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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교육 사고를 방해하는 것(III)

  1. 교육은 사고의 장애가 된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우리들이 '올바른 사고 방법'을 몸에 익혀 가는 데 있어

가장 무시할 수 없는 것은 '교육'이라는 장애다.
  교육이 정신의 '기생충'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냐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결코
궤변을 늘어놓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이론상으로는 교육이란 지성에 탄력성을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 정신적 훈련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교육은 정신을 단련시키는 대신에 정신을 지치게 하고, 탄력성을 줄이는 구실을 하

경우가 많다.
  두뇌라고 하는 것은 쓰면 닿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머리는
쓰면 쓸수록 좋아진다는 생각은 기정 사실이다. 사람은 뭔가를 생각하면 할수록
그만큼 '사고'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교육이 만일 생각하는 습관을 만드는 수단으로서의 구실을 한다면 아무런
문제는 없다. 그런데 사실에 있어서는 바로 그 반대가 아닐까?
  "당신은 자기가 받은 교육에 만족하고 계십니까?"
  여기서, 우리들의 노력이 부족했다는 불만은 우선 일단 제쳐놓기로 하자. 지금
문제삼고 있는 것은 가르치는 쪽에 대한 불만에 관해서이다.
  독자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불만스러운 것은 당연하다고 나는 말하고 싶
다.
  라블레(1484-1554, 프랑스의 작가로서 "가르강튀아 이야기"라는 소설의 작가),
몽테뉴(1533-1592, 문예부흥기의 프랑스의 모랄리스트, 주요 저서는 "수상록"),
존 로크(1632-1704, 영국의 계몽철학 및 경험의 창시자), 펜롱(1651-1715, "덴마크"의
작가), 루소(1712-1778, 프랑스 계몽기의 사상가), 이러한 여러분의 사상가들을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당신은 반드시 마음속에 짚이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모두
교육에 대해서 커다란 불만을 품고 있었다. 19세기의 나타난 이름 있는 교육자들도
대개는 교사에게 반감을 품고 있었으며, 또 그것을 숨기려고도 하지 않았다.
  교육의 어떠한 점이 그들로 하여금 뛰어난 지성이 결함투성의 교육의 희생물이
되었으며, 발전이 저해 당했다고 할 수가 있다.
  결함투성이의 교육! 이것은 루소나 페스탈로치(1746-1827, 스위스의 교육가) 시대의
옛이야기에 불과한 것일까? 유감스럽게도 이에 대한 대답은 '노!'이다. 현재에도 뜻있

교사들은(그들 자신이) 커다란 불만을 품고 있다.
한 발 양보한다 해도 교육은 아직까지도 이상과 현실 사이에 커다란 갭을 안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창조적 사고'를 향상시키는 데 있어서는 교육이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어쨌든 우리들의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고 하겠다.
  그러나 이런 정도로 이야기가 쉽게 끝나지 않는다. 앞에서 '장애'라는 말을 사용했

사실을 상기해 주길 바란다. '장애'는 이런 교육을 계속 받으면 도리어 나빠진다는
관점에서 한 말이다.
  예를 들면, '교육'을 받았던 탓으로 나이가 들어갈수록 열등감만 자꾸 심해진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도 비교육(무교육이 아니고)의 교육적 악효과의 한 실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결국 나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즉,
  "모든 나라의 교육에 결함이 있을 겁니다"라고.
  그렇다고 여기서 모든 나라의 교육의 결함을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으므로 여기서는
미국이나 프랑스의 경우만을 예를 들어서 검토해 보자.
  미국의 교육은 지나치게 실제적이고 실용적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문화라는 것은
소수의 엘리트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프랑스의 경우는 미국과는 정반대의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 '문화'를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나머지 단순한 지적 만족감을 추구하여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실제적인
의무는 가볍게 다루어지는 경향이 있다.
  어쨌든 간에 올바른 사고의 능력이 손상되고, 따라서 사람들은 최초의 좌절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평생 동안 노력해도 안된다는 비극 속으로 빠져들게 되기가 쉽다.

  2. 프런티어 정신의 폐해-미국의 교육(1)

  미국의 교육은 오늘날까지도 개척자(또는 그 후손)를 위한 교육의 성격을 띠고
있다는 것을 외국인은 누구 나가 느끼게 된다. 이러한 경향은 미국의 서부만이 아니고
고층 빌딩이 하늘을 찌르는 대도시라 해도 결코 예외는 아니다. 미국인들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개척자의 습관이나 기질을 이어받고 있다.
  미국인 집의 문패 하나만 보아도 곧장 알 수가 있다. 통나무 끝에 매우 우편함은
근대적인 롱 아일랜드의 한복판에서도 볼 수가 있다.
  철저한 레이디 퍼스트의 풍속도 따지고 보면 여성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대접을
받던 개척 시대의 유물이라 할 수가 있다.
  개척자들이 만든 학교의 목적은,
  #1 우선 학생의 육체를 건강하고 억세게 단련시키는 것.
  #2 다음으로 건장한 육체에 어울리는 건전한 정신과 강인한 의지를 기르는 것.
이라는 것이다.
  미국 사람에게 있어서 건강한 육체로 단련해야 한다는 것은 인디언과 싸우면서
농장을 개간하고 목장을 이룩하던 저 프런티어 이래의 전통이며 또한 본능이기도 한
것이다. 그들의 캠프 생활에의 정열이 독립 자주의 정신과 결코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스포츠는 학교 생활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되었고 물론
그것이 나쁠 것은 없지만 모든 일에는 정도라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솔직히 말한다
면,
미국인들이 이 점에서 생각이 부족한 것이다.
  나에게도 이런 경험이 있다.
  어떤 학교를 방문했을 때, 그 학교의 교장은 제일 먼저 나를 그들 학교의
'신성한 장소'로 안내해 주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놀랍게도 은으로 만든 받침대 위에
야구공이 소중하게 모셔져 있었다. 어처구니없게도 그 공에 대해서 경례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3. 지나친 스포츠 우선-미국의 교육(2)

  어떤 일이나 정도가 지나친 것은 옳지 못하다. 미국인이 스포츠를 즐긴다는 것
자체에는 잘못이 없다. 그러나 학교 교육에 있어서의 지나친 스포츠 편승은
신중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이다.
  미국의 대학 신문은 스포츠 신문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노트르담 대학은
카톨릭 계통의 대학이지만 일반적으로 '미식축구가 센 학교'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하기야 체육도 어느 모로 보아서는 기술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체육을
'문화'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우리 나라의 교육은 체육과 문화를 잘 조화시키는 시도에는 성공하지를 못한 것
같다"라고 불평을 하게 된다.
  또한 나는 이런 말을 들은 적도 있다.
  "당신네 나라(프랑스)의 젊은이들은 말재주가 뛰어나더군요. 서로 대화를 해보면 매

재치 있는 표현을 능숙하게 하는데 그 비결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프랑스의 학교에서는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서 밤 여덟 시까지 사이에 레크리에이

시간이라고는 불과 두 시간 정도밖에 없습니다. 프랑스말로 '공부한다'는 말
'뜨라바이에'는 영어의 일하다에 해당되는 말인데, 우리 나라에서는 운동장이나 보트

타는 강에서는 '뜨라비아에'한다고 하지 않습니다..."
  "과연 그렇군요"
  "프랑스의 소년들은 말재주는 뛰어나지만 가슴이 좁지요. 미국의 소년들은 말솜씨는
서툴지만 체격만은 훌륭하더군요. 장점도 있고 결점도 있다고 하겠습니다"
  학교는 실생활에 들어가지 전에 거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지만 일반적인 교육이란
생활을 위한 준비라는 점에서는 직접적인 효과가 부족한 것이다.
  미국인들은 그런 점을 탐탁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매우 실제적인 것을
존중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문화'와 같은 실제적이고 직접적인 효과가 없는 것을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보지를 않는다. 스포츠 우선이 '공인'되고 있는 이 나라의 교육 자체도 미국적 기질을
만드는 데 중요한 구실을 맡고 있다고 하겠다.
  미국인들은 뭐든지 세계 제일이 아니면 마음이 편치 않은 민족이다. 그러면서도
사상이나 예술의 분야에서는 의외로 욕심이 없는 것 같다.
  그 이유는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미국인들은 문화라고 하는 것은 별로 소용이 없

것이라 생각하는 민족이다. 잘못된 환상에 사로잡혀 있다고밖에 말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은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라고 말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4. 점점 젊어지는 국민 미국의 교육(3)

  미국인들은 언제나 젊다든지, 미국은 젊은이의 나라라고 흔히들 이야기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미국인들은 과연 젊다고 말할 수가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그러한 말은 어느 정도 핵심을 찔러 주고 있기는 하지만 의아스러운
점이 없지는 않다. 미국의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영광스러운 여러 인물들을 한 번
보라. 그들, 즉 과거의 미국인들은 결코 '젊지는' 않았다. 미국은 그 역사의 후반에서
젊어진 것이다. 뜻있는 사람들은 이런 현상을 개탄하고 있다.
  교육을 통해서 '어른으로 돌아가려는' 노력이 오늘날 끈질기게 추진되고 있으나
이러한 노력도 대중의 저항에 의해서 그리 신통한 성과는 올리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교육은 대중을 향상시키는 목적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교육방법이 도리어 대중에
의해서 대중이 하라는 대로 마구 휘둘려지고 있는 것 같다. 대중이란 직접적이고
실리적이며 실제적인 것만을 바라는 철저한 현실주의자들이다.
  교육이 현실성의 편중과 손을 끊지 않는 한, 세부적인 방법론 같은 것을 아무리
주물럭거려도 별로 큰 효과를 바랄 수는 없다.

  5. 안이화와 실리성의 편중-미국의 교육(4)

  사물을 될 수 있는 대로 안이화해서, 이해하기 쉽게 한다고 하는 것은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이것은 자칫 잘못하면 중대한 잘못을 초래하는 것이다. 미국식의
'안이화'에는 위험이 너무도 많은 것이다.
  나에게 이런 경험이 있다.
  "알기 쉬운 프랑스 문법"이라는 책을 뉴욕에서 출판하였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그 책이름을 "쉬운 프랑스어"라고 바꿔 부르는 것이었다.
  '쉬운 프랑스어'나 '쉬운 프랑스 문법'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알기 쉽게 재미있

설명할 수는 있다.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며 안된다. 그러나 격변화나 동사의
활용변화를 쉽게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효과적인 것은 프랑스어를 배우는 사람에게 암시를 주는 정도의 것이다.
  #1 아무리 따분하고 지겹더라도 처음에는 참을성 있게 끈질기게 극복해야 한다.
  #2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모두 이런 식으로 이미 해낸 일이니까.
  이것은 원칙적이다. 라틴어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미국에서의
라틴어의 학습이나 교과서의 체계를 보면, 우리 유럽인들은 정말 어처구니가 없어진
다.
  미국에서는 라틴어를 꼭 알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라는 식의
적당주의로 꾸며져 있다는 것을 곧장 알 수가 있다.
  그럴러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물어물할 바에는 처음부터 하지 않는 편이 현명할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학생들은
  #1 아무렇게나 어물어물하는 습관과
  #2 열등감
  만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학에서는 단편소설이나 단막극 시나리오 등을 쓰는 방법을
가르친다. 교육 방법도 고전어학 코스를 가르칠 때보다는 몹시 발달되어
있다. 한편 학생 쪽에서 보면, 그런 분야(단편소설이나 시나리오) 중에서 성공하고 싶

때문에 성과도 상당히 있는 듯하다. 테크닉이란 점에서는 거의 나무랄 곳 없을 만큼
완벽한 작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것은 '팔리는' 상품을 만들려고 하는
상업주의적인 욕망의 결과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문제인 것이다. 기교면에 있어서는 그 어느 곳 하나 나무랄
곳이 없지만 아무래도 감동을 주지는 않는 것으로 금방 바닥이 드러나는 것들이
양산되고 있다. 즉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쉽게 스마트하게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실리성'이라는 기생충에게 좀먹힌 정신에서 미에 대한 사고력 같은 것이
우러날 리가 없는 것이다.
  미국의 학생들은 누구나 다소간은
  '문화란 사치스러운 것, 즉 군더더기와 같은 것'
  이라는 고정관념을 안고 학교를 나온다. 그러니 과연 그들의 상상력은
개발되어진다기보다는 오히려 싹이 싹둑 잘려 버린, 보기에도 가엾은 모습이 된다.
미국식 교육은 역시 젊다고 하는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6. 전통에서 오는 지성의 우선-프랑스의 교육(1)

  프랑스의 교육은 뭐든 미국의 경우와는 정반대의 것 투성이다. 그 교육의 결함이
나타나는 방식도 또한 정반대이다. 프랑스의 학교가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는 이념은
지성이다. 학생들은 공부를 마칠 때에,
  '나는 지성의 성과가 '절대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배웠다'
라는 신념을 가지고 교문을 나서게 된다.
  그래서 그들도 또한 잘못된 '환영'만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사회에 발을 들여놓게 된
다.
  그들은 매우 중대한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사실을 한동안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들은 '생활상의 실제적인 면'이라고 하는 인생에 있어서는 불가결한 관념은 돌보지
않고, 이를 무시해 버리는 경향이 있다.
  지성편중이라는 프랑스 교육의 결함은 전통적인 것이다. 프랑스의 학교는
90% 이상이 도시의 한복판에 있고, 유명한 학교는 파리에 집중되어 있다. 대개의
학교는 아직도 중세기의 수도원 같은 좁고 고색창연한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높은
벽으로 막혀 있는 좁은 뜰, 여기서는 학생들의 자연스러운 육체적 활동 요구는 거의
전적으로 무시당하고 있다. 미국의 학교의 개방적이고 넓고 건강한 분위기는 이런
프랑스의 학교에서는 약으로 쓰려 해도 찾아볼 수가 없다. 여기 이와 같은
감화원의 뜰에서 어떤 체육이 가능한가를 상상해 보라. 대답은 분명하다.
감화원 안에서와 같은 빙빙 도는 운동밖에 할 수가 없지 않겠는가.
  이런 환경에서 짓눌러진 '울분'을 학생들은 어떻게 풀고 있을까? 그들은 부득이
상상이나 표현의 연구에 집중을 하게 되고, 정신의 세계에로 도피하는 것이다. 마음만

그만큼 생생하게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이런 광경도 폴 부르제(1852-1935, 프랑스의
소설가)의 시대까지는 매우 자연스러운 사실이었다.
  오늘날에는 그 당시만큼은 심하지가 않다. 대학예비학교(우리 나라의 인문고교와 같

것)의 학생들은 체육관에 다니기도 한다. 일주일에 이틀 정도는 축구나 테니스를
즐겨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대체로 11시간의 학과시간 중 단 두 시간이 '놀아도 좋
은'
시간으로 할당되어 있다. 미국의 경우와 비교할 때 두드러진 차이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7. 재사의 대량 생산-프랑스의 교육(2)

  프랑스의 학교는 문자 그대로 '교사와 책'을 의미한다. 학생끼리의 토론이 중간에
끼여드는 것은 용서되지 않는다.
  고전어를 다루는 방법을 보면 프랑스의 교육이 '머리만 큰' 교육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거의 최근까지도 이 나라에서는 고전어(희랍어와 라틴어)가 국어와 같은 비중으로
다루어지고 있었다. 학생들은 고전어로 말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하도록 강요당하고
있었다. 그 반동으로 다른 학과목은 그리 열심히 공부를 안하게 된다는 것은 말하자면
당연한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실용적인 면이 없다고 하여 일률적으로 비난할 것은 못되지만, 이런 정도로까지 이

같은 '관습'은 문학을 지나치게 중요시하는 형태로 남아 있다.
  물론 '문학'을 배움으로써 학생들이 얻는 바가 적지 않다. 우선 무엇보다도 사실의
논리에 익숙해지게 된다. 명석함을 존중하는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나이를 먹음에 따라 인간적인 성숙을 해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에
맞는 일이다. 프랑스의 학생들은 이 점을 소홀하게 한 교육의 폐해를 자칫하면
뒤집어쓰게 되는 것이다. 미숙한 두뇌에 지극히 전문적인 지식이나 관념을 억지로
주입하는 방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소년들의 대부분이 겉똑똑이의
재사가 되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 하겠다.
  그들은 스스로 뜻도 잘 모르는 전문용어를 입에 담음으로써 우월감에 젖기 쉽다'
그리고 마치 어른이 된 것처럼 행세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에 익숙해져 버리기
쉽다.
  가장 곤란한 것은 이와 같은 불성실성이 몸에 배어 버리는 일이다. 프랑스의 교사들

도대체 뭘 하고 있을까? 학생들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 그들의 역할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도-특히 파리에서는-그런 것들은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같은 고질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환자가 어떻게 환자를 고칠
수가 있겠는가? 그것은 결코 불가능한 일이다.

  8. 우등생 숭배주의-프랑스의 교육(3)

  예를 들면 프랑스의 교사들은 천재의 개념에 대해서 학생들에게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1 '천재'라는 것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추구해야 할 가치 있는 것이다.
  #2 그러나 천재가 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학생들은 '천재'의 화신을 찾아 나선다. 그 반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얻은
학생이 당장에 그들의 우상으로 떠받들려진다. 일단 이렇게 되면 그들은 자기 체면이

뭐고 내던지고 이 '천재' 앞에 엎드려 버리고 만다. 학생들에게 있어서는 자기의
자존심을 내버리는 것은 이른바 예정된 행동인 것이다. 말하자면 '운명'의
소관이라고나 할까?
  다른 나라에서는 열등생이라 할지라도 각지 활로가 있다. 예를 들면
학과공부는 잘못해도 스포츠의 실력이라든가 용기, 일을 잘 처리해 가는 능력 등 뭔가
한 가지 일에서 특징이 있으면 열등감에 사로잡혀 고민할 것이 없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지성 우선인 프랑스에서는 결코 그렇게는 안된다. '천재' 이외의
사람, 즉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슬프게도 열등감의 노예가 되고 만다. 따라서
교육상의 왜곡이 프랑스 국민성의 약점이 되어서 나타나는 것은 유감스럽게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는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프랑스 사람은 과연 현명하기는 하지만 지성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까?"
  나는 여기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프랑스 인은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남이 험담하는 것을 잠자코 들어 넘길 수 있는
국민이기도 하다. 즉,
  #1 웃을 수 있는 경우
  #2 비난을 받을 일에 대해서 핀잔을 주거나 비꼬아 말할 수 있는 경우
  이와 같은 국민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처럼 아주 끈질긴 인내심으로 계속
추진하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는 계몽운동 같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또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프랑스 인이 잘하는 '토론을 위한 토론'은 그리 흔하지 않
다.
조국이나 나아가서는 자기에게 피해가 생길 우려가 있으면 영국인이나 미국인은 즉시
토론을 중지하고 실제적인 대책을 세우려고 든다.
  그러나 프랑스 인은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 하여튼 너무나도 관념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지성'이 없다고 아픈 데를 찔리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지성'편중의 교육의
결과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