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유악(1857-1909)
20회본 장회체 장편소설로, 노잔 이라는, 떠돌이 의사가 청대말에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견문한 것을 기록한 형식의 소설이다. 주인공은 각
지방의 탐관오리들의 악정을 폭로. 고발하였을 뿐만 아니라, 청렴을 표방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관리들의 학정이 탐관오리들에 못지않은
사회혼란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고발하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청말, 풍전등화격인 조국의 현실을 개타하고 국가와 민족을 위한 작가의
통곡이라 할 수 있다.
생애와 작품활동
유악은 강소성 의미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맹웅이고, 자는 철운이다. 선조는 무관이었으나, 부친은 독서인으로 진사에 급제하여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부친은 차남인 유악이 독서인으로 성장하여 관리가 되기를 원했으나, 그는 소년시절에 불량소년들과
어울려 공부를 하지 않고 부모에게 걱정을 끼쳤다고, 소년시절의 친구인 나진옥은 유철운전 에서 술회하고 있다.
그러나 청년이 되면서 그는 대오각성하여 책에 파묻혔다. 20세 되던 해에 남경에서 향시에 응시했으나 낙방했다. 광서제 6년(1880)에는
태주학파(양명학의 좌파인 왕간 중심학파)에 심취하여, 양주에 가서 당시 양주학파의 거장인 이용천에게 사사하니, 그의 사상적 체계는 이
무렵에 성립되었다고 한다. 1885년에는 다시 과거에 응시코자 남경으로 가던 중 생각을 바꾸어 고향으로 돌아왔고, 이후 과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다시는 응시하지 않았다 한다.
광서제 14년(1888)에 하남성 정현에 큰 수재가 났을 때, 당시 하남순무이던 오대징을 도와 치수에 큰 공을 세웠고, 이듬해에 산동일내의
대수재시에는 산동순무이던 장요의 초빙으로 치수에 참가하여 성공하였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치수의 경험을 토대로 치하칠략
황하변천도 등의 저술을 남기기도 했다.
그후 그는 중국에서 산업진흥의 첩경은 철도의 부설과 부존자원의 개발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노한철도와 진진철도의 부설 및 산서탄광의
개발을 정부요로에 건의했으나 반대파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도리어 서양인의 자본을 들여오려 했다가 서양인의 앞잡이 매국노
라 하여 지탄을 받았다.
광서제 27년(1901), 청을 도와 서양타도를 외친 반기독교집단의 봉기인 의화단 사건 때, 난군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연합군이 북경에
진주하자, 그는 러시아 군이 태창을 경비하다가 태창이 방해가 되어 소각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들을 찾아가 교섭 끝에 양곡을 싸게
구입하여서 난민들에게 배급, 구휼에 힘썼다. 다시 상해에 나가서는 양무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반대파에 의해 태창의 정부양곡을
사사로이 매입했다는 죄명으로 체포되어 유배되었다가 죽었다.
그는 대단히 진보적인 인물이었으나, 혁명을 원치는 않았다. 따라서 남방에서 봉기하여 멸청흥한의 기치를 들고 의화단을 옹호하던 서태후
일파인 보수파도 싫어했다. 그는 스스로 보수적 유신파로 자처했고, 그렇게 행동했다. 즉, 어둡고 부패한 관리들은 견책했으나, 봉건독재를
수호했으며 농민들의 반제투쟁은 반대했다. 평생 그는 꽤 다양한 직업을 가졌다. 그가 펴낸 철운장구 는 최초의 갑골문 서적으로 갑골문
연구에도 공헌 바 크다.
시대적 배경과 견책소설
시대적 배경
무술개혁(1898)으로부터 신해혁명(1911)사이, 대략 1900-1910년 사이에 중국소설사에는 새로운 발전적인 국면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개량주의적인 정치요구를 반영하고, 사회의 암흑면 관계의 부패상 제국주의 침략자들의 만행을 견책하는 견책소설 이 대량으로
창작되었다. 이러한 원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중일전쟁 후 제국주의의 침략은 갈수록 더 엄중해지고 있었으나, 국가와 민족의
위기를 부패한 청조에 맡기지 않고, 스스로 나라가 약해진 원인을 찾고, 나라를 부강케 할 방도를 찾게 되었다.
당시 지식인을 대표하는 강유위. 양계초, 담사동 등과 이들의 영향을 받은 봉건사대부들은, 개량주의적 정치운동을 일으킴으로써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 하고 있었다. 소설계의 혁명은 바로 이러한 전체 개혁운동의 한 부분으로, 시대적 요청이었던 것이다. 유악이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광치제 29년(1903) 의화단사건이 끝난 2년 후가 되며, 일본과 영국이 중국과 한국을 침탈하려고 영. 일동맹(1902)을 체결한
다음 해가 된다. 청의 운명이 열강제국에 의해 풍전등화격이던 시기에 해당한다.
그 스스로가 서문에서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개인. 국가. 민족. 종교 등에 대하여 여러 가지 느낌을 가지고 있다. 그 감정이
깊으면 깊을수록 울음도 더욱 통렬하다 고 말한 바와 같이 이 소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한 통곡이라 할 수 있다.
견책 소설
노신은 중국소설사략 에서 소설을 분류함에 있어 견책소설(censure novel)이라는 새로운 분야를 만들고는 종전에는 이런 종류를
풍자소설의 범주에 포함시켰으나, 청말의 일부 소설은 풍자라고 하기에는 숨겨진 것을 파헤쳐 폐악을 폭로하고 시정을 규탄함에 있어, 그
언사가 지나치게 날카로워 풍자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가 없다 고 했다. 그중에서 이보가의 관장현형기 , 오옥요의 20년 동안에 본 기괴한
현상들 , 증박의 얼해와 를 노잔유기 와 함께 청말의 4대 견책소설이라 했다.
청말의 소설은 대부분 정치에 대한 견책, 정계 내부의 폭로라는 경향을 지녔는데, 이는 1902년 양계초가 제창한 소설계 혁명 이론에
동조한 것으로, 정치개혁을 목적으로 하는 소설이 많이 나왔다. 이러한 소설들은 현실의 부패를 폭로하며 정치적 책임을 추궁하고 있는데,
예술성은 다소 미흡하며 저널리스트의 폭로기사와 유사한 면이 있다. 그 직접적인 계보는 오경재의 유림외사 에서 찾을 수 있으나,
풍자성은 사라졌다.
작품의 주요내용
노잔유기 는 유악이 쓴 유일한 소설이자, 자전적 소설이다. 내용은 몰락한 관리의 아들인 노잔이라는 주인공이 각지를 편력하면서 당시의
정치상과 사회상을 듣고 보며 폭로, 비판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장회소설로 본편 20회와 속집 6회 등 모두 26회 본으로 내용은 크게 셋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소설의 서론부분으로, 꿈의 형식을 빌어 당시의 중국에 대한 자기의 총체적인 견해를 썼다. 떠돌이 의사 노잔은 산동의 천숭이라는
고을을 지나다가, 매년 여름이면 온몸에 종기가 나서 고생하는 산동의 부호 황서화를 만난다. 황은 거금을 뿌려 백방으로 고명한 의사와
귀한 약을 구해 썼으나 효험이 없었는데, 노잔이 이를 치료하여준다. 이로 인해 며칠 동안 그 댁에 머문다. 하루는 친구 두 사람과 함께
바닷가에 일출구경을 갔다가, 북방과 동방에서 검은 구름과 함께 폭풍이 몰려오는데 한 척의 커다란 배가 표류하다가 이 폭풍을 만나
침몰직전에 놓인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북방과 동방의 검은 구름은 러시아와 일본을 가리키는 것이며 거대한 배는 중국을 비유한 것이다.
그런데 침몰직전의 배 안에는 4가지 종류의 사람이 타고 있었는데, #1선장과 키잡이 #2승객들을 약탈하는 하급선원 #3혼란한 배 위에서
연설하는 사람들 #4승객들이다.
첫째 집단은 상층 통치집단인데, 이런 혼란의 원인을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고, 다만 그들은 태평양에서 태평한 나날을 보내다가
갑작스런 폭풍에 당황할 뿐이라는 것이다. 즉, 청말의 위기상황에 대해 지배계급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정도의 책임만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 유형은 나라 상황은 돌보지 않고 못된 짓을 하는 하급관리들인데, 작가는 이들에게 불만을 품고 이들을 주로 견책하였다.
셋째 유형은 손중산을 대표로 하는 부르주아 계급 혁명파들을 지칭하며, 이들을 저는 돈 벌 궁리를 하면서 남은 피를 흘리게 하는 영웅
으로 몰아세웠다.
넷째 부류는 백성들인데, 작가는 그들 중 혁명에 찬성하는 사람을 철도 모르고 남에게 이용당하는 사람들로 보았다.
노잔은 이 배를 구하는 방법은 배를 모는 사람에게 가장 정확한 나침반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여겼다. 보다 못해 그 배를 구하려고 나침반과
6분의를 가지고 그 배에 가서 선장에게 주려고 했더니, 선원들과 선동자들은 그것이 서양 것이며, 그것을 받으면 서양인들에게 팔려가게
된다면서 노잔을 매국노라고 욕하며 죽이려 한다. 그러자 배는 그만 산산조각이 나고 노잔도 함께 물에 빠진다. 문득 깨어보니 꿈이었다.
둘째, 노잔은 제남으로 발길을 돌려 중국의 아름다운 산천과 문물을 돌아보고 극장에서 중국의 훌륭한 노래를 감상한다. 여기서 잠시
천불산과 대명호에 관한 묘사를 보자.
가을날 이른 아침, 노잔은 역하정을 구경하려고 작화교 변에 와서 쪽배를 얻어타고 노를 저어 어느 사당 앞에 이르렀다.
철공사 앞에 이르러 눈을 들어 남쪽을 바라보니, 맞은 편에 천불산이 바라다 보였는데, 산 위에서는 절과 중들의 집이 창송취백들과 어깨를
다투며 서 있는데, 붉은 것은 타고 흰 것은 새하얗고 푸른 것은 남색으로 보이며, 녹색은 초록색으로 보였다. 그런 사이에 단풍이 드문드문
섞여 있었다. 마치 송대사람인 조천리의 큰 그림 한폭으로 수십리 긴 병풍을 둘러친 것 같았다. 찬탄을 마지않는데 홀연 어부의 노랫소리가
들려오기에 눈을 돌려 호수를 바라다보았다. 어느새 명호가 거울같이 맑아졌다. 천불산이 호수물 속에 거꾸로 비껴 있었다. 물속에 비친
누대와 수목이 유난히 빛나는데 호수 위에 서 있는 천불산보다 더 아름다워 보였고, 더 똑똑히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이렇듯 아름다운 강산에 천재가 일어난다. 그것은 재산과 인명을 송두리째 앗아가는 수재로 인간을 괴롭힌다. 생활이 곤궁하자
사방에 도적이 횡행하고, 관리들은 도적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된다.
중앙정부에서는 유능하고 청렴한 관리를 파견하여 도적을 잡고 백성을 위무케 한다. 그러나 이들 관리들은 청렴하다는 미명하에 도적과
내통한다는 혐의만 있으면, 죄가 있건 없건 무조건 잡아가 극형에 처한다. 이에 따라 백성들은 도적에게는 재물을 빼앗기고, 관리에게는
목숨을 빼앗기는 상황이 벌어진다.
작가는 16회 말에 이 소설의 주지를 이렇게 자평하고 있다.
탐관오리를 미워해야 함은 누구나 알고 잇다. 그러나 청렴한 관리가 더욱 밉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탐관오리는 그들
자신의 결점이 있기 때문에 공공연히 드러내놓고 나쁜 짓을 못하나, 청렴한 관리는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무엇이든 못한 짓이
없다고 생각하고는 자기 멋대로 일을 처리한다. 이런 것은 작으면 사람을 죽이나, 크면 나라까지 망치게 된다. 내 자신이 친히 본 것만도
수를 헤아릴 수 없다. 역대소설들은 모두가 탐관오리의 악을 썼을 뿐이며, 청렴한 관리의 악을 든 것은 노잔유기 가 첫번째다.
이것은 바로 이소설이 청관들의 실정을 나무라고 백성들이 어떻게 박해받는가를 폭로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셋째, 주인공 노잔은 막후에 숨고, 신자평이라는 선비가 도화산에 들어가 황룡자라는 도인과 어떤 처녀와 대화하는 부분이다. 그는
공맹사상이 송대의 유학자들에 의해 왜곡되었다고 통박하고는, 예언의 형식을 빌어 북거남혁 이라는 말로 중국의 미래를 예언하고 있다.
북거는 의화단 사건으로, 이 소설을 쓰기 전에 이미 종국을 고한 것이고, 남혁은 남방에서의 혁명을 일컫는 말이나, 당시에는 이미 손문
등이 활발하게 혁명하게 활동하고 있을 때였다.
감상 및 문학사적 의의
위에서 본 것처럼 노잔유기 는 견책소설로서 봉건사회의 모순과 관리들의 탐학. 비리. 폭종 등을 여실히 폭로. 고발하여 독자의 호응을
얻었다. 특히 그 자신이 평하였듯이, 청렴한 관리의 비행을 폭로한 착상은 매우 독특한 것으로, 소설로서 성공한 것이라 하겠다. 그것은
문학적인 묘사에서도 좋은 평을 받고 있다.
노잔유기 는 예술성에서도 어느 정도 성공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사물에 대한 묘사가 때때로 세밀하고 생동적이며, 선명한 색채를
띠고 있다. 예를 들면 백뉴의 아름답고 미묘한 노랫소리는 마치 그를 보면 그 소리를 듣는 듯한 감을 주도록 묘사되어 있으며, 도화산의
달밤, 얼어붙은 황하기슭의 눈과 달빛이 어울리는 경치, 특히 대명호와 더불어 천불산의 아름다운 경치는 독자들의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특히 제남의 풍물을 묘사한 부분과 극장에서 강창하는 부분의 묘사는 매우 뛰어난 문학적 표현으로도 인정받고 있다. 이 소설은
중국소설로는 드물게 풍물도 정교하게 묘사하고 있어, 호적은 노잔유기서 에서 이 부분을 가리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유악은 문학적
천재로 그의 문학적 견해는 초탈하다.
그러나 구성이 미흡한 면이 발견되는데, 예를 들면 백뉴가 노래하는 장면은 전후사건과 유기적인 연관이 부족하다. 그리고 작가는
작중인물인 황룡자의 입을 빌어, 의화단과 자산계급 혁명파들을 요괴라고 공격하였다. 의화단은 나라를 망칠 뻔한 두려운 물건 으로 볼
정도로 청왕조의 봉건통치를 유지하려 했다.
이런 점에서 노잔유기 에는 봉건사회의 본질과 제국주의의 침략야욕을 제대로 꿰뚫지 못다는 점에서 일정한 한계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