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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시선

 (두보시선)
    작가: 두보(712--770)

이백이 굴원, 장자, 도연명 등에 의해 넓혀져온  낭만주의의 전통 을 확립한 반면, 구보는 (시경)과 악부민요의  사실주의적 전통 을
구축함으로써 당나라를 중국 시문화의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두보는 초월적 자세로 삶을 파악하려는 이백과 달리 삶 자체를 나에게 주어진
현실적 진실로 보며 이러한 삶 가운데 나타나는 각종의 모순을 지적한다. 그는 사회적 모순이야말로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지만 이 또한 삶의
일부라는 인식을 시로 표현하고 있다. 지성인이 느끼는 삶에 대한 고뇌가 훌륭한 시적 기교를 통해 시화되고 있다.

  * 생애와 작품
중국 당나라 시인. 중국 최고의 시인이라는 뜻에서  시성 으로 불린다. 이백과 아울러 일컬을 때는  이두 , 당나라 말기의 두목에 견줄 때는
 노두, 대두 라고불린다. 자는 자미, 호는 소릉. 소릉이라고 불리는 것은 장안 남쪽 근교, 이름이 같은 지역이 선조의 출신지인 데서
유래한다. 유교를 받들고 벼슬을 한 소관료의 집안에서 출생했다.
두보가 생존했던 시기도 당제국의 번영과 몰락이 교차하는 시점이었다. 현종의 지배기에 수도 장안은 인구 백만을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도시로 세계 도처의 사람들이 모인 인종 전시장과 같았으며, 당의 개방적이고 국제적인 문화의 산실이었다. 그러나 양귀비에게 빠진 현종은
안녹산의 난을 당해 실각하고 국력은 약화되기 시작했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지만 과거에는 급제하지는 못했다. 20대 전반은 강소절강에서, 후반부터 30대 중반까지는
하남산동에서 방랑생활을 하고, 이백고적과 친교를 맺었다. 35세 때 장안으로 가서 현종에게 부를 바쳤으나 관직에 오를 기회를
잡지 못해 궁핍하고 불우한 생활을 계속했다. 이 시기에 (병사의 노래) (미인의 노래) (서울에서 봉선현으로 갈 적의 영회, 5백자)등
사실주의적 시가작품을 창작하기 시작했다.
44세 때 안녹산의 난을 만나 적군에게 잡혀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뒤쯤 탈출하여 새로 즉위한 숙종이 있던 장안 서쪽의 봉상으로 급히
달려가 그 공으로 좌습유지책을 받았다. 그러나 임관되자마자 곧 실각된 재상 방관의 죄를 변호하다 속종의 미움을 사서 휴직처분을 받았다.
이 시기에 (봄날에) (북녘으로 가면서) (관리에 대한 시 세 편(삼사:석호사, 신안사, 동관사)) (이별에 대한 시 세 편(삼별:신혼별, 수로별,
무가별)) 등을 썼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면서 사면되어 조정에 다시 출사했으나, 1년 뒤 화주 지방관으로 좌천된 뒤 다음해에 관직을
버리고 가족과 함께 감숙의 진주로 갔다. 진주에서도 겨우 4개월 머물다 다시 남쪽의 동곡으로 옮기고, 그해 말 사천의 성도에 정착했는데,
이때 나이 48세였다.
다음해 봄 청두 교회의 언저리에  완화초당 을 짓고 살았다. 지바군벌의 반란 때문에 동쪽 사천의 재주낭주 등에 잠시 피난한 적도
있으나, 전후 수년에 걸친 초당에서의 생활은 비교적 평화로웠고, 친구인 절도사 엄무의 지극한 천거로 공부원외랑이라는 관직을 얻기도
했다.  두공부 라고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이다.
54세에 귀향하기 위해 청두를 떠나 양자강을 따라 내려오면서 여러 곳을 전전한 뒤 양서와 동둔에서 관전을 비려 농원을 경영하기도 했다.
57세에 처음으로 양자강에 배를 띄워 3협을 따라가면서 2년 동안 호북호남 등의 물 위를 떠돌아다닌 후 59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쇠고기와 술에 의한 중독으로 죽었다는 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로 신빈성이 낮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동정호에서 숨졌다고도 한다.
이와 같이 두보는 유교사상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사회계급적 모순을 보고 그 해결책을 강구해보려고 탐구의 길을 걸으며 고뇌 속에서 한
평생을 보냈다.

  * 두보의 작품세계
두보 자신의 말에 의하면 이미 소년시절에 1천여 편의 시를 썼다고 하나, 오늘날까지 전해져오는 것은 30세 이후에 쓴 1400여 편의 시와
몇몇 산문뿐이다. 30세 이후의 시는 뚜렷한 시풍의 변화성장에 따라 4시기로 나뉜다.
제1기는 44세까지로, 이 시기의 두보는 외부세계로 눈을 돌려 대상의 충실한 묘사와 여러 가지 사회악의 고발에 충실했다.
제2기는 48세까지로, 이 시기에는 안녹산의 난 동안 겪었던 여러 가지 경험으로 종래의 외부세계로 향하던 눈길을 안으로 돌려 마음속의
우수를 노래함과 동시에 자신의 우수를 다른 사람들의 우수와 일치시켜 다루었다.
제3기는 54세까지 성도에 살던 시기로 또 한번의 전환을 이룬다. 이때 그의 시선은 자연이 인간에게 보여주는 선의로 향해진다.
제4기는 죽기 전인 59세까지의 시기로서 특히 양서와 둔동에 머문 2년 동안은 원숙의 경지에 이른 작품을 많이 썼다. (추홍팔수)
(영회고적5수) 등 칠언율시의 명작을 남겼다. 이 시기의 시세계는 많은 모순을 포함하면서도 영원히 지속한다는 새로운 철학을 확립한
진지함과 따스함이 있다.

두보의 시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인간에 대한 깊은 성실성이다. 인간은 인간에 대해 성실해야만 된다는 중국문학 정신은 두보의
시속에서도 아주 활발히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성실이 만들어낸 우수를 근간으로 일상생활에서 많은 제재를 취해 인간의 생활상과 심리,
자연풍경 속에서 그때까지 다른 시인이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감동을 널리 발굴하여 자유자재로 읊었으며 표현에 정성을 기울였다.
(서울에서 봉선현으로 달 적의 영회, 5백자) (북녘으로 가면서(북정))의 2대 걸작을 포함한 장편 고체는 주로 사회성을 발휘해 시로 쓴
역사라는 의미에서  시사 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단시가 정형인 금체에서는 특히 율시를 잘 지어, 엄격한 형식 속에서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어 이 시의 완성자로 평가된다. 6조, 당초기의 시가 정신을 상실한 장식으로 떨어지고 고대의 시가 지나치게 소박한 데 비해
두보는 고대의 순수한 정신을 되찾으면서도 그것은 성숙한 기교로 표현해 중국 시사상 한 획을 그었다.

  * 주요 작품내용
두보가 산 시대는 안녹산의 난(755)을 중심으로 당나라가 번영에서 쇠망으로 향하던 시기이며, 두보의 생애 역시 고난에 찬 것이었다.
그러나 두보 시의 주제는 그 괴로운 인생 속에서도 그것을 참아내는 의지와 성실을 추구하는 데 있다. 두보의 시와 같이 우수를
노래하면서도 전대의 시처럼 절망에 빠지는 일 없이 읽는 사람의 영혼을 깨끗이 씻어주며 고무하는 힘을 가진 것도 그와 같은 두보의
적극적인 인생관과 도덕적이 태도 때문이다.
그의 용어에는 독특한 구성법이 있으며 장중한 언어로 민중의 고뇌를 호소한 힘은 비할 데가 없다. 특히 자유운율의 5언7언의 고시에
있어 생생한 묘사로써 시대의 고통과 민중의 고뇌를 여실하게 노래한 것이 많으며 후세의 비평가들이  시사 라 불러 높이 평가했다.
대표작으로 (병사의 노래) (미인의 노래) (서울에서 봉선현으로 갈 적의 영회, 5백자) (북녘으로 가면서) (애강두) (애왕손) (석호의 관리)
(신혼부부의 이별) (초당) 등이 있다. 이 가운데서도 고금의 걸작으로 알려진 것은 (서울에서 봉선현으로 갈 적의 영회, 5백자) (북정)이다.
전자는 안녹산의 반란이 일어나기 직전 장안에서 봉선현에 있는 가족을 만나기 위해 돌아가는 도중에 여산을 지날 때, 현종이 귀비들과
대신들을 거느리고 산에 있는 화청궁에서 주연을 베풀며 춤추고 노래부르며 태평스럽게 세월을 보내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순간 두보의
뇌리에 고통 속에 나날을 살아가는 민중들의 고달픈 삶이 교차되어 지나갔다. 장안 사거리에 굶고 얼어죽은 시체를 떠올리면서 지배계급들의
방탕함을 준열히 지적하고 있다.

  봉선현으로 가면서
더운 김 무럭무럭 피는 온천에 / 금군들의 창검이 절겅거리네
임금 신하 여기 와서 즐겨 노는데 / 풍악소리 하늘 가에 울려퍼지네
온천욕은 고관께만 하사하셨고 / 연회에는 서민이 하나도 없네
중당에선 신선들이 춤을 추는가 / 향연기 피는 속에 미인이 보이네
손님들은 돈피가죽옷 따뜻히 입고 / 피리와 거문고 소리 흥겹게 듣네
손님에겐 낙타족탕 드시라 권하고 / 쟁반에 유자 향귤 쌓여 있구나
궁궐에서 나눠주는 그 비단필은 / 가난한 여인들이 짠 것이건만
그 집 남편 붙잡아다 곤장치며 / 긁어모아 대궐에 바치라 하네
부자집엔 술 고기 썩어나는데 / 길가에는 얼어죽은 시체 널렸네
부귀귀천 지척 두고 판이하거니 / 너무나 슬픈 이 마음을 더 쓸수 없어라

두보는 이와 같이 노동인민들이 생산한 물질재부가 봉건 통치배들을 먹여 살린다고 보았다. 봉건사회에 엄연히 존재하고 있는 계급모순과
대립을 이처럼 신랄하게 폭로한 그는 전란과 봉건적 수탈로 말미암아 생활을 영위해나갈 수 없는 노동인민에 대해 깊은 동정을 표시했다.
그들을 구제할 수 없어 눈물을 흘리는 시인의 모습은 읽는 이의 심금을 울려준다.
(북정)은 난이 일어나 임시로 설치한 숙종의 처소가 있는 봉상에서 고향의 처자에게로 귀성했을 때 쓴 작품이다. 장중한 말로 여행의 목적을
말하고, 경쾌한 표현으로 도중의 광경을 서술하는 한편, 진정이 넘치는 말로써 처자와의 재회를 그리는 한편 다양한 언어로 시국을 논하는
700여 자에 달하는 웅편이다.
그의 작품 중 (관리에 대한 시 세편(삼사:석호사, 신안사, 동관사)) (이별에 대한 시 세 편(삼별:신혼별, 수로별, 무가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수작이다. 이들 작품에서는 잔악하고 암흑같은 병역제도에 대해 비판, 풍자했을 뿐만 아니라, 모든 고통을 이겨나가면서 나라를 위하는
노동인민들의 애국주의 정신을 열렬히 노래했다. 그는 (석호의 관리)에서 세 아들을 전쟁터에 보내고 두 아들은 이미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어머니가 횡포무도한 관리에게 끌려 병역에 나가는 처참한 광경을 묘사했다.

  석호의 관리
저녁녘에 석호촌에 머물렀더니 / 벼슬아치 밤을 타서 사람 붙잡네
아범은 담 넘어 도망가고 / 할멈은 문을 열고 내다보누나
벼슬아치 고함소리 몹시 사납고 / 할멈의 흐느낌 가슴 아파라
앞에 나선 할멈의 하소연 소리 /  아들 셋 업성에 수자리갔소
한 아들이 편지에서 전해온 소식 / 두 아들은 근자에 전사했다오
산 사람 이럭저럭 살아가지만 / 죽은 이는 못 올 길을 영영 떠났소
집안에 병역나갈 사람이 없고 / 젖먹는 손자애가 있을 뿐이오
손자 있어 며늘아기 갈 수 없지만 / 나들이 치마 한벌 없는 신세요
이내 몸 늙어서 원기 약하나 / 나리님 따라가 밤새워 가면
하양의 싸움터에 가닿게 되고 / 병사들 아침밥을 지을 수 있소
밤깊어 말소리 끊어졌으나 / 흐느낌 소리 귓가에 들려오는 듯
날밝아 노정에 발길 옮길 때 / 홀로 남은 어멈과 작별했다네

두보는 이와 같은 장편 고시 외에도 짧은 5언7언율시에도 장기가 있었다. 한정된 숫자와 엄격한 규칙 속에서 다른 어떤 시인도 흉내낼
수 없는 내용을 담았으며, 종래의 상투적인 반복에 불과했던 대구표현을 유기적인 대비 혹은 결합으로 일변시켜서 처음으로 이 시형에다
높은 예술성을 부여했다. 그 역량에는 놀라움이 앞선다. 대표작으로는 (진주잡시20수) (영회고적5수) (춘여8수) 등의 연작을 비롯,
(달밤(월야)) (봄밤에 내리는 단비(춘야춘우)) (누각에 올라(등고)) (악양루에 올라) 등 일일이 꼽을 수 없을 만큼 많다.
또 가장 짧은 시형인 5언7언 절구에도 140수 정도의 시를 남기고 있는데, 그중에서도 (절구만홍9수) (강남에서 이구년을 만나다)와
같이 널리 애송되는 작품들이 많다.

  * 이백과 두보
일반적으로 중국문학사를 논할 때 한대의 부(산문), 남북조의 운문, 당의 시, 송의 사, 원의 곡(잡극), 명의 백화소설(구어체 소설)을
시대적 특징으로 꼽는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당 시대에는 현종의 개원천보시대(712--755)에 해당하는데, 문화의 전성기와 맞물려 황금시대를 이룩했다.
시성 두보와 시선 이백왕유맹호연 등이 뛰어났다. 특히 두 사람의 작품에는 그들이 함께 살았던 동시대의 아픔이 있다. 이백이
타고난 자유분방함과 아름다움에 대한 뛰어난 감각으로 인간의 기쁨을 노래했다면, 두보는 인간의 고뇌에 깊이 침잠하여 시대적 아픔을 깊은
울림으로 노래했다.
두보가 이백을  한 말 술을 마시면 곧 백 편의 시(주일두 시백편) 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이백은 즉흥적이고 천재적인, 그러면서도 인생과
자연의 불가사의를 즐겁게 노래하는  도가적  경향의 시인이었던 데 반해, 두보는  티끌만한 유감도 날릴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하기 전에는
작품에서 손을 떼지 않는 엄정함을 지닌  유가적  경향의 시인이었다.
 달과 술과 노래 로 지칭되는 이백의 삶은 사람들에게 그가 받아온 사랑만큼이나 많은 일화와 전설을 남겼다. 물 속에 비친 달을 건지려다
익사했다는 그의 사망에 대한 전설을 그의 이러한 삶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비해 두보는 조국의 웅대한 자연을 배경으로 한 그의 사실주의적 시각에서 전략에 시달리는 조국과 민중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표현하고 있어서 탁월한 시어와 절제된 감정과 사색의 깊이와 함께 중국인들에게 널리 사랑받아왔다.
이백은 구비문학과 굴원장자도연명 등에 의해 넓혀져온 낭만주의의 흐름을 급격히 고조시켜 낭만주의의 전통을 확힙했고,
두보는 시경과 악부민요의 사실주의적 전통을 확장하여 사실주의 경지를 개척함으로써 후세 사람들에게 당나라를 중국시문학의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 문학사적 위치
두보는 그의 시 가운데서  천추만세의 이름은 죽은 다음의 일 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시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은 당나라 중기의
시인들인데, 한유는  두보에 문장이 있으니 광염이 만장이나 길으리 라 했고, 원진은  시인이 있어온 이래 아직 두보와 같은 이는 없어라 고
말했다.
백거이는 두보의 시가 가진 사회성을 의식적으로 발전시켜 현실비판적인 시를 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보의 시가 중국최고의 시로서
평가받는 것은 11세기 북송의 시인인 왕안석소식 등이 칭찬을 한 데서 비롯된다. 왕안석은 말하기를  내가 예전의 시를 생각해볼 때
두보의 시를 가장 사랑한다 고 했고 소식은  고금에 시인은 많으나 두보를 앞설 사람은 없다 고 말하며 두보의 시를 적극 배우기에 힘썼다고
한다. 두보를  시성 이라고 일컬은 것도 이 시기로 보인다.
이후 송, 원, 명, 청을 거쳐 중화민국 초년(1917)의 문화혁명에 이르기까지 그의 시는 중국의 완전한 시의 전형으로  조술 (성인의 설을
본받아 씀) 되어왔다. 문화 혁명에 이르러 그의 시의 직접적인 조술도 뜸했으나 오늘날에는 다시 부활되었다. 사실주의 시가발전사에서
두보는 매우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시경)과 (악부민요)의 사실주의적 문학전통은 후기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조조왕찬진림조식 등 건안시기(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시대로 중국문학사상 황금기였음) 작가들은 그 전통을 계승하여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는 시들을 썼다. 그러나 위진남북조, 특히 진조와 남북조 시기의 송조에 이르러 진부한 시풍이 범람하기 시작하여 소위
도술을 깨치는 현언시와 궁정체시까지 뛰쳐나와 시단을 어지럽혔다.
당대에 들어와서 비록 진자앙이 당시 시풍을 일소하고 건안시기의 꿋꿋한 풍격을 내세웠지만 창작 실천이 따르지 못했다. 그후 고적이
현실을 반영한 시들을 썼지만 그 수가 많지 않으며, 이백도 사실주의적인 시편을 썼으나 그의 주요한 성과는 낭만주의였다. 두보만이 시가
백성의 질고를 알려주어야 한다 고 주장하면서 (시경)과 (악부민요)의 사실주의적 전통을 계승, 발전시켜 그 시대의 전란과 암흑스런 통치
및 인민의 질고를 반영했다. 이렇게 하여 두보는 중국 사실주의적 시가창작의 전통을 성숙된 발전단계로 이끌어올렸는데, 시가창작이
사회변모를 반영하는 역할을 하게 했고 인민의 생활에 얼굴을 돌리도록 만들었다.
두보는 시가 형태 면에서도 기여가 크다. 그는 앞선 시기 작가들이 창조한 모든 시 형태를 능숙하게 파악하여 시가체제의 영역을 확대했다.
그는 시형식을 빌어 유람기도 썼고 서정도 토로했으며, 전기와 우화도 함께 썼다. 심지어 문예평론,시사상주문편지까지
시로 쓰는 등 시가형태의 여러가지 기능을 충분히 활용했다. 또한 그는 자기의 예술적 실천으로 율시의 형상수준을 높였는데, 율시를 보다
정연하고 함축성이 있으며 세련되고 음악적 율조가 선명한 정형시가 되게 했다. 두보의 애국주의적 사상은 후기 작가들과 애국지사들에게
사악한 세력과 침략자에 반대하여 용감하게 투쟁하도록 고무해주었다. 예를 들면 문천상과 육유는 모두 송대의 정치가이며 문인들로서
두보의 애국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북송의 민족영웅 종택은 임종 때에 두보가 쓴 (촉상(촉한의 재상))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니 영웅의 옷자락 눈물에 흠뻑 젖네 라는 시구를 읊었다. 한마디로 평가하여 중국에서 문화혁명 이후 직접적인 조술은 사라졌으나
중국최고의 시인으로서의 위치는 문화대혁명 한 시기를 제외하고는 오늘날의 중국에서도 확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