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저속한 욕망에서의 자기 해방
인간의 마음을 채워 주고 있는 이미지는 결코 일반적으로 고상한 것만 이라고는 할
수 없다. 감수성의 강도나 사랑의 깊이에 있어서, 인간은 동물에게 미치지를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이 점은 아무래도 솔직히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은 누구나 일단 저속한 욕망에 사로잡히기만 하면 이 이미지의 포로가 되어
쉽사리 풀려 나오지 못한다. 다음에서 그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1 술 없이는 못하는 알코올 중독자
#2 색정광
항상 늘씬하게 차려입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여자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는 사람들
도
같은 부류에 속한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다.
#3 수전노
이것은 글자 그대로 돈밖에 모르는 일종의 중독자이다.
#4 야심의 포로가 된 속물. 헛된 명예욕이라든가 겉치장에 홀린 사람들을
말하며 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5 사회적 야심가
#6 이밖에도 여러 가지 치사하고 하찮은 문제에 골몰한 나머지, 나무는 보지만 숲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
대체로 쭉 한번 훑어보면 이런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열등한
이미지의 소유자라고 말할 수가 있다.
좀더 구체적인 실례가 필요하다고 하는 분들에게는 제인 오스틴(1775-1817, 영국의
여류작가 철저한 사실과 풍자로 유명한 작가임)의 소설을 권하고 싶다. 여기서 아주
훌륭한 표본을 볼 수가 있을 것이다.
비관적인 전제가 길어지기는 했지만 지금 한 가지 필자 자신이 소년시절에 체험한
바를 덧붙여 말하겠다.
그것은 프랑스의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화상 가게 앞에 서 있었던 일이다.
주인인 베야 씨는 체구가 조그마하나 뚱뚱한 중년 남자인데, 보기보다는 민첩하고
줏대가 있는(나중에 그렇다고 생각했지만) 사람이었다.
어린 소년인 내가 가게의 과자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베야 씨는 싱글벙글하면서
어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귀만은 엉뚱한 곳으로 향해져 있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가게의 안쪽에서 종알종알하고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수다를 떨고 있는 것은 베야 씨의 부인과 딸들인데 모두 미인들이었다.
베야 씨는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나 끝에 가서는 잠시 이맛살을
찌푸리면서
"쳇! 시시한 소리들..."
하고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시시한 소리들'하는 말이 분명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깊은 인상을 나에게 심어 주었다. 나는 왠지 베야 씨가 '시시한 소리들!' 하고 중얼거
린
말에 끌렸었다.
베야 씨의 인상이라고 한다면 단지 이것뿐이었으나 그 수 오늘날까지도 나의
마음속 깊이 새겨 져 뚜렷이 흔적을 남겨준 것이다. 베야 씨가 어째서 그런 말을
했으며, 또 어째서 내가 그 말을 잊지 않고 있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까,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베야 씨는 여자들의 이미지의 빈약함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
다.
의젓한 베야 씨의 태도는 어린 나의 마음에까지도 중요한 뭔가를 강하게 인상짓게
하는 힘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가 있다.
한 가지 복습을 해 볼까요.
'인간의 이미지가 본래 저속한 것이라면, 그것은 인간(또는 그 인간의 사고)의
가난함을 숙명 짓는 것은 아닐까?
-베야 씨가 이에 대해서 하나의 해답을 보여준 것이다.
즉, 저속한 이미지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려는 욕망이 사고의 수준을 끌어올리는
첫걸음인 것이다. 밖을 넓게, 그리고 멀리 내다보는 눈이 지금부터 가야 할 깃을 밝혀
주는 것이 아닐까? 이미지의 확대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2. 가장 좋은 것을 선택하라
도시의 공해에 견디기가 어려워지게 되면, 우리들은 멀리 떨어진 바닷가의 솔밭의
솔 향기에로 마음이 이끌리게 된다. 이웃 사람들과 남의 이야기를 하는 대신에
세계 정세를 논할 수도 있다.
"백척간두에서 한 걸음 더 내디딥시다"
"그런 이론이야 누구나 이미 다 알고 있어요. 그러나!"
역시 이론상으로는 알고 있지만 일단 실행을 하려고 들면 무언가 꺼림칙한 것이
있어서 일이 잘 안되는 일이 있다.
국제정세라는 테마에 대해서 여기서 좀 생각해 보자.
우리들은 지금 어지럽게 움직이는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있다. 더구나 국제문제란
복잡한 것이 되어서 극히 소수의 특권적인 당사자 또는 관측자의 손에 맡겨지고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지난날을 돌이켜 보자. 2차 대전이 한창이던 때를 생각해 보라. 그 때, 우리
들
일반시민, 수백만 명의 시민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서로 주고받았던 이야기 내용을
상기해 보라. 그 무렵에는 매일매일의 토픽이 역사 그 자체였다. 그러나 평화가
찾아옴과 동시에 이야기의 대상은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 세상의 흔해빠진 너절한
이야기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국제문제라고 하는 '보다 높고 넓은 사고'의 소재는 여전히
시시각각으로 충분히 계속 제공되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사물을 '보다 높고
넓게'생각하기 위해서는 이미지의 질에 주목하지 않을 수가 없다.
국제정세를 논할 때와 이웃의 뜬소문을 이야기할 때에는, 이미지의 질이 다른 것이
다.
결국 수준 높은 이미지는 의식적으로 선택할 필요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뛰어난 이미지를 획득하려면, 어떤 대상을 선택하면 좋을까?' 라는 문제에 촛점이
옮겨지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서 명석한 해답을 내는 것은 아무래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다소 추상적인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효과적 방법이 있다. 즉 모든
것에서 최선의 것을 택하라.
단순하고도 명쾌한 듯이 보이는 이 원리가 실상 한 곬으로만은 문제가 잘 풀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두세 가지 실례를 들어 설명하겠다.
여기에 몇 사람의 비평가를 빠뜨린 함정이 있다. 그들은 문학사상의
'2유급의' 인물을 통해서 문학의 본질을 해명하려고 시도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물론 아더 영(1741-1840, 영국의 농정학자, 저술가)은 낭만주의 역사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샹플로리(1821-1889, 프랑스의 사실소설가)는 사실의
철저함에 있어서는 플로베르(1821-1880, 프랑스의 사실주의 소설의 대가. 대표작
"보바리 부인") 이상이었다. 이런 견해 자체는 정당한 것이다. 그러나 영이나
샹플로리를 알기 위해서는 책한 권 정도씩만 있으면 충분하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이에 비하면, 발작(1799-1850)이나 플로베르나 바이런(1788-1824)의 경우는 도서관
가득히 채울 책을 써도 결코 많지 않은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무수한 학자들에 의해 연구, 토론되면서도 또한 중대한 숙제로서
남아 있는 테마-그것이야말로 본질적이 테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연구해도 끝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테마의 중대성을 말해 주는 것이다.
호머, 플라톤, 버질, 밀턴, 라신과 같은 문학자들을 들 수 있으며, 알렉산더,
시저, 나폴레옹 등의 정치가들도 이에 못지 않은 연구 대상이 될 것이다.
사도시대라든가 대혁명시대 같은 역사상의 시대나 사건이
다른 의미로 보다 중요한 테마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이다. 더구나
이밖에도 철학상의 테마가 있다. 예를 들면 '사랑과 죽음'과 같은 문제이다.
다시 되돌아보자. 우리들은 저속한 욕망이 초래하는 '저속한 사고'와는 깨끗하게
인연을 끊어야 되겠다.
그러나 이를 위한 한 가지 방법으로는 가장 뛰어나고 두드러진 인물의 생애를
추적하여 그들이 남긴 저작을 통해서, 그들의 마음을 파헤쳐 보는 것이 어떤가를
제안하고 싶다.
두말할 여지도 없이 여기 당신 자신을 테스트할 단 한가지 방법이 있다. 당신의
이미지의 질이 저속한가 어떤가를 아는 간편한 방법이다.
당신이 지금 본받고 있는 위인의 이름을 적어도 한 사람 들어 보라.
당신이 일상생활에 있어서 본받고자 하는 위인이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안심이다.
당신의 내면은 저속하다는 것과는 적어도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