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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그 가뭇한 향기

행복, 그 가뭇한 향기
    헤르만 헤세
  독일의 시인이자 소설가. 독학으로 문학에 입문하여
22세 때 처녀 시집 출간 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
  대표작 "지와 사랑" "데미안" 등이 있음.

  신이 생각한 인간, 문학이나 지혜가 몇 천년을 걸쳐
이해해온 인간은, 사물이 쓸모 없는 경우에도
아름다움을 해석하는 기관을 가지고 그것을 즐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도록 만들어졌다. 미에 대한
인간의 기쁨에는 언제나 정신과 감각이 동등한 정도로
관여하고 있다. 인간이 삶의 역경과 위험
한가운데에서도 그러한 것을 즐길 줄 아는 한, 즉
자연이나 회화 속의 색채의 어우러짐, 폭풍우나 바다
소리 속에서 들려 오는 외침 또는 인간이 만든 음악
같은 것을 즐길 줄 알고, 이해나 어려움의 표면
깊은 곳에서 세상을 전체로 바라보거나 느낄 줄 아는 한,
또는 막 태어난 강아지의 감동적인 눈길에서
시인의 비극에 이르기까지 서로 연관이 있고 무한히
풍부한 연대성. 상응. 유사. 반영 등이 존재하고
있어 끊임없이 흐르는 그 언어들에서 기쁨과 지혜,
농담과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그 같은 전체로서
세상을 바라보고 느낄 수 있는 한--그것을 할 줄 아는
한, 인간은 자기라는 것에 달라붙는 의문을
가지고 자신의 존재에 되풀이해 의미를 부여할 수가
있으리라. 진실의 인간, 건전하고 불구가 아닌
인간에게 있어서는, 세계와 신은 끊임없이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기적에 의해 실증되어진다. 즉
저녁이 되면 시원해지고, 노동의 시간이 끝난다는 것
외에 저녁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가 다시
장미빛에서 보라빛으로 매혹적이며 거침없이 옮겨져
간다고 하는 현상이 있다는 것, 꽃받침 속의
수술의 질서 같은 것, 작은 판자쪽으로 만들어진
바이올린 같은 것, 음계와 같은 것, 언어처럼 실로
불가해하고 미묘하고 자연과 정신에서 태어난 것,
이성적인 동시에 초이성적이며 어린애다운 것이
있다는 것, 세상의 아름다움, 신기함, 수수께끼, 그리고
무릇 인간적인 일체의 것이 모면할 수 없는
연약함, 질병, 위험 따위를 내몰고 방지하지는
못하더라도 영원불변으로 보이는 것이 있다는 것 --
이와 같은 것이 세계를, 그 사도며 제자가 되는
우리들에게 있어 지상의 가장 신비적이며 존경할
값어치가 되는 현상의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각 민족 혹은 각 문화 협동체가 내력에 상응하는
동시에 아직 표명되지 않은 목표에 소용되도록
언어를 만들어낸 것만은 아니다. 또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의 언어를 배우고 찬탄하고 냉소하지만, 결국
완전히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도 사실은 아니다. 아니,
각 개인에게 있어서도 아직 언어가 없는
원시세계나 궁극에 이르기까지 기계화되어 버린, 때문에
다시 언어가 없어진 현실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 한, 언어는 인격적인 재산인 것이다. 언어에 대한
감수성을 지닌 사람, 지리멸렬해지지 않은
건전한 인간에게 있어서는 예외없이 말과 글, 자모나
형태, 문장 구성의 가능성 같은 것은 그 사람
나름의 특수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다. 모든 진실한
언어는 그것을 알도록 그것을 가지고 태어난
모든 사람에 의해 완전히 개인적으로 감동되고
체험되어지는 것이다. 본인이 그것을 도무지 자각하지
못할 경우에도 거의 모든 인간은 대체로 언어감각을
지닌 한, 어떤 종류의 말이나 음이나 모음 또는
자모의 순서에 대해 독특한 나름의 취향을 가지고 있다.
어떤 사람이 어느 특정의 시인을 특별히
좋아하거나 거부하는 경우, 거기에는 그 시인의 언어
취미라든가 청각이 독자의 그것과 비슷하거나
무연한 것도 관계가 있는 것이다. 예컨대 나는, 수십 년
동안 사랑을 해오고, 지금도 사랑하고 있는
많은 시구를 들어, 그 의미나 지혜, 경험이나 선의나
위대함 같은 내용으로 해서가 아니라 단지 특정한
운이나 흔해빠진 형태에서 리듬이 독특하게 변해 있는
것으로 하여,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 언어는, 화가에게 있어 팔레트
위의 물감이 의미해 주는 그것과도 같은
것이다. 언어는 무수히 많다. 그리고 끊임없이 새로운
언어들이 발생한다. 하지만 참다운 언어는
그리 많지 않다. 나는 70년 동안에 새로운 언어가
발생하는 것을 체험하지 못했다. 그림물감도
그 농담과 혼합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지만 아무렇게나
얼마든지 있는 것은 아니다. 언어 가운데에는
말하는 사람 모두에게 있어 좋아하는 말, 익숙하지 않은
말, 특별히 끌리는 말, 피하는 말이 있다.
천번을 써도 못다 쓰는 일상어도 있거니와 아무리
사랑하고 있다 해도 신중히 다루어 장중한 것에
걸맞는 말이 있고, 드물긴 하지만 특별히 가려서 입에
올리거나 글로 써야 하는 다른 종류의 장중한
언어도 있다.
  나에게 있어서는 행복이라는 단어가 바로
그러한 것 중의 하나이다. 그것은 그러니까
내가 언제나 사랑해 오고 반갑게 들어온 하나의 단어다.
그 뜻을 놓고는 얼마든지 논의하고 그 이유를
달아볼 수 있겠지만, 어쨌든 이 단어는 아름다운 것,
좋은 것, 바람직한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
단어의 울림도 그에 걸맞는다고 나는 생각해 왔다. 이
단어는 짧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우리만큼 무겁고
충실한 것, 황금을 연상케 하는 데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충실하고도 아주 묵직할 뿐만 아니라, 이
말에는 확실히 광채도 서려 있었다. 구름 속의 전광처럼,
짧은 스펠링 속에 광채가 깃들어 있다. 짧은
엮음은 잠깐 쉬고, ck에서 딱 잘라 간결하게 끝난다.
웃지 않고는, 또는 울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말,
근원적인 매력과 감성이 넘치는 언어였다. 이것을 옳게
느껴 보고 싶을 땐, 이 황금의 언어 곁에다
나중에 만들어진 천박하고 피로한 니켈이나 구리 같은
단어--예를 들어 소여라든가 이용이라는
단어--를 배열해 보면 모든 게 명확하게 드러난다.
의심할 것도 없이 그것은 사전이나 교실에서 나온
단어는 아니었다. 고안되고 전화되거나 합성된 것이
아니라 하나로 이루어져 있었고 완전하였다.
햇빛이나 꽃처럼 하늘과 땅에서 온 것이다. 그러한
언어가 있었음은 얼마나 행복하며 가슴 벅찬
일이던가! 그런 언어를 갖지 못하고 살아가거나
생각하는 것은 시들어 메말라 가는 일이리라. 빵과
포도주가 없는, 웃음과 음악이 없는 삶과 같은
것이리라.
  이런 면을 향해서, 즉 자연의 감각적인 면을 향해서
행복이라는 말에 대한 나의 관계는 조금도
발전하거나 변화되지 않았다. 이 언어는 언제나와
다름없이 오늘날에도 짧고 무겁게 황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나는 소년시절에 이 말을 사랑했듯이
지금도 사랑하고 있다. 이 불가사의한 상징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이 짧고 묵직한 언어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이에 대한 나의 의견이나
생각은 여러 형태의 발전을 체험하고, 훨씬 훗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하나의 명백한 결론에 도달했다.
내 생에 절반을 훨씬 넘어설 때까지, 뭇 사람들의 입에
올려질 때에 행복은 확실히 어떤 적극적인 절대
가치의 것을 의미하고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평범한 것을
뜻하고 있음을, 나는 검토도 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행복'이라고 할 때는, 좋은 가문,
좋은 교육, 좋은 경력, 좋은 결혼생활, 가문과
가정의 번영, 뭇 사람으로부터 받는 신망, 많은 돈이
들어 있는 지갑, 재물이 가득 찬 금고 등이
떠올랐다. 나도 모든 사람들과 똑같았다. 어진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었듯이, 행복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세계사에서도 행복이란 것을 말했다. 행복한 민족과 행복한
시대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으로 미루어 봐도,
우리들 자신이 매우 '행복한' 시대 한가운데에서
살고 있었다. 우리들은 긴 평화와 드넓은 거주권과 아주
편안하고 쾌적한 행복에, 마치 따뜻한 탕 속에
들어앉아 있듯이 젖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미처 깨닫지 못했다. 이 행복은 너무도 당연한 것
것이라고 여겼다. 겉보기에 지극히 즐겁고 쾌적하며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던 우리 젊은이들은 웬만큼
자각을 지녔다 하면 우쭐해지며 회의적인 기분이 되어
죽음과 퇴폐, 정신의 천박함을 거의 장난 삼아
가지고 놀기가 일쑤였다. 그리고 15세기의 피렌체나
페리클레스의 아테네 등 기타 옛 시대는 행복한
시대라고 떠들어대고는 했다. 우리는 역사책을 읽고
쇼펜하우어를 읽기 시작하였으며, 최고급의
표현이나 미사여구에 대해서는 전에 없이 불신감을 품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정신적으로 완화되고
상대화된 풍토에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그러면서도
역시 부담감 없이 행복이라는 단어에
부딪치거나 하면, 그것은 옛날처럼 변함없이 충실한
황금의 음향을 울려 최고로 가치 있는 것을
상기시키고는 했다. 단순한 소인배들은 인생에서
보편적으로 일컫는 재화를 행복이라 부르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우리는 이따금 생각했다. 이에 반해 우리는 이
말을 들으면 차라리 영혼의 지혜나 초월이나
인내, 그리고 확신 따위를 생각했다. 그것들은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아름다운 것의 전부였지만,
'행복'과 같이 근본적이며 충실하고 깊은 명칭의
값어치가 있지는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나의 개인적인 생활은 더욱 앞질러
나아가, 세상에서 말하는
행복한 생활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이른바
행복을 겨냥하는 노력도 거기에 끼어들 여지나 의미가
없어졌음을 알게 되었다. 때때로 격정이 일 때,
나는 아마도 이 태도를 운명을 사랑하는 마음이라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국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던 과열된 성장의 상태를 제외하고는 그다지
격정으로 치닫는 일이 없었다. 비격정적인
쇼펜하우어의 욕망없는 사랑도 이미 나의 무조건적인
이상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된 것은, 중국
달인들의 생활이나 장자의 비유를 잉태시킨 지반이 된
지혜, 조용하고 눈에 띄지 않으며 조심성 있고
언제나 약간은 조소적이랄 수도 있는 지혜에 탐닉된
다음부터의 일이다. 이제 군소리는 그만두기로
하자. 나는 비교적 확고한 단언을 내릴 참이다. 먼저
지엽적으로 흐르지 않기 위해, 행복이라는
말속에는 오늘의 나에게 있어 어떤 내용과 의미가 담겨
있는가, 그것을 다른 말로 평이하게 설명해
보기로 한다. 나는 오늘날 행복을 통해 온전히 객관적인
것을 이해하고 있다. 즉 전체 그 자체,
몰시각적인 존재, 세상의 영원한 음악, 뭇 사람들이
천구의 조화 내지는 신의 미소라 일컫고 있는 것
등을 이해한다. 이 정수, 이 무한한 음악, 이 넘쳐
울리며 황금빛으로 빛나는 영원은 순수하고 완전한
현재일 뿐, 시간도 역사도 이전도 이후도 그 안에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인간과 그 세대와 민족과
국가는 일어나고 번영하고 그러다가 그림자와 허무
속으로 스러져 없어지지만, 세계의 얼굴은 영원히
빛나며 미소짓는다. 인생은 영원을 향해 음악을 울리고,
영원 속에서 춤을 춘다. 우리네 무상의 존재,
위험 속에 처해진 존재, 연약하기 이를 데 없는
존재들에게 더욱 주어질지도 모르는 기쁨과 위로와
웃음은, 그곳으로부터의 광휘 고 빛에 충만한 눈이며
음악으로 가득 찬 귀인 것이다.
  언젠가 전설적인 '행복한' 인간이 실제로 있었다
해도--시새움으로 가득 채워진 행운아나 태양의
아들이나 세계의 지배자도 때로는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시간, 또는 순간에 어쩌다가 큰 빛에 비쳐졌다
할지라도--하지만 그들은 다른 행복은 체험하지 못했고,
다른 기쁨은 맛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완전한 현재 속에서 숨쉬고 있는 것, 천구의 합창
속에서 같이 노래하는 것, 세계의 윤무 속에서 함께
춤추는 것, 신의 영원한 웃음 속에서 함께 웃는 것,
그것이야말로 행복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것을 단 한 번, 아니 몇 번만 체험했다. 그러나
그것을 체험한 사람은, 단순히 한 순간만 행복했던
것이 아니라 몰시간적인 기쁨의 광휘나 여운의 그
무엇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세상에
사랑하는 이가 가져온 사랑, 예술가가 가져온 기분
전환의 유쾌한 모든 것들, 그리고 몇 세기 뒤에도
최초의 날처럼 밝게 빛나고 있을 그 모든 것들은 바로
거기서 오는 것이다.
  나의 경우, 행복이란
언어는 내 생애를 거치는 동안에 이처럼 포괄적으로
우주의 크기 만한 신성한 의미에 도달했다. 나는
여기서 언어학을 강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신역사의
일편을 말해 주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사람들
것을, 그리고 사람들이 말하거나 글로 쓰는 경우
행복이라는 언어에 이같은 큰 의미를 달도록 하라고
다그칠 생각이 결코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 둘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는,
이 은혜롭고 짧은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단어 안에 내가
어린시절부터 그 울림을 듣고 느껴온 모든
것들이 모여들고 있는 것이다. 그 느낌은 어린시절에 더
강하고 분명했다. 그 감각적인 성질이나
단어의 속삭임에 대한 모든 감각의 응답은 더 강하고
높았다. 하지만 이 단어 자체가 그토록 깊이
또 근원적으로 세계를 감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면,
영원한 현재라든가 황금의 흔적(골트문트),
불멸의 웃음(황야의 이리)따위의 나의 상념은 결코 이
단어를 거쳐서 결정되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나이 든 사람들이 언제, 얼마나 자주 그리고 얼마나
강하게 행복을 느꼈는가를 알아볼 때는,
뭐니뭐니해도 유년시절을 떠올려 그것을 찾게 된다.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행복을 체험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야 함과 동시에 공포나
희망의 지배를 받지 않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대개가 나이와 더불어 그와
같은 힘을 잃어 가기 때문이다. 나도 영원히
빛나는 현재와 신의 미소에 잠겨 있었던 순간을 돌아볼
때면, 그때마다 유년시절로 돌아가곤 한다.
그리고는 거기서 이러한 종류의 가장 귀중한 수확을
가장 많이 찾아내는 것이다.
  확실히 기뻤던 청년시절은 그 이상으로 눈부시게
다채로우며 화려하게 꾸며져 있고, 영롱한 채광으로
비쳐져 있다. 거기에는 유년시절의 기쁘던 순간 이상으로
정신이 관여되어 있었다. 그러나 더욱 깊이 알고 보면,
그것은 진정한 행복이라기보다는 기분 전환이며
흥미로움이었다. 익살스런 기지가 번들이고 재기가
넘쳐흘렀다. 여러 가지 신나는 기분 전환도 했다.
더없이 정다운, 젊은날의 친구들과 어울려 지낸 날을
나는 기억한다. 그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한
친구가 호메로스의 큰 웃음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하고 갸우뚱거렸다. 나는 정확하게 육각운에 따라
억양을 붙인 리드미컬하게 큰 웃음으로 그들에게
대답했다. 모두들 크게 웃으며 기쁨의 술잔을 부딪쳤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순간은 후일 음미해 보니
아주 시시했다. 그런 것은 다 아름답고 재미있고
감미로웠지만 행복은 아니었던 거이다. 이와 같은
검토를 충분히 긴 시간을 두고 계속해 보면, 행복은
역시 유년시절에만 체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행복을 체험한 때나 그 순간을 다시 찾아내기는
너무도 어려웠다. 왜냐하면 이 경우,
유년시절의 범위에서도 훗날에 음미해 보니 그 광휘가
반드시 진짜는 아니었고, 황금도 반드시 순금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심하게
말한다면, 지극히 적은 체험밖에는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그것도 물론 그려낼 수 있는 정경이거나
이야기할 수 있는 구체적인 사항은 아니었다. 그러한
체험을 좇다 보면 그것들은 어느새 슬며시 몸을 돌려
피해 버렸다. 그런 회상이 떠오르면, 우선 그것은
몇 주일이나 몇 날 또는 적어도 하루의 일처럼
생각되었다. 예를 들면, 크리스마스나 생일날이나
휴가 첫날 따위처럼--그렇지만 어린시절의 하루를 기억
속에 재현시키는 데는 무수한 정경을 필요로
한다. 단 하루를 위해서나 반나절을 위해서도 기억력을
충분한 양의 정경을 모으기가 어려울 것이다.
  몇 날, 몇 시간, 아니면 고작 몇 분 동안의 체험이긴
하지만, 나는 행복을 몇 번이고 체험했다.
그 뒤에, 나이가 들고서도 나는 여러 순간 행복에
가까이 다가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인생의 초기에
만났던 여러 종류의 행복들을 되살리며 음미해 볼
적마다, 그 가운데서 유독 하나만이 또렷이 남는
것이었다. 그것은 나의 학생시절의 일이다. 그러나 그
행복과의 만남의 독특한 점, 순수한 점,
근본적인 것, 신화적인 것, 조용히 웃으면서 우주와
일체가 되어 있는 상태, 시간과 희망과 공포로부터
절대적으로 놓여 있는 자유의 상태, 완전히 현재인 상태
그것은 결코 오래 지속되어지지 않았다.
  어느 날 아침, 열 살의 씩씩한 소년이었던 나는
확실히 여느 때와는 달리 굉장히 기쁘고 즐겁게
상쾌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것이 나를 내부의
태양처럼 속속들이 비춰 주었다. 소년이 막
깊은 잠에서 깨어난 순간에 무슨 새로운 것, 멋있는
일이 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아름다운 생활
전체가 지금 바야흐로, 이 새아침에 가치와 의미를
남김없이 획득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어제 일도
오늘 일도 모두 잊고 있었다. 그런 상태에서 나는
행복한 오늘에 감싸여 포근하게 정화되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상쾌하게, 감각과 영혼에 의해,
호기심이나 변명도 없이 감지되었다. 그것은 말하자면
내 몸 전체에 스며드는 황홀함이었다.
  아침이었다. 높은 창을 통해, 이웃집의 기다란 지붕 너머로
투명한 담청색으로 밝게 펼쳐져 있는 하늘이 보였다.
하늘도 행복에 가득하여 뭔가 특별한 일을 꾸미고
있는 듯이, 그 때문에 고운 옷을 갈아입기라도 한 듯이
보였다. 나의 잠자리 속에서는 넓은 세상도
그 이상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지붕도, 짙은
적갈색으로 된 기와의 권태롭고 살풍경한 지붕도
웃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가파르고 그늘진 경사면에
온갖 색깔들이 아련하게 어려 있었다. 지붕에
뚫린 단 한 장의 파아란 광창이 붉은 점토의 기왓장
사이에서 숨을 쉬면서, 고요하게 찬란히 빛나는
아침 하늘의 일부를 비추려고 기꺼이 노력하고 있었다.
하늘, 울퉁불퉁해 보이는 지붕의 모서리,
나란히 늘어선 갈색의 기왓장, 공기처럼 엷은 단 한 장의
물빛 광창 등이 서로 아름답고 즐겁게 화합해
있는 듯이 보였다. 이 특별한 아침 한때에 그들은
명랑하게 서로 웃으며 서로 착한 마음으로 대할
생각밖에는 안 하고 있는 듯했다.
  하늘의 파아란 색,
기와의 갈색, 유리창의 푸른색 등은 한마음으로
한 몸이 되어 함께 어우러져 노닐고 있었다. 모두 즐거워
보였다. 그들을 바라보고, 그들의 유희에
함께 어우러지며, 그들처럼 아침의 광휘와 쾌감에 젖는
느낌을 안아 보는 것은 참으로 멋있고
기분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나는 잠의 포근한 여운과
함께 시작되는 아침을 즐기면서 누워 있었다.
하나의 아름다운 영원이었다. 일생 동안에 이때를
제외하고도 똑같은, 혹은 유사한 행복이라도 맛본 일
일이 있었던가, 어쨌거나 행복이 이때만큼 깊고 보다
현실적이었던 적은 없었다. 세상은 질서다. 이
행복이 100초 동안 이어졌는지 혹은 10분 동안
이어졌는지--하여튼 그것은 시간 밖에, 그러니까
시간의 질서 밖에 있었으므로 다른 모든 진짜 행복과
완전히 닮아 있었다. 마치 팔랑팔랑 날고 있는
얼룩 나비가 다른 것과 완전히 유사한 것처럼
말이다--그것은 잠시였다. 시간에 씻겨지고 있었다.
그러나 60년이 더 지난 오늘날에도 나를 불러
끌어당김으로써, 내가 피로한 눈과 아픈 손가락으로
거기에 호소하고 미소를 보내며 그것을 묘사해 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게 하기에
충분할 만큼 깊은 영원이었다. 그 행복은 내 신변의
사물들과 내 존재의 조화 및 어떠한 변화나 상승도
원치 않는 바랄 것 없는 유쾌한 즐거움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집 안은 아직 고요했다. 밖에서도
소리는 들려 오지 않았다. 이 고요함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일어나 학교에 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상적 의무에의 경고가 내 상쾌한 기분을 흐트러뜨렸을
것이다. 하지만 틀림없이 그때는 낮도 밤도
아니었다. 달콤한 빛과 웃음띤 하늘색이 있었지만,
현관의 돌마루 위를 하녀가 부지런히 오가거나,
방문을 여닫는 소리가 나거나, 빵집 아이가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지도 않았다. 그 자체로 충족되어
있었다. 그것은 나를 온전히 감싸안아 들이고
있었으므로, 나에게 있어서도 날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고, 기상이나 학교, 절반쯤만 끝낸 숙제, 못다 외운
단어, 상쾌하게 환기된 식당에서의 부산한
아침식사 따위도 생각하지 못했다.
  행복의 영속은 이때 역설적이게도 아름다운 것의 증대, 기쁨의
증가와 과잉에 의해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하고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는 내 속에, 환하고
조용한 아침 세계가 들어와 나를 감싸안고 있는 동안에,
멀리서 뭔가 심상치 않은 것, 찬란한 것,
극도로 밝은 것이 황금처럼 승리를 뽐내며 정적을 뚫고
다가왔다. 그것은 가슴이 터질 듯한 기쁨과
마음을 진작시키며 깨어나게 하는 감미로움에 넘쳐
있었다. 나팔 소리였다. 이제 비로소 완전히 잠이
깨어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며 부드러운 이불을 냉큼
걷어차 버리고 있는 사이에, 그 울림은 이미 두
갈래로 그리고 다시 여러 갈래로 증폭되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연주하면서 골목을 행진해 가는
마을의 음악대였다. 그것은 울려 퍼지는, 아름다움에
넘치는, 진짜 신기한, 가슴 뛰놀게 하는
일이었으므로 어린애의 마음이 내 몸 속에서 미소짓는
것과 동시에 흐느껴 울었다. 그 은혜로운 한때의
행복이나 매력도 이 자극적이고 짜릿하게 감미로운 소리
속으로 흘러들어, 불러내는 소리에 깨어나
다시 어렴풋한 시간 속으로 되돌아와서는 넘쳐흐르는
듯했다. 그 순간, 나는 축제의 기쁨에 몸을
떨었다. 자리를 박차고 문으로 달려나가 옆방으로
뛰어들어갔다. 그곳은 창으로 밖이 내다보였기
때문이다. 환희와 호기심과 보고 싶은 욕망의 도취
속에서 나는 열린 창틀에 올라앉아, 다가오는
음악의 자랑스럽게 높아져 가고 있는 진동을 울렁이는
가슴으로 들으며, 이웃의 집들과 길이 잠에서
깨어나 활기를 띠며 얼굴과 모습, 소리로 가득 차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에 나는 또
잠과 낮 사이의 상쾌한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들을 남김없이 의식했다.
오늘은 진짜 학교수업이 없고, 대축제일이었다는
것--임금님의 생신이었던 것 같다--행렬과 깃발과
음악 등의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즐거운 일들이 여러
가지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알게 됨과 동시에 나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일상을 지배하는 법칙 아래 놓여졌다. 금속의
울림소리에 눈을 뜨고 깨어난 그들은 여느 날이 아니라
축제일이었지만, 이 불가사의한 아침의 독특한
아름다움이며 신성함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고
잔잔하고 아름다운 기적이 사라지고 난 바로 그
자리에는, 시간과 세계와 일상생활의 물결이 서로
부딪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