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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정복

행복의 정복
    버트랜드 러셀
  영국의 철학가이며 수학자. 시인이며
사회사상가이기도 함. 1950년 노벨문학상 수상. 주요
저서로 "라이프니츠의 철학" "수학의 원리" 등이 있음.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동물의 경우는 몸에 탈이 없고 먹을 것만 넉넉하면
행복하다. 인간은 저마다 행복해야 하지만,
오늘날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가 못하다. 만일
당신이 불행한 사람이라면, 그 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곧 인정할 것이다.
친구들 중에 다행히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과연
몇 사람이나 되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 그들을 살펴본
연후에, 인간의 얼굴빛을 읽는 법을 배우라.
그리하여 하루하루 당신과 만나는 사람들의 기분을 잘
살펴 보라.

  "내가 만나는 얼굴마다 피곤한 그림자와 슬픔의 빛이
서려 있노라"

  이것은 블레이크의 시구이다. 불행의 종류는 여러
가지이다. 우리는 세상 곳곳에서 불행을 만나게
마련이다. 우리가 대도시 뉴욕에 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사람들이 한참 일에 바쁠 때, 분주한
사거리나 주말의 밤 거리, 저녁 댄스 파티에 나가 보라.
주위의 낯선 사람들을 각각 유심히 바라보면,
얼굴에 저마다 수심이 끼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인류 역사의 어느 시대에도 마찬가지였지만,
지금도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다. 즉 우리들
가운데서 현명한 자는, 지난날의 여러 가지 경험을
다 겪어 온 나머지, 인생은 결국 살아갈 만한 보람이
없다고 느끼게 되었으며, 불행의 원인을 우주의
본질에 돌리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인생관을 갖고 있는
자는 참으로 불행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그들의 태도는 지식인이 마땅히
지녀야 할 이성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더욱 우스꽝스럽다. 그들이 자기의 불행을 자랑하는
것을 볼 때, 보통 사람의 안목으로서는 그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불행을 즐기는 자는 이미 불행한 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단순한 견해이다.
  이러한 사람들이 갖는 우월감과 사고방식에는 물론 어느
정도의 보수가 따르지만, 그것으로써 쾌락의 손실을
충분히 보상한다고 볼 수는 없다. 나는 불행 속에
결코 커다란 합리성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현명한 사람은 환경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
행복을 누릴 것이다. 그리고 우주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큰 괴로움을 준다면, 그는 그 대신 다른
것을 생각할 것이다.
  이론은 어쨌든, 이성이 결코
행복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점을 나는 독자들에게
납득시키고자 한다. 자기의 불행을 모조리 우주관에
돌리는 사람은, 말에게 거꾸로 수레를 메우는
것과 같다. 그런데 진상은 이러하다. 그들은 자기를
의식하지 못한 어떤 이유로 자기 자신도 불행한
것이다. 그리고 이 불행 때문에 자기가 살고 있는
세계를 불쾌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죠세프 우드 크러취는 "현대의 기질"이라는 책에서,
내가 사람들을 위해 생각해 보려는 내용을 논한
적이 있다. 그리고 몇 세대 전에 바이런도 그러한 의미의
말을 한 적이 있다. 후세대를 위하여
"전도서"의 작가는 이것을 기록해 놓았다.

  "우리는 패배하였다. 이 우주의 대자연 속에는 우리가 몸
붙일 곳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인간임을
유감스럽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동무로 사느니
인간으로 죽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바이런은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 줄 수 있는 기쁨은, 인생이 빼앗아 버리는
기쁨과 견줄 수 없다. 옛 사색의 광채가 감정의
둔한 부패로 말미암아 사그러질 때."

  "전도서"의 저자는 또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살아 있는 생명보다 이미 죽어 버린 생명을 더욱
찬미하는 것은 실로 이 때문이다. 이 세상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사람은 하늘 아래서 일어나는 악한
현상을 보지 아니하였으므로 살아 있는 생명보다
낫고 죽은 생명보다 낫도다."

  이 세 사람의 염세주의자는 인생의 모든 쾌락을
검토한 연후에, 이런 어두운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크러취는 뉴욕의 상류 지식층으로 살았었다. 그리고
바이런은 다다넬스 해협을 건너 무수한 연애
사건을 경험했다. 또한 "전도서"의 저자는 여러 가지
쾌락을 맛본 인간이었다. 술과 노래와 그 밖의
모든 쾌락을 경험했다. 그는 자기 집에 연못을 파고,
슬하에 남녀 하인을 무수히 거느리고 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호화로운 환경 속에서도 그는 자기의
지혜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허무함을 알게 되었다. 지혜까지도 허무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지혜를 가졌으며, 우매한 것과 미친 것을
분간하는 판단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영혼에 괴로움울 준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많은
지혜에는 많은 슬픔이 따르기 때문이다. 또한 지식이
많으면 슬픔도 따라서 많아지는 것이다."

  그의 지혜는 그를 무던히 괴롭혔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 지혜를 없애 버리려고 부질없이 애를
썼다.
  "내가 내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시험삼아
너를 즐겁게 할 터이니 너는 쾌락을 느끼라고
하였지만 이것 역시 헛된 일이로다."

  그러나 그의 지혜는 여전히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때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우매한 자에게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나한테도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어찌하여 지혜로운 자가 되었는가. 그때
나는 내 마음에 이르기를... 이것도 또한
허망한 거이다. 그러므로 나는 인생을 미워한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나에게는 모두 다
슬픔이다. 모든 것이 허무하여 영혼을 괴롭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고대의 작품을 읽지 않는 것은, 문학가에게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현대인들이 고대의 작품을 탐독하면, 현대의 작가들이
글을 쓴다는 것은 모두가 부질없는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전도서"의 사상은 지혜로운
자가 지녀야 할 하나밖에 없는 이론이 아님을
우리가 해명할 수 있다면, 같은 감정을 표현한 후세의
작품 때문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논할 때, 우리는 감정과 이성의 표현을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 감정을 논리로 다룰 수는
없다. 어떤 좋은 일이 생기거나 또 육체에 변화가
일어나야만, 감정에 변동이 생긴다. 그러므로 이론이
기분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나는 여러 번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느꼈었다. 내가 이러한 감정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어떤 철학의 힘이 아니라 단호한
행동의 덕택이었다. 만일 당신의 아들에게 병이
났다고 생각해 보라. 당신은 불안에 사로잡힐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이 허무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생명이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뒤로 미루고 우선 어린애의 건강을
회복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 부자들이 모든 것이
공허하다거나 허망하다고 느낄 때가 더러 있을
터이지만, 만일 그들이 재물을 잃게 된다면 결코 공허니
허무니 하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감정은 자연적인 욕구를 쉽사리 충족시키는 데서
일어나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동물도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생존 경쟁에 적응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사색가가 재산이 많아 자기의 모든
만족을 손쉽게 충족시키게 되면, 생활에서 애써
노력하는 경향이 없어지기 때문에, 행복의 본질적인
요소를 상실하게 된다. 또한 적은 욕망을 쉽게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흔히 욕망의 실현이 행복을
가져오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게 마련이다. 만일 그가
철학에 소질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것이다.--인간 생활의 본질은 비참하기
짝이 없다. 왜? 자기가 바라는 것을 다 소유하고
있는 사람까지도 불행하므로.
  그러나 당신이 원하는
것을 더러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이것이 행복에
없어서는 안 될 조건임을 당신은 잊고 있는 것이다.
기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전도서"에는
다음과 같은 지혜의 말이 기록되어 있다.

  "모든 강물은 바다를 향하여 흘러가지만, 바다를
채우지는 못한다. 세상에 새로운 것이란 하나도
없다. 지나간 과거를 누가 다 기억할 수 있으랴. 나는
세상에서 행한 모든 일을 혐오하였다. 이것은
내 뒤에 올 자에게 그것을 물려주려 함이다."

  이러한 의미의 내용을 현대 철학자의 말로 표현하면
아마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인간은 끊임없이
노력을 하고 만물은 쉬지 않고 움직인다. 뒤에 오는 새
것은, 앞서 간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지만,
영구불변한 것은 하나도 없다. 인간은 죽어 가지만, 그
후계자는 그의 노력의 성과를 거두어들인다.
강물은 바다로 흘러가지만, 그 물은 거기에 머물러 있지
못한다. 인간과 사물은 목적과 종말이 없는
둥근 원과 같이, 날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한없이
생사를 되풀이하지만, 결국 아무런 발전도 성과도
없다. 만일 물이 현명하다면, 현재 있는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이다. 만일 솔로몬에게
지혜가 있었더라면, 아들이 그 열매를 즐기는 과일
나무를 심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견지에서 보면, 만물은 모두 변하는 것이다.
세상에 새 것이 없다고? 마천루는 어떠한가? 비행기나
정치가의 방송연설은 어떠한가? 솔로몬이 여기에 대하여
무엇을 알고 있었는가?(주-솔로몬이 이
"전도서"를 쓴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 두는 것이
편하다) 만일, 솔로몬이, 쉬바 여왕이 그의 영토를
돌아다니면서 신하들에게 한 연설을 라디오로 듣는다면,
메마른 숲과 풀밭에서 자기를 위로했을
것이다. 만일 솔로몬의 공보 비서가 궁전의 건축이나,
무수히 처첩과의 재미나, 또는 솔로몬과
회담하여 여러 현자들이 실패한 이야기 등에 대한 신문
논평을 일일이 보고하여 주어도 세상에 새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기야 이런 것쯤으로 그의
염세주의가 시정될 리 만무하지만, 여기에 대하여
새로운 표현을 했을 것이다. 현대에 대한 크로취의
불평중 하나는 세상에 새로운 것이 너무나 많은
점이었다. 새로운 것이 있어도 괴롭고 없어도 괴롭다면,
새로운 것이 어찌 절망의 원인 될 수
있겠는가.
  모든 강물은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만 바다는
차지 않으며, 강물은 흘러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간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자. 만일 이것이
염세주의의 원리라면, 여행은 조금도 재미가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이 여름이 되면 피서지에 갔다가,
이윽고는 본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온다. 그렇다고
해서 여름에 피서지에 가는 것을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을까. 만일 강물에 감정이 있다면, 쉘리의
"구름"처럼 모험적인 여행을 즐길 것이다. 자기
후계자에게 여러 가지로 물려주는 괴로움만 해도 두
가지 견지에서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그것은 물려받은
자의 처지에서 보면, 분명히 나쁜 일이라고
볼 수가 없다. 그리고 만물이 유전한다는 사실은 원래가
염세주의의 토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악을
물려받으면 염세주의의 이유도 될 터이지만, 선을
물려받는다면 낙천주의의 이유가 될 것이다.
  무엇이나 한 부분이 가치가 없다면 전체가
무가치하다. 인생을 저속한 연극의 논리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행복한 최후를 갖기 위해 남녀 주인공이
비참한 불행을 겪게 되는 것이 연극이다. 내가
살아서 행복한 인생을 보내고, 또 아들은 뒤를 이어서
번영하고, 그 손자는 아들의 뒤를 잇고 --
여기에 무슨 비극이 있다는 것인가? 도리어 내가 영원히
생존한다면, 인생은 한결 무미건조해 질
것이다. 그렇지 않기 때문에 인생은 영원히 새로운
것이다.

     인간은 행복할 수 있는가?

  무릇 행복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물론 이 두 가지
행복 사이게 중간 단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두 종류를 구별해 보면 분명한 것과
가상적인 것, 동물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 감정적인
것과 이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을 택해야 할까? 여기게 대한 해답은
다음에 입증해야 할 명제에 따라서 결정이 된다. 그런데
여기서는 이 명제를 입증하지 않고 다만
서술만 하고자 한다. 이 두 가지 행복의 다른 점을
간결하게 설명하자면 이러하다. 하나는 모든
인간에게 열려 있는 행복이요, 또 하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자에게만 열려 있는 행복이요. 나는
일찍이 소년시절에, 행복에 도취된 사람을 본 적이
있다. 그는 우물을 파는 일이 직업이었다. 키가
몹시 크고 근육이 매우 탄탄하였다. 그는 책도 읽을 줄
모르고 글도 쓸 줄 몰랐었다. 그는 1855년
국회의원의 투표권을 받고 나서 비로소 그러한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지닌 행복은
지성에서 오는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면 자연의
법칙에 대한 신앙, 인류의 완전성, 사회적인 복리의
공동 소유,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지는 마지막
승리, 그리고 지식인들이 인생을 향락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신념--이러한 것들이 그의 행복의
원천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육체적인 용맹,
적당한 노동, 바위로 된 커다란 장벽의 정복--이러한
것이 그의 행복의 원천이었다. 나의 정원사의
행복도 이와 비슷했다. 그는 토끼 사냥을 즐겼었다.
그는 마치 런던 경찰국이 공산당에 대해 말하듯이
토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토끼라는 놈은 음흉하기 짝이 없고, 계략이
풍부하며, 잔인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토끼와 같은
교활한 지혜가 아니고서는 당해 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의 정원사는 마치 밤중에 죽으면 아침에
되살아나는 야생의 곰을 부질없이 진종일
쫓아다니는 발할라의 영웅들처럼 되살아날 길이 없는
토끼들을 신이 나서 죽여 버리는 것이었다. 그는
칠십이 넘은 늙은이였지만, 종일 걸어다니고 16마일이나
되는 산길을 자전거를 타고 일터에 다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쁨의 샘은 마르는 법이
없었다. 그에게 기쁨을 주는 것은 '그 토끼'들이었다.
그런데 우리 지성인은 이와 같이 단순한 기쁨을 느낄 수
없다. 대관절 토끼와 같은 조그마한 동물을
상대로 무슨 기쁨을 느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그런
이야기를 해본댔자 별로 신통할 것이 없다.
토끼는 황열병의 병균보다 덩치가 훨씬 더 크다. 그러나
두뇌가 우수한 사람은 토끼보다도 황열병균과
싸울 때 행복을 발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최고의
지식인들도 감정적인 내용에 치중하여 생각해
본다면, 나의 정원사의 같은 기쁨을 누릴 수가 있다.
단지 이러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행동에
대해서만 교육에서 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성공의 기쁨을 누리고자 하면 당연히 여러 가지
애로가 따르게 마련이다. 나중에 가서는 성공의 탑을
쌓아 올리고야 말지만, 처음에는 도저히 성공할 가망이
없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일어나게
마련이다. 자기의 능력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것이
행복의 원천이 되는 것은 주로 이 때문이다. 자기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사람은 언제나 성공하고, 자기의
능력을 과대평가하는 사람은 번번이 실패하고
놀라게 되는 것이다. 성공을 거둔 자의 놀라움은
행복에서 오는 놀라움이요, 실패한 자의 놀라움은
불행에서 오는 놀라움이다. 그러므로 교만하지 않다는
것은 지혜로운 일이라고 하겠다. 물론 너무
소심하여 아무 일도 감히 손을 대려고 하지 않아도
탈이지만.
  오늘의 지식계급에서 가장 행복한 인간은 과학자이다.
그들 가운에서도 뛰어난 자들은 대개가
감정이 단순하다. 그리하여 자기의 연구나 과업에서
깊은 만족을 느끼므로 식사를 해도 즐겁고
결혼생활도 행복하다. 예술가나 문학가는 결혼생활이
불행한 것을 예사로 생각하지만, 과학자들은
대체로 옛 그대로의 가정의 행복을 달게 받아들인다.
  단순한 감정은 어려움에 부딪치지 않는 법이다.
복잡한 감정은 마치 강물에서 이는 거품과 같다.
고요히 흘러가던 강물이 어떤 장애물에 걸리면 거품이
인다. 생명력이 방해를 당하지 않는 이상 표면에
물결이 일지 않는다. 그리고 그 힘은 보는 눈을 갖지
못한 자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다. 과학자의
생활 속에서의 행복의 모든 조건이 이루어진다. 그들은
자기 능력을 최대한으로 이용한다. 그리하여
자기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 대중에게도 소중한  성과를
이루어 놓는다. 심지어 사회 대중이 과학이
무엇인지 전혀 모를 경우에도 그러하다. 이런 점에서
과학자는 예술가보다 행복하다. 대중이 그림이나
시를 이해하지 못할 때, 저것은 나쁜 그림이요, 나쁜
시라고 단정해 버린다. 대중이 상대성 원리를
이해하지 못할 때는(정당하게도) 교육이 불충분하다고
단정한다. 그러므로 최대의 화가가 아틀리에에서
굶어죽는 경우가 있어도, 아인슈타인은 온 세상에서
존경을 받는다. 화가는 불행해도 아인슈타인은
행복하다. 사회 대중의 의혹을 품는데도 불구하고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생활에서 참된 행복을 찾을
수는 없다. 골방 속에 들어앉아서 냉정한 바깥 세상을
잊어버린다면 별문제이지만. 그런데 과학자는
동료를 제외하고는, 모든 사람들의 존경을 받으므로
골방 속에 들어앉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가는 이와 반대로 남에게 멸시를 당하느냐, 혹은
남을 멸시하느냐의 두 가지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해야 하는 괴로운 입장에 서게 된다.
  그의 재능이 일류에 속한다면 이러한 불행 가운데서
어느 하나를 당하여, 자기의 재능을 나타내면
전자의 불행을 초래하고 재능을 나타내지 않는다면
후자의 불행을 초래할 것이다. 이것은 언제
어디서나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줄리우스 2세는
미켈란젤로를 학대했는지 모르지만, 미켈란젤로가
결코 그림을 그릴 수 없는 인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오늘의 백만장자들은 예술가가 죽은 연후에
그들에게 돈을 뿌리지만, 예술가의 작품이 자기
사업만큼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사실은 대체로 예술가가 과학자보다 행복하지 못한다는
것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유럽의 지식 청년들에게서 때때로 찾아볼 수 있는
냉소적인 태도는 쾌락과 무기력을 결합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인간은 무기력하면 당연히 세상에서
아무 일도 할 가치가 없다고 느끼게 마련이며,
한편 쾌락은 이러한 감정의 괴로움을 감당케 한다.
오늘날 동양의 대학생들은 서구 대학생들과는 달리
사회의 여론을 상당히 수입을 올릴 기회가 훨씬 적다.
  동양의 청년들은 유능하며 또한 향락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 세상에서 냉소자가 되지 않고, 개혁자나
혁명가가 된다. 개혁자나 혁명가가 누리는 행복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전개에 의하여 결정된다.
그들이 설령 박해를 당하더라도 향락을 일삼는
냉소가보다는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 나는 우리 학교를
찾아온 중국 청년 한 사람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는 고국에 돌아가면 중국의 반동지역에 학교를
하나 세우겠다고 했다. 그는 결국 자기 모가지가 달아날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내가 몹시
부러워할 만큼 아늑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이런
야심적인 행복만이 유일한 행복이라고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행복은 사실상 극히 소수의
사람에게만 허용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비범한
넓은 시야와 일종의 어떤 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뛰어난 과학자만이 연구생활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떤 주장을 펴나가는
데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비단 지도자적인
입장에 있는 정치가만이 아니다. 세상에서 찬양 받을
것을 원치 않고 자기가 타고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만으로 만족을 느낄 수 있다면--어떤 특기를
발휘할 수 있는 사람은 연구 생활에서 오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어려서부터 두 다리를 쓸 수
없게 되었지만 일생 동안 참된 행복의 길을 걸어간
사람을 알고 있다. 그는 장미꽃을 좀먹는 해충에
대하여 연구를 발표하여 다섯 권의 책을 발간했다.
거기에 그의 행복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내가
보기에는 그 방면의 권위자였다. 나는 패각학자를 몇
사람 알고 있다. 나는 조개껍질의 연구가
그들에게 만족감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식자공 한 사람을
알고 있다. 예술적인 활자를 발명하기에 전력을 다하는
사람들이 저마다 그 사람을 구하고 있었다.
그는 남의 존경을 받는 기쁨보다 자기 기술을 발휘하여
얻는 기쁨에서 더욱 큰 행복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 기쁨은 마치 무용가가 무용을 하면서
느끼는 기쁨과 마찬가지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행복의 원천은 어떤
주의를 신봉하는 것이다. 그것은 피압박 민족의
혁명가나 사회주의자, 또는 민주주의자와 같은
사람들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겸손한
신념도 가리킨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영국
사람은 이스라엘의 잃어진 10부족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거의가 행복했지만, 에피렘의 유일한
부족이라고 믿는 사람은 무척 불행했다. 나는
독자들에게 이런 신념을 갖도록 권고하려는 것은
아니다. 허위적인 신념 위에서는 도저히 행복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독자들에게
인간은 '밤이나 도토리를 먹고도 살 수가 있다'는
신념을 갖기를 권고할 수 없다. 허무 맹랑하지 않은
어떤 뚜렷한 목표에 대하여 참으로 관심을 갖는
사람은 한가한 시간을 보내기 위한 일거리를 갖는
것이요, 또 인생의 허무감에 대한 좋은 해독제를
갖게 되는 것이다.
  유흥이나 오락은 대체로 행복의 근본적인 원천이 되지
못하며, 현실을 도식하는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참된 행복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사물에
대하여 호의적인 관심을 갖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정다운 관심을 일종의 애정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욕심이 많으며 소유욕이 강하여
언제나 커다란 반응을 요구하는 그러한 애정은 아니다.
이런 애정은 오히려 불행의 원인이 되기 쉽다.
행복을 증진시키는 애정은, 즐겨 남을 관찰하여 각자의
특징과 장점을 기뻐하며 자기와 접촉하는
사람의 이득과 즐거움을 증진시키려고는 할망정,
상대방을 지배하여 엄청난 칭찬을
받으려는 욕심은 부리지 않는다. 대인관계에서 이러한
태도를 갖는 사람은 행복의 원천이 되며, 그
보상으로서 따뜻한 대접을 받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는
분노를 살 만한 인물도 그에게는 중요한
흥미의 대상이 된다. 남이 아무리 기를 써도 되지 않는
일을 그는 손쉽게 이루어 놓는다. 그는 스스로'
행복하고 또 남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이처럼 남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으므로 그는 더욱
행복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진실해야 한다. 행복의
꽃은 의무감에서 비롯되는 자기 희생으로는
피어나지 않는다. 의무감이란 일을 해 나가는 데는
필요하지만, 대인관계에 있어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인간은 저마다 남의 호감을 사려고 한다.
그런데 누구나 억지로 상대방을 인정하기를
원치 않는다. 애쓰지 않고 자연히 여러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 행복의 커다란 원천이 된다. 나는
앞의 글에서 '사물에 대한 정다운 흥미'에 대하여
이야기했지만 이 말은 어쩌면 무리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독자들은 사물에 대해서는 친애한 감정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지질학자가
바위를 대할 때나 고고학자가 유적에 접할 때 느끼는
흥미는 우정과 비슷한 데가 있다. 우리의
대인관계나 대사회적인 태도의 윤리는 마땅히 이래야
하는 거이다. 우리는 사물에 대해 정다운
관심보다 절대적인 감정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거미를 싫어하여, 거미들이 적은 데서
살려는 마음에서 거미의 습성에 관한 여러 가지 사실을
수집해 볼 것이다. 이러한 관심은 지질학자가
바위에서 느끼는 것과 같은 만족감을 줄 수는 없다.
사물에 대한 관심은 인간에 대한 관심보다는,
일상생활에 필요한 행복의 요소로서 그 가치가 적지만
역시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세계는 넓고 인간의 힘에는 한계가 있다. 인간의 모든
행복이 개인적인 환경에 국한된다면, 인생이
줄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인생에게 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요구가 너무 크면 그 만족은 적은
법이다. '토렌트의 회의'니 '전체의 역사'니 하는
문제에 참된 흥미를 느낌으로써 인생의 고민을
잊을 수 있는 사람은 비인간세계에서 돌아올 때, 자기
자신의 고민을 가장 슬기롭게 처리할 수 있는
침착성과 휴식을 얻은 셈이며, 또한 당분간이나마 참된
행복을 그동안에 경험한 셈이다.
  행복의 비결은 이렇다. 즉 당신이 흥미를 느끼는
세계를 될 수 있는 대로 넓히라. 당신이 대하는
인간과 사물에 가급적 적대감을 품지 말고 애정을 가지라.

  행복한 인간이란 흡사 건전한 식욕에서 식사를 하는
사람과 같다. 그리고 식욕과 인생의 관계는
흥미와 인생의 관계와 같다. 식사를 귀찮게 여기는
사람은 바이런과 같은 불행에 빠진 사람이다.
또한 의무감에서 식사를 하는 병자는 금욕주의자와
비슷하며, 대식가는 방탄한 자와 같고, 식도락가는
인생의 즐거움의 절반은 아름답지 못하다고 비난하는
탐미주의자와 같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타입 중에서, 아마도 대식가만
제외하고는 저마다 건전한 식욕을 가진 사람을 멸시하며
자기가 격이 더 높은 듯이 생각한다. 그들은 환멸의
높은 자리에서 인생을 내려다보고, 이러한 사람을
단순한 인간들이라고 비웃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태도를 찬성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는 모든 환멸을
일조의 병이다.
  A는 딸기를 좋아하지만, B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자.
이 경우에 후작 나을 것이 무엇인가? 인간을
떠나서 추상적으로 딸기가 좋다든가, 혹은 좋지
않다든가 하는 문제를 해명할 수는 없다. 다만
좋아하는 인간에게는 좋고 싫어하는 인간에게는 좋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좋아하는 사람은 싫어하는
사람이 갖지 못하는 기쁨을 하나 더 갖고 있는 것이다.
  작은 일에 대하여 진리인 것은 큰 일에 대하여
진리이다. 흥미 분야가 넓어질수록 행복을 누릴
기회가 많아지며, 운명의 지배를 적게 받기 마련이다.
하나를 잃어 버리면 다른 것으로 대처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생은 모든 일에 대하여 한결같이
흥미를 느끼기에는 너무나 짧다. 그러나 하루하루를
충당하는 데 필요한 여러 가지 일에 되도록 흥미를
느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우리는 자칫하면 눈을
내부로 돌리기 쉽다. 다시 말하면 자기의 눈앞에
전개되는 세계의 천태만상을 외면하고 내부의 공허를
들여다보는 병에 걸리기 쉽다. 이러한 내향적인
병폐에서 비롯되는 불행에 마치 위대한 무엇이라도
있는 듯이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옛날에 소시지를 만드는 기계가 두 대 있었다. 그
기계의 구조는 묘하게 되어 있어서, 돼지에게서
바로 맛좋은 소시지가 되어 나오는 것이었다. 한 기계는
돼지에 대한 흥미를 갖고 많은 소시지를
만들었다. 다른 기계가 말하였다. "그까짓 돼지가
대관절 대체 뭐란 말이나, 내 기계는 어느
돼지보다도 훨씬 재미있고 놀랍다." 이 기계는 돼지를
외면하고 몸소 자기 내부의 됨됨이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돼지고기가 들어오지 않게 되자, 기계의
내부는 기능을 중지했다. 기계는 연구를 거듭할수록
자기 자신이 어리석은 것 같았다. 맛좋은 소시지를
만들어 내던 기계가 움직이지 않게 된 것이다. 이
기계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제2의
기계는, 말하자면 흥미를 잃어버린 인간과
같으며, 제1의 기계는 흥미진진한 인간과 같다.
  인간의 정신은 정묘한 기계처럼 여러 가지 재료로
신기하게 훌륭한 제품을 만들어 낸다. 그러나
외부에서 재료가 제공되지 않으면 기계는 기능을
상실하고 만다. 그런데 정신은 이 소세지 제조기와
달라소 자기 자신의 힘으로 재료를 취해야 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사건들은 우리의 흥미를 통해
경험된다. 만일 사물이 우리의 흥미를 끌지 못하면,
우리는 아무것도 창조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흥미가 내부에 향한 사람은 주목할 만한
대상을 좀처럼 찾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주의력이
외부로 향한 사람이 가끔 자기 자신을 반성해 볼 때,
다채롭고 흥미 있는 여러 가지 요소가 서로
분리되었다가 다시금 결합하여 아름답고 재미있는
세계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흥미의 세계는
한정이 없다. 샬록 홈스는 행길에 떨어진 모자를
집어들고 살펴본 결과, 그 모자의 임자는 술로 가산을
탕진하고 아내는 그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연한 일이 이와 같은 흥미 있는
세계를 안겨 주는 사람에게는 인생이 지루할 까닭이
없다. 일찍이 톨스토이가 새로운 생활에 들어가기
이전에 청년시절에 전재에서 세운 공로로 용사의 훈장을
탄 일이 있지만, 장기에 도취되어 그 수여식에
참석 못한 일이 있었다. 훈장을 타건 말건 그런 문제는
톨스토이의 안중에 없었기 때문에, 이것으로
톨스토이를 탓할 수는 없지만, 그만 못한 자가 그런
행동을 했다면 필경 어리석은 자라는 비난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자기가 하는 일이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세계가 얼마든지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기
쉽다. 그런 것을 알아서 무엇하느냐 하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대답이 준비되어
있다.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에게 필요한 활동과
모순되지 않는 올바른 세계관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머물러 있는 시간은 그다지 긴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신비스러운 이 지구와,
이 지구가 우주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하여,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 알아두어야 할 것은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설사 불완전한 지식일지라도, 그
자식을 얻는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것은
마치 극장에 가서 연극을  보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 세계는 슬픈 일, 우스운 일, 용감한 일,
기이한 일, 놀라운 일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세계의
삼라만상에 대하여 흥미를 느낄 수 없는 사람은
인생의 소중한 특권을 하나 포기하는 셈이다.
  조화를 이룬 감정은 매우 귀중한 것이다. 그것은
위로의 힘이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는 괜히
흥분하기 쉽고 긴장하기가 쉽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작은 한 구석을 차지하고 삶에서
죽음에 이르는 짧은 기간에 부당하게 당한 인상을 받기
쉽다. 자기를 소중한 존재라고 흥분하며
과대평가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렇게 함으로써 일은
열심히 하게 될는지는 모르지만 잘하지는 못할
것이다. 높은 목적을 향해 나가는 작은 일들은 저속한
목적을 이루려는 큰 일보다 훨씬 나은 것이다.
그러나 활동적인 생활만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은 나와
견해가 다를 것이다. 사업밖에 모르는
사람들은 언제나 광신에 빠질 우려가 있다. 광신은 본래
인생의 여러 가지 목적을 다 저버리고, 오직
한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언제나 물불울 헤아리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광신적인 태도를 예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약은, 인간의 생명과 그리고 인간이 이
우주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똑바로 아는 것밖에 없다.
  교육이 단지 어떤 기술을 배우는 것으로 격하된
결과, 세계를 공정한 눈으로 바라보고 정신의
시야를 넓히려고 하지 않는 것이 현대의 고등교육이
지닌 또 하나의 결함이다. 예를 들어 정당
싸움에서 자기 당이 승리하기 위해 애쓴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그런데 그 투쟁의 과정에서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오면, 세상에 대한
증오심과, 폭력과, 의혹을 조장하는 방법도 사양치
않는다. 그리하여 외국 국민을 욕되게 해서까지 승리를
얻기 위한 가장 가까운 방도를 찾는 경우도
있다. 보는 눈이 현재에만 국한되어 있거나 무조건
능률만 올리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불미스러운
방법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당장은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머지 않아 반드시
실패하고 말 것이다.
  눈앞의 실리만을 추구하는 태도를
초월하여 원대한 그리고 서서히 발전하는
목표를 가질 때, 당신은 한 사람의 고독한 존재가
아니라, 인류를 문명생활로 이끌어 가는 대행렬의
일원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인생관을 지니고 살아갈 때,
당신은 인생의 어떤 길을 걸어가든지 깊은
행복을 느낄 것이다. 인간이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모든
시대의 위대한 것과의 정신적인 교섭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죽음은 작은 사건에
불과하다.
  고등교육을 내 이상대로 재건하는 힘이
있다면, 나는 낡은 전통적인 종교 대신에, 다른
것--종교하고 부를 수 없는--을 대치하고 싶다.
그것은 오직 실제적인 현실에 관심을 집중시키기 때문에
결코 종교는 아니다. 또한 낡은 전통적인
종교는 젊은이들에게는 거의 매력을 상실하고 대체로
지능이나 정신이 몽롱한 사람에게나 작용을 한다.
  나는 청년들에게 우리의 과거를 분명히 알리는 동시에
인류의 미래는 과거보다 무한히 길다는 것을 잘
인식시키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구가 한없이 작다는
것과, 이 지구의 생명은 한낱 순간적인 현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깊이 깨닫게 하는 교육을 실시하고자
한다. 개인의 존재가 보잘것없음을 강조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청년들의 가슴 속에 개인의
위대성을 느끼게 하고 또한 일월성신의 대우주 속에
똑같은 가치를 지닌 존재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가르치려고 한다. 일찍이 철인 스피노자는 인간의
자유와 부자유에 대하여 서술한 적이 있다. 그의 표현
방식과 술어가 난해하여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그 사상을 이해하기 어렵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사상과 그의 철학은 근본 문제에 있어서는
비슷하다.
  정신의 위대성에 대하여 잠시라도 그리고
조금이라도 느낀 사람이라면, 사소한 불행에
시달림을 받고 어떤 운명이 닥칠지 몰라 두려워하는
비천한 이기주의적인 인간으로 전락되면 도저히
행복할 수가 없는 것이다. 위대한 정신의 소유자는
마음의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세계의 곳곳에서
불어닥치는 자유의 바람을 들이마신다. 그는 인간의
힘이 닿는 데까지, 자기와 인생과 세계를
바라볼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의 생명이 보잘것없고,
순간적임을 깨닫는 동시에, 한편 개인의 정신
속에는 우주가 지니고 있는 모든 가치가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이
세계를 비칠 수 있는 자는, 그것이 어느 의미에서
세계만큼 크다는 것도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
자기를 환경의 노예로 만드는 공포에서 벗어날 때
커다란 기쁨을 느끼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외면적인'
생활은 모든 우여곡절과 성쇠가 거듭되지만 깊은 정신
속에서는 언제나 행복을 누리고 있을 것이다.

  중용은 재미없는 주장이다. 나는 젊었을 때 조소와
의분을 금할 수 없는 심정으로 이 이론을 반대한
적이 있다. 나는 그 당시에 영웅적인 극단주의를
좋아했던 것이다. 진리는 반드시 재미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실은 그것을 지지할 만한 증거가 별로
충분치 않은데도 재미있다고 해서 신봉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이야기하는 중용도 재미없는
이론일지 모르지만, 여러 모로 비추어볼 때 하나의
진리임에 틀림이 없다. 적어도 노력과 체념에 관한 한
우리는 반드시 중용을 지켜야 한다. 이 두 가지
이론이 모두가 극단적인 지지자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체념의 이론은 성자나 신비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이요, 노력의 이론은 능률을 강조하는
전문가나 남성적인 기독교인들이 주로 강조하는
것이다. 노력과 체념은 서로 상반되지만, 각자 진리의
일면을 갖고 있다. 그러나 결코 전체는 아니다.
  행복은 무르익은 과일처럼 복된 환경에 의해 입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여기에
예외에 속하는 경우가 간혹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내가
이 글의 제목을 "The Conquest of Happiness ;
행복의 정복"이라고 붙인 까닭도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피할 길 없는 불행과 심신의 여러 가지 질병과
투쟁 및 빈곤, 그리고 죄악의 충만한 이 세상에서
행복한 인간이 되려면 누구나 다 함께 당하는
여러 가지 불행의 원인과 과감히 싸울 수 있는 방법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기는 별로 힘을 들이지
않고서도 행복을 찾아내는 사람도 더러 있기는 하다.
  천성이 선량하고 충분한 재산을 물려받은 데다가
튼튼한 몸에 훌륭한 취미까지 겸한 사람은 일생을
행복하게 지낼 수 있다. 이러한 사람은 어찌하여
남들이 그렇게 아우성을 치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할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이 넉넉하지
못하거나, 천성이 그리 선량하지 못하거나, 혹은 불행한
정열을 소유했거나 하여 조용히 규칙적인
생활을 하는 것은 권태로워서 견디지 못한다. 건강은
아무도 보장할 수 없는 선물이다. 또한 결혼도
반드시 행복의 원인이 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행복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은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성취이다. 여기에 도달하려면
내면적 그리고 외면적인 노력이 큰 역할을 하게
된다. 그런데 내면적인 노력에는 반드시 체념의 노력이
곁들어야 하므로 여기서는 단지 외면적인
노력만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살기 위해 일하지 않을
수 없는 경우, 노력이 필요한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인도의 승려들은 신도의 공양으로 수고를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지만, 서구 사회에서는
이러한 방법으로 수입을 얻는 것을 옳게 생각하지
않는다. 서구는 인도의 건조한 열대지방과는 달라서,
겨울에 따뜻한 방에서 일하는 것보다 밖에 나가서
놀기를 좋아할 정도로 게으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므로 서구 세계에서는 체념만으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서구 세계에서는 체념만으로
행복에 도달할 수 없다. 서양 사람들은 대체로 일에
성공을 거두는 데서 만족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단지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
그들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어떤 직업, 예컨대
과학 연구에 있어서는 큰 수입이 없는 사람도 성공에
대한 만족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직업에 있어서 수입의 다과가 성공의 기준이 된다.
여기에 체념의 윤리가 필요하게 된다. 왜냐하면
서로 생존경쟁을 해야 하는 사회이므로 커다란 성공을
거두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식을 훌륭히 기르는 데 필요한 노력의 양은
명확하므로, 아무도 그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체념의 윤리를 숭상하는 나라와 그리고 그릇된 영적인
인생관을 갖고 있는 사회는 사망률이 높다.
의학, 정신위생학, 방부제, 영양 등은 현실적인 관심이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 그것은 지식과 정력을
물질적인 세계에 쏟기 마련이다. 물질은 인간의 환상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먼지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함으로써 자기 어린애를 싱겁게 죽이는
경우도 있다.
  인간이 모든 사회적인 활동을 하게 되는 동기는
목적으로 재물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 한 어떤 권력에
대한 욕구이다.
  남의 비참한 모습을 보았을 때 일어나는 순수한
이타적인 동기에서 행동하는 사람은, 그 참상을 덮어
줄 수 있는 힘을 원한다. 권력에 대하여 전혀 무관심한
사람은 자기 이웃 사람에게도 무관심하다.
그러므로 어떤 권력 의욕은 훌륭한 사회를 이룩할 수
있는 인간의 한 도구로 인정해야 한다. 권력에
대한 욕구는 이것이 훼방을 당하지 않는 한, 노력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유럽인의 논리로
보면 당연하지만, 이른바 '동방의 지혜'를 좋게
생각하는 서구 사람들도 있다. 동양인들이 그것을
포기하려고 할 때 이들에게는 나의 주장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말한 보람이
있게 된다. 행복을 정복하는데 있어서, 체념이 할 일은
따로 있는 것이다. 그것은 노력이 지닌
역할만큼이나 소중하다.
  이 세상에서 이로운 일의 절반은 해로운 일과 싸우는
데서 생긴다. 여러 가지 사실을 알기 위해
소비하는 시간은 낭비가 아니다. 그후의 일은 정력에
대한 자극제로써 언제나 이기심을 팽창시켜야
하는 자들이 만드는 일보다 해가 훨씬 적다. 자기
자신의 진실을 용감하게 들여다보려는 태도에는,
어떤 체념이 깃들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체념은
처음에는 괴로울지 모르지만, 결국에 가서는 하나의
진실로 유일한 방패가 되는 것이다. 결코 믿을 수 없는
일을 언제까지나 믿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피곤하고 화가 치미는 것은 없다. 이러한 노력은 버리는
것이, 확고한 행복을 얻는 필수조건이 된다.

  행복은 분명히 일부는 외면적인 환경에 달려 있고,
일부는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 나는 역기서
자기 자신에 달려 있는 행복에 대해서 말했다. 이
부분의 행복에 대한 비결은 매우 간단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어느 정도 종교적인 신조가
없으면 행복을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불행한 자들은 슬픔의 원인은 매우 복잡하며,
거기에는 많은 지적인 요소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이런 것이 행 . 불행의 원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하나의 신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불행한 자는 대체로 갖고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각자가
행복과 불행을 자기 신조에 돌릴 것이다.
그러나 참된 원인은 다른 데 있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행복을 누리려면 물질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간단하다--음식, 집, 건강,
사랑, 사업의 성공, 세상 사람들의 존경 등등. 어떤
사람에게는 부성애가 필요하다. 이런 것이 없어도
행복한 자는 특수한 인간이다. 그러나 이런 것을 즐기고
계획적인 노력에 의해 이를 얻을 수 있는
경우라도 여전히 불행한 인간은 심리적인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이 감옥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자기 자신 속에
몰아넣은 정념이야말로 가장 고약한 감옥을 만드는
것이다. 이런 정념 가운데서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은 공포, 질투, 죄의식, 자기 찬미이다. 이런 정념에
사로잡힐 경우에 우리의 욕구는 언제나 자기
자신에게만 쏠리게 된다. 여기서는 외부적인 세계에
대하여 참된 관심을 갖지 않고, 오직 외부적인
세계가 우리를 해치거나, 또 우리의 이기주의를
만족시킬 수 없는 데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따름이다.
인생의 다양성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고, 오직 자기
자신을 따뜻한 옷에 감싸려고 하는 것은 주로 공포
때문이다. 가시에 의해 그 옷이 찢기고 그 구멍에
찬바람이 스며든다. 따뜻한 옷에 싸여 성장한 사람은
찬바람을 맞고 성장한 사람보다 당하는 고통이 크다.
그리고 언제나 자기 자신을 기만하는 사람은 마음
속으로는 자기의 더러운 몰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는 혹시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나, 자기의
허위가 드러나지 않을까 하여 언제나 불안에 싸여
살아간다.
  우리가 자기 본위의 욕심에 사로잡히는 폐단의
하나는, 인생에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는
점이다. 자기만을 아끼는 자는 애정이 혼란 되어 있다는
비난을 사지 않지만, 헌신의 대상이 언제나
같으므로 결국은 참을 수 없는 권태에 빠지게 마련이다.
  죄의식으로 하여 시달림을 받는 사람은 특수한 자애심
때문에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다. 그에게는
이 광대한 우주에서 자기의 덕행만이 가장 중대하게
보인다. 이런 특수한 자기 집념을 권장한 것은
어떤 전통적인 종교의 커다란 결점이다. 행복한 사람은
개관적으로 살아가고 자유로운 애정과 광범위한
흥미를 갖고 이를 통하여 자기의 행복을 소유하는 자요,
자기가 남에게 흥미와 애정이 대상이 되어
행복을 느끼는 자이다.
  남의 사랑을 받는 것은 행복의 커다란 원인이 된다.
그러나 대체로 애정을 요구하는 자는 사랑을
받지 못하는 법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남의 사랑을
받는 사람은 남에게 사랑을 베푸는 사람이다.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것처럼, 이해타산에서
사랑을 베푸는 것은 하나의 넌센스이다.
  자기 세계에만 몰두하는 병폐를 극복하면, 어떤
객관적 흥미가 마음 속에 솟아나는가는 당신의
성격과 외부적인 환경의 작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다.
"우표를 수집하는 취미가 있다면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미리 말할 필요는 없다. 우선
우표수집에 착수해 보라. 그렇게 하면 그것이 시시함을
느낄지도 모른다. 당신이 참으로 흥미를 느끼는 일만이
실제로 행복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 안에 빠져 들어가지 않게 될 때, 진정한 흥미가
우러난다고 믿어도 무방하다.
  행복한 생활은 선한 생활과 닮은 데가 많다.
전문적으로 도덕을 숭상하는 자들은, 자기 부정을
중요하게 생각함으로써 잘못된 주장을 내세우게 
되었다. 의식적인 자기 부정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아에 전념하도록 하고, 자기가 무엇을 희생하였는가를
기억하도록 한다. 그리하여 때때로 직접적인 목적
달성에 실패하고 또 거의 언제나 구극적인 목적 달성에
실패하게 된다. 우리에게 긴요한 것은 자기 부정이
아니라, 관심을 외부로 돌리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자발적으로 그리고 자연스럽게 자기 덕을 추구하기에
여념이 없는 사람이 의식적인 자기 부정에서 이룰 수
있는 행동과 마찬가지의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한 쾌락주의자 즉 행복을 선이라고 생각하는 견지에서
이 글을 썼다. 그런데 쾌락주의자의 입장에서
훌륭하다고 보는 행동은 진정한 도덕가가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행동과 대동소이하다.
  물론 도덕가들이 저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정신 상태보다 행동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행동이 인간에게 주는 영향은 그때 그때의
정신상태에 의해서 상당히 다르게 된다. 물에 빠진 어린
이를 보고 곧 건져내야겠다는 충동에서 그 아이를
건져내는 것은 하나의 선행이다. 만일 반대로
"불쌍한 자를 구제하는 것은 선행이다. 나는 선한
인간이 되고 싶다. 그러므로 나는 이 어린애를
건져내야겠다"고 말한다면, 그는 전보다도 더 악한 자가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내가 주장하는 생활태도와 전통적인 도덕가들이
주장하는 생활 태도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예컨대 전통적인 도덕가들은 사랑은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의 말이 어느
의미에서는 옳다. 다시 말하자면, 어느 한도까지는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의 성공과 행복은 서로 연관성을 갖고 있어야 한다.
만일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에게 청혼을 할
경우에, 그 여자의 행복을 절실히 바라는 동시에 그
여자는 자기에게 희생적으로 대해 줄 것이라고
기대할 때, 그 여자가 이에 만족을 느낄 수 있을지는
의심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물론 사랑하는 사람의 행복을 바라는 것이
당연하지만, 결코 우리 자신의 행복과 바꾸어서는
안 된다. 자기와 외부 세계와의 대립은 자기 부정의
우리 속에 내포되어 있지만, 우리가 남에게
진심으로 관심을 갖는 순간에 그 대립은 없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관심을 통하여 자기 자신을
빌리어드의 공처럼 충돌하는 것밖에는 다른 실체와
아무런 관계도 없는 서로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생명의 긴 물줄기의 한 부분으로 느끼게 된다.
  인간은 피차에 통일을 상실하고, 분열될 경우에 모든
불행이 일어난다. 그리고 의식적인 정신과
무의식적인 정신의 협력이 부족할 경우에 자아의 분열이
생기는 것이다. 객관적 세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힘으로 자기 자신과 사회가 피차에 결합되지
못하면 그 통일은 상실하고 만다.
  행복한 인간은 자기와 사회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아
괴로워하는 일이 없다. 그의 인격은 자기
자신에 대하여도 분열되지 않으며, 세계에 대하여도
대립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을
'우주의 시민'이라고 생각하고, 우주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마음껏 향락하며, 자기들 뒤에 오는
생명과 분리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함으로써 죽음에
대하여도 마음이 동요되지 않는다. 이처럼 생명의
큰 물줄기와 본능적으로 깊이 결합될 경우에, 우리는
가장 큰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