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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메론

(데카메론)(Decameron)
    작가: 보카치오(G. Boccacio, 1313--1375)
 단테의 (신곡)에 비해 (인곡)으로 불리어지는 작품. 이탈리아의 플로렌스에 흑사병이 돌자 이를 피해 10명의 남녀가 교외의 별장에서
머물면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하루 1인당 1편씩 열흘간 이야기한 것을 기록한 (데카메론)은 영적인 것에 초점을 맞추는 중세적 시각과는
달리 보통사람의 육체적 욕망을 제재로 하고 있다. 거의 모든 장르를 망라하는 100편의 이야기는 외설과 교훈, 풍자와 관용, 로맨스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를 교차하면서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전환하는 시기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단테, 페트라르카와 함께 3대 인문주의자 보카치오는 서정시, 서사시장편소설단편소설 등 다방면에 재능을 발휘했다. 단테의
(신곡)에 비해 (인곡)이라 불리는 (데카메론)의 저자 보카치오는 1313년에 이탈리아 피렌체 근처 체르탈도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을
어머니와 함께 파리에서 보내다가 어머니가 죽자 아버지가 있던 피렌체에 가서 살았다는 설이 있다.
1321년에 단테가 죽었을 때 보카치오는 8세였으며 가정교사로부터 읽가와 쓰기를 배웠다. 이 교사가 열렬한 단테 숭배자였으므로 어릴
때부터 말년에 피렌체 시의 요청으로 (신곡)을 강의하게 되었을 때까지 중세 최대의 문학자는 단테였다. 보카치오는 남달리 총명하여 어릴
때부터 시를 지었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자기 직업을 잇게 하기 위해 보카치오가 12세가 되자 상업술을 가르칠 목적으로 나폴리로
보냈다. 문화의 중심지인 나폴리에서 보카치오는 정서적 생활에 반해 상업술 공부를 포기하고 문학 공부에만 전념했다. 1333년의 부활제
전야, 그는 나폴리의 로베르토 왕의 딸인 미모의 마리아를 만났다. 첫눈에 마리아를 사랑하게 된 그는 일생을 통해 그녀를 잊지 못했다.
그는 작품 속에서 늘 피아메타라는 이름으로 마리아를 그리워하고 찬양했다.
1350년 부친이 세상을 떠난 후, 그는 피렌체 공화정으로부터 극진한 대우를 받아 중요한 외교관 직책을 맡기도 했다. 이때 그는 로마 교황을
비롯하여 여러 나라의 황제와 황후 등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동안에 그가 얻은 가장 큰수확은 인문주의의 창시자인 페트라르카와
친교를 맺게 되었다는 점이다.
(데카메론)은 1348년에서 1353년에 걸쳐 집필되었다. 이 작품이 발표되자 문단의 반응은 냉담했으나 민중으로부터는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 작품은 곧 외국에까지 퍼졌고, 거리의 변사들까지도 이 이야기를 늘어놓을 정도였다. 인쇄술도 없고 종이도 귀한 시대에
설화형식의 단편소설이 퍼진 것이었다.
1348년 피렌체에서 괴질 페스트가 만연하여 수만 명의 시민이 죽어갔으며, 부유층은 말할 것도 없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다른 곳으로
피신해야 할 형편이었다. 환자와 미처 피신하지 못한 빈곤한 사람들 이외에는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보카치오 또한
그때 아버지를 잃었으나, 그 자신은 나폴리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재난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는 평생 잊혀지지 않을 그 참담한 광경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구성하게 되었다.
교외의 화려한 별장으로 피난 가 10일 동안 계속 매일 열 명의 남녀가 주고받는 이야기를 꾸며 (데카메론)을 쓴 것이다. 이 소설을  10일
이야기 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작품은 근대적인 리얼리즘의 산문정신으로 그려진 최초의 작품으로 일컬어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미사여구를 찾아볼 수 없으며, 대체로
문장표현이 거친 편이다. 이야기에 때때로 나오는 외설적인 면을 지나치게 강조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인간생활을 솔직히 묘사하다 보니
자연히 나오게 된 것뿐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데카메론)에 나오는 100편의 이야기는, 인간생활에서 일어나는 우스운 이야기로부터 도덕적인 훈화, 타락하고 부패한 교회의 수도자들에
대한 풍자, 그리고 사랑의 기쁨과 슬픔 등 아주 다채롭다.
1370년 보카치오는 교화인 체르탈도에 돌아와 머무르다가, 1373년에 피렌테 영주의 부탁으로 성 스테파노 디 바디아 성당에서 단테의
(신곡)을 상의했다. 그것은 보카치오가 소년 단테의 위대성에 대해 강력한 인상을 받았으며, 평생토록단테를 존경했음을 증명한 일이었다.
보카치오는 몇달 후 병 때문에 체르탈도에 돌아와 있다가 1375년 12월에 숨을 거두었다.
  * 작품의 주요내용
1948년경 페스트가 피렌체를 휩쓸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게 되었고, 따라서 꽃의 도시라 불리던 피렌체는 페허가 되어갔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도시를 버리고 피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황량하게 시체만 뒹구는 도시의 어느 성당 안에서는 7명의 귀부인이 모여 살아갈
궁리를 모색하던 끝에 피난을 가기로 한다. 그런데 여자들만이 가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아 남자들을 같이 데려가자고 의견을 모으고, 이들이
토의하던 도중에 세 명의 잘생긴 청년이 성당을 찾아오게 된다. 여자들에게 설명을 들은 청년들이 찬성을 하고, 이리하여 열 명의 남녀는
교외에 있는 피에졸 언덕의 별장으로 가게 된다.
별장에 도착한 그들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 것인가를 궁리하다가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이야기를 하자고 제안한다. 그들은 2주 동안
머무르게 되는데, 그리스도의 수나날인 금요일과 토요일은 쉬시로 했기 때문에 총 백 편의 이야기를 서로가 하게 된다. 또 그들은 이야기를
하고 난 후에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게 되는데, 이때 부르는 발라드가 매일 한 편씩 총 열 곡이 된다.
한 사람씩 번갈아하며 하는 이야기는 변화가 풍부하고 그 무대에고 유럽 각지에서 동방에까지 걸쳐 있으며, 인물이나 성격기질 따위도
최하층에서 최상층에 이르는 다양함을 보이고 있다. 또 이야기의 내용도 우스운 이야기, 비련 이아기, 잔혹한 이야기, 꾀를 써서 남을
속이는 이야기, 비련 이야기, 잔혹한 이야기, 꾀를 써서 남을 속이는 이야기 등 기발한 줄거리와 기상천외한 장면이 교차되고, 아이러니와
풍자, 간지러운 선정적인 무드를 풍기면서 진행된다. 그 속에는 중세의 교훈적인 내용이 아니고 인생을 즐기려는 애욕의 기쁨이 대담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그 밑바닥에는 봉건적인 세력에 대한 신흥 부르주아 서민계층의 쌓이고 쌓인 울분이 깔려 있고 그것이 너털웃음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이 이야기들 중에서 양적으로 가장 많은 것은 섹스의 해방과 기쁨, 성직자의 모순과 부패에 대한 조소, 낡은 지배계급에 대한 서민의 평등한
감정이다. 여기에 나타난 여성의 매력은 그때까지 천상적인 플라토닉한 베일을 벗겨버리고 육욕과 직결되는 매력일 뿐 아니라, 간통조차
인간의 자연스러운 성정으로 시인되고 있다. 사랑의 모험이나 테크닉, 소위 색정 이야기는 이 책의 이름을 높게 만든 특색이기도 하다.
또 신의 권위로 서민에겐 금욕과 인내를 강요하면서도 성직의 특권으로 현세적인 인간의 욕망에 도취되어 있던 교회나 신부의 타락과
기만성이 비웃음거리로 통렬히 폭로되어 있다. 이것은 이윽고 하나님의 최후의 심판까지도 의심하는 부르주아의 허무적인 의식이 현실적으로
죽음이란 보편적인 사실과 대치된다.여기서는 제왕이나 교황도 똑같은 육체를 가진 인간이란 합리적인 해석이 나온다.
그러므로 마부가 왕비를 범하는 논리도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상인적인 실리주의로부터 인간의 가치란 벼슬이 아닌 재능이므로 합리적인
두뇌가 존중된다. 선량한 우둔함보다 스마트한 잔꾀가 모럴로서 인정되고 속는 자보다 속이는 자가 갈채를 받는다.
이 책은 당시에도 너무 음란하다는 비난이 있었는데, 그 말에 대해 작가는  세상의 부인들이 좀더 도덕적인 화제를 가지고 있었다면 나도
좀더 도덕적인 것을 썼을 것이다 라고 응수했다. 이말로 미루어 보면 이 책이 애로틱한 사랑의 모험이나 음란한 이야기로 메워져 있는
까닭도 수긍이 간다.

  *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데카메론)은 토막 이야기가 형식을 취해 10일 100회의 기상 천외한 단편 이야기들을 엮어냄으로써 초서나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후세의
유럽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세계문학사상 이처럼 모방변형표절을 당한 작품은 없다. 존스의 말에 의하면 각국에서 100여
종의 유사작품이 나왔다고 한다.
(데카메론)은 작품 속에 넘치는 통렬한 성직자 비판정신으로 말미암아 보카치오의 가치관이  인간의 사랑 에 두어져 있음을 나타냄으로써
똑같이 격렬한 교황권력 비판을  하느님의 사랑 에 기준을 두면서 전개한 단테의 (신곡)(신성한 비극)에 비해 종종 (인곡)(인간의
희극)이라고 일컬어진다.
한때 이 작품이 카톨릭 윤리에 어긋난다 하여 소외된 적이 있으나 소위 사실주의 문학관이 대두됨에 따라 다시 살아난 것이다. 이 작품은
10일 동안에 전개되는 열 편의 발라드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세분화된 이야기가 독립된 작품들로 구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일정한 규격
속에서 질서정연하게 개성을 지니고 있으며, 연관된 사회적 현실의 바탕은 엄연히 한 작품으로 존립함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에 나오는 수많은 이야기는 완전한 의미에서 문학적인 창작이 아니라, 그 당시 떠돌던 이야기와 보카치오 자신이 이전에 써놓았던
소설들의 집합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무작위로 모은 이야기가 질서를 지키고 있음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이것은 작가의 정신에서
우러나온 예술론에 입각한 통일성과 인간의 지성이 표현할 수 있는 한계성을 초월한 인상을 주는 조건이 되고 있다.
또한 이 작품은 고발정신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그의 작품을 사실주의적 관점에서 파악하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는 신랄한
풍자를 통해 당시의 사회상을 고발하고 있으며, 또 이를 개선하고자 하는 의지를 뚜렷이 읽을 수가 있기에 더욱 더 새로운 오늘날에도
평가되고 있는 것이다.
보카치오가 고대문학과 고대역사의 보존을 위해서 많은 기여를 했다는 점 역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때가지 신부나 수도자의 손에만
독차지되었던 고대작품들은 자칫하면 그 보존조차 걱정되는 상태에 있었다. 보카치오는 각 수도원을 찾아다니며 이것을 손수 베껴 후세의
학자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또 라틴 어를 통하지 않고 직접 호메로스 등의 고전문헌을 해독하려 한 점에서 페트라르카에 못지않은 최대의 인문주의자이기도 하다.
이처럼 이 책은 근대적인 리얼리즘의 산문으로 씌어진 최초의 작품으로 이런 점에서 중세와 인연을 끊은 근대의 인간적인 자각을 연
여명이라 평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