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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열전

<사기열전>
     저자 : 사마천(BC 145?--?)

 <사기>는 사마천이  이능사건 과 관련하여 죽음보다 수치스런 궁형을 당하면섣 완성한 불멸의 고전이다. <사기>는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고
역사정신에 투철했던 한 인간이 빚어낸 인간승리의 결정체다. <사기열전>이란 중국의 전통적인 역사서술방법인 기전체사서의 효시가 된
<사기> 중에서 역사적인 인물들에 대한 기록인데, 여기에는 사마천의 역사관.세계관.인간관이 잘 반영되어 있다. 인간과 인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제반현상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씌어진 <사기열전>은 역사서이자, 인간과 사회에 대한 깊은 철학서이기도 하다.
     생 애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를 헤로도토라고 한다. 반면에 중국 전한시대 역사가 사마천은 <동양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후반시대의 역사가인
반고와 함께 역사학의 독창적인 경지를 개척한 인물이다. 사마천은 대대로 사관을 지낸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사마담은 태사령,
즉 천체를 관측하여 달력을 만들고 문헌이나 기록루를 관리하는 직에 있었다. 사마담은 사관의지의가 점차 기술적으로 천시되고 옛기록이
사라져가는 것에 깊은 비애를 느끼고 사서편찬을 계획하고 있었다.
 사마천은 어릴 적부터 역사에 흥미를 갖기 시작했으며 그의 아버지에 의해 의도적으로 역사가로서의 소양을 키워나갔다. 그는 이미 10대에
고문서에 통달했으며 20대에는 천하를 주유하며 주요 사적지를 직접 답사, 각지의 전승과 풍속, 중요인물 등의 체험담 들을 채록하는 등
귀중한 체험을 했다. 그후 낭중의 벼슬에 올라 무제를 수행, 사자로서 출장을 거듭하게 되니 전국 각지에 그의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아버지 사마담은 한무제가 거행한 태산에서의 봉선(흙을 쌓아 담을 만들어 하늘과 산천에 제사지내는 일)의식에 태사의 직책에 있으면서도
참석을 허락밭지 못해 괴롭게 여기다가 분사했는데, 죽기 전에 고대부터 당시까지의 역사를 기록할 것을 유언으로 남긴다. 천문.제사의 직을
관장하는 태사령이 봉선의 대의에 참가하지 못했다는 것은 정녕 큰일임에 틀림없고 죽을 정도로 발분한 것도 당연하다.
 BC 108년 아버지를 이어 태사령에 임면된 사마천은 부친의 유언에 따라 역사서의 집필을 결심하고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까지
남아있던 <시경> <상서> <춘추> <전국책> 등과 궁중에 비장되어 있는 각종 서적.상소문.국가의포도문 등을 섭렵,<사기>의 집필에 전념했다.
그러던 중 예기치 않은 재난이 닥쳐왔다. BC 99년 한나라 장군 이능이 훙노와 싸우다가 패하여 포로가 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능의 처분을
결정하는 자리에서 단죄를 주장하는 무제와 일가멸족의 의견이 대세인 상황에서 사마천이 홀로 이능의 충절과 용감한을 들어 변호하자
격분한 무제는 사형을 선고했다.
 자무심이 하늘을 찌르던 천하의 사마천은 감옥 속에서 <<용감하고 비겁하고 강하고 약한 것은 상황에 따라 좌우된다>>는 손자의 말에 깊은
공감을 느끼고 인간과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다. 당시에는 사형을 면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것은 50만 전을
내든지 아니면 생식기를 절단하는 <궁형>을 받는 일이었다. 넉넉치 못했던 사마천은 죽음보다 더 치욕적인 궁형을 택했다. 2년 여의
옥중생활을 마치고 세상에 나왔을때 그는 뜻밖에도 한무제의 측근에서 일하게 되었다. 중서령이라는 높은 벼슬로 복귀했는데, 운명의
장난이었는지 이는 그가 환관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뒤 정시적 타격에도 굴하지 않고 분발하여 인간의 운명에 대한 의문을 역사에 대한 깊은 성찰 속에서 찾고자 하여 마침내 20년간의 산고
끝에 <사기> 130권을 완성했다. 이처럼 사관의 가문에서 출생, 천하주유, 부친의 유언, 저술 착수, 이능사건과 궁형, 사명감으로 완성된
책이 <사기>다. 그때가 BC 97년. 탁월한 재능과 예리한 관찰력, 거기에 인생의 가혹한 체험을 겪은 사마천에 의해 <사기>는 불멸의 역사서로
남게 된 것이다.
     사마천의 역사관
 먼저 사마천의 역사연구의 관점을 엿볼 수 있는 그의 편지의 일부를 보자.<<겸손치 못한 일이나 저는 감히 저의 무능한 문장으로 세상에
흩어져 없어져버린 구문을 수집하여 그 행해졌던 일을 대략 상고하고, 그 처음과 끝을 정리하여 성패와 흥망의 원리를 살펴 모두 130편을
저술했습니다. 저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의 말을 이루고자 했습니다(<한서>).>>
 이 글에서 감지할 수 있는 것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역사연구란 폭넓은 역사적 자료에 의거해야 하며 아울러 이러한 자료를 사실과 서로 검증하여, 일의 성패와 국가의 흥망원인에 대해
연구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역사가는 풍부한 자료를 바탕으로 사료의 진위감별력,내용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사료와 진실에 근거하여
사실대로 쓰는 데 과감해야 한다.
 사학자들은 절대로 주위의 압력이나 회유에 굴복해서는 안되며 객관적인 역사서술에 용감해야 하는데, 사마천은 두 방면에서 모두   어난
모범이 되었다고 후세사가들은 평했다. 그는 이처럼 <사기>를 저술하면서 객관적 판단이나 자신의 개인적 견해를 구분하여 서술하는, 즉
주관적 판단이나 감상은 언제나 본문 끝에다 <태사공월>이라고 써서 역사가로서의 엄정함을 갖추었다.

   2. 사마천은 역사연구에 있어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사기>에서 밝혔다. 즉,
역사연구에 있어 시대상황의 변화와 개인이 서로 만나게 되는 관계에 대해 연구했던 것이다. 인간사의 성패나 국가의 흥망은 인간 자신에
의한 것인가. 아니면 하늘과 신의 뜻에 의한 것인가? 이에 대한 사마천의 태도는 분명하다. 즉,인간은 역사의 주체이지 객체가 아니라는
생각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역사에 있어 인간사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천명사상>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 예로 사마천은 항우가
패배하여 자살하기 직전 하늘의 뜻으로 돌리며 <<하늘이 나를 망친 것이지 나의 탓이 아니다>>라고 한 데 대해, 항우가 패하여 죽은 것이지
결코 하늘의 뜻이 아니며 오직 그 스스로 일을 그르쳤다고 평가했다.

   3. 사마천은 역사연구에 있어 마땅히 <<고금의 변화에 통달해야 한다>>고 보았다. 즉, 역사발전과정과 법칙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역사란 발전적이고 변화적이며 역사의 각 마디는 상호연계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기>는 통사체제를 활용하여 중국역사시대부터 한에
이르는 3천 년의 인류역사를 일관되게 서술한 최초의 책이며,아울러 이 한 폭의 역사의 그림책 속에서 각 시기의 특색 및 예법.제도.인물의
변천을 드러내었다. 바로 이것이 사마천의 <고금에 통달하는> 사상을 보여준 것이다.

   4. 네번째, 사마천은 역사연구에 있어 마땅히 역사가 나름대로의 독특한 품격을 지닌 <<일가의 말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옛날부터 사학은 일종의 고지식함을 많이 지니고 있어 역사서는 천편일률적이고 역사가는 개성이 부족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의 대부분이
정치세력의 영향으로 조성되었다는 점은 부인 할 수 없다. 바로 이 점에서 사마천은 후대사람들의 모범이 되어 매우 힘원한 영향을 미쳤다.
 사마천은 우수한 역사가로서 <사기>에서 대단히 개성적인 품격을 형성했는데, 그 결과가 기전체 형식의 역사서술방법이다. 비록 공자가
편년체(연대중심의 역사서술방법, <사기> 이전의 모든 역사책의 서술방법이었으나 <사기>이후 기전체가 유행하고 송나라 때 사마광의
<자치통감>이후 편년체의 편찬방법이 보다 완벽해져서 다시 새롭게 주목을 받는다)로 지었다는 <춘추>를 참고했다 해도 그 역사서술
방식이나 태도에 있어 크게 다른 기전체라는 독특한 방법을 개발했던 것이다.

     <사기>의 내용

 <사기>는 처음 <태사공서>라 불려지다가 위.진 시대에 와서 <사기>라 약칭되었다. 이 책은 중국의 고대부터 사마천이 살던 그 당시까지의
3천 년 역사를 인물중심으로 다룬 통사(기전체 사서)로,본기 12권,표 10권, 서 8권, 세가30권, 열전 70권 등 총 130권(10권은 그후
소실)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기>란 제왕의 일대기, <세가>는 제후의 일대기, <열전>은 그아래에서 역사의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인물들을 묘사한 것이고,<표>는
연대기,<서>는 역법이나 경제 등의 제도사이다. 이중<열전> 70권은 이 책의 백미로서 사회 각계각층 그리고 각 방면의 중요한 인물 및
주변국가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대사공자전>편이 있는데, 이것은 사마천 자신의 가계와 사적을 서술하고 이 책의
편찬과정과 의미, 그리고 저자의 사학적인 견해를 설명하고 있다.
 <본기>는 역대왕조의 역사를 제왕을 중심으로 쓴 연대기다. 황제의 첫머리에 <5제본기>로부터 시작하여 하.은.주.진.한의 5대에 걸쳐
1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대는 서술이 간략하고 내려울수록 사료가 풍부하여 자세히 기록했다.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비록 황제에
오르지는 않았지만 천하에 그 영향력을 떨쳤던 항우를 <항우본기>로 <진기>와 <한기>사이에 설정한 것과, 한나라의 2.3대 군주인
효제,소제는 본기로서 다루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구구한 이럼 점으로 볼 때 사마천의 견해는 유학파와는 달리 실증적인
특색을 지녔던 듯하다.
 <세가> 30권은 선진 이후 한나라에 이르기까지 흥망성쇠를 거듭한 봉건제후국의 역사다. 주나라의 봉건제후는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와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복잡한 역사를 엮어내는 제왕을 중심으로 한 <주본기>만 가지고는 이 시대 제후국의 활동을 충분히 파악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세가>란 차례를 세우고 각 나라별로 제후국의 역사를 서술했다. 그렇다고 해서 <본기>에 대해 <세가>를 세운 것은 단지
주나라의 봉건제를 수술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한 예외로서 공자와 진승(진나라를 치기 위해 제일 먼저 봉기한 민중의 지도다)이 세가에
들어가 있는 것이다. 공자는 제후는 아니었고 진승은 권력투쟁에서 실패한 무장임에도 <세가>로 대우한 것은 문화사에서 공자가 차지하는
비중과 정치사에서 진승이 차지하는 비중을 고려했기 때문인 것같다.
 <열전>의 서술은 사마천이 그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부분이며 70권으로 되어 있다. 그는 <열전> 저술의 목적을 <<의를 돕고 결연히
나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천하에 공명을 세운 사람들을 위해 70여 편의  열전을 짓는다>>고 밝히고 있다. 대개가 전국시대 이후의 역사의
무대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인 인물들의 생애를 깊은 통찰력,예리한 판단력,풍부한 상상력 등을 구사하여 다채로운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전기가 아니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역사의 질서를 내면으로부터 뒷받침하는 뜻에서 각 개인의 구체적인 행동을 서술하고 있다. 사마천은 그와 같은
질서의 세계를 현실에서 권력을 잡은 자의 구체적인 권력지배의 세계와 혼동하지 않았다. 차라리 개인의 구체적인 권력자 행위는 그와 같은
질서이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행위의 동기,심성이란 관점에서 날카롭게 비판된다.
 특히 그와 같은 시대를 산 권신들의 행동에 대한 비판적 서술에는 가차없으며, 비록 평민이라도 그가 이념하는 질서세계를 유지하는 데
참여한 자를 위해서는 특별히 <열전>을 세워서 이를 기록하고 있다. <유협열전> <유림열전> <자객열전> <호리열전> <화식열전>등이
그것이다.
 그밖에도 중국을 둘러싼 이민족을 열전의 단위로 삼아서 서술한 것이 있는데, <조선열전>을 비롯한 <흉노열전> <남월동월열전> <서남이
열전>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것은 중국을 중심으로 한 사위 민족과의 교섭이 잦았기 때문이며 그들의 실정을 이해해야 한다는 실리적
견지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나, 중화사상의 표현으로 왕화가 미치는 곳이라 하여 더욱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조선열전>에는
특히 무제의 한사군설치를 둘러싸고 우리 나라의 청천강 유역에서 한군과 위만조선군이 충돌한 사건을 소상히 다루고 있다.
 대략 1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사마천은 52만 자에 달하는 저작을 완성했다. 우리는 여기서 궁형의 고통을 참아가며 <사기>를 완성하고
아울러 과거에 대한 서술을 통해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줌과 동시에 삶의 존재의미를 이 저술 속에서 승화시킨 <인간승리의 모습>을 보게
된다.


     공헌

 사마천의 중국문화에 대한 공헌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지대하다. 중국이 사상사.문학사.천문학사에서 특히 그렇다. 이는 사마천 자신의
천재성에 그 연원을 찾을 수 밖에 없겠지만 그 밖에도 중요한 원인의 하나를 그가 산 시대에서도 찾을 수 있다.
 진.한 이래 정치적인 분열상태가 종식되고 사상적으로도 백가쟁명은 종지부를 찍는다. 그리하여 구사회의 역사.문화를 총괄하고, 거기에
새로운 사회에 대한 철학적.역사적 해석을 필요로 한는 현실적인 요구가 필연적으로 싹트게 된다. <태사공자서>도 이러한 시대적 요구를
충족시켜주었던 책 중의 하나다.
 많은 사람들이 사마천을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격찬해 마지않는 것은 그가 사학분야에 미친 공헌 때문일 것이다. 그 이전의 역사문헌인
<상서>와 <춘추>에서는 개인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 그 개인을 유교의 훈계담이나 정치법률에 붙여 제2차적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기>의 출현으로 종래의 교훈적인 역사가 과학적인 학문의 수준으로 발전하여 유교의 경에서 사학을 독립시킨 것이다. 이라하여 경과
사는 한대부터 구분되기 시작했으며, 사가경과 독자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사마천과 후한의 반고에 의해서이다.
 사마천의 뚜렷한 업적 중의 하나는 기선체를 통해 역사서술을 시도한 점이다. <기전체>란 본기와 열전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사마천에
의해 새로이 창안된 이 기전체의 서술체제는 중국 정사체에 계승되면서 송의 사마광의 <자치통감> 이후 나타난 연대 중심의 편년체와 함께
이후 동양 역사서술의 전형이 되었다.
 <사기>의 사료로서의 가치는 <사기>에 기록된 천년 전의 은나라 계보가 갑골문자의 발굴을 통해 정확히 확인된 바 있다. 또한 1974년
진시황의 지하궁전이라 하여 세계의 8대 불가사의로 알려지고 있는 진시황릉의 동쪽에서 한 농부가 발견한 대규모 병마용갱의 발견 역시
<사기>의 진가를 다시 한번 확인해준 셈이 되었다. <사기>제6권에 <<37년 9월에 진시황을 여산에 묻었다. 시황은 즉위 초에 지하수맥 3개를
끊고 그곳에 동을 흘려서 그위에다 관을 설치했다. 접근하는 자가 있을 경우 화살이 저절로 쏘아지게 했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상당부분
일치하고 있다.
 그렇다고 <사기>가 단순한 역사서적만은 아니다. 전편에 보이는 유려하고 생동감있는 문장 속에 무수한 인간들의 인생역정이 서술되고,
왕에서 서민까지, 역사의 주연에서 조연까지 이들 개성적 인물들이 교차하면서 엮어내는 인간관계에 주목,곧 인간에게 있어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역사서술의 형식을 빌어 기술하면서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밝히고, 나아가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사서다. 따라서 이 책은 인간탐구의 서적이다.
 사마천은 기전체 문학의 창시자임과 동시에 이른바 우수한 전기문학작가이기도 하다. 사마천은 고도의 언어예술을 갖추고 시대의 언어를
구사하여 역사인물의 성격과 특징을 생동감 있고도 간결하게 각인했다. <<역사가들이 부른, 만고에 빛날 노래이자 운이 없는 굴원의
<이소>다.>> 이것은 노신이 <사기>에 보낸 찬사이자, <사기>의 탁월한 문학성에 대한 평가이기도 하다.
 중국문학사상 문학가로서의 사마천은 시인 굴원과 비교된다. 이것은 양자의 처지가 비슷란 것만은 아니고 그들의 작품에 내재하는
현실주의적 정신이 매우 유사한 까닭이다. 뿐만 아니라 그는 중국의 사실을 소재로 한 역사산문을 높은 단계로까지 끌어올려놓은 공로 또한
크다.
 사마천이 궁형을 당하고 이때의 심정을 뒷날 친구인 임안에게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서 자신의 역경을 발전의 기회로 승화시킨 그이 투철한
역사정신을 음미해보자.

 <<나는 세상에서 버림받은 몸입니다. 진작 죽었어야 할 것을 이제까지 버티어온 것은 아버지의 유명인 <사기>의 찬술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온갖 수치와 굴욕을 참아가면서 나는 밤낮으로 이 일에만 열중하고 있습니다. 내가 듣건대 그 옛날 문왕을 이리에 갇혀서 <주역>을
풀었고, 공자는 곤궁함 속에서 <춘추>를 지었고, 굴원은 추방되어 <이소>를 쓰고<자구명은 <국어>를 지었고, 손자는 다리를 끊기고<병서>를
썼다고...이러한 사람들은 모두 뜻하는 바를 알리기 위해 이런 글들을   던 것입니다. 나 역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세상에 흩어져 있는
전고를 모으고 과거에 있었던 일과 사적을 조사하여 그 성패와 흥망의 배후에 깃든 이치를 규명코자 모두 130편을 저술했습니다. 저는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의 말을 이루고자 했습니다. 극형을 받으면서도 태연스럽게 부끄러운 빛조차
띠지 않고, 만약 이 책을 완성하여 명산에 소장하고 지식인들에게 전달 할 수 있다면 저의 수치도 충분히 씻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연후에야 설령이 몸이 산산조각이 난다 한들 무슨 후회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