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고하는 사람의 생활
생활이야말로 위대한 교육자라고들 한다. 사실 우리들은 생활 속에서 계속
시행착오를 되풀이하면서 안전을 찾는 본능-경험이라든가 생활의 지혜라든가 하는
것을 터득하고 있다.
그러나 몇 억이라는 사람들이 매일같이 되풀이하고 있는 방대한 노력이나 경험은
사람들의 사고 능력을 도리어 줄이는 것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플라톤(B.C. 427-347, 희랍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은,
"경험은 플러스보다도 마이너스가 되는 것이 많다"
라고 말하였다. 사고에 전념하는 생활에는 아무래도 고독하고 자유롭고 또 틈이 있어
야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는 수도원의 방 한 칸에서, 데카르트는 파리를 멀리 떠난 조용한 교외에서,
파스퇴에르 (1822-1895, 프랑스의 화학자, 생물학자)와 에디슨의 고립된 실험실에서,
학자인 수도사는 수도원에서, 성자는 매사추세츠 주의 조용한 시골에 틀어박혀서, 또
예술가는 이해관계가 없는 일에 전적으로 집중할 수 있는 낙원을 만들려고 끊임없이
시도해 온 것이다.
그들은 사회생활을 최소한으로 억제하려고 했다. 사고하는 사람에게는 생활이
가져오는 번잡한 일은 필요 없는 방해물이었던 것이다.
2. 사고하지 않는 사람의 생활
대부분의 사람들의 생활은 스피노자나 데카르트의 생활과는 반대이다.
부자이건 가난뱅이건 대개는 자기 자신의 일을 안달복달하면서 일하고 있는
인간들이다. 당신이 사람들의 얼굴에서 문득 피로의 기색을 읽게 되면 아마도 그것은
그 사람이 자기가 하는 일에 불안을 가지고 있고, 그 불안이 눈을 움푹 꺼지게 했으
며,
입을 오므라들게 만들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재능은 있지만 재산을
갖지 못하는 문학가나 예술가들도 마찬가지이다.
재산이 예술을 망가뜨린다는 것은 사실이기는 하지만, 예술가도 어느 정도의 재력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실패와 불안이 인간의 능력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끄집어
낸다고 할 수만은 없다.
그 반대로 눈을 움푹 꺼지게 할뿐만 아니라 꽃피려고 하는 재능을 시들게 해버리는
수가 많은 것 같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의 접촉을 회피하게 되거나 '방탕' 속에 도피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다고 해서, 만일 부자나 권력을 가진 자와
잘 어울리거나 아니면 자기에 대한 평판에만 신경을 쓰면 인간적으로 비굴해지고 그의
사상의 질은 한꺼번에 타락하고 만다.
설교자는 부자가 가난뱅이보다 근심 걱정이 많다고 말하지만, 부자는 가난뱅이보다
도
걱정이 적다는 것이 정말일 것이다.
시간이 없다는 것이 또 이 부자들의 상투적인 말인데, 가끔 조금 쉬기 위해서 병을
앓는 것을 기뻐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들은 고독이나 싫증에는 참을성이 적다.
여행을 하거나 사회생활을 함으로써 이 사회의 모습도 알고, 여러 가지 사실이나
지식은 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그들이 얼마나 무지한가를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그들은 진지한 책이나 회화에는 흥미나 관심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사색을 하기 위해서 시간을 내는 일은 절대로 없다. 그들은 본능을 위해서
생활하고, 오락이나 스캔들 또는 권력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드디어 그들의 가치 판단의 척도는 잘못된 것이 되어 버리고
말며 직접적인 향락만이 최대의 관심거리가 된다.
3. 기분전환의 수단이 되어 버린 독서
독서가 사색에 도움을 줄 수가 있을까?
'독서가 완전한 인간을 만든다'라고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 영국의 철학자)이
말했다.
그러나 독서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다.
아직 책이 귀했던 시대에는 독서는 마술과 같은 신성한 분위기를 주었던 것이다.
당시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읽을 수가 없었으므로 성직자는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 은혜를 나누어주어야 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서, 큰 소리로 책을
읽도록 약속이 되어 있었던 것 같다(이 현상은 개인적인 독서에서도 오랫동안 습관이
되어 남아 있게 되었으며 지금도 입술을 움직이면서 읽는 시골사람들은 이 전통을
지키고 있다고 하겠다).
그래서 사람들이 책을 입수하게 되면 몹시 소중하고도 값비싼 물건이나 되는
것처럼 엄숙한 태도를 보여주었던 것이며, 그래서 온 정신을 독서하는 데 집중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는 책을 읽는 것의 효과를 누가 의심이나 했겠는가?
책의 희소가치가 있었으므로, 무차별한 장서를 늘린다는 일은
없었다. 인쇄술이 발달되고 난 후에도 처음에는 그 이전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종교서적· 시인 철학자의 저서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가벼운
책으로는 호머나 역사가의 책이 뒤섞여 있었다.
왕이나 귀족들, 그리고 부유한 수도원의 장서라도 천 권을 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개인의 장서는 당연히 이것보다는 적었고, 스피노자도 60권이 못되는 것으로 그
리스트가 오늘날 공개되고 있다. 1백 년 후 칸트가 3백 권을 모았지만 그 중 대부분은
여행기였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는 책의 홍수에 휩쓸릴 것 같은 위험에 처해 있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얼이 빠져서 열등감이나 환영이 세균과 같이 자꾸만 늘어가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처치가 곤란한 것은 아마도 모든 책에 대해서 의견을 가질 수는
없으면서도 알고 있는 척해야 한다는 생각일 것이다. 사람들은 읽지도 않았으면서도
읽은 것처럼 행세를 해야 되며, 다른 사람의 판단을 제 것인 양 표절하고 있다. '생각
의
기술'에 있어서 이보다 더 파괴적인 것은 없다.
오늘날 산더미처럼 출판되고 선전되고 비평에서 과장되고 있는 것은 소설이다.
소설은 서점의 책장 뿐 아니라 우리들의 책장에서도 넘치고 있다. 이들 소설은 시간
보내기 위해서 읽히고 있다. 그리하여 '읽는다'는 말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존엄성을
잃어버렸을 뿐만 아니라 의미 그 자체가 변질되고 말았다.
오늘날에는 독서란 담배를 피운다던가 카드놀이를 하는 것과 같은 일종의 육체적인
기분 전환의 수단이 되고 있다. 이와 같이 사교적인 행위로서의 독서가 가져오는
'효과'는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는 이 책의 14장에서 신문이야말로 사색을 하기 위한 가장 좋은 도구라는 점을
말하려고 생각하지만, 대개의 경우, 신문은 전혀 읽혀지지 않거나 쭉 한번 눈으로
훑어보는 것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나는 기차 안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사람을 유심히 관찰한 적이 있다. 그
신사는 허드슨 강을 헤엄쳐서 건너간 여성의 기사를 읽고 있었다. 이것은 상당히 긴
이야기로서 6면에 계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신사는 신문 지면의 석 장을 넘길
생각은 하지 않고, 같은 지면에 있었던 뉴저지 주의 '돼지 여자 사건'의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난 후, 의회에 보낸 대통령의 교서, 사설, 옥수수 시세, 선박, 스포츠에 관
한
소식 등을 거의 비슷한 관심을 가지고 읽는 것 같았다. 얼마 후 신사는 피로해졌는지
신문을 꾸깃꾸깃 꾸겨서 밑으로 집어던지고는 발로 밟고 난 후 담배를 꺼내 피웠다.
전혀 관심도 없는 기사를 오랫동안에 걸쳐서 읽는다는 지적 작업이 어떤 영향을
주는가 생각해 보라.
이것은 대다수의 사람들이 일생 동안하고 있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독서는 오히려
창조적 사고를 파괴하는 것이 되고, 그 중에서도 신문은 그 산만성 때문에 사람들의
집중적인 사고를 방해하고 무책임한 표제, 헤드라인에 의해서 농락 당하고 마는 것이
다.
인간은 본래 열등감이나 환영을 가지지 않고, 관찰하는 힘이나 사고를 위한 이미지
를
저장하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런데 생활, 즉 교육이라든가 문학작품이라든가
언뜻 생각하기에는 유익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포함한 생활이라는 것은 이것을 마치
4월의 서리가 꽃을 시들게 하듯이 파괴하고, 드디어 사람들이 흉내내기나 비열함 힘센
자에게 는 양보하라는 식의 사고 방법이 독창성을 몰아내고 그 대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인간의 표면은 허쿠라리움(기원 79년,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에 의해서 매몰된 나폴
리
부근의 로마시대의 도시)과 같이, 딴딴한 지각으로 싸여 있고, 그 밑에 진짜
생활이 잊혀진 채로 버려져 있는 것이다.
극히 적은 사람만이 지하에 숨겨진 방-일찍이 소년시대에 즐겁게 놀면서 지낸
일이 있는 그 방으로 통하는 길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습관이나 되풀이라는 두꺼운 용암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