역사는
역사를 위해서 지으란 것이요, 역사 이외에 딴 목적을 위해서 지으란 것이 아니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객관적으로 사회적 유동상태와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역사요, 저작자의 목적에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더하거나 혹은 고치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여
역사학의 학문적 독립성을 역설했다. 이는 결국 우리의 역사학을 근대적인 역사학으로서 성립시키고자 하는 이론적 작업이다. 또한 단재는
총론에서 사대주의나 유교사상에 물든 기존의 역사가들을 비판하고 있다.
제2편 신수두시대(단군시대), 제3편 3조선시대, 즉 해씨(신조선), 기씨(불조선), 한씨(말조선), 제4편 열국쟁웅시대(대한족 격전시대),
제5편 고구려 전성시대, 고구려 성쇠와 북부여의 멸망, 제6편 고백 양국의 충돌, 제7편 남방 제국 고구려 공수동맹, 제8편 삼국혈전의 시,
제9편 고구려 대수전역, 제10편 고구려 대당전역, 제 11편 백제의 강성과 신라의 음모 등으로 구성되었다.
우선 주목할 수 있는 것은 단군조의 활동무대를 만주로 한 것과 단군조의 중국에 대한 식민활동이다. 여기서 그의 만주 중심의 단군조
이해는 부여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체계화 및 발해사의 한국사화와 관련되고, 또 만주 중시의 밑바탕에는 한말 일제하에 전개된 만주의
우리 국토화 운동과 독립운도의 기지화 운동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김부식 등 사대주의 역사가와 한국사의 타율성론을 강조하였던 식민사관론자들은 한국사의 본격적인 전개시기를 삼국시대 이후로 보고, 그
역사무대도 한반도가 중심이라고 애써 강조하였다. 단재는 이런 종래의 한반도 중심의 역사무대를 만주요동반도 및 요서지방과 중국
동북지대에까지 확대한 것이었다.
또 대외 식민활동을 강조하는 단군관은 한말의 사대주의 청산작업과 자강독립운동 및 일제하의 국권회복운동의 기반구축을 단군과
관련시키려는 데 있었다. 단재가 <삼국유사>를 통하여 전통적인 사료들의 틀을 넘어서서 단군문제를 이해하려는 것은, 단군문제가 한말
일제하의 민족주체성의 과제와 연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재의 부여고구려 중심의 고대사 인식체계는 조선후기의 학자인 이종휘의 <동사>의 영향을 받은 듯하다. 단재는 일찍이 이종휘의
<동사>를 섭렵했고 그를 극찬했을 뿐만 아니라, <동사>에서 체계화한 한국고대사의 골격이 단재를 거쳐 더욱 정교해졌음을 알 수 있다.
단재의 부여고구려 중심설은 만주를중심으로 한 고구려의 웅혼성과 대외투쟁의 승리를 강조한 것으로, 이는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
으로 보는 단재의 자강독립적인 사학정신과 상통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하자면 중국에 대한 문화적정치적 사대주의를 타파하려는 의도일 뿐 아니라, 민족적 과제를 역사학과 연결시킨 데서
가능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단재가 이러한 관점에 섰을 때, 종래 사가들이 삼국과 신라에 가려서 보지 못했던 부여가야발해사에 대한  재조명이 가능했고,
아울러 대외항쟁의 주체였던 고구려와, 해외경략에 앞섰던 백제를 멸망시켜 한국사의 무대를 반도 내로 축소시킨 신라의  삼국통일 을
김유신의 음모 로까지 혹평하였다.
   단재사학의 역사적 의의
단재의 사학은 박은식의 사학과 함께 한국사학의 근대사적인 학문을 성립시킨 것으로 평가된다. 단재는 한국사학에서 전통사학과
근대사학식민주의 사학과 민족주의 사학, 영웅사학과 민중사관이 교차되는 그 접점에 서 있다.
   근대사학의 성립
먼저 전통적인 역사학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실학시대의 역사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면서 <삼국사기> 이래의 유교적 사학과 비유교적
사학(선교와 불교의 재야사학자)을 접목시키고 있다. 이는 단재가 유가적 분위기의 한문사료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우리 민족의 전통성과
주체성르 강조할 수 있었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또한 일반적으로 단재의 사학과  아와 비아의 투쟁의 정신사 라하여 독립운동의 한 방편으로만 이해되어왔으나, 근래에 와서는 그의
역사학이 지닌 중세성의 극복과 근대성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즉, 역사를 편협한 의리론과 정통론적인 이데올로기 성에서
해방시켜,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밝히는  역사과학 의 위치로 끌어올렸으며, 그리하여 유교적 중세사학을 완전히 청산하고 근대사학을
성립시켰다고 볼 수 있다.
   민중사관
단재의 역사학에서 보이는 역사인식 주체도 그의 사학의 근대성과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그는 역사연구의 초기에는 역사의 주체를  영웅
으로 보고 갈망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08년을 전후한 시기에 이르면 그는 신민국을 강조하였는데, 기존의  영웅사관 에서  국민 을 역사의
주체로 보는 역사관으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러다가 31운동이 일어나고 1920년대의 사회주의 사상에 의한 평등사상이 고양되고
독립운동에서도 민중지도자가 나오면서  민중 을 역사인식의 주체로 보는 사상적 용단을  조선혁명선언 에서 내리게 된다.
따라서 그의 역사주체 인식은 영웅-국민-민중의 순서로 변화되어 가는데, 그가 <조선상고사>를 저술하는 시기에 이르면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인식하는 근대적인 사관의 단계에 이르른다.
   민족주의 사학
이리하여 단재에 이르러 한국의 근대 민족주의 사학이 시작된다. 단재가 근대 민족주의 사학을 일으켰고, 또 그의 고대사 인식에 창조적인
혜안이 번득인다 할지라도, 그도 역시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학자에 불과하다. 그의 투철한 민족애와 자주정신, 치열한 삶이
시대를 넘어서서 두고두고 귀감이 된다 할지라도, 그가 남긴 역사연구 업적은 냉엄하게 비판받았으며 1930년대의
정인보문일평안재홍 등에 의해 발전되어갔고, 1940년대에는 손진태 등에 의해 관념론적 한계를 극복하면서 신민족주의 사학으로
비약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