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상은 인류역사의 변천과 더불어 약 2500년 동안 다양한 특징을 지니고 발전해왔는데, 이들 사상의 공통점은 1차적으로 신과 자연,
그리고 우주에 존재하는 근본원리를 도출하여 이를 바탕으로 인간의 존재의미와 본성을 밝히려 한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의 본성을 두 가지로
제시하였는데, 하나는 이성 적 측면을 중시한 사상이고, 다른 하나는 감각 적 욕구충족을 중시한 사상이다. 그리스 철학, 스토이즘,
합리론, 관념론(특히 칸트)은 이성적 측면을 강조한 사상인데, 주로 보편주의적 세계관을 취하였다. 반면 키레네 학파, 에피쿠로스 학파,
경험론, 자연주의 윤리설, 공리주의 등은 감각적 측면을 강조한 사상으로, 주로 상대주의적 세계관을 취했다.
서양사상의 원류
영국의 비평가 매튜 아놀드는 세계역사는 헬레니즘과 해브라이즘 사이를 오락가락한다 고 했다. 이는 오늘날 서양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2개의 지주를 그리스 정신과 크리스트교 정신으로 본 것이다. 그리스 사상은 인간중심 사상으로 인간의 이성과 감정을 존중하고 인간의
현세적 의미의 긍정과 자아를 강조하여, 후에 서양의 철학.과학.문학(사실주의).예술 등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반면 크리스트교
사상은 신중심으로 특히 영성과 덕성을 존중하고 내세적인 성격을 띠는데, 이는 뒤에 신학.예술.문학(낭만주의) 등에 영향을 주었다.
그리스 사상(헬레니즘)
동양문명에 대응하는 가장 뚜렷한 서양문명의 원류는 고대 그리스의 사상과 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 기원전 5세기경 페르시아와의 전쟁이
끝나면서 그리스 사상의 무대는 그리스 본토에 있는 아테네로 옮겨져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는데, 이때부터 서양사상의 원류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즉, 과학과 철학, 문학과 미술, 정치와 각종 제도 등이 이전에 비해 한 차원 높은 수준에서 체계화되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의 철학자는 3단계의 발전과정, 즉 #1자연철학 #2소피스트(궤변학파) #3고전철학의 시기로 파악된다. 자연철학의 시기는
자연계의 본질을 탐구하려는 시기로서, 자연현상을 해석함에 있어 신화의 단계를 벗어난 수준이었고, 소피스트 학파는 주로 자연보다는
인간 문제에 관심을 쏟았다.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의 지적 혁명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대표적인 소피스트인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이 만물의 척도 라고 하면서, 인간의 감각적 경험과 그 유용성이 모든 사물에 대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소피스트들에게 있어서 가치판단의 주체는 곧 인간들이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진리관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소피스트들의 상대주의.회의주의.개인주의에 대항하여 절대적 진리의 기준을 확립하려는
새로운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로서 그리스 고전철학이 성립되었다.
1. 소크라테스
고전철학 시대에는 인식론과 윤리학 및 사회철학에 있어 치밀한 체계가 나왔는데, 진정한 의미에서의 서양철학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철학운동의 기수는 소크라테스였다. 그는 저술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제자인 플라톤이 남긴 저술에 의해 그의 사상을
분석해볼 수밖에 없다.
소피스트들이나 소크라테스는 다 같이, 자연보다는 인간의 본질을 아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 점에 대해서는 공통적이었으나,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의 진리의 상대성 에 대해, 모든 인간의 삶에 있어서 보편적.절대적으로 실재하는 진리나 지식을 구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이러한 진리나 지식은 모든 인간에게 내재해있는 보편적 이성 활동에 의해 인식될 수 있다고 하였다. 더 나아가, 그는 진리와
지식을 발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반드시 실천해야 한다는 지행합일설을 제시하였다.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에 의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진리나 지식을 발견하고 이를 실행할 때에 선하고 행복한 삶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실제생활 속에서 악한 행위를 저지르게 되는 까닭은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 옳고 그른지를 모르는 무지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는 델포이 신전에 씌어 있던 너 자신을 알라 라는 구절을 인용하면서, 자신의 무지를 스스로 자각할 것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참된 앎을 통해 덕을 쌓아 갈 때에 비로소 행복을 누린다고 하였다. 이러한 지덕복합일설은 앞에서 제시된 지행합일설과 그 맥을 같이한다.
2. 플라톤
인간의 이성 에 근거한 소크라테스의 철학사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졌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윤리사상을 이어받아
감각적으로 경험되는 현상의 세계는 다만 이데아 세계의 불완전한 모상에 불과할 뿐이라는 진리관을 제시하였다. 그는 선의 이데아 를
모방해서 이를 실현해가는 것을 참된 삶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인간이 자신의 잠재능력을 개발하여 자아를 실현해가는 삶의 방식을 말한다.
자아실현은 구체적으로 지혜.용기.절제가 서로 조화를 이루어 정의 를 실현할 때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지혜.용기.절제의 덕을 개인이
갖추어야 할 덕이라고 한다면, 정의 는 개인의 덕들이 사회 속에서 실현될 때 나타나는 사회의 덕, 즉 이상국가의 덕이다.
그의 이러한 정치사상은 정치공동체에서 인간의 삶이 가능하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들에 관한 성찰을 담고 있는 <국가>에서 철인왕에 의해
통치되는 정의로운 국가가 잘 나타나 있다. 플라톤이 제시한 이러한 4주덕은 그 이후 서양사상에서 강조된 덕목이었다.
3.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소크라테스,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궁극적 목적을 최고선의 실현, 행복추구, 이성적 자아의 실현에 두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이성에 의해 감각적이고 육체적인 생활을 절제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덕에 대해서 말하기를 단순히 지식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선한 행위를 실천하고자하는 선의지 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는 이러한 의지를 함양하기 위한 실천적 덕으로서
중용(middle of the road)을 제시하였다. 중용이란, 이성에 의해 일상생활에서의 충동.정욕.감정 등을 억제함으로써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려는 의지를 습관화한 덕이다. 그는 또 인간을 정치적 동물이라고 규정하면서, 개인의 이성적 자아실현은 사회나 국가에서의 실천적
도덕생활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고 정치사상은 정치학이 학문으로서의 독립된 지위를 얻게 한 그의 저서 <정치학>에 잘 표현되어 있는데,
정치공동체의 성격과 장단점, 가장 좋은 나라의 체제, 당시 국가체제들의 비판, 그 외의 서양정치학의 기본개념들이 다루어지고 있다.
한편 그리스의 역사기술은 그후의 역사학 발달에 크게 기여하는데, 서양 역사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헤로도토스가 그 주역이다. 기원전
5세기 초반의 페르시아 전쟁을 그린 <역사>는 동서양의 만남을 보여주고 있는 최초의 서양 역사기록으로, 페르시아에 대한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를, 폭군의 통치에 대한 법의 통치의 승리로 기록하고 있다. 여러 지방에 걸친 그의 여행과 생생한 경험을 바탕으로 기술된 이 책에서,
우리는 동방대국의 침략을 물리친 그리스 인의 자부심과 자아의식이 형성되기 시작하는 단초를 읽을 수 있으나, 대체로 문화적 설화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어 나타난 위대한 과학적 역사가는 투키디데스로, 그는 사료에 대한 주의깊은 검토를 바탕으로 역사를 자연과 구별지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아테네 인들에 대한 동정을 억제하고 객관성을 유지하여 기술하였다. 그는 과거사실에서 교훈을 얻고자 하는 교훈적 역사 를
서술하고자 하였으나, 사회적.경제적인 면을 되외시하였다는 점에 그의 역사관의 결함이 있었다.
헬레니즘 시대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기원전 334년)부터 아우구스투스가 로마제국을 건설할 때(기원전 30년)까지 300년을 헬레니즘 시대 라 한다.
동서융합정책으로 그리스의 이상은 대부분 상실되어, 새로운 문명 즉, 그리스 문화와 동방문화가 혼합되어 새로운 그리스 풍의 세계적인
성격을 띤 문화와 구별하여 헬레니즘 문화(Hellenistic Culture)라고 부른다.
폴리스를 중심으로 발달한 그리스 인들의 공동체적 생활약식은 그리스와 국력이 쇠퇴함에 따라 점차 개인주의적 생활양식으로 전환되었다.
특히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원정으로 그리스 문화와 페르시아 지방을 위시한 동방문화가 융합되어 범세계적인 헬레니즘 문화가 발전되어감에
따라, 그리스 인들의 자유로운 안심입명을 시도하는 이기주의나 세계시민의 철학사상이 전개되었다. 이처럼 그리스 문화를 로마까지
연결시킨 교량적 역활을 한 헬레니즘 문화는 상대주의.세계주의.개인주의.도피주의를 그 특징으로 하는데, 대표적인 사상에는 스토아
학파(금욕주의 사상)와 에피쿠로스 학파(쾌락주의 사상)가 있다.
스토아 학파의 금욕주의 사상은 기원전 4세기 말에서 3세기 초에 제논에 의해 제시되었다. 제논은 인생의 궁극목적인 최고선과 행복이,
이성활동에 의해 어떤 것에도 움직이지 않는 마음의 상태(apatheia)'를 유지해나갈 때 실현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위한 구체적인
생활태도로서 보편적 우주이성에 의해 지배되는 자연법칙에 따르는 생활을 들었다. 이러한 스토아 학파의 윤리사상은 그후 2세기경에 이르러
아우렐리우스에 의해 더욱 발전되었다. 이 사상은 당시 로마의 만민법과 중세 및 근대의 자연법사상에 이론적 기초를 제공했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윤리사상은 스토아 학파의 사상과 거의 같은 시기에 에피쿠로스에 의해 체계화되었다. 그는 정신적인 쾌락을 통해서만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정신적 평정상태(ataraxia) 를 얻을 수 있으며, 진정한 행복을 실현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는 행복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서 플라톤의 4주덕을 받아들였다. 그 덕들은 신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시켜주고 행위를 정당하게 판별할 수
있게 해주며 윤리사상은 그후 근대 영국 경험론과 공리주의 윤리설에 영향을 미쳤다.
로마의 사상
19세기 독일의 역사가 랑케에 의해 고대사의 호수 라고 평가되는 로마는, 그리스를 비롯한 이전시대의 문화와 사상을 종합하여 전세계에
보급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 그리스 인의 독창성을 로마의 조직성으로 엮어 오늘날의 서양문명의 기초를 이룬 것이다. 그러나 로마문화가
단순한 매개체 역할에 안주한 것은 아니다. 19세기 독일의 법학자 예링은 로마는 무력과 종교와 법률로써 세계를 세 번 통일하였다. 고
말했듯이, 로마의 자연법사상과 크리스트교는 중세 이후 서양문명의 중요한 요소로서 성장하게 된다. 로마법은 일개의 시민법에서 시작하여
지역과 민족을 초월한 항구불변의 자연법에 이르기까지 철학적 발전을 거듭하여, 서양세계에 자유 와 평등 의 관념이 싹트게 하였다. 또한
크리스트교는 로마의 국교로 인정되기까지 박해와 순교를 거듭하였으나, 서로마 멸망 후에는 유럽세계의 혼란 속에서 정신적 지도력을
발휘하여 마침내 세계종교로서 교세를 확대하였다.
실제적인 지혜와 활동적인 생활을 높이 평가한 로마 인들은 추상적인 철학적 사고에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사상과 과학적
사고에서도 그리스 인을 모방하였고, 주로 현실의 필요에서 그리스 사상을 수용하였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법률과 종교를 기피하려는 젊은 귀족층에게 호소력을 가졌으며, 일반적으로 생활에 대한 물질적 해석을 합리화하였다.
한편 스토아 학파는 낡은 전통적 방식을 존중하는 진지한 로마 인들에게 공감을 느끼게 하였다. 그것은 개인의 자제력과 의무감 및 정신적
평화를 존중하는 사상이었다. 그리하여 포에니 전쟁기간 중 영향력을 얻기 시작한 로마의 스토아 학파는 제정수립후 세네카, 아우랠리우스
등과 같은 대표적 사상가들을 배출했다.
로마의 철학자이자 문학가로는 우선 키케로를 들 수 있다. 그는 그리스 정신에 강한 영향을 받았으면서도 비교적 독창적인 사유를 한
사람으로, <웅변에 관하여> <공화국론>등 여러 편의 저서를 남겼다. 그중 스토아 철학의 원리에 입각하여 실천윤리의 문제를 다룬
<의무론>은 그의 대표작이며, 그의 문체는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한때 네로 황제의 가정교사를 지낸 세네카는
철학적 에세이와 비극작품을 저술하여 그리스 3대 비극시인 이후의 최고의 비극작가로 평가되었다. 이우렐리우스는 로마 평화시대 5현제의
마지막 황제이며, 대표적 스토아 철학자로서 <명상록>을 저술하였다.
역사서술에 있어서는 타키투스가 돋보이는데, 명저 <게르마니아>에서 당시의 로마를 비판하기 위해 야만인 들의 활력에 넘치는 건강한
삶을 묘사하고 있다. 이 책에서 독자들은 로마공화정에 대한 저자의 향수도 함께 느낄 수 있다.
크리스트교 사상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약 1천 년간 지속한 중세는 그리스-로마 문화의 잔잔한 호수에 새로운 불순물 이 힘차게 쏟아져
흘러들어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 불순물이 게르만 민족이라 할 수 있는데, 일정한 기간이 지난 후에 호수는 다시 맑아지면서 새로운
물줄기가 근대라는 큰 바다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중세 속에서 계속 줄기차게 나오는 크리스트교의 샘은 서양사상의 또 다른 원류가 되었다.
원래 초기의 크리스트교는 하나님의 말씀이 수록된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하는 인간적인 종교였다. 그후 구약성서에서 구세주로
예언되었던 예수(Jesus Christ)가 나타나 세계평화주의적 복음을 전파함에 따라 크리스트교는 일반대중의 정신생활 속으로 침투하게 되었다.
예수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사랑의 윤리를 강조하였다. 이어서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사도들에 의해서
크리스트교는 세계종교로서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도들의 복음활동과 예수의 가르침을 수록한 경전이 <신양성서>이다. 로마
정부는 313년에 밀라노 칙령을 반포하여 크리스트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그후 중세에는 인간중심의 사상이 신 중심의 사상으로 전환되었다. 신 중심의 사상에서는 우주의 창조주인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를
우선적으로 믿고, 이를 실천함으로써 인간의 행복과 영생이 실현될 수 있다고 본다. 이러한 신 중심의 윤리사상은 중세 유럽의 생활문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흔히 중세를 암흑의 시대 라 한다. 왜냐하면 신학이 중세의 학문과 사상을 압도하여, 철학이나 자연과학 등 기타 학문은 그 시녀역할에
만족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세의 신학발전의 주체세력은 파리대학을 중심으로 한 대학교수들이었고,중세신학의 발전은 크게 2분될 수 있다.
#1예수 사후 8세기까지 신부들에 의해 발전된 교부철학과 #29세기에서 15세기까지 발전된 스콜라 철학을 들 수 있다.
교부철학은 주로 크리스트교의 정통교리를 하나로 체계화하여 교회의 권위를 확립하고자 하는 아우구스티누스 등의 교부들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그는 크리스트교의 신앙을 그리스의 이성으로 설명하기 위해 초월적인 이데아 사상을 강조한 플라톤 주의를 받아들였다.
나는 믿기 위해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알기 위해 믿는다. 는 말로써 신앙과 이성의 타협을 시도하였다. 그의 크리스트교 사상이 잘
반영된 <신국론>에서 그는 신국, 즉 내세는 지상의 세속적 역사과정 속에 투영된 것으로서, 인간역사의 과정이 신의 섭리의 실현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또 인간은 교회를 통해서 신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교회는 인간구원을 위한 유일한 기관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의 자서전
<고백록>에서는 그의 젊은 날의 지적 방황과 30세가 넘어서야 기독교에 귀의한 종교적 개종과정을 담담히 고백하고 있다.
스콜라 철학은 교회의 교리철학으로서 중세철학과 학문의 절정을 이룬 중세의 종합적 세계관이다. 대표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는 플라톤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더 가까운 수정된 실재론을 주장하여, 보편적 존재는 영원불변의 실재성을 갖지만 본질로서 개체 안에 존재한다고 보며,
교회가 수용할 수 있는 최종적인 공식을 만들어냈다. 그는 대표적 저술인 <신학대전>에서 스콜라 철학의 정수를 제시하였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근대 초기(14∼16세기)의 사상이 형성될 수 있었던 계기는 14∼16세기에 나타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운동에 찾아볼 수 있다. 르네상스는
중세 신 중심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자연적이고 현실적인 인간본성을 다루었던 고대 그리스와 초기 로마시대의 문예로 돌아가자는
운동으로서, 기본적으로는 인본주의 성격을 띠고 있다. 한편 이 운동은 고대사상에로의 맹목적인 복귀만을 추구하지 않고,
고대사상중에서도 형이상학이 아닌 인간현실에 바탕을 둔 지식이나 진리를 추구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에 이탈리아의 마키아벨리는 역사서술에 있어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역사를 주장했는데, <군주론>에서 정치적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군주에게 수단과 방법의 광범위한 선택을 허용하여, 그간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인간의 정치적 속성을 드러냄으로써, 정치를 완전히
세속적인 세계이해 에 기초하여 파악한 최초의 근대적인 정치이론서를 저술했다.
르네상스는 근대 자연과학의 진정한 출발점 역활도 했다. 1543년 코페르니쿠스는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에서 중세의 우주관인 천동설을
뒤엎고 지동설을 주창하였고, 동년에 인체 해부학자 메살리우스는 <인체구조론>을 저술하여 인체구조의 해명에 중요한 진전을 이록했다.
르네상스 운동과 동시에 일어난 종교개혁 운동의 기본정신 역시, 세속화된 중세교회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순수했던 초기 교회의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었다. 중세교회의 권위와 전통은 봉건사회의 신분제를 확립하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로 인해 개인의
내면적인 신앙생활은 점차로 순수성을 잃어버리고 세속화되었다. 이러한 종교계 자체 내에서의 개혁운동을 시도한 대표적인 인물은 루터다.
그는 독일의 로마교회가 면제부를 판매한 것에 대하여 95개조 반박문 을 제시하며 항의하였다. 이러한 운동은 그후 스위스의 츠빙글리,
칼뱅 등에 의해 계승되었고, 전 유럽에 퍼져 프로테스탄티즘을 형성시켰다. 또한 영국에서는 16세기 후반에 청교도주의(puritanism)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처럼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에서 나타난 사상의 핵심은 로마말기부터 중세까지 1000년 동안 지배해온 신 중심의 윤리에서 벗어나 인간의
현실적 삶을 중시하는 데 있으며, 이는 근대 서양윤리사상의 형성에 전환점을 마련해주었다.
17세기 과학혁명
근대에 들어오면서 중세문학의 여왕이던 신학은 물러가고 자연과학이 크게 발달했다. 대자연과 인간사회의 모든 현상은 자연법 이라는
영원불변의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그 법칙이 발견될 경우 인류의 행복이 증진되며, 그러한 자연법은 반드시 발견될 수 있다고 믿었다.
수학적 계산과 관찰에 의해 우주의 법칙이 설명되고 그로 인해 세계관의 변화까지 초래한 과학혁명은 1543년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에서
시작하여 케플러, 갈릴레이를 거쳐 1687년 뉴턴의 중력법칙 에서 그 절정에 달하였다. 과학사고의 혁명은 현대인에게 자연정복 의 길을
마련해놓았고(이 자연정복에 대한 가치판단은 유보), 어쨌든 현대문명의 본질을 전환시켜놓았다.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더욱 세련시켰고, 갈릴레이는 <두 우주구조에 관한 대화>에서 코페르니쿠스의 태양중심설을 확인했다.
인류역사상 경이로운 천재 중 한 사람인 뉴턴은 선행업적들을 하나의 우주원리로 종합하여 우주 내의 모든 물체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프린키피아>를 발표했는데, 이로써 전통과 권위에 맞서 싸우던 1세기 반의 과학혁명 은 절정에 달했다.
사상혁명
17세기에 일어난 과학혁명으로, 우주는 수학자가 창조한 움직이는 거대한 기계이기 때문에, 이제 더이상 신의 섭리는 필요치 않다는 관념이
지배했다. 이러한 기계론적 우주관 에 입각한 과학적 사고는 합리주의 정신을 성장시켜 다른 학문분야에도 폭넓게 적용되었다. 즉, 당시의
과학자들에 의해 제시된 자연과학적 방법론과 지식은, 종래의 신학적인 자연관과 세계관에서 벗어나,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인식과 사유의
법칙을 형성하게 하였다.
근세의 자연과학에서 주로 사용된 방법론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그 하나는 사유와 지식의 근원을 경험 으로 보고 경험적 관찰이나
실험에 의해서 얻은 지식을 중시하는 이른바 귀납적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사유와 지식의 근원을 이성 으로 보고 과학적 논리나 추리에
의해서 얻은 지식을 중시하는 이른바 연역적 방법이다. 이런한 자연과학적 방법론과 지식은 전 학문영역에 적용되어, 근대적 사고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근대 중기에 영국이 경험론 과 대륙의 합리론 이 형성되었는데, 전자는 인간의 경험 을, 후자는 인간의 이성
을 중시하였다.
영국의 경험론
영국 경험론의 대표적 인물로는 베이컨을 들 수 있다. 그는 현실생활에 도움을 주는 지식이 보편적인 지식이라고 보았으며, 이러한 지식의
원천은 경험 이라고 하였다. 즉 관찰과 실험에 의해서 인간과 외부사물을 인식하고 얻어낸 지식이 유용하고 참된 지식이며, 이를 통해서
행복한 삶이 실현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신논리학>에서 실험을 통하지 않은 이론, 또는 체계적 이론이 없는 실험은 다 같이 무용한
것이라고 경고하고, 위대한 진보는 이론과 실제의 결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우리가 실제생활에서 참된 지식을
인식하지 못하는 이유는 인간의 시각에 내제하는 선입견 과 편견 때문이라고 보고, 이것을 타파할 것을 역설하였다. 경험론에 입각한
베이컨의 사상은 홉스, 로크 등을 거쳐 공리주의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대륙의 합리론
대륙의 합리론은 데카르트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는 감각적 경험을 통해서 얻은 지식은 개인의 편견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단편적이며 우연한 지식이라고 보고, 철학적 사유를 통해서 완전하고도 확실한 지식을 추구하고자 하였다. 그의 저서 <방법서설>에서 그는
이성활동에 의한 진리탐구 방법을 이른바, 방법적 회의 라고 하였다. 그는 확실하고 자명한 진리를 연역해내기 위해서는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기본명제를 그 출발점으로 삼아야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이러한 기본명제를 찾기 위해 수많은 의심을 해본 결과 내가 지금 사유한다는
사실만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명석한 진리를 제시하였다. 그는 이것을
사유의 제1원리 라 하였고, 여기서부터 출발하여 모든 보편적 지식을 연역하고자 하였다. 데카르트는 이성 에 근거하여 보편적 지식을
추구하고자 함으로써 근대적 사고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한편으로 그는 기계적인 자연계와는 별도로 신의 세계가 존재한다고 보고 중세적인
종교신앙을 기계적인 우주관과 조화시키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사회계약설과 계몽사상
경험론과 합리론은 대개 합리적인 개인만을 문제삼는 경향이 있었다. 반변에 개인과 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사회계약설을 토대로 한
근대시민사상이 대두되었다. 17, 8세기에 나타난 계몽주의 사상이 그 대표적인 예인데, 이는 근대 시민혁명의 사상적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홉스는 17세기 과학혁명의 정신을 그의 사상 속에 잘 반영시켰다. 근대시민사상에 사회계약설을 도입한 그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
를 극복하고 모두의 생명보존을 위한 평화상태를 창출하기 위해 국가를 성립시킨다고 생각했다. 홉스는 이러한 진리관.인간관을 토대로
하여 사회계약설이라는 근대시민윤리를 도출해냈다. 그는 사회구성원들이 투쟁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자연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고,
공공이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합의나 계약에 의한 규범을 만들고 이를 준수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러한 홉스의 사상은 그의 <리바이어던>에
잘 나타나 있다.
명예혁명을 전후해 살았던 로크는 영국의 경험론을 철학적으로 체계화시키고, 시민혁명의 정당성을 옹호하기 위해 <정부론>을 저술했다.
로크는 이 책에서 정치사회의 정립이 각자의 생명.자유.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개인들의 사회계약에 기초한다는 점을 밝히고,
법치국가성.대의제.권력분립.입법권 우위.저항권을 주창하고 있다. 결국 자연상태 및 사회계약을 전제로 한 점에서는 홉스와 같았지만
그 결론은 정반대였다.
또 다른 계몽사상가인 루소는 당시대의 이성존중의 풍조에 반대하여 이성보다 감정과 본능을 중시하고 자연으로 돌아가라 고 외쳤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의 서두에서 사람은 태어날 때 자유로우나 현재는 어디서든지 쇠사슬에 매어사는 것을 본다 는 말로 필요악으로서의
사회를 논하였다. 루소는 근본적으로 로크의 사회계약설에 동의하였으나, 대의제나 다수결에 관해서는 상이한 견해를 갖고 있었다.
<사회계약론>은 프랑스 혁명의 성서라 불리며, 자유.평등.박해 의 표어도 거기서 유래한 것이다.
또한 당시 많은 지식인들의 협동작업으로서 혁명 전 프랑스 사회를 과감하게 비판한 획기적인 업적이 <백과사전>의 발간이다. 디드로를
중심으로 편찬된 이 방대한 사전은, 전통적인 권위와 사회악에 도전하여 계몽사상을 전파하는 매개체가 되었고, 사회진보를 위한 최초의
백과사전이었다.
이 당시 역사학의 발전도 주목할 만한데, 이탈리아 출신의 비코는 <신학문의 원리>에서 역사의 순환성 을 강조하면서, 역사과학의 확립을
제창했다. 영국의 기번은 이교적 문명 과 크리스트교적 야만 을 비교하면서 <로마제국의 쇠망사>를 저술했다.
18세기의 또하나의 업적은 과학적 연구방법을 인간과 사회현상에서 적용하여, 정치학.경제학.인류학 등 사회과학이 주목할만한 발전을
했다는 것이다. 경제학의 창시자인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옹호하였고, 이탈리아의 법학자 베카리아는
<범죄와 형벌>에서 범죄를 사회계약의 위반으로 보고 그 예방수단으로서의 교육.형의 신속 등을 주장하였으나, 후에 중대한 오류도
지적되었다. 프랑스의 귀족출신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3권분립을 제창하였다.
근대후기 18, 9세기에 전개된 사상으로는 칸트를 중심으로 한 독일의 관념론과 벤담, 밀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공리주의, 그리고 콩트를
중심으로 한 실증주의를 들 수 있다.
독일 관념론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주의를 잘 조화하면서 과학혁명의 성과를 철학적 사고에 적절히 편입시킨 인물은 근대 비판철학의 창시자라 할
칸트였다. 18세기 계몽사상의 마지막 대변자이며, 동시에 19세기 낭만주의 철학을 함께 종합한 그의 과학의 합리성, 인류를 향한 인도주의적
관심 등을 자신의 사상 속에 심화시켰고, 그의 주저 <순수이성비판>을 통해 철학적 사유의 발전에 새로운 장을 마련했으나 비판이 일자,
자신의 저작에 대한 몇 가지 오해를 제거하기 위해, 이를 재구성하여 새로 쓴 저작이 <형이상학 서설>이다.
독일의 관념론은 그후 피히테, 셀링으로 계승되어 헤겔에 의해 절정을 이룬다. 헤겔은 개인의 인격과 자율적 동기를 중요시하는 칸트와는
달리 개인과 국가성원 전체의 역사적, 사회적 현실속에서 드러나 있는 윤리를 밝히고자 하였다. 그는 개인의 자유와 사회의 자유가 함께
실현되기 위해서는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공동체를 인륜(Sittlichkeit)이라고 정의했는데, 이런 공동체는 절대정신이
정립(These), 반정립(Antithese), 종합(Synthese)의 단계를 거쳐 변증법적 원리에 의해 가족에서부터 시작해서 시민사회를 거쳐 국가에
이르러 완성된다고 하였다. 그의 주저 <역사철학강의>에서 헤겔은 인간 개개인의 생각이 발전하는 것처럼 인간정신의 구체적 구현인 역사도
자유를 실현하는 방향으로 발전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영국의 공리주의
근대후기에 나타났던 또 다른 사상으로 공리주의를 들 수 있다. 독일에서 칸트, 헤겔에 의해 관념론에 제기되고 있을 무렵, 영국에서는
기술혁명으로 말미암아 산업혁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영국인들은 물질적인 풍요와 편의를 누릴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방임주의(laissezfaire)라는 미명하에 무절제한 자유경쟁과 개인의 이윤추구현상이 대두되자, 개인의 이익과 전체의 이익을 조화시키는
문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나타난 사상이 공리주의 사상이다.
공리주의 사상에서 제시되는 인간관은, 인간이면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쾌락 을 추구하고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경향을 가진다는 데서
출발한다. 이는 곧 삶의 목적이 쾌락이나 행복의 추구에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개개인 모두가 저마다 자기의 쾌락이나 행복만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사회는 혼란상태에 빠지게 된다. 따라서 선한 행위란 가급적 많은 사람에게 쾌락과 행복을 주는 공리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 여기서 공리주의 윤리설이 표방하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이라는 행위원칙이 도출되었다. 이러한 공리주의 윤리설의 인물로는 벤담과
밀을 들 수 있다.
벤담은 <법과 도덕의 원리>에서 쾌락이나 행복을 양적으로 계산할 수 있다고 보고, 개인의 쾌락이나 행복을 증대시키는 것이 사회 전체의
행복을 증대시키게 된다는 양적 공리주의 를 제창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도덕적으로 행동하기 위해서는, 법률과 같은 외적 제재가
필요하다고 강조하였다.
벤담이 쾌락의 양을 중시한 것에 반해, 밀은 쾌락의 질을 중시하였다. 그는 쾌락에도 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고, 쾌락을 고상한 정신적
쾌락과 저급한 육체적 쾌락으로 구분하였다.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고, 만족스러운 바보보다는
불만족스러운 소크라테스가 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자유론>에서 밀은 사회주의적 자유주의체제를 옹호하고
자유주의적 민주적 개혁 및 경제체제로서의 사회주의에 찬성하지만 그가 자유에의 위협이라고 본 순수한 다수의 지배 에는 반대한다.
1830∼1900년대에 이르는 기간은 인류 역사상 과학기술의 전성시대로 특히 생물학과 의학의 발전은 특기할 만한 것이었다. 생물학에서의
뉴턴을 표방했던 다윈의 진화론은 코페르니쿠스 이래 다시 한번 세계관을 바꾸었고, 그가 <종의 기원>에서 주장한 약육강식 과 적자생존
등의 이론은 19세기 이후 자연과학은 물론 사회과학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골턴의 우생학과 스펜서의 사회적 다위니즘에
영향을 주어, 인종차별과 제국주의의 이론적 배경이 되기도 했다.
프랑스의 실증주의
한편, 19세기경에 프랑스에서는 콩트를 중심으로 한 실증주의 사상이 등장한다. 과학의 실증성을 강조한 콩트는 특히 사회학 을
인간들간의 사회적 관계를 연구하고, 이러한 관계가 어떻게 역사의 과정 속에서 변해가는지를 탐구하는 학문으로 규정지음으로써 사회학의
독자성을 개척했다. <실증철학강의>에서 그는 역사적 단계에서의 인간정신, 즉 과학이 그 이전의 단계에 의존하여 진보하고 있음을 증명해
보이고자 했다.
유물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사상은, 일반적으로 합리론과 관념론에서와 같이 주지적이고 이성적인 윤리사상에 반대하고, 인간의 현실생활
자체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상으로는 유물론.생철학.실존주의 등을 들 수 있다.
유물론은 하나의 사상이라기보다는 당시의 경제.종교를 비판하기 위해 대두된 사회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포이어바흐와 마르크스에
의해 체계화되었는데, 그들은 자연의 물질들을 대상으로 하는 노동에서 인간의 본질을 찾고자 했다. 즉, 인간은 노동이라는 자기창조적
활동을 통해 자기자신을 실현해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유물론적 인간관은 후에 사회주의적 인간관으로 전개되었다.
변증법적 유물론을 제시한 마르크스는 19세기 이후 거의 모든 학문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마르크스의 사상적 배경은 19세기의
3대 지적 유산인 헤겔을 비롯한 독일의 관념철학 , 스미스와 리카도의 영국 고전경제학 , 생시몽, 프리에, 오언의 프랑스 사회주의
사상이 근간을 이룬다. 마르크스는 이를 비판적으로 수용, 종합하여 <변증법적 유물론> <노동가치설>과 <잉여가치설> <계급투쟁론>과
<혁명론> 등으로 발전시켰다. 인류의 역사를 바꾼 한 권의 책인 <자본론>에서 계급갈등.인간소외.실업.빈곤.공황 등 자본주의의 어두운
면을 부가시켰다.
생철학
생철학은 계몽철학의 주지주의와 헤겔의 이성주의적 관점을 비판하고, 인간의 의지를 중시한 반 이성주의적 철학사조다. 생철학자들은 생을
고정된 것이 아니라, 항상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직관적이고 비합리적인 방법을 통하여 생의
의의.가치.본질을 파악하였다.
실존주의
실존주의는 반이성적 사조에 포함되는 윤리사상으로서 과학과 기술문명 속에 비인간화되어가는 현실을 고발하고, 잃어버린 자아의 각성과
회복을 강조한 철학이다. 실존주의의 선구자로는 키에르케고르를 들 수 있는데, 그는 불안과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고 참된 실존을 회복하기
위해, 신 앞에서 단독자 로서 인간의 주체적 결단을 강조하였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20세기 철학의 한 주류인 생철학의 완성자요, 현대 실존철학의 창시자의 한 사람인 니체가 쓴 것으로,
서구사상의 중심이던 크리스트교를 부인하고, 새로운 사상과 질서를 창조하기 위해 권력의지 , 영원회귀사상 , 초인사상 의 개념을
도입했다.
실용주의
한편 미국에서는 경험론의 전통을 계승하여 일상생활에의 유용성을 중시한 실용주의가 등장하였다. 대표적 사상가로는 퍼스, 제임스, 듀이
등이 있는데, 특히 듀이는 <철학의 재건>에서 일상생활 속에서 획득한 경험적 지식에 의해 미지의 세계를 실험하면서 도구적 실용주의 를
강조하였다. 이 실용주의는 20세기 미국의 국가발전에 사상적 기초로 작용했다.
현대의 사상
현대사상의 두 주류는 다음과 같다. #1논리실증주의와 언어분석의 2가지를 주요분야로 하는 분석철학과 #2실존주의와 현상학의 2가지를
주요분야로 하는 유럽 대륙철학이다. 논리실증주의는 러셀과 그의 제자 비트겐슈타인이 개척한 분야로, 어떤 가치나 이념은 수학이나
물리학과 같은 과학적 영역에서 증명되지 않는 한 인정될 수 없다는 순수한 과학철학이다. 이러한 사상은 비트겐슈타인의 <논리철학 사고>와
<철학적 성찰>에 잘 나타나 있다. 언어분석 운동은 무어와 비트겐슈타인의 산물인데, 무어는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검토하는 일, 즉
동시대인들의 잘못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일을 철학적으로 대중화했다.
1950∼60년대의 유럽 대륙철학은 현상학과 실존주의로 구별할 수 있지만 이 구분이 엄밀한 것은 아니다.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등은 두 사조에 모두 관여했던 철학자이다. 철학으로 전향한 독일의 수학자 후설은 현상학의 아버지로, 그의 현상학적 방법은 경험의
직접성을 강조하며 경험을 존재나 인과적 영향에 대한 모든 가정에서 떼어내어 그 실제적인 내재적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후설을
지지한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인간존재의 본질을 해명하고자 하였다. 그는 인간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언젠가는 죽음을 직시함으로써 비로소 본래적인 실존을 되찾을 수 있다고 하였다. 스승인 후설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나 특정문제에 관해서는
견해를 달리했던 프랑스 현상학의 대가인 메를로-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인간의 신체와 지각에 근거하여, 타인의 앎을 설명하려는
이론을 제시했다.
키에르케고르와 니체에 뿌리를 둔 유럽내륙의 실존주의는 2가지 주제, 즉 존재의 분석과 인간선택의 중심성에 대한 연구를 지향한다.
독일의 야스퍼스는 한계상황 속에서의 실존을 해명하고자 하였고, 인간상실을 파멸에 이르는 병 이라 규정지었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인간의 불안에 관심을 가지고 실존은 본질에 선행하며 실존은 주체성이라고 주장했다. 가다머는 현대해석학의 고전으로 불리는
<진리와 방법>에서 이전까지의 해석학이 감정이입의 방식을 통해 주관적으로 이루어졌다고 비판하고 객관성 의 원리를 담보하여 했다.
베르그송은 생명과 물질에 대한 실증적 사실을 토대로 하여, 존재하는 전체를 하나의 통일된 관점에서 파악하려 한 <창조적 진화>를
저술했다. 화이트헤드는 아주 폭넓고 일반적인 이해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조망하려 했고, 그의 이해력은 위대한 3부작 <과학과 현대세계>
<과정과 실재> <관념의 모험>이 지향한 목표였다.
이상의 철학분야 이외의 사상의 살펴보면 근대서구의 자본주의 정신을 예리하게 분석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청교도 정신이 자본주의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였다. 케인즈는 1930년대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을 통해 공황을 극복케
하고 자본주의의 낙관론을 제시한 반면, 2차대전 후 새로운 보수주의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 하이에크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개입은 파멸을 자초할 것이라는 <예종에의 길>을 써서, 오늘날 경제에 대한 국가개입을 반대하는 신보수주의자들에게 고전이 되고
있다. 또한 슘페터는 소위 슘페터식 자본주의 붕괴론으로 알려진 <자본주위.사회주의.민주주의>에서 자본주의는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하고, 자본주의는 결국 사회주의를 후계자로 지목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현대 미국의 도덕철학과 정치철학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한 롤스는 사회계약론을 보다 일반화시켜, 그 이론 속에 함축되어 있는 정의관의
종요한 구조적 특성을 밝혀냄으로써, 새로운 정의관을 발전시킬 수 있는 길을 <정의론>에서 열어놓았다. 현대 인류학에 지대한 영향을 남긴
레비-스트로스는 일종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슬픈열대>에서 철학으로부터 인류학으로 이행한 저자의 지적 열정을 기술하고, 인간과
사회에 대한 제반문제에 대한 깊은 시사를 던져주고 있다. 루마니아 태생의 종교학자 엘리아데는 인간의 삶이 경험하는 두 차원, 즉 성속을
준거로 하여 문화를 재서술하고 있다. 1984년, AIDS의 희생자 푸코는 <광기의 역사> <말과 사물>등 초기의 그이 저작들에 관한 자신의
해설서인 <지식의 고고학>에서 역사서술의 시각, 주체의 문제 등 굵직한 문제를 다루었다.
그람시는 마르크스적 사회분석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가장 창의적인 저작으로 평가되는 <옥중수고>를 저술했고, 스위스의
아동심리학자인 피아제는, 프로이트가 성인의 심리를 연구한 반면 어린이의 심리를 연구하여 어린이의 프로이트 라 불린다. 그는
<아동지능의 근원>을 남겼다. 뒤르켐은 사회학의 고전인 <자살론>에서 자살이라는 사회현상을 공식적 통계에 입각해 검토하고, 자살이
사회적 결과임을 밝혔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이론을 발표하여, 뉴턴적인 3차원 공간이 아닌 4차원의 시공의 연속개념을 제시하여, 뉴턴보다 더 광범위한 우주현상을
설명했고, <부분과 전체>의 저자 하이젠베르크는 원자의 세계가 반드시 인과법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불확정성의 원리 를 제시했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프로이트는 인간의 무의식을 인간의 행위를 경정하는 주요한 요인으로 보면서, <꿈의 해석>에서 꿈의 해석을
무의식의 이해에 이르게 하는 왕도라고 하였다. 그의 제자인 융은 스승과 의견을 달리하여 <심리학과 종교>에서 종교를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미국의 쿤은 과학발전의 역사가 과학자들의 수세기에 걸친 연구업적의 단순한 누적이 아니라, 과학발전이 어느 한순간
혁명적으로 일어난다는 과학의 본질에 대한 혁명적 서술을 담고 있는 <과학혁명의 구조>를 저술했다. 또한 현대 환경의 위기에 대응하는
요나스의 윤리학적 대응이 <책임의 원리>에 잘 나타나 있다.
이상으로 서양사상의 흐름을 개괄적으로 조망해보았는데, 현대에 올수록 복잡다기하게 분기되고 있다. 여러 사상들이 통합될 전망은 없어
보인다. 과학적 기질과 형이상학적 기질은 여전히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으며, 실존주의의 주관성과 논리실증주의의 객관성은 아직도
경멸하면서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대의 사상계에는 다양한 분열이 여전히 버티고 있다.
제 2장 중국사상과 흐름과 고전
중국사상의 원류
중국사상의 원류로는 공자로 대표되는 유가사상 , 노자와 장자로 대표되는 도가사상 을 들 수 있으며, 여기에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사상까지를 포함하여 동양사상의 원류로 간주한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계속적인 영향력을 미쳤던 중국사상은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현실주의적 경향
중국인의 사상은 현실생활에 밀착되어 있다. 추상적, 이론적 사색에 잠기지 않고 현세와 떨어진 피안 또는 형이상학적 세계 등을 추구하는
일보다는, 현실을 어떻게 사느냐,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생각하는 데에 큰 관심을 기울여 왔다.
조화적 경향
상대 개념의 사고형식이 현저하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사물을 상대되는 두 요소로 나누어 파악하는 사고방법으로서 가장 전형적인 것은
음양사상인데, 그저 단순하게 모순 대립하는 두 이질적인 성격의 것으로 구분지어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연관적인 것으로 보는 동시에
이 양자의 조화와 안정을 중시한다. 그것은 한편에 치우치지 않는 중용을 중히 여기는 사고와도 상통하는 면이 있다.
천명사상
중국인은 고대 이레 근대에 이르기까지 시종 하늘 에 대한 숭앙의 염을 가지고 있었다. 하늘은 천공이지만 단순히 자연현상으로서의
천공일 뿐만 아니라 조물주 또는 조화의 근원이어서 사람 및 기타 만물을 낳고 자연계 인간계를 주재하며, 이러한 작용은 모두 천명 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인간이 사는 세계 전체를 천하라고 하고, 이것을 통치하는 지배자를 천자 라 일컬으며 천자는 천명에 따라
천하에 군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은 이러한 모든 인간사의 주재자이므로,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 즉 사람의 길 은 하늘의 길
을 근간으로 해야 하며, 요컨대 사람은 하늘에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화이사상
또한 천하 의 관념의 관련하여 화이사상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한민족 특유의 민족의식을 표현한 것으로, 중화라는 고도의 문화를
가진 한민족에 대하여 주변의 이민족을 이적(오랑캐)이라 하여, 문화수준이 낮은 야만인으로 간주하고 이는 화의 문화를 추앙하고 화에
복속해야 하고, 중화의 문화가 미치는 모든 지역이 천하이고 그것이 세계 전체에 해당한다고 생각했다. 위와 같은 특징을 가지는
중국사상의 흐름은 대개 4기로 나눈다.
태고--전한말기(BC 1세기 말)_
중국사상의 성립
제 1기는 중국사상의 성립기로, 은나라 때인 BC 15세기 무렵 이후이다. 은나라 때에는 제로 불리는 하늘의 신을 최고 신으로 삼고, 각
씨족의 조상인, 산, 강, 초목 등 기타 여러 신들을 숭상하여, 이러한 여러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고 행운을 기원하며 또 중요한 행사는 점을
쳐서 신의를 확인하고 난 뒤 실행에 옮겼다. 주나라 때에도 은나라 때의 상제신앙을 이어받아, 하늘을 신앙 하였다. 그래서 주나라 초기에
주공이 제정했다고 전해지는 주례 는 하늘과 그밖의 여러 신을 모시는 종교의식임과 동시에 천하통치를 위한 정치형태이자 동시에
신분제도를 규정하는 예제이기도 하였다.
제자백가 사상
중국사상은 춘추시대 후기부터 전국시대에 걸친 시기(BC 6세기말-- BC 3세기 말)에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때는 중국사상에서 최고의
황금시대로 제자백가라 불리는 수많은 학파·사상가가 배출되었다. 그 가운데 주요 사상가 군은 유가·묵가·명가·도가·법가·음양가의
6가였다.
유가사상
가장 일찍 등장한 것은 유가로서, 공구(공자)를 시조로 하여 맹가(맹자), 순황(순자)등으로 이어지면서 유력한 학파가 되었다. 유가는
전통적인 예에 입각하여 인류의 질서와 도덕을 중시하고, 이것을 실천할 수 있는 인격의 도야를 목표로 하였다. 또 그러기 위해서 실천해야
할 인·의·예·지·신등의 덕목을 강조함과 동시에 그 성과를 정치의 장으로 확대시켜, 덕치주의를 주장했다. 이 훌륭한 인격의 형성 과
이것을 기반으로 하는 덕치 의 구상은 수기치인의 도라 하여 이후 오랫동안 유가사상의 근본을 이루었다. 묵적(묵자)으로 대표되는 묵가는
유가와 비슷한 점도 있지만, 유가의 형식주의와 불평등성을 신랄히 비판하고, 겸애교리, 즉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남도 사랑하여
자타가 상호간에 이익되게 해야 한다면서 인간평등을 외쳤다. 아울러 절약과 비공등 공리주의적인 주장을 폈다. 혜시·공손룡등으로
대표되는 명가는 사람의 인식과 언어의 논리를 분석하고 고찰했다. 도가의 무사상의 성립은 이같은 명가의 논리에 관한 고찰과 관계가
있었다.
도가사상
이이(노자)와 장주로 대표되는 도가의 사상은 무 라는 성격을 가진 도 를 만물의 근원으로 제사하고, 사람은 그 무 인 도 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무위자연 을 설하며, 여러 집착에서 초월하여 절대경지에 이르는 것이 진실로 자기를 완성하는 길이라 하였다. 그리고
유교의 인위적인 도덕윤리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일반백성의 저항권을 인정하고 있다. 상앙·한비로 대표되는 법가는 유가에서 중시하는
자연발생적인 불문율인 예 를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 부정하고, 시대의 변화에 적합한 법(실정법)을 제정·공포함과 동시에,
신상필벌주의에 의하여 귀족·평민을 불문하고 그 법을 엄격하게 정진하고록 하여, 부국강병을 도모하고 군주권의 강화를 지향했다.
음양가는 추연으로 대표되는 일종의 자연철학 및 역사철학을 내세운 사람들로서, 음양과 5행을 원리로하여 자연계·인간계를 망라하여
사상이 성립·변화하는 모든 양상을 설명하려 하였다. 이는 결국 중국인들로 하여금 자연현상에 대한 객관적 진리를 포기하게 만들어
중국과학 발전을 저해한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이상의 6가 외에 농업생산의 중시를 설하는 농가, 현종연횡등 외교상의 책략을 논하는
종횡가, 병법을 논하는 병가등이 있으며 또 복수의 학파사상을 두루 지니고 있어 특정 1가의 사상으로 볼 수 없는 사상은 잡가라고 하였다.
춘추전국시대는 주나라 초(BC 11세기)에 성립한 봉건제도의 정치제도가 붕괴되고 중앙집권체제로 옮겨가는 과정에 해당하며, 여러 나라
가운데 중앙집권화를 가장 빨리 추진한 진이 천하를 통일 하자, 그 중앙집권체제를 중국전역에 확대시행하였다. 이와 같이 선진시대에
있어서 중국사상 형성의 주된 담당자는 사대부 안정을 얻으려면 어찌해야 하겠는가, 또 그러한 격변의 세계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활발한 논의를 전개했다. 그것이 제자백가 사상 내용의 주를 이루었기 때문에 이 시기에 여러 유형의 사상이
성립했다. 이 가운데 예와 질서를 중시하여 수기치인의 도를 설한 유가의 사상은 치자계급의 가장 표준적인 사상이다. 묵가는 공리주의
입장에서 유가가 중시하는 예 를 비판한 분명히 성격이 다른 사상이다. 도가사상은 상식적인 사회생활에 대하여 소극적이고 비판적인
사상이었다. 법가는 봉건제에서 중앙집권체제로 변화해 가고 있던 시대의 흐름에 편승한 활동을 하였다는 점에서 다른 학파와는 성격을
달리하였다. 전국시대 말기부터 진·한 시대초에 걸쳐(BC 3세기 후반 ∼ BC 2세기 중엽) 여러 면으로 사상의 정리와 이론의 정비가
이루어졌다. 또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고 그 뒤를 한이 이어받아 강력한 제국이 성립되자 이것을 이론화시킬 정치 철학이 요구되는 동시에
사상의 통제가 시도되었다. 진나라 때에는 법가사상에 의한 사상통일이 이루어져 유가는 분서갱유라는 심한 탄압을 받았다.
관학화된 유교
한나라 초기에는 황로사상 이 유행했는데, 이것은 법가사상을 토대로 하여 노자의 허정무위의 설을 도입한 통치술 및 여기에 부수되는
처세관 이었으나, 무제(BC 2세기 후반) 때부터 유가사상 존중의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고 무제는 유교사상으로 천하의 사상을 통일해야만
한다는 취지의 동중서의 건의를 받아들여 유교 국교화의 길을 열었다. 즉 전한시대 말 성제·애제 무렵에 이르러 그 결실을 맺게 되어,
제자백가의 다양한 사상 가운데서 유가사상만이 정통사상으로 인정받는 유가일존의 상황이 도래되었다. 이 당시 역사 서술에서 획기적인
발전이 있어, 전한의 사마천과 후한의 반고에 의해 사는 경에서 독립하여 독자적 학문으로 발전하였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독특한
기전체를 확립하고, 반고는 「사기」의 부족한 점을 보완하여 「한서」를 남겼다.
전한말∼북송중기 : 경학과 종교사상
경전연구 활성화
제 2기의 시작을 이루는 유가일존의 사상은 왕망의 새로운 유교존숭 정책에 따라 더욱 강화되었다. 후한도 유교존숭 방침으로 이어져
유교가 국가지도 이념으로 공인되었고, 유교를 국책으로 하는 상황이 이후 청나라 말기의 제 3기가 끝날 때까지 거의 2000년 동안
계속되었다. 이처럼 유가사상이 권위를 갖게 되자 유교경전의 권위가 높아지고, 경전의 연구 주석이 활발히 이루어져 제 2기 동안에 각
경전에 대한 주석서가 수없이 만들어졌다. 경전도 5경에서 점차 수가 늘어나 13경이 되었다. 한편 경전의 원본 및 해석의 정리 통일을
꾀하려는 움직임도 있어서 당나라 초에 「오경정의」가 만들어진 것을 비롯하여, 그것을 확대시켜, 제 2기가 끝날 때까지
「십삼경주소」라고 불리는 표준적인 주석이 성립하였다. 이와 같이 주석을 학문으로 하는 경학이 매우 활성화되었고, 유교는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필수적인 교양으로 중시되기는 했지만, 그 권위는 다분히 형식적이었으므로 사상으로서의 활력이 부족하였다.
도참사상
실제로 민간의 실제 생활에 깊은 연관을 갖고 있던 것은, 한나라 때에는 음양오행설이나 참위설등의 신비사상, 위진시대(3∼4세기)에는
노장사상, 남북조시대로 부터 수·당시대에 와서는 외래의 불교와 신흥의 도교였다. 음양오행 사상은 전한·후한을 통해서 성행했는데
원래는 선진시대 음양가의 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음양오행의 변화와 결합에 따라서 자연현상과 인간계의 사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것이었지만, 점차 비합리·미신적인 요소가 증가되어 신비화 되었다. 참위는 참기와 위서를 말한다. 참기는 예언서, 위서는
천인합일·재이서상의 사상 및 음양오행 사상·신선사상 등의 신비사상에 의하여 경서를 해석한 서책을 말한다. 참은 선진시대부터
행해졌지만 특히 한나라 때 유행하여 위서의 설에도 혼입 되었다. 위서는 전한시대 말부터 많이 만들어졌으며 위서의 설은 정통경학에도
도입되었다. 한나라 때에는 유가사상 전체가 신비사상 영향 아래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위진시대에는 노장사상이 유행하였다. 귀족 등의
상류사회에서는 정치논의나 인물평론과 함께 현학이라 불리는 철학 논의가 성행하였는데, 삼현(「노자」「장자」「역경」)이 화제에 많이
올랐다. 죽림칠현 등으로 유명한 청담도 이러한 종류의 담론이었다.
중국적 불교의 성립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된 연대는 분명치 않지만, 제 2기 초에 서역을 거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불타가 신선과 동일시된 시기도
있었지만, 이윽고 명상에 의하여 마음을 맑게 하고 명지를 얻는 가르침으로 이해하게 되었고, 위진시대로부터 남북조에 걸쳐 점차 성행하여
많은 불전(주로 대승불교의 경전)이 반입, 한역되었다. 일반에게 그 교리를 쉽게 하기 위하여 노장사상으로 불교용어를 설명하려 한
격의불교 가 한때 유행하기도 했으나, 도안이나 인도출신의 구마라습 등의 본격적인 불전연구와 역경에 힘입어 격의의 영역을 벗어나
중국불교의 기초를 확립하고, 법현·현장 등은 직접 인도에 가서 불전을 가지고 돌아와 한역하였다. 또 도교와의 마찰로 수차례에 걸친
폐불정책의 타격을 받으면서도 발전을 거듭했으며, 특히 수·당나라 때(6세기 말∼9세기)에는 명승이 배출되어 수나라 길장등의 삼론종,
지의 등의 천태종, 신행 등의 삼계교, 당나라 현장 등의 법상종, 법장 등의 화엄종, 도선 등의 율종, 북인도 사람 불공삼장 등의 밀교,
혜능·신수 등의 선종, 선도 등의 정토교 등 많은 종파가 성립하여 중국 독자적인 불교가 확립되었다. 특히 중국남방 선종의 창시자인
혜능은 제자들을 통해 「육조단경」을 남겨 인도식 불교와는 상당히 다른 중국식 불교의 특징을 잘 보여주었다. 이상 중국 불교의 전개를
살펴보면, 폐불의 시기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정치 권력의 비호를 받아 국가진호의 종교로 발전했다. 또한 교의로서는 매우 고도의 이론이
전개되었지만, 민간에서는 현세 구복적 성격이 강했다.
국가에 의한 도교의 발전
도교는 후한 말 장릉이 일으킨 천사도(오두미교)와 이를 발전시킨 장각의 태평도에서 시작되었다. 그후 종래의 노장사상과 불로장생을
추구하는 신선사상 등을 수용하여 건강법이나 연단술, 기타 장생과 복록을 얻는 법을 설하는 현세적인 민간종교로 성장해갔다. 도교는 어느
정도 도가의 설을 받아들였고, 노자를 교조신처럼 받들었지만 노장의 도가사상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었다. 교의로서는 도가 외에 불교와
유교의 설까지도 받아들였다. 민간종교로 출발했지만 북위와 구겸지에 이르러 도교라는 종교로 발전하게 되고, 북위의 국교가 되어
폐불사건을 일으키면서 당에 이르러서는 최대의 세력을 떨쳤다.
북송중기 - 아편전쟁: 성리학의 전개
성리학
성리학은 원시유교나 한 당시대의 훈고학과는 다른 유학으로 송학·주자학이라고도 한다. 성리학은 이론의 학문, 즉 철학이지만 경학의
면도 갖추고 있어, 경전을 깊이 고찰·연구하고 이것을 바탕으로 불교의 이론이나 노장·도교의 설까지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종래의
유가사상에 결여되었던 고도의 철학이론을 수립, 그 이론에 의하여 경전을 새로이 해석했다. 그들이 구축한 이 독자적 철학이론 체계이론
신유학의 큰 특색이 있는데, 그 학문의 본질은 이론체계 수립 자체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이론을 생활의 기준으로 삼아 자기인격 수양에
역점을 두고 있었다. 성리학을 대성시킨 것은 남송의 주희로 북송의 주돈이(주염계), 장재(장횡거), 정호(정명도), 정이(정이천),
소옹(소강철) 등의 철학을 계승하였고, 특히 정이의 학설을 많이 수용·종합하여 주자학이라는 독자적인 학문을 완성했다. 주희의
철학이론은 「근사록」에 잘 나타나 있는데, 이와 기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 는 사물본연의 상태를 규정하는 존재원리이고 기 는
물질의 근원이다. 이 는 또 사람은 이렇게 존재해야 한다 는 이상적인 인간성의 전형이며, 사람은 이렇게 해야된다 고 하는 도덕적
규범이다. 주희의 본체론은 모든 사물은 이 와 기 에 의하여 성립하고 존재한다고 하는 이기이원론 이지만 기 보다 이 를 근원적
존재로서 파악했다. 사람의 성에 있어서도 성즉리 라는 명제를 내세워 이 에 의하여 성 을 설하며, 사람의 성 은 순수하고 지극히
선하다는 성선설을 내세웠다. 그리고 사람은 모든 사물의 이 를 인식하여 마음을 이 에 합치시킨 상태로 유지시켜 이 에 따라 행동해야
하며, 그것이 학문(수양)이라고 하였다. 또 화이의 구별과 오륜의 명분을 분명히 할 것을 강조하였다. 이후 주자학을 신봉하거나 계승하는
학자가 수없이 나왔다. 또 원나라 때에는 과거시험에서 경전의 해석으로 주자학계 주석설이 채용되었으며, 명의 영락시대(15세기 초)
이후는 관학으로서의 주자학의 위치가 더욱 강화되어 청나라 말기까지 이루렀다.
양명학의 등장
한편 주자학과 경향이 다른 사상으로는 심학의 경향이 있었다. 같은 유가사상 내부에서 주희와 같은 시대의 육구연은 주희가 설하는 사물의
이 를 아는 것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마음의 수련에 진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진량·섭적 등의 사공학파는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주자학을 관념적이고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여 주희와 각각 논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중에서 심학의 요소가 성장하여, 진헌장 무렵부터
주자학을 탈피하기 시작하였고, 왕수인(왕양명)에 이르러 양명학으로 대성되었다. 왕양명의 저서 「전습록」에 잘 나타나 있는 양명학은
심즉리 지행합일 차양지 설을 핵심으로 했고, 그중에서도 자기 마음의 양지(시비선악을 판별할 수 있는 선천적인 지력)를 신뢰하고,
양지의 판단대로 행위하라고 하는 치양지 의 가르침을 궁극적으로 하는 심중지·실천중시의 철학이었다. 한편 왕수인과 같은 연대의
나흠순·왕정상 등은 주자학에서 설하는 이른바 기 보다도 근원적 존재원리인 이 를 인정하지 않고, 기 는 기 독자적으로 존재하고
변화·운동하여 사물을 형성 한다고 하면서 이 보다도 기 를 근원적 존재로 보는 기일원론 의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기의 철학 은
그뒤에도 발전하여 청나라 중기의 대진에 이르러 이론적으로 완성되었다. 대진에 의하면 기 즉, 육체에 부수되는 정이나 욕(주자학에서는
정이나 욕은 악의 근원이라 하여 부정적으로 보았다)을 고유의 것으로 적극 긍정한 뒤 성선설을 제창했다. 주희의 이의 철학 은 이 라고
하는 사회규범을 중시하는 철학이기 때문에 관학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기의 철학 은 현실생활을 중요시하는 철학이고,
왕수인의 심학은 마음의 권위, 자기의 주체성을 중시하는 철학이므로, 그런 의미에서 이 둘은 본래 비관학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둘 모두 주자학에서 설하는 규범과 별개의 원리에 따른 새로운 도덕을 확립할 수는 없었으므로, 이 점에서는 주자학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고, 또 주자학을 무너뜨리고 그에 대신할 수도 없었다. 왕수인 출현 후의 주자학계에서는 주자학보다 양명학이 우세한 시기가
있었고, 왕수인이 죽은 후에 2,3개파로 나뉘어 17세기 초까지도 양명학이 성했지만 그후 쇠퇴하였고, 아울러 수양학문으로서 성리학의
발전은 더이상 없게 되었다.
경제학, 고증학, 공양학
명나라 말부터 청나라 초(17세기 중반)의 혼란기에는 이에 대신하여 경세치용의 실학이 제창되었고, 정치론이나 사론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나 청나라 조정의 중국지배가 확립되고 나라가 안정되자, 실학의 요소가 약해져 18세기부터 19세기 초에 걸쳐 고문서를
실증하려는 청조고증학이 학계를 휩쓸었다. 그 고전연구가 성과에 의하여 종래의 고전해석에 수정을 요하는 곳이 많이 생겨났지만,
명교로서의 주자학의 권위에 흔들림이 없었다. 또한 19세기에는 정치색이 짙은 공양학이 성행하였다.
불교의 명맥유지
수·당시대에 융성했던 중국의 불교는 845년 제 2기 말기에 당나라 무종과 폐불과 955년 오대 후주의 세종의 폐불 등 두 차례의 탄압으로 큰
타격을 받았지만, 그뒤 선종과 정토교가 살아남아서 제 3기에는 이 둘을 중심으로 제종겸수의 형태를 취한 융합적이고 민중적인 불교가
성립되었다. 선종은 불립문자를 표방하여 불전의 학습에 의한 것이 아닌 타좌선정을 통하여 자력으로 불교이치를 깨닫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오로지 염불로써 극락정토 왕생을 얻을 수 있다는 정토교는 가장 민중적인 가르침이어서 폭넓은 귀의를 얻게 되었다.
도교의 민간종교화
도교는 가장 융성하였던 당나라 때를 이어 송나라 때에는 민간종교로 계속 번성하였다. 남송 때 금나라가 지배하는 화북에서 새로운 도교가
생겼는데, 그 가운데 왕철이 시작한 전진교는 주술성을 배제하고 타좌수양하여 도를 깨닫는 것을 지향했으며, 윤리적인 실천을 중요시하고
교단활동도 활발히 하였다. 유·불·도 3교 사이에서 유교는 불교·도교를 이단시하고 배격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주자학이나 양명학도
원래 이들의 학설을 수용한 면도 있었고, 특히 양명학 계통에서는 3교의 조화합일을 설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불교에서는 내부적으로
여러 종파의 융합, 겸수, 특히 선종과 정토교의 융합을 주장하였는데 명나라 말에는 다시 3교합일론이 제기되었다. 도교에서는 이러한
3교합일의 풍조를 배경으로 선서(인과응보 권선징악 사상을 기초로 사람들에게 선행을 권하는 책)를 많이 만들어 보급하였다.
서양학술의 전래
당나라 초(7세기)에 경교(크리스트교의 네스토리우스 파)가 전래된 일이 있었지만, 그로 부터 수백년이 지난 명나라 말(16세기 말)에 예수회
선교사들이 카톨릭을 중국에 전해왔다. 1583년에 이탈리아의 마태오 리치는 중국 본토에 들어와 1601년 베이징(북경)에서 공식적인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밖에도 상당수의 선교사가 차례로 도래하여 지식층과 민중에 대한 포교로, 어느 정도 신자를 확보했다. 그러나
크리스트교 자체보다 오히려 선교사들이 가지고 온 유럽의 과학기술(주로 수학·천문학·측량·수리·병기 등에 관한 기술)이 환영을
받았고, 특히 천문역학 면에 대해서는 조정에서도 그 뛰어남을 인정하여 공식채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유럽의 학문은 명·청 시대를 통하여
이 방면에 대한 중국인의 관심을 자극하여 학문진보에 기여한 바가 컸다. 왕수인의 심학이나 나흠순의 기의 철학 이 나온 16세기
이후(혹은 양명학이 쇠퇴한 명말 청초 17세기 이후)를 제 3기에서 제 4기로의 과도기로 본다.
아편전쟁이후: 전통사상의 변용
중국의 근대화운동
1840∼42년의 아편전쟁으로 상징되는 구미자본주의 경제의 중국진출에 따라 중국의 서양 근대문화와의 접촉이 증대하였고, 이로 인해
전통사상이 충격을 받아 중국인의 사상 또한 근대화하기에 이르렀다. 아편전쟁에서 영국군에게 패한 뒤 태평천국운동과 그밖의 반란이 종종
일어났고 또 애로호 사건으로(1856)으로 영국·프랑스 등 연합군의 공격을 받는 등 중국은 연이어 어려운 국면을 맞았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서양의 선진과학기술을 받아들일 필요성을 통감한 유력한 관료들이 서양식 공장을 설립하여 병기나 함선제조에 힘을
쏟았다. 이를 양무운동 이라 하며 이것을 뒷받침하는 이론으로서 중체서용론 이 제시되었다. 인륜도덕 등 근본적인 정신적 기반은
중국의 전통적인 유교를 지주로 삼고, 실용적인 지식과 기술면에서도 서양의 앞선 부분을 받아들여 이용하자는 사고 방식이다.
정치면에서는 공양학자 강유위 등에 의한 변법운동 이 도모되었다. 청의 광서제는 입헌군주제를 목표로 조정의 정치대변혁을
꾀하였으므며, 이 의견을 받아들여 1898년 여러제도의 개혁에 착수하였다. 이것을 무술변법 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신정은 약 백일 만에
서태후등 보수파의 쿠데타로 무너지고 변법은 실패로 끝났다. 강유위는 「대동서」에서 제국주의의 침략과 내부적경직성으로 붕괴위기에
처한 중국의 현실을 타개할 방향으로 대동세계를 제시했다. 양무운동이나 중체서용론은 기술부문에서만 서양문화를 이용하려는 발상인
반면, 변법운동은 정치나 경제제도까지도 서양의 근대적인 요소를 수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중국의 전통문화를 지키려는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았고 서양에 관한 지식도 충분치는 않았지만, 19세기 말부터 엄복이 T. H.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1893)를 번역한
「천연론」(1898)을 비롯하여 많은 번역서가 나와 서양사상 문화의 대량적인 소개와 수입이 시작되었다. 이렇게 하여 외래의 근대적인 여러
사상괴의 본격적인 대결 또는 그 수용이 시행되기에 이르렀다. 다만 이점에 대하여 중국인의 대응은 각양각색이었다.
손문의 삼민주의
서구화 반대론이나 전통문화 수호의 주장도 끝까지 끈질기게 나왔고 여러 논점을 둘러싸고 많은 토론이 되풀이되곤 했지만, 결국 대세는
서구사상을 받아들여 중국의 사상 자체가 근대화하는 방향으로 진전되어갔다. 이에 따라 청나라 조정을 타개하기 위한 혁명사상도
활발해졌다. 그 대표적인 것이 손문의 삼민주의 로 이것은 유교적인 바탕 위에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요소를 가미한 것이다. 민족주의는
멸만흥한을 기치로 내건 반청조적인 면과 외국의 압박에 반발하는 배외적인 면을 겸한 것이었다. 현재 중국과 대만에서 국부로 추앙받고
있는 손문은 「삼민주의」를 남겨 현재까지도 중국국민당의 사상적 지주 역할을 하고 있다. 손문 등의 혁명운동은 1911년 신해혁명을
성공시켜, 청나라는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수립되었다. 다만 그뒤에는 북양군벌인 원세개 등이 계속 정권을 장악하여 혁명의 성과는 제대로
거두지 못했다.
모택동
제1차 세계대전 종결의 강화조약이 체결되는 데 있어서 일본이 중국에 제시한 21개 조의 요구에 대한 중국인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1919년
5월 4일 베이징 학생들의 시위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항의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었는데, 이는 정치운동에만 머물지 않고 큰
문화운동으로 발전했다. 이 사건을 5·4운동이라 한다. 그 주류를 이룬 사상은 중국의 현상황을 대외적으로 반식민지, 대내적으로
반봉건제의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단계를 보고,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의 입장에서 전통사상을 비판하고 철저한 근대화를 기한 것인데, 특히
민주주의와 서양학문을 받아들일 필요성을 강조하였고 또 다분히 사회주의 색체를 띠고 있었다. 1921년 진독수등이 중국 공산당을
결성하였고, 손문이 주재하는 국민당은 공산당과 제휴(국공합작)하여 국민혁명을 추진했다. 손문의 뒤를 이은 장개석이 북방의 군벌을
타도하기 위한 북벌에 성공하고 남경에 국민정부를 수립, 주석에 취임했는데 장개석은 복고적인 정책을 취하여 공산당과 대립함으로써
국공은 분열되었다. 1931년 일어난 만주사변 이후 중·일전쟁, 제2차 세계대전으로 중국에는 항일전쟁 시기가 오래 계속되었다. 이 사이
공산당은 모택동이 주석이 되고 제2차 국공합작도 이루어져 항일 민족 통일전선이 결성되었으나, 1945년 일본의 항복을 사이에 두고 국공의
내전이 재연되어, 1949년 결국 공산당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고 신민주주의 노선에 입각한 사회주의국가 건설이 시작되었다. 한편
모택동은 마르크스주의와 중국혁명의 경험을 총결하여 「실천론」을 저술 했다.
문화대혁명의 종말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이후 모택동이 추진했던 각종 개혁과 대약진운동 , 그리고 중국의 전통문화를 철저히 파괴하고 새로운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데 그 목표를 두었던 문화대혁명 은,모택동의 사망(1976)과 함께 물거품처럼 사라져버렸다. 1978년 등소평은 주도권을
잡으면서, 4대노선(농업·공업·과학기술·군사)의 현대화 추구에 주력하였고, 이러한 변화는 모택동의 개혁이 지나치게 파괴적이고 중국의
전통적인 문화가 송두리째 유린당하면서도 결국 남은 것은 경제적 빈곤과 사회적 갈등뿐이라는 현실을 중국인들이 깨닫기 시작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중국사상의 현대적 의미
개인의 내면적·도덕적인 자각을 중시하는 중국사상은 오늘날 현대 산업 사회에서 중요한 원리로서의 의미를 지닐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소외·배금주의·환경오염 등의 병폐현상이 만연되고 있는 오늘날, 우주와 인간본성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인간과
자연간의 조화를 추구하고자 한 중국사상은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제3장 한국사상의 흐름과 고전
한국사상의 원류
한국사상의 원류가 되는 고대사상으로서는 상고시대의 원시신앙 과 단군신화 를 들 수 있는데, 이들은 우리 민족의 윤리관·가치관의
형성과 구체적인 생활양식에 지속적인 영향을 끼쳤다. 애니미즘·토테미즘·샤머니즘 등의 우리 원시신앙은 고대 부족국가 확립 이전에
형성된 것으로 당시 씨족사회의 생활윤리규범을 제공하였고, 우리 민족의 독자적인 공동체 의식과 전통문화를 형성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원시신앙은 단군신화에서 더욱 구체화되는데, 천인합일의 통일적 세계관과 홍익인간 이라는 인본주의가 그 중심사상을 이루고
있다. 한민족은 고대에 형성된 우리 고유사상을 기반으로 유·불·선 3교와 서양사상을 주체적으로 수용하여 우리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사상을 발전시켜왔으나, 여기서는 불교 와 유교 를 중심으로 우리 사상을 개관해 보고자 한다.
삼국 및 통일신라 시대
불교의 전래
한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4세기경으로, 삼국이 고대국가로서 한창 발전하고 있던 때였다. 당시 사회는 이미 씨족공동체의 폐쇄성에서
벗어나 초부족적인 상태로 변해, 씨족사회의 무속신앙이나 조상숭배 사상만으로 새로운 고대 국가의 사회생활을 이끌어 나갈 수 없었다.
따라서 불교라는 고등종교가 전래됨으로써 인간사회의 갈등이나 모순을 한 단계 높은 수준에서 이해하게 하여 고대국가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한편 불교의 전래는 종교로서의 교리나 의식만이 아닌, 음악·미술·건축·의학 등의 문화의 전파까지 수반하는 것으로,
중국뿐 아니라 인도나 중앙 아시아의 문화도 소개함으로써, 한국의 고대 문화를 성립시키는 데 기여했다. 불교가 삼국에서 공인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백제 침류왕 1년(384), 신라 법흥왕 14년(527)이다. 고구려에서 초기에 받아들인 불교는 중국에서 노장사상으로
불교를 이해하려 했던 격의불교 였다. 예를 들면 불교의 공을 노장사상의 무로 해석하려 했다. 그뒤 문자왕 때에 이르러 불교 교학의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데 중관계의 삼론종 이 주류를 이루었다. 영류왕 때 일본에 간 혜관은 일본 삼론종의 시조가 되었다. 백제는
중국 남조의 불교를 받아들였는데, 주로 율종 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백제의 겸익은 성왕 때 인도에 직접 가 소승불교의 논과 계율 관계의
경전을 가지고 와, 그중 율부를 번역해 백제 율종의 시조가 되었다. 백제에서는 이외에 열반종·삼론종·성실종 등의 연구도 활발했다.
실라는 불교가 전래되기 전까지 문화수준이 가장 낮고, 고대국가의 성장도 늦었지만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고대국가의 체계를 정비하고
왕권강화를 추진하였다. 따라서 불교는 왕실과 밀착되어 상호이용의 관계를 가지고 국가적 후원 속에 확장되었다. 신라의 초기불교는 주로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 고루려의 승려 혜량은 진평왕 때 망명하여 최초의 국통이 되었다. 그뒤 원광은 중국에 유학해 불교를 널리
섭렵하고 돌아와서 세속오계를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유학 이해는 조예가 깊어 세속오계 속에 반영되고 있다. 이는 당시 삼국통일을
앞두고 신라사회가 요청하던 사회적 질서·윤리를 불교의 권위를 빌어 제시한 것이다. 그 다음 자장은 대국통으로서 신라불교의 제도적
발전과 국가의 사상적 통일에 기여했다.
통일신라
삼국통일을 전후해 신라불교는 비약적 발전을 이루어, 경전을 수입하고 교설을 소개하는 데 그친 이전의 단계에서 벗어나, 스스로의
독자적인 교학 발전단계로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로는 우선 신라는 삼국통일의 주체로서 그것을 실현한 후보다 넓은 세계관을
수립하게 되었으며, 또한 삼국통일을 통해 고구려와 백제의 높은 교학 수준을 널리 섭취할 수 있었다는 점 등이 있었다.
1.원효
한편 그 당시 인도와 중국 등 동아시아의 불교계는 대립과 갈등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1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대립, 즉
석가 입적 후 1000년 인도 대승불교 철학에 발생한 공·유 의 대립, #2진(출세간의 진리)·속(세간의 진리)의 차별 문제였다. 여기서 공
이란 영원불변의 실체가 없음 을 의미하는데, 중관학파는 공의 부정적 측면을 강조하고, 유식학파는 공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여
대립하였다. 이 두 학파의 대립을 인도에서 해결하지 못하자 이 과제가 중국과 한국의 불교계에 넘어왔는데 이 과제를 해결한 사람이 바로
원효다. 원효는 「대승기신론소」에서 대립하는 여러 학파의 논리를 일심 을 바탕으로 한 화쟁사상으로 화합했다. 대승기신론의 핵심은
한 마음에 두 가지 문이 있다는 일심이문론인데, 이 두 가지 문이란 진여문(중관학파)과 생멸문(유식학파)이다. 진여문과 생멸문은 서로
대립한 듯 보이지만 일심(중생의 마음)에 의지한다는 점에서는 통하기 때문에 둘은 화합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러한 이론에 입각해 세속적 진리와 절대적 진리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는 실천원리르 제시하고, 나아가 불교의 실천운동에 힘썼다. 그는
당시 신라불교가 주로 왕실이나 귀족 지배세력에 의해 주도되고 일반민중과 유리되는 모순을 통찰해, 초탈한 행동으로 정토 사상을 통한
불교의 대중화에 전력 하였다. 원효의 사상은 당시의 중국에 수출되어 법장·징관 등에 영향을 주어 중국 화엄학 성립의 기반이 되었다.
2.의상
그와 동시대의 인물인 의상은 원효와는 달리 유학해 중국 화엄종의 제2조 지어 문화에서 화엄학을 배웠다. 그때 「화엄일승법계도」를
짓고, 신라로 돌아와 「백화도량발원문」을 지었다. 그의 저서는 주로 실천적인 목적에서 저술된 것이며, 원효의 경우와 같은 방대한
불교사상 체계나, 혹은 지엄의 문화에서 비길 만한 학문적 업적은 없다. 그는 법장의 이론적 태도와 구별되게 실천수행에 주력하여, 지엄은
의상에게는 의지, 법장에게는 문지의 호를 주었던 것이다. 의상의 이러한 경향은 그의 제자들에게 이어져, 신라 화엄학의 특징을 이룬다.
의상과 그의 제자들의 실천 중시 경향은 신라 화엄학의 이론적 발전에 한계가 되어, 새로 대두된 선종의 공격을 받게 되는 나말여초에
이르러서는, 균여로 하여금 다시 지엄이나 법장 등의 중국 화엄학을 재발굴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나 의상이 뒤를 이어 화엄종을
하나의 종파로서 크게 발전시켰다. 이는 원효가 제자를 양성하지 않아, 고려대에 와서 의천에 의해 추앙되기 전까지 그의 사상이 제대로
계승되지 못한 것과 대조된다. 화엄종은 신라불교의 가장 대표적인 종파일 뿐만 아니라 이후 줄곧 교종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3.원측
화엄학과 더불어 신라불교를 대표하는 사상은 유식학이다. 원측은 어려서 당에 가서 유식이론을 배우다가 후에 현장이 인도에서 귀국하자,
그에게서 호법 계통의 새로운 유식이론을 배우고, 유식학의 주요경전의 주석에 힘썼다. 현장의 문하에서 함께 공부하던 규가의 토론을 벌일
때면 몰려든 스님들로 야단법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원측은 법상종의 정통을 자처하던 규기와 그의 제자 혜소 등에 의해 이단시되어
배척당했다. 따라서 원측의 유식학은 중국에서는 계승되지 않고 신라에 전해져, 원측의 제자 도증이 귀국하면서 태현·경흥 등의
유식학자가 배출되었다.
선종의 전래
신라 하대로 들어오면서 불교계에 나타난 새로운 경향은 교종의 전통과 권위에 대항하는 선종이 성립된 것이다. 원래 선종이 들어온 것은
통일 이전부터였다. 즉 달마시대를 제1조로 삼는 중국 선종이 6조 이후 남,북종으로 갈라지기 전에 제4조 도신의 선이 신라의 승려 법랑에
의해 전해졌으며, 이어 북종선이 신행에 의해 전해졌다. 그러나 선종이 신라에서 크게 유행해 종파로 성립된 것은 821년, 남종선의 법을
도의가 귀국하면서 전한 때부터이다. 그후 계속해 홍척, 혜철, 무염, 도윤, 현욱, 범일 등 당에 유학했던 선승의 귀국과 더불어, 마조
문하의 여러 선풍이 각각 전래되면서 국내 각처에 선종 사찰이 세워져 선종 거점을 이룬 것이 이른바 구산선파이다. 통일 후의 신라불교는
화엄학과 유식학을 중심으로 교학면에서 커다란 진전을 이루었다. 그것은 고대국가의 전제 왕권이 강화되고 있었을 때 그 지배체제의
정신적 기반을 마련해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선종은 교종의 기성사상 체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사색하여 진리를 깨닫는
것이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교종이 지니는 고대적 사유방식을 극복케 하였다. 이리하여 선종의 대두는 당시 사상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중세적인 지성을 성립시키는 중요한 자극제가 되었다. 또한 선승들은 대개 육두품 출신으로 지방호족 세력과 연결되어 있었고, 사원을
중심으로 거대한 장원을 형성하였다. 특히 나말여초의 선승들은 대부분 왕건에게 후삼국통일의 이념을 제시하고 나아가 왕건과 지방호족을
연결시키는 매개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유학의 전래
한국에 유학이 전래된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위만조선의 성립과 한사군의 설치를 계기로 해서 한자가 도입되어 사용되었으니,
이때 한문문화의 핵심인 유교사상도 함께 전래된 것으로 추측한다. 삼국이 고대국가로서의 체제를 정비해나감에 따라 행정문서 및 외교문서
작성의 필요성이 증대하게 되고, 이러한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 한문에 능통한 유학자들을 관료로 채용했다.
삼국시대
고구려에는 태학이라는 국가교육기관에서 유학자를 양성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태학박사 이문진의 이름이 전해지고 있으며, 백제에도 박사
고흥이라는 이름이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유학사상의 독자성을 주장할 수 있는 정도의 집단을 이루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고구려, 백제에
비해 늦게 유학을 신라에서는 불교로 사상통일을 이루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유교적인 덕목이 상당히 강조되었는데, 원광의 세속오게에
보이는 충효에 대한 강조와 임신 서기석에 보이는 충도에 대한 연마, 그리고 진흥왕 순수비에 보이는 자신의 내적 수양을 통하여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 라는 구절 등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통일신라
신라에 본격적으로 유학이 채용된 것은 신문왕 2년(682) 국학이 설치되면서부터인데, 아찬 이하의 한정된 관직을 위한 것이기는 하지만
골품제에 토대를 둔 것이 아닌, 학문에 기준을 둔 관리가 일부에서나마 탄생했다는 데 중요한 의의가 있다. 당시의 유학자로서는 강수와
설총이 있었는데 모두 문장에 뛰어났고, 유교적인 의리를 강조한 점에서 일치한다. 특히 설총은 (화왕계)를 지어 군주의 도덕적 수양과
신하의 군주에 대한 참된 충성을 설파하여 당시의 유학이 전제왕권의 확립에 직접 관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 유학자들은 모두 육두품
출신이라는 계급적 특성을 지니는데, 당시의 진골귀족들이 사상적 토대로 삼고 있던 불교사상에 대해 충효라는 사회적 윤리규범을 내세워
왕권과 결합,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자 했다. 즉 신라의 유학사상은 왕권과 육두품의 결합에 의해 형성되었다. 이는 전제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기구의 발전과 함께하고 있다. 원성왕 4년(788), 독서삼품과를 시행한 것도 그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채용된
국학 출신의 유학자들은 인 이라는 보편적 원리를 근거로 한 국왕의 자애와 신하의 충성이 조화된 유교적 전체주의를 신라하대의 이상적인
정치체제로 상정하고 지방호족의 할거에 따른 혼란을 충효라는 윤리의 확보에 의해 수습하려 하였다. 반진골, 반호족적인 입장에서
전제왕권을 지지하는 경향은 최치원, 김운경, 김가기 같은 도당 유학자들에게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그들은 당의 빈공과에 합격한 후
중국의 역사책에도 이름이 오를 정도로 당시 최고의 지식인이었다. 이러한 자부심과 유학자적인 책인감을 가지고 그들은 시부책을 올리는
등 유교적인 정치를 실현하려고 노력했으나, 호족세력의 발흥으로 말미암은 왕권 약화, 골품제의 한계 등으로 인해 좌절되고 말았다.
고려시대
선,교의 대립발전
신라하대 선종이 새로 성립되면서 시작된 5교 9산의 사상적 대립은 고려에 들어와서도 그대로 계속되었다. 게다가 화엄종 내에서도
남악파와 북악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선종은 각 지방의 호족세력과 연결된 채 심한 분열상을 나타냈다. 고려 광종은 불교계 혁신을 위해,
당시 불교계를 교종과 선종으로 양립시키고, 교종은 화엄종 중심으로, 선종은 중국에서 수입해온 법안종을 중심으로 통일하려 했다. 균여를
통해 화엄종단을 통합케 하고, 화엄종의 교리를 재정리하게 했다. 균여는 중국의 초기 화엄학을 재검토해, 중국의 지엄, 법장, 신라의
의상의 저서에 대해 주석을 썼다. 균여는 당시 교종의 2대 주류인 화엄종의 입장에서 법상종을 융회하는, 이른바 성상융회 사상을 폈다.
천태종
광종은 법안종을 후원함과 더불어 중국 천태종에도 유의해, 제관은 중국에 들어가 (천태사교의)를 지어 침체 되었던 중국 천태종을
부흥시켰고, 의통은 중국 천태종의 제13조가 되었다. 이처럼 광종 때의 교선통합은 천태종과 법안종이 서로 보완하는 입장에서 추구되었다.
그러나 광종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개혁정치는 다시 보수세력에 의해 무산되고, 법안종이나 천태종은 독립된 종파로 성립되지 못했다.
다만 그 융합사상은 뒤에 의천의 천태종 개창에 밑거름이 되었다. 그후 100년 뒤 왕자 출신 의천은 불교계에 일대 개혁을 시도했다.
당시는 보수적인 귀족불교를 법상종이 융성하여 화엄종과 양립하였고, 따라서 선종은 제3종단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때 화엄종과 종측에서
등장한 의천은 법상종을 통합하고, 나아가 선종까지도 통합하려는 운동을 전개했다. 교관겸수 와 지관 을 중시한 그의 교선통합은 교리적
발전보다는 정치적 성격이 농후하여, 그가 죽자 천태종은 곧 쇠퇴하고 선종은 다시 독립하였으며, 화엄종은 균여파와 의천파로 분열되었다.
조계종
이후 얼마 안되어 무신란이 일어나면서 고려 불교계에는 커다란 변동이 일어난다. 그것은 선종의 부흥(조계종의 성립) 과 신앙결사운동의
전개 로 요약된다. 지금까지 왕실의 보호를 받던 교종세력은 무신정권에 반발하였고, 이로 인해 무신정권의 가혹한 탄압을 받아 급격히
쇠퇴하였다. 그대신 의천 이후 침체해 있던 선종세력이 최씨정권과 제휴함으로써 새로이 대두하였다. 이는 신라 말에 선종이 호족들에게
환영받았던 사실과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조계종의 세력을 크게 떨친 승려는 보조국사 지눌이었다. 지눌의 사상은 돈오점수
와 정혜쌍수 로 요약할 수 있느느데, 이는 인간의 마음이 곧 부처라는 사실을 깨닫고(선 돈오), 이를 바탕으로 수련을 계속해야 하며(후
점수), 이 수행에 있어서는 정, 혜를 함께닦아야 한다(정혜쌍수)는 것이다. 지눌의 이러한 사상은 중국 화엄종에서 방계로 취급되는
이통현의 화엄학과, 역시 중국 화엄에서 선교통합을 주장한 종밀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결국 선종을 위주로 교종과 조화를 시도한 것이다.
선은 부처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 말씀이다 라고 하여 교와 선이 본래 둘이 아닌 하나임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의천이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포섭한 천태종보다는 교리적으로 한층 발전한 것이었다.
신앙결사운동
지눌은 이러한 사상체계를 바탕으로 피폐된 당시 불교계에 대한 혁신을 도모하여 신앙결사로서 수선사를 조직하였고, 뒤를 이어 진각국사
혜심과 원감국사 충지에 의해 조계종은 계속 발전하였다. 특히 지눌의 심성론은 수선사가 주로 지방의 지식인 계층을 대상으로 하였다는
사실과 관련하여 고려후기에 지방향리 출신의 신흥 사대부들이 성리학을 수용하는 바탕을 마련하기도 했다. 이러한 신앙결사운동은 천태종
내에서도 일어났으니, 요세에 의해 조직된 백련사가 그것이다. 수선사와 함께 무신집권기의 가장 대표적 결사라 할 수 있는 백련사도 역시
불교계의 혁신과 기층사회의 교화에 이바지하였다. 그러나 수선사가 기층민보다 지방의 지식인층을 주된 대상으로 하였음에 비하여,
백련사는 정토관에 보다 충실하여 기층사회의 교화에 전념하였다.
불교의 타락
그러나 이러한 불교계의 혁신적 기운은 몽고간섭기에 와서 단절되었다. 최씨정권과 밀착해 있던 수선사는 몽고의 억압을 받아 위축되었고,
백련사는 고려왕실 및 원황실의 원찰인 묘련사로 변질되었으며, 이에 대신해서 균여파 화엄종과 법상종, 그리고 (삼국유사)의 일연이 이끄는
선종 가지산파가 부흥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고려왕실과 원의 후원을 받으며 막대한 농장을 소유하고, 고리대나 양주를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또한 승려는 세속화되어 혼란한 고려사회를 더이상 이끌 수 있는 정신적 역할을 못하자, 이것이 곧 성리학의 수용에 따른 유불
교체의 요인이 되었다.
유학의 발전
고려시대는 유교가 정치이념으로 채용되어 크게 발달하였다. 광종이 과거제도를 실시하고 성종이 유학자 최승로의 보필을 받아숭유정책을
실시하였으니 유교는 정치의 사상체계로 확립되고 학문적으로도 크게 발달하였다. 유교는 이국의 본이요, 불교는 수신의 본이다 라고 한
최승로의 말은 이를 잘 나타내고 있다. 특히 지배층인 귀족이 문신들로 구성되고 문치주의를 표방함에 따라 숭문의 풍조는 더하였다.
유학이 크게 융성한 고려 문종 때, 해동공자 인 최충은 9제학당을 세웠고, 이를 모델로 하여 11개의 사학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사학의
융성은 상대적으로 관학의 쇠퇴를 가져와 숙종 때부터는 관학의 진흥책이 도모되었다. 고려가 유교를 정치이념으로 채용함으로써 신라의
종교적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이 지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체계가 성립하였으니 확실히 하나의 진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의
유학자들은 과거준비에만 급급하여 유학의 이론이나 사상면에서의 폭넓은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훈고학, 사장학에 치중한 고려의
유학은 중기 이후 귀족취향의 보수적인 경향으로 떨어지는 폐단을 초래하였다.
성리학의 전래
유학이 불교에 대항하는 새로운 이념으로 부흥되는 것은 고려의 귀족사회의 모순이 첨예화되는 13세기 후반부터이다. 권문세족의 횡포와
불교의 폐해는 신흥 사대부로 하여금 새로운 지도이념을 모색하게 하였는데, 때마침 들어온 성리학은 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성리학은 송의 주자가 완성한 것으로 한, 당시대의 훈고학적 유학 대신 우주의 근본원리와 인간의 심성문제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려는
신유학이다. 고려는 이미 심성화된 선종의 융성으로 성리학 수용의 터전이 마련되어 있어 그것을 용이하게 수용할 수 있었다. 이 성리학은
충렬왕 때 안향이 소개한 후, 백이정이 원에 가서 배워와 이제현, 박충좌에게 전수하였으며, 고려말에는 이색, 이숭인, 정몽주, 길재,
권근, 정도전 등이 발전시켰다. 이들 주자학자들은 자신이 처한 계급적 위치에 따라 정몽주를 중심으로 한 중앙 귀족관료 출신의 온건파와,
정도전을 중심으로한 향리 출신의 급진파로 나누어진다. 온건파는 토지개혁을 점진적으로 행할 것을 주장하고 불교비판에서도 불교의 교리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닌 승려와 사찰의 폐해를 지적하는 데 그쳤다. 이에 비해 급진파는 즉각적인 토지개혁을 통한 민생안정을 주장하고,
불교에 대해서도 사상 자체의 이론적 비판을 통해 불교 자체를 완전히 말살하려고 허다. 이러한 입장 차이는 결국 고려왕조에 대한
계속적인 충성과 역성혁명에 의한 새로운 국가의 건설이라는 극단적인 대립으로 치닫게 되었고 정몽주의 피살과 조선의 개국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조선시대
억불정책과 산중불교
조선시대에 들어 불교는 극심한 탄압 속에서 일종의 자기 보호책으로서 호불론을 전개하여, 유불일치를 강조하는 경향을 띤다. 조선초기의
기화는 배불론에 대해 호교론을 펴고, 종교적 갈등을 모나지 않게 해소해 공존을 추구하려는 융화적 경향을 뚜렷이 나타냈다. 그는 유, 불,
도 3교의 일치론을 최초로 주장했다. 그후 명종 때, 문정 왕후의 후원을 받은 보우는 선과 교가 하나임을 강조하고, 불교와 유교가
하나에서 유래했다는 융합론을 폈다. 그는 유교의 공자, 순자 및 노자 등 일체의 사상을 불교의 화엄일리 속에 융합시키고, 다시 여기에
선의 요소를 가미해, 교선일체에서 더 나아가 교선일체를 주장했다. 그후 휴정과 유정이 등장하여 불교사상을 진작시키고, 승병을 모집해
왜란을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휴정은 유, 불, 도 3교가 각각 다른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그 궁극적인 진리에 있어서는 다 같다고
하였다. 기화가 (현정론)에서, 유교가 불교를 비난한 내용을 조목조목 들어 해명하는 방식으로 논리를 전개한 데 반해, 휴정은 거기서 더
나아가 전혀 상대를 비판함이 없이 일체임을 강조한 것이었다. 그런 그의 사상은 (선가귀감)에 잘 나타나 있다.
조선의 통치이념화된 유교
고려말 중소 지주계급 출신 사대부들이 이념적 토대가 되었던 주자학은 1392년 이성게,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급진개혁론자들이 조선왕조를
개창하자 조선의 통치이념으로 채용되었고, 곧 중세적인 조선 봉건사회를 확립하기 위한 절대이념이 되었다. 조선초의 주자학은 고려
귀족의 정신적 지주였던 불교의 현실적인 폐해를 비판할 뿐만 아니라, 불교적 세계관이 허구라고 비판함으로써 고려 귀족사회의 정신적
기반을 허물고, 주자학에 입각한 중세적 세계관의 확립이라는 과제를 완수하기 위해 상당히 높은 수준까지 연구된다. 반면 역성혁명을
반대한 일부는 지방의 중소지주로 머물면서 향촌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훈구파의 비리를 비판하는 가운데 정치세력으로
성장해갔으니 이들이 사림파다.
사림파
사림이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 때부터다. 이 시기에 오면서 훈구관료 사이에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하였고,
성종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사림파들을 언관직에 기용하였다. 길재,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으로 연결되는 이들은 훈척세력의
비리를 맹렬히 공격 하였는데, 사림을 옹호하던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훈구파들이 반감을 폭발시켜 사화를 일으킨다. 네 번에
걸친 사화로 그때마다 사람들은 큰 화를 입었지만, 지방의 서원과 향약을 중심으로 잠재적 성장을 계속하여 선조대에는 결국 정계의
주류로서의 위치를 차지했다.
주리파와 주기파의 대립발전
조선의 성리학은 주리론 과 주기론 의 두 계통으로 발달하였다. 주리론 은 주자의 견해를 보다 충실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이기이원론
의 입장에서 이 (본질, 플라톤의 이데아,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상과 유사)와 기 (현상, 플라톤의 현상계,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유사)는
서로 다른 것이면서 서로 의지하는 관계에 있지만 어디까지나 이가 기를 움직이는 근본이라는 견해다. 따라서 인간의 심성문제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이는 순선무악한 것이고 기는 가선가악한 것이라 하여, 역시 이에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이 학설은 이 언적에서
시작되어 이황에 이르러 집대성되었는데, 특히 이황은 동방의 주자 라 불릴 만큼 주자의 교리에 충실하였다. 그의 저서 (성학십도)는
성리학의 요체를 10개의 그림으로 나타낸 책이다. 그의 문하에서는 유성룡, 김성일, 정구 등이 배출되어 영남학파를 형성하였으며,
일본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한편 주기론 은 서경덕이 처음으로 주자의 학설을 비판하고 이기일원론 을 주장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화담집)을 지은 서경덕은 독자적으로 중국의 기철학을 수용하여 기일원론에 입각한 독특한 기철학 을 완성했다. 주기론은
(성학집요)의 저자 이이에 의해 완성을 보게 된다. 이것은 우주만물의 근원을 기에 두고 모든 현상들을 기의 변화, 운동으로 보는
입장이었으나, 여기서 이는 기를 움직이는 법칙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심성론에 있어서도 본연의 성보다 기질의 성을 더욱
중요시하였으며, 정치, 경제 등 현실인식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했다. 이 학문은 이이를 비롯해서 성혼, 송익필과 이이의 제자인 김장생
등에게 이어져 기호학파를 형성하였다. 이후 영남과 기호의 두학파는 학문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립하면서 발전하였다.
예학의 발달
조선유학이 예학 중심의 교조적 주자학으로 변모하게 된 것은 당시 조선의 사회, 정치적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 임진왜란,
병자호란을 겪은 후 조선은 봉건사회의 모순을 극명하게 드러내면서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17∼18세기에 이르면 농업기술의
향상으로 생산력이 급격히 향상되면서 농민층의 분해가 가속화되는 동시에, 통치능력의 상실에 따른 지배계급의 압박과 수탈이 더욱
가중된다. 이러한 봉건사회 자체의 해체 위기에 처하여 지배계급의 유학자들은 주자학적 명분을 더욱 강화하고 신분질서를 엄격히 함으로써
이를 극복하려 했다.
주자학에 대한 비판
조선후기에 나타난 사회경제적 변동은 주자학 일변도의 사상체계에 근본적인 반성을 요구하였다. 교조화된 주자학에 대한 비판은 이전부터
있어왔는데 윤휴와 박세당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들은 주자학의 절대성을 부인하고 유교경전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하였고 이러한
비판적인 동향은 양명학의 도입으로 가속화되었다. 양명학은 명의 왕양명이 일으킨 주관적 실천적인 유학체계로, 주기론의 입장을 견지하여
조선의 사회변동을 수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제 두는 이를 학문적 체계화하였다.
실학운동
지배계급의 정통 주자학이 끝까지 명분론과 주리론을 고집하는 동안 사상계의 일각에서는 전혀 새로운 문제의식을 지닌 학문 경향이 17세기
후반부터 등장하는데 이를 실학 이라고 부른다. 실학을 담당한 계층은 양반계층 내부의 계급분화와 일부 벌족의 대토지소유로 말미암아
몰락한 양반 지식인들이다. 이들은 신분적으로는 지배계급에 속했지만 현실행활은 일반민중들과 다를 바 없어 당시 민중들의 비참한
생활상과 지배계급의 수탈상을 체험으로 깨닫게 되었고, 현실정치의 모순을 누구보다도 예리하게 볼 수 있었다. 이들은 관료로 진출하지
못한, 혹은 불우한 관료생활로 끝맺은 자신의 처지를 통하여 봉건사회의 모순을 자각하고, 주자학적인 명분론의 강화로는 현실의 구조적
모순이 도저히 극복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학문연구의 방향을 관제, 병제, 토지, 기술 등의 현실문제로 전환하고,
이러한 현실문제의 해결을 위해 그동안 지엽적인 지식들을 백과전서식으로 탐구하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구의 자연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학문대상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을 이룬 실학자들은 학문 방법에 있어서도 중국의 고증학을 받아들여 전통적인
주자학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경험적, 실증적인 방법을 채택함으로써 어느 정도의 근대성을 띠게 된다. 실학자들의 철학사상은 시대와
대변계급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으므로 일률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대개 현실의 변혁과 개인이 욕망을 긍정하는 주기적인
경향과 경험론적인 색채를 보이고 있다.
1.경세치용학파
실학사상은 연원을 거슬러올라가면 이이에까지 소급되지만, 본격적인 실학사상은 유형원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본다. 초기의 실학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에 걸쳐 발전했는데, 흔히 경세치용학파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이익에서 시작하여 그의 제자들에게 계승된 사상으로,
당시의 사회적 모순이 토지의 과점에 있다고 보고 토지개혁 문제에 주력하였으며, 당시의 소농민계층을 대변한 양심적인 관료의 사상으로
후에 일부의 제자들은 그들이 지향한 농촌사회의 이념으로 천주교를 도입하기도 한다.
2.이용후생학파
18세기 중반에 일기 시작한 중기 실학은 이용후생학파라고도 하는데, 주로 중국을 다녀오고,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북학파의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이 주축을 이룬다. 이들은 대개 서울 출신의 학자들로 당시 현저한 발전을 보였던 상업과 수공업을
중시하고, 도시빈민의 생활상을 동정하여 이들을 대변하는 중상주의적 사상을 전개했다. 그들은 생산력 발전을 위해 중국에 들어온
서구과학을 과감히 받아들일 것을 주장했고, 그들 자신이 과학적 연구에 몰두하기도 했다. 또 당시의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양반제도를 철폐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초기와 중기와 실학사상은 정약용에 의해 집대성되는데, 그는 현실문제에 대한
여러가지 개혁안을 제시했을 뿐 아니라, 청의 고증학을 이용한 유가경전의 재해석을 통해 수사학(유학)의 입장을 확립함으로써, 기존의
주자학에 대체될 수 있는 새로운 인간관, 세계관을 제시했다.
3.실사구시학파
19세기 초반 김정희에 이르러 일가를 이룬 학파가 바로 실사구시학파 이다. 이 학파는 경서 및 금석, 고전의 고증을 위주로 하여 학문하는
자세에 있어, 실증성과 해석을 크게 강조하였다. 이 사상은 묘하게도 김정희와 가까웠던 중인계급 학자들에 의해 후일 개화사상과
연결된다. 김정희와 더불어 초, 중기 실학과는 거리가 있으면서도, 당시 사회를 충실히 반영하는 철학체계를 구성한 학자는 최한기다.
그는 실학가 개화사상의 가교자로 평가되는데, 서구의 자연과학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외국과이 교류를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윤리적인 면에서도 유교를 옹호하여 전형적인 동도서기론을 폈다. 최한기는 경험적인 인식론과 자연과학적인 학문관, 유교적인 윤리관,
정치개혁론 등이 모두 융해되는 방대한 기일원론의 철학체계를 구성하여 조선의 유학에 막을 내린다. 그의 기철학은 저거 (기학)에 담겨
있다. 이들 실학사상들은 교조적 주자학을 타파하고, 학문의 중심을 윤리, 도덕으로부터 정치, 경제, 자연에 대한 현실문제로 전환시켰다.
그들은 당시 사회적 모순이 지배계급의 부패, 무능과 더불어 토지제도, 신분제도 등의 봉건사회 자체에 내재하고 있음을 깨닫고, 토지제도의
개혁을 통한 이상적인 농촌사회의 건설, 신분제도 철폐 및 과학기술의 수용 등 여러 가지 이상적인 방안을 내놓았으나, 시대적, 계급적
제한성과 제국주의의 침탈로 말미암아 근대적 사상으로까지는 성숙하지 못했다. 그러나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세도정치가 시작됨에 따라
실학파의 활동이 부진하게 되자, 다시 성리학이 세력을 만회하였다. 그뒤 천주교의 세력이 날로 심각해지면서, 위정척사 운동이 대두하여
외국사상과 외국문물에 대한 배격운동이 전개되었으나, 그 수구적인 운동은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고, 오히려 근세에 개화혁신에 장애가 되는
측면이 많았다. 그 원인은 조선말엽의 유교계가 대부분 국제정세에 어둡고, 유교의 유신정신을 망각한 채 수구만을고집했기 때문이다.
근대이후
불교자체 정화노력
그후 한국불교는 일제의 통치를 당해, 백용성, 박한영, 한용운 등이 나타나 불교 유신을 제창했다. 백용성은 전통적인 한국 선종의 특색을
다시 드러내고, 그럼으로써 불교 본연의 진면목을 제시하고자 하여 대각교 운동 을 벌였다. 박한영은 한국의 전통적 선관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제시하는 한편, 과학과 서구문물이 밀려오던 당시의 상황에서 미래를 지향하는 불교를 제시하려 했다. 한용운은 철저한 유신을
주장하여, 과학문명이 고도로 발달된 시대에 정신문명의 원천으로서 불교를 확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당시 이회광이
친일불교운동의 일환으로 일본 조동종과 합종할 것을 추진한 데 대해, 한국불교의 전통은 임제종이라고 선포하여 조동종과 합종할 수 없다는
운동을 이끌었다. 국권이 상실되면서 한국불교교단은 일본총독의 지배하에 30본산으로 나뉘어 전국의 사찰과 승려를 통제하는 기구가
마련되지 않았다. 1941년 봄 태고사(지금의 조계사)를 세워 총본산으로 삼아 종단의 이른을 조계종으로 결정하고, 1946년에는 기존의
명진학교를 동국대학교로 개칭하여 새로운 출발을 하였다. 그후 효봉, 청담, 성철 등 큰스님들의 구조적 신앙자세는 1980년 10,27법난에도
꿋꿋하게 한국불교를 지켜나갔고, 1990년 불교방송(BBS)의 개국과 더불어 불교발전의 기틀을 마련해가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우리
불교계는 돈오점수(깨달은 후 계속 닦음)와 돈오돈수(단번에 깨우쳐 단번에 닦아 마침)의 해묵은 이론적 대립문제, 중생구제보다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세속적인 교권 확대에 집착하는 일부 집단의 반종교적 행위문제, 타종교와의 융합을 통해 모든 인류가 화합하여 참된 인간을
완성하려는 불교의 이상을 실현하는 문제 등 몇 가지 해결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다.
유학
국권침탈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책이라는 미명 아래 친일절인 유학자들을 이용, 성균관을 경학원 으로 격하시켜 한국유교의 맥을
단절시키고자 하였다. 1945년 광복 이후 전국 유림의 합의에 따라 경학원을 성균관 으로 환원시키고, 1964년 전국 유림의 결합체인
유도회를 결성함과 동시에, 성균관 대학교를 창설하여 유학정신에 바탕을 둔 대학교육을 실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