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은 독이다
약국이 문을 닫는 밤이나 일요일이 지나고 약국 문을 여는 아침이면 기다렸다는 듯
이 약국 문을 밀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있다. "약국은 휴일 없이 영업하도록
법을 정했으면 좋겠다. 약국이 문을 닫았을 때 식구 중 누가 아프면 당황스럽고 답답
하기만 하다" 는 것이다. 이러한 말로써 사람들이 얼마나 약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
아가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은 언제 어떻게 약을 사용하게 되었으며, 약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먼저 약의 정의를 살펴보면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며 예방하기 위해 사용하는 화
학 물질'이라고 규정되어 있는데, 약이 언제부터 그리고 어떻게 사용되기 시작했는지
에 대해서는 다만 역사 이전의 선사시대부터 경험적으로 사용되었다고 추측할 수밖에
없다.
원시시대로부터 고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우리 선조들은 질병을 (귀)신이 가져다
주는 것으로 생각하여, 주술적인 방법으로 질병을 치료하려고 했다. 그리고 병에 걸린
환자를 대상으로 굿이나 제사와 같은 무속의식을 진행하면서 환자의 몸 속에 들어온
귀신을 내 쫓기 위해 쓴 물질을 먹였는데 이것을 약의 기원으로 볼 수 있다. 아마도
쓴 물질을 먹고 환자가 괴로워하면 귀신도 괴로워하며 도망간다고 생각한 듯싶다.
그런데 원시시대의 무속의식에 쓰인 쓴 물질은 아마도 어떤 식물이었던 것 같다. 동
양의 약이라는 한자 '약'을 보면 풀과 즐거움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말이고, 서양의 드
럭 'drug'이라는 말도 마른 풀을 뜻하는 프랑스 말 'drogue'에서 유래된 것이기 때문
이다. 이처럼 약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그 역사가 길다. 이
를 두고 헉슬리라는 사람은 "태초의 인간은 농부이기 이전에 약물학자였다"라고까지
했다.
이렇게 사용되기 시작한 식물성의 쓴 물질은 나름대로 효과를 발휘하여 무속의식이
이 세상에서 많이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인간의 질병을 극복하는 데 유용하게 이용되
었다. 그리고 그렇게 경험적으로 사용되어 온 쓴 물질은 이제 그 화학적인 성분이 규
명되고, 또 생리적인 활성도(약물학 또는 약리학으로서) 규명되어, 막연한 기대 효과
가 아닌 과학으로서 자기 역할을 공인받게 되었다.
약학과 의학의 발전사는 인간의 건강 증진과 수명 연장의 역사이기도 하다. 중요한
약물이 발견될 때마다 인간은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더 건강하게 오래 살게 되
었다. 인간의 건강과 수명 연장에 이바지한 백신과 항생제의 공헌은 이루 말할 수 없
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놓쳐서는 안 될 중요한 사실은 '약학 발전 의 역사는 약의
각종 부작용 발견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19세기초부터 본격화된 신약 개발의 역사는 그야말로 눈부신 것이었다. 세계의 수많
은 제약회사들은 앞을 다투어 신약 개발에 열을 올렸고 그들의 이익도 엄청났다. 그때
까지만 해도 약이 희귀해서 효과만 좋으면 약의 안전성에 대한 문제는 어느 정도 감수
하는 풍토였 으며, 정부에서도 쉽게 허가해 주었다.
그런데 1957년 독일의 한 제약회사에서 개발한 수면제인 '탈리도 마이드'라는 약을
임산부가 복용한 후에 양팔이 없고 손이 어깨에 붙은 기형아를 낳은 사건이 발생하였
다. 이 사건 이후 전세계적으로 약의 부작용에 대해 감시해야 한다는 비판이 들끓었
다. 또 불행을 당한 사람들의 경험을 받아들여, 새로이 약을 개발할 경우에는 약의 효
과 외에 약의 안전성이 충분히 입증되어야만 정부에서 허가하게 되었다. 또한 종래
의약품에 대한 대대적인 재평가 작업을 실시하게 되었다.
미국의 경우를 예로 들면, 1937년 미국의약품공정서에 등록된 약품이 3,091개 품목
이었으나, 30년 후인 1967년에는 이들 가운데 약 80%인 2,470개 품목이 득보다는 실이
많고 가치 없는 약으로 지목되어 폐기되었다. 그렇게 사라진 약 속에는 한때 염증에
특효약이었던 '다이아진'이나, 매독 치료제였던 '606호' 등이 포함되어 있다.
결국 약학 발전의 역사는 이처럼 약이 가진 두 얼굴을 확인해 오는 역사였다. 그래
서 현대의 보건의료인들과 약학자들은 '어떻게 하면 약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어떻게 하면 가능한 한 약을 적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
해 열심히 연구하고 있는 실정이다. 왜냐하면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라는 불청객이 도
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약은 환자와 소비자가 건강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존재한다. 그리고 약이란
약사의 것도, 의사의 것도 아닌 환자와 소비자의 것이다. 따라서 환자나 소비자들은
약에 대해서 꼭 알아야 할 상식적인 내용을 이해하고, 약을 사용하는데 지켜야 할 원
칙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과 가족을 건강하게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다.
약은 우리의 몸이 정상적으로 움직이게 도와주는 조력자이다
우리가 약을 필요로 할 때는 선체에 어떤 이상이 생겨서 통증이나 피로감 또는 생리
작용에 이상이 느껴질 때이다. 그러한 이상들은 원인이 매우 다양하며 보통 원인에 따
라 나타나는 증상이 달라진다. 그러나 때로는 같은 원인으로 전혀 다른 증상이 나타나
기도 하 고, 때로는 전혀 다른 원인으로 같은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결국 약은 바로 이러한 이상이 발생할 때에 자신의 힘을 발휘한다. 우리 몸의 이상
을 바로잡아 주는 약을 알기 쉽게 구분해 보자면 이렇다.
#1 외부에서 들어와 몸의 정상적인 기능을 방해하는 원인을 제거하는 약. 즉 병원균
의 침입으로 손상된 부위가 생겼을 때 그 병원균을 물리침으로써 몸을 정상으로 회복
시키는 약.
#2 심리적이거나 환경적인 원인으로 우리 몸의 정상적인 기능이 마비되거나 교란되
었을 때 그 기능이 회복되도록 도와주는 역할 을 하는 약(이러한 약들은 흥분 작용이
나 억제 작용을 하는 특징이 있다).
#3 우리 몸에 꼭 필요한 물질이 결핍되었을 때 그 물질을 보충시켜 주는 약(각종 영
양제류가 여기에 속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약의 거의 모두는 이 세 가지 중의 하나에 속한다. 결국 우리 몸의
이상이란 대체로 위의 세 가지 사항 중에서 어느 하나 또는 두 가지 이상의 요인이 겹
쳐져서 정상적인 기능을 못 할 때이다.
그런데 여기서 알아야 할 중요한 사실은 우리의 몸은 스스로가 누구보다도 뛰어난
약사이자 의사라는 점이다. 우리의 몸에 이상이 생겼을 때 우리의 몸은 보이지는 않지
만, 정상적인 기능을 찾기 위 헤서 온갖 수단을 동원한다. 외부에서 온 병원균에 대항
하기 위해 몸 속의 군대를 파견하기도 하고, 졸리게 하여 쉬도록 만들기도 하는 등 여
러 가지 노력을 한다. 그리로 우리는 이러한 움직임을 몸의 이상으로 느끼게 된다. 약
이라는 원군을 청하는 신호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우리의 몸이 주인이고 약은 어디까지나 손님이다. 우리 몸은 약의 도움을
받아 정상적인 기능을 되찾으면 나중에는 약의 도움 없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게 된다.
정상적으로 움직이는데도 약을 계속 사용하면 우리 몸은 오히려 그 자체의 힘을 잃게
된다. 소화가 안 된다고 소화제를 계속 사용하다 보면 스스로의 소화력이 떨어져 나중
에는 소화제 없이는 살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약에만 의지하려다가 손님에게 안방을
내 주게 되는 수도 있다.
현대 과학의 발전으로 아무리 좋은 약이 많이 개발된다고 해도 약에 의지해서 살아
갈 수는 없다. 그리고 아무리 효과가 좋은 약이라 하더라도 주인인 몸 자체가 허약하
면 원군이 되지 못한다. 조력자는 어디까지나 조력자로 힘을 발휘하게 하는 자세가 필
요하다.