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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학십도

<성학십도>
  저자: 이황(1501--1570)

 <동방의 주자>라 불리는 퇴계 이화이 68세 때 서울생활을 마감하면서 16세의 어린 선조를 <성군>으로 인도하기 위해 제왕의 길을
말씀드리고 말로 다할 수 없어 글로 올린 것이 <성학십도>다. 여기서 퇴계는 수신이 정치의 근본이 됨과 동시에 수신의 방법과 그 철학적
근거를 밝히고 군주의 도덕적 수양을 강조하고 있다. 퇴계는 성리학의 요체를 열 개의 그림으로 나타낸 다음 자신의 해설을 덧붙이고
있는데,우리는 여기서 성리학적 사유의 핵심과 도덕적 명분의 확립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대하는 그의 진지한 태도를 엿볼 수있다.

     생애

 정통 성리학의완성자,이름은 황,퇴계는 호.퇴계가 태어난지 7개월 만에 부친은 세상을 떠나고, 30대 초반의 모친은 별로 배우지는 못했으나
매우 현명하고 덕성스러운 여자였다. 21세에 결혼하고 23세(중종 18년)에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과거를 세 번 보아 모두 낙방하는
쓰라린 경험을 맛본다. 교훈이기도 했다. 율곡이 과거를 아홉 번 보아 모두 장원급제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퇴계는 대기만성형이었다.
27세부터 과거에 합격하기 시작했다. 34세에 승문원 부정자라는 최하위직으로 출발하여 49세에 풍기군수를 끝으로 관에서 물러나기로 결심할
때까지 중앙에서 29종의 벼슬을 지냈다. 1545년 을사사화로 일시 파면다하기도 했느나 곧 복직되었다. 그후 고향에 돌아와 조그만 암자를
짓고 독서롸 사색에 열중한다.
 그의 호인 퇴계는 고 이은상 선생에 의하면 <<물러나 시냇가에 거처한다>> 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49세에 은퇴하여 70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는 왕명으로 4번이나 서울로 올라가 성균과 대사성(국립대 총장),공조판서,예조판서 등을 거쳐 학자문사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양관
대제학(왕의 정책결정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하는 홍문관과 왕의 교서를 작성하는 예문관의 장)등의 벼슬을 억지로 한다.
 16세의 어린 선조에게 <성학십도>를 올리고 68세에 완전 은퇴하여 <주자서 절요>등 저술작업과 학문연구,그리고 제자양성에 전력한다. 그는
특히<주자전서>에 감동하여 침식을 잊고 연구한 결과 <동방의 주자>라는 칭호를 받게 되었다. 이이와 함께 우리나라 유학사상의 대표적
학자로 주자의 <이기이원론> 을 발전시켰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이기호발설>로 이가발하여 기가 이에 따르는 것은 4단이며,기가 발하여
이가 기를 타는 것은 7정이라 했다. 그의 학풍은 후에 영남학파를 이루어 이이의 기호학파와 대립, 동서당쟁과 관련이 있고, 그의 학설은
일본유학계와 구한말 위정척사운동에 영항을 미쳤다. 현실생활과 학문생활을 엄격히 구분하여 최후까지 학자적 태도를 지켰다.
 퇴계는 타고난 학자로서 벼슬에 있을 때나 야에 있을 때나 손에서 책을 놓는 경우가 없었다 한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고 생각하고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여 저술에 몰두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건강을 해쳐 소화불량.안질.현기증에 시달렸다. 그러나 만년에 학문을
대성하고 성인의 경지에 들었을 때는 모든 것을 달관한 탓인지 건강도 저절로 회복되고 수척하던 몸도 원숙하 마음과 더불어 보기좋게
살쪘다고 한다. 제자들은 그를  신명  즉 신처럼 존경하고 받들었다.

     조선시대 성리학의 두 흐름

 서일학은 속안라의 주자에 의해 체계화된 유학사상으로  이.기 의 개념을 통해 우주와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본성을 규명하고자 한
유교철학으로 대체로 태극론.이기론.심성론.성경론으로 구분된다.
 조선의 성리학은  주리론 과  주기론 의 두 계통으로 발달했다.  주리론 은 주자의 견해르 ㄹ보다 충실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이기이원론
의 입장에서  이 (본질,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유사)와  기 (현상, 플라톤의 현상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흡사)는
서로 다른 것이면서 서로 의지하는 관계에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가 기를 움직이는 본원이라는 견해다.
 따라서 인간의 심성문제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이(목??의 ??)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기질의 성)는 가선가악한 것이라 하여 역시 이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 학설은 이언적에서 시작되어 이황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는데, 특히 이황은  동방의 주자 라 불릴 만큼
주자의 교리에 충실했다. 그의 문하에서는 유성룡.김성일.정구 등이 배출되어 영남학파를 형성했으며 일본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편  주기론 은 서경덕이 처음으로 주자의 학서를 비판하고  이기일원론 을 주장함으로써 시작되어 이이에 의해 대성을 보았다. 이것은
우주만물의 근원을 기에 두고 모든 현상들을 이 기의 변화.운동으로 보는 입장이었으나 여기서 이는 기를 움직이는 법칙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심성론에 있어서도 본연이 성보다 기질의 성을 더욱 중요시했으며 정치.경제 등 현실인식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 학문은
이이를 비롯해서 성혼.송익필과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 등에게 이어져 기호학파를 형성했다. 이후 영남과 기호 두 학파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발전했다.

     이황의 사상

 이황의 사상은 이기론에 있어서는  이기이원론적 주리론  이기호발설 과, 기대승과의  4단7정논쟁,  성경론 에 있어서는  경 사상 등으로
요약된다.

 1.이황에 의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만물은 이와 기로 이루어진다. 이는 무형무질의 정신적인 형이상학적 존재이고, 기는 유형유질한
물질적인 형이하학적 존재라고 보았다. 이와 기는 상호의존적이나 이를 기보다 더 근원적인 존재로 파악했다. 이리하여 이 우위론적
이기론이 그의 본체론을 장식한다.

 2.이기호발설과 4단7정의 해석을 놓고 기대승과 벌인 4단7정논쟁이다. 4단이란 맹자가 말한  측은지심은 인지단이요, 수오지심은
의지단이요, 사양지심은 예지단이요, 시비지심은 지지단이다 에서 인.의.예.지를 말하며, 7정은 <예기>의 희.로.애.락.애.오.욕을 말한다.
 이황은 심성의 문제를 해명함에 있어 절대적인 이와 상대적인 기로 임했으며 언제나 인간의 심리현상은 이발기수(이가 작용하여 기가 이에
따르기도 하고)와 기발이승(기가 작용하여 이가 그 위에 타기도 함)의 이기호발설로써만 설명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 순선무악한 4단은
반드시 이에서 발해야 하며 가선가악한 7정은 기에서만 발할 수 있다고 보았다. 기대승은 이에 반대하여 이익의 혼륜이 정이고 그 정은 기의
작용에 의하여만 발출한다고 보고 이발을 인정치 않았다. 또한 4단은 7정에 포함되어 있고 4단과 7정의 근원은 같다고 보아 4단7정을
상대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즉, 이기는 분리할 수 없고 기를 통해서만 이를 알 수 있다고 했다.

 3.그는 평생을  경 으로 일관했다.  마음을 방마하지 말고 항상 정신을 집중, 통일된 상태로 지녀야 하고 모든 지거동작을 가볍게 하지
말고 모든 일에 조심하게 삼가는 태도를 지녀야 한다. 따라서 말할 때에도 경해야 하고 움직일 때도 경해야 할 것이며 앉아 있을   에도
모름지기 경해야 한다. 이는 이루러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심산이 숙연해지고 표리가 하나로 되는 경지가 되는 것이어야 한다.
 또한 그는 선지후행이나 선행후지를 배격하고 지행병진론을 주장했다. 지와 행, 정과 동을 관통하는 하나의 기본이 되는 것이  성 이며
거기에 이르기 위한 방법이  경 이라 했다.

     <성학십도>의 내용

 1568년(선조1) 서울생활을 영원히 청산하면서 68세의 노대신은 16세의 선조에게 제왕의 길을 말씀드리고 말로 다할 수 없어 글로 올린 것이
<성학십도>였는데, 어린 왕과 늙은 신하의 대면은 감격적인 장면이었다 한다. 선조를 성군으로 인도하기 위해 군왕의 도에 관한 학문의
요점을 도식으로 설명했다.
 <성학>이란 <성인을 배우는 학문> 또는 <성왕을 배우는 학문> 의 뜻으로,쉽게 말하면 유학을 가리키며,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성인이 되도록
하기 위한 학문이 내재되어 있다는 뜻이다. <성학십도> 의 서론에 해당하는 <진성학십도차>에서 이를 확인해보면, <<임금이 된 분의 한
마음은 온갖 정무가 나오게 되는 자리이자 온갖 책임이 모이는 것이며 뭇 욕심과 간사함이 침해하는 곳입니다. 그마음이 만일 조금이라도
태만하고 소홀하여져 방종케 되면 마치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들끓는 것과 같아서 그 누구도 이것을 막아낼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임금
한 사람의 용심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훌륭한 덕을 쌓아야 한다는 뜻으로 올린 것이다.
 공자 이후 유학에서는 이상적 정치를 군왕의 덕치.예치고 생각한 만큼 이황이 그 덕치의 이상실현을 위해 임금에게 덕을 쌓는 심법을
가르치고자 지은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유학의 근본정신을 언제나 <수기치인>과 <내성외왕> 에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어느 누구나 수양을
하되 현실의 문제를 도외시해서는 안되며,현실을 다루되 (외왕) 그에 앞서 누구나 성인의 조건(학시과 덕망)을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성리학의 경우에 이러한 정신을 더욱 투철하다. 따라서 이러한 점에서 보면 <성학십도>의 저술동기는 다만 군왕 한 사람의 교육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배우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성학십도>는 서론의 뜻이 담긴 <진성학십도차>와 10개의 도표와 해설로 되어 있는데, 특히 그 도에는 저작과 앞선 학자들의 것이 섞여
있다. <진성학십도차>에서는 왕 한 사람의 마음가짐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경의 내면활르 중요시한다.
 10도 중 1.태극도 2.서명도 3.소학도 4.대학도 5.백록동규도의 5도는 천도에 입각하여 성학을 설명한 것이고 6.심통성정 7.인설 8.심학
9.경제차 10.숙홍야매차의 5도는 심성에 근원하여 성학을 설명한다. 7개는 옛현인들이 작성한 것이고 3개(3.5.10)는 이황 자신이 작성한
것이다. <십도>의 서술내용은 도표와 함께 앞부분에 경서와 주의 및 여려 성현의 글을 인용한 다음 자신의 학설을 전개하고 있다. 이로 보면
본서는 이황의 편집과 저작의 중간형식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일종의 편저형식을 통하여 그의 사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서 흑자는 도 자체만 가지고 말할 때 본서에는 이황의 독창성이 별로 없다고 주장할지 모르나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것은
당시까지의 성리학의 요지를 열 가지로 압축,체계화한 것인데,그 당시의 성리학을 자기류로 체계화한다는 자체가 그의 독창성의 발로이기
때문이다. 이황이 특히 주희의 입장에서 성리학의 요지를 도설의 형식으로 총정리,체계화한 것이라는 데에 <성학십도>의 저술 의의가 크다.
따라서 우리는 이 한권만으로도 이황의 공헌과 그 비중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아무튼 우리 나라에서 <성학십도>만큼 숭상받은 책도 드물 것이다.이황의 철학을 대표는 <성학십도>는 선조의 명에 의해 병풍에 씌어져
애중되었고,그 이후의 역대 임금들도 경연 (임금에게 학문을 가르치고 논하는 일) 에서 자주 강의하게 했다. 임금들이 이러했으니 그
신하들의 경우는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중국에서는 청말의 양게초 같은 성학으로부터 극찬을 받은 바 있고, 일본에서는 일찍이 1655년부터 이 책이 인쇄되어 유학자들의 필독서로
숭상되었다.

     퇴계사상의 영향

 어떤 학자들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 두 사람을 선택하라면 이황과 정약용을 드는 사람이 많다. 이황은 생전에 두 명의
부인,형님,아들 등의 죽음을 맞는 불운을 겪었으나 정신을 가다듬어 학문에 정진했고, 스스로 몰려드는 제자들을 가르쳐 인재를 양성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깨닫고 사당을 지었다. 이와 같이 그가 평생에 역점을 두었던 일은 크게 두 가지로 학문연구와 교육운동이
그것이다.
 그의 학문과사상에 대히서는 앞에서 살펴몬 바와 같이 그는 인간의 심성을 구명하는 데 있어 이이와 입장을 달리했으나,구명된 인간심성을
실천으로 연결시켜 도덕적인 인간과 사회를 구현하고자 한느 것을 학문의 궁극적 목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이와 함께 뚜렷한 공현을
한다. 그는 저술에 매진하면서 때로는 편지로 가르치기도 하고 수양하는 방법을 일려주기도 했다. 그의 이러한 학문적 깊이는 임금드르이
귀감이 되었고 뒷날 후학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는데, 일본의 메이지 유신 때에도 지도이념으로 활용되었다.
 그는 교육자로서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여 풍기군수로 재직시 백운동서원을 최초로 국가공인으로 만들엇고,성균관의 대사성자리에
있으면서 학문적 분위기를 성숙시켰느며,고향에 돌아와 도산서원을 일으켜 본격적인 제자양서에 주력한 결과 정승 10여명과 판서 30여 명을
배출했다. 그의 제자들은 뒷날 영남학파를 형성하여 중앙의 관계를 주름잡았고 향리의 학문풍토를 조성한다.
 그러나 그가 성균관의 유생을 자기 세력으로 만들고 영남학하를 당쟁에 휘말리게 했다는 비난과, 그가 너무나 큰 학자여서 학파의 흐름이
권위주의적 경향으로 흘러 개혁과 변화를 소홀히하는 보수성을 띠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미래지향성의 결여나 물질경시
현상,가족주의의 폐단 등은 유교사상의 전반적인 역기능으로 이해하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끝으로 이황의 검소한 일생을 보여주는 일화 한 토막을 소개한다.
 권율 장군의 아버지인 권철은 영의정을 지낸 당대의 인물로 도산서원으로 이황을 찾은 적이 있었다. 식사 때가 되자 밥상이 나왔는데
보리를 반 이상 섞은 밥에 콩나물국,반찬으로는 콩자반,귀한 손님이라고 해서 특별히 마련한 것이 북어 한 토막이 전부였다. 이황은 한
그릇을 다 먹었으나 권철은 체면치레로 몇술 뜨고 수저를 놓았다. 이튿날도 같은 식사가 나오자 목에 넘어가지 않는 식사 때문에 예정을
앞당겨 떠나기로 했다.떠나면서 좋은 말씀 한마디를 부탁했다. 이에 이황은 <<촌부가 대감께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다만 융숭한 대접을
못해드려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 식사는 백성들이 먹는 식사에 비하면 진수성찬이올시다. 이것을 드시지 못하면 관과 민의 생활이 이처럼
동떨어져서야 어찌 백성이 진심으로 복종하겠습니까>>라고 대답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