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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시간 수면이 만드는 발상의 전환

1. 유연한 머리가 발상 전환의 기본

    두뇌를 합리적으로 혹사시키는 것이 제 1보
  도대체 발상이란 무엇인가? 그 방면의 책을 보면 논리적인 면은 좌뇌가 작용하고, 종합적인 결론으로 정리해서 동작으로 나타내는 것은 우뇌가 작용한다. 아무튼 발상이란, 여러 형태로 좌우의 뇌가 얽혀서 작용한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수면이 이러한 뇌를 쉬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은 물론 사실이지만 나로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여러 가지로 신경을 피로케 하는 환경에 대응하게끔 종합적인 판단을 하고, 자율신경에 명령을 내리는 것도 또한 수면의 중요한 기능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만약 이런 대응이 무시된다면 결국 수행같은 것을 단지 생명을 단축시키는 작용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발상의 목적이 탐욕성에 있느냐 호신에 있느냐 하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그것이 어떤 형태로 자기 자신에 관계되는 사항에의 대응으로서 생겨나는 것만은 확실하다. 따라서 당연히 뇌의 작용에 의존하는 것도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뇌의 대응이 늦어지면 발상의 전환도 늦어진다. 뇌가 사보타아지하고 있으면 발상의 전환은 기대할 수가 없다.
  옛적에는 노인들 중에 남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의 의견만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최근에는 젊은층에도 많아지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에 있어서는 발상의 전환같은 것은 거의 기대할 수 없다.
  뇌를 합리적으로 혹사시킴으로써 전환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는데 뇌를 합리적으로 혹사시키는 방법은 아무래도 단시간 수면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단시간 수면을 수행이라고 하면서도 수도자의 수행이나 참선의 수행과는 이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수도자의 수행이나 참선이 몰아의 심경을 추구하고 아욕을 버리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면 단시간 수면은 자신을 인식하고 의식 속에 행동을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단지 공통점은 자신을 단련하고 안주에 머물지 않는 자신을 만들려 한다는 점이다.
  몇번씩 반복하는 이야기지만 단시간 수면의 이점은,
  1) 수마와 싸우는 의지의 강도가 양성된다.
  2) 신체의 회복이 가능하도록 자율신경이 충분한 활약을 하게 된다.
  3) 그 결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
  4) 수마와 싸우다 보면 당연히 작업량도 늘어나게 되고, 긴장시간도 길어지게 된다.
  5) 즉, 심, 신, 지 다같이 축적이 많아지기 때문에 환경에의 대응도 빨라지게 된다.
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5)야말로 발상과 직접 관계를 지닌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발상의 전환이란 실은 무의식 중에 생겨나는 환경변화에의 대응 이면 순응이다. 따라서 "밀어서 안되면 당겨 보라"는 사고방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나는 전환이라는 것이 의식적으로 될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많이 생각해 보았지만, 어쩐지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발상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는 것이리라.
  어떻든 뇌나 신경을 합리적으로 혹사시킴으로써 대응속도를 높일 수 있고 광범위한 대응을 요구할 수 있다면 역시 단시간 수면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오감과 자율신경을 민감하게 작용시켜라
  흔히 "머리가 딱딱하다"거나 융통성이 없는 "석두"라는 말을 많이 한다. 이것은 도대체 어떤 내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물론, 천성적이라는 뜻도 있겠지만 꼭 타고난 소질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 듯 싶다. 열성신자의 경우처럼 때로는 가치관의 변화에서 생겨나는 것도 있는 모양이다.
  인간은 오감을 통해서 주위의 변화를 깨닫는다. 이와 같은 정보는 몇 개의 경로를 거쳐 우뇌에 집합되어 좌뇌의 판단에 도움을 받으면서 상응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론이 각각의 정보에 대응한 것이면 "머리가 유연하다(잘 돌아간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 결론이 잠재관념에 좌우되거나 특정한 정보에 치우치고 있으면 "석두!"라는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결론이 각각의 정보에 충분히 대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반드시 연령만의 문제는 아니다. 예를 들어,
  옛날의 사관학교처럼 어떤 사고 방식으로 고정화되도록 훈련을 받으면 반사적으로 훈련된 것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게 된다.
  지식이 부족하면 이해할 수 있는 정보만을 택하고, 그 안에서 결론을 이끌어 내게 된다.
  예를 들어, 계산같은 것이 포함되면 계산에 걸리는 시간이 길어지거나 또는 계산이 틀리게 되면 결과적으로 편파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게 된다.
  "이래 주었으면"하는 바람이 잠재하면 아무래도 치우친 결론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각각의 정보 정리에 시간이 걸리면 내리기까지 시간이 걸리고, 이른바 "피의 순환이 늦어진다"고 하며, 재촉에 대응하지 못해 그릇된 결론을 꼬집어낼 적도 있다.
하는 예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약에 유연한 머리의 수지자가 되고 싶으면 이런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상의 점을 유의하면서, 오감이 민감하게 작용해 줄 수 있도록 유지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물론, 음악가처럼 훈련에 의해서 실현하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 전에 더욱 보편성이 있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즉, 오감도 자율신경도 항상 긴장시켜 두는 것이다.
  그러자면 검소, 필요최소한 양의 식사법을 지키고, 언제나 다소 공복의 상태가 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또 엷은 옷을 입는 것도 효과가 있음을 더 말할나위 없다. 4시간 수면을 실천하면 약간만 긴장이 풀려도 수마가 엄습하게 되므로 깨어있는 20시간 동안은 긴장을 한시도 늦출 수가 없다. 그리고 지속적인 긴장을 위해서는 공복이나 엷은 옷 등이 매우 유효한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폭넓은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고 운용한다.
  항상 지식을 축적하고 축적한 지식은 기회 있을 때 마다 재이용하며, 언제라도 주저없이 운용할 수 있도록 해 둘 필요가 있다.
  지식이란 독서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지식이 풍부한 사람으로부터의 가르침을 받아 얻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지식이든 운용되지 않는 지식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지식이라는 것은 운용할 때만이 비로소 그 가치가 생겨나고, 평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가장 알기 쉬운 예로, 바둑의 정석에 대해서 말해 보자. 어떤 정석도 상황에 따라 적용되는 법이 달라진다. 때로는 매우 큰것 같이 보이는 돌도 프로는 태연히 버리고 만다. 그래서 프로인 것이다. 아마추어는 깊이와 시야를 넓게 가지지 못한다. 아마가 아마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밀어서 안되면 당겨 보라"는 속어가 있다. 한대의 차를 움직일 때 처음에는 미동하지 않다가도 어느 시기에서 적당히 밀거나 당겨 보면, 이윽고 차는 움직이기 시작한다. 문제는 그러한 호흡이다.
  이런 호흡은 몇 번씩 실패를 거듭하여 반복해서 경험하지 않으면 좀처럼 터득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기회 있을 때마다 재이용에 힘쓸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정량성 전에 정성적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다.
  정량성이라는 것은 계산처럼 좌뇌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정성이라는 것은 우뇌에 의해 판단되는 종합적인 판단이다.
  따라서, 양부를 판단하는 것이 우뇌이며 그 정도를 표현하는 것이 좌뇌에 의해 판단되는 정량성인 것이다.
  사항에 따라서는 정량성이 선행하고, 그 결과에 따라 종합적 판단이 생겨날 적도 있지만 연구와 같은 내용의 예처럼 일반적으로는 정성적 판단쪽이 선행하고 정량성이 그것에 부수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것은 "학자 바보"라는 말이 빈번히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종합적 판단이라는 것은 반드시 지금 문제로 삼고 있는 사항에만 한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분야의 대가도 비결을 물으면 대부분이 똑같은 말이다. 그것은 자신이 고생한 경과에 대응시켜서 유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역으로 말하자면 그만큼 경험이 많으면 또 정보에 대한 인식도 다르다는 것이다.
  다음은 폭넓은 지식과 폭넓은 경험을 축적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학자가 세상사에 어둡다는 것은 옛부터 들어오는 말이다. 즉, 사용하는 뇌가 고정화됨으로써 생겨지는 결과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사회인으로서는 매우 바람직하지 못하다. 모든 뇌가, 모든 신경이 동등하게 혹사당하고 단련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폭이 넓은"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전기 공학의 분야에서 진전이 없이 막혔을 경우 음악이나 바둑에서의 감각이 해결의 포인트가 된 적이 많다. 나는 이런 점에 이른바 인간의 "두뇌 작용"의 신비성을 느낌과 동시에 그 필요성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여러 가지의 지식이나 경험은 그것이 혼합되었을 때만이 새로운 세계를 펼쳐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풍부한 정서와 고상한 교양이 정확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점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그리고 끝으로 중요한 것은 환경 조건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마음의 여유를 가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A씨라면 이렇게 말하고, B씨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고 하는 식의 자기 나름대로의 잠재의식을 만들어선 안된다.
  물론, 잠재의식대로의 이야기가 되면 문제가 없지만 잠재의식과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면 대응할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자기 나름대로의 편견이 생기기 쉽기 때문이다. 머리가 유연하다는 것은 그 내용을 옳게 파악하고 순응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의식을 잠재시키는 것 자체가 이미 잘못이라는 것이다.
  기대가 있으면 자칫 오감까지도 그르치기 쉽다. 그리고, 한가지 잘못은 다음 잘못을 유발시킨다. 따라서 더욱 더 허둥대고 초조감이 생긴다. 반면에 마음에 여유가 있으면 충분히 진정해서 대처할 수 있다.

    머리가 경직되면 이미 때는 늦어진다
  이렇게 볼 때 "머리가 경직된다"는 말의 의미가 어느 정도 명백해진다. 그것은 반드시 연령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보행이 부자연한 고령의 서예가는 붓을 쥐어 주면 힘 있게 자신의 신체를 움직여서 대작을 써 낸다. 무용가도 그렇고, 검도의 대가도 마찬가지이다. 즉, 항상 혹사시키고 오랫동안 단련한 신념은 나이와 더불어 세련되면 세련되었지, 너무 늙어서 별볼일 없다는 상태로는 되지 않는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하찮게 생각되는 것이라도 열심히 한 가지씩 이루어 가는 사람은 언제나 생동감이 넘친다. "젊어서는 속은 셈치고 열심히 하라! 하지만, 어느 연령이 되면 젊다고 해서 바보 취급을 받으니 적당히 속이면 된다"는 말이 있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적당히 속이는 한 신경은 적당히 사보타아지하게 된다. 한번 사보타아지하는 것을 알면, 신경은 더욱 더 사보타아지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퇴화가 시작된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심한 경우 30대에 이미 이런 노화가 진행되는 사람도 제법 보게 된다.
  "자네는 알 만한 나이인데도 아직 그런 말을 하고 있는가? 아무튼 중역이 되기는 글렀잖은가. 적당히 처세하면 되지 뭘 그래"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을 듣고도 별말이 없다면 발상의 전환같은 것과는 영영 인연이 먼 사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머리가 경직되고 나서는 이미 때가 늦다. 평균적 일반인이 볼때는 마치 헛수고로 보일지라도, 4시간 수면을 지속하는 의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 머리를 경직시키지 않으려면 4시간 수면이 최고의 수단이다. 또한 젊음을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발상의 전환을 원활하게 하는 모체인 것이다.
  또 한 번 반복하기로 한다. 신경은 본인이 자발적으로 혹사시키는한 성장하게 될지언정 절대로 파괴되는 일은 없다. 그리고 모든 신경을 평등하게 혹사시킴으로써 신속하게 시의에 적합한 반응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2. 풍부한 지식으로 발상의 전환을 한다

    올바른 지식이란 자신의 판단으로 운용될 수 있다
  지시에 대한 것은 이미 잠깐 언급한 바 있는데, 여기서 두세 가지의 설명을 덧붙이기로 한다.
  보통의 일반인들은 대체로, 어느 연령이 되면, 현상에 만족하지 못하고 "어떻게 전신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으냐고 물어보면 전혀 대답을 못한다. 현상에 대한 불만과 한탄, 그리고 장래에 대한 꿈같은 이야기로 시종할 뿐이다. 어째서인가?
  그들은 너무나도 사물을 모른다. 갖가지 국가시험 제도가 있다는 것도, 단 세 사람으로 회사를 경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올바른 지식이란 스스로 판단해서 운용할 수 있는 내용의 지식이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다. 아무리 책을 읽는다고 해도 그것이 올바른 지식이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항상 손수 운용할 수 있도록 정리하고, 보충해 두지 않으면 안된다. 주간지에서 얼핏 본 기사도, 올바른 의미에서의 지식으로 완성시키자면 때로는 몇 년씩 걸릴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기회가 있을 적마다 자가용기로 창공을 비행한다. 기분 전환에는 최고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어느 정도 기상에 관한 지식도 지니고 있다.
  비행 중, 각지의 날씨 정보를 입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비행하고 있는 시점에서의 풍향, 풍속 그리고 구름의 양과 흐르는 방향이다.
  아무튼, 나는 기분 전환이 목적이기 때문에 몇 시까지 어디에 도착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은 없다. 따라서 구름의 방향여하에 따라서는 미야께지마로 생선을 먹으러 가려던 것을 갑자기 나고야로 국수를 먹으러 방향을 바꾼다고 해서 잘못될 것은 없다. 즉, 생선이 국수로 바뀌었을 뿐, 본인이 납득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대체로 발상의 전환이란 이런 점에 큰 의미가 있다. 즉,
  선입관 구애받지 않고 가능한 범위로 목표를 옮긴다
  그때 비행기에 대해서, 자신을 대응시킬 만한 목표를 찾아낸다.
  몇 개의 목표를 가지고 있을 경우, 한 가지씩 몸소 확인해 본다.
고 하는 것같은 내용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터무니 없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에게 있어서는 일종의 필연적인 결과인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위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전혀 예상 밖이었다고 하겠지만.
  따라서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운용할 수만 있다면 어떻게 짜건 관계가 없다. 결국 그런 것이 옆에서 보기에는 멋진 <발상의 전환>으로서 보이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발상의 전환이란 선입관을 제거하고 잠재관념을 불식하는 것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폭넓은 지식이 꼭 필요하다. 따라서, 내가 취득했던 몇 가지 지식을 예로 들어 구체적인 패턴을 소개하기로 한다.

    나의 지식 축적의 비결
  나는 현재 죠오지대학 이공학부 전기전자공학과 교수인데, 이 학교에서만 19년째 봉직하고 있다. 그동안 여러 과목을 담당해 왔지만 근자에는 거의 전력계로 치우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졸업생이다.
  나는 졸업생들을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다. 물론 죠오지대학에 봉직하기 전, 5년간 조교수로 근무한 도쿄 도립대학의 졸업생도, 시간 강사로서 근무했던 국철의 중앙철도학원, 혹은 도쿄 시바우라 공업대학의 졸업생도 다같이 나에게 있어서는 스승이다.
  요쯔야라는 교통편이 좋은 곳에서 근무하는 탓인지 졸업생의 방문이 많다. 도쿄에 오는 길이었다거나 근처에서 위원회가 개최되었다거나, 때로는 주례를 서 달라거나 중매를 서 달라거나...아무튼 졸업생들과 함께 지낼 적이 많다.
  그들은 모두 근황 보고를 해 준다. 최첨단의 기술 이야기에서부터 가족에 대한 것, 친구의 일, 직장의 일 등, 나에게 있어서는 그 모든 이야기들이 공부이다. 지식을 줄 뿐만 아니라 훈계도 되고 또 새로운 발상에의 계기도 된다. 정말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현재 나는 기술사, 제1종 전기주임 기술자의 자격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IEEE,미국의 전기전자 공학회에 소속하고 이 학회에서 주최한 국제회의에도 참가한 적이 있다.
  이런 것들은 대학교수로서는 얻을 수 없는 또다른 지식과 자극을 나에게 준다.
  또 [나폴레옹 수면]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서예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방대한 양의 연습을 쌓았다. 대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다만 내 자신이 납득할 수 있는 작품을 쓰기 위해서이다.
  서예를 하게 되면 자연히 각 방면의 사람들과 상대하게 된다. 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정치가, 실업가 등등. 그리고 거물이 될수록 조예가 깊어진다. 따라서 그들과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야말로 체험에서 얻어진 인생훈을 듣게 되는 기회가 주어진다.
  나는 서예를 뜻한 덕분에 정말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득을 보았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전문적인 일로 좌뇌를 혹사시킬뿐만 아니라, 이러한 일들을 통해 우뇌에도 짐을 주어 왔다. 거기에, 좌뇌와 우뇌의 조화를 이루는 도순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더우기, 서예를 통해서 득을 보았다고 생각되는 것은 얼핏 보기에는 전혀 무연하다고 생각되는 고대중국사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법] [한자가 생기기까지] [고대 중국인의 수관념]도 출간할 수 있었다. 이것은 나의 머릿속에 전혀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주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취미에서 새로운 지식의 원천, 술집까지
  내가 바둑을 배우게 된 것은 1939년 4월, 여순 공과대학 예과에 갓 입학했을 무렵이었다.
  연상인 한 동급생이 "너는 꽤 머리가 좋은 것 같은데 사용 법을 모른다. 사물을 대국적으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바둑을 뒤라! 내가 가르쳐 주지. 좀더 대국적으로 보는 눈을 길러라. 그렇게 하면 반드시 큰 인물이 될 수 있을 것이다"고 하면서 바둑을 지도해 주었다.
  바둑의 장점은 무어라 해도 여러 가지의 수를 무궁무진하게 전개할 수 있다는데 있을 것이다.
  승부를 겨루는 시합이면서도 예술의 아름다움이 있다. 물론, 전문기사가 아니기 때문에 그런 한가한 말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또 나는 가루다(딱지놀이의 일종)를 좋아한다. 가루다란 백인일수를 말한다. 국민학교시절 동급생의 집에 초대되어서 그 동급생 누이의 친구들과 어울려서 처음으로 가루다 놀이를 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한 장도 집을 수 없었다. 가루다 놀이는 "어른의 놀이"라고 평소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참패를 당하고 나니 분한 마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책을 사다, 닥치는 대로 암기했다. 덕분에 그 후로 거의 패해 본 적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중학교에 들어가서 고전을 배우게 되면서 비로소 백인 일수의 의미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여순으로 가서는 <아카시아 단가회>의 멤버가 되었고, 전후 히로시마에 거주한 1년 간은 히로시마 청년문화 연맹의 단가지도를 맡은 적도 있다.
  내가 술을 입에 대개 된 것은 여순시절부터이다. 그러나 술의 진미를 알게 된 것은 해군시절이다.
  전후, 나는 어엿한 기술자로서 일했지만 생활이 궁핍한 시대였다. 소주건, 탁주건 마실 수 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마셨다. 그리고, 그 기세로 3시간 수면을 하면서 공부했다. 신바시역의 <다찌바나>에서 친구와 어울려서 떠들석하게 술잔을 기울인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그 후로 차츰 <맥주>로 바뀌게 되었다. 술 속의 방부제가 체질에 맞지 않았기 때문에 맥주로 바꾼것이다. 집에는 <맥주>밖에 두지 않고 있다. 따라서, 20년 이상이나 계속 마신 맥주는 나에게 있어서 안식처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즐겨 가는 술집은 생선구이집, 꼬치집, 그리고 초밥집이다. 맥주 몇 잔을 기울이며 편안한 마음으로 한두 시간 보낸다. 단골 명사의 이야기도 나오고, 옆자리의 날품팔잇군과도 대화를 나눈다. 신문이나 텔리비젼이 아무리 <경기>를 부추겨도 현실은 또 다르다. 거기에 새로운 지식의 원천이 있다.
  나는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과자도 전혀 먹지 않는다. 내 생명을 지탱해 주는 벗은 오로지 맥주뿐이다. 그런 만큼 나에게 있어 맥주를 마시는 장소는 중요하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맥주를 마시는 장소는 나에게 있어서 강의실이며 도장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음악도 내가 좋아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중학교 시절, 틈틈이 하모니카를 부는 것이 인연이 되었다. 여순으로 가서는 좀더 어른의 음악을-하는 생각으로 기타, 만돌린, 첼로 등의 기초를 배웠다.
  그 후, 현재까지 계속하고 있는 바이올린을 시작한 것이다.

    온갖 방면에서 얻은 지식들을 서로 짝지워라
  비행기 조종면허를 취득한지도 어느덧 13년째가 된다. 게다가 적십자 비행대원이니 조종은 더욱 신중해지지 않을 수 없다. 나는 별로 비행곡예에 뜻이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오로지 수평 비행뿐이지만 비행시간은 그래도 300시간을 넘고 있다.
  비행기 조종면허를 취득하자면 항공 신체검사에 합격한 다음 실기 훈련을 40시간 이상 받고서 학과 시험에 붙어야 한다. 학과 시험의 과목은 항공 공학, 항공 법규, 항공 기상, 항법, 통신 시설이 있다.
  비행기 외에 나는 1급 소형선박 조종사 자격도 가지고 있다. 내용은 비행기와 비슷한 것이지만 비행기만큼 어렵지는 않다.
  나는 전에 곧잘 미야자끼의 남단쪽으로 낚시를 다녔는데, 이 고장 남자들은 거의 원양어업에 나가고 있기 때문에 낚시배조차도 이쪽에서 면허가 있어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래서 1개월이나 걸려 이 면허증을 취득했던 것이다.
  바다낚시를 좋아한다는 것은 그만큼 바다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다. 따라서, 낚시나 낚시배를 통해서 얻은 지식은 결코 적지않다.
  지금까지 나의 여러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었는데, 이런 각방면에서 얻어지는 지식들은 결코 서로 무관할 수는 없다. 그런 것들을 잘 짝지워 놓지 않으면 실제 운용은 전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도 좋다. 그런 점에, 같은 지식이라는 명칭을 갖는 것이라도 내용적으로 상당히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비행기 조종면허만 해도 사업용과 자가용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실제로 비행하기는 소형기이면 똑같으며, 기상의 변화나 항법도 전혀 현식적으로는 차이가 없다.
  이 점을 명심해 주기 바란다. 아마이기 때문에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는 식의 안이한 생각을 한다면 처음부터 손대지 말라는 것이다. 기술이나 자격은 프로가 아니더라도 프로같은 진지성을 지니지 않으면 돈과 여가의 헛수고에 불과하다. 역설적으로 말하면 프로같은 의식을 가져야만 새로운 지식을 살려서 운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3. 시간의 여유로 능력을 배가 한다

    목표를 잃지 말고 항상 움직여라
  세상에서는 언제나 능력이라는 말이 쓰인다. 학생의 평점이건 회사내의 평가이건, 또는 서류작성이건 능력이라는 말이 거의 모든 분야에서 거론되고 있다. 그런데 그 정의에 대한 문제가 되면 의외로 조잡하고 개략적이라는 것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능력이라는 말은 사실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그 내용이 잡다하고, 썩 분명하지가 못하다.
  능력이란 간단한 말 같지만 그 자체는 사실 종합적인 것으로서 상당히 복잡한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즐겨 쓰는 스타일로 고치면 이런 내용이 된다.
  1) 기력:보기만 해도 지례 질겁해서 물러나는 일없이 "해 보이겠다"는 채비이다.
  2) 행동력:"해 보이겠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3) 정신력:체념하지 않고 끝까지 해 내고 마는 계속력이다.
  4) 체력:목표로 삼고 있는 사항에 신체를 대응시켜 가는 힘이다. 따라서, 체격검정 같은 체력과는 본질적으로 질이 다르다.
  5) 노력:인간은 사람에 따라 장점과 단점이 있다. 따라서 자신의 지식과 1)--4)항을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를 연구해야 하는 것이다.
  6) 능력:5)까지의 결과로서 일이 이루어진다. 그리고, 그 일의 내용에 따라 판단되는 것이 능력이다.
  따라서, 능력이 있으니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잘못이다. 성과로서의 일이 평가됨으로써 종합력으로서의 능력이 판정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면 능력을 만들건 육성하건 항상 움직이는 것을 전제로 삼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움직임 속에서 자신의 목표와 움직임 사이의 차이를 주시하고 언제라고 코오스 위에 있도록 수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헛수고를 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경형이 풍부하지 않으면 자신이 코오스에서 벗어나 있어도 깨닫지 못할 적이 많다. 이럴때 가장 중요한 것은 "초조하지 말라"는 것이다. 젊을 때는 실패해도 몇 번이고 다시 할 수 있다-그 정도의 강경한 자세도 필요한 것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마음에 여유가 없는한 발상의 전환은 바랄 수 없다"고 할수 있는 것이다.
  마음에 여유를 가진다는 것은 충분히 시간을 들인다는 것이다. 시간에 여유가 있으면 초조할 필요는 조금도 없다. 그러므로 젊어서 권하고 싶은 것이 4시간 수면법인 것이다.

    실패의 체험이 직감력을 키운다
  형사생활을 하게 되면 흔히 <직감력>이 강화된다고 한다. 이것은 하루 내내 신경을 곤두세워가며 몇 번씩 쓰디쓴 경험을 쌓아 가는 동안 자연히 키워지는 것이라고 한다. 따라서 <직감력>의 좋고 나쁨은 발상의 전환과 직접적인 관련을 가진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엄두가 나지 않으면 누구나 노력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과라는 것은 해 본 다음이 아니면 나오지 않는데 엄두란 결과를 평가하는 것이므로 직감력에 의해 판단되어야 할 성격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직감력에도 두 가지가 있다. 이른바 주사위 놀이처럼 여러 가지 경험 또는 자료를 가지고 있어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 즉, 주사위의 숫자가 나오는 대로의 결론밖에 내지 못하는 타입의 직감력이 개선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후자는 많은 체험과 그 체험의 정리 방식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직감력을 키울 수 있는 성격의 것이다. 앞에서의 형사가 갖는 직감력이라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바로 이런 타입의 것이다.
  아니, 더욱 중요한 것은 보통 사람들에 비해 매우 앞이 잘보인다는 것이다. 즉, 이런 종류의 <직감력>이 발달한 사람들이 볼때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 필연적인 결론이라도 보통 사람들의 눈에는 의표를 찌른 <발상의 전환>으로 보이고, 놀라운 폭탄성명으로도 들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직감력>은 발상의 전환에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런 종류의 <직감력>은 모두 체험이 모체가 되어 육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체험이란 대부분이 실패의 체험이지 성공의 체험은 아니다. 여기에 새로운 문제가 나타난다. 하나의 결과란 적어도 이 사회에 관한한 수많은 여러 가지 인자가 유기적으로 결합됨으로써 도축되는 것이다. 따라서 인터뷰하는 아나운서가 흔히 "성공한 원인이 어디에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하고 묻는데 그럴때마다 한결 같이 "노력한 탓이겠죠"하고 대답하는 것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그 이외에는 적절한 말이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는 반대로 예상외로 실패가 거듭되면 누구나 애석하기 때문에 그 원인에 대해 자기 비판을 한다. 본인이 열심이면 열심일수록 애석함도 배가하기 때문에 자기 비판은 더욱더 섬세해진다. 그리고 "모처럼의 기회이니 조금이라도 많은 것을 알아 두자"고 노력한다. 즉, 그러한 노력이 <직감력>을 키우는 것이다. 개도 돌아다니다 막대기에 부딪친다거나 부딪쳐 넘어져도 그냥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그런 식으로 관찰하며 칠전팔기를 반복하면 누구라도 배우는 것이 많아지고 또 <직감력>도 좋아진다. 요컨대, 거물이 되기 위한 제 1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경과 속에서는 당연히 고생도 많고 괴로움도 많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노력이다. 따라서, 평균적 일반인 처럼 "자신만 사서 고생할 필요는 없다"거나, 또는 타인의 실패를 보고서 "허, 그렇다니까"하는 사고방식으로는 한평생 직감력과는 전혀 인연이 없다고 생각해도 좋다.
  어떤 실패도 최후의 성공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을 믿고 매일매일 힘껏 노력하면 어떤 일에서도 성공한다. 그리고, 만약에 여의치 않으면 자신의 노력이 부족하다고 자각해야 한다. 내가 [나폴레옹 수면]에서 <장님의 총질도 백 번을 쏘면 맞는다>는 말을 인용한 것도 실은 이런 진의를 알아 달라는 의도에서였다. "뜻이 있으면, 마침내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기회만 있으면 모든 것을 기억에 넣어라
  그럼 <직감력>을 키우는 구체적인 방법을 소개하기로 한다.
  첫째, 거듭된 실패의 반복에서 직감력이 얻어지는 것이니 시간적으로나 심적으로 여유가 없으면 안된다. 그러므로, 4시간 수면을 실천해야 한다. 일상적인 시간은 보통 사람같이 쓰면된다. 다만 4시간 수면으로 벌은 여분의 시간을 이런 자기 단련으로 돌리면 된다. 그리고 절대로 조급하지 말고 하루하루를 음미하며 보내 주기 바란다.
  4시간 수면을 하면 낮 동안 몇 번씩 수마가 엄습한다. 따라서 절대로 방심하면 안된다. 즉, 항상 우뇌, 좌뇌를 적절히 쓰고 전혀 무의미하고 하찮은 일에 생각되는 것도 기억에 넣어둘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A양은 적색 계통의 색깔을 좋아 한다"는 것 같은 사소한 일도 훗날 제법 도움이 될 적이 있다. 이런 취향이나, 생활의 패턴 변화는 말하자면 생활 자체의 변화를 입증할 적이 많기 때문이다.
  더우기, 여성은 혼담이 이루어지면 갑자기 리드미컬해지고 아름답게 보이며 남성은 중역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면 갑자기 대담해진다는 보편적인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기억은 단지 졸음을 깨려 하는 것이 목적이며 그렇게 썩 진지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다만 일시적으로 의식하되 뒤에는 마음에 새겨두기만 하면 된다. 매일 변함이 없는 직장이라도 아침에 들어설 때 무엇인지 여느때와 다르다는 감각을 피부로 충분히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직감력>이라는 것이다.
  일이건, 생활이건 국면의 타개를 꾀하려 할 때는 <발상의 전환>이라는 것이 필요해진다. 그러나 결과가 전혀 예측할 수 없다면 위험 천만이다. 그런 점에 <직감력>이 필요해지게 되는 것이다. 예컨대 일의 경우, 시종 일에 구애를 받고 일의 영역에서 떠나지 못한다면 발상의 전환은 바라볼 수 없다. 즉, 직감력이란, 분명히 말해 모든 것을 동원해서, 그 속에서 하나의 줄기를 찾아내는 것이며 만들어내는 것이다.
  모든 기회를 이용하며 귀로 들을 수 있는 것은 귀로, 눈으로 볼수 있는 것은 눈으로 무엇이든지 기억에 넣는다. 그리고, 자유스러운 시간이 되었을 때 전문서나, 혹은 물리 상수표, 공식집 같은 것에 의해 확인하면서 언제든지 옳게 이용할 수 있는 형태로 정리해 두는 것이다.  무슨일이건 "한 가지 일이 만 가지 일"이다.  어떤 지식이든 옳게 쓰이면 낭비가 되는 것은 없다. 오히려 기억 부족으로 고심할 때가 많다.
  <직감력>이란 이러한 기반 위에 비로소 만들어지고 키워지는 것이다. 수고를 아끼다가는 직감력은 양성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만큼 사회적으로 뒤떨어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