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데이아(Medeia)
저자: 에우리피데스(Euripides, BC 480-406)
14년간의 평화에 뒤이은 펠레폰네소스 전쟁의 와중에서 아테네 문명의 와해를 감지하며 쓴 메데이아 에서, 에우리피데스는 여성의 사회적
위치와 감정적 특성에 초점을 맞추어 남녀 사이의 대립적 관계와 사회제도의 기본적 불안정성을 천착하고 있다. 도시국가라는 문명세계가
평소에 가까스로 억제할 수 있었던 감정이, 갑자기 격렬한 힘으로 폭발하여 인간과 국가를 파괴하는 모습을 담은 에우리피데스의 비극은
작가 자신이 속한 사회에 대한 분석이고 반응일 뿐만 아니라, 인류와 인류가 이루어낸 사회구조나 문명의 의미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다.
생애와 작품활동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와 함께 그리스 3대 비극시인으로 꼽히는 에우리피데스는 천성이 명상적이고 사람을 싫어하는 고독한 성격이었음이
전기에 나타나 있다. 그러한 성격은 그의 작품이나 조각상에 나타나 있는 침울한 표정에서도 엿볼 수 있다.
두 번 결혼하였으나 상대는 한결같이 음란스런 여자들이었다. 그의 작품 중에는 여성을 비꼬는 말이 많다. 때문에 그는
미소지니(여성혐오)의 대명사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실제로는 누구도 감히 따르지 못하는 여성심리의 예리한 통찰자였다.
소재는 전통적인 관례에 따라 신화. 전설에서 빌려왔지만 여러 신과 영웅은 비범한 존재가 아닐, 아무 곳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보통의
남녀와 별로 다를 것 없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메데이아 와 히폴리토스 만 해도 등장인물의 정념이 다소 비정상적이라고 할 정도로
격렬하지만 가정 내의 비극에 지나지 않고, 이온 같은 작품도 본질적으로는 오늘날의 홈드라마와 같다. 여성의 굴절된 심리를 묘사하는
그의 수법은 정평이 나 있다.
그는 소포클레스까지의 그리스 비극의 경향, 즉 신과 영웅 을 주제로 하지 않고, 신이 내리는 정의로부터 인간중심의 도덕으로 관심을
옮겼다. 그의 희곡은 문제를 다루는 희곡이며, 비판적이고 회의적인 태도를 표현하였다. 그러나 그는 비판을 하였으나 합리성을 찾지는
못했다.
그의 작품 중 바카이 의 주인공인 테베 왕 펜테우스는 미친 여자들에게 붙잡혀 사지가 찢기지만, 작가 자신도 마케도니아에서 야밤에
미소년 집을 찾아가던 중 여자들에게 붙잡혀 사지가 찢겨 죽었다고 한다.
총 92편의 작품을 썼다고 하나 현존하는 것은 19편이고, 그중 대표적인 것은 메데이아 히폴리토스 헤카테 헬레네 트로이의 여인
바카이 등이 있다.
그리스 3대 비극시인과 페르시아 전쟁
그리스 3대 비극작가를 페르시아 전쟁과 관련시켜 이들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보는 것도 흥미롭다. 아이스킬로스는 이 전쟁에 병사로서
참전했고, 적군 페르시아에 결정적인 타격을 준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를 축하하는 축제에서 소년 소포클레스는 소년 합창단을 지휘하였으며,
에우리피데는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군이 승리를 쟁취하던 날 태어났다 한다. 이런 이유로 이들 3대 비극시인을 흥륭. 전성. 쇠퇴기의
시인으로 보아, 그들의 작품과 사상을 이해하는 데 상징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직접 전쟁에 참가하여 신의 섭리와 신의 위대함을 절실하게 체험한 아이스킬로스의 작품에서는,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신의
의지가 인간의 의지보다 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인감보다 오히려 신이 극의 주역이 되고, 인간은 신의 의지의 구현도구로서 결국
신의 의지에 순응하고 귀의한다. 반면, 페르시아 전쟁에 뒤이은 조국 아테네의 가장 영광된 시기와 더불어 펠로폰네소스 전쟁으로 인하여
아테네의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던 불안한 시기를 겪어야 했던 소포클레스의 작품에서는, 인간의 한계와 더불어 인간의 위대함이
주제를 이루고 있고, 신의 의지보다는 인간의 의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인간이 극의 주역이 되고 있다. 반면, 조국의 영광스런
순간을 단지 전해들었을 뿐인 에우리피데스는 전통적인 세계관과 종교관에 회의적이고 사변적인 해석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작품의 주요내용
메데이아는 태양신 헬리오스의 아들인 코르키스 왕 아이에테스와, 오케아노스의 딸인 이다이아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 메데이아 라는
이름은 빈틈없는 교활한 의 뜻이다.
두 아이의 어머니인 메데이아는 이국의 땅 코린토스에서 이 나라 왕가의 딸과 약혼한 남편 이아손에게 버림받을 처지에 있다. 한때 그녀는
흑해 동부해안의 고향 콜스키에서 황금양털을 구하려고 그리스 군사들을 데리고 원정온 이아손에게 반해, 아버지를 배신하고 남동생을
죽이면서까지 이아손을 돕고 사랑의 도피를 하였다. 그런데 이아손의 고국도 안주의 땅이 되지 못하여 겨우 이곳으로 낙향해 있는 지금
눈앞에 사랑의 파국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아손이 황금양털을 구하게 되면 공주와 결혼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고 황금양털을 구하기 위해
원정을 떠난 것이다.
때마침 찾아온 구면의 아테네 왕에게 부탁하여 도피처를 확보한 그녀는 배반당한 사랑과 상처입은 자존심으로 증오에 불타는 복수를
계획한다. 우선 독약을 바른 예복과 황금의 관을 자기의 아이를 시켜 공주에게 선물로 보낸다. 독약에 취하고 관에서 뿜어내는 불길로
불투성이가 된 공주는 그녀는 돕고자 한 부왕과 함께 불타 죽는다. 이어 자기 자식의 목숨도 끊으려 하지만, 미소짓는 어린아이의 순진한
눈동자를 보자 마음이 흔들려, 모성애와 복수의 악마 사이에서 한동안 고민한다. 그러나 마침내 분노가 이성을 누름으로써 그녀는 칼을 잡아
자식을 죽인다.
메데이아는 죽은 자기 자식들을 품에 안고 아무도 닿을 수 없는 높은 지붕 위에 선다. 처음에는 충격을 받은 합창단이, 다음에는 메데이아의
남편 이아손이 하늘의 신과 대지의 신에게 극악무도한 잔학행위를 한 메데이아에게 복수해달라고 호소한다. 그러나 신들은 전혀
메데이아에게 복수하지 않는다. 오히려 태양의 신은 전차를 내려보내 메데이아를 개선장군처럼 아테네의 피난처로 태워다 준다.
남편에 대한 복수로 아이를 죽일 것인가를 망설이던 끝에 드디어 정념의 힘에 꺾여 죽이는 장면의 묘사는 시인의 창작이라고 하는데, 그로
인해 이 극은 정념의 비극 이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그런 면에서 인간내면의 비극적인 갈등을 묘사하는 데에 뜻을 둔 이 시인에게
어울리는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작품의 결말을 두고 불합리하다 고 비난했는데, 그러나 그 불합리하다는 것이야말로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요점이
아닐까? 작가의 비극이 지닌 구조는 세련되거나 논리적이지 못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적이지 않다. 에우리피데스는 자신이 정확하고
논리적인 우주 속에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선정적인 것을 피하려고 애쓰지도 않았고, 과묵해지려고 애쓰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리스 비극에 있어서 아이스킬로스를 비극의 창시자, 소포클레스는 비극의 완성자로 본다면, 에우리피데스는 많은 면에서 정통을 벗어난
이른바 데카당스 적인 작가라고 할 수 있다. 합창대의 처리방법을 비롯하여 구성면에서나 인물의 취급면에 있어서나 선인들과의 수법차이가
현저하다. 당시로서는 극단적으로까지 사실적인 수법을 썼고, 다분히 아이러니를 포함한 합리적인 해석으로 전통적인 신화와 전설에 새로운
모습을 부과하려 했다. 그 결과 신이나 영웅이 천상에서 일상의 현실적인 세계로 끌어내려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그가 생전에 받은
불평의 주된 원인이 되었지만, 근대인이 그의 예술에 공감하는 것은 이 허황된 세계가 현실적인 세계로 바뀌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생전에 있어서보다 사후에 새로운 평가로 각광을 받은 작가로서 3대 비극시인 중 그는 가장 연소자였고, 특히 인간적인 갈등을 주제로
많은 부분을 할애한 작가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었다. 평소에 자신의 생활은 매우 비사교적이었으며, 자신이 소유지인 동굴에서 하루종일
바다를 보는 사색적이고 고독한 생활로 일관했다고 한다. 또한 그가 다른 작가들보다 작품을 적게 발표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이 오래
지속되어 현존할 수 있었던 이유도 사후에 그의 극이 붐을 이루어 부활 전승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